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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한 마리아 테레지아 (1741년)[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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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편집]
카를 6세가 죽자 카를 6세의 후계자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갖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 지위와 상속령과 여러 나라의 작위를 이어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추정상속인이긴 해도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계승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주에게 필요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것.[16][17]
그리고 아버지가 힘들여 추진한 국사조칙이 무색하게 주변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의 합법성에 대해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18] 특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공격, 1차 슐레지엔 전쟁이 일어났다.
슐레지엔은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지역이 된 터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미련이 없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환영했다. 남편 프란츠는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9살이나 연상인데다 어려서부터 소국의 왕자로 살아남기 위해 국제 정세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카를 6세에게 물려받은 군대로는 프로이센군을 막기 어렵다고 보고 아내를 설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사에 참여해 프로이센 사절과 협상을 했는데, 커튼 뒤에서 듣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이 조금이라도 양보할라 치면 방해를 했고 결국 협상은 실패하게 되었다. 이후 프란츠 슈테판은 다시는 국사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열중했다. 결과를 보면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옳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똑똑하고 재능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후계자로서의 교육이 부족했으며 더욱이 10대 때부터 임신 크리로 견문이 짦았던 데다 나이가 젊어서(23세) 생긴 일이다.[19]
그리고 아버지가 힘들여 추진한 국사조칙이 무색하게 주변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의 합법성에 대해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18] 특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공격, 1차 슐레지엔 전쟁이 일어났다.
슐레지엔은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지역이 된 터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미련이 없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환영했다. 남편 프란츠는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9살이나 연상인데다 어려서부터 소국의 왕자로 살아남기 위해 국제 정세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카를 6세에게 물려받은 군대로는 프로이센군을 막기 어렵다고 보고 아내를 설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사에 참여해 프로이센 사절과 협상을 했는데, 커튼 뒤에서 듣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이 조금이라도 양보할라 치면 방해를 했고 결국 협상은 실패하게 되었다. 이후 프란츠 슈테판은 다시는 국사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열중했다. 결과를 보면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옳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똑똑하고 재능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후계자로서의 교육이 부족했으며 더욱이 10대 때부터 임신 크리로 견문이 짦았던 데다 나이가 젊어서(23세) 생긴 일이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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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년 3월 13일 넷째이자 첫 아들인 요제프가 태어났고, 6월 25일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넷째 이전에 낳은 세 아이가 모두 딸이라 매우 위축된 상태였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적으로 돌아선 상태에 보헤미아는 배신을 때려 카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마저 동요하며 이탈할 움직임이라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기인 요제프를 안고 헝가리로 달려가 의회 연설에서 장자 요제프를 선보이며 군자금과 병력을 얻어냈다.[20]
그러나 전쟁 준비가 부족한 데다 외교적으로도 오스트리아가 고립되었고 프로이센군이 결국에는 빈 코 앞까지 당도해 상황이 급박해졌다. 결국 다시 협상에 돌입해 슐레지엔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양도해 적을 하나 줄이고, 한숨 돌린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른 카를 7세가 대관식을 하러 군대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간 사이, 본진 뮌헨을 탈탈 털면서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뮌헨을 탈환하긴 했지만 다시 오스트리아에 대들 국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 7세가 사망하고 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적국 작센도 바이에른 꼴을 보고 순순히 굴복했고 남은 적은 이제 프랑스밖에 없었다.
바이에른을 밀어 완전히 합스부르크 왕가를 뒤집어 엎으려던 프랑스와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지만 영국과 손 잡고 쇼미더머니를 친 결과 마침내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사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전쟁 준비가 부족한 데다 외교적으로도 오스트리아가 고립되었고 프로이센군이 결국에는 빈 코 앞까지 당도해 상황이 급박해졌다. 결국 다시 협상에 돌입해 슐레지엔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양도해 적을 하나 줄이고, 한숨 돌린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른 카를 7세가 대관식을 하러 군대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간 사이, 본진 뮌헨을 탈탈 털면서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뮌헨을 탈환하긴 했지만 다시 오스트리아에 대들 국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 7세가 사망하고 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적국 작센도 바이에른 꼴을 보고 순순히 굴복했고 남은 적은 이제 프랑스밖에 없었다.
바이에른을 밀어 완전히 합스부르크 왕가를 뒤집어 엎으려던 프랑스와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지만 영국과 손 잡고 쇼미더머니를 친 결과 마침내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사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4.2. 동맹의 역전[편집]
4.3. 7년 전쟁[편집]
즉위 초와 달리 통치 경험이 원숙해진 데다 제국에 대한 통제력이 공고해졌기에 왕위 계승 전쟁 때 잃어버린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주도하게 되는데, 십여 년간 내정 개혁과 군제 개혁을 실시하면서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21]를 등용해 프랑스에게 접근했다. 당시 프랑스 궁정의 실세인 퐁파두르 부인과 함께 동맹을 유도했고, 개인적으로 프로이센 까에 프리드리히 2세를 증오하는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와 협력해 프로이센 공격을 감행했다. 초반에는 그 동안 힘을 쌓은 보람도 없이 또 프로이센 군대에 털리면서 프라하까지 밀렸지만 프로이센은 사방이 적이었고[22] 너무 깊숙이 쳐들어오다가 보급 수래 3,000대가 습격당하면서 자국으로 철수, 위기를 넘긴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공세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러시아군은 이길만 하면 보급상 문제로 후퇴하고 프리드리히 2세도 만만찮은 상대이기에 결정적인 승기는 잡지 못 했다. 영국의 정권 교체로 프로이센에 대한 재정 지원이 끊기고 프로이센이 약화되면서 승기를 잡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우세가 이어졌으나 프로이센이 남은 병력으로 끈질기게 버티고 동맹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면서 분위기가 뒤집혔다. 하필 옐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은 인물이 덴마크 올렌보르 왕조의 방계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출신이자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는 표트르 3세였던 것.[23]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지고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털려서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이전 재정 수입의 22%를 차지하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7년 전쟁의 순수 전쟁 비용만 11년치 재정 수입인 2억 6,000만 굴덴을 쏟아부었고, 전후 여파로 전쟁이 끝난 첫 해인 1763년에는 세입(2,300만 굴덴)보다 세출이 3배(7,000만 굴덴)나 될 정도로 국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4]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공세로 몰아넣기도 했지만 러시아군은 이길만 하면 보급상 문제로 후퇴하고 프리드리히 2세도 만만찮은 상대이기에 결정적인 승기는 잡지 못 했다. 영국의 정권 교체로 프로이센에 대한 재정 지원이 끊기고 프로이센이 약화되면서 승기를 잡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우세가 이어졌으나 프로이센이 남은 병력으로 끈질기게 버티고 동맹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면서 분위기가 뒤집혔다. 하필 옐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은 인물이 덴마크 올렌보르 왕조의 방계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출신이자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는 표트르 3세였던 것.[23]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지고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털려서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이전 재정 수입의 22%를 차지하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7년 전쟁의 순수 전쟁 비용만 11년치 재정 수입인 2억 6,000만 굴덴을 쏟아부었고, 전후 여파로 전쟁이 끝난 첫 해인 1763년에는 세입(2,300만 굴덴)보다 세출이 3배(7,000만 굴덴)나 될 정도로 국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4]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4.4. 통치[편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을 거치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손상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내정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전국에 초등학교를 설치해 의무교육을 실시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성장했다.[25][26] 또 일반 징병제를 채택, 전국민의 병역을 의무화하고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게 해서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에 오스트리아는 안정기에 들어섰으며, 당대인들에게 여성의 영광이자 왕들의 모델로 여겨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개인은 프리드리히 2세를 싫어했지만, 적국인 프로이센을 배우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적국인 프로이센에서는 100년 전 대선제후 시절에 했던 조치들을 뒤늦게나마 오스트리아에 도입함으로써 근대 국가로서의 틀을 만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의 오스트리아의 지방 행정은 충성 서약을 받은 봉건 영주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각 왕국/공국에 중앙에서 임명한 총독을 내려보내고, 중앙 관청을 설립하여 각 지방에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를 국가 조직에서 배제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헝가리 왕국을 제외한 모든 지방을 크라이스라고 불리는 행정 단위로 구분하여 중앙집권을 안정화시키고, 지주의 횡포로부터 농민을 보호했다.
행정과 사법의 영역을 분리하는 한편, 대법원을 설치하고 <테레지아 법전>을 편찬하여 오늘날 오스트리아 민법의 기초를 닦았다. 새로운 조세 제도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했으며, 오스트리아에 드디어 제대로 된 일반징세대장이 도입되었다. 예수회로부터 대학에 관한 감독 권한을 빼앗아 고등 교육을 국가의 의무로 만드는 동시에, 빈 의대를 설립하였다. 초등 의무 교육 외에도 중학교에 해당하는 실업학교를 설치했으며,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인 시범학교를 도입했다.
슐레지엔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경제 부흥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중상주의에 입각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독점 기업을 불허하였고, 길드 규약을 철폐했다. 그 결과 보헤미아 왕국의 섬유 공업이 크게 번성하였다. 또한 이주 정책을 통하여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인 헝가리 왕국 북부와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했던 에르데이 대공국의 광공업을 크게 증진시켰다.
하지만 실책도 있었다. 모든 여성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혐오했다.[27] 여성의 술집과 여관 취직을 금지시켰고, 여성은 밤길을 다닐 수 없도록 하는 통금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매질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삭발하게 했다. 또한 매춘부를 매우 혐오해 감화원을 설치해 이들을 격리수용했는데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과 갈등을 빚었고, 이게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퍼지자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뒤바리 부인과 화해할 것을 지시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도 구설수에 올랐다. 예카테리나 2세가 폴란드 왕위를 획득하고 전 국토를 병합하려 하자 프로이센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끌여들여 분할을 제안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악마와도 같다며 지독히도 혐오하던 프리드리히 2세와 손을 잡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평소 철저한 도덕주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과 반대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폴란드 분할을 오스트리아에서 주도한 것은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카우니츠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간의 정책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황제는 우려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국익을 위해 침묵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해 그 여자는 울고 또 울었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철저하게 취했다고 비꼬았다.
두 차례의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공적인 프랑스와의 동맹도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오스트리아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패퇴하고 일찍 독일 전역에서 이탈하자 슐레지엔을 빼앗는 대가로 프랑스에 벨기에를 할양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1777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때 또 한 번 프로이센과 충돌했을 때 프랑스는 파병을 거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공식 지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1740~1780),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 국왕(1741~1780), 보헤미아 국왕(1743~80), 신성 로마 제국 황후(1745~1765), 에르데이 여대공(1765~1780),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여왕(1772~1780), 부코비나 여공(1775~1780), 밀라노 여공(1740~1780) 등등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리킬 때는 공식 칭호와 상관 없이 '황제'로 취급된다.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보다 혈통면에서 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실권 대부분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갖고 있어서 사실상의 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즉위한 아들 요제프 2세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 통치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들 요제프 2세는 남편과는 달리 허수아비까지는 아니었다.[28]
공동 통치자이며 후계자인 요제프 2세와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의 전제적 계몽주의는 여러 관계 없는 국가들이 결혼동맹에서 온 동군연합으로 묶인 느슨한 체제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아 아들의 행동에 항상 제동을 걸었고, 요제프 2세는 어머니를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로 보았다. 서로 폐위시키겠다는 협박을 한 적도 있다.[29]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를 보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권한은 없이 아들을 황제로 삼아 조종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통치에 필요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작위 등을 전부 본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통치자였다. 남편과 아들에게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공동 통치자의 지위를 주었지만 선임 통치자는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이었다. 남편은 알아서 재정 분야를 제외하곤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고, 아들 요제프의 팽창 정책과 개혁 조치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경계했지만 모두 막지는 않았으며 군제 개혁과 교육 정책에는 모자의 뜻이 일치했다.[30] 다만 사법 개혁과 교회 개혁이나 종교 정책에서는 태클을 걸어서 요제프 2세는 단독 통치자가 될 때에나 자신의 구상을 펴게 된다. 전형적인 합스부르크적인 가톨릭 도덕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당대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계몽전제군주를 꿈꿨던 요제프 2세는 항상 대립했고, 요제프 2세의 개혁 조치에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태클을 자주 걸어 계몽군주라는 세평이 무색한 면도 있었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이러한 면이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29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폐암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기 직전에 자녀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장남 요제프 2세에게 "이리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긴 여행을 해야 하는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남긴 날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망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대로 안장되었다. 한편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숨을 거둔 후 며칠 동안 어머니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요제프 2세는 정치적으로는 어머니와 자주 대립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계속 사랑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개인은 프리드리히 2세를 싫어했지만, 적국인 프로이센을 배우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었다. 적국인 프로이센에서는 100년 전 대선제후 시절에 했던 조치들을 뒤늦게나마 오스트리아에 도입함으로써 근대 국가로서의 틀을 만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의 오스트리아의 지방 행정은 충성 서약을 받은 봉건 영주에 의해 돌아가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각 왕국/공국에 중앙에서 임명한 총독을 내려보내고, 중앙 관청을 설립하여 각 지방에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를 국가 조직에서 배제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헝가리 왕국을 제외한 모든 지방을 크라이스라고 불리는 행정 단위로 구분하여 중앙집권을 안정화시키고, 지주의 횡포로부터 농민을 보호했다.
행정과 사법의 영역을 분리하는 한편, 대법원을 설치하고 <테레지아 법전>을 편찬하여 오늘날 오스트리아 민법의 기초를 닦았다. 새로운 조세 제도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했으며, 오스트리아에 드디어 제대로 된 일반징세대장이 도입되었다. 예수회로부터 대학에 관한 감독 권한을 빼앗아 고등 교육을 국가의 의무로 만드는 동시에, 빈 의대를 설립하였다. 초등 의무 교육 외에도 중학교에 해당하는 실업학교를 설치했으며,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인 시범학교를 도입했다.
슐레지엔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경제 부흥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기본적으로는 중상주의에 입각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독점 기업을 불허하였고, 길드 규약을 철폐했다. 그 결과 보헤미아 왕국의 섬유 공업이 크게 번성하였다. 또한 이주 정책을 통하여 오늘날의 슬로바키아인 헝가리 왕국 북부와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했던 에르데이 대공국의 광공업을 크게 증진시켰다.
하지만 실책도 있었다. 모든 여성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혐오했다.[27] 여성의 술집과 여관 취직을 금지시켰고, 여성은 밤길을 다닐 수 없도록 하는 통금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매질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삭발하게 했다. 또한 매춘부를 매우 혐오해 감화원을 설치해 이들을 격리수용했는데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과 갈등을 빚었고, 이게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퍼지자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뒤바리 부인과 화해할 것을 지시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도 구설수에 올랐다. 예카테리나 2세가 폴란드 왕위를 획득하고 전 국토를 병합하려 하자 프로이센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끌여들여 분할을 제안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악마와도 같다며 지독히도 혐오하던 프리드리히 2세와 손을 잡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평소 철저한 도덕주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과 반대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폴란드 분할을 오스트리아에서 주도한 것은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카우니츠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간의 정책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황제는 우려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국익을 위해 침묵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해 그 여자는 울고 또 울었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철저하게 취했다고 비꼬았다.
두 차례의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공적인 프랑스와의 동맹도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오스트리아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패퇴하고 일찍 독일 전역에서 이탈하자 슐레지엔을 빼앗는 대가로 프랑스에 벨기에를 할양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1777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때 또 한 번 프로이센과 충돌했을 때 프랑스는 파병을 거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공식 지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1740~1780),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 국왕(1741~1780), 보헤미아 국왕(1743~80), 신성 로마 제국 황후(1745~1765), 에르데이 여대공(1765~1780),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의 여왕(1772~1780), 부코비나 여공(1775~1780), 밀라노 여공(1740~1780) 등등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리킬 때는 공식 칭호와 상관 없이 '황제'로 취급된다.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보다 혈통면에서 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실권 대부분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갖고 있어서 사실상의 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즉위한 아들 요제프 2세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 통치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들 요제프 2세는 남편과는 달리 허수아비까지는 아니었다.[28]
공동 통치자이며 후계자인 요제프 2세와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의 전제적 계몽주의는 여러 관계 없는 국가들이 결혼동맹에서 온 동군연합으로 묶인 느슨한 체제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아 아들의 행동에 항상 제동을 걸었고, 요제프 2세는 어머니를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로 보았다. 서로 폐위시키겠다는 협박을 한 적도 있다.[29]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를 보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권한은 없이 아들을 황제로 삼아 조종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통치에 필요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작위 등을 전부 본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통치자였다. 남편과 아들에게 오스트리아 대공이라는 공동 통치자의 지위를 주었지만 선임 통치자는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이었다. 남편은 알아서 재정 분야를 제외하곤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고, 아들 요제프의 팽창 정책과 개혁 조치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경계했지만 모두 막지는 않았으며 군제 개혁과 교육 정책에는 모자의 뜻이 일치했다.[30] 다만 사법 개혁과 교회 개혁이나 종교 정책에서는 태클을 걸어서 요제프 2세는 단독 통치자가 될 때에나 자신의 구상을 펴게 된다. 전형적인 합스부르크적인 가톨릭 도덕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달리 당대의 프리드리히 2세와 같은 계몽전제군주를 꿈꿨던 요제프 2세는 항상 대립했고, 요제프 2세의 개혁 조치에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태클을 자주 걸어 계몽군주라는 세평이 무색한 면도 있었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이러한 면이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29일에 사망하였다. 사인은 폐암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기 직전에 자녀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밖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장남 요제프 2세에게 "이리 나쁜 날씨에도 불구하고 긴 여행을 해야 하는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남긴 날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망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대로 안장되었다. 한편 그녀의 아들 요제프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숨을 거둔 후 며칠 동안 어머니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한다. 요제프 2세는 정치적으로는 어머니와 자주 대립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계속 사랑했다고 한다.
4.5. 평가[편집]
동시대에 프리드리히 2세가 있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처럼 이기기 어려운 전쟁을 이긴 반면[31], 7년 전쟁은 질 수 없는 싸움[32]을 운빨로 날려먹었다. 여러 개혁 조치를 시행했지만 '불순 사상', 즉, 자유주의가 성장하는 조짐을 보고 보수 정책으로 회귀하게 된다.
뛰어난 능력과 달리 즉위 초반의 거의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임신-출산으로 국사를 전력으로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33] 직접 전쟁에 참가해 국운을 걸고 군대를 지휘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에 맞서기에는 빈에서 원격으로 부하들을 조종하는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즉위해 타고난 의지력과 재능으로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지켜낸 것은 분명한 업적이다. 덤으로 가문의 전통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되찾아왔으며, 카를 6세 시기부터 기울어가던 나라를 망조에서 건져냈다. 게다가 후계자인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마저 잘 키워냈으니 능력 있는 군주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역사를 통틀어 유럽에서 가장 많은 왕관을 썼던 카를 5세, 그의 동생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계 중시조인 페르디난트 1세 시대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만큼 강력한 카리스마와 존재감, 통치력을 발휘한 군주는 없었다.[34] 그녀와 대적했던 프리드리히 2세도 (형식적인 말일 수 있겠지만) 1781년 1월 6일 추모사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큰 영예를 남겼으며, 자신은 그녀와 긴 전쟁을 벌였지만 결코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프리드리히 2세도 그녀의 치세나 능력에 대해선 나쁘지 않게 본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암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거나 일으킨 두 차례의 큰 전쟁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35]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막대한 전비만 소모하며 오스트리아를 휘청이게 만들었다.[36] 또한 여성군주임에도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의 통치철학인 금욕주의, 도덕주의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37],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죽고난 후에는 통치의욕을 잃는 모습을 보여 기껏 강화시켜 놓은 황권을 깎아먹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식 농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공동 통치자인 첫째 아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특정 자식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어머니로서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흠이었다.
이렇듯 평가가 갈리기는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신민들에게 진정 사랑받았던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 느슨한 동군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뭉치게 되었다. '통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8세기까지도 중세적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던 합스부르크 왕가 산하 국가들의 후진적 시스템을 근대적으로 정비했으며, 그녀의 대에 드디어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게 된다. 살아생전 이미 '국모'[38]로 불릴 정도였고, 그녀의 사후에도 오스트리아의 기본 정책 방향은 점진적인 개혁과 관용을 고수하며 오랜 안정을 유지했으며 후계자와 신민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뛰어난 능력과 달리 즉위 초반의 거의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임신-출산으로 국사를 전력으로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33] 직접 전쟁에 참가해 국운을 걸고 군대를 지휘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에 맞서기에는 빈에서 원격으로 부하들을 조종하는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즉위해 타고난 의지력과 재능으로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지켜낸 것은 분명한 업적이다. 덤으로 가문의 전통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되찾아왔으며, 카를 6세 시기부터 기울어가던 나라를 망조에서 건져냈다. 게다가 후계자인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마저 잘 키워냈으니 능력 있는 군주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역사를 통틀어 유럽에서 가장 많은 왕관을 썼던 카를 5세, 그의 동생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계 중시조인 페르디난트 1세 시대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만큼 강력한 카리스마와 존재감, 통치력을 발휘한 군주는 없었다.[34] 그녀와 대적했던 프리드리히 2세도 (형식적인 말일 수 있겠지만) 1781년 1월 6일 추모사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에 큰 영예를 남겼으며, 자신은 그녀와 긴 전쟁을 벌였지만 결코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프리드리히 2세도 그녀의 치세나 능력에 대해선 나쁘지 않게 본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암군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녀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거나 일으킨 두 차례의 큰 전쟁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35]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막대한 전비만 소모하며 오스트리아를 휘청이게 만들었다.[36] 또한 여성군주임에도 여성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자신의 통치철학인 금욕주의, 도덕주의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37],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죽고난 후에는 통치의욕을 잃는 모습을 보여 기껏 강화시켜 놓은 황권을 깎아먹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자식 농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공동 통치자인 첫째 아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특정 자식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 어머니로서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흠이었다.
이렇듯 평가가 갈리기는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신민들에게 진정 사랑받았던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 느슨한 동군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뭉치게 되었다. '통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18세기까지도 중세적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던 합스부르크 왕가 산하 국가들의 후진적 시스템을 근대적으로 정비했으며, 그녀의 대에 드디어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게 된다. 살아생전 이미 '국모'[38]로 불릴 정도였고, 그녀의 사후에도 오스트리아의 기본 정책 방향은 점진적인 개혁과 관용을 고수하며 오랜 안정을 유지했으며 후계자와 신민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5. 사생활[편집]
5.1. 성격[편집]
개인적으로는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이었으며 상당한 다혈질에 자존심도 셌다. 30대까지는 빼어난 미모와 달변을 자랑했고 밤새 춤추고 노는 것을 즐겼다. 특히 여장부이기도 한데 계속되는 전쟁에 대해서도 내가 임신중만 아니었다면 직접 전쟁터에 나갔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성격이었다. 허례허식을 혐오해 궁정의 경직된 예법을 혁파했으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주의였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인적 삶과 공적인 삶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위의 각종 도덕주의 정책을 실시한 것도 이 때문.
그러나 남편이 사망하고 50대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과식으로 달래서 점점 살이 쪘고, 성격도 유쾌하고 강한 성격에서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남편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삶은 평생 애도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사망하고 50대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과식으로 달래서 점점 살이 쪘고, 성격도 유쾌하고 강한 성격에서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남편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삶은 평생 애도하는 삶이었다.
5.2. 가정[편집]
남편과의 사이에서 슬하 5남 11녀를 낳았다. 거의 20년 동안 임신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많은 아이를 낳아서 다른 유럽 왕가들이 부러워했다고. 이에 필적할만한 인물은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슬하 7남 7녀)와 영국의 조지 3세(슬하 9남 6녀)정도 밖에 없다. 자녀들 중에서 레오폴트 2세(12남 4녀) 정도다
많은 아이를 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금슬이 매우 좋아서 공식적인 행사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는 평범한 부부처럼 소박하고 화목하게 지냈다.[39][40] 프란츠 슈테판은 전술된 일화들에서 보듯이 훌륭한 바지사장 노릇을 하며 처세를 잘했다. 게다가 여러 대에 걸친 근친혼으로 구성원이 많이 줄어버린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시 번성시키는 역할도 매우 잘 해주어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최고의 남편감이었다.
남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 외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는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프란츠 슈테판 또한 자존심 강한 부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존중했다. 그러나 프란츠 슈테판의 바람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 트러블이 있었다.
유일한 동생[41]인 마리아 안나는 전술한 대로 남편 프란츠 1세의 남동생 샤를 알렉상드르 공자와 결혼해서 겹사돈 관계였다. 이쪽도 연애결혼인데 아버지 카를 6세가 로트링겐 가문과 너무 단단히 맺어지는 것을 경계해서, 이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카를 6세가 죽은 뒤에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사산의 여파로 일찍 사망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후손은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손만 남게 되었다.
시동생 샤를 알렉상드르는 은근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골칫거리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결코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막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군 지휘를 맡아 프리드리히 2세에게 계속 호구잡히며 허구헌날 깨졌다.[42] 7년 전쟁 때는 좀 나아져서 한두 번씩 프로이센군을 격파했으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또 호구잡히면서[43]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가 압력을 넣으면서 스스로 사임.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서는 시동생에다 하나뿐인 동생의 남편이라 자신이나 남편의 체면상 자르지도 못했고, 결국 전쟁에 지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상대방인 프리드리히 2세가 후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반면[44] 샤를은 무척 무능했다. 다만 샤를은 전쟁에서 무능했으나 군주로선 꽤 우수했고, 현지인들과 사이는 좋았다.
프란츠 슈테판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 무려 16남매를 낳았으나 이 중 4명은 요절하고 12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당시의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당대 다른 유럽 왕족들의 자녀들에 비해 놀랄만한 생존률을 보여줬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우 엄격한 어머니였고,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지나치게 크면서도 칭찬에 인색했다. 그리고 16명의 자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지는 않아서 편애하는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다른 아이들을 항상 비교했고, 남편 사후에는 매사에 비관적인 어머니가 되었기에 죽을 때까지 마리아 테레지아를 원망한 자녀들도 꽤 있었다. 국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딸들에게 항상 미안해했으며 어떻게든 보상하고자 했다지만, 이미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먼 외국으로 보내진 딸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별난 편애를 받았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만 허용된 연애결혼도 다른 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에는 충분했다. 유능한 통치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결코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자식들에겐 훨씬 자상한 아버지였다.[45]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을 한 딸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했으나 자기 자신부터가 그 말과는 좀 거리가 있었고,[46]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진 딸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되려 어머니를 닮았는지 야심 많은 딸들이 많아서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시집간 나라에서 남편을 제치고 권력을 휘둘렀다. 자식들 중 세간에 가장 유명한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정도가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따른 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했던 루이 16세에게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런 태도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 정세가 위태롭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남편 대신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이때 남편보다는 어느 정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결국 일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많은 아이를 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금슬이 매우 좋아서 공식적인 행사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는 평범한 부부처럼 소박하고 화목하게 지냈다.[39][40] 프란츠 슈테판은 전술된 일화들에서 보듯이 훌륭한 바지사장 노릇을 하며 처세를 잘했다. 게다가 여러 대에 걸친 근친혼으로 구성원이 많이 줄어버린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시 번성시키는 역할도 매우 잘 해주어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최고의 남편감이었다.
남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 외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는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프란츠 슈테판 또한 자존심 강한 부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존중했다. 그러나 프란츠 슈테판의 바람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 트러블이 있었다.
유일한 동생[41]인 마리아 안나는 전술한 대로 남편 프란츠 1세의 남동생 샤를 알렉상드르 공자와 결혼해서 겹사돈 관계였다. 이쪽도 연애결혼인데 아버지 카를 6세가 로트링겐 가문과 너무 단단히 맺어지는 것을 경계해서, 이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카를 6세가 죽은 뒤에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사산의 여파로 일찍 사망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의 후손은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손만 남게 되었다.
시동생 샤를 알렉상드르는 은근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골칫거리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결코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막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군 지휘를 맡아 프리드리히 2세에게 계속 호구잡히며 허구헌날 깨졌다.[42] 7년 전쟁 때는 좀 나아져서 한두 번씩 프로이센군을 격파했으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또 호구잡히면서[43]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가 압력을 넣으면서 스스로 사임.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서는 시동생에다 하나뿐인 동생의 남편이라 자신이나 남편의 체면상 자르지도 못했고, 결국 전쟁에 지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상대방인 프리드리히 2세가 후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반면[44] 샤를은 무척 무능했다. 다만 샤를은 전쟁에서 무능했으나 군주로선 꽤 우수했고, 현지인들과 사이는 좋았다.
프란츠 슈테판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 무려 16남매를 낳았으나 이 중 4명은 요절하고 12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당시의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당대 다른 유럽 왕족들의 자녀들에 비해 놀랄만한 생존률을 보여줬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우 엄격한 어머니였고,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지나치게 크면서도 칭찬에 인색했다. 그리고 16명의 자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지는 않아서 편애하는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다른 아이들을 항상 비교했고, 남편 사후에는 매사에 비관적인 어머니가 되었기에 죽을 때까지 마리아 테레지아를 원망한 자녀들도 꽤 있었다. 국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딸들에게 항상 미안해했으며 어떻게든 보상하고자 했다지만, 이미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먼 외국으로 보내진 딸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별난 편애를 받았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만 허용된 연애결혼도 다른 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기에는 충분했다. 유능한 통치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결코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인 프란츠 1세가 자식들에겐 훨씬 자상한 아버지였다.[45]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을 한 딸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했으나 자기 자신부터가 그 말과는 좀 거리가 있었고,[46]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진 딸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되려 어머니를 닮았는지 야심 많은 딸들이 많아서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시집간 나라에서 남편을 제치고 권력을 휘둘렀다. 자식들 중 세간에 가장 유명한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정도가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따른 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했던 루이 16세에게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런 태도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 정세가 위태롭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남편 대신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이때 남편보다는 어느 정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결국 일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5.3. 자녀들[편집]
6.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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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문명 5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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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역사를 만든 여왕 리더십 시리즈에서 두 번째 여왕 주연으로 등장한다. 배경은 1728년부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까지. 후반부에서는 고정 주인공인 아인과 11살의 모습으로 현대에서 재회한다. 전작의 주연인 엘리자베스 1세와도 만나는데,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쳐 즉위했기 때문에 서로를 경계하면서 본다. 1500년대의 사람인 엘리자베스는 1700년대의 테레지아를 전혀 몰라서 당연히 '누구야, 그게?'라고 반응. 이에 자존심이 상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시골 같은 영국 여왕이란 말이지? 네 후손들 도움을 잘 받았음'이라며 광역도발을 시전해 말싸움을 한다.
3권 초반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마찰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인을 찾아오며, 엘리자베스와는 여전히 영국이 더 크냐, 오스트리아가 더 크냐 하는 별 의미도 없는 싸움 때문에 아인을 잠도 못 자게 시달리게 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에서 연재중인 '합스부르크의 데릴사위로 살아남기'에서는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원 역사에서는 라이벌이었지만 여기서는 주인공이 빙의한 프리드리히 대왕과 맺어졌다. 빙의한 주인공이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과는 달리 이성애자인 덕분에 부부간의 사이는 매우 좋으며 원 역사에서 보여준 여군주로서의 당당함과 능력,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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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매체에서 대단한 미녀로 묘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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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역물에선 숙적 프리드리히 대왕과 결혼한다는 설정이 많다. 그녀가 내정에서 보여줬던 유능함과 강인함,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사적 재능이 합쳐진다는 것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그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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