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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

광주 향약과 이선제

by 이덕휴-dhleepaul 2018. 6. 6.

역사문화 이야기

100가지의 광주역사문화자원

스토리 100

필문대로와 이선제

도로명이 된 향약 선구자, 필문 이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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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광주 사거리에서 산수오거리를 지나 서방사거리까지를 '필문대로'라고 일컫는데, 바로 이 필문 이선제李先薺(1389~1454)를 기리기 위한 거리명이다. 이선제가 어떤 인물이기에 광주의 큰 길에 그 이름이 붙은 것일까.
이선제는 고려 마지막 왕인 1390(공양왕 2)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일영이며, 할아버지는 이홍길이다. 양촌 권근權近(1352~1409)의 문하에서 수학한 후 1413(태종 1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19(세종 원년) 증광시에 급제한다. 이후 1419(세종 원년)부터 사망하던 1453(단종 원년)까지 30년 이상을 관직에 있었다.
광주 최초의 향약도 그에 의해 실시되었다.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승격시켰을 뿐 아니라 지금 광주우체국 자리에 희경루喜慶樓를 짓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광주의 젊은 선비 30인을 뽑아 강학의 학풍을 일으키며 조정과 향리에 기여했다.
 
필문 이선제의 특별한 생애
이선제의 관직 생활은 활동의 내용에 따라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419(세종 원년) 급제 후부터 세자인 문종이 섭정을 시작하는 1442(세종 24)까지이고, 2기는 문종이 섭정을 시작한 후부터 관직을 끝마칠 때까지이다. 1기는 대부분 집현전에서 활동했던 시기였다. 이선제가 언제 집현전에 들어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420(세종 2)에 설치되었고 세종 5년에 사관으로, 세종 8년에 집현전 수찬의 관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집현전이 만들어진 직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선제의 집현전에서 활동 기간은 20여 년이나 된다. 20여 년 동안 이선제는 집현전 수찬, 집현전 부교리, 집현전 직제학을 지내면서 세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당시 집현전 학사들은 여러 특권과 신분을 보장받고 있었고 인사 이동도 거의 없어 10년에서 20여 년 동안 근무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 기간 동안 이선제는 주로 사관이 되어 태종실록고려사를 편찬하였으며 경연검토관으로 활동하거나 각종 경찬소문을 짓기도 한다.
1기가 학자로서의 활동기라면, 2기는 정치적 활동기였다. 1442(세종 24) 이후 세종은 각종 질환으로 모든 정사를 세자인 문종으로 하여금 처결하도록 했다. 이후 세종은 8년여 동안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모든 서무를 위임하였으며, 섭정에 필요한 첨사원을 설치하였다. 8년여의 섭정을 끝내고 문종이 왕으로 등극했으나 3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이후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지만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들이 빈발한다.


1999년 필문대로 (출처:광주시청)
필문 이선제의 호를 딴 필문대로는 광주 남구 남광교에서 광주 북구 서방사거리까지의 도로를 지칭한다.
대남대로, 서암대로, 죽봉대로와 함께 제1순환도로로 기능을 하고 있다.

 
이 시기 이선제는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주요 관직에 올라 있었다. 10여 년의 기간 동안 이선제는 6조의 고급관료인 참의나 참판으로서, 외관직인 강원도 관찰사로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관직생활에서 직접 체험한 경험과 집현전 재직 당시 살펴본 옛 제도를 바탕으로 각종 정책 상소를 올리는 등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한다. 당시 이선제가 올렸던 상소로는 이재소를 비롯하여 군재소, 단군신전건립소, 시의소등이 있다. 이 상소들은 당시 이선제가 경제, 국방, 의료 및 단군에 대해 어떤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시기 이선제의 관직 중 눈에 띄는 것이 1442(세종 24) 첨사원 동첨사와 1450(문종 즉위년) 세자우부빈객의 관직이었다. 첨사원동첨사는 문종이 세자 시절 섭정할 수 있도록 설치한 첨사원의 관직이며 세자우부빈객은 바로 다음 임금이 되는 단종을 보필하는 관직이었다. 즉 이선제는 세자의 정무처결 기관인 첨사원이 설치되자마자 첨사원동첨사로 발탁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당시 이선제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의 첨사원 관직의 독점은 집현전 출신 학자들이 학문적 집단에서 정치 세력화하는 계기가 된다.
이선제의 죽음은 다소 갑작스럽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해까지 시의소단군신전건립소를 올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중국 사신을 호송하는 반송사로 임명되고 있었다. 1452(단종 즉위년)에 올린 상소에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 죽음의 원인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집현전 학자들의 정치 세력화로 인한 수양대군 측과의 정치적 갈등이 그의 죽음을 앞당긴 한 요인은 아니었을까 싶다. 30여 년 동안 주요 관직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그의 졸기마저 남아 있지 않고 있음도 그의 정치적 박해를 짐작케 한다. 이선제는 1453(단종 원년) 겨울에 서울에서 사망한 뒤 이듬해 봄 상여로 광주 만산동으로 옮겨 할아버지 무덤 옆에 장례를 치른다.
 
직언하고 상소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결단을 촉구하다
이선제는 30세 때인 1419(세종 원년)에 증광시에 급제한 후 부모님의 3년 상을 제외하고는 30여 년 동안 줄곧 관직에 있었다. 이선제의 관직 생활이 달랐던 점은 주어진 자기 관직에만 한정하지 않고 옛 제도를 고찰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 국방, 의료, 단군신전 등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올려 임금으로 하여금 결단을 촉구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상소로는 이미 서술한 것처럼 1447(세종 29) 예조 참의로서 올린 이재소를 비롯하여 1450(문종 즉위년) 예문관 제학 때 올린 군재소, 1452(단종 즉위년)에 올린 단군신전건립소]시 의소등이 있다. 이재소를 제외하고, 군재소]시의소그리고 단군신전건립소등이 모두 죽기 3년 전, 즉 관직에 나아간 지 30년이 지난 이후에 올린 것임을 볼 때 이선제가 죽을 때까지 얼마나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골몰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재소1447(세종 29) 이선제가 예조 참의로 재직시에 올린 상소로 그의 경제관을 잘 보여준다. 이선제는 장문의 상소에서 중국 역대 제왕들의 국가 재정 확보책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토지세인 전조와 술, 소금과 차의 전매가 그것이다. 그중 술과 차의 전매는 선왕의 옛 제도가 아니므로 논할 필요가 없다면서 "소금이 토지세인 전조와 함께 국가재정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선제는 그 근거로 "토지세인 전조는 반드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므로 믿고서 만족하게 쓸 수 없으나 소금의 수입은 홍수나 가뭄 그리고 흉년이 들 걱정이 없기 때문에 무한정 취하여 이용할 수가 있다"는 이점을 들었다. 더욱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소금을 국가의 주요 수입원으로 삼는 정책은 앞 시대인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왔었는데 고려 말엽에 이르러 권문세족과 토호들이 독점 탈취하면서 무너져 버렸다"고 지적하면서 전쟁이나 홍수, 가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고기와 소금을 국가의 수입원으로 삼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선제의 국가재정 확보방안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더군다나 이선제의 이재소는 중국 역대 제도뿐만 아니라 전조인 고려의 제도까지 참조한 것이었다.
두 번째 상소는 1450(문종 즉위년) 이선제가 나이 61세 되던 해에 올린 군재소. 이선제는 군재소에서 "조선 왕조가 건국된 지 50년이 지나면서 군사는 흩어지고 읍성과 산성은 무너지고 내지의 익군은 모두 연변에 소속되고 변방의 나머지 백성들은 초야에 흩어져 있어 고려 현종 때의 거란이나 고종 때의 몽고와 같은 침입이 있다면 어찌 대처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단기적으로는 한가한 때를 당해 성을 견고히 쌓고 성을 지키는 군졸을 뽑아 책임을 주어 지키며 장기적으로는 모든 성의 군사를 조치할 방도를 대신과 더불어 강구하여 영세의 방어책으로 삼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필문이선제 부조묘
조선 초기 문신인 필문 이선제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 포충사 뒤쪽 산기슭에 있으나 원래의 위치에서 50여m 왼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선제는 삼의사 제조로 근무하면서 의생들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 깜짝 놀란다. 의서의 내용에 정통한 자는 매우 드물었고 조금만 알고 있거나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의원마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서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자의 집에 이르러서도 병세는 묻지 않고 진맥하지도 않은 채 소견만으로 약을 써 환자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필문은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당시 이선제가 가장 고민하고 걱정하는 내용은 의원들의 실력이었다. 의원들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예조에서 통합하여 상등, 중등, 하등의 세 부류로 나누어서 뽑고 또 여러 의서들을 가르치고 읽게 하여 의원들의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몇 년 만 시행하면 반드시 양의가 나올 것이며 질병이 있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선제가 가장 중요시 여겼던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향약이란 중국 송나라의 '남전여씨향약'으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여씨향약은 중국 섬서성 남전현에 살던 여씨 4형제가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향리 전체를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해 만든 약속이었다. 이 여씨 형제들에 의해 실시된 향약을 주희가 가감하여 발전시킨 것이 '주자증손여씨향약'이었다. 조선의 향약도 '주자향약'에서 비롯된다. '주자향약'주자대전에 실려 고려 말 전래되었으나 곧바로 실시되지는 못한다.
태조 이성계가 자신이 향리였던 함흥에서 '향헌 41'를 친히 제정하고 호령대군으로 하여금 반포 실시한 것이 처음이었다. 광주에서의 향약은 형조참판과 황해감사를 역임한 김문발金文發(13591418)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다. 그러나 김문발이 행했다는 향약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지만 크게 행해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광주향약의 내용은 김문발의 향약 실시 때 참여한 이선제의 문집인 수암지에 남아 있다.
 
염치가 없는 자, 힘을 믿고 약자를 구휼하지 않는 자를 벌하다
수암지에 실려 있는 '광주향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은 주로 가족 및 향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모에게 불순한 자, 형제끼리 서로 싸우는 자, 가족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 고을의 연장자를 능멸하는 자 등에 대해서는 가장 엄한 상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2장은 향촌민들이 지켜야 할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자, 정부인을 박대한 자, 친구끼리 서로 싸우는 자, 염치가 없는 자, 힘을 믿고 약자를 구휼하지 않는 자, 국가의 각종 세금 및 역을 행하지 않는 자 등에 대한 내용으로 중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3장은 회의시 불참자나 문란한 자에 대한 내용으로 하등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부칙을 두어 하급관리들이 향촌 사회에서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국가의 공금을 탐할 경우 관에 고발하는 등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도 규정하고 있다.
이선제가 시행했던 '광주향약'에서는 이미 살펴본 대로 가족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를 상등의 벌로, 향촌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를 중등의 벌로 향약을 운영하기 위한 회의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하등의 벌로 규정하고 있다. 하 등의 벌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정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가 가장 엄한 벌을 받고 있음을 통해 가정의 질서 유지가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청의 하급관리가 민폐를 끼치는 행위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이선제가 죽고 난 후 '광주향약'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15세기 말~16세기 초에 만들어져 100여 년 동안 실시된 '양과동 동약'을 분석해 보면 이선제가 실시했던 내용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선제가 실시했던 '광주향약''양과동 동약'으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초기의 좌목에 기축옥사로 연루되어 화를 당했던 이선제의 5대손인 이발(15441589)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선제와의 연관성을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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