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神學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by 이덕휴-dhleepaul 2018. 6. 14.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필자  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담임 이 덕 휴목사

 


목 차

제1장 들어가는 글/ 2
  제1절 작품에 대하여/ 2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4
제2장 기독교의 본질/ 7
  제1절 서문/ 7
   1. 제1판의 서문/ 7
   2. 제2판의 서문/ 8
  제2절 서론/ 10
1. 인간의 본질/ 10
2. 종교의 본질/ 12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14
     1) 본질론/ 14
  2) 신 또는 종교의 비밀/ 17
  3) 소결/ 22
    (2) 제2부 종교의 허위의 본질/ 24
  1) 종교의 본질적 입장/ 24
  2) 신의 본질/ 26
  3) 사변적 신학비판/ 29
   4) 모순의 변증법/ 30
  5) 결론/ 32
제3장 나가는 글/ 34
  제1절 비판/ 34
  제2절 평가/ 38
  제3절 비판에 대한 반성/ 41
* 참고문헌/ 45
** 필자와 이 논문에 대하여/ 46


제1장 들어가는 글

 제1절 작품에 대하여

본서『기독교의 본질』은 포이에르바하(L.A. Feuerbach, 1804-1872)가 1841년에 출간한 책으로서, 서론(1-2장)과 본문, 즉 제1부(3-19장) 및 제2부(20-28장)로 구성되었다. 서론부 제1장에서는 "인간 일반의 본질"을 서술하고. 제2장은 "종교 일반의 본질"을 도출해 내고 있다. 여기서 그가 종교와 인간과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소위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를 시도하는 데, 그 결정적 테제는 다음과 같다.  "종교는 무한성의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자기 의식, 다시 말해서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존재로서의 자기 의식이며 그것 이외의 어떤 것일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이러한 인식론적 가치의 전도를 해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대상이 철저히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신학의 비밀이 인간학이고 신적 본질의 비밀이 인간적인 본질임을 증명했다." 여기서 포이에르바하가 '증명'이라고 한 것은 학문에 있어서 한 가지 주장을 각양각색의 문제에 대하여 일관되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적용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일관성 때문에 그의 저서가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이 계속되는 것이다.
서론부의 제1장과 제2장은 사실상 제1부와 제2부의 총론부 라고 할 수 있다. 제1부와 제2부의 관계는 저자 자신이 붙인 제2판의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주의하라! 나의 저서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은 단지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일 뿐, 종교의 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그 중 제1부는 요점에 관해서는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2부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그러나 양 부분에서는 동일한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단지 방법이 서로 다를 뿐이다. 즉 제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 즉 종교의 진리로 인도하며, 제2부는 논박이다. 따라서 제1부는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것의 직접의 증명이며 제2부는 간접의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제2부는 필연적으로 제1부로 환원된다. 제2부는 전혀 독립된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제2부는 단지 제1부에서 말하는 의미와 반대되는 의미의 종교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제1부에서 말하는 의미의 종교가 정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제1부에서는 주로 종교를 취급하고 제2부에서는 신학을 취급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이 책을 칸트(Immanuel Kant, 1729-1804)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 구상했으며, 본서의 구성도 칸트의『순수이성비판』과 유사한 서문과 제1부, 제2부 등으로 집필하였다.   
1841년 3월 30일 에어랑겐 대학의 사강사 포이에르바하가 바이에른 내무성으로부터 파직통고를 받았을 때, 그를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기독교의 본질』제1판이 인쇄되고 있었다.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제목은 발행인 비간트(Otto Wigant)가 붙인 것이며, 이는 종종 있는 일로서 상업성을 위하여 적당하고 인기 있는 제목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의 책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칸트의 저작『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2)의 모델을 따르면서 그 대칭물이 되도록 구상했다. 이에 따라 그는 본서의 제목을『순수비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Unvernunft)이라 명명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책을 포이에르바하가 당초 제시했던 제목으로 불러도 좋다. 왜냐하면, 이념 정책적일 뿐만 아니라 순수이성비판과의 형식적 유사성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서론은 칸트의 서문처럼 본론을 두 개의 주요부분으로 구획짓고 있으며, 사고방식에 있어서도 코페르니쿠스처럼 회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미학과 분석론(순수이성비판의 제1부문)은 본서의 제1부인 "종교의 진실한 본질, 즉 종교의 인간학적 본질"(인간의 본질과 모순되는 종교)에 대응한다. 여기서는 신적인 제 가치의 형성에 작용하는 한편, 인간지성의 유한한 능력도 동시에 서술하고 있다. 선험적 변증론과 방법론(순수이성비판의  제2부문)은 본서의 제2부인 "종교의 허위의 본질"(인간의 본질과 모순되는 종교)에 대응한다. 여기서 교리의 체계는 이미 발전시켰던 방법에 따라 파괴되고 종교적 투사(投射)가 갖는 병적인 지적 성격이 폭로된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종교현상은 그 자체가 비판의 목적은 아니었다. 종교란 단지 그가 새로운 학문을 정초 시키는데 사용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였다.

제2절 저자의 생애와 사상

포이에르바하(Feuer: 불, Bach: 시냇물)라는 문자적 의미는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대립이다. 전통적으로 그의 가계는 알려진 바대로 유명한 신학자. 법률가. 예술사가. 수학자·화가 그리고 근대 형법학의 아버지이자 그의 부친 안젤름 포이에르바하(Paul Johan Anselm Ritter von Feuerbach, 1775-1833)를 배출한 '불의 강'의 집안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확신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자와 철학자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당신들 사변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만일 당신들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다시 말하여 진리에 접근하려 한다면 종래의 사변철학과 철학과 편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당신들의 진리와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불의 강'을 통과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불의 강은 현대의 연옥(purgkatoium)이다.
철학자인 동시에 법률가인 아버지 안젤름 포이에르바하(Paul Johann Anselm Ritter von Feuerbach, 1775-1833)는 원래 타당한 법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법은 인간에 의해 입법되는 것이며, 법과 도덕은 분리되는 것이라는 소위 법률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재판관이란, 엄격한 결과를 자의나 주관적 가치의식으로 완화시키거나 변경시킬 수 없으며, 오직 법 아래에서만 존재한다는 법치주의자였다. 1808년 작위를 받은 안젤름 포이에르바하는 형법의 형벌기능에 대한 위하설(威 說)을 주장하여 이른바, 심리강제설에 의한 일반예방이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여 상대적 형벌이론을 주장하였으며, 오늘날 형법학의 최고의 이념인 "법률 없으면 형벌도 없다"(nulla poena sine lege)라는 명제 하에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당시까지의 형법학계는 소위 칸트와 헤겔(G.W.F. Hegel, 1770-1831)이 주장한 형법의 자기목적성에만 의지하는 절대적 형벌이론에 근거한 응보형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1798년에 트레스터(wi1helmine Tr ster)와 결혼하여 위로 세 아들을 낳고 이어서 1804년 7월 28일 란쯔후르트에서 네 번째로 태어난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카톨릭 의식에 따라 바이에른의 시 교구에서 Jodocus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아버지 안젤름과 어머니 트레스터는, 비록 아버지가 정부와 지냈을지라도 다섯 아들을 낳은 후에도 딸 을 셋이나 더 두었다. 포이에르바하는 스스로 쓴 익명의 사전에서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1804년 7월 28일생. 형제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저술가로서 가장 활동적임.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할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분야에서 즉 훈장도 작위도 얻을 수 없는 분야에서 활동함. 그는 먼저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에어랑겐에서 몇 년간 강의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학문 외에는 단지 경건한 양(羊)의 사육만이 번창하고 있는 대학'이 자신에게 적합한 곳이 아님을 깨닫고 '독자적이고 조용한 생활에서만 성숙될 수 있는 사상을 잉태하고 있음을 느끼고' 안스바하 부근의 시골로 내려갔다. 그는 자신의 저술활동을 1830년 아직 체계를 갖추지도 않았고 저자의 이름도 없는 저술인 -그러나 위대한 천재성과 풍부한 표현으로 가득찬- 『죽음과 불멸성에 대한 고찰』(Gedanken  ber Tod und unsterblichkeit, 1830)로 시작했다. 그는 용암의 흐름과 같은 이 저술에서 젊음의 불꽃을 태우고 자신의 후기의 철학적 발전을 선취하여 풍자시의 형태로 대담하게 표현하고는 이를 더욱 전진시켜 나가는 대신 자신의 주관성을 순수하게 객관적인 요소 안에서 극복하고 또 형성하기 위해 철학사로 후퇴한다. 이렇게 자신의 본질을 억제하고 포기했던 시절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편견이 생기게 되었다. 그 편견이란 그가 이미 타인의 사상을 역사적으로 재생하고 발전시키는 사상가이기를 그치고 비판자의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헤겔 학파에 귀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의 시기는 『기독교의 본질』이후 종막을 내린다. 왜냐하면 이 저술에서 비판의 과제는 단순히 대상을 분석하여 모순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대상을 하나의 포괄적 원리로부터 발생적으로 산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출의 근거는 '자연이라는 근거 위에서의 인간'이다. 이시기를 우리는 이전의 역사적 시기나 비판적 시기와 구별하여 실증적 또는 생산적 시기라고 명명할 수 있는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의 세 번째 시기라고 한다. 포이에르바하의 의미 다시 말하여 그의 철학적 의미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이는 이미 그가 애초부터 역사와 경험 일반을 그의 사상의 초석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제2장. 기독교의 본질

제1절 서문
 
 1. 제1판의 서문

저자는 지금까지 여러 저작에서 종교와 기독교, 신학과 사변적인 종교철학에 관하여 자신의 사상을 잠언(箴言)이나 논쟁의 형식으로 다루었다. 이 책의 특징은 한정된 주제에 대한 원리를 포함한다. 그것은 적극종교(positiven Religion)의 철학 또는 계시의 철학을 위한 원리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화학(神話學)이 가지는 유치할 만큼 공상적인 의미에서의 종교철학 또는 사변철학을 위한 원리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 신화학은 이야기로서 전해지는 허황 된 이야기를 그럴싸한 사실로서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일찍이 스콜라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신앙개조(Articulus fidei)를 논리학적, 형이상학적 진리로서 논증한다.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철학을 위해 종교를 희생하며, 기독교적 신화학은 종교를 위해 철학을 희생한다. 사변적인 종교철학은 종교를 제멋대로 사변적인 장난감으로 삼으며, 기독교적인 신화학은 이성을 공상적인 종교적 유물론의 장난감으로 삼는다. 확실히 철학과 종교가 일반적으로 양자의 種差를 제외하면 동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사유하는 존재자와 신앙하는 존재자는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종교의 심상은 동시에 사상과 사실을 표현한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사이의 본질적 구별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책에서 종교의 형상은 사변적인 종교철학으로 고찰되지 않고 사실로서 고찰되지도 않으며 다만, 형상으로 고찰된다. 즉 신학은 기독교적 신화학에서 처럼 신비적 실용학으로서 취급되지 않고 사변적 종교철학에서처럼 본체론으로서 취급되지도 않으며 정신병리학으로으로 취급된다. 이 책의 목적은 정신적 수치료학(Pneumatishe Wasserheilkunde)을 촉진하고 자연적 이성이라는 冷水의 용법과 효용을 가르치며 고대 이오니아인의 단순한 수문학(hydrologie)을 사변적인 종교철학의 영역에서 부흥시키는 것이다.
탈레스(Thales, B.C. 640/24-546경)에 의하면, 물은 모든 사물 및 존재자의 근원이며 신들의 근원이기도 하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에 따르면. 만물이 탄생할 때에 특수한 존재자로서 물을 돕는 정신 또는 신은 명백히 훗날의 이교적인 유신론을 생각해낸 덤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물의 놀라운 치유능력이 있는 것이다. 수문학에서의 물은 단지 물질적인 생식수단이었지만, 포이에르바하의 물은 정신적 치료학으로서의 물이라는 것이다.

2. 제2판의 서문
나는 정신적인 자연과학자일뿐이다. 자연과학자는 물질적 수단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나는 정신적인 자연과학자로서 이 책을 썼다. 이 새로운 철학은 지금까지의 철학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원리로서 초인간적, 초자연적, 곧 반인간적, 반 자연적인 종교나 사변에 의해 부패하고 불구가 된 모든 인간에게 반항하는 철학이다. 단지 사유되었을 뿐인 추상적 존재자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자, 가장 실재적인 참된 실재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철학은 실재원리를 자신의 원리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철학은 사상을 그 반대물로부터, 곧 물질(Stoff)로부터, 실재(Wesen)로부터, 감각(Sinn)으로부터 산출하며, 자신의 대상을 사유에 의해 규정하기 전에 먼저 감각적으로 관계한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종교의 현존재를 폭로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설사 종교 또는 오히려 신학이 그것을 거부하려고 할지라도 인간을 숭배한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이다. 나만 "신이 인간이며 인간이 신이다"라고 외친 것이 아니라, 종교 그 자체도 그렇게 외친다. 인간이 아니라 단지 합리적인 존재일 뿐인 그러한 신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종교 자체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우선 신을 인간으로 만들고 그리고 다음 지금 비로소 인간적으로 형성되고, 느끼고, 생각하는 신을 자신의 숭배와 존경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신학의 모순에 가득 찬 거짓덩어리와 속임수 덩어리를 제거했을 뿐이다. 확실히 나의 저서는 부정적이며 파괴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비인간적인 본질에 대해서일 뿐, 종교의 인간학적인 본질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저서는 2부로 나누어진다. 그중 제1부는 요점에 관해서는 긍정적이며, 부록을 포함한 제2부는 종교를 종교의 모순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양 부분에서 동일한 것이 증명되고 있으며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제1부는 종교를 종교의 본질로 인도하고 제2부는 종교를 종교의 모순으로 인도한다. 제1부는 발전이고 제2부는 논박이다. 따라서 나는 제1부에서 신학의 진정한 의미는 인간학이라는 것, 신학의 본질(신적 존재)의 술어와 인간의 본질(인간 존재)의 술어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것, 따라서 신적인 주어(주체) 또는 본질(존재자)과 인간적인 주어(주체) 또는 본질(존재자) 사이에도 아무 구별이 없이 양자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정신의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도 무 또는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현실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종교에 대해서 행하는 작업은 오직 종교에 눈을 뜨게 하는 것, 안쪽에 향하여 있는 종교의 눈을 바깥쪽으로 돌려주는 것, 바꿔 말하면 표상 또는 상상 속의 대상을 현실 속의 대상으로 전화시키는 것만이 내가 종교에 대해 행하는 작업의 전부이다.

제2절 서론

 1. 인간의 본질

 종교는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점에 기초한다.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별짓는 것은 의식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은 자기의 유(Gattung), 자기의 본질성(wesenheit)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본질(존재자, 있는 것)에게 있을 뿐이다. 의식이 개체와 관계하며, 학문에서는 유와 관계한다. 그러한 오직 자신의 유, 자신의 본질성이 사고의 대상이 되는 본질만이 다른 사물 또는 다른 본질을 그들의 본질적인 본성에 따라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종교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종교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종교한 무한자(Unendlich, infinite)의 의식이다. 따라서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 즉 유한하고 제한되어 있는 본질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실제로 유한한 존재자는 무한한 존재자에 대해 극히 미미한 예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물론이다. 무한자에 관한 의식에서는 주체가 그 자신의 본질의 무한성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의식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성, 의지, 그리고 심성이 그것이다. 완전한 인간에게는 사유하는 힘, 의지하는 힘, 심정의 힘이 필요하다. 사유의 힘은 인식의 빛이고 의지의 힘은 성격의 에너지이며 심정의 힘은 사랑이다.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힘이란 완전성이고 최고의 힘이며 인간 그 자체의 절대적 본질이며 인간의 현존재의 목적이다. 인간은 인식하고 사랑하고 의욕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참된 존재자는 사유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는 존재자이다. 인간 안에 있고 개개의 인간 위에 있는 신적인 삼위일체란 이성과 사랑과 의지의 통일이다. 이성, 의지, 사랑 그리고 심정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며, 인간은 오직 그것들에 의해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인간에게 혼을 불어넣어 주고 인간을 규정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힘으로서, 그리고 신적이고 절대적인 힘이다. 인간은 그들 힘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대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대상에서 자기자신을 의식한다. 대상의 의식은 인간의 자기의식이다. 우리는 대상에 의해서 인간을 의식한다. 대상에서 인간의 본질이 나타난다. 이것은 정신을 물론이고 감성에서도 나타난다. 대상은 인간의 노출된 본질이며 인간의 진실하고 객관적인 자아이다.
의식이란 자기 확증이며 자기긍정이며 자기사랑이며 자기자신의 완전성에 대한 기쁨이다. 의식은 어떤 완전한 존재자를 특색 짓는 표징이다. 의식은 어떤 만족하고 완전한 존재자 속에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한자를 사유한다면,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고 또 확증하는 것이다. 또한 무한자를 느낀다면, 감정 능력의 무한성을 느끼고 또 확증하는 것이다. 이성의 대상이란 자기자신에게 대상적인 이성이며 감정의 대상이란 자기자신에게 대상적인 감정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초월적인 사변이나 종교의 견지에서는 단지 희생적인 것, 주관적인 것 또는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본질, 대상, 그 자체라는 것이다. 감정이 지각하는 신적 본질은 감정의 본질이 자기자신에게 황홀해지고 도취된 것, 즉 환희에 취해 자기 안에서 행복에 잠기는 감정이다. 이것은 감정이 무한자의 기관, 종교의 주관적 본질로 될 때에는 종교의 외적 표현들이 그 객관적인 가치를 잃는다는 것을 보아도 이미 명백해진다. 인간은 확실히 공상의 힘에 의해 자기보다 더 높은 다른 종류의 개인을 표상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자기의 유, 즉 자기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2. 종교의 본질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대상, 즉 감성적 인간을 포함하여 인간의 관계에 관해 주장한 것은 특히 종교적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적용된다. 감성적 대상에 대한 의식은 자기의식과 구별된다. 그런데 종교적 대상의 경우에는 의식은 자기의식과 직접적으로 일치한다. 종교적 대상은 인간 안에 있으며 그것 자체로서 내면적인 대상이다. 때문에 종교적 대상은 인간의 자기의식, 인간의 양심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끊을 라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종교, 적어도 기독교는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해 취하는 태도, 또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신적 본질이란 인간적인 본질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인간의 본질이 개개의 인간의 제한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화 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신적 본질이란 인간의 본질이 개인으로부터 구별되어 다른 독자적 본질로서 직관되고 숭배된 것이다. 그 때문에 신적 본질의 모든 규정은 인간 본질의 규정이다. 이것은 신의 술어, 즉 특성 또는 규정에 대한 관계에서는 실제로 주저 없이 인정되지만 주어, 즉 그들 술어의 기체(근본, 본질)에 대한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어를 부인하는 것은 무신앙, 무신론으로 간주되지만, 술어를 부인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신의 술어를 부인하는 방법도 있다. 사람들은 신적 본질의 술어가 유한한 인간적 규정임을 인정한다. 
인간은 자기가 진실한 것으로서 표상하는 것을 곧바로 현실적인 것으로서 표상 한다. 인간에게는 현실적인 것만이 진실한 것이며 상상된 것과는 대립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념, 즉 실존의 개념은 진리의 첫째가는 개념이며 근원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신이란 인간의 본질이 최고의 진리로서 직관된 것이다. 그러나 신 또는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 본질을 파악하여 최고의 본질로서 직관할 때의 규정성이 각양각색인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다양하다. 인간이 신을 사유할 때의 이러한 규정성은 인간에게는 진리성이며 동시에 최고의 실존 또는 실존자체이다. 따라서 신이 규정된 본질임과 같은 이유로 신은 실존하는 현실적 본질이다. 왜냐하면 신의 질 또는 규정성은 인간 자신의 본질적인 질 바로 그 자체이지만, 특정한 인간은 자기의 본성, 자기의 실존, 자기의 현실성을 오직 자기의 규정성 안에서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의 술어와 인간의 술어의 동일성을 망각하고 그와 함께 신적 존재자와 인간적 존재자의 동일함을 망각하기 위해 신은 무한한 존재자로서 무한히 풍부하고 다양한 술어들이라는 표상에 구원을 청한다. 그 술어들 가운데서 우리가 현세에서 인식하는 것은 약간 닮았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적인 존재자와 약간 다른 것은 그것 이외의 술어, 즉 피안에서의 일이다. 무한히 풍부한 신의 술어들의 비밀은 다양하고 무한하게 규정될 수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감성적인 존재자로서의 인간적인 존재자가 가지는 비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대상화하며 그런 다음에 다시 자기를 이와 같이 대상화되고 주체는 인격으로 전화된 본질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이 종교의 비밀이다. 여기서의 인간은 신의 대상이다. 따라서 믿음이 깊은 인간은 지가의 심성과 행위를 신의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을 신의 목적, 즉 정신에서 대상인 것은 행동에서는 목적이므로 신의 활동을 인간의 구원수단으로 삼은 것에 의해서 인간의 활동의 허무성을 다시 취소한다. 인간이 선해지고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따라서 인간은 신 안에서 그리고 신을 통해서 오로지 자기자신을 목적으로 한다. 분명히 인간은 신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영원한 도덕적 구원 이외의 어떤 것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 안에서 인간은 단지 인간자신의 활동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나는 종교의 발전과정을 일반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므로 종교의 발전과정은 인간이 점점 신을 거부하고 자기자신을 승인하는 일이 많아지다는 것 속에서 성립한다. 애초에 인간은 만물을 구별 없이 자기 외부에 두었다. 이것은 계시신앙에 나타난다. 이스라엘인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아직 극히 자연적인 충동도 적극적인 신적 명령으로 생각하였다. 이 예로부터 인간은 자기를 거부하면 할수록 신은 그만큼 저급해지고 또 그만큼 더 보통의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인간의 충동이나 격정을 그것의 특성이나 내용에 따라 구별지었다. 기독교는 오직 선한 격정, 선한 기질, 선한 사상만을 신의 계시, 신의 작용, 즉 신의 심성, 신의 격정, 신의 사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 자신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내면적인 도덕적 깨끗함을 외면적인 육체적인 깨끗함과 구별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는 양자를 동일시했다.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와는 반대로 비판과 자유의 종교이다. 이스라엘은 외면적인 것조차 자기의 의지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외면적인 것은 자율에 두었다. 즉 기독교는 이스라엘이 자기 외부에, 신 안에 두었던 것을 인간 안에 두었던 것이다. 이 적극주의의 가장 완결된 발로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인에게 기독교도는 교의를 믿지 않는 사람(Esprit fort, 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며 자유사상가이다. 사물은 이와 같이 변한다. 어제의 종교는 오늘은 이미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오늘 무신론으로 인정되는 것이 내일은 종교로 인정된다.


  (1) 제1부 종교의 진실한 본질, 즉 종교의 인간적인 본질
 
   1) 본질론
종교는 인간이 자기자신과 분열한 것이다. 즉 인간은 종교에서 신을 자기와 대립한 존재자로서 설정한다. 신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인간의 본성은 신이 아니다. 신은 무한자이고  인간은 유한자이다. 신은 영원하고 인간은 일시적이다. 신은 완전하고 인간은 불완전하다. 신과 인간은 양극이다. 신은 단적으로 긍정적인 것이자 모든 실체성의 총체이며, 인간은 단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자 모든 허무성의 총체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자신의 감추어진 본질을 대상화한다. 따라서 종교는 신과 인간의 대립·갈등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그 갈등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본질과의 갈등이다. 만일 종교의 대상인 신적 본질(존재자)이 실제로 인간의 본질 이외의 본질이었다면 분열이라든가 같등은 일어날 수 없었다. 분열은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하나이어야 하고 또 하나일 수 있는 본질사이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이 본질은 지성과 이성 또는 오성(Verstant, understanding)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인간의 대극(對極)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본질, 즉 인격적으로 인간적인 본질이 아니라면 오성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다. 신의 본질은 오성의 자기의식이며 오성이 자기자신의 완전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오성은 심장과는 달리 욕망이나 열정이나 욕구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결함이나 약점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순수한 오성인은 일면적이지만 특징적 규정성에서 오성의 본질을 상징화하고 인격화하는 인간이다. 이러한 순수한 오성인은 감정인이 갖는 고뇌나 열정이나 탐닉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오성은 본원적·원초적인 존재자이다. 오성은 만물을 제1원인인 신으로부터 끌어낸다, 오성은 오직 자기 안에서만 세계의 근거와 목적을 발견한다. 당신이 신 안에서 긍정하고 대상화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오성이다. 신이란 당신의 최고 개념인 오성이며 당신의 최고의 사유능력이다. 오성은 따라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 즉 옛날의 존재론적 신학(Ontotheologie)에서 말하는 어떤 것보다 더 실재적인 존재자이다. 또한 오성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자이며 절대적 주체이다. 오성의 통일성은 신의 통일성이다. 그 자체 절대적 통일성으로서의 자기자신(오성자신)을 의식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오성은 무한한 존재자이다. 따라서 오성은 통일성과 조정되며 유한성은 다수성과 함께 조정된다.
마지막으로 오성 또는 이성은 필연적인 존재자이다. 그것은 오직 이성의 실존만이 이성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성도 어떤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무이며, 존재는 비존재와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으로서의 신, 즉 오성의 무한한 본질, 일반적인 본질, 의인화하지 않은 본질이 종교에 대해 가지는 의의는 특수과학의 출발점인 일반적인 근본명제가 특수과학에 대해 가지는 의의 이상의 것은 아니다. 종교의 대상적인 본질이 인간과 다른 본질이라는 것은 그 본질의 본질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를 만족시키기를 바란다. 종교는 인간의 최고의 선이다. 그러나 오성의 본질을 표현할 뿐인 신이 어떻게 종교를 만족시킬 것인가? 신은 종교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종교는 신이 아니다. 오성은 단지 인간에 관해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본질인 자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기독교도는 오직 자기만을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오성은 보편적이고 범신론적인 본질이며 우주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특히 기독교는 전적으로 인신론(anthropotheistisch)적인 본질, 즉 인간의 자기자신에 대한 배타적인 사랑, 보다 정확히 말하면 주관적으로 인간적인 존재자의 배타적인 자기긍정이라는 것이다.
오성은 전적으로 율법의 엄격함에 따라 판단한다. 심정은 자신에 순응하며 공평, 관대하며 동정심이 많고 인간적이다. 율법은 인간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며 사랑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사랑은 율법과 심정,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매개한다. 사랑은 신 그 자체이며 사랑 이외에는 어떤 신도 없다. 사랑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고 신은 인간을 만든다. 사랑은 신과 인간의 참된 통일이며 정신과 자연의 참된 통일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신의 눈 속에서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깨끗하게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피만이 신을 자비롭게 만들고 신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즉 우리의 가 용서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추상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살과 피를 가진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의 의식을 통해서 신 또는 자기와 화해한다. 신의 사랑의 의식, 즉 신을 그 자체 인간적인 본질로서 직관하는 것은 신의 성육신, 육화 또는 인간화의 비밀이다. 성육신이란, 신의 인간적인 성질이 감정적인 사실로서 드러나는 것이고, 인간화된 신이란 단지 신격화된 인간의 현상에 불과하다. 신이 인간에게로 내려온다는 것은 반드시 인간이 신에게로 올라간다는 것이 선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즉 신성의 제1인격이 성육신 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안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제2인격이 성육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2인격은 종교의 진실하고 전체적인 제1인격이다. 성육신이 신비적이고 불가해하고 사변적으로 보이는 것은 성육신의 출발점인 이 매개개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학이 사변철학과 어떻게 다른가는 다음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즉 인간학은 신비적인 가상(假像)에 의해 속고있는 특수한 경탄할 만한 비밀로는 보지 않는 것이다. 인간학은 신의 인간화라는 교의들 사랑으로 환원한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 더욱이  신은 자기 안에 아들을 가지고 있다. 신은 아버지이다. 인간성의 모든 관계는 신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것은 신과 소원하지 않으며 미지의 것도 아니다. 성육신에서 종교는 자기자신에 대해 반성함에 있어서 신학으로서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즉 신은 철두철미하게 인간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고백 할 뿐이다. 인간은 종교에서 자기를 신적인 활동의 대상이나 신적인 목적으로서 직관한다.

2) 신 또는 종교의 비밀
인간화된 신, 즉 그리스도의 본질규정의 하나는 열정(Passion, 그리스도의 수난)이다. 사랑은 수난을 통해서 확실해 진다. 그리스도에 관련된 모든 사상과 감정은 수난이라는 개념에 집중한다. 사랑은 수난을 통해서 확실해 진다. 우선 그리스도에 관련되는 모든 사상과 감정은 수난이라는 개념에 집중된다. 신으로서의 신은 인간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그리스도로서의 신은 모든 인간적인 비참함의 총체이다.
고뇌(수난)는 기독교의 최고의 명령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 자체가 수난사이다. 이교도에게는 감성적인 쾌락의 환상이 신들에 대한 예배 안에 혼합되어 있다면 기독교도 당연한 것이지만, 고대의 기독교도에게는 혼이나 심정의 눈물과 한숨이 신에 대한 봉사에 필요한 것이다. 신의 가장 내적인 혼, 즉 기독교에서는 신에 대한 내면적인 본질로부터 나오는 영적인 예배에서 나타나는 신이 참된 신이지 궤변적인 신학의 신이 인간의 참된 신은 아니다.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이다. 우리가 오늘도 여전히 모든 교회 안에서 마주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초상은 우리에게 결코 구제자를 보여주지 않으며 단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수난자를 보여 줄 뿐이다. 신이 고뇌하는 것은 그러나 실은 신은 심정이다 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심정은 모든 고뇌의 원천이며 총체이다. 고뇌를 가지지 않은 존재자는 심정을 가지지 않은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수난의 신의 비밀은 감정의 비밀이다.
종교는 인간의 본질이 자기자신 안에 반성되고 반영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기자신이 마음에 들고 자기자신에게 기쁨을 느끼며 자기를 사랑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은 인간의 거울이다. 인간에 대해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 인간에 의해 완전한 것이나 우수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인간에게 신이다. 감정이나 고뇌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는 신은 느끼고 고뇌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에 만족을 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 오성과 의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자 또한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오직 전인을 자기 안에 포괄하는 존재자만이 전인을 만족시킬 수 있다. 인간이 자기의 전체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 삼위일체의 의식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오성의 일반적 본질, 즉 신으로서의 신을 하나의 특수한 본질, 하나의 특수한 본질, 하나의 특수한 능력으로 끌어내린다.
우리는 단지 신학에 의해 삼위일체의 복제, 형상, 비유로서 특색 지어지고 있는 것을 사물 그 자체, 본질, 원형, 원물로서 이해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수수께끼를 푼 셈이다.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구상화하여 알기 쉽게 하고자 사용한 공식적인 형상을 주로 정신(Geist, mens), 오성(Verstant, intellectus), 기억(Ged chtnis, memoria), 의지(Wille, voluntas), 사랑(Liebe, amor 또는 caritas)이었다. 신은 사유하고 사랑한다. 사유된 것, 인식된 것, 사랑 받는 것은 신 자신이다. 자기의식의 대상화는 우리가 삼위일체 안에서 마주치는 최초의 것이다. 신의 자기의식이란 절대적 본질성 또는 본질성으로서의 의식에 관한 의식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신 그 자체, 단순한 존재자로서의 신은 단적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고독한 존재자, 즉 절대적 고독과 독립성이다. 사람은 혼자서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것은 오직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랑할 때, 우리는 타자에게 의존한다. 사랑이란 자기와는 다른 존재자를 욕구하기 때문이다. 신적 존재자의 고독 속에 인격성에서는 신과 구별되지만, 본질에서는 신과 일치하는 존재자가 조정(措定)됨으로써 충족된다. 다시 말하여 아버지 신과 구별되는 아들 신이 조정됨으로써 만족된다. 아버지인 신은 나이며, 아들 신은 너이다. 나는 오성이고 너는 사랑이다. 그런데 오성을 동반하는 사랑 및 사랑을 동반하는 오성이 비로소 정신, 즉 성령이며 전인이다. 삼위일체에서의 제3인격은 두 개의 신적 인격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 이상의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제3인격이란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이며 연대성이 전혀 불합리하게 조정된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분석의 특수한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다. 다만 성령이란 주관적 측면으로 보아서 종교적 심성의 자기 표현, 종교적 감정의 표현, 종교적 영감의 표현이며 종교 안에서의 종교의 인격화, 대상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가족,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사랑의 유대를 보완하기 위해서 제3의 인격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여성적인 인격이 천국에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참으로 안성맞춤이다. 당초 마리아가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놓였던 것은 아버지가 마리아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모성적인 원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마리아는 오히려 삼위일체라는 관계를 나타내는 범주에 적합하다. 아들, 즉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아들은 그 자체에서 아버지의 남성적인 본질과 어머니의 여성적인 본질사이에 있는 중간본질이다.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서 가지는 사랑은 남성적인 본질이 여성적인 본질에 대해서 가지는 최초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의 아들을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과 결부되어 왔다. 신의 어머니에 대한 신앙이 쇠퇴하는 곳에서는 신의 아들과 아버지인 신에 대한 신앙 또한 쇠퇴한다. 아버지가 진리인 것은 오직 어머니가 진리일 때뿐이다. 사랑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여성적이다. 신의 사랑에 대한 신앙은 신적 존재자로서의 여성적 존재자에 대한 신앙이다.
프로테스탄트교는 신의 어머니를 한쪽으로 밀쳐버렸다. 그러나 냉대 받은 여성은 그 대신 프로테스탄트교에 가혹하게 보복했다. 프로테스탄트교가 신의 어머니를 향해 삼위일체 전체에 향해졌다. 일단 신의 어머니를 오성을 위해 제물로 바치는 사람은 어느새 다시 신의 아들의 신비를 의인적(인격적) 표현으로서의 제물로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적 존재자가 배제된다면 확실히 의인적 표현이 은폐된다. 삼위일체의 신은 카톨릭교의 신이다. 삼위일체의 신은 내용이 풍부한 신이다. 이 때문에 신은 실제생활의 내용이 사상(捨象)되는 곳에서 요구된다. 생활이 공허할수록 신은 그만큼 더 풍부해지고 더 구체적이 된다. 신은 결핍의 감정으로부터 발생한다. 인간이 상실한 것이야말로 신이다. 따라서 공허함이나 고독함과 같은 허전한 감정은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존재자의 사회나 교제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종교 속에서 차지하는 본질적인 의의는 항상 제2인격의 본질 안에 집중되어 있다.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 동질, 동일한 본질)와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 유질, 비슷한 본질)에 관한 격렬한 싸움은 비록 글자 한자의 차이에 불과 하였지만 공허한 싸움은 아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제2인격과 신의 동격성이었다. 교의학적 사변은 신의 형상인 신의 아들의 내적인 생성을 완전히 간과하면서 아들은 바로 신성의 형이상학적 관념으로부터 일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인격의 또 하나의 규정이며 형상의 본질과 관련된 것은 제2인격은 신의 말(Wort, Logos)이라는 규정이다. 말은 추상적인 형상, 상상 속의 사물이다. 또는 모든 사물이 항상 최후에는 사유력의 대상인 한, 말은 상상된 사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물의 말, 이름을 알면 사물 그 자체를 아는 것처럼 상상한다. 말은 구제하는 힘 행복하게 하는 힘, 해방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신의 말이란 종교의 내부에서 인간에게 대상이 되는 신성이며 말의 참된 본질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말의 참된 본질을 인간의 말과는 구별된 특수한 본질로서 표상 한다. 자기를 계시하고 발현하고 표현하는 신인 제2인격은 신 안에 있는 세계창조의 원리이다.
세계가 신은 아니다(기독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싹은 이미 도래하고 있었다). 세계는 신과는 별개의 것이며 신의 대립물이다. 이 표현은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신은 아들을 확실히 아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세계는 적어도 신과 구별된다. 세계 창조의 과정은 심리학적(정신논리학적, psychologisch) 과정의 신비적인 표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며 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신은 자기를 사유한다. 따라서 신은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을 사유한다. 따라서 자기를 의식한다. 신이란 자기의식이 대상이나 본질(존재자)로서 조정(措定)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를 사유함으로써 또한 자신과는 다른 것을 사유한다.
나는 너의 의식의 매개에 의해 세계의 의식을 획득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인간의 신이다. 인간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에 신세지고 있으며 타인이 없으면 물리적, 정신적인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추상적인 논리학적 범주에 의하면 신 안에 있는 세계창조의 원리는, 다른 것은 오직 차이성의 원리로부터 나올 수 있을 뿐이며 단순한 본질 자체로부터는 나올 수 없다. 기독교적 철학자나 신학자가 애써 무로부터의 창조를 변호하려 하지만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근본명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적인 오성을 모든 사물을 자체 안에 총괄하는 정신적 물질로서 현실적인 물질의 근거로 삼았다. 사물(Ding)은 존재(existiren)하기 전에도 존재(sein)하고 있었다. 그 사물은 감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세계는 오직 세계 그 자체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세계와 창조주로서의 신 사이의 구별은 단지 형식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본질적인 구별은 아니다. 따라서 신의 본질이란 세계의 본질이 추상화되고 분리되어 사유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신의 본질이란 세계의 본질이 현실화되고 구체화되고 감성적으로 직관된 것이다.
신 안에 있는 자연의 교리는 자연주의를 통해서 유신론, 특히 최고의 존재자를 인격적 존재자로서 고찰하는 유신론을 확립하고자 한다. 인격적 유신론은 신을 모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인적적 존재자로 생각한다. 신이란 신의 존재이다. 신이란 신 자신의 본질이다. 이 점에서 유신론은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인격성은 신의 추상적인 신이다. 그러나 신이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신의 개념 안에 들어 있다. 인간은 신의 인격성 안에서 자기자신의 인격성의 초자연성, 불사성, 독립성, 비제한성을 찬미한다. 인격신이 하나의 진리성, 유일한 진리성인 곳에서는 자연은 아무런 실재적인 의의를 가지지 않으며, 실재적인 근거를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본래의 무로부터의 창조가 단 하나의 설명 근거이다. 왜냐하면 무로부터의 창조는 자연은 무라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자연이 절대적 인격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의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오직 섭리나 기적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고 설명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섭리는 인간에 관계한다. 섭리는 인간을 위해 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능한 법칙의 효력을 폐기한다. 자연의 섭리에 경탄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종교적 자연주의일지라도 자연주의에 속한다. 종교적 섭리는 오직 기적 안에서만 계시된다. 섭리는 인간의 특권이다. 섭리는 다른 자연적인 존재자나 사물과는 다른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섭리는 인간을 세계의 연관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오직 특수한 섭리만이 종교적 의미에서의 섭리이다. 섭리에 대한 신앙은 자기자신의 가치에 대한 신앙이다. 섭리가 믿어지는 곳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은 섭리에 대한 신앙에 의존한다. 섭리가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신이 신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종교적 섭리에 대한 신앙은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신앙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자연과 구분한다. 자연과 인간의 구별이 인간의 신이다. 범신론과 인격신론의 구별은 다음의 질문으로 해소된다. 즉 인간의 본질은 세계의 밖에 있는 본질인가 아니면 세계의 안에 있는 본질인가, 초자연적인 본질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본질인가 하는 질문이다. 범신론은 인간을 자연과 동일시한다. 인격신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독립시키며, 인간을 부분에서 전체로 바꾸어 독립된 절대적 존재자로 만든다. 이것이 범신론과 인격신론의 구별이다. 따라서 세계의 창조자란 다음과 같은 인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세계는 창조된 것이며 의지의 산물, 다시 말하여 자기를 가지지 않는 실존, 위력이 없는 실존, 허무적인 실존이라는 증명 또는 의식에 의해서 자기자신의 중요성, 진리성, 무한성의 확실성을 자기에게 주는 인간이다. 따라서 세계는 무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무는 세계 자신의 무이다.
이상에서 말한 창조의 비밀을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직 다음의 것을 명심하라. 즉 창조에서는 결코 흙, 풀, 짐승, 물 -이것들에게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창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자나 영혼의 창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은 그 자체가 인격으로서의 인격성의 개념 또는 이념이며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자기 자신 안에 틀어박혀 있는 주관성이며 절대적 존재 및 본질로서 조정된 무욕구의 자기 충족태이며, 너를 가지지 않는 나이다.

   3) 소결
그리스도는 주관성의 전능이며 자연의 온갖 속박과 법칙으로부터 구출된 심정이며 세계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기 혼자에만 집중된 심정이며, 심정의 모든 소망의 심정이며, 공상의 승천이며, 심정의 부활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와 이교의 구별이 필요하다.
인간은 기독교에서 자기를 오직 자기자신에게로 집중시켰고 자기를 세계 전체의 연관으로부터 떼어놓았으며 자기를 자기자신에게 만족하는 전체로 만들고 세계의 밖에 있고 또 세계를 초월하는 절대적 본질로 만들었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를 세계에 속하는 존재자로 간주하지 않고 세계와의 연관을 중단하였다.
그러나 이교도는 단지 인간을 우주와 연관시켜 고찰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교도는 인간을 오직 타인과 연관시켜, 공동체와 결합해서 고찰했다. 이교도는 적어도 철학자로서는 개체(인간 또는 개인)를 유와 엄밀히 구별했고 부분으로서의 개체를 인류라는 전체와 구별했으며 그리고 부분을 전체에 종속시켰다. 이에 대해 기독교는 유를 방치하고 개체만을 안중에, 심중에 새겨두었다.
기독교는 이교에 대한 직접의 대립물이다. 기독교는 이교의 대립물로서 이해될 때에만 진실로 이해되고 독단적인 사변적 억지에 의해 불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립물이 허위인 한, 기독교는 진실하지만 기독교의 대립물이 진실인 한 기독교가 허위이다. 기독교는 개체를 위해 유를 희생시켰다. 이교는 개체를 유라는 전체와 구별해서 오로지 부분으로서 이해했으며 그에 반해 기독교는 개체를 유와 직접적이고 무차별한 통일성 안에서 이해하였다. 기독교에서 개체는 직접적인 섭리의 대상이다. 즉 신적 존재자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다. 이교도는 개인의 섭리를 유, 법칙 그리고 세계질서를 매개로 해서 믿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별적 존재자를 일반적 존재자와 동일시했다. 신은 하나의 개체로서 유라는 개념이다. 신은 유라는 개념 또는 본질이다. 더구나 신으로서의 "유의 본질"은 유로서 일반적 본질로서, 모든 완전성의 총체로서, 실제의 제한이든 가공의 제한이든 개별적인 본질이다. "신의 본질과 실존은 동일하다"는 것은 신은 하나의 실존, 개별적 본질이며 동시에 유개념(Gattungsbegriff)또는 유의 본질(Gattungswesen)말고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의 유와 개체성의 이러한 직접적인 통일성을 명확하게 상징하는 것은 기독교도의 실제의 신인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원상이며 인류의 실존하는 개념이며 신적인 완전성의 총체이며, 순수한 천상의 인간, 유적 인간이며 시조 아담(Adam Kadmon)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로서의 시조 아담은 하나의 인격으로서 직관된다. 그리스도, 즉 종교적인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간이 아니라 역사의 끝이다.
인간의 유로서의 개념 및 생활의 의미는 기독교가 지배함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거기서는 또한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며 신은 그 자체 이 목표가 달성된 것이며 인류의 이 최고 목적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신은 각 개인에게 따로따로 나타난다. 오직 신만이 기독교가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도는 반드시 타인이나 인류나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들의 자기 편집에 가까울 정도의 편협한 신앙적 배타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즉 기독교도에게는 타인에 대한 내적 욕구가 결여되어 있다.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과제는 이것으로써 수행되었다. 우리는 신이 세계의 밖에 가지고 있는 자기의 본질, 신의 초자연적인 본질, 신의 초인간적인 본질을 인간적 본질의 성분으로 환원시켰다. 인간적 본질의 성분은 신의 본질의 근본성분이다. 우리는 결론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인간은 종교의 시작이자 중간이며 끝이다.

   (2) 제2부 종교의 허위의 본질, 즉 종교의 신학적 본질

 1) 종교의 본질적 입장
종교의 본질적 입장은 실천적(praktisch)인 입장이다. 즉 여기서는 주관적인 입장이다. 종교의 목적은 인간의 복지, 구원, 행복이며,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관계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즉 신이란, 영원의 구원이 실현된 것 또는 인간의 구원과 행복을 실현하는 무제한적인 위력이다. 기독교만큼 강하게 인간의 구원을 강조한 종교도 없다. 기독교는 특히 이점에서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 이 때문에 기독교는 스스로를 신의 교리라고 부르지 않고 구원의 교리라고 부른다.
신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대상이지 철학의 대상이 아니며, 심정의 대상이지 이성의 대상이 아니며 심정의 필요의 대상이지 정신의 자유의 대상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신은 이론적 입장의 본질이 아니라 실천척 입장의 본질을 표현하는 대상이며 존재자 이다. 신과 인간사이에 세계라는 표상, 즉 제2원인이라는 표상이 끼어 드는 곳에는 일반적으로 종교는 폐기된다. 종교는 신과 인간사이에 있는 사물의 현존재에 관한 예감을 단순히 감성적 자연적인 직관으로부터 받을 뿐이다. 그리고 종교는 일반적으로 혼자서는 제2원인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제2원인의 존재는 종교에서 보면 오히려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게2원인은 인간을 신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의 본질로서 특색 지은 것을, 종교 자신이 확증하는 종교의 본질적인 작용은 기도이다. 기도는 전능하다. 경건한 사람이 기도할 때 간절히 바라는 것을 신은 충족시켜준다. 그는 자연의 위력을 다름 아닌 기도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기도할 때 경건한 사람은 자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의 초자연적인 수단을 택한다. 신은 그에게서 동떨어진 제1원인이 아니라 모든 자연적인 결과의 가장 가까운 동력인 이다.
기도의 직접 작용은 기적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본질적으로 종교의 사고방식 안에 포함되어 있다. 종교는 모든 것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설명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종교의 본질과 무관하며 단지 경험적인 또는 감성적인 사고방식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그러나 종교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기적이 시작된다. 참된 기도는 하나 하나가 기적이며 기적을 일으키는 힘의 작용이다. 종교적인 기적은 자연적인 기적과 절대로 다르다. 다만 사람들은  이성을 귀머거리로 만들거나 자연과학이라는 가상아래 종교적인 기적을 합리성과 현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기적과 자연적인 기적을 항상 혼동하는 것이다.

 2) 신의 본질
종교란 인간이 자기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에 종교의 진실성과 도덕적 치유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종교 안에서 자기자신의 본질로 관계하는 것 아니라 자기와는 대립된 다른 존재자로서의 자기의 본질에 대해서 관계한다. 여기에 종교의 비진실성, 종교의 한계, 이성이나 도덕과 종교의 모순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종교적 광신의 유해한 원천이 있으며 나아가 피비린내 나는 인간 희생의 최상의 형이상학적 원리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사라는 비극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잔학과 소름끼치는 장면의 시원적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하여 종교가 신학이 된다면, 인간과 신의 통일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종교의 근원에는 신과 인간사이의 질적인 구별 또는 본질적인 구별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고대 유대교에서 여호와는 실존 측면에서 보아 인간적인 개체와 구별된 본질에 불과했다. 그러나 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호와는 온전히 인간과 똑같았다. 후기 유대교에서 비로소 여호와는 인간으로부터 매우 날카롭게 분리되었으며 신인동감동정설(Anthropopathismus), 인간의 감정을 신에게 이입시키는 것에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비유 안으로 도피했다.
기독교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문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아직 나중처럼 그렇게 결정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특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는 아직도 하늘과 땅 사이, 신과 인간 사이를 떠돌아다니는 불명확한 존재였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천사 중에 첫 번째 천사였으며, 최초로 창조되기는 했지만 창조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은 천사나 인간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신과 동일시하고 그리스도를 신의 외아들로 만들고, 그리스도가 인간이나 천사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 피조물이 아닌 영원한 존재자라는 독점권을 주었던 것이다.
종교에 대한 반성, 즉 신학은 신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과 다른 본질로 만들고 그것을 인간의 외부로 끌어낸다. 이러한 방식 중에서 개념상 최초의 것은 정식의 증명 대상이 되는 신의 실존이다. 신의 현존재에 관한 증명은 내적인 것을 이적인 것으로 전화시켜 인간에게서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신은 실존을 통해서 사물 그 자체가 된다. 내가 신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나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의 필연적인 귀결의 하나가 무신론이다. 신의 실존은 경험적인 또는 감성적인 실존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주지하듯이 칸트는 신의 현존재에 관한 증명을 비판하면서 신의 현존재는 이성으로부터 증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칸트는 헤겔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칸트는 적절하다. 즉 개념에서 실존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성은 자신의 객체를 자신의 감관의 대상으로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경험론과 유물론이 성행한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의 경험적 실존이라는 개념이 완전하게 발달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신의 실존에 대한 신앙은 인간의 실존, 자연의 실존과 구별된 하나의 특수한 실존에 대한 신앙이다.
 신의 실존에는 계시의 개념이 연관되어 있다. 신의 실존의 자기증명, 신이 실존한다는 것의 진실한 증언은 계시이다. 신의 현존재에 관한 단순히 주관적 증명은 이성의 증명이며, 신의 현존재에 관한 객관적인 증명은 신의 계시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야기한다. 계시는 신의 말이다.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심성이 신앙하는 것, 소망하는 것, 표상 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에 관해서 종교적 심성이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확실성이다. 또한 계시에 대한 신앙은 종교적 의식에 특징적인 환상을 가장 분명하게 폭로한다.
그런데 신은 초인간적 존재자이다. 신은 오직 신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 진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 우리에게 계시한 것 이외에는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신이 계시하는 것은 신이 계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오는 것은, 단지 신 안에 있는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계시와 이른바 인간적 이성 또는 인간성 사이에는 환상적인 구별 이외의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신의 계시의 내용 또한 인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 가장 정확하게 확증된다.
기독교적인 궤변의 최상의 원리, 중심점은 신의 개념이다. 신은 인간적 본질(존재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인간적인 다른 본질의 이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격적, 개체적 본질이어야 한다. 또는 신은 인격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본질로서 신이어야 한다. 즉 신은 결코 인격적인 본질이어서는 안 된다. 신은 존재한다. 즉 신의 존재는 특수한 존재로서는 지각되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정의의 한쪽 절반은 다른 한쪽 절반과 언제나 모순된다. 존재(Ist)에서 주장되는 것은 당위(Soll)에서 항상 거부된다.근본개념은 단지 궤변에 의해서 숨겨져 있을 뿐인 모순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신은 결코 신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성은 신의 본질적인 술어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독립적으로 인간밖에, 인간 위에, 다른 존재자로 실존하지 않는 신은 환영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비인간성과 초인간성은 신성의 본질적인 술어가 된다. 종교의 성격은 인간의 본질을 다른 본질로서 직접적으로, 무심결에 무의식적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상적으로 직관된 본질이 반성의 객체, 신학의 객체가 되면, 그것은 허언과 기만과 배반과 모순과 궤변의 무궁무진한 보고가 된다.
신의 본질은 공상의 본질이 대상화된 것이다. 신은 감성적 본질이지만 감성의 제한으로부터 분리된, 즉 제한되지 않은 감성적 본질이다. 그러나 공상이란 무엇인가? 공상이란 제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감성, 제한되지 않은 감성이다. 신은 사랑이지만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며, 오성이지만 인간적인 오성이 아니다. 그렇다! 오성은 본질적으로 다른 오성이다. 오직 신적 오성을 인간적 오성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며, 오성이며 실제의 개념이다. 그런데 신적 오성을 인간의 오성과는 다른 오성으로 만드는 것은 객관적으로는 무이며 주관적으로는 단순한 상상이다. 그러나 신적 존재자의 다른 모든 규정에서 구별을 만들어내는 것은 숨겨진 무이다. 그에 반해 창조에서 구별을 만들어 내는 무는 공공연한 무이며 분명하게 언급된 무이며 대상적인 무이다. 그 때문에 창조에서 구별을 만들어내는 무는 인간학과는 구별된 신학이 가지고 있는 공공연하고 저명한 무이다.

 3) 사변적 신학비판
신의 인격성이란 인간이 자기자신이 본질의 규정과 표상을 다른 본질(존재자)의 규정과 표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사용하는 수단이다. 신의 인격성은 그 자체 인간의 인격성이 소외되고 대상화된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이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식을 신의 자기의식으로 여기고 있는 헤겔의 사변철학은 자기소외 과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신은 우리에 의해서 생각되고 인식된다.
사변철학에 따르면 신이 자기를 생각한다고 한다. 사변철학은 종교가 서로 분리시키는 양 측면을 결합시킨다. 사변철학은 이 점에서 종교보다도 더 심원하다. 신은 내적, 정신적인  존재자이며 사유나 의식은 내적, 정신적 작용이기에 신의 본성이 긍정되는 것이며 신의 본질이 작용으로서 확증된다는 것이다. 신은 우리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과는 별도로 자기자신을 사유한다. 신이 실제의 인격성으로서 표상 된다면, 그것은 확실히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실제의 인간적인 인격에 대한 나의 사유는 그 인격에게는 무관한 외적 사유이다. 이것은 종교적인 신인동감동정설의 극점을 이룬다.
신은 자기를 계시하기 위해서 창조한다. 즉 창조는 신의 계시이다. 신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만, 신은 인간 안에서 자기를 찬미한다. 즉 인간은 신의 긍지이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무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이 없으면 신은 무이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서 비로소 신은 신으로서 대상이 되고 인간 안에서 비로소 신은 신이 되기 때문이 다.
인간은 드러난 신이다. 신적 존재자는 인간 안에서 비로소 자기를 신적 존재자로 실현하고 확증한다. 인간은 신의 질에 인간적 감정으로서 분절을 붙이고 억양을 붙인 신의 입이다. 신이 존경과 찬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이 신에 대해서 품고 있는 감정이 바로 신의 자기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의식은 인격성이라는 표상을 사용하여 신과 인간을 독립적인 실존으로 만듦으로써 분리할 수 없는 양 측면을 다시 분리시킨다.
그런데 헤겔적 사변은 이 양 측면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낡은 모순이 근저에 남아있다. 그러므로 헤겔적 사변은 단지 종교적 진리의 철저한 수행이며 완결에 불과하다. 학식 있는 대중은 헤겔에 대한 증오로 눈이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헤겔의 교리가 적어도 이 점에서는 종교와 모순될 뿐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헤겔의 교리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신에 관한 인간의 의식이 신의 자기의식이라면 인간적 의식은 그 자체 이미 신적 의식이다. 신의 의식이 있는 곳에 신의 본질이 있다. 따라서 인간 안에 신의 본질이 있다. 신적 존재자의 규정이 인간적이면, 인간적 규정은 신적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로지 신적 존재자와 인간적 존재자의 참된 통일을 획득한다. 이 통일은 우리 안에서 만족한다.

 4) 모순의 변증법
그러나 종교 또는 신학은 단지 인간적인 또는 신적인 존재자의 일반을 인격적인 존재자로서 대상화할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또는 신적인 존재자 일반의 근본규정 또는 근본구별을 다시 인격으로서 표상 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근원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의 본질 안에서 지각하는 본질적인 근본구별의 총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삼위일체는 일신론과 다신론의 모순이며 공상과 이성의 모순이며, 공상과 현실의 모순이다. 신적 인격은 이성에서 보면 환각이며 상상에서 보면 본질이다. 삼위일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의 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것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거기에는 세 개의 인격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인격은 세 개지만 본질은 하나이다(Ters person , una essentia). 여기까지는 당연하다. 우리는 본질에서는 동일한 세 개의 인격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신 안에 있는 세 인격은 서로의 외부에 어떤 실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기독교에서의 신의 세 인격은 단지 표상되고 상상되고 꾸며진 인격에 지나지 않으며 확실히 실제의 인간과는 다른 인격이다.
기독교 신의 세 인격은 세 신이 아니라(tres Dii)이 아니라 하나의 신(unus Deus)이다. 세 개의 인격은 단지 동일한 것(Unum), 즉 같은 것(Eins)일 뿐만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신(Einer), 즉 하나의 것(unus)이다. 유일성이라든가 단일성은 여기서는 단지 본질이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실존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단일성은 신의 실존 형태이다. 셋은 하나이면 복수형을 단수형이다. 신은 세 개의 인격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인격적 존대이다. 따라서 세 개의 인격은 이성의 눈에는 단지 환상일 뿐이다.
종교의 객관적인 본질, 즉 신의 본질이 순수한 모순으로 해소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주관적인 본질 또한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근거에 의해서 순수한 모순으로 해소된다. 종교의 본질적 계기 중 주관적인 것은 한편으로는 믿음과 사랑이며, 다른 편으로는 종교가 제의를 통해 외면적으로 표현하는, 세례와 만찬의 성사(Sakramennt)이다. 믿음의 성사는 세례이고 사랑의 성사는 만찬이다. 세례의 자료는 물이다. 그것은 재생의 목욕이며 원죄의 부정으로부터 깨끗하게 하며,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따라 다니는 악마를 구축하고 인간을 신과 화해시킨다.
세례는 기적의 개념을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세례는 그 자체가 기적이다. 기적은 신앙을 담보로 한다. 그리스도라는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적이다. 신앙은 현실적인 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고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상상력의 위력이며 감관의 진리성이나, 이성의 진리성과 직접적으로 모순된다. 신앙은 이성이 긍정하는 것을 부인하고 이성이 부인하는 것을 긍정한다.
만찬의 비밀은 신앙의 비밀이다. 만찬의 비밀에 대한 신앙이 전정한 진리로 인류를 지배하는 한, 인간성의 지배적인 원리 또한 상상력이었다. 프로테스탄트의 만찬론을 믿느냐 카톨릭의 만찬론을 믿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전자에서는 누림을 행하는 바로 그 순간에 혀 위에서 비로소 살과 피가 안전히 지적적인 방법으로 빵과 포도주와 결합한다. 그러나 카톨릭에서는 누리기 전에 이미 신부의 위력에 의해서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전화된다. 전자의 만찬론과 후자의 만찬론의 구별은 단지 이것뿐이다. 일반적으로 만찬은 특정한 심정와 신앙을 수반하지 않는 만찬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무이다.

5) 결론
관념론과 유물론의 모순, 주관주위와 객관주의의 모순은 종교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구성한다. 그리고 성사는 이 모순을 감성화 한다. 그러나 성사는 신앙과 사랑이 없으면 무이다. 그러므로 성사의 모순은 우리를 신앙과 모순으로 인도한다.
종교의 숨은 본질은 신적 존재자와 인간적 존재자의 구별이다. 신은 인간적 존재자이다. 사랑은 인간을 신과 동일시하고, 신을 인간과 동일시하며 따라서 인간을 인간과 동일시한다. 신앙은 신을 인간과 분리시키고 그 결과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킨다. 신앙은 신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율법으로 삼는다. 신앙은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거짓이라는 식으로 구분한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한정된 신앙이다. 오직 이 한정성에서의 신만이 참된 신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진실하고 유일한 예언자이며 신의 외아들이다. 그리스도에게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반대하는 사람이며, 기독교적이지 않는 것은 반기독교적이다. 그러나 무엇이 기독교적인가? 신앙에서 보면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완고와 악의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적이다.
기독교는 비기독교적 민족의 신앙 안에서는 티끌도 찾아내지만, 자기자신의 신앙 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도의 이기주의, 허영, 자만에 불과하다. 기독교도와 다른 민족은 단지 종교적 신앙의 표현 양식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앙은 사랑의 반대물이다. 사랑은 죄 안에서도 덕을 인식하고 오류 안에서도 진리를 인식한다. 따라서 사랑은 단지 이성과 일치할 뿐,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성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보편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은 편협하고 제한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이 지배하는 곳에서만 보편적인 사랑이 지배한다.
기독교가 단지 신앙만을 율법으로 삼았다면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비난은 무조건적으로 진실하며 무제한적으로 진실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을 제멋대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기독교는 이 자유를 가지지 못했으며, 또 가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랑을 신앙의 지배에 복종시킨다. 사랑은 단지 기독교의 공교적(esoterisch)인 가르침에 불과하며, 신앙은 기독교의 비교적(exoterisch)인 가르침이다. 즉 사랑은 단지 기독교의 도덕에 불과하지만, 신앙은 기독교의 종교이다.
신은 사랑이다. 이 명제는 기독교의 최고의 명제이다. 그리나 신앙과 사랑의 모순은 이미 이 명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사랑은 단지 술어에 불과하며 신이 주어이다. 그러나 사랑과 구별되는 이 주어는 무엇인가? 신은 사랑이라는 명제에서 주어는 자신의 배후에 신앙을 숨기고 있는 어둠이며, 술어는 그 자체 어두운 주어를 비로소 밝게 하는 빛이다. 기독교적인 사랑은 그것이 기독교적이고 자기를 기독교적이라고 부름으로써 이미 하나의 특수한 사랑이다.
우리는 종교의 내용과 본질이 철두철미 인간적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며 신의 본질의 비밀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종교는 자신의 내용이 인간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종교는 오히려 자신의 내용이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관계다.

 

제3장 나가는 글

 제1절 비판

포이에르바하의 발전과정은 헤겔학파의 한 사람이 유물론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 발전과정은 일정단계에서 그가 헤겔의 관념론 체계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과정이다. 포이에르바하는 마침내 불가항력적으로 다음과 같이 깨닫게된다, 즉 헤겔의 절대이념의 선세계적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논리적 범주의 선존재란 초세계적인 창조자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 환상적인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우리자신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물질적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이며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그것이 아무리 초감각적으로 보일지라도 물질적·육체적인 기관인 두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질이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의 물질의 가장 높은 산물에 불과하다. 물론 이것은  순수한 유물론이다. 그가 사유하는 유물론의 한계는 여기까지이다.
포이에르바하가 진지하게 탐구한 유일한 종교는 일신론에 기초한 서방의 세계종교인 기독교이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란 단지 인간의 환상적 반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가 바라본 종교는 사람의 의존성에 관한 감정에 그 근거를 갖는 것이어서 무력감으로서의 의존성에 바탕하면서 공상의 세계에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종교는 가능과 소원의 모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수단과 주어진 목표를 망하는 것 사이의 모순, 현실과 상상, 존재와 의식사이의 모순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종교는 사랑이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 공상의 세계에서 자기의 소원을 만족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의 전 생애는 사실상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으로 마감하였다고 볼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마르크스 종교비판에서 뿐만 아니라, 프로이드(Sigmund Freud)에 있어서도 아버지이다. 종교를 인간의 소원의 투사물로 해석하고자 했던 그는, 본시 깊은 종교적 인간이었으나 헤겔과 낭만적 자연철학을 통해서 철학자가 되었으며 평생을 종교의 핵심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그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은 이중적이었다.
첫째, 역사적 발생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종교는 인류의 유아적 단계에서 생겨났다. 종교는 인류의 본질을 인간 자신의 밖에다, 즉 하나님 아버지 속에다 옮겨 놓았으나 급기야 인류는 그것을 자기자신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의 정상은 기독교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고난 당하고 신앙적 의식 속에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다.
둘째, 인간학적 관점에서 포착한다. 인간의 결함과 제한성, 그리고 위협과 개별화에서 나오는 의존의 감정에서 종교적 소원이 생긴다. 여기에서 인간의 소원과 유의 목표를 성취시키는 절대적 인격이신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생긴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체상 인간적인 본질임을 직관하게 된다. 그의 의미 구성은 완전히 실현된 신적 종류의 유(Gattung)의 목표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를 극단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이해하였다. 헤겔에 있어서의 인간이 하나님 속으로 지양되었다면, 그의 전도된 사유는 당연히 하나님이 인간의 본질로 지양되는 것이다. 그가 결코 종교적 현상에 대해서 폐쇄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현상 속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맺는 관계를 보지 못했다. 종교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자신의 자아와 관계한다. 인간은 곤궁의 상황에서 그러한 자아를 하늘에 투사하게 된다.
그가 종교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심리학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인간정신의 빈궁하고 비참하며 지친 상태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란 인간과 인간속성이 확대되어 투사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소위 투사이론을 그의 기본 논제로 설정하였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깊이 생각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하나의 소외된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자기소외가 된다. 그의 관심은 신을 현실적이고 인간적으로 만드는데 주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심의 대상은 신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하여 신의 존재는 한편으로 자연의 존재, 다른 편으로 인간의 존재를 표현할 뿐이라는 인식의 결과로서만 그는 신이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구분된 추상적 존재라고 한다. 본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의 자질로 낮추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이 방법을 다양한 기독교 교리의 모든 분야에 적용시킨다.사랑의 하나님, 삼위일체, 창조론, 섭리론, 예수의 신성과 성육신, 동정녀 탄생,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이 모든 것을 기본적인 인간상황으로 전락시켜버렸다. 간단히 말해서 종교적인 선언에 적용해 볼 때, 이와 같은 종교적 비판은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 1:27)라는 본문을 전도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은 인간학이 된다는 빌미를 기초하게 된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들을 차례로 단순한 인간학의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전체를 통하여 모든 역사적 진술을 회피한 것은 그가 그의 기독론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여 그의 비판이론은 초시간적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가정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는 처음부터 행동과 사건의 역사를 담고 있는 성서적 진술들을 종교철학에서와 같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전체로 바꾸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또 그의 반전과정(process of reversal)에 종속시켜버렸다. 행위동사의 문장들을 "is"의 문장들로 대치시킴으로서 초시간적 성격들을 부여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했다'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로 되고 이것이 다시 반전되어 '하나님은 인간의 형상이다'가 되고  있다. 이와 똑 같은 반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라는 본문은 문맥에 따라 파악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자주 잊혀지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느니라"(요일 4:10), 하나님의 사랑이 행동이 되었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는 행위와 역사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확립의 측면에 대해서는 결코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다.
헤겔이 기독교를 역사화 하여 극단적으로 갱신한 결과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종교비판이 일어났다. 헤겔 체계에서의 주관이던 하나님과 객관이던 인간을 전도시키면, 신학의 진술은 인간의 조작물과 허상이 되어버린다. 즉 양자택일의 문제를 동전의 앞과 뒷면에 따라서 신학이냐 인간학이냐 아니면, 사회철학이냐 하는 문제로 비화된 것이 오늘의 종교비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헤겔의 사변적 신학은 통상적인 신학을 철학적으로 확장시킨 것이고, 통상적인 신화의 감추어진 의미를 명확히 밝혀주는 것이다. 헤겔 철학은 인간의 자기신격화 현상으로서의 종교와, 이것에 기인하는 자기소외 현상에 대한 진리를 보여준다. 포이에르바하의 기독교 해석은 헤겔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소위 소외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지금까지 주로 종교적 생활을 영위해 왔으며 종교의 본질 또는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의 자기자신으로부터의 소외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소외화 된 정신에 대한 헤겔적인 형이상학에 은밀하게 나타나는 실제의 심리학적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를 신이라고 종교적으로 의식하는 데 따르는 인간의 자기소외라고 말한다. 그에 있어서 헤겔철학은 변증법에 의하여 잘 다듬어진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었다. 자기소외 된 신(self-alinated God)에 대한 헤겔의 묘사는 합리적 신비주의이며 상실된 기독교를 부흥시키는 최후의 웅대한 시도였다. 이로부터 "헤겔의 철학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은 신학을 거부하지 않는다" 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일련의 헤겔 사유가 그의 급진적 제자들에 의하여 비판의 희생물 되었다.
본서『기독교의 본질』에서 제시된 포이에르바하의 종교철학의 공식은 철저히 '주어'와 '술어'를 바꾸는 것이었다. 헤겔철학의 신의 자기소외, 또는 절대정신의 자기소외는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기소외로 반전된다. 또한 신이 인간을 통해 완전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는, 인간이 신을 통해 완전한 자기의식에 도달하는 과정으로서 의 역사가 된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역사적 구별이 부족했다는 점은 그의 비판에 관한 한, 그는 모든 종교와 종교철학들을 똑같이 다루었다는 점에서 볼 때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분명히 처음으로 그의 종교비판의 방법을 종교철학의 비판으로, 또한 분명히 쉘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학파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개념을 절대적 인격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방법을 전혀 다른 주제, 즉 기독교의 기원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적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종교철학의 일종으로 보고 기독교의 역사적 기반과 내용을 무시하였다.
마르크스로 하여금 포이에르바하의 방법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제공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질문들의 회피였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해서 제기했던 문제들을 기독교인들에게 질문한다. 협동을 유발하기보다는 이론과 사색에 그치고 마는 종교가 가치가 있는가? 지배계층의 도구로 이용되는 이념적인 앞잡이이며 착취를 위한 위장이며 압제받는 자들의 눈을 가리워버리는 먼지 떼이고  비참한 민중을 마취시키는 아편인 종교가 과연 가치가 있는가? 라는 반론에 블로흐(Ernst Bloch)는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면 파시즘은 그 '스트리키닌'이라고 다시 반론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마르크스가 진정한 유물론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해석에 따르면 역사에서 자기자신을 실현하는 존재는 인류(hmman species, Gattung)이며, 신으로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최초의 인간행위는 현재의 종교비판에 이르기까지 줄곧 전개되는, 종교 속에서의 인간소외라는 단계를 이룬다고 한다. 그는 헤겔적 역사철학의 인간학적 변형에 있어서는 단지 그 윤곽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의 체계적인 헤겔의 해석방법은 마르크스에게 전해졌고, 마르크스는 자신의 철학적 구조를 포이에르바하의 사상에서 구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가 그의 종교의 본질 또는 신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혼동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신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헤겔식의 종교를, 종교 일반의 원형으로서의 기독교의 의미를 파악하는 열쇠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가『기독교의 본질』에서 다루고 있는 현상은 인간 체험의 현실이지 기독교 또는 종교로 묘사될 성질이 아니었다. 즉 포이에르바하의 인간은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는 환상적 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한,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으로 남게된다. 그에 있어서 인간의 자기신격화는 인간소외의 원인인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적인 존재로 실현하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2절 평가

계몽사상의 등장 이후 기독교 사상은 독일관념론의 영향아래 윤리적 종교적 요소만을 간직한 채 합리적 또는 자유주의적으로 혹은 역사주의적으로 또는 실존주의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9세기에 이르러 기독교의 본질을 윤리적 측면에서만 인정하고자 하는 신학과 반대로 기독교를 윤리와 합리로부터 해방시켜 오직 종교적 본질로부터만 이해하고자 하는 신학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모두 종교를 현대의 세속화 과정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나 긍정하고자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역사적, 사회적 관점의 토대 위에서 발생되면, 오히려 종교가 해체되고 나아가서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종교비판이 발전되었다. 이들의 대표는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그리고 니체를 들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종교를 윤리화함으로써 기독교적 진리의 질을 모색하였다. 그는 계몽주의의 3대 이념인 하나님, 자유, 영혼불멸에 대하여 이론이성의 영역에서는 증명할 수 없고 논박할 수 없는 이율배반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그 이념을 회복시켰다. 사람이 이론적, 경험적으로 증명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공리적으로 타당한 세 가지 원리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선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한 행위는 동기와 의도에 있어서  낯선 환경적 목적으로 말미암아 규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주관 자체로부터 나와서 최종목적인 최고선(summum bonum)을 향할 때 나타난다. 최고선을 향할 때 도덕법을 성취하고 주관적 충동이 사회전체의 보편성에 접근할 때 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전래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윤리학의 한계 안에서 해석하였다. 그는 초월의 경험을  철저하게 기독교적, 종교적 유산의 한계 안에서 세울 수 있었다. 종교는 선한 원리의 효율성의 운반수단이다. 칸트가 심지어 종교와 윤리를 동일시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그의 종교관은 정적인 요소로 감수하면서도 행동하는 윤리의 실체로 보았다.
헤겔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으로 말미암은 규정된 현대의 세속화한 상황 속에서 종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성서의 역사 속에서 종교의 본질을 사회철학 및 역사철학의 분석에다 전용하였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유일한 인간, 예수 안에서 자기소외화 되고 다시 성령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어 풍족해진다. 현대적 주관이 노동과 성과 법 그리고 소유와 헌법을 통해서 자기소외화 되었다가 가정, 신분, 사법, 국가 등 제도 속에서 그것이 화해된다. 이러한 현대인은 종교를 통해서 새롭게 역사적, 문화적 연관성 속에 들어간다. 헤겔은 종교 안에서 종교를 통하여 현대의 운명을 감내할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성교회를 별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가 주장하는 자기실현의 공동체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진리의 사변적 권유를 추구하는 자들을 의미하였다. 헤겔의 사유를 전혀 몰랐던 Kant나 Schleiermacher에서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즉 신학이냐, 인간학이냐 또는 사회철학이냐 하는 문제가 오늘날까지 꼬리를 물고 종교비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포이에르바하가 등장한다. 신학의 신비를 인간학으로 전도시킨 그의 관심사는, 종교를 인간의 소원의 투사물로 관조하고, "종교는 환상이요,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명제를 도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종교는 인류의 본질을 인간 자신 밖에다가, 즉 하나님 아버지 속에다가 옮겨 놓았으나, 급기야 인류는 그것을 자기자신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종교는 구원과 사랑 등에 대한 인류의 갈망을 초자연적으로 채워주었으나, 인류는 드디어 그것을 자연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종교의 정상은 기독교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고난 당하고 신앙적 의식 속에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한다. 개체 속에서 유의 목표가 직관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이에르바하가 기독교를 비판한 첫 번째 목표이다. 다음으로 비판한 것이 인간학적 관점에서 관조한 종교의 본질이다. 결함과 제한성과 위험과 개별화와 종교적 소원이 생긴다고 하였다. 즉 인간의 소원과 유의 목표를 성취시키는 절대적 인격이신 하나님이라는 관념이 생긴다. 그의 기독론은 쉽게 전개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자체상 인간적인 본질임을 직관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누구든지 남을 위하여 고난 당하는 자는 신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 있다. 기도는 나의 고난과 곤궁에 하나님이 참여한다는 뜻이며, 신앙은 의식화되고 의욕 된 본질적인 삶의 목적이고, 천재의 눈길이라고 한다. 삼위일체는 나와 당신의 관계와 사귐의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구성은 완전히 실현된 신적 종류의 인간성이라는 유의 목표이다.
포이에르바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를 극단적으로 인간으로부터 이해하였고 이러한 일치의 명제 위에 오직 인간학적 의미만을 부여하였다. 종교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자신의 자아와 관계한다. 인간은 곤궁한 상황에서 그러한 자아를 하늘에 투사(projection)한다. 즉 종교는 인류의 유아적인 미성숙한 의식의 잔재일 뿐이다. 이것을 의식하는 성숙한 인류는 전에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던 곳에서 단지 무한한 자연, 즉 인간적인 유를 볼뿐이라고 한다.
칼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을 더욱 극단화하여 종교를 허위의식으로 규정하였다. 포이에르바하에 있어서 종교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 속에 해소되었으나, 이제 마르크스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 속에 내재하는 추상적인 실재가 아니라 사회적 제 관계의 총화라는 것이 그의 비판의 요지이다. 종교는 자본을 축적하고 잉여가치를 취득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부루주아 사회의 부차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회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종교는 사회적 관계의 변혁을 통해서만이 사라지고 사멸하며 무용지물이 된다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종교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관계를 설명하는 수단으로서의 종교 현상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철학적 종교비판의 완성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에게서 이루어진다. 니체에 있어서 종교는 타락의 총화였다. 즉 종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기 창조적 자유 대신에 단지 도덕적으로 대치하여 해결을 도모하는 타락의 총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언제나 이미 자기 자신을 강력하게 관철시키는 주인들에 대항하여 애초부터 희망 없는 헛된 반항을 하는 노예의 반란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자기의 구성적 약점을 견디어 낼 수 없어서 주님 한 분을  추구하였으며, 그 주님에게 노예로서 자신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강한 점, 즉 초인에의 충동을 인정하는 데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인간은 기독교와 함께 그 기독교에 적합한 노예도덕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노예도덕은 인간의 병적인 현상을 두둔해서 참된 삶을 억누른다는 것이다. 참된 삶에 대항하는 이 노예의 반란이 바로 종교라고 하였다. 니체는 결국 '하나님의 죽음' 또는 '하나님을 죽인 인간'을 말하는데 이것은 초인에의 충동을 인정하는 참된 삶을  실현시키고자 종교와 종교 신앙의 대상을 부정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제3절 후기

19세기 이후 근대철학의 연대기에서 차지하는 포이에르바하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를 관념론자로 부르지도 아니하고 신학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감각론자들(sensationists), 실증주의자들(positivsits), 심지어 유물론자(materialists)의 대열에 올려놓고 있다. 동시대인들이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정열을 가지고 그는 신학을 해체(displace)시키기 위한 목표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근대의 신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포이에르바하 만큼 정확히 신학의 문제에 몰두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모든 저술들은 엄격히 말해서 한 가지 주제, 즉 종교와 신학, 그리고 이것들과 연관된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현대 신학의 거장 바르트(Karl Barth)가 바르게 지적한대로 그의 저서에 나타난 신학적 이해력은 대부분의 근대 철학자들보다 뛰어난 것이다. 또한 그 시대의 어떠한 철학자도 당시의 신학적 상황을 포이에르바하만큼 충분히 꿰뚫어보지 못했으며, 자기의 신분은 물론 아버지의 신분마저 박탈시켜 가면서 그의 일관된 학문적 열정을 쏟아 낸 사람은 없었다. 반신학자인 포이에르바하 신학에 대한 자세는 많은 신학자들 보다 더욱 신학적이었다.
현대의 신학은 포이에르바하와 유사하게 비종교적 상호 인격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 또한 형이상학을 함축하는 전통적 종교와 신학에서 인간의 실체가 상실됨을 보고 있다. 신과 인간간의 수직관계를 비난하고 인간과 공동인간간의 수평적 교제의 지평을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경우 신은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있다. 현대의 인간학적, 대화적 신학은 바로 인의 상호 인격적 나와 너의 간계에서 신의 계시를 말하며, 나와 너의 관계에서 사회적 간계의 성취에 대한 은총, 또는 관계의 좌절이나 오해에 대한 형벌을 인식한다. 그리하여 "신은 죽었다"라는 슬로건에서 모든 초월적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신학은 자기 쇄신과 인간의 해방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피안에 대한 포이에르바하의 인간학적 파괴에 관해 당대의 신학적·철학적 비판이 없지 않지만, 19세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종교비판과 형이상학 비판이 끼친 광범하고도 심대한 사상사적·문화적 영향은 감소되지 않고 있다. 본서의 영역판 머리말에 실린 리차드 니버(H. Richard Niebuhr)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이 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종교사상에 있어서 포이에르바하와 바르트는 대립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시의 선차성(先次性)과 주권을 모든 기독교적 성찰의 출발점으로 보는 바르트의 관심은, 기독교의 본질을 인간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서 찾고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술을 인간에 대한 진술로 바꾸어놓은 인간주의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런데도 바르트는 포이에르바하와 동시대의 정통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그를 단죄하지 않고 그의 의도에 찬사를 보이는 듯이 보이는가?
그 대답은 인간을 영혼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슴과 위를 가진 존재로 보는 포이에르바하의 인간이해와 함께 철학자로서의 열정과 함께 진지함, 정직성에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의 책을 불태우는 신앙은 그것이 정통주의에 대한 신앙이든, 아니면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이든, 아니면 바르트가 말하는 어떤 다른 실체에 대한 신앙이든 그것 자체가 불신앙의 고백이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를 신학의 구극적 핵심으로 인도한다. 바르트가 신학연구자들에게 포이에르바하를 추천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 상태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신학은 그것이 하나님의 의식으로부터 출발하든, 신성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출발하든, 인간의 주관적 상태에서 출발하는 모든 신학의 결과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데 있다. 이와 같은 연구의 결과 나타나는 신학적 견해들은 포이에르바하의 견해와 의미가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가 인간학적(anthropological) 견해일 수밖에 없다. 바르트와 포이에르바하 간의 근본적 일치점과 상이점은 우리를 현대인의 종교생활의 중심적 쟁점으로 이끌어 낸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치한다. 즉 종교를 믿는 것은 인간을 믿는 것이고,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은 인간이 자기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이며, 기독교를 믿는 것 자체는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간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포이에르바하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냐 비존재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황제의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을 인간에게 돌려주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하여 인간을 한없이 믿는데 반해, 바르트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19세기와 20세기의 차이점이다.
에수님은 우리에게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이 말씀은 "빵도 필요하지만, 그러나"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기독교 인간학이 가지는 가장 구체적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현실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반성하여야 한다. 자고 초라한 교회가 문제가 아니다. 소위 잘 나간다는 대형교회, 부와 권세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바로 그 교회가 문제다. 신문지상에 소개되는 교회의 갖가지 문제를 이 글에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교인들이 성서는 들고 다니지만, 얼마나 하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지, 아니면 한국의 재래 토속신앙의 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구원의 정복(淨福)과 기복(祈福)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마귀들의 역사가 한 판 굿을 치는 지도 모르면서 눈만 뜨면 수 천억의 대형교회가 숲을 이루도록 지어가면서 세 불림에만 혈안이 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착실하게 가르쳐서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이 성서의 빛에 따라 꾸준히 형성된에 따라 교회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연예인을 동원하여 부흥회를 연다든가, 열광적인 산기도 등을 통하여 성도들의 감정을 뜨겁게 하여 열심을 내게함으로써 교회부흥을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최면술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빈곤 때문에 빵의 현실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목회자의 형편없는 자질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 빛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150년 전에 이러한 갖가지 종교와 신앙의 모순을 뿌리깊게 파헤치면서 오직 인간을 위한 인간의 종교를 구가하고자 하였던 포이에르바하를 우리는 이쯤에서 다시 한번 오늘의 교회현상과 비견해 볼 수 있는 기회로 맞이하고자 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장 24절).     

                                             2000년 7월 26일 

* 참고문헌
 국내

김광식 편저.『기독교신학개론』,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4.
______ 편저. 『기독교 사상』, 서울: 종로서적, 1984.
김균진,『헤겔과 바르트』,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송기득.『신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6.
정문길.『에피고넨의 시대-청년헤겔파와 칼 마르크스』,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7.
조석만.『현대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1979.
편집부 편. "포이에르바하, 기독교의 본질,"『기독교명저 60선』, 서울: 종로서적, 1985.
황선명.『종교학개론』, 서울: 종로서적, 1982.

외국

Aqinas, Thomas. Summa Theolgica.
Bentley, James.  Between Marx and Christ, 김쾌상 옮김,『기독교와 마르크시즘』, 서울:          일월서각, 1986.
Berkhof, L, 고영민 역,『벌콥 조직신학-제2권, 신론』,서울: 기독교문사, 1978.
Bockrnuehl, K1aus. The Callenge of Marxism -A Christian Response, 이종윤 편역, 『마          르크스주의의 도전과 크리스챤의 응전』, 서울: 도서출판엠마오, 1983.
Engels, Friedrich. Ludiwig Feuerbach und Ausgung der klassischendeutshen Philosophie,          김기연 옮김, 『포이어바흐론』, 서울: 도서출판 새날, 1990.
Feuerbach, Ludwich Andreas. Das Wesen Des Christentum(1903), Georg Eliot. Edit, The          Essens of Christianity(1957), 김쾌상 역,『기독교의 본질』, 서울: 도서출판 까치,           1992.
Hick, John H. Philosophy of Religion, 황필호 역,『종교철학개론』.서울: 종로서적, 1980.
Ladd, George Eldon. 이남종 역,『신약의 중심사상』, 서울: 새순출판사, 1987.  
Kant, Immanuel, 윤성범 역,『순수이성비판』, 서울: 을유문화사, 1983.
Neve, J.L.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Ⅰ. 서남동 역,『기독교교리사』.서울: 대한          기독교서회, 1965.
Range, Erhard. 신민우 역,『헤겔과 현대』, 서울: 도서출판 풀빛, 1985.
Sass, Hans Martin. Ludwich Feuerbach, 정문길 역,『포이에르바하』,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6.
Straus, David Friedrich. Das leven Jesu, kritisch bearbeitet, 1835.
Tucker, Robert. Philosophy and Myth in Karl Marx, 김학준·한명화 역,『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신화』, 서울: 한길사, 1982.

 

** 필자와 이 논문에 대하여

   이 논문은 필자가 1998. 10.13 밤에 그리스도 신학대학원 제4차 학기의 신론 세미나에서 동 대학원 이오갑 교수(조직신학)의 지도를 받으면서 "유물론과 신"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글을 다시 금년 봄부터 약간씩 손질한 것이다. 또한 이 글은 필자가 법학석사학위를 취득한 인천대학교의  법학논문집(인천법학 제13집)에도 수록하였다.
   이 글을 집필한 동기는 필자가 법학수업을 하는 동안 "사회적 법치주의에 있어서의 정의"를 연구하였는데, 유물론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근대 관념론적 유물론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지는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를 연구하던 차에 그의 유물론적 신학사상에 빠져들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그 날 발표가 끝나고 질문 시간에 나를 유물론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확신하느냐"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필자를 그리스도 신학대학원이라는 선지동산으로 불러 주셨고, 급기야 유물론적 신학사상에 쐐기를 박는 일에 종으로 쓰시고자 이 글을 쓰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종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경험을 사도 바울의 다메색의 회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필자는 신학석사학위를 취득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는 일에 기도하고 있으며, 주님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에 바치고자 준비하고 있다.
  
   이 글의 구성은 제1장에서 저자(포이에르바하)의 사상과 생애, 작품의 성격, 그리고 본서가 나오게 된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였고, 제2장에서는 본서를 요약하면서 부언설명을 필자의 주석으로 곁들이고 또한 저자의 주석을 실었다. 끝으로 제3장은 본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 저서가 갖는 학문적 위치와 역사성을 평가하고, 나아가서 오늘날 조국강단의 현실을 150년 전 포이에르바하가 왜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하였는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반성하였다.
   본 논문의 장절과 항목을 설정하는 데는 상당한 고심을 하였다. 왜냐하면 논문의 형식상 전체적인 구성을 통일적으로 서술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논문의 제2장에 본서의 방대한 500여 쪽을 진술하여야 하고, 나아가서 저자의 의도를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제2장의 편별은 구조적으로 어지러운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神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Feuerbach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비판적 고찰  (0) 2018.06.22
사도 바울의 율법과 복음  (0) 2018.06.18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0) 2018.05.20
판넨베르크 자료실  (0) 2018.04.29
헤겔의 신학론집   (0) 2018.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