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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Ancien Régime
영어: Old (or Ancient) Regime, Old Order, or Old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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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프랑스 혁명 발발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체제를 통칭하는 말.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한다.
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봉건제라고 보기 어렵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봉건제 아래에서 왕권과 귀족권의 대립이 지속되면서, 그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과 성문법으로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된 아주 복잡한 체계이다.
프랑스는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정부 중심의 국가로 재편되었다. '왕정복고'조차도 혁명의 '제도 개선' 성과는 도저히 되돌리지 못했다.
2. 신분제[편집]
기본적으로 왕과 왕의 가족 밑에 크게 세 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신분제는 안을 들여다 보면 신분끼리 완전히 이해관계가 일치되지는 않았다.
크게 알려진 것은 특권 신분과 피지배 신분의 갈등이라는 구도지만, 실상은 그보다 좀 더 많이 복잡했다. 앙시엥 레짐의 특권층이 전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특권층들부터가 분열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택에 프랑스 내에서도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계급의 전면적 숙청에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꽤 높았고,[2] 다수의 특권층들이 살아남을 수 있기는 했다.[3]
2.1. 왕가[편집]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은 루이 14세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껍데기가 되어 갔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악화로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힘이 약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정을 '귀족들을 순화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의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1789년 혁명 전야쯤에 절대왕정은 이미 이름뿐인 개념이 되어버렸으며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부르봉 왕조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의 욕심 때문에 분열해 있었던 것은 왕실의 힘을 더욱 약화시켰다. 뒷날의 루이 18세는 은근히 왕위에 야심을 품고 있었으며, 루이 14세의 자손으로 왕가의 인척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깎아먹는 반 왕실 활동을 후원하고 있었고, 혁명이 일어나자 대놓고(…) 혁명을 부추겼다.
2.2. 제1신분(기도하는 자)[편집]
성직자/수도자 계층으로 약 10만명이었다.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만 가톨릭이라서 교황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힘이 없던탓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왕의 신하나 다름없었다. 1신분의 숫자는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와 수도원의 토지 등등 까지 합쳐서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기본적으로 면세라서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1신분 모두가 기득권층은 아니었고 일선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상황 돌아가는 걸 파악할 머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랐다.
고위 성직자/수도자와 하위 성직자/수도자들끼리도 계층이 갈려서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충당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였다. 이런 중앙 교회와 수도원이 귀족 출신에게 있었고 혜택도 많기 때문에 이런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반면에 지방의 교회나 시골의 성직자/수도자들은 당시에 농민 및 시민들과 직접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이들이었다.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얼마 안 됐고, 일반 백성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위 성직자/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수도자들과 이해관계가 달랐다.
2.2.1. 갈리아 교회주의[편집]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이단심문이 일어날 수 없었고, 교황이 내린 결정사항도 일단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이고 분립을 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하지 않고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가톨릭적인 왕'은 멀리할 수 없는 강력한 동맹이었으므로 암묵적으로 유지되다가 나폴레옹이 집권하며 갈리아 교회주의는 무너지게 되었다. 이런 부분이 왜 문제냐면, 앞의 고위 성직자/수도자 부분과 시너지 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신자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헌금이 교구를 시작해서 교구장까지 올라가면, 거기서 더 이상 올라지 않고 교구장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 고위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돌아버리게 되는 근본적 폐단이 발생하는 것이다. 차라리 로마 교황청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라면, 교구 단위까지 지원을 보내라는 로마 교황청을 위시한 외부의 압력이라도 있었을 것인데 그것마저도 배제되었던 것이 실상이었다.
실제로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에서는 하급 성직자들도 백성에게 동정적일지언정 기본적으로 특권층이었는데, 이는 교황청에서 고위층끼리 해먹는 걸 못하도록 칙령을 내리고 그걸 잘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역설이지만 교황 말을 잘 들을수록 혁명이 더 온건하게 진행되거나 진행이 안 된 것이다.
2.3. 제2신분(싸우는 자)[편집]
귀족으로, 약 40만 명 정도 되었고 토지의 25%를 차지하였다. 일단 귀족의 봉건 특권은 절대왕권에 짓눌렸다. 그러나 몇 가지 사소한 특권이 있었는데, 교회의 특별석에 앉았고 큰 칼을 찰 수 있었으며 마차에는 가문의 인장을 그려넣을 수 있었고, 사냥권을 바탕으로 숲을 관리하였으며 헌금할 때 기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특권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이 면세 대상이었으며 성직을 포함한 고위직을 독점하는 계급이라는 것이었다.
귀족은 크게 둘로 나누는데, 부계에서 이어지는 역사를 자랑하는 뼈대 있는 가문의 경우 '대검귀족(La noblesse d'épée)', '혈통 귀족'으로 불리었고 세습되는 작위와 토지에 기반한 장원의 귀족들이었다. 반대로 왕의 신임을 받은 법관이나 행정 관료로 귀족이 된 자들은 '법복 귀족(La noblesse de la robe)', '종루 귀족'으로 불리었고 고등법원과 행정을 장악하였다. 이런 후천적인 귀족들은 왕의 신임 외에 관직을 매매함으로써 귀족이 될 수도 있었으며 관직은 매매가의 60분의 1만 내면 세습이 가능했기에 관직은 세습되었다. 이 시기에 고귀한 혈통을 자랑하는 혈통귀족은 소수였고 행정직을 장악한 후천적인 귀족이 다수이었다. 이는 왕이 자신의 친위 세력을 육성하면서 장원을 가진 혈통귀족들을 견제하려고 한 결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법복귀족들은 배타성이 강해지면서 새로운 구성원의 유입을 차단하고자 이를테면 고위 장교를 1400년대 이전부터 귀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자(본인 위로 4대 이상이 정통 귀족)들로 제한하는 식으로 새로운 귀족의 등장이나 출세길을 막고 왕에게 저항한다. 또한 귀족들도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한때는 사문화되었던 봉건 특권들을 마구 부활시켜서 영지 주민들을 압박했다. 이는 농민들의 증오를 받아 프랑스 혁명 때 귀족들이 농민들에게 학살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들도 하급 귀족과 고위 귀족으로 또 나뉘어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고위 귀족에 대한 불만이 크다보니 혁명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 모두 태양왕 대에 축소되었던 전통적인 귀족세력의 권력을 회복시키려는 대에는 동의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연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삼부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저항은 영국처럼 의회가 중심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에 세습 특권을 가진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국왕에 대항하였다. 혁명 초기에 이러한 반 왕실 귀족 계급은 혁명을 일으키는데 상당히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근대적 학문체계를 먼저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 계층들이었다. 소위 혁명파 귀족이라는 자들은 귀족부인들의 살롱에 모여들어서 저명한 학자들을 불러다 놓고 강연을 들으면서 근대적 지식을 쌓았다. 테니스 코트의 맹세에서 3신분 위원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라파예트를 위시한 일련의 귀족들이 이들이다. 특히 라파예트는 대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여한 독특한 인물이다.
2.4. 제3신분(일하는 자)[편집]
왕과 1, 2 신분을 제외한 프랑스 국민들로 가장 많은 숫자를 자랑하였다. 제3신분의 대다수는 농촌의 농민들로 약 2000만 명이었다. 이 농민들은 가장 많은 부담을 지고 있었으며 가장 큰 억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농민 대신에 주도층이 된 건 도시에 거주하는 부르주아였다.
부르주아는 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생활수준이 높았고 그 지식이나 능력에 있어서 귀족과 경쟁할 수 있었지만[4] 신분제 때문에 억압을 받아서 눌려지내는데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삼부회 대표를 뽑을 때 다층적 간접선거를 하면 부르주아가 제3신분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제3신분은 숫자가 많은 만큼 다양한 층위를 이루었다.
크게 도시민인 부르주아와 지방민인 농민으로 나누어지지만 농민들도 토지 소유에 따라서 자영농부터 빈농까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부담과 일치된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농민보다 부르주아의 층위는 더 다양했다. 대농장주, 무역상, 금융업자와 같은 귀족에 가까운 부르주아도 있었고 변호사나 교수, 의사 같은 학자 계층과 도시의 소상인이나 제조업자 같은 도시 경제의 하층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다양한 층위는 프랑스 혁명에서 복잡성을 띄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3. 정치[편집]
절대왕권 사상과 전제군주제에 따라 왕이 담당했으며, 왕에게는 위원회 격인 참사원들이 붙어 있었다. 참사원들은 왕에게 조언을 할 수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의회 제도로서 삼부회가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왕이 국민대표에게 자문을 구하는 식이었으므로 의결권은 없었고 소집과 의제 제기권은 왕에게 있었다.[5] 이는 1302년 필리프 4세가 처음으로 연 후 국민의회가 되었으나, 특권 계층 (귀족, 성직자)과 평민 (부르주아 등)간의 이해관계가 맞을 리가 없었기에 자주 대립과 항쟁이 발생했다. 루이 13세 때 마지막으로 열리고 그 후 170년간 소집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 삼부회가 없어졌다고 해도 지방 삼부회는 일부 지방에서는 건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들은 특히 지역주의가 강해서 왕권에 반항적이었다. 물론 삼부회가 없는 지방도 있었다. 이렇게 지방마다 사정이 전부다 다른 것이 앙시앵 레짐의 특징이다.(...)
4. 경제[편집]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헬란서. 농담이 아니라 꿈도 희망도 없는 시절이었다.
1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경제는 다른 구체제적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정으로의 회복'이 이어졌다. 국가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과 전근대적인 농업 기술로 인한 빈약한 생산물은 불안정한 사회를 구축했다. 즉, 풍년이나 평범한 수확량이라면 어찌어찌 사회는 유지되겠지만 흉년이나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기반이 불안정한 경제는 심각하게 요동을 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회가 수용할 수 있을만큼으로 인구가 감소하게 되면서 사회는 다시 이전의 불안정한 상태로 회귀하게 된다. 균형은 유지되어야 한다 사실 이는 비단 프랑스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근대 농업국가 모두에게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장 프리츠 하버가 질소 비료를 개발해내지 않았다면 아직도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전 인류는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가 점진적으로 진보하며 역설적이게도 전체 사회가 '풍요'로워지며 발생하게 된다. 18세기 초와 말 사이 프랑스는 전체 인구 2천만명에서 2천 6백만 명으로 증가해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했다. 경제규모도 확 늘어난 건 말할 필요도 없으며, 이에 따라 전체 사회가 영위하는 부의 총량 역시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이게 대다수 민중이 누리는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당장 양극화라는 말이 왜 나왔나 생각해 보자. 제1, 제2신분 수십만명의 자산이 배로 늘어나는 동안 밑에서는 빈곤층만 수백만명 늘어난 거다. 당시 프랑스에서 일반적인 농민이 자유롭게 소유하고 있던 땅은 단 한 평도 없었다. 물론 소유권은 농민에게 있었을지라도 지대를 귀족에게 납부해야하는 전통적인 봉건적 관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소유권이 농민에게 있는데 왜 지대를 납부해야되는지에 대해서는 동양의 식읍 개념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이때문에 라부뢰르(Laboureur)같은 극소수의 독립부농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프랑스 농민들은 삼중고를 겪어야 했다.[6] 도시도 예외가 아니라 부유한 대상인을 제외한 중소 상공업자들은 농민과 같이 높은 세금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이들중에는 세금을 못내어 재산을 압류당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경제 규모가 확장되면서 농산물의 가격도 상승했지만 이러한 구조 때문에 농민들이 직접 혜택을 보는 일은 사실상 전무했다. 오히려 지주들은 농산물 가격 상승을 빌미로 지대를 더 올렸다. 더군다나 이 시기의 프랑스 농업은 가족 규모의 소농 경영 체제로 그 수확물 역시 삼중고로 나가는 것들을 제하면 모두가 가정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적 형태였다. 따라서 이들은 시장의 가격 변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계층이었음에도 지대 상승으로 인한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해야했다. 거기다 18세기 후반, 그러니까 혁명이 일어나기 10년 전쯤부터 밀과 포도 가격의 침체가 이어지는데 귀족들은 이때문에 일어난 손실을 농민들에게 지움으로써 탕감했다. 정말 이 정도면 아무리 못 배운 까막눈이라도 빡칠 수 밖에 없다. 정말 흉작이라도 일어나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전까지 프랑스 농민들은 국왕과 귀족들의 권력에 대해 '하늘이 내려주신 권력'이라 생각하며 신분적 차이를 당연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전체적인 부는 늘어났지만 이에 대한 불균등한 분배가 너무 심해서 혁명을 유발한 것이었다. 제3신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을 적으로 돌린 귀족들은 결국 단두대로 손에 손잡고 사이좋게 끌려갔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건 1786년 영국과 맺은 무역조약인 이른바 이든 조약(Eden Treaty)이었다. 이 조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의 수출품에 관세를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조약이 성사되자. 영국에는 가격이 낮아진 프랑스 농산물(밀)의 수입이 늘어났고 프랑스에서는 가격이 낮아진 공산품(면직물 등)의 수입이 늘어났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밀 가격은 폭등하고 이로인해 빵값이 올라가 사실상 물가가 오르고 비단이나 면직물을 만들던 제조업자가 망하고 그 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7] 여담으로 영국으로의 수출이 기대되었던 포도주는 별로 수출이 늘어나지 않았다.
5. 행정[편집]
앙시앵 레짐의 행정은 혼란스러웠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대혼란 그 자체였다.
5.1. 중앙 행정[편집]
왕은 국가의 각 분야에 대해서 '대신'을 임명해서 통치를 했다. 그런데 영국과는 달리 각 대신들 사이에서는 내각 같은 통일된 의사 합의 구조가 없었다. 대신들 간의 업무 분야가 명백하지 않았으며, 대신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다투기가 일수였다. 결국 통일된 행정이 어려웠다.
5.2. 지방 행정[편집]
이론상으로는 지방행정은 왕이 파견한 행정관이 담당하도록 되어있었으나, 봉건귀족들의 저항으로 현실은 이론대로 되지 않았다. 왕의 말을 잘 듣는 지방도 있었지만, 봉건 특권의 저항이 극심하여 왕의 지배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지방도 많았다.
역대 프랑스의 왕들은 지방 통제권을 강화하려고 여러 차례 다른 형식으로 행정관을 파견했는데 이게 오히려 행정구역의 중복 현상만 극심해지게 만들었고 지방행정의 통일성은 약화되었다.[8] 그러다보니 이 당시 프랑스는 외형상 중앙집권이지 실질적으론 지방분권에다 봉건제나 다름없었다.
봉건적인 지방 구분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 한 나라인데도 지역들끼리는 아예 다른 나라로 취급했다. 얼마나 심했냐면 각지에서 관세가 있었으며, 도량형의 통일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9] 각지의 관습법이 다 달랐을 정도였다. 언어조차도 지방마다 차이가 컸다. 브로타뉴 지방에는 켈트어가 아직도 남아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만 해도 남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의 연설을 파리 사람들이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정도였다.
앙시앵 레짐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지방'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관습에 의지하고 있었다. 지방의 경계가 상당히 불확실 했던 것인데, 이름까지도 불확실해서 지금의 '아퀴텐' 부근을 파리에서는 아퀴텐이 변형된 '귀엔'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라는 나라의 국경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영역 내에서도 나바르 왕국이 잔존하고 있었고[10],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는 독일계 귀족들이 여전히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11]
5.3. 법률[편집]
사법적으로는 왕국 전체에 하나의 법이 통용되지 않았다. 몇몇 도시는 세제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부는 성문법화된 로마법의 적용을 받고 있었지만 북부는 관습법(Common Law)의 적용을 받고 있었다. 사실 이 무렵 유럽의 법률은 로마법이나 관습법을 지방이나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하는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중세 초기부터 왕의 '칙령'이 사실상 법률과 같은 역할을 했는데, 이는 고등법원(프랑스)에 의하여 '등기'가 이루어져야 정식으로 반포될 수 있었고 고등법원은 이를 왕권에 대항하는 무기로 삼았다.
5.4. 일반 행정[편집]
교육, 호적 업무(사망 신고, 결혼 의식) 등의 일반 행정 업무는 가톨릭 교회가 담당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행정 업무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 대가로 십일조를 징수했다.
사실 중앙도 지방도 행정이 모두 체계가 엉망이고 뭐 하나 통일되어 돌아가지 않아서, 가톨릭 교회가 없었다면 앙시앵 레짐 프랑스는 아마 국가 체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이러한 일반 행정 업무는 교회에서 국가로 전면적으로 이전된다.
5.5. 세금[편집]
이 복잡한 행정 체계에서 가장 어지러웠던 것이 바로 세금.
세금은 왕, 귀족, 성직자 계급이 각각 거뒀다. 왕은 임의로 신민들에게 전체적으로 토지세, 20분의 1세, 소금세 등 각종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는데, 귀족, 성직자에겐 이런저런 면세특권이 있었으므로 결국 평민들에게만 거두는 것이다. 게다가 지방의 농민들에게는 도로 공사에 동원되는 부역까지 추가되었다.
문제는 루이 16세 시대의 프랑스가 오랜 전쟁과 패전, 그리고 심각했던 기근으로 인해서 대대적인 적자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같이 적자를 봐도 영국의 경우는 차관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해서 일시적 경제문제를 해결했는데 반해서[12], 프랑스의 경우는 차관도 잘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13] 프랑스의 경우는 이런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2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문제는 2가지 모두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첫번째가 조선시대 공명첩과 같은 수준인 법복귀족을 만들어주면서 돈을 받은 것이고, 두번째가 징세권의 판매였다.
징세권을 넘겨주는 것은 행정기술의 미비와 일시적인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서 로마시대부터 사용된 방법이었다. 내용은 단순한데, 일정지역을 정해놓고 평균적인 수준의 세금을 기준으로 일정기간의 세금을 특정인이 국가에 먼저 헌납하고, 그만큼을 나중에 자기가 거두어 들이는 방식이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이쪽에 관심이 있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무차별 징수가 이뤄지는 것이다. 징세권을 넘겨받은 이들은 이득을 보려고 국가에 낸 돈 이상으로 세금을 거둬들이는게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으로 벌어졌다. 이것이 로마시대에 등장한 것이 성경에서 만인의 지탄을 받는 존재로 등장하는 세리 들이고, 앙시앵 레짐에서는 징세청부업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것도 프랑수아 1세 시기에.
이건 말하자면, 프랑스 국왕 입장에서는 신용카드+사채와 마찬가지의 역할이다. 신용카드처럼 긁기는 쉽고 지불을 유예할 수 있지만, 대신에 기존의 수입이 여기에 빨려들어가는 동시에 부담은 뻥튀기 되는 구조인 것이다. 결국 프랑스 국왕들은 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전쟁과 사치 등에 필요한 돈을 빌리면서 징세청부업자에게 징세권을 차곡차곡 넘겼고, 징세청부업자들은 그렇게 넘겨받은 징세권을 바탕으로 세금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프랑스 전체 영토의 절반 이상에 해당되는 지역의 수십년에 걸친 징세권이 이미 징세청부업자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이 징세청부업자들이 얼마나 프랑스 재정을 박살내고 돈을 긁어들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앙투안 라부아지에이다.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당시 행적을 봐서는 100년이 아니라, 인류역사에 단 한명만 태어나는 수준이라도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정도이다. 당장 구명에 가담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강대국 출신의 외국인이나 해외 거주 프랑스인이었던 것만 봐도 세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자코뱅당이 몰락하고 과도하게 내려진 처벌에 대한 복권이 이뤄지던 시절에조차 세리였던 라부아지에의 판결은 뒤집지 않았다. 단지 죄가 없는 아내는 풀어주고 1796년 연구 자료를 모두 돌려주는 선에서 그쳤을 정도.
여기에 더해서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이 부르주아와 농민, 중소 상공업자들을 압박했다. 절대왕권이 강력했던 때는 봉건 특권이 일시적으로 억제되었지만,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발달로 점점 귀족들이 몰락하게 되자 오히려 그 동안 파묻히고 버려져 있었던 봉권적 권리를 기를 쓰고 되찾게 되었다.[14] 온갖 낡은 서류에서 관습법을 캐내서 농민들을 빨아먹었다.
성직자는 물론 십일조를 거뒀으며, 각종 기부 재산과 보유한 토지로 막대한 지주의 권리를 행사했다. 주교 정도 되면 당시 프랑스 예산과 맞먹는 연수입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사실 프랑스 왕실의 방만한 재정 운용과 파탄은 과거부터 흔히 있었던 일로(...) 프랑스 왕실은 역사적으로는 이미 몇 차례나 파산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배째고 디폴트를 해버리거나, 성전기사단 같은 만만한 놈들을 조져서 해결해왔다. 왕이 '정의법정'을 열어 재정가들을 부패나 횡령 등으로 몰아 털기도 했다. 다만 이것도 이런 재정가들이 고위귀족과 고위 성직자, 고등법원 법관들과 연결되어 공고화된 루이 15세 중후반 이후에는 역부족인 상황이 되었다.
6. 종교[편집]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의 세력이 매우 강한 국가여서 구교와 신교간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프랑스의 신교는 하급 귀족들과 상인 계층의 지지를 받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주요 근거지는 프랑스 남서부와 노르망디였다. 그러나 이 지역들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였고 신교도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신교도, 즉 위그노들은 국가의 통일을 해치는 요소로 보아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위그노들도 불리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적인 독일이나 네덜란드 신교도들과 자주 동맹을 맺었다. 성 바르톨로메 축일의 학살이나 프랑스 종교 전쟁이 그 예였다.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종교 전쟁은 일단 끝났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신교도들과 구교도들간의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고, 소수인 신교도들을 위해 8개의 무장 도시를 허가하는 등 군사적인 자유권도 보장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권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남용되었고 나중에는 프랑스 왕국에서 분리독립을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리슐리외 추기경은 1628년 라 로셸을 포위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그 결과로 맺어진 조약에서 종교적 자유는 그대로 보장하는 대신 군사적인 자유는 박탈하면서 신교도 세력은 위축되었다.
1610~163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프랑스의 남부지방에서는 일련의 내전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라이벌 귀족 가문간의 싸움으로 보았으나 연구를 더 진행한 결과 이는 종교분쟁으로 밝혀졌다. 프랑스 종교전쟁이 종식되고 낭트 칙령이 발표된 뒤에도 그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신교도들에게 더욱 강경한 대책으로 일관했다. 처음에는 선교사를 보내 개종하도록 했다. 이 때는 개종을 하는 자에게는 금전적인 보상을 주었다. 그 다음에는 형벌을 부과하고 신교도들의 학교를 폐쇄하였으며, 직업에 종사치 못하게 했다. 나중에는 용기병 부대를 보내 신교도들의 집을 약탈하게 해서 강제로 개종시키려 시도했고 이는 낭트 칙령의 폐지 (1685년 10월 18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교도 18만 명이 프랑스를 떠나 영국과 네덜란드, 독일과 남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했고, 약 4천명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렇게 떠난 신교도들은 상인, 학자와 같이 사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었기에 프랑스에겐 뼈아픈 손실이었다. 다만 나머지가 그대로 죽거나 한 건 아니고 무늬상 개종한 것으로 보이면 더 문제삼지 않았기에[15] 대부분 명목상 가톨릭. 실제로는 신교도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각종 차별이 철폐되자 이들 대부분은 다시 신교도가 된다.
7. 군대[편집]
프랑스는 카페 왕조 이후부터 점차 중앙집권화 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중앙에서 시작해 지방에 이르기까지 국왕이 모든 군사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주변국가들과 달리 상비군의 개념을 만들었고 상비군의 유지비는 국왕이 지불하였고 이는 국왕이 각종 조세를 거둘 명분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군대의 규모 또한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루이 14세하에 군대의 규모는 약 40만에 육박했으나 루이 14세의 무모한 정복 야욕으로 끊임없는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군비의 지출이 증가하였고 군대의 규모 또한 40만에서 점차 증가시키면서 군비의 지출을 더욱 부추겨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국경을 따라 요새들 역시 지나치게 축성해 그에 따른 유지비 또한 부담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한 장교의 계급 승진 또한 신분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 나중엔 일개 최하위 위관급인 소위마저 귀족자제들이 차지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귀족들이 군 지위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돈으로 계급을 사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이마저도 귀족들 또한 자신들의 재산으로 사는 등의 폐단이 생기기 시작했고[16] 이것이 점점 심화되어 혁명 전의 군대 내에선 평민 출신의 장교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귀족 출신의 장교들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귀족 장교들의 질이 좋지 않았는데 루이 15세때 창립된 왕립 사관학교의 경우 원래 가난한 귀족 자제들을 훌륭한 귀족 장교로 키워내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주된 교육은 군사학보다는 수학, 문법, 역사, 지리 등이었고, 그나마 있는 군사학은 요새 구축법이 전부였으며, 군사 훈련도 현실과 동떨어진 승마, 펜싱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러니 군대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안봐도 비디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거라도 있는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귀족 출신 장교들이 모조리 단두대에 목이 날아가거나 외국으로 도주하거나 강제전역당함에 따라 장교계급의 공백이 생기는데, 혁명정부는 이 자리에 평범한 민간인들을 명망가라는 이유로 임명했다. 게다가 지휘권을 제대로 주면 모르되 그렇지도 않았다. 이렇게 변호사 출신 장군, 의사출신 참모가 넘쳐나는 데다 그나마 이들이 실전경험을 쌓은 뒤 뭔가를 하려고 하면 일반 병사들이 난리치는 판이니, 열정만 가득한 프랑스 혁명군이 프랑스 혁명전쟁 초기에 처참하게 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국민공회가 붕괴된 뒤 새 정부 하에서 앙시앵 레짐의 핵심을 맡은 귀족들과 죄가 가벼운 귀족들을 구분하고 후자를 포용하는 쪽으로 나가면서 일부 귀족출신 장교들은 신정부에 대한 충성과 특권포기를 조건으로 복귀를 허락받고, 무엇보다도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은 장교들이 등장하게 되고 나서야 이 상황은 겨우 해결된다.
...하지만 이렇게 그나마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육군만의 이야기. 프랑스 해군은 이조차도 불가능해서 상태가 가히 안습이었다.(...) 해군으로서 경험을 쌓으려면 우선 바다 위에서 범선을 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건 재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육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상당한 기간의 교육과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별수없이 스페인 해군에 의존했지만 그렇잖아도 프랑스의 반 속국이던 스페인 해군이 잘 싸울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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