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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스크랩] 서론

by 이덕휴-dhleepaul 2018. 4. 29.

철학의 가능성

 

철학은 단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고 현실에 대해 체념함으로써 자체로서도 불구화되었다는 일괄적 판단은 이성의 착오이다.( 이 부분은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에 대한 반론이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철학에 대해 비판한 부분일 것이라 생각된다. '철학은 이론적인 해석일 뿐 현실을 바꾸고자 의지도, 힘도 없다.' 이론에 대해 아도르노는 그렇지 않다. 잘못된 판단이라 주장하는 듯)

 

예나 지금이나 이론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의심은 잘못된 것이다. 예측 못할 훗날로 연기된 실천은 이제 자족적 사변에 반대하는 장치가 아니라, 대개 행정가들이 변화하는 실천에 필요한 비판적 사상을 공허한 것이라고 묵살하는 구실로 되었다. ( 이론에 기반해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행정가 들에 의해 공허한 사상이라고 묵살 되었다.) 철학의 비판적 자기성찰이 철학사의 절정들 앞에서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 이론은 철학적 개념들과 이질적인 것들을 철학적 개념들로써 충분히 다룰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시도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변증법은 입장이 아니다.

 

이제는 어떤 이론도 시장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변증법이라는 명칭은 우선 대상들이 그 개념과 동화되지 않는다는 점, 또 이 대상들이 전통적 적합성의 규범과 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말할 뿐이다. 헤겔의 절대적 관념론은 모순을 자연이 지닌 본질적인 특징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모순은 그처럼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모순은 동일성이, 즉 개념으로 파악된 것이 개념과 동화된다는 생각이 허위라는 표시다.

  그러나 동일성의 가상은 사유의 순수한 형식으로 인해 사유 자체에 내재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다. ( 무슨 뜻? 개념은 사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컵이라는 개념과 대상을 연결하는 것은 사유로 인한 것이다. 개념은 사유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시하는 개념은 사유로 인한 것이지만 '사유한다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유에는 동일시 이외에도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므로 사유한다와 동일시한다를 같은 단어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모순은 동일성의 관점에서 본 비동일자이다. 변증법에서 모순원칙이 우선성을 띨 경우, 이질적인 것은 통일성사유에 비추어 평가된다. 변증법은 비동일성에 대한 일관된 의식이다. 변증법은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모순이라는 단순한 논리적 형태에 맞추어 이로써 대립적이지 않은 것, 단순히 상이한 것의 풍부한 다양성을 제거한다는 따위의 반론을 제기할 경우, 이는 실제적인 문제를 방법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모순의 총체성은 총체적 동일시의 허위일 뿐이다. 모순은 비동일자에도 작용하는 법칙의 지배하에 있는 비동일성이다.

(변증법은 모순에 대한 것이고 이는 동일자에 대한 비판이다.)

 

현실과 변증법

 

변증법은 사유의 법칙이 아니라 현실의 법칙이다. 변증법의 규율에 굴복하는 자는 의심할 바 없이 경험의 질적 다양성을 애석하게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사유한다는 것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A는 A다'라고 말하면

A라는 규정이외의 것은 사상한다.)  변증법의 고통스러운 면은 개념으로까지 고양된, 관리되는 세계로 인한 고통이다. 한편 변증법은 화해로 종결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따르는 논리적 강압성을 해체하며 이 때문에 변증법은 법논리주의라는 비난을 받는다.

  변증법의 비관념론적 형태는 이제 독단으로 타락했고 (사회주의 실천)관념론적 형태는 교양물로 전락했지만, 변증법에 대한 심판의 재개가 역사적으로 전래되는 철학행위의 어떤 방식이나 인식대상의 철학적 구조의 시의성을 결정하는 유일한 것은 아니다.

 

철학의 관심

 

역사적 위치에 비추어보면 철학은 비개념적인 것, 개념적인 것, 특수한 것에 진정으로 관심을 둔다. 철학의 테마는 철학에 의해, 우발적인 것으로서 무시할 수 있는 양으로 격하된 질들일 것이다. 개념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 개념의 추상 메커니즘을 통해 삭제되는 것, 아직 개념의 본보기가 되지는 않은 것, 그런 것이 개념에 대해서는 절박한 것으로 된다.

  베르그송과 후설은 관념론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베르그송 자신의 인식을 포함해서 모든 인식은 구체화되려면, 그가 경멸한 합리성을 필요로 한다. 논리학자 후설은 본질 인식의 방식과 일반화하는 추상을 엄격히 대립시켰다. 특수한 것으로부터 본질을 파악해낼 수 있어야 하는 특유한 정신적 경험을 염두에 두었으나 그런 경험이 적용된 본질은 보편 개념들과 아무 차이도 없었다.) 베르그송은 실증주의 계열의 철천지원수들처럼 의식의 직접적 소여들을 지향했으며 후설은 이와 유사하게 의식의 흐름이라는 현상들은 지향했다. 후설도 베르그송도 주관적 내재성의 언저리에 머문다.

  개념이 개념을 넘어서고 그로써 비개념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믿음, 비록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이런 믿음이 철학에는 불가피하며 이로써 어떤 순진성이 불가피하다. 인식의 유토피아는 개념들을 통해 비개념적인 것을 밝히되, 그것을 개념들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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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헤라의 자료
글쓴이 : 헤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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