朴憲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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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당시의 박헌영[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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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무성 외무상 | |
1948년 9월 9일 ~ 1953년 3월 31일 | |
김두봉 | |
김일성 | |
신상정보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1900년 5월 28일 | |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 | |
1955년 12월 5일 (55세)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에서 총살형 집행[2][주해 1][2] | |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 일제강점기 경성부 중화민국 장쑤성 난징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 일제강점기 경성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대덕군 대전읍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부 미군정 한국 서울특별자유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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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寧海)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조선공산당 당수 겸 총비서 조선로동당 고문 겸 중앙대표최고위원 북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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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 |
아버지 박현주 생모 이학규(아버지의 소실) 적모 최씨(아버지의 본처) 서모(이름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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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형 박지영 이복누이 박신기 이복누이 박간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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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레나(마지막 4혼, 본명: 윤옥) 주세죽(이혼) 정순년(이혼) 이순금(이혼)[3][주해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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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2녀 딸 박 비비안나(본명: 박영), 아들(이름 미상), 아들 박병삼(법명: 원경), 딸 박 나타샤, 아들 박 세르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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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 빅토르 마르코프 사촌 형 박건영 사촌 동생 박자영 조카 박병석 5촌 조카 박병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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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호는 이정 또는 이춘, 자는 덕영, 이명은 김성삼, 이두수, 왕양옥, 박건일 | |
없음(무신론) | |
군사 경력 | |
조선인민군 | |
1950년 6월 - 1953년 12월 | |
조선인민군 지상군 | |
조선인민군 지상군 중장 | |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 |
한국 전쟁 |
박헌영(朴憲永, 1900년 5월 28일 ~ 1955년 12월 5일)은 일제 강점기 반도의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노동운동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목차
이력[편집]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정국에서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로동당의 당수로 활동하였고, 좌우합작운동에는 반대하였으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8년 월북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본관은 영해(寧海).
공산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4][5]이자 반 기독교 운동가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몰락 양반 가문 출신 지주 박현주(朴鉉柱)의 서자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 투옥과 출옥을 거듭하였으며 수감 중 한번도 동료와 조직책을 누설하지 않았다. 1927년의 재판에서는 당의 조직과 당원을 진술하라는 가혹한 고문과 폭행을 당하면서 광인이 되어 인분을 먹고, 소리를 지르는 등의 행동으로 정신이상자로 풀려나기도 했다.[주해 3]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주요 인사였고, 1930년대에도 계속 조선공산당의 창당, 조직활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1940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광주의 벽돌·기와 공장의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지하 활동을 통해 공산당 재건운동 조직을 지도하였다.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8년에 월북했으며, 같은 해 4월에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뒤에는 부수상 겸 외무장관 등을 지냈으나 김일성에 의해 한국전쟁을 패전으로 몰고간 미국제의 간첩이란 이유로 숙청, 희생되었다. 기독교를 침략 제국주의의 아편으로 보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때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일제에 의한 다섯 번에 걸친 조선공산당 탄압 이후 당이 해체되면서, 1927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지도자이자 한국인 공산주의자의 지도자로 활동하며[주해 4] 체포와 수배, 도피, 은신 중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 1945년 8월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에 힘입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세우고[주해 5], 북조선분국을 중심으로 북조선로동당을 창건한 뒤, 당대 당의 통합으로 조선로동당이 되면서 박헌영이 조직한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 합작 운동을 무성의하고 무원칙한 야합으로 간주하여 반대하기도 했다.
아호는 이정(而丁, 而靜)[6], 이춘(而春)이며, 자는 덕영(德永)이다. 별칭은 대한민국 반란주모자 , 조선의 레닌[7], 암흑 속의 별[8], 비운의 혁명가 등이었다. 또한 그는 이두수[9][10], 이춘, 왕양옥, 박건일(朴健一),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 본관은 영해(寧海)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1900년 5월 28일[주해 6] 출생한 박헌영은 신라의 문신 박제상(朴堤上)의 56대손으로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에서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지주이자 상업에 종사하던 박현주(朴鉉柱)와 소실 이씨(李氏, 이학규) 사이에서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본처에게서 10여 세 연상의 이복형 박지영(朴芝永), 박신기 등을 비롯한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11] 그의 출생일은 다소 정확하지 않은데 5월 1일이라는 설과 음력 5월 5일이라는 설도 있다.[주해 7]
몰락 양반가 출신으로 그의 선대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영해 박씨 태사공파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박홍원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이 그의 아버지 박현주였다. 그의 가계는 오래전에 몰락하여 향반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대에 아버지 박현주와 아버지의 친형인 박현정이 함께 벼장사로 돈을 벌어 중류 이상의 생활을 했다.[12] 그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 박현주는 땅을 가진 지주이자 정미소를 경영하는 상인이었다. 박헌영이 대흥보통학교 입학 당시 아버지 박현주의 직업은 농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박헌영이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무렵의 박현주의 신분은 양반이며 직업은 상업으로 기록되어 있었다.[13]
그의 어머니 전주 이씨 이학규(李學圭)는 충청남도 서산군 출신으로 과부였다. 본남편과 사별하였고, 본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하나를 데리고 신양면 신양리 근처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국박집을 하고 있다가 박현주의 첩이 되어 재가하였다. 박헌영이 태어날 때는 이부(異父) 누이와 나이차이는 10여세였다.[14] 어머니 이씨는 서산 출신이라 서산댁으로 불렸는데, 춘궁기에 마을 주민에게 식량과 자선을 대가 없이 베풀어 덕망있는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 후일 박헌영이 투옥당했을 때, 어머니 이학규가 사망하지만 예산군의 주민들이 대신 이학규의 장례식을 치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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