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대박해와 밀라노 칙령
대박해
로마 제국 치하에서 알렉산드리아 시가 발전하고 있는 동안 제국 내에서는 통치질서의 근본을 바꾸고, 인류의 사고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가진 새로운 세력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로마 군단이 검으로 막을 수 없는 세력이었다. 그 세력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고, 전투 능력도 없었다. 다름 아닌 기독교회의 발전이었다.
기독교는 처음에 유대교의 한 분파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 제국 곳곳에 퍼져 나갔고, 제국의 박해를 피해가면서 오직 신앙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는 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제국 정부도 탄압으로 일관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기독교를 용인하고 관용을 베풀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기독교회는 국가로부터 분리하여 고유한 구조와 조직, 그리고 자신들만의 위계질서를 가질 수 있었으며,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것을 이기고 자라나는 끈질긴 생명력의 조직체로 성장했다.
기독교회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준 로마의 박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두 사건은 데시우스 황제(249~251 재위)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 재위)가 행한 탄압이다.
데시우스 황제는 처음으로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가했는데, 정부의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전국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도 네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에 의한 박해가 혹독하게 자행되었으나, 데시우스의 탄압은 그 규모나 정도가 과거와는 차원이 달랐다.
몇몇 사가들은 데시우스의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 로마의 위대한 법률과 로마 고유의 종교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제국이 윤리적으로 붕괴되고 정치적으로 부패되었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과거 영광스러웠던 로마 고유의 미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과거의 전통과 종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전 제국에 퍼져가고 있는 기독교를 박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데시우스는 기독교도의 모든 예배 행위를 근절시키려 했다. 250년에 발표된 법령은 현존하지 않지만 거기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체계를 비난하고, 고대 로마인들의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그의 명령을 거부하자 곧 탄압 명령이 내려졌다. 교회는 순식간에 파괴되고, 셀 수 없이 많은 기독교도들이 처형되었다.
데시우스의 명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기독교도에 대한 탄압이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데시우스의 대대적인 탄압은 서기 251년, 그가 고트 족에게 살해되면서 마치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쳤다가 어느 한순간에 소진된 것처럼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었다.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원하는 기독교도와 과거의 영광과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는 우상숭배자들 사이에서는 그칠 줄 모르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런 피의 제전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 다시 한번 벌어졌다. 그가 왜 기독교도들을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가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비상한 능력과 덕을 겸비한 자였고, 황제로 등극하여 처음 18년 동안에는 기독교도에게 호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난의 화살은 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위이자 후계자였던 갈레리우스에게 쏟아졌다. 그가 철저히 반기독교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가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도 탄압은 측근의 영향력보다는 데시우스 황제와 같이 로마의 전통과 종교를 부흥시키고, 기독교회의 정치 세력화를 막고자 했던 것이 주원인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황제는 303년 2월에 모든 교회를 파괴하여 땅과 같이 평평하게 만들고, 성서는 모두 불사를 것을 명령했다. 그는 또한 명예를 얻은 자 중에 기독교를 고집하는 자는 그 지위를 격하시키고, 집안의 하인이 그럴 경우에는 그의 자유를 박탈하라고 명했다. 이때의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재위에서 물러나고 죽은 후에도 계속되다가, 서기 311년, 신앙의 자유를 묵인한다는 법령이 발표된 후에야 누그러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한 탄압이 전 로마 제국에서 진행되면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이집트에서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열정이 제국 내 어느 다른 지역보다 높았던 만큼 순교자도 당연히 많이 나왔다.
오늘날에도 이집트의 콥트 교회에서는 그때의 고난을 기리기 위해 '순교의 기간'을 정해놓고 있다.
밀라노 칙령 (313년, 라틴어: Edictum Mediolanense, 영어: Edict of Milan)
종교적인 예배나 제의에 대해 로마 제국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다. 이로써 로마 제국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방해물이 제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311년 갈레리우스가 내린 칙령에 의해 이미 합법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밀라노 칙령은 311년의 칙령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에서 적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 내지는 '장려'를 의미하게 되었다.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탄압받는 입장에서 로마 황제의 비호를 받는 입장으로 크게 격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장려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현재 칙령 문서 자체는 내려오지 않으며, 금석문 형태로도 남아있지 않다. 1차 사료로는 유일하게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의 죽음에 대하여'에 동방황제 리키니우스가 휘하의 총독들에게 보내는 공식 서한의 형태로 실려 있다.
내용
313년 2월 로마제국의 공동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80?~337 로마의 서방 황제)와 리키니우스(Licinius, 270?~325 로마의 동방 황제)가 메디오라눔(Mediolanum, 지금의 Milano)에서 협의한 정치조약으로 공동으로 발표한 칙령이다.
그 내용으로는
- 첫째,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교회도 공인되었다. 로마 제국내의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해 주고 기독교인에게 교회를 조직할 권리를 포함하는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주며,
- 둘째로는 기독교 탄압시대에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고 이에 대해 국가가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했다.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든 다른 종교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 제의에 참여할 자유를 지닌다고 선언하여 종교의 자유와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교도 그러한 자유를 지닌다고 강조하여 각 지역의 총독들에게 박해의 중지를 지시하였다. 또한 국가나 개인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교회와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반환해야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계기로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기반을 넓히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최대한 장려하였다.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각종 특권을 주었고, 각지의 교회 설립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 (Councils of Nicaea)를 열어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밀라노 칙령의 배경
285년에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5~305)는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재위 286~305)를 공동 황제(Augustus)로, 갈레리우스(Galerius, 재위 293~311)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재위 293~306)를 부황제(Caesar)로 지명해 제국의 영토를 넷으로 나누어 방위를 책임지는 사분 통치제를 시행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내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멈추지 않았다. 특히 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제국의 동부 지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매우 극심하게 탄압되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황제가 되었고, 세베루스(Severus, 재위 305~307)와 막시미누스(Maximinus, 재위 305~313)가 부황제(Caesar)가 되었다. 그러나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죽으면서 로마제국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군대는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를 황제로 선포했지만,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를 서부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자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 재위 306~312)가 로마에서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고 세베루스를 공격해 죽였다. 갈레리우스는 308년에 리키니우스를 세베루스를 대신해 서부 황제로 지명했지만,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실질적으로 서부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은 뒤 리키니우스가 그 지위를 계승했지만, 동부 지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막시미누스와 대립하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센티우스를 죽이고 서부의 통치권을 장악하였으며,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추진하였다.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는 지금의 밀라노인 메디오라눔(Mediolanum)에서 회담을 열어 신앙의 자유와 빼앗은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밝힌 ‘밀라노칙령 (Edict of Milan)’을 연명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누이인 콘스탄티아와 결혼하였다.
밀라노 칙령 후
밀라노 칙령의 발표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도교를 최초로 공인한 사건은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자, 303~304년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혈 박해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였으며, 갈레리우스도 311년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였다. 그러나 이들 정책은 실제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각 지역의 총독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함께 발표한 밀라노 칙령은 우선, 그리스도교든 다른 종교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 제의에 참여할 자유를 지닌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 마땅히 종교의 자유를 지닌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 때까지 그리스도교의 교회나 그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했던 모든 법령을 무효로 하고, 국가나 개인이 빼앗아 가지고 있던 교회와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반환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리키니우스는 313년 6월 비티니아 지역의 총독들에게 공식 서한의 형태로 밀라노 칙령의 내용을 전달해, 그리스도교 박해의 중지와 교회 재산의 반환을 명령하였다. 오늘날 전해지는 밀라노 칙령의 내용은 이 서한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통치 말기에 다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보호에 소극적이었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장려에 나서 그것을 제국의 통치에 이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리스도교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재정과 조세, 법률의 특권을 주었으며, 각 지역의 총독들에게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방해하지 말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부대를 위해 특별한 기도문을 만들었고, 이동 예배당을 설치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지원 아래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등의 지역에서 교회들이 성장하였으며, 325년에는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를 열어 그리스도교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이처럼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에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공인(公認)한 데 그치지 않고,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보호되고 장려되는 계기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 재위 361~363) 황제는 로마의 전통을 부활시키려 그리스도교를 탄압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 때인 392년에는 이교의 신에 대한 숭배 의식이 전면 금지되어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밀라노 칙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의 공인종교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를 그리스도교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틀 안에서 성장할 숙명에 있었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교회 관할구에도 제국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또한 로마제국을 <지상의 왕국>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판도 밖으로 확대된 후에도 교의 확정 등의 중요 문제를 제국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에 조금도 모순을 느끼지 않았다.
공인 종교가 된 교회는 몰수재산이 반환되고, 성직자에게는 조세부담면제의 특권이 주어지고, 신자간의 투쟁에 주교재판권이 인정되었다. 이런 조치는 교회가 제국의 통치기구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교는 공인과 함께 변질되어서, 속권 지배에 가장 유효하게 적응할 수 있는 체질을 구축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여러 이단을 극복하고 세계종교가 된 요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