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발한다!>
대통령 각하!
일전 제게 베풀어주신 따뜻한 환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감사의 마음과 더불어 당신의 영광에 흠집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제 마음, 지금까지 그토록 찬란했던 당신의 명성이 가장 부끄러운 오점,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더렵혀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온갖 비열한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 체결 이후 애국 축제의 물결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진정 눈부시게 빛나고 있고, 노동, 진리, 자유를 지향하는 우리의 위대한 세기를 장식할 만국박람회의 장엄한 성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증스러운 드레퓌스 사건이라니, 당신 이름에 대해, 게다가 당신 통치에 대해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먹칠인지요! 군사 법정은 에스테라지라고 불리는 자, 모름지기 진실과 정의에 대한 최대의 모욕인 이 자에게 이제 막 감히, 명령에 따라,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끝났습니다. 프랑스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생겼고, ‘역사’는 당신이 대통령일 때 그런 사회적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기록할 겁니다.
그들이 감히 그렇게 했기에, 저는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다.
진실,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으로 가득한 밤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 정직하게 살아온 한 시민으로서 솟구치는 분노와 더불어 온몸으로 제가 이 진실을 외치는 것은 바로 당신을 향해서입니다. 저는 명예로운 당신이 진실을 알고도 외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렇지만 국가 원수인 당신이 아니라면 제가 도대체 누구에게 진범들의 악랄한 죄상을 고발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재판과 드레퓌스의 유죄 선고에 관련된 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악한 한 인간이 모든 일을 꾸미고, 모든 일을 저질렀는데, 당시 일개 소령이었던 뒤파티 드클랑 중령이 바로 그 인간입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조사하면 그가 한 행동과 그가 져야 할 책임이 명백히 드러날 텐데, 그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는 진정 음험한 인간이며, 복잡한 인간이며, 허황한 술책에 민감한 인간이며, 빼돌린 문서, 익명의 편지, 외딴 곳에서의 접선, 심야의 치명적 증거를 파는 수수께끼의 여인들이 나오는 삼류 신문 연재소설에 탐닉하는 인간입니다. 드레퓌스에게 문제의 명세서를 그대로 받아쓰게 할 생각을 한 것도 이자입니다.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드레퓌스를 심문할 생각을 한 것도 이자입니다. 포르지네티 소령이 우리에게 증언했듯, 소리 없는 랜턴을 들고 잠든 피고 곁으로 살며시 다가가 갑자기 얼굴에 불빛을 비추고, 피고로 하여금 문득 잠이 깨는 충격 속에서 범행을 자백케 할 생각을 한 것도 이자입니다. 제가 여기서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습니다. 요컨대 찾으면 찾아질 테니까요. 저는 다만 드레퓌스 사건의 심리를 당당한 조사 장교 뒤파티 드클랑 소령이 사건 일자와 책임 소재에 비추어 이 가공할 사법적 오판의 최대 범죄자임을 단언하는 바입니다.
문제의 명세서는 발견 직후 정보국장 상데르 대령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전 그는 전신 마비 증세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 ‘자료 유출’이 발생했습니다. 이런저런 문서가 없어졌고, 이 문서들은 오늘날까지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리고 명세서 작성자가 누구인가에 생각이 미치자 사람들은 조사도 않고서 대뜸 그건 참모 본부 장교이자 포병장교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이중의 잘못, 이 명세서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조사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중의 잘못입니다. 사실 조금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일반 군장교의 소행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던 까닭에, 예단은 금물이었습니다.
내부 문제로 추정되었기에 사람들은 내부를 수색했고, 필적을 조사했습니다. 범인이 정보국 내에 있는 이상, 반역자를 기습적으로 체포, 추방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부분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만, 최초의 혐의가 드레퓌스에게 떨어지자마자 뒤파티 드클랑 소령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이때부터 그가 드레퓌스라는 인물을 가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그의 사건이 되었고, 그는 배신자를 꼼짝 못하게 해서 완전한 자백을 받아낼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또한 평범한 지성의 소유자인 국방부 장관 메르시에 장군, 종교적 광신에 휩싸인 듯한 참모총장 부아데프르 장군, 빈번히 양심을 속인 참모차장 공스 장군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뒤파티 드클랑 소령이 문제입니다. 그는 최면을 걸다시피 해서 장군들을 오도했는데, 실제로 강신술과 신비술에 빠져 있던 그는 심령과 대화할 수 있다고 허풍을 떨곤 했습니다. 불행한 드레퓌스에게 가한 실험들, 드레퓌스를 몰아넣고자 했던 함정들, 끔찍한 심문, 기괴한 가정(假定) 등 그가 저지른 정신 착란과도 같은 광태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이 최초의 조사는 그 과정을 소상히 아는 사람들에게는 정녕 하나의 악몽이었지요! 뒤파티 드클랑 소령은 드레퓌스를 체포해서 독방에 가둡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드레퓌스의 집으로 가서 부인을 만나 이 사실을 발설하면 남편은 끝장인줄 알라고 위협합니다. 그동안 그 불행한 사람은 살 떨리는 절규로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로 15세기 괴담에나 나올 법한 잔인한 계략과 신비스런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심문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모든 것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단 하나의 증거, 즉 그 알량한 명세서, 비열한 배반일 뿐만 아니라 가장 파렴치한 사기였던 그 명세서, 더욱이 거기 실린 유명한 기밀 사항이란 것도 사실상 별 가치가 없는 그 명세서에 근거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진짜 범죄, 프랑스를 병들게 한 가공할 정의는 부인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사법적 오판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사법적 오판이 뒤파티 드클랑 소령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는가, 어떻게 메르시에 장군, 부아데프르 장군, 공스 장군이 거기에 휘말려서 조금씩 책임질 일을 저지르게 되었는가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세 장군은 나중에는 이 오판을 성스러운 진실, 심지어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진실로 내세우려 했습니다. 사실 애초에 그들이 저지른 잘못은 태만함과 아둔함뿐이었습니다. 그 집단 특유의 종교적 열정과 연대 의식이 강요하는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이지요. 죄는 바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드레퓌스가 군사 법정에 섰습니다. 재판은 완전 비공개로 진행되었습니다. 적에게 국경을 열어 독일 황제를 노트르담 성당까지 안내한 반역자라 하더라고 이보다 더 쉬쉬하며 재판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국민들은 대경실색한 채 온갖 풍문이 떠도는 이 무시무시한 배신 행위에 대해 수군거렸습니다. 물론 그들은 국가의 조치를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가혹한 형벌도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죄인에 대한 공개 군적박탈식에 갈채를 보냈고, 죄인이 회한을 씹으며 오욕의 바위에 영원히 묶여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저 비밀의 방에서 조심조심 묻어야만 했던 그 말할 수 없는 것들, 전 유럽을 화염에 휩싸이게 할 수도 있다던 그 위험한 것들은 과연 진실일까요? 아닙니다. 그 방에는 오직 뒤파티 드클랑 소령의 기괴하고도 광기 어린 상상력만이 있었습니다. 기상천외한 삼류 소설을 실화로 만들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날조했습니다. 군사 법정에서 낭독된 기소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사실은 금방 드러납니다.
아!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기소장인지요! 이런 기소장으로 한 인간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진다면, 이것이야말로 불의의 극치입니다. 저는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 기소장을 읽고 저 악마도에서 말도 안 되는 속죄를 강요당하고 있는 한 인간을 생각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반항의 외침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장담합니다. 드레퓌스는 수개 국어를 구사합니다. 유죄. 그의 방에서는 위험한 서류가 한 장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유죄. 그는 가끔 조상의 나라를 방문합니다. 유죄. 그는 근면하며 모든 것을 알고자 할 정도로 지식욕이 강합니다. 유죄. 그는 마음의 동요를 일으킵니다. 유죄. 얼마나 터무니없는 내용이며,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지요! 기소 항목을 모두 열네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문제는 오직 한 항목, 즉 명세서입니다. 우리는 필적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들 중 한 명인 고베르 씨가 참모 본부의 의도애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기에 험악한 처우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법정에는 스물세 명의 장교가 드레퓌스를 생매장할 증언을 하러 왔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심문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들 모두가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들 모두가 국방부 소속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모두가 한 통속인 가족 재판이었던 셈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모 본부가 재판을 원했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방금 막 두 번째 판결을 내렸습니다.
명세서가 유일한 물증이었지만 필적 전문가들조차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군법회의 재판관들이 당연히 무죄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참모 본부가 유죄 선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 장의 기밀 서류의 존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입니다. 일반에 공개할 수 없는 기밀 서류, 모든 것을 정당화해주는 기밀 서류, 우리가 경배해야 할 기밀 서류,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전지전능한 신과도 같은 기밀 서류! 저는 그 기밀 서류의 내용을 온몸으로 부인합니다! 한마디로 웃기는 서류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자들 이름으로 오간 이 서류, 이 편지의 내용 중에 ‘D’라는 이니셜로 불리는 자가 등장한다고 합니다. 몸값이 비싼 아내를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제대로 값을 치르지 않는다고 여기는 남편처럼 이자는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런 편지가 선전 포고 없이는 공개할 수 없는 국방 관련 기밀 서류라니요! 아닙니다. 아니고말고요. 그것은 거짓입니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다니 정말 가증스럽고 파렴치한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국민 감정 뒤에 숨긴 채 뭇 사람들의 가슴을 동요시키고, 정신을 왜곡시키고, 입을 막고 있습니다. 저는 이보다 더 큰 공민 범죄를 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 바로 이렇게 해서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습니다. 게다가 드레퓌스의 도덕성, 부유한 환경, 범죄 동기의 부재, 끝없는 무죄의 외침은 그가 뒤파티 드클랑 소령의 기발한 상상력, 그를 둘러싼 종교적 환경, 우리 시대의 불명예인 ‘더러운 유태인’ 사냥 등의 희생자였음을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
이재 에스테라지 사건을 보겠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이 시작된 지 삼 년이 흘렀습니다. 양심적인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깊은 고통과 불안을 느꼈고, 마침내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쉐레르 케스트네르 씨의 의심과 확신의 연대기를 작성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그가 이 사건을 탐구하는 동안 참모 본부에서 일어난 주요 돌발 사태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만은 밝혀두겠습니다. 상데르 대령이 사망한 후 피카르 중령이 정보국장직을 물려받았습니다. 직무 수행을 하던 피카르 중령은 어느 날 외구 대사관 요원이 에스테라지 소령에게 보낸 전보 엽서 한 통을 수중에 넣게 되었습니다. 조사를 시작한 것은 그의 최소한의 의무였습니다. 그가 상관들의 의도를 넘어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는 즉각 자신의 의심을 직속상관이 공수 장군에게 보고했고, 그 다음 부아데프르 장군, 그 다음 메르시에 장군에 이어 국방부 장관이 된 비요 장군에게 보고했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린 그 유명한 피카르 문서는 실은 비요 문서였던 겁니다. 말하자면 그 문서는 장관을 위해 부하가 작성한 문서이며, 지금도 국방부에 보관되어 있음에 틀림없는 문서입니다. 조사는 1896년 5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특히 강조해야 할 것은 조사 결과 공스 장군이 에스테라지의 유죄를 확신했다는 사실 및 부아테프르 장군과 비요 장군의 이 명세서의 작성자가 에스테라지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피카르 중령의 조사는 이런 사실을 명백히 입증했습니다.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테라지의 유죄 선고는 필연적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초래할 것이고, 그것은 참모 본부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막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고뇌에 찬 심리적 혼란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비요 장군은 드레퓌스 사건과 우무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주십시오. 몹시 깨끗한 채로 장관직에 취임했기에, 그는 충분히 진실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여론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리고 부아데프르 장군, 공스 장군, 부하 장교 등 참모 본부 전체를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그는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한순간 자신이 군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것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을 하기는 했겠지요.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자 만사가 끝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이 사건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책임은 커져만 갔고, 다른 사람들의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만큼,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유죄인데, 왜냐하면 그 자신이 정의를 구현해야 할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비요 장군, 부아데르프 장군, 공스 장군이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사실을 안 지 일 년이 지났건만, 그들은 여전히 그 점을 무시무시한 진실을 숨기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잠을 잘 잡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내와 자식들을 몹시 사랑합니다!
피카르 중령은 양심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상관들에게 건의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들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직무 유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역설했습니다. 끔찍한 뇌우가 조금씩 힘을 축적하고 있거니와,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그것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온 세상을 강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나중에 쉐레르 케스트네르 씨가 우국충정으로 비요 장군에게 국가적 재앙으로 변해가는 이 사건을 확실히 장악해서 더 이상 악화시키지 말 것을 요청했습니다. ‘쇠귀에 경 읽기’ 였지요! 범죄는 이미 저질러졌고, 참모 본부는 이제 그 범죄를 고백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피카르는 정찰 임무라는 미명하에 변경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점점 더 멀리 끝내 튀니지까지 보냈는데, 언젠가는 짐짓 그의 용기를 치하하면서 학살의 위험이 상당히 높은 지역을 시찰하는 임무를 맡기려 하기도 했습니다. 모레스 후작이 죽음을 맞은 것이 바로 이 지역입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스 장군은 그와 우정 어린 교신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비밀을 간파했다는 것이 모두에게 위험한 일로 인식되었습니다.
한편 파리에서는 진실이 불굴의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우리는 예견된 그 뇌우가 어떻게 폭발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마티외 드레퓌스 씨가 에스테라지 소령을 명세서의 진짜 작성자로 고발했고, 바로 그때 쉐레르 케스트네르씨는 재심 요구서를 법무부 장관에게 제출하러 갔습니다. 에스테라지 소령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증언에 따르면, 맨 처음 그는 자살이나 도망을 고려할 정도로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방약무인하게도 행동하며 난폭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온 파리를 경악케 했습니다. 구원의 손길이 그에게 뻗쳤던 것입니다. 그는 대비책을 알려주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수수께끼의 여인이 한밤중 그를 방문하여 참모 본부에서 훔친 한 장의 서류, 그를 살려줄 한 장의 서류를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궁여지책으로 뒤파티 드클랑 중령의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의 작품, 즉 드레퓌스의 유죄가 부인될 위험에 처하자 그는 자기 작품을 확실하게 보호하고자 했던 겁니다. 사건의 재심, 그것은 곧 너무도 엉뚱하고 너무도 비극적인 삼류 연재소설- 그 결말이 악마도에 펼쳐지고 있습니다-의 파산을 뜻하지요! 그것은 그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대결은 피카르 중령과 뒤파티 드클랑 중령 사이에서 벌어졌는데, 한 사람은 얼굴을 백일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머지 않아 민간 법정에서 그 두 사람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런데 실은 자기 방어를 하고, 자기 범죄-그에 대한 혐오감이 시시각각 커져하고 있습니다-를 고백하려 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참모 본부였습니다.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도대체 누가 에스테라지 소령을 보호하고 있는지 자문했습니다. 우선 베일에 가린 인물, 즉 모든 것을 꾸미고 모든 것을 지휘한 뒤파티 드클랑 중령이 있습니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기괴한 조처란 없습니다. 그 다음 부아데프르 장군, 공스 장군, 비요 장군이 있는데, 그들은 드레퓌스의 무죄 인정을 곧 국방부의 치욕적 궤멸로 인식했기에 에스테라지 소령을 무죄 방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불가사의한 상황의 결과는 한 양심적인 인간, 홀로 충실히 의무를 다했던 피카르 중령의 희생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제 곧 그는 모욕을 당할 것이며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오, 정의여, 이 얼마나 뭇 사람의 가슴을 찢는 끔찍한 절망인지요! 심지어 사람들은 그가 날조자이며, 에스테라지를 곤경으로 몰아넣기 위해 전보 엽서를 꾸며낸 자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도대체 왜? 무슨 목적으로? 동기를 말씀해보십시오. 그 또한 유태인들에게 매수당한 것일까요? 소문에 의하면 지금까지 그는 반유태주의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열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빚더미와 죄악으로 얼룩진 자들은 무죄를 선고받고, 한 점 오점도 없는 명예로운 이는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지요! 이 지경에 이른 사회라면 그 운명은 파멸밖에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 이것이 바로 에스테라지 사건입니다. 범죄자에게 무죄를 선고하기 위해 기소된 사건 말입니다. 우리는 두달 전부터 전개된 사건의 추이를 시간별로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요약만으로 충분하고, 또 언젠가 사건의 역사가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펠리외 장군과 라바리 소령이 악의적인 조사를 벌인 결과 악당들이 미화되고 선인들이 더렵혀지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군사 법정이 열린 것은 이런 과정이 완결된 이후입니다.
어떻게 한 군사 법정이 내린 판결을 다른 군사 법정이 뒤집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재판관들이 할 수 있었던 선택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군인들의 피에 흐르는 강고한 규율 정신은 그들의 평정심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규율을 말하는 자는 곧 복종을 말하는 자입니다. 군부의 수장인 국방부 장관이 국회의원들의 환호 속에 기왕의 판결의 권위를 존중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군사 법정이 국방부 장관에게 공식적인 반박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계급 사회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요 장군은 선언으로써 재판관들에게 암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에 따라 재판관들은 불을 향해 가는 나방처럼 아무런 추론 없이 판결을 했습니다. 재판관들이 사로잡힌 선입견은 분명 이런 것입니다. “드레퓌스는 첫 번째 군사 법정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유죄이며, 두 번째 군사 법정을 열고 있는 우리 또한 그를 무죄로 선언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에스테라지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 곧 드레퓌스의 무죄를 선언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그 선입견에서 빠져나오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불공정한 선고를 내렸거니와, 이 선고는 우리의 군사 법정을 영원히 짓누를 것이며, 미래의 군사 법정이 내릴 모든 결정에 의혹의 시선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첫 번째 군사 법정은 어리석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두 번째 군사 법정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건대 두 번째 군사 법정의 변명은 군부의 수장이 기왕의 판결을 손댈 수 없는 것, 신성한 것,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으로 선언한 탓에 하위 계급자들 가운데 누구도 그 선언을 반박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군대의 명예를 역설했고, 우리가 군대를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원합니다. 아! 물론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땅을 위협하는 그 어떤 도전에도 분연히 일어설 군대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군대는 프랑스 국민 그 자체이며, 우리는 그러한 군대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갈망하는 우리는 존엄성을 잃은 군대를 원하지 않습니다. 내일 우리에게 칼을 겨누고 지배자로 군림할 군대, 그 군대의 칼자루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라니, 하느님 맙소사, 결단코 그건 안 될 말입니다!
다른 한편 저는 이 점을 논증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국방부 사건입니다. 참모 본부 간부들의 압력으로 유죄 선고를 받았습니다. 환언하면 참모 본부 전체가 유죄가 되지 않는 한 드레퓌스는 무죄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국방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예컨대 언론 캠페인, 흑색선전, 영향력 행사 등을 통해 드레퓌스를 다시 한번 파멸시키고 에스테라지를 보호했습니다. 비요 장군 스스로 그렇게 부르듯이 예수회 교단에 가해야 할 공화국 정부의 빗질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도대체 모든 것을 재조직하고 쇄신할 진정 강력한 정부, 슬기로운 애국충정의 정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국방을 맡은 자들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발발의 위험 앞에서 고뇌로 전율하고 있습니다! 조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이 신성한 사원은 저열한 음모와 비방과 횡령의 보금자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들은 한 불행한 인간, 즉 ‘더러운 유태인’의 희생, 이름하여 드레퓌스 사건을 비춘 환한 조명 앞에서 몸을 떨고 있습니다! 아, 실로 모든 것이 광기, 어리석음, 기괴한 상상력, 비열한 경찰 근성, 종교 재판 식의 매도, 전제적인 폭압으로 뒤흔들렸고, 몇몇 장교와 장성들의 영달을 위해 국가 전체가 강철 군화에 짓밟혔으며, 진실과 정의를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는 국가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질식되었습니다!
속악한 언론에 기대는 것, 파리의 온갖 사기꾼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그리하여 파렴치하게도 사기꾼들이 승리하고 인권과 청렴결백이 패배하게 만드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전 세계에 오판을 강요하려는 사악한 음모에 맞서 프랑스를 자유와 정의의 일등 국가로 만들고자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들을 국가혼란죄로 다스리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여론을 오도하는 것, 여론을 집단 정신 착란으로 몰고 가 사악한 협잡에 이용하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인권의 위대한 자유 국가 프랑스를 병사하게 할 가증스러운 반유태주의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일반 서민들을 중독시키고, 반동과 배척의 열정을 부추기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증오심을 유발하는 데 애국주의를 이용하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끝으로 인간이 꽃피운 일체의 과학이 진실과 정의가 지배할 내일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고 있는 이때, 총칼을 현대의 신으로 삼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갈망했던 이 진실, 이 정의, 그들이 그것을 모욕하고, 경멸하고, 암흑의 구렁텅이에 던져 넣는 것을 지켜보는 슬픔이란 정녕 말로 표현할 수 없군요! 저는 쉐레르 케스트네르 씨의 가슴 속에 일었을 좌절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그가 마침내 후회, 즉 상원의 대정부 질의의 날 비밀의 보자기를 전부 풀어놓고 모든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지 못했다는 후회, 즉 혁명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느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공정한 삶을 살아온 위대한 신사였습니다. 그는 진리란, 특히 그것이 한낮의 햇살처럼 자명할 때에는,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태양이 이내 모든 것을 비출 텐데 굳이 모든 것을 뒤엎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지만 그는 그 낙관적인 평정심 때문에 지금 잔혹한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고매한 인격 탓에 공스 장군의 편지를 공개하려 하지 않았던 피카르 중령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규율을 존중하고 있는 동안 그의 상관들은 그를 흙탕물로 뒤덮고, 그의 사건을 가장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가장 모욕적인 방식으로 심리하고 있었습니다. 악마가 활약하고 있을 때 신이 임하기를 기다린 두 희생자, 두 신사, 두 깨끗한 영혼이 여기 있습니다. 특히 피카르 중령의 경우 우리는 그에 대한 야비한 처사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즉 프랑스 법정은 보고 책임자로 하여금 증인 피카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도록 방치한 후, 증인 피카르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고 변호할 때에는 비공개 밀실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범죄 행위이며, 이 범죄 행위는 전 세계의 양심을 뒤흔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명백히 두 군사 법정은 기괴한 정의의 개념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 진실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그리고 이 무시무시한 진실은 당신의 통치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단지 헌법과 측근의 수인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래도 역시 완수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사건’이 진정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에서야 각자의 입장이 확실해졌기 때문입니다. 한쪽에는 햇빛이 비치기를 원치 않는 범죄자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햇빛이 비칠 때까지 목숨마저도 바칠 정의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머지 않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막 가장 멀리까지 울려 퍼질 재앙 중의 재앙을 준비했다는 것을.
편지가 길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이제 이 긴 편지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뒤파티 드클랑 중령을 고발합니다. 이유는 그가 무의식적으로일망정-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사법적 오판의 악마적 생산자 역할을 했고, 삼 년 전부터 가장 기괴하고 가장 범죄적인 계략으로 자신의 간악한 행동을 은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메르시에 장군을 고발합니다. 이유는 그가 심약한 탓일망정 금세기 최악의 범죄의 공범자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요 장군을 고발합니다. 이유는 그가 드레퓌스의 무죄와 관련한 명백한 증거를 쥐고서도 그것을 묵살했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리고 위험에 빠진 참모 본부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인간성 모독죄와 정의 모독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아데프르 장군과 공스 장군을 고발합니다. 이유는 그들이-아마도 전자는 종교적 열정에 의해 그리고 후자는 국방부를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신성한 사원으로 만드는 군인정신에 의해-동일한 범죄의 공범자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펠리외 장군과 라바리 소령을 고발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사악한 조사, 즉 후자의 보고서가 보여주듯 불공정의 기념비와도 같은 조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 명의 필적 전문가, 즉 벨롬 씨, 바리나르 씨, 쿠아르 씨를 고발합니다. 이유는 의료 진단에 의해 그들의 시력과 판단력에 문제가 있었음이 입증되지 않는 한, 그들이 날조된 거짓 보고서를 작성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국방부를 고발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여론을 오도하고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특히 <레클레르>와 <레코 드 파리>를 통해 가증스러운 언론 캠페인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첫 번째 군사 법정을 고발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비공개 서류에 근거해서 피고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법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번째 군사 법정을 고발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상관들의 명령에 따라 첫 번째 군사 법정의 불법성을 은폐하기 위해 진실을 알고서도 범죄자를 무죄 석방하는 사법적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위의 고발을 함으로써 저는 1881년 7월29일 제정 언론법 30조 및 31조에 따라 명예 훼손 행위로 기소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행위는 순전히 의도적인 것입니다.
제가 고발한 사람들에 관한 한, 저는 그들을 알지도 못하며, 단 한 번 만난 적도 없으며, 그들에 대해 원한이나 증오를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제게 사회악의 표본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는 저의 행위는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 수단일 뿐입니다.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부디 저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하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존경과 더불어 인사드립니다. 대통령 각하,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유기환
해제 I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들*어*가*는*말
도처에 진실의 담지자들이 있다. 진실 게임에 관한 한 한국 사회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소장과 노장이 저마다 진실을 외친다. 그런데 국내외을 막론하고 이런 치열한 몸싸움의 와중에 정작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은 진실 그 자체이다. 혼수상태에 빠진 진실을 되살리는 일이 문제가 될 때 주로 인용되는 사건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며, 드레퓌스 사건이 인용될 때 항용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밀 졸라이다. 테러와 전쟁의 구조적 폭력이 진실을 압살하는 이 시대에 드레퓌스 사건과 졸라의 행동 탐구를 통해 혼란기 지식인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가늠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부터 1906년까지 12년에 걸쳐 프랑스 국민을 좌우 대결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 중의 사건'이다. 드레퓌스 진영에는 주로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가 포진했고, 반드레퓌스 진영에는 교회와 군부, 보수 왕당파가 섰다. 이 사건의 경과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이 과연 자유.평등.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의 나라.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인가 하고 경악하게 된다. 국가 안보, 국익, 통치상의 기밀 등을 빌미로 행사는 국가 폭력......, 반드레퓌스 진영이 진정으로 지키려 했던 것은 국가 였을까. 국가 권력이었을까? 오늘날 이 질문에 답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드레퓌스 사건이 발발한 이래 그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 사건의 의미에 관한 해석은 대략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서구 민주주의 문화에서 해석이요, 다른 하나는 유태 민족의 운명이라는 입장에서의 해석이다. 어떤 성찰이든, 모름지기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성찰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화두는 '지식인'',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식인의 행동과 책임'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좌파와 우파가 확연하게 구분되는 현대 프랑스 사회의 지식인 지도 및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라는 명제로 요약되는 프랑스 사회의 지적 전통은 바로 이 드레퓌스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올해는 졸라 사후 110주년 되는 해이고, 드레퓌스 사건 종결 105주년 되는 해이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지식인 졸라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만일 1898년 1월13일 프랑스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졸라의 공개 서한 [나는 고발한다!J'Accuse!]가 발표되지 않았더라면,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은 빛을 보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폭발의 도화선이었다. 라자르,조레스 등 소장 지식인들이 역부족을 절감하고 있을 때, 당대를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도발적이고도 호전적인 제목의 글로써 국가 권력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나는 고발한다] 발표 한 달 후 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단언하건대 드레퓌스는 무죄이다. 나는 거기에 내 생명을 걸고, 내 명예를 걸겠다." 그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1902년 졸라의 돌연한 가스 중독사에 대해 제기되었던 암살설은 날이 갈수록 더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에밀 졸라는 누구이고, 드레퓌스 사건은 무엇이며, 그는 이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 먼저 졸라의 저술 세계의 특징과 의미를 알아본다.
에밀 졸라(1840.4.2~1902.9.29)의 저술 세계의 특징과 의미
대중적 성공에 비해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졸라가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소위 '68세대'로 불리는 넒은 연구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졸라를 프로이트적 차원에서 접근한 보리, 철학적 차원에서 접근한 세르, 서사학적 차원에서 접근한 아몽, 상징적 차원에서 접근한 드잘레, 신화적 차원에서 접근한 리폴 등의 활약으로 졸라 문학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드러났다. 특히 푸코가 광기와 비정상을 복권시킨 후 졸라는 이런 사유에 가장 알맞은 텍스트를 제공하는 소설가의 하나로 보였다. 졸라와 그의 저서에 관한 연구는 1968년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다가, 1993년 클로드 베리 감독의 영화 [제르미날]이 개봉되면서 절정에 이른다.
이처럼 졸라에 관한 연구가 일종의 유행처럼 번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졸라의 문학이 간직한 현대성 때문이다. 졸라의 현대성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졸라는 등장인물을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으로 간주한 선구적 소설가이다. 따라서 서사학자들이 졸라의 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은 당연했다. 2) 졸라의 문학은 돌과 나무로 이루어진 건축물이 철과 유리로 형성된 건축물로 바뀌는 서구 문명의 이행기를 적실하게 담아냈는데, 이것은 특히 미국 문화학자들의 학제적 연구를 활성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3) 그의 [루공마카르] 시리즈 중 마카르 계열의 작품들은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 현대 프랑스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신경증적 일탈을 중심 테마로 그려냈다. 졸라 문학에 대한 신화적.인류학적.정신분석학적 접근이 빈번해진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졸라가 19세기와 20세기의 길목에 서서 서구 문명의 이행기를 적실하게 담아낸 것은 문학에서뿐만이 아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맞아 졸라가 쓴 일련의 시론은 프랑스 사회의 봉건적 보수성을 약화시키고 민주적 현대성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민주 항쟁의 격문이 꽃을 불리는 [나는 고발한다!]는 정치.사회.경제가 요동치는 격변의 시기에는 어디서나 빈번한 인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도 바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고지로 여든 장에 불과한 [나는 고발한다!]의 전문이 아직도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물론 [인간 짐승], [부인들의 행복 백화점], [의사 파스칼] 등 졸라의 대다수 문제작들이 여전히 우리말로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흔히 지식인의 글은 군인의 총알 못지 않게 강력한 무기로 간주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고발한다!]를 번역하는 일은 한국 사회의 완전한 민주화를 위해 필요의 차원의 넘어 의무의 차원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제
드레퓌스 사건
1894년 10월31일 독일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한 프랑스 장교가 체포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제2제정의 프랑스가 비스마르크의 독일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프랑스에서는 격심한 대독對獨 적대감이 만연해 있었다. 이같은 적대감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치열한 첩보전을 촉발했고, 그 와중에 몇몇 정보원이 체포되어 중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문제가 된 피고는 유태인이었다. 속된 말로 '제대로 걸린' 셈이었다. 단순한 정보원 사건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비화된 배경에는 바로 내셔널리즘과 반유태주의 열풍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역사적 배경
제3공화국(1870~1940)의 출범은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패배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제3공화국이 성립된 1870년부터 드레퓌스 사건이 발발한 1894년까지 프랑스의 대외 정책이 온통 독일을 향한 복수에 집중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영광을 부르짖는 내셔널리즘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혁명전쟁과 함께 이미 한차례 프랑스를 휩쓴 바 있다. 그 내셔널리즘이 19세기 말 알자스로렌을 지방을 회복하려는 전 국민적 염원과 함께 광풍으로 부활한 것이다. 1880년대 후반 군부의 상징인 불랑제 장군을 국민의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소위 불랑제주의가 기세를 떨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가 외국 용병이 아닌 프랑스 병사로 구성된 국민군을 가지게 된 것은 대혁명 때부터인데,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장교단이 대혁명 이전의 귀족 가문에서 충원되는 폐단이 발생했다. 그 이유는 도시의 상류층 부르주아 자제들은 군대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 입대를 꺼린 반면, 도시 산업화의 영향으로 피폐해진 농촌의 귀족 자제들은 군대를 새로운 기회의 영역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동시대 프랑스 사회의 진보적 민주화 경향에 비추어볼 때, 프랑스 군부의 보수적 성향은 확실히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군장교단의 강한 결속력이 애국심이 아니라 계급적 유대감에 기인하고 있음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한편 유럽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유럽의 유태인들은 끝없는 유랑을 강요당했고, 간혹 정착이 허용되는 경우에도 게토라고 불리는 집단 거주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특유의 톨레랑스 정신에 따라 유태인들로 하여금 프랑스인과 똑같은 시민권을 누리게 했으며, 혁명전쟁을 통해 다른 나라에도 이 같은 원칙을 강요했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은 정말 프랑스에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대혁명 이후의 상황을 요약해보자.
유태인들은 오랜 세월 유랑 생활을 해온 터라 당연히 토지가 토지가 없었다. 유태인들의 전통적인 치부 수단은 대금업이었다. 유태인들이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서 금융자본가로 성장한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제2제정 사회에 이르러 말 그대로 금융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한 로트실트 가家는 유태인 영광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모름지기 성공에는 복수가 따르는 법이다. 발자크, 졸라 등의 소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대금업, 금융, 증권 투기 등은 당연히 유태인의 이미지를 몹시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제3공화국 초기 보수적인 유태인 금융가들이 공공연히 취한 왕당파 지지 태도는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의 반유태 감정을 부채질했다. 그리고 1890년을 전후해 터진 희대의 뇌물 스캔들, 파나마 운하회사 사건은 극단적 반유태주의 감정을 일반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이런 사회정치적 배경하에서다. 요컨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내서널리즘과 반유태주의의 고려 없이 드레퓌스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두 시대정신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사건의 구체적 전개 과정을 주요 흐름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정리해보자.
(2) 드레퓌스 사건의 진행 과정
드레퓌스 사건은 대체로 다음과 간은 여섯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드레퓌스 재판과 유죄 판결→피카르의 문제 제기→에스테라지 재판과 무죄 석방→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드레퓌스 사건의 재심과 사면→드레퓌스의 완전한 복권
ㄱ. 드레퓌스 재판과 유죄 판결
1984년 12월19일 군사 법정에서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재판이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독일에 전달되었다는 문제의 명세서의 작성자가 필적 감정에 의해 드레퓌스 대위로 추정되었다. 국방부 장관 메르시에 장군이 재판관들에게 불법적으로 전달한 '비밀 자료'가 배심원들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군적 박탈과 종신 유배를 선고 받았다. 1895년 1월5일 에콜 밀리테르 연병장에서 군중의 적의찬 시선 속에서 드레퓌스의 군적 박탈식이 거행되었고, 1895년 4월13일 드레퓌스는 유형지인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도'로 가는 배를 탔다.
ㄴ. 피카르의 문제 제기
만일 피카르 중령이 없었더라면,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은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피카르 중령의 양심이 드레퓌스를 구했고, 프랑스를 구했다. 1896년 3월 프랑스 참모본부 정보국은 일명 '푸른 엽서'라는 수상한 속달우편 한 통을 받는데, 수신인 이름이 에스테라지 소령이었다. 당시 막 정보국장이 된 피카르 중령은 즉각 에스테라지 소령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고, 그 결과 에스테라지 소령이 드레퓌스 사건에서 문제가 된 명세서의 진짜 작성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직속상관인 참모총장 부아테프르 장군과 참모차장 공스 장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 오판을 바로잡을 것을 건의했지먄, 그들은 사건 재검토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지 않았다.
1896년 9월 드레퓌스 부인은 재판 절차의 불법성을 이유로 의회에 재판의 재심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1896년 10월 재심을 원하지 않았던 신임 국방부 장관 비요 장군은 피카르를 격리시킬 목적으로 그를 동부전선에 이어 튀니지로 파견했다. 1897년 6월 튀니지에서 파리로 돌아온 피카르는 친구인 변호사 르블루아에게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비밀을 조건부로 털어놓았다. 그러나 1897년 7월 르블루아는 상원 부의장 쉐레르 케스트네르에게 그 내용을 알려주었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한 쉐레르 케스트네르는 본격적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 운동을 시작했다.
ㄷ. 에스테라지 재판과 무죄 석방
1897년 11월15일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 드레퓌스가 쉐레르 케스트네르의 요청에 따라 에스테라지 소령을 공식적으로 고소하는 편지를 비요 장관에게 보냈다. 에스테라지는 비밀 통신에 의해 참모 본부와 긴밀히 대책을 논의했다. 필적 전문가들은 참모 본부의 압력으로 문제의 명세서의 필적이 에스테라지의 것이 아니라고 판정했으며, 결국 1898년 1월11일 군사 법정은 에스테리지를 만장일치로 무죄 석방했다. 어이없게도 에스테라지의 재판이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지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다. 군중은 정부(情婦)와 나란히 팔짱을 낀 채 법정에서 나오는 에스테라지를 열광적인 환호로 맞았다.
ㄹ.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에스테라지의 무죄 석방은 예상대로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특히 에밀 졸라는 이 혐오스러운 판결을 계기로 드레퓌스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판결 이틀 후인 1898년 1월13일 [로로르]지는 언론 사상 가장 유명한 기사가 된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 즉 [나는 고발한다!]를 일면 톱기사로 실었다. 졸라는 원래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목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편집장 클레망소의 권유에 따라 [나는 고발한다!]로 바꾸었다. 그날 [로로르]지는 평소 판매 부수의 10배가 넘는 30만 부를 찍었지만 삽시간에 동이나버렸다. 후일 유명한 사회주의 정객 레옹 블룸은 "[나는 고발한다!]는 단 하루 만에 파리를 통째로 뒤흔들었다"는 표현으로 그날의 쾌거를 회고했다.
ㅁ.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과 사면
[나는 고발한다!]가 게재된 이후 청년 학생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결 더 강한 결속력을 보이며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했다. 더욱이 유명한 '앙리의 허위문서'가 폭로되고, 그것을 작성한 앙리 소령이 의문의 자살을 하자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은 불가피한 듯 보였다. 더욱이 드레퓌스 사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가 서구 문명의 전위였던 만큼 프랑스의 불의를 바라보는 세계는 큰 불안과 함께 심한 구토를 느꼈다. 마치 세계 문명의 전위를 자처하는 미국의 불의를 바라보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말이다.
1898년 9월 각료 회의가 드레퓌스 부인의 재심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자료가 프랑스 최고 재판소인 파기원으로 넘어갔고, 파기원은 1898년 10월 마침내 재심 요청을 받아들였다. 재심 개회지로는 렌이 선정되었는데, 그것은 렌이 드레퓌스가 도착할 항구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소란스러운 파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1899년 8월 마침내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렌의 한 고등학교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이 열렸다. 그렇지만 렌이라고해서 소란이 없었을까. 재심이 진행되는 동안 드레퓌스의 변호인인 라보리 변호사가 총격을 당했는데,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2개월 전 이미 에스테라지가 자신이 문제의 명세서 작성자라고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1899년 9월9일 군사 법정은 5대 2로 드레퓌스의 유죄를 확정함으로써 다시 한번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결국 정부와 군부는 참모 본부와 드레퓌스를 다 살리기 위한 고육책으로 유죄 확정과 사면을 생각해낸 것이다.
1899년 9월19일 대통령 에밀 루베는 수순에 따라 드레퓌스를 사면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거니와, 이는 드레퓌스 사건의 사법적 종결을 의미했다. 그런데 사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가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드레퓌스가 받아들였던 사면을 드레퓌스파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이다. 드레퓌스가 사면을 수용한다는 것은 곧 그의 무죄를 초지일관 주장했던 피카르를 곤경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었다. 드레퓌스를 구해준 은인, 그 피카르를 말이다. 사실 드레퓌스는 군인으로서도 동료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사면까지 받아들이자, 드레퓌스는 드레퓌스파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인물로 비쳤다. 참모 본부 근무 시절부터 드레퓌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피카르는 이를 계기로 드레퓌스에게서 더욱 멀어져 갔다.
ㅂ. 드레퓌스의 완전한 복권
1900년 4월 개막된 만국박람회가 초래한 일종의 휴전도 드레퓌스파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부와 의회가 드레퓌스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선택한 마지막 카드는 이른바 사면법이었다. 드레퓌스의 사면 이후 15개월이 지난 1900년 12월, 의회는 사면법을 통과시켰다. 요컨대 사면법은 좌우를 막론한 모든 사건 관련자들을 사면함으로써 가능한 논쟁을 원천봉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말소, 즉 문제의 회피였다. 드레퓌스파는 사면법통과를 시민에 대한 반역 행위로 규탄했지만 소용없었다.
드레퓌스파에게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복권은 1906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04년 3월 파기원은 명예를 되찾기 위해 사면 혜택을 자진 반납한 드레퓌스가 제기한 새로운 재심 요구를 타당하다고 인정했고, 보충 수사를 명령했다. 그리고 1906년 7월12일 파기원은 마침내 드레퓌스에게 내린 유죄 선고가 오류였음을 선언했으며, 이튿날 의회에서 드레퓌스와 피카르의 군대 복귀 법안과 졸라 유해의 팡테옹 이장 법안이 가결되었다. 드레퓌스와 피카르와 졸라의 복권은 곧 자유와 정의, 진실의 복권을 의미했다. 1906년 드레퓌스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906년 10월 피카르는 전(前) [로로르] 편집장이자 현(現) 내각수반인 클레망소에 의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보수주의 언론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졸라의 유해 역시 시민들의 애도 속에 1908년 6월6일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졸라의 이장식이 거행되는 동안 반드레퓌파 신문기자 한 명이 드레퓌스의 팔에 총상을 압힌 것이 이 기나긴 역사적 사건의 마지막 이야깃거리였다.
드레퓌스 사건과 졸라
1898년 1월13일 발표된 [나는 고발한다!]는 졸라 인싱의 전환점이자 프랑스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졸라는 이 글의 발포 이후 한편 국가적 배신자의 상징이 되었고, 다른 한편 양심적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다. 전자는 부르주아 독자의 상실로 인한 경제적 고통을 초래했고, 후자는 이미 대가로서 인정받고 있던 그의 문학적 지위를 단연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졸라 개인의 운명과는 별도로 [나는고발한다!]는 발표를 기점으로 사람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단순한 수사 드라마가 아니라 프랑스의 현재와 미래, 나아가 세계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대하 역사 드라마로 읽기 시작했다.
(1)[나는 고발한다!]이전
애초에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별 관심도 없었다. 드레퓌스의 재판이 열린 1894년 그는 소설 [로마]의 자료 조사를 위해 이탈리아에 머물고 있었고, 여느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드레퓌스 사건의 판결에 특별히 의혹의 시선을 던질 이유가 없었다. 드레퓌스 사건 재심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897년에도 그의 관심은 온통 [메시도르]의 상연과 [파리]의 집필에 쏠려 있었다.
졸라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897년 11월 초 [사법적 오판, 드레퓌스 사건]을 출간한 바 있는 드레퓌스의 작가 라자르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들으면서부터이다. 드레퓌스파로서는 당대의 문호 졸라가 그들의 진영에 합류한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셈이었으리라. 1897년 11월 중순 상원 부의장 쉐레르 케스트네르의 집에서 열린 비밀 모임에 참석한 졸라는 마침내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전개할 결심을 했고, [르 피가로]를 통해 [쉐레르 케스트네르 씨], [조합], [조서]등 3편의 글을 연이어 발표했다. 하지만 [르 피가로]의 보수적인 독자들은 졸라의 글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들의 격렬한 해지 운동을 이겨낼 수 없었던 [르 피가로]의 편집진은 결국 졸라의 글을 사양했고, 졸라는 이어지는 2편의 시론,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프랑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파스켈 출판사를 통해 팸플릿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좌절의 서곡에 불과했다. 1898년 1월11일 군사 법정은 그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에스테라지에 대해 만장일치로 무죄 석방을 선고했다. 반면 '푸른 엽서'를 위조한 혐의로 피카르는 같은 날 체포.투옥되었다. 드레퓌스파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격이 아닐 수 없었다.
(2) [나는 고발한다!]
1898년 1월13일 졸라의 저 유명한 격문 [나는 고발한다!]가 <로로르>에 발표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하에서다. 그 파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이 격노한 가운데 고등사범학교 학생들, 작가들, 예술가들, 과학자들, 교수들의 대대적 지지가 이어졌다. 프랑스, 위르켐, 프루스트, 모네 등이 망설임 없이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 청원서에 서명했다. 이를테면 에스테라지 석방, 피카르 투옥, 쉐레르 케스트네르의 상원 부의장직 상실 등으로 꺼져가던 재심 운동의 불씨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한 편의 글로써 다시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와 참모 본부는 [나는 고발한다!]의 파급 효과에 대경실색했다. 의회는 서둘러 졸라에 대한 기소를 312대 122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결정했고, 반드레퓌스파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재심을 막으려 했다.
1898년 2월 센 중죄재판소로 소환된 졸라는 15차례의 공판 끝에 법정 최고형인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을 선고받았다. 졸라는 즉각 프랑스 최고 법원인 파기원에 상고했고, 1898년 4월 파기원은 상고를 받아들여서 센 중죄재판소의 판결을 형식상의 결함을 이유로 파기했다. 군사 법정의 반응 역시 신속했다. 그들은 졸라를 다시 기소하고, 그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회수할 것을 요청했다. 1898년 5월 베르사유 중죄재판소에서 졸라의 두 번째 재판이 열렸다. 7월에 졸라에게 원심대로 선고했다. 이제 판결의 집행을 막는 방법은 그 판결을 전달받지 않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졸라는 선고 당일 저녁 런던으로 원하지 않는 망명을 떠났고, 며칠 후 정부는 그의 레지옹 도뇌르 수훈자 자격을 박탈했다.
졸라의 영국 망명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한쪽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비겁한 도피로 받아들여졌다. 어쨌든 날로 뜨거워져 갔던 찬사의 열기를 식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사람들은 졸라의 망명을 피카르의 투옥과 즐겨 비교하곤 했다.
(3) [나는 고발한다!] 이후
드레퓌스 사건의 주역은 당사자인 드레퓌스 대위를 비롯해 그를 유죄로 몰아간 참모 본부 장교, 국방부 장관, 보수주의 정객, 그리고 그의 무죄를 입증하려 애쓴 피카르 중령, 진보적 지식인, 공화주의 정객들이다. 그러나 이런 주역들만 있었더라면, 드레퓌스 사건은 그렇게 장기화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드레퓌스 사건을 보수와 진보의 물러설 수 없는 결전장으로 만든 것은 아마도 반유태주의와 내셔널리즘의 선동에 호응한 군중이리라.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군중과 민중이다. 독일계 유태인 여류 사상가 아렌트는 반드레퓌스파 군중을 민중이라고 부르지 말 것을 요청한다. 민중이 올바른 변화를 위해 궐기할 때, 각 사회계급의 찌꺼기로 형성된 군중은 대개 자신의 계급을 증오하면서 강력한 지도자를 찾는다. 반드레퓌스파 선동가들이 교회와 귀족의 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사회적 낙오자들을 반유태주의, 반의회주의, 군국주의 운동에 끌어들였음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드레퓌스파의 지식인들은 실질적으로 반드레퓌스파가 장악하고 있는 국가 권력 및 이들에 의해 조종되는 군중 심리, 즉 막연한 국민감정과 이중의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나는 고발한다!] 이후 졸라는 군중의 표적이 되어 끊임없이 살해의 위협에 시달렸다.
다른 한편 [나는 고발한다!]는 졸라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지 편지를 안겼거니와, 그것이 그의 행진을 지속시킨 원동력이 되었음을 말할 필요조차 없다. 여론이 재심으로 돌아선 것은 1898년 여름부터인데, 앞서 말한 유명한 '앙리의 문서'가 허위 문서로 밝혀졌고, 뒤이어 앙리가 감옥에서 의문의 자살을 했기 때문이다. 위기에 몰린 에스테라지는 처음에는 벨기에로, 그 다음에는 영국으로 피신했다. 1899년 6월 재심이 확정되자 피카르는 석방되었고, 졸라는 영국에서 돌아와 [로로르]에 게재한 [정의]를 통해 진실과 정의의 승리를 선언했다.
1899년 렌의 군사 법정은 또다시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졸라는 3개월 전과는 반대로 진실과 정의의 죽음을 선언했다. 이어서 대통령 에밀 루베가 드레퓌스에게 사면령을 내리자 졸라는 '고통받은 자'의 석방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동시에 드레퓌스에 명예 회복, 더 나아가 프랑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1900년 12월 의회가 드레퓌스 사건 자체를 땅속에 묻어버리기 위해 사면법을 통과시켰을 때, 졸라는 <공화국 대통령 에밀 루베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역사의 정의를 구현하기 전에 이 땅의 정의부터 구현할 것을 촉구했고, 항의의 의미로 침묵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 침묵은 이내 영원한 침묵이 되고 말았다. 1901년 2월 [멈추지 않는 진실]을 출간한 다음, 드레퓌스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진실]을 유고로 남긴 채, 1902년 9월30일 졸라는 불의의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한다. 그리고 그가 보지 못한 드레퓌스 사건의 행복한 결말, 즉 드레퓌스의 복권은 그로부터 4년이 흐른 1906년 7월12일 이루어졌다.
멈추지 않는 진실
12년에 걸친 드레퓌스 재판으로 밝혀진 것은 드레퓌스와 피카르의 무죄뿐이다. 반역자 에스테라지도, 사건을 오도한 드클랑과 앙리도, 군부를 욕되게 한 메르시에, 무아데프르, 공스 장군도, 아무도 법적으로 단죄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법적 의미에서 보면 드레퓌스 사건은 영구 미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드레퓌스 사건에 있어서 드레퓌스라는 고유명사는 그리 결정적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드레퓌스는 다소 융통성이 없는 성실한 군인이었다. 동료들을 그의 맹목적 군인정신으로 볼 때 만일 자신의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드레퓌스는 틀림없이 반드레퓌스파의 일원이 되었으리라고 평가했다. 더욱이 그는 유죄 인정을 전제로 하는 사면을 받아들일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드레퓌스는 드레퓌스 사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드레퓌스가 매력적인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드레퓌스파의 투쟁의 계기가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요컨대 드레퓌스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사법'이나 '연민'이 아니라 '역사'에 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노태우 대통령 집권 당시 정부의 실정과 공권력의 폭력에 항의하는 대학생.노동자들의 분신이 잇따르자, 검찰이 1991년 5월8일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강기훈씨가 대필해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한 사건. 강씨는 다른 증거 없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필적 감정만으로 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됐다.
강기훈, 재심 재판부 필적감정 결과 곧 발표
정치공작 시대에 유서대필을 말하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강기훈(49) 유서대필 의혹 사건의 재판이 22년 만에 다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입을 바라보게 됐다. 이 사건의 재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이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의뢰했고, 그 결과가 다음 공판기일인 11월7일에 공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2013년과 1991년의 상황은 비슷하다. 국과수는 1991년 5~6월 검찰의 필적감정 요청을 받았다. 감정 대상은 5월8일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의 유서가 평소의 필적과 일치하는지 여부였다. 국과수는 처음엔 속필에(유서)와 김씨의 정자체를 비교할 수 없다“며 ‘감정불가’라고 통보했다가, 검찰이 추가 찾은 김씨의 정자체들과 함께 재차 감정을 요청하자 ”두 필적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이후 검찰은 유서의 필자로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기훈씨를 지목했고, 국과수는 강씨와 유서의 필적이 같다고 발표했다. 결국 강씨는 1991년 7월 유서를 대필하여 김씨의 자살을 방조한 죄로 징역 3년을 법원에서 선고받았다.
새로운 국면은 2005년에 시작됐다.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김기설의 지인이 보관하고 있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노트가 새로운 증거로 접수됐다. 김씨의 행적이 세세하게 기록된 이 노트의 필적은 유서와 마찬가지로 속필체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워원회’는 이 노트와 김씨의 김씨의 유서를 감정해 ‘필적이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2007년 11월 법원에 유서대필 사건의 ‘재심’을 권고했다.
이제 공은 국과수로 넘어갔다. 검찰은 항고이유서를 통해 전대협 노트가 강씨 쪽이 조작한 증거이고, 김씨의 노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전대협 노트의 감정을 요청한 것이다. 국과수는 속필체로 쓰인 전대협 노트와 정자체로 쓰인 기존 김씨의 필적을 감정해야 하는 운명이다.
강기훈 씨는 말한다. “요즘 유서대필 사건에 관해 설명하기 쉬워졌다.” 1991년과 비슷한 정치공작이 많기 때문이다. 김기춘 법무부 장관 등 강씨가 22년 전 맞닥뜨린 공안당국 주역들은 현 정부의 요직에 있다.
1991년 5월8일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쓴 건 누구일까. 김씨는 죽었고, 강기훈 씨는 "내가 쓰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검찰과 법원은 강 씨가 썼다고 판단했다. 그 근거는 "유서에 나타난 필적이 강씨의 것과 같다"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다. 검찰이 목격자 등 직접증거를 찾아내기 못한 상황에서 필적 감정은 강씨의 자살방조죄 우죄에 유력한 증거가 됐다.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결론은 '죽음마저 이용한다'며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혔다. 김씨의 유서를 강씨가 대신 써준 걸일까?
법원은 검찰이 주장해온 ‘전대협 노트’의 감정을 지난 8월 결정했다. 1991년 국과수가 유서와 대조했던 김씨의 문서들과 비교해달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번 감정으로도 논란이 깨끗이 결론날지는 의문이다. 속필체인 ‘전대헙 노트’와 달리 당시 국과수가 감정한 김씨의 문서들은 정자체로 양자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원칙대로 ‘판단 불가’라 나오면 논란은 계속될 것이고, ‘같다’ 또는 ‘다르다’고 나오면 원칙에 반하는 결과다. 사건을 담당하는 송상교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사건의 본질은 강씨가 정말 유서를 썼느냐인데,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다르다는 감정 결과가 이미 나왔다. 이번 감정은 감정의 일반적 원칙에 맞지 않고, 본질에서도 벗어났다”고 말했디.
강씨는 김씨의 유서를 대필해 준 것일까. 재심은 원심과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진다. 변호인은 ‘강씨가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실화해위 감정으로 강씨와 유서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반면 검찰은 ‘김씨가 썼다고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유서와 필적이 동일한 것으로 감정된 ‘전대협 노트’는 김씨가 쓴게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강씨가 “영원히 안 될 것 간다”고 생각했던 재심이 시작됐지만 10개월째 제자리 걸음이다.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나와 김씨는 같은 단체에 있었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전민련은 여러 운동단체의 활동가들이 파견 나와 함께 일하는 곳이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이 정국을 잘 끝내고, 살아서 싸워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죽으면 정말 감당이 안 된다. 장례식을 치르다 일을 다 할 정도였다. 민심의 흐름도 불안했다. 운동권 밖에 있던 사람들도 '너네들 자꾸 이러면 큰일난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직접 '살아서 싸우자'고 설득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꾸 죽어나면... . 김기설씨는 아마 '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죽지 마세요'라는 심정으로 분신을 하지 않았을까. 나중에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살인자로 몰아붙였다. 즉음을 막으려 한 사람에게 오히려 '너가 죽였다'며 거꾸로 죄를 뒤집어 씌웠다. 형법상 내 죄는 자살방조죄지만 여론재판에선 '살인죄'를 받은 셈이다.">
<"사실 영원히 재심으로 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출소하자마자 변호사들을 찾으러 다녔다. 그들에게 '검찰이 사건을 조작했다. 난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형사법에 정통한 변호사들은 모두 '그 사건은 뒤집힐 수 없다. 그냥 잊고 지내라'고 했다. 그래서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려 했다. 10년 넘게 기업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일을 했다. 지금은 작은 무역회사에 다닌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기자들이 찾아왔다. 어떤 기자는 '이번에 검찰 인사에서 당시 수사한 검사가 검사장이 됐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다른 기자는 '좀지난 일이지만 관심이 많다 얘기 좀 들을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기자들이 찾아오면 난 다시 처음부터 얘기해야 했다. 그렇게 찾아온 기자들이 하나같이 '지금 심경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건성으로 '별생각 없다'고 답했지만 사실의 그때의 감정, 느낌들이 되살아나 몇달 동안 괴로웠다.>
<까칠하다. 지금도 까칠하단 말을 듣는다. 그래도 병이 생기고서 인생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 또 만나는 사람도 바뀌었다. 요즘 조작간첩 피해자들이 모인 '진실의 힘'이라는 단체의 모임에 종종 참석한다.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추렴해서 만든 단체다. 그곳에 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특히 과거에 힘들었던 경험을 얘기하는 '만풀이'라는 행사가 있다. 거기에 갔더니 나보다 잔인한 경험을 한 한 분들이 많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60일 넘게 잔인한 고문을 받고 나오면 주변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다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아내와 자식들도 주변의 싸늘한 시선 때문에 힘든 삶을 산다. 부인과 이혼하고 자녀는 우울증으로 자살하기도 했다. 그분들에게 위로를 받는 게 좀 비겁하단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자연스레 거기로 발길이 간다. 나도 때로는 그냥 위로를 받고 싶다.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선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렵다. 진실의 힘에선 이러저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정신분석학에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의미인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딱 그렇다 그분들을 만나고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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