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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음악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by 이덕휴-dhleepaul 2023. 1. 12.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나무위키

생전에 완성되어 상연까지 된 오페라는 초기에 작곡된 '코'와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 두 작품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미완성 작품이거나 개작이다. 집시들 (1919~20) - 14세에 씌어진 습작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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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Дмитрий Шостакович
Dmitri Shostakovich
 
본명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
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
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출생
사망
1975년 8월 9일 (향년 68세)
직업
작곡가
자녀
막심 쇼스타코비치
종교

1. 개요2. 생애
2.1. 가족 및 사생활
3. 창작 성향4. 평가
4.1. 대한민국에서의 평가
5. 주요 작품들
5.1. 교향곡5.2. 관현악5.3. 협주곡5.4. 실내악5.5. 피아노5.6. 성악곡 및 합창곡5.7. 오페라5.8. 오페레타5.9. 발레5.10. 극음악 및 영화음악5.11. 편곡
6. 수상 경력/주요 직위7. 기타

1. 개요[편집]

소련 작곡가  피아니스트.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현대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20세기 음악사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0대 시절부터 조숙한 음악성을 확립하여, 음악인생 내내 특유의 번득이는 신랄함과 풍자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작곡하였다.

20세기에 태어난 음악가임에도 불구하고 서방과 전혀 다른 음악환경을 가진 공산주의 국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조성의 해체와 아방가르드가 대세였던 서유럽의 음악사조와는 상당히 다른 음악세계를 구축하였고, 그가 창작한 작품들은 당시의 정치상황과 개인사와 맞물려서 죽은지 4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수많은 해석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논란과 별도로 그의 음악은 다른 현대작곡가들의 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들이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들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연주되고 음반으로 발매되고 있다.

베토벤 이후 교향곡 대작곡가들에게 일종의 굴레와도 같았던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깬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그가 작곡한 15곡의 교향곡은 현재까지 교향곡 분야의 최후의 '대작'(=마스터피스(masterpiece)) 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8살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폴란드계 이민자 3세로 태어났다.[2] 여덟 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내 피아니스트가 되어도 좋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10대 때부터는 작곡도 시도했는데, 제대로 완성한 것은 드물지만 1905년의 혁명이나 기타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소재를 취하는 등 음악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미 이 때부터 본인의 음악적 재능을 인지하고 꽤 야심을 품었던 듯하다.

레닌이 주도한 공산주의 혁명 직후인 1919년에 고향인 페트로그라드(개명된 지명) 음악원에 피아노와 작곡 전공으로 입학했고, 각각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와 막시밀리안 슈테인베르크를 사사했다. 재학 중 여러 편의 피아노곡과 실내악을 써서 직접 초연할 정도로 뛰어난 소양을 보였으며, 원장인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도 그를 각별히 챙겨주었다고 한다.
13살(1919)경에 작곡된 스케르초 F#단조 op.1[3]
그러나 혁명기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면서 상당히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4] 이는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던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같은 선배 세대 작곡가들과 다른 점이었다. 글라주노프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더라면 음악원 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5] 어린 쇼스타코비치는 영화에 맞춰 피아노를 연주하는 극장 아르바이트 등으로 가족을 부양하였고, 그 와중에 틈틈이 자신의 졸업작품이 될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교향곡 제 1번은 1925년에 완성되었고, 이는 러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10대 작곡가가 쓴 교향곡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6] 작품성에 있어서도 완성도와 독창성이 상당히 뛰어나서 페트로그라드에서 초연된 뒤 몇 년 사이에 서방 국가들에서도 널리 연주될 정도였고, 프로코피예프 베르크 등 당대의 작곡가들도 주목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첫 성공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27년에 촬영된 21세의 쇼스타코비치.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꿈도 버리지 않았는데, 1927년에 제1회 쇼팽 콩쿠르에 참가했으나 명예상을 타는 데에 그쳤다.[7] 쇼스타코비치는 전문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에는 흥미를 접었지만 피아노 연주는 계속했으며, 주로 자작곡 연주에 매진해 녹음도 여럿 남겼다.[8]

1920년대 후반에는 꽤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작곡가로 평가받았고[9], 혁명과 노동절을 기념하는 단악장의 합창 붙은 교향곡 두 곡(2번과 3번)이나 니콜라이 고골의 풍자 소설을 각색한 오페라 '코' 등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형식주의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것이 훗날 큰 재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34년에는 두 번째 오페라인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음악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된다. 오페라는 초연 당시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해외에도 연주되었으나, 어느 날 소련 최고의 권위를 지닌 신문인 소련 공산당 당간지 프라우다에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당의 비판 기사가 올라왔다. 비판이 아니라 협박에 가깝게까지 들리는 이 비평은 작성자가 표시되지 않았는데, 이 경우 공산당의 공식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오페라를 관람하던 스탈린이 공연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사건 이후 나온 기사였기에, 스탈린이 직접 썼거나 적어도 깊게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있었다.

며칠 후에는 그의 발레 '맑은 시내'에 대한 혹독한 비판문이 게재되었고, 이로써 쇼스타코비치가 어찌됐든 높으신 분들에게 찍혔다는 것이 확실시되었다.[10] 당시는 스탈린 대숙청이 벌어지던 시기로, 일반인은 물론 유력 정치인에서 저명한 문화계 인사까지 가리지 않고 별다른 이유없이 잡혀가 죽임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당장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친지들이나 후원자들[11]이 비밀경찰에게 잡혀가고 있었고, 주위의 사람들이 쇼스타코비치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패닉에 빠진 쇼스타코비치는 결국 자신이 쓴 파격적인 구성의 교향곡 제4번의 초연을 포기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든 자신이 변화하였다는 음악적 응답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사활을 걸고 교향곡 제 5번을 작곡한다. 이는 작곡가 본인의 고난을 표현하는 듯하면서도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암시하는 팡파르로 귀결되는 베토벤적인 구성의 대작이었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처지에 동정적이었던 사람들은 물론 당국자들까지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이루어진 초연은 갈채가 40분 이상 이어진 대성공이었으며, 당국은 쇼스타코비치가 비판 끝에 '어느 정도 변화하였음'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압박하지 않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첫 정치적 위기에서 목숨을 부지하였고, 모교인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도 임용되었다. 이후에는 현악 4중주 등의 전통적인 실내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방공감시원과 의용소방대로 복무하던 당시의 사진.[12]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러시아 본토에 전쟁의 영향이 거의 미치지 않았으나, 1941년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쇼스타코비치가 거주하던 레닌그라드도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초기에는 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위의 소방헬멧을 쓰고 있던 사진이 그때다. 소련군으로 징집되는 대신 방공감시원과 의용소방대로 활동할 적이다. 이때 교향곡 제7번을 작곡하였지만, 결국 10월에 포위망이 잠시 뚫릴 때 쿠이비셰프[13]로 피신했고, 거기서 교향곡 제7번을 초연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포위된 도시의 시민들이 겪은 지옥 같은 고난을 생각해보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14] 아무튼 이 곡은 당국에 의해 '레닌그라드'라는 제목이 붙었고, 소련 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에서도 수없이 방송되어 승리를 기원하는 음악의 상징이 되었다.

전황이 호전되자 1943년에 다시 거주지를 모스크바로 옮겼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 재직하면서 7번보다는 좀 더 비극적이고 거친 교향곡 제8번을 비롯해 전쟁의 경험을 다룬 작품들을 계속 창작했다. 그러나 1945년에 소련이 승전한 뒤 발표한 교향곡 제 9번은 베토벤의 같은 번호 작품을 기대한 이들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고, 이내 스탈린의 심복이자 소련 문화계의 거두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비판(일명 "즈다노프쉬나")에서 비판 첫머리에 오름으로써 두 번째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15]

이 때는 쇼스타코비치만이 아니라 그의 선후배와 동료들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가브릴 포포프 같은 작곡가들까지 연루되어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았고[16],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교수직도 내놓고 전쟁을 소재로 한 선전 영화의 음악을 붙이거나 '숲의 노래' 같은 정권 영합형 작품의 작곡에 주력하면서 후폭풍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발표를 미루면서 몰래 실내악이나 교향곡 등도 창작하고 있었고, 1953년에 스탈린이 죽은 직후 교향곡 제10번을 발표하면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깼다. 혹자는 "저승사자가 쇼스타코비치를 잡아가야 하는데 스탈린을 잡느라 못 잡아갔다"고도 한다.[17][18]

프로코피예프가 공교롭게도 스탈린과 같은 날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1953년 이후로 쇼스타코비치는 사실상 소련 음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 위상이 확고하게 굳어졌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오래지 않아서 이미 문화적으로 '해빙'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연주금지와 비판은 점점 해제되었고, 이 때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프랑스나 미국 등 서방 세계에 연주 여행을 다니고,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는데, 입당이 자의였는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강제 입당이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한 상태다.[19] 입당 전후에 쓴 교향곡 두 곡(11번과 12번)도 1905년과 1917년의 혁명에 대한 부제를 붙였기에,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정권의 어용 작곡가가 되었다'는 비판이 서구에서도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악 4중주 제8번 같이 분명한 공포와 고통을 표현한 내면적인 작품도 만들었고, 소련 내에서는 공공연한 만행이었지만 공식 언급이 금기시되었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교향곡 제13번 '바비 야르'를 작곡하는 등 반골 정신을 드러내기도 했다.[20] 이렇게 논쟁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는 와중에 쇼스타코비치는 점차 쇠약해졌고, 특히 오른손에 마비 증상이 오면서 피아노 연주와 악보 작성 등이 어려워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1966년에는 심장마비를 겪으며 생명의 위기를 넘겼다.

건강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그의 작품도 점점 더 어두워지고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는데, 말기의 교향곡인 14번은 죽음을 주제로 쓰여진 시를 가사로 하고 청년 시절에 도입했던 서구의 현대음악 기법을 응용하는 등 체제 도전적인 면모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작품으로 논란을 빚었다. 1970년대에는 폐렴에 심근경색까지 발병했고, 결국 1975년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비올라 소나타를 마지막으로 완성하고 4일 뒤 세상을 떠났다. 많은 인사들의 추모 속에 유해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장례식. 아람 하차투리안이 고인의 손에 입맞추고 있다.

2.1. 가족 및 사생활[편집]

쇼스타코비치는 일생동안 세 번 결혼했는데, 1932년에 맞이한 첫 아내 니나 바르자르는 1935년에 잠시 이혼까지 갈 뻔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21] 하지만 니나의 임신을 안 이후 정신차리고 부부관계를 가다듬어 좋은 관계를 회복했고, 1936년과 1938년에 각각 딸 갈리나와 아들 막심이 태어나 대숙청이라는 험난한 시기에 위로가 되었다. 막심은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과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고, 지금도 현역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니나는 1954년에 방사능 노출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쇼스타코비치는 굉장한 슬픔에 빠졌지만 이내 제자인 우스트볼스카야[22]에게 청혼하였다. 자식들에게도 우스트볼스카야와의 재혼에 대해서 의견을 묻기도 한 모양이나, 우스트볼스카야는 스승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2년 후 쇼스타코비치는 콤소몰의 운동가였던 마르가리타 카이노바와 1956년에 두 번째로 결혼했는데, 성격 차이와 쇼스타코비치의 자녀들과의 트러블 등으로 인해 겨우 3년 만에 이혼했다. 1962년에 이리나 수핀스카야와 마지막으로 결혼했고, 이 결혼은 성공적이었다. 음악출판사에서 일하던 이리나는 나이가 자식뻘만큼 차이가 났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편집과 초연 준비 등 음악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주었고, 쇼스타코비치 사후에도 생전의 반려자로서 중요한 증언들을 남겼다.

지인들로는 화가 보리스 쿠스토디에프, 음악학자 이반 솔레르틴스키, 작가 미하일 조셴코, 극작가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 소련군 원수 미하일 투하쳅스키, 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등이 중요하게 언급된다. 그러나 메이에르홀드와 투하쳅스키는 대숙청 기간 동안 목숨을 잃었고[23], 조셴코도 특유의 풍자적인 시 때문에 스탈린에게 찍혀 작품 활동을 금지당해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주변인들의 이러한 불행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중에서도 가장 죽이 잘 맞았던 벗은 이반 솔레르틴스키였는데[24],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급사하였고 쇼스타코비치는 그를 추모하여 피아노 3중주 제 2번을 작곡하였다. 솔레르틴스키의 유대 혈통을 의식해서인지,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에 유대의 선율을 인용하였다. 실제로 쇼스타코비치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대 성향은 그의 일생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났으며, "유대 민족시에서"(1948) 등 유대인 선율에 대한 의식적인 인용 등으로 나타난다. 다만 말년의 교향곡 제13번 등에서의 유대인 학살 폭로는 당국이 보기에도 오버스럽게 여겨졌고, 결국 쇼스타코비치의 운신의 폭을 좁히게 되기도 한다.

축구를 관람하는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지인들. 우측 아래가 쇼스타코비치다.
열혈 축구 팬으로서 축구 심판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팬이었다고 한다.# 구단측에서 그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한 행사를 열기도 하였으니 확실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 인간적으로는 전형적인 '러시아인' 그 자체였다고 하는데, 음식도 뻴메니(러시아식 만두)나 블린늬(러시아식 팬케이크)같이 소박한 것을 즐겨먹었고, 좋아하던 술도 보드카였다. 우리 식으로 치면 대작곡가라는 사람이 자장면이나 부침개 같은 소박한 음식을 즐겨먹었던 거다. 하지만 술과 담배를 평생동안 즐긴 탓에, 이것이 건강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시간 감각이 정확하다 못해 앞질러나가는 스타일이었고, 주변인들이 이를 맞춰주느라 진땀을 뺐다는 일화도 있었다.[25]

그리고 자신이 공격당할 '꺼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사소한 대화 때도 뭔가 확실히 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지인은 '아니오'라고 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자신이 음악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올랐던 중년 이후에는 젊은 작곡가들이나 예술인들이 부당하게 당이나 정부로부터 공격받을 때 구명을 위해 힘쓰기도 했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나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경우 오히려 종교적인 입장이나 과거 행적을 이유로 변호는 커녕 강하게 비판하는 등 다소 모순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26]

3. 창작 성향[편집]

생애 내내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에서 활동한 작곡가였기 때문에 당대 서방음악의 주류였던 무조음악이나 아방가르드 성향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27] 젊은 시절에는 나름 급진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이후에도 종종 아방가르드의 수법을 도입하거나 무조/음렬의 경향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의 음악은 조성의 기반 위에 있으며 대위법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선배 작곡가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베토벤에게는 소재를 긴축시켜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작곡법이나 '투쟁과 승리'의 도식을, 무소륵스키에게서는 러시아 민속음악의 요소를 예술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말러에게서는 다채로운 관현악법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스트라빈스키로부터는 음의 중첩과 불협화음을 통해 역동적인 음향을 구현하는 법 등을 배운 것으로 여겨진다.[28] 15년 선배인 프로코피예프의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개인적으로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높이 인정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선배들의 음악을 평면적으로 답습한 보수 성향의 작곡가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결코 20세기를 대표하는 대작곡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음악은 조성에 기초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유의 화성체계와 잦은 조바꿈 때문에 조성이 상당히 모호하게 느껴진다. 또한 주제를 강하게 비틀고 왜곡에 가깝게 과장하는 수법, 소음에 가까운 불협화음의 도입, 대위법이나 선법의 변칙적인 응용 등등의 특유의 작법을 통해 이전의 음악과는 확실하게 구별되는 쇼스타코비치만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어느 시기 할 것 없이 쇼스타코비치 음악에서는 공통적으로 톡 쏘는 듯한 신랄함과 예상을 깨는 아이러니함이 느껴지는데, 강약이나 속도의 극명한 대비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선율이나 리듬을 과감하게 병치시키는 등의 파격적인 수법을 통해 돌발성과 긴장감을 강화시키고 있는 덕분이다. 이와 같은 신랄함과 아이러니는 서방 세계의 악습이나 구태를 풍자하는 '선전용 작품' 뿐 아니라 교향곡이나 실내악 같은 절대음악 계통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다. 이것을 작품 끝까지 유지시키느냐, 아니면 진지하게 분위기를 바꾸느냐, 또 에너지를 실어가며 폭력적인 방향으로 변형시키느냐에 따라 음악의 분위기가 크게 바뀐다.

한편으로는 군악대의 행진곡이나 서커스 음악 등에서 나타나는 통속적인 요소가 삽입되어 약간 '깨는' 느낌도 주는데, 혁명의 혼란기에 소년 시절을 보낸 작곡가로서 군악에 대한 인상이 꽤 깊었던 모양이다. 또 서커스 음악풍 요소도 작품에 밝은 색채 혹은 긴장감을 더하는데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 발레 같은 무용음악에서 이런 식의 작곡 스타일이 잘 드러난다. 한편으로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유럽을 휩쓸 때에도 과감하게 유태인들의 민속 음악을 자기 작품에 도입했으며 작품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왔던 초기와 후기에 주로 국한되지만 미국에서 건너온 블루스/재즈의 어법도 작품에 도입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다른 현대 작곡가의 음악에 비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대중들에게 좀더 친숙하고 인기가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어떤 음악 어떤 사조를 도입하건 날 것 그대로가 아니라 본인의 스타일에 맞게 상당히 해체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행진곡/서커스 음악이건 서구의 '이국적인' 작곡 기법이건 르네상스 시기의 코랄이건 일단 쇼스타코비치의 손에 들어가면 특유의 신랄함이나 아이러니가 더해져서 성격이 일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탈린 말년에 가면서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네 개의 음도 쇼스타코비치 애호가들의 눈길을 끄는 요소인데, 레-미b-도-시로 이루어진 이 음들은 자신을 상징하는 이니셜이기 때문이다.[29] 교향곡 제10번을 시작으로 하여,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첼로 협주곡, 현악 4중주 제8번 등 내면적인 작품들에서 종종 눈에 띈다.

그는 현대 작곡가 중에서는 상당한 다작을 한 편에 속한다. 방대한 작품 수 만큼이나 그의 음악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그가 세상을 떠난지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논란은 지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4. 평가[편집]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타급 작곡가였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대중적 인지도 측면에서는 시벨리우스와 투톱을 이룰 정도였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때 그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높아졌는데, 그의 교향곡 제7번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라디오로 들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쇤베르크, 힌데미트, 바르톡 등 구미에서 활동하던 작곡가들의 질투를 한 몸으로 받았고, 소련에서도 그 압도적인 인기 때문에 견제를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서구와의 교류와 정보가 제한된 소련에서 활동하던 작곡가였으므로 신비주의적인 아우라가 형성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너무 이른 나이에 권력에 의해 진보적인 작풍이 꺾여버렸으므로, 음악적 혁신을 중시하는 음악사적 관점에서의 평가는 다소 미묘하다. 기본적으로 그가 뛰어난 재능과 음악성을 지닌 작곡가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30] 비록 소시적의 파격과 실험정신을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법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 성향의 답보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에 국가가 개인의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예술활동에 각종 간섭을 했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의 음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충분히 뛰어넘는 음악성을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그의 음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정치에 엮여서 제대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는 단순히 시대의 희생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권 친화적인 음악을 창작한 어용 성향의 작곡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1]

즉, '음악과 정치'의 연계를 주장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작곡가이다. 공산 체제의 어용 음악가에서부터 '내부 반항자'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정말 천차만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여기에 작품에 나타나는 특유의 수수께끼같은 요소나 생전의 각종 행적들이 논쟁을 더 격화시키고 있다.

솔로몬 볼코프(Solomon Volkov)라는 음악학자가 쇼스타코비치 사후 그와 나눈 대담을 정리했다면서 서방에 '증언'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이 그에 대한 논쟁을 한층 격화시켰다. '증언'만 보면 쇼스타코비치의 사고방식은 거의 반체제 인사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는데, 거기에 쇼스타코비치를 공격한 인사들에 대한 냉소나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더해져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쇼스타코비치의 사적인 대화록 등을 자신의 입맛에 맞춰 편집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비판에 볼코프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은 것도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미망인인 이리나는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를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라면서 책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데이비드 패닝 같은 음악학자들은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여러 글과 '증언'의 내용을 대조하면서 볼코프의 작업을 비판하는 논문을 내놓았다. 반면 쇼스타코비치와 친한 사이였던 플로라 리트비노바는 쇼스타코비치가 "젊은 레닌그라드 출신의 음악학자와 자주 만나면서 내가 나와 내 작품에 대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그는 그것을 받아 적고 그 다음 내가 그것을 검토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볼코프는 레닌그라드 출신임.) 쇼스타코비치의 아들 막심도 아버지가 볼코프와 만나 함께 작업하였으며 자신은 '증언'과 볼코프를 지지한다고 소련 붕괴 이후 인정했다. 실제로 책을 보면 쇼스타코비치는 책의 내용에 의해 자신에게 불이익이 갈 까봐 자신의 사후에 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실제로 출판은 쇼스타코비치의 사후에 이루어진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증언'의 내용에 비판적이라고 알려졌던 쇼스타코비치의 지인들은 직접 비판을 가한 적은 없고, 사망 이후 자식들이 그렇게 증언했을 뿐이다.

실제로 '증언'의 진위 여부는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기는 하나, 특히 소련 붕괴 이후 쇼스타코비치의 지인들은 그 내용이 대체로 진실임을 인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첼리스트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지휘자인 키릴 콘드라신,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피아니스트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인 막심 쇼스타코비치(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 활동중)와 딸 갈리나가 이전까지는 볼코프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다가 소련이 붕괴하고 나자 입장을 바꿔 지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내용을 무시할 수 없음은 확실하다.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체로 쇼스타코비치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인정되고 있으며 특히 위서 운운하는 것은 모함에 가깝다. 게다가 '증언'이 위서임을 주장하는 쪽은, 쇼스타코비치를 어떻게든 투철한 공산주의자의 이미지로서 남기고자 했던 붕괴 이전의 소련이었다.

1999년에는 솔로몬 볼코프 자신이 '증언'에 대한 의문에 답을 하기 위해 뉴욕 Mannes College에서 기자 회견까지 열었지만 그를 비판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http://www.siue.edu/~aho/musov/man/mannes1.html 참조. 실제로 볼코프를 비롯한 지지자들에 의해 '증언'에 대한 비판은 모두 반박되었으나, 쇼스타코비치를 잘 알던 지인들은 대부분 사망한데다 볼코프 본인은 원본 러시아어 원고를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보여주고 공개할 생각을 하질 않으니 논란이 더 이상 진행되기 힘들어 보인다. 심지어는 쇼스타코비치 본인이 자신의 사후 이러한 이미지를 갖기를 원해서 자신이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말하는 사람[32]까지 나올 지경이니 갈 데까지 간 셈이다.

'증언'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으로 첫 번째는, '증언'에 등장하는 일부 문장은 이전에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던 것과 일치하며 따라서 '증언'은 이것들은 짜깁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로는 핀란드어 번역자인 Seppo Heikinheimo가 무단 유출한 러시아어본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서명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무단 공개된 러시아어판은 원본이 아닌 편집본이고 원본은 공개된 적이 없다.)

물론 '증언'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 대한 이전까지의 해석이 크게 바뀌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의 진위 여부가 음악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만한 일은 아니다. '증언'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Testimony_(book) 참조.

소련 붕괴 후인 1990년대 후반부터는 절충적인 의견을 내놓는 이들이 많은데, 쇼스타코비치는 레닌 등 초기 혁명가들에 대한 경외심을 계속 유지했지만 스탈린이나 후속 집권자들의 독선과 폭력에는 거부감을 느끼고 작품에 우회적인 비판과 풍자를 더했다는 식이다. 네 곡의 혁명 소재 교향곡(2, 3, 11, 12번)은 1905년부터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 때까지를 그린 표제음악 스타일이고, 사회주의 지식인으로서 쇼스타코비치의 모습을 드러낸 곡이라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쇼스타코비치를 '관제 작곡가'나 '체제 비판자' 같은 정치적인 문제와 얽기보다는 음악 자체만 놓고 평가해 보자는 '순음악' 계열의 움직임도 있다.[33] 이런 움직임은 서방이나 일부 망명 음악가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볼코프의 '증언'이 진서로 취급받던 1970~80년대에는 쇼스타코비치 음악에서 '선전성'을 걷어내고 냉정한 시각을 견지하는 해석이 나타났다는 점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해외에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문화, 예술규제가 완화되면서, 이 때부터 서서히 국내 공연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등 '우방국'이나 일본보다도 훨씬 뒤늦은 해금이었고, 다루는 레퍼토리의 폭이나 연주 수준에 관해서는 아직 개선하고 보완해야 할 점이 많기도 하다.

4.1. 대한민국에서의 평가[편집]

한국 역시 냉전을 직접 겪은 나라였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 역시 다른 동구권 작곡가들과 함께 작품 전체가 금지곡으로 지정된 흑역사가 있었다. 당연히 음반 수입도 막혀서 해외에서 몰래 들여오는 LP를 숨어서 듣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1970년대 후반에 뉴욕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한 레너드 번스타인이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향곡 5번을 연주하여 이슈가 되기도 했다.

한국이 민주화되고 소련이 붕괴되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도 자연스럽게 해금됐으며 현재에는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등과 함께 현대음악 작곡가 중에 가장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다. 다만 연주회에서 그의 음악이 레퍼토리로 올라오는 빈도는 아직 높지 않은 편이며 현재까지도 국내에서 초연되지 않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꽤 많다.

5. 주요 작품들[편집]

5.1. 교향곡[편집]

 
교향곡 5번 d단조

5.2. 관현악[편집]

 
축전 서곡 A장조
  • 오리지널곡
    • Op.1 스케르초 F샤프 단조 (1919)
    • Op.3 주제와 변주곡 (1921~22)
    • Op.7 스케르초 E플랫 장조 (1923~24)
    • Op.23 드뢰셀의 오페라 '콜롬버스'를 위한 2개의 소품 (1929)
    • 서곡 '녹색회사' (1931)
    • Op.42 소관현악을 위한 5개의 단편 (1935)
    • 근엄행진곡 (1942)
    • 오케스트라를 위한 3개의 소품 (1947~48)
    • Op.111b 노볼로시스크 시(市)의 음악 시계의 음악 (1960)
    • Op.115 러시아와 기르기스 민요 서곡 (1963)
    • Op.130 슬픔과 승리의 전주곡 (1967)
    • Op.131 교향시 '10월 혁명' (1967)[34]
    • Op.139 소비에트 민경(民警) 행진곡 (1970)
  • 합창을 포함한 곡
    • 교향시 '카를 마르크스로부터 우리들의 날까지' (1932)
    • 8개의 영국 • 미국 민요 (1944)
    • Op.74 칸타타 ‘조국의 노래’ (1947)
    • Op.79a 유대민족시 (1948)
    • Op.81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1949)
    • Op.90 칸타타 '나의 조국에 태양은 빛나고' (1952)
    • Op.119 서사시 '스테반 라진의 처형' (1964)
  • 모음곡
    • Op.15a 모음곡 '코' (1927~28) - 오페라 '코' 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 Op.22a 모음곡 '황금시대' (1929~30) - 발레 '황금시대' 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 Op.27a 모음곡 '볼트' (1931) - 발레 '볼트' 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 Op.30a 모음곡 '황금언덕' (1931) - 영화음악 '황금언덕' 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 Op.32a 모음곡 '햄릿' (1932) - 극음악 '햄릿' 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제2번 (1938)
    • Op.80a 모음곡 ‘에르베 강에서의 만남’ (1948)
    • Op.99a 모음곡 '제1제단 (제1군용열차)' (1956) - 영화음악 '제1제단 (제1군용열차)'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 Op.64a 모음곡 ‘조야’ (1944) - 영화음악 ‘조야’ 에서 발췌한 곡들이다.
      • 흔히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제2번'으로 불리지만, 잘못된 표기다. 진짜 2번 모음곡은 2차대전 중 악보가 행방불명이었다가 1999년에 피아노 악보로 발견되었고, 영국 작곡가 제럴드 맥버니가 관현악 편곡했다. 여러 영화들에 삽입되어 유명한 왈츠 II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5.3. 협주곡[편집]

 
피아노 협주곡 2번 F장조
 
첼로 협주곡 1번 E플랫장조
  • Op.35 피아노 협주곡 1번 C단조 (1933)[35]
  • Op.77 바이올린 협주곡 1번 a단조 (1947~48)
  • Op.102 피아노 협주곡 2번 F장조 (1957)[36]
  • Op.107 첼로 협주곡 1번 E플랫장조 (1959)
  • Op.126 첼로 협주곡 2번 g단조 (1966)
  • Op.129 바이올린 협주곡 2번 c샤프단조 (1967)

5.4. 실내악[편집]

 
비올라 소나타 C장조
 
현악 4중주 8번 c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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