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가르침을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팔레스타인의 목수 예수의 가르침에 기반한 기독교는 4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끝없이 확산되어 가는 듯 했다.
한때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던 기독교는 7세기 이후 아라비아 반도의 상인 모하메트가 창시한 신흥종교 이슬람교에 밀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기반을 대부분 상실하지만 게르만인들과 슬라브인들을 개종시키면서 유럽 대륙 전체를 그 영향권 하에 두게 된다.
1054년 기독교가 이슬람교를 본받아 성상 숭배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여 신앙을 재확립하자고 주장하는 동방교회(후대의 그리스 정교)와 야만인들에 대한 전도를 위하여 조각상 및 회화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서방교회(후대의 카톨릭 교회)로 분열하면서 4세기말부터 5세기초에 걸쳐 활동했던 북아프리카 출신 사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기반한 단일 교리에서 벗어나 교회간 경쟁의 시대가 열린다.
초기에는 동방 교회가 서방 교회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12세기 십자군 원정, 13세기 몽골의 러시아 정복 등을 거치면서 그리스 정교는 정체기를 겪게 된다. 반면 카톨릭 교회는 13세기에 들어서며 이탈리아의 사제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접목시켜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하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453년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그리스 정교의 중심이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자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카톨릭 교회가 그리스 정교에 대하여 압도적 우위를 보이게 된다.
1492년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등을 계기로 카톨릭 교회의 세력은 유럽 대륙을 넘어 전세계로 퍼져 나가는데 현재 14억명의 신자를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종교 집단으로 남아있다.
개신교는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재세례파의 네가지 종파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수천 개의 종파로 분화되었다.
1. 루터교 계열
독일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의 대리인 요한 테첼 수도사는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구매자가 동전을 상자에 넣을 때마다 "그대의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광경을 보고 격분한 독일 작센의 카톨릭 사제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예배당 정문에 95개조에 이르는 반박문을 게시한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의 95개 조항에 대항하는 교서에서 "난폭한 돼지(루터)가 주님의 포도원(교회)에 침입했다"고 선언하고 두 달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개최한 보름스 회의에 루터가 소환된다.
마르틴 루터의 운명은 교황청에 맞서 개혁을 외쳤다가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당했던 보헤미아의 신학자 얀 후스의 전철을 따르게 될 것처럼 보였다. 카를 5세가 루터의 신변을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개입했지만 신학 논쟁이 본격화되면 결국 레오 10세의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터의 지지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보름스 회의를 마치고 귀가하던 루터를 납치하여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버렸다. 신변의 안전을 확보한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번역 출판하고 교회의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에 우선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독일 전역에 루터 추종자들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교황청이 루터를 파문하고 그의 견해를 이단으로 선포하자 루터의 지지자들은 "우리가 이단이라면 카톨릭 교회는 교황 추종자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면서 양자의 관계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루터교는 북유럽 및 발트해 국가들에서 주류 기독교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과거 프로이센의 영토였던 북부 및 동부 독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2. 칼뱅교 계열
1533년 프랑스의 변호사 장 칼뱅은 파리 대학교 학장에 취임하게 된 친구 니콜라스 콥을 위하여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어록을 인용하여 카톨릭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내용의 연설문을 작성한다.
이 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된 칼뱅은 스위스 바젤로 도망치는데 그 곳에서 개신교 신학을 정리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발표한다.
기욤 파렐의 설득으로 1536년 스위스 제네바에 정착하게 된 존 칼뱅은 전 유럽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자신의 신학 이론을 전파한다. 그의 가르침에 기반한 개신교 종파를 독일, 네덜란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개혁교회, 스코틀랜드와 미국에서는 장로교라고 부르고 있다.
인간의 직업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에 직업의 귀천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그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지 여부가 중요할 뿐이라는 칼뱅의 가르침은 네덜란드가 17세기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는 정신적 기반이 된다.
3. 성공회 계열
그가 교황의 혼인 무효 선언을 원했던 이유가 자신의 사후 후계자 문제로 잉글랜드가 내전 상황에 빠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지 25세의 시녀 앤 볼린과의 결혼을 원했기 때문인지 불분명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두려워하던 교황 클레멘트 7세는 헨리 8세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는데 캐서린이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이다.
1532년 헨리 8세가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국왕의 통치 하에 있는 독립적인 교회가 되었다고 선포한다. (성공회의 성립) 이후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이르러 성공회는 의례는 카톨릭, 신학 이론은 개신교에 따르는 중도 노선을 취하기 시작한다.
(2) 1604년 성공회의 불분명한 정체성에 불만을 품은 잉글랜드 사람들이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른다. 이들 중 일부는 칼뱅의 신학 이론을 지지하면서 성공회로부터 이탈하여 자신들만의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네덜란드로 이주한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덜란드인들이 자신들은 칼뱅의 가르침을 따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인들보다 훨씬 더 타락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하지 못 한다.
이주민들 중 한 무리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현재 미국의 매사츄세츠주로 집단이주하는데 오늘날 미국인들은 이들을 "필그림파더스"라고 부르고 있다.
네덜란드에 남은 사람들은 존 스미스를 중심으로 유아세례를 부정하면서 신앙고백을 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신학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이를 침례교라고 한다. 침례교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에서는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신대륙 미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놀라운 성장세를 보여준다.
(3) 1736년 성공회 사제 존 웨슬리는 현재 미국의 조지아주로 향하던 중 폭풍우 속 흔들리는 배 안에서 차분하게 찬송가를 부르는 모라비아 경건주의자들을 만나면서 개인의 신앙 체험이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잉글랜드에 돌아온 존 웨슬리는 신성 클럽 - 1729년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옥스퍼드 대학에서 조직했던 경건주의 모임 - 을 중심으로 성경공부, 묵상, 금식 등을 엄격하게 지켜 나가기 시작했다. 웨슬리 본인은 성공회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다른 성공회 신자들과의 마찰이 계속되면서 신성 클럽 회원들이 그의 사후 별도의 교회로 분리되어 나가는데 이들을 감리교라고 부른다.
한편 신대륙에서는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감리교 신학자 조지 휫필드가 173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야외집회를 통한 전도활동을 행한다. 힘겹게 살아가던 식민지 변방의 수많은 정착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휫필드의 설교에 열렬히 반응하는데 이를 '대각성'이라고 한다.
잉글랜드의 감리교는 그 교세가 계속 축소되면서 성공회와의 재통합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반면 미국의 감리교는 개신교 종파들 중 침례교와 함께 가장 많은 신자를 보유하고 있다.
4. 재세례파 계열
마르틴 루터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스위스 취리히의 카톨릭 사제 울리히 츠빙글리는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규정된 행동만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525년 츠빙글리의 제자들 중 펠릭스 만츠와 그 동료들 - 스위스 형제단 - 은 신약성경이 유아세례를 명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들은 모두 유아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신앙인으로서의 세례를 다시 받았다.
만츠를 비롯한 스위스 형제단원들은 다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재세례파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유아세례를 통하여 출생신고를 하고 그리스도교인이 되는 당시의 관습을 전면 부정하는 이들의 신앙은 취리히 시의회에 의하여 이단으로 규정되어 1527년 만츠가 사형을 당하기에 이른다.
유아세례 부정, 개별 교회의 자체적 신자 축출, 신자들만 참석할 수 있는 성찬식, 절대적 평화주의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세웠던 재세례파는 다른 개신교도들에게 탄압을 받아 왔으며 아미시, 후터라이트, 메노나이트, 퀘이커 등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집하고 있는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도 재세례파에서 기원한 개신교 종파들이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선별된 문헌들의 묶음인 성경에 기반하여 성립된 개신교는 그리스 정교 및 카톨릭 교회와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지 못 하면 기존의 주류 기독교에 흡수통합될 것이고 기존 성경의 가르침에서 지나치게 벗어날 경우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 구조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내 소수파인 개신교가 현재의 교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니면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지 여부는 그리스 정교 및 카톨릭 교회보다 높은 윤리 의식을 보여줄 수 있을지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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