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발한다 - 에밀 졸라
- 드레퓌스(Alfred Dreyfus)사건과 지식인 중에서 -이덕휴목사 식
끌레망소는 국가주의를 비난하면서 그것을 애국심과 비교하여 “愛國心은 正義없이는 存在할 수 없는 祖國을 必要로 한다.” 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국가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였다.
“正義는 社會와 동떨어져서는 存在할 수 없다. 社會는 正義가 없이 存在해 왔지만 社會가 없이 正義가 存在한 적은 없다.”
고등법원의 전원출석심리회의가 1889년 5월 29일에 열렸다. 이날 아침 영국의 어느 신문과 ‘르마땡’지는 에스떼라지와의 회견 기사를 게재했다.
에스떼라지는 프랑스에 돌아와도 법적 고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받고 발로 보쁘레판사 앞에 증인으로 나타났다. 발로가 그에게 문제의 ‘명세서’를 썼느냐고 다짜고짜로 물었다. 그는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닌 어정쩡한 대답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군법회의에서 그것은 드레퓌스가 썼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또 다른 군법회으에서도 그것을 쓴 사람은 제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재판이 끝난 후 영국에 돌아온 그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 기자에게 그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나의 조국에 상당한 봉사를 했습니다. 나는 전장에서는 용감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 날 정도로 불명예스러운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야비한 인간들은 저의 눈을 결코 들여다보지 못한 인간들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는데, 저는 타락한 프랑스 국민들이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이념의 순교자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는 인식되어 있지 않는 방첩활동 기구에 고용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군인이고 항상 군인으로서 행동해 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비겁하지 않던 시대에 사는 것이 마땅한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아마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사람입니다. 당신은 지금 제가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프랑스는 자신이 결코 잊을 수 없었든 1789년의 혁명의 이념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앙리에 관해서 말씀드린다면 우리들은 서로 애착을 갖고 살아왔으며 우리들 사이에는 서로 숨기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그가 정말로 자살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프랑스인들은 군사정보업무는 필연적으로 날조하는 일이라는 것을 결코 이해 못할 것입니다.
영국기자는 단념하지 않고 그가 명세서를 썼는지 캐어물었다. 에스떼라지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명세서를 쓴 사람입니다.”
고등법원 삼부의 46명의 판사들과 마조법원장은 자신들 앞에 제시된 청원서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붉은 법복을 입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법원의 방청객들은 전 세계로부터 온 기자들, 외교관들, 패션계의 여자들, 정계의 거물들, 문학예술계의 거물들, 고급관리들 그리고 장군들이었다. 프랑스와 문명세계는 이미 5년 동안 질질 끌어온 악몽을 끝내 줄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청객들은 발로 보쁘레가 보고서를 낭독하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는 군법회의의 선고를 무효로 할 만한 법적 이유가 있다고 분명히 밝힌 후,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원서는 판결을 무효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드레퓌스는 새로운 재판을 원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군 동료장교들이 자신의 무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를 원했다.
처음부터 악의 화신인 메피스토펠레스가 있어서 그는 1천 구백년 동안 기독교가 수립했던 도덕적인 질서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테니 5년만 달라고 하나님에게 대들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널리 과시하기 위해서 세계에서 가장 계몽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택했다. 그가 선택한 전장은 서구의 민주문명의 고지였었다. 그는 자신의 흉악한 일이 소수의 지배에 의하기 보다는 다수의 지배에 의해서 더 쉽게 달성될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반대자들은 정렬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다수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폭군이나 독재자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휠씬 더 쉽기 때문이다. 다수에 도전하는 반란자들은 쉽게 진압되고 불법화될 수 있으며 설사 그들이 앞으로 옹호를 받는다 해도 결코 용서받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들의 교훈극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는 19세기 말에 서구세계에 새로운 관점들을 부여했고, 그의 빛나는 예술과 문학으로 세계를 빛나게 했던 프랑스를 택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프랑스가 외부의 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정적인 패배에 의해 기울어진 균형을 바로잡아보려는 프랑스의 희망은 좌절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위대하고 강력한 시대에 있어서 프랑스를 도와주었던 사상을 깊이 불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자신을 잃고 위축된 프랑스인들에게는 신기루처럼 보였다. 공포와 불신에 몰린 프랑스는 프랑스의 국가로서의 사명, 즉 “만민에게 정의”라는 그 위대한 사상을 계속 상기시켜주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렸던 것이다. 프랑스는 공포 때문에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가운데 자신을 강력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이에 반대하는 자들을 프랑스의 힘을 갉아먹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의견의 일치가 형성되었고 국가 내의 사악한 세력들은 이 의견의 일치를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고 했다. 이 사악한 세력들은 매스컴을 효율적으로 조종함으로써 공장, 사무실, 병영, 학교, 가정, 심지어는 탁아소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그들은 진실한 소수를 위협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의 용기 있고 책임 있는 사람들이 저항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들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였던가? 다수의 편에 서서 소수를 반대하는 일은 항상 쉬웠다. 소수의 반대자들이 기댈 수 있는 기관들은 없었다. 전 국민들이 단결하여 이들을 반대하는 데, 이 소수의 반대자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싸워야 했던 것인가?
이런 현상은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방심 못할 위험이며 그것은 1백 년 전에 알레시스 드 토크빌에 의해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는 민주공화국에 있어서 여론의 포악성에 대해 글을 쓰면서 반대자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당신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당신의 일체의 소유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결심이라면 당신은 금후부터는 당신의 국민들 가운데서는 이방인이다·‥. 당신은 인간들 사이에 남아 있지만 인간의 권리는 박탈당할 것이다. 당신의 동포들은 당신이 마치 문둥병자인 것처럼 당신을 피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무죄를 가장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도 다음에 외면을 당하지 않기 위해 당을 기피할 것이다.
따라서 이견자들은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불리한 가운데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자유를 이용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완강하게 발표하고 항의 를 했을 때, 이 단 한 줄기의 진실이 거짓과 배반의 해로운 조직에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공포의 마법을 깨어버렸다. 교훈극 중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성공’ 직전에 진실이라는 불굴의 깃발아래서 싸웠던 소수인들의 손에 패배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교훈극이었다면, 드레퓌스 지지 전위대였던 이 모임의 참석자들을 신격화시키는 데서 막을 내리는 게 합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훈극은 아니었다. 이것은 드레퓌스사건이라는 방대한 인간드라마였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은 전면적으로 다시 시작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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