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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나는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 시절의 사환이었습니다
2018-08-1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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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법원의 음산한 이야기가 시중을 떠돌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이 오손도손 아기자기 할 때도 있었다. 그것도 무려 반세기 전인 60년대였다. 몇 해 전 70대 여성의 자서전을 써 준 일이 있는데 그녀는 60년대 야간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5년간 대법원의 사환(관청이나 회사,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으로 근무했었다. 사법부가 시끄러운 지금, 그녀의 이야기를 통하여 당시의 대법원은 어땠었는지 시간 여행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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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나이 어린 사환으로 대법원에 근무할 때 대법원장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에서 가장 존경 받는 가인 김병로 원장이었다. 가인은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의 무료 변론을 도맡았었고 민족의 미래를 개탄하며 소석(小石)이던 아호를 ‘거리의 사람’이란 뜻의 가인으로 바꿨다고 한다. 가인은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을 뿐 아니라 법관들에게 항상 청렴을 강조하였다. 이따금 뵙게 되는 대법원장님이 퇴청 하실 때 눈에 띄인 것은 영감님께서 구두 대신 검은 고무신을 신으셨다는 것이었다. 검은 두루마기 역시 반드르르하지 않은 무명천이라서 어린 나는 속으로 '저렇게 높은 분께서 왜 비싼 옷과 멋있는 구두를 신지 않으실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김홍섭 판사님도 역시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다. 한번은 판사님 댁에 심부름을 갔는데 집도 작았고 반찬도 우리 집과 별반 다름이 없어서 더욱 존경스러웠다. 한참 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정치 깡패 이정재와 임화수가 다른 죄수들과 굴비 엮이듯이 엮여 오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죄수인 이정재의 하얀 비단 한복을 입은 모습이 무명옷의 대법원 원장의 모습과 무척 대조되었다.
당시에는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 그리고 법원 행정처가 모두 한 울타리 안에 모여 있어서 구내식당, 구내병원, 구내 목공소, 구내매점, 심지어 원예사까지 있었다. 목공에겐 법원 안에 기거할 수 있는 관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자녀들이 원하면 사환으로 일할 기회를 주었다. 사환에도 임시사환, 정사환으로 직급이 있었고 봉급에도 차이가 있었다. 출근부에 올라 있는 이름 순서대로 진급이 되는 터라 출근부만 보면 자기의 순서를 알 수 있었다.
사환들의 세계에서도 나름의 질서와 문화가 있어서 지방법원 사환은 뛰고, 고등법원 사환은 걷고 대법원 사환은 앉아 있었다. 왜냐하면, 지방법원은 사환 한 명이 여러 판사의 심부름을 해야만 했지만, 대법원에서는 대법관 한 분만 모시면 되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대법관 실에서 내가 하는 일은 청소와 커피 끓이는 일, 그리고 판결기록을 서기실로 보내서 정서하도록 하는 일, 손님이 오시면 커피 대접, 대법관님 점심 주문, 판결문을 다른 대법관실에 회람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온종일 대법관님과 같은 사무실에서 함께 생활하니까 매사에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고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대법관님은 점심을 대부분 구내식당에서 시켜 드셨는데 토스트 두 장에 따듯한 우유 한 잔, 아니면 설렁탕 한 그릇 뿐이었다. 매주 화요일에 대법관회의가 있을 때만 일식집에서 도시락을 주문해서 드셨는데 음식을 깨끗하게 남겨서 서기나 비서들까지 내게 아부(?)해서 남은 음식을 얻어먹곤 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법원에도 군인이 들어와 법원 내의 모든 행정업무를 군대 시스템으로 바꾸기 시작했는데 내가 군인들이 근무하는 방에 배치되었다. 그 방에 여유 있는 한량 같이 생긴 중령과 백범 김구 선생의 젊은 모습처럼 둥근 테 안경과 대머리 같이 보이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하고 흡사 로봇같이 정확히 일만 하는 대위 한 명과 나, 셋이 근무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보는 일본 순사 같기도 한 대위는 출근을 하면 먼저 전화로 부모님께 문안 전화를 짧게 하고 근무 시작을 했다. 법원으로 파견을 나온 것을 보면 법무관이었을 것이고 당시 가정집에 전화가 있는 집은 매우 드물었던 시대이고 보면 대단한 집의 아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이 처음에 법원에 들어와서 착수한 일들은 군 미필자를 색출해서 군에 보내고, 부정 부패한 공무원 찾아내기, 모든 문서를 현대화 시키기였다. 예를 들어 세로쓰기 문서를 가로쓰기로 전환하기, 한자를 한글로 전환 등등의 일도 있었다.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대위는 나에게 '누가 민원인 접촉을 많이 하는지? 외식을 자주 하는지?' 등의 직원들의 동향을 물었다. 대위가 왜 묻는지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내가 보고 들은 대로 모든 것을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군인들은 나에게 들은 자료를 가지고 직원들을 숙청하는 데 사용한 것 같다. 중령과 대위 단 둘이서 하는 살인적인 업무량 때문에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근무가 끝나면 통금시간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군인 지프를 태워줬다. 시청 앞부터 효자동까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텅 빈 광화문 거리를 질주하는 느낌은 어린 나이에도 세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박정희가 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할 때, 그날의 그 기분이 떠올려지면서 그 발표가 전혀 놀랍지가 않았다.
6년간의 나의 법원 생활에서 특별히 기억이 나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10년간 대법원장을 했던 민복기와의 하찮은 인연이었다. 당시 법원 행정처 차장이었던 민복기가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며 "너를 보면 10년 전에 먹은 오징어가 다시 올라온다."고 심하게 나무랐다.
어른만 보면 인사를 하는 어린 10대 소녀였던 나로서는 자기가 눈길을 주지 않아서 인사를 할 기회를 놓친 것인데 억울하지만,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행정처장님이 인사 잘한다고 특별히 나를 지목해서 처장실로 옮긴 때였는데 차장님에게 인사를 안 한다고 찍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나는 그 시대 내 또래의 사람들이 전혀 접할 수 없는 세상인 법원을 통하여 세상을 배웠다. 법원 안에서 많은 일을 보고 겪었지만,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들도 있었다. 그 중에 순간적으로나마 충격을 받은 일은 한국의 소비자 운동의 대모였던 여기자 정광모 씨를 본 일이었다.
한국일보 법원 출입 기자였던 정광모 씨는 빨간 재킷에 바지를 입고 당시로써는 보기 드물게 폭스바겐을 타고 다니고 남자 기자들처럼 기자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오기도 했다. 원래 기자라는 직업이 안하무인으로 건방을 떠는 것부터 배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젊은 여기자의 당돌한 행동은 법원에서도 주목거리가 되었다. 한 번은 기자실에 보낼 문서가 있어서 들렸는데 정광모 씨가 막 들어오고 있었다. 의자에 앉으면서 자세가 잘못되었는지 손으로 가랑이 사이의 국부를 툭 치면서 “아이고 내 보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서 그만 기절할 뻔했다. 젊은 여자가 남자 기자들 사이에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에 중학교 여학생이었던 나는 머리에 전기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판단을 넘어서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임시사환에서 정사환이 되는 순서에서 뒤에 들어온 애가 나보다 먼저 진급이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쪼르르 김홍섭 판사님께 달려가 울면서 자초지종을 일러바쳤더니 판사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책 한 권을 주셨다.
"나도 그런 일을 많이 겪었다. 너도 이번만이 아니라 비슷한 일을 또 겪게 될 거야. 내가 쓴 이 책이 조금이라도 너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하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때 주신 ‘무상을 넘어서’ 라는 책을 소중히 간직했었는데 그만 한국을 떠나며 집에 두고 오는 바람에 어디론가 없어져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사환이 고교를 졸업하면 큰 탈이 없는 한 대부분 임시 서기보 자리나 촉탁, 여자는 타자수로 진급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환에서 정식 직원으로 승진된다고 해도 사환 출신의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닐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나는 평생 이 직장에서 '사환 출신'의 꼬리표를 달고 근무하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 즈음 사환을 채용할 때도 공개 시험을 도입해서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정식으로 법원 공무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공개채용이 아닌 특채로 사환에서 진급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한 편으로는 내 실력으로 얼마든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어서 나 스스로 나의 가치를 검증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법원을 그만두었다.
법원을 그만둔 몇 해 후, 친구의 일로 법원에 갈 일이 생겨서 나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써 주셨던 계장님을 찾아갔더니 점심을 사주시겠다며 고급 그릴로 데려갔다. 나는 깜짝 놀라서 "너무 비싼 데 왔네요." 했더니 그 분은 "항상 오는 단골집이야. 지금은 형편이 많이 달라졌어. 왜 기다리지 않고 그만두었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날 밥은 잘 먹었지만 돌아오면서 ‘봉급이 그렇게 갑자기 뛸 수가 없는데, 군인들이 들어서고 난 뒤에 공무원들이 더 부패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뇌물을 받았던 기억이 생각났다.
첫 번째 뇌물은 전도관 박태선 장로 공판이었다. 행색이 초라한 엄니 또래의 아주머니가 간절한 눈빛으로 복도를 지나가는 나를 붙들고 "학생, 여기 근무해요? 나 ㅇㅇ법정 방청권이 긴히 필요한데 얻어 줄 수 없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애절한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 나로선 얻기 쉬운 방청권을 몇 장 얻어다 드렸더니 신앙촌 카스텔라를 한 보따리 안겨줘서 얼떨결에 받았다.
두 번째 뇌물은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변호사들로부터 이따금 용돈을 받은 것이다. 토요일쯤엔 가끔 변호사들이 들려서 일찍 퇴근하니 극장이나 가라고 용돈을 조금씩 줄 때가 있었다. 그 용돈을 받은 뒤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변호사가 부탁한 대로 그 기록을 맨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되었다. 그 변호사는 자기가 담당한 사건의 판결을 조속히 끝내고 싶어서 내게 돈을 주었던 것이다. 대법관님은 내가 놓은 재판기록을 위에서부터 차례로 판결문을 쓰도록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권력의 끄트머리에서 힘을 써 본 셈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엄격한 대법원에서 제일 직급이 낮은 사환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나중에 미 8군 무대의 무용수가 되었어도 그 버릇이 변하지 않아서 나이 어린 단원들에도 반드시 존댓말을 썼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이런 태도가 문제가 되었다.
어느 날 연습 도중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나이 어린 단원 둘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늦게 들어와서 춤도 잘 추지 못하는 주제에 혼자서 교양 있는 척한다고 흉을 보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쫓아 나가 "야! 이 년들아! 평생 욕이나 먹고 살아야 시원하겠냐?" 하고 뺨따귀를 갈겨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태도를 바꾸어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웬만하면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원래 무용단은 동작 통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규율이 강하고 말이 짧고 거칠었다. 엄격한 가정과 엄숙한 법원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탓에 철저하게 예의와 질서를 지키는 것이 몸에 배 있는 나에게 마치 군대 같은 무용단의 분위기는 완전히 딴 세상이어서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가 전혀 먹히지 않았다. 농담으로 너무 저속한 이야기를 한다든가 약해 보이는 사람을 존중하기 보다는 무시하는 경향 등 법원에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환경이 정말 싫었다. 법원에서는 대법관님 한 분만 잘 모시면 아무 문제 없고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도 있었고 어린 급사의 신분이지만 높은 분들도 반말을 하지 않아 존중 받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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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거꾸로 돌아가던 시절의 대법원 이야기다. 해도 60년 전, 나름 품격 있었던 대법원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나라 전체를 후진 기어 넣고 달리게 만든 대법원이 되어 버린 지금, 우리는 과연 지금이 나아졌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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