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롬13: 12~14)
교회의 역사 안에서 사도 바울 다음으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us, 354-430)이었다. 어거스틴은 타락과 방황과 불신앙적인 삶을 살다가 인류사에서 위대한 성인(聖人)이 되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인기와 존경심이 최고에 달했을 때 「고백록」을 출판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다. 마치 신앙이 깊어질 수록 죄인식과 겸손함이 커져서 "달이 차지 못하여 태어난 자", "가장 작은 사도"(고전 15:8-9), "보든 “모든 성도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 마지막에는 “죄인의 괴수”(딤전1:15)라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과 흡사하다.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s)을 복수(複數)로 표현했다. 죄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처럼 죄 고백은 감사와 찬양을 동반한다. 어거스틴은 중세의 신학과 개신교회 신학의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는 고대에 나타난 모든 신학사상을 종합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를 했고, 후대로 넘겨주어 중세와 근대 신학의 모태가 되도록 했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교수 화이트헤드(Whitehead)는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다”라고 말했다.
어거스틴이 이렇게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어거스틴은 타락과 방황으로 불신앙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서 인류사에 위대한 성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신의 과거의 죄를 고백하였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가능하면 자신의 잘못은 숨기고 잘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자신에 대한 인기와 존경심이 최고에 달했을 때 「고백록」을 써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였다. 바울도 신앙의 성숙성이 깊어질수록 고백이 바뀌었다.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15:8-9),
1. 어거스틴의 생애
어거스틴은 354년에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테(Thagaste)에서 기독교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모니카는 남편의 방탕을 인내로 참아내며 남편과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녀의 남편은 죽기 직전(37년)에 세례를 받았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재능을 일찍 발견했고 세속적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어거스틴은 11세에 웅변가가 되기 위해 라틴어를 배웠고, 17세에 대도시 카르타고에 가서 수사학 학교에서 공부한 우수한 학생이었다.
어거스틴이 태어난 Tagaste=Souk Ahras, Carthago=Tunis
어거스틴은 청소년기에 신앙을 잃고 방탕의 도시 카르타고에서 죄의 달콤함에 깊이 빠졌다. 그는 한 여인과 동거를 하면서 18세에 ‘아데오다투스’(Adeodatus)라는 아들을 낳았다. 어거스틴은 또한 연극에 탐닉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카르타고의 드라마는 그의 감정을 깨끗하게 하는 대신에 상처를 할퀴는 것 같이 짜증스럽게 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19세에 철학을 발견하면서 극장의 쾌락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키케로(Cicero)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다가 ‘지혜를 향한 엄청난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에 그는 진리탐구를 위한 방황을 시작했다. 어거스틴은 회심을 하고 신앙으로 돌아오기까지 누구보다도 더 깊은 윤리적, 지적 방황을 하였다. "오 하나님, 내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나의 인생에는 진정한 휴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20대에 마니교에 빠졌다. 마니는 216년 바벨론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가르침은 중국, 인도,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퍼져나갔고, 기독교 신앙에 큰 위협이 되었다. 마니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은 두 개의 물질인 ‘선과 악’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은 악의 원리가 강하게 지배하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의 원리가 지배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사상이 나온 것은 세상에는 절대선이 없고 선과 악이 영원히 대립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욥처럼 하나님을 잘 믿고 인정을 받는 사람도 어느 날 재산이 다 날라 가고, 가족들이 비명횡사하고, 자기 몸까지 병들어 비참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반면, 악하고 못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그 자식들도 잘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운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신정론(神正論)이라고 한다. 마니교 사상은 신정론에 응답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당시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마니교에 빠진 것을 알고 눈물로 기도했다. 교회의 주교는 모니카에게 “오직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는 독서를 통해 스스로 잘못이 무엇인지 발견할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어거스틴은 공부를 통해 마니교의 모순을 발견했다. 그는 어느 날 마니교의 최고 이론가, 파우스투스를 만났는데 자기의 고민거리를 명료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니교에 흥미를 잃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빠져나와 로마로 와서 선생으로 성공하려고 했다.
이제 마니교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자.
어거스틴은 로마에서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는 2~6세기 유럽에서 성행했던 철학사상으로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가 정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에 의하면, 만국은 궁극적이고 알 수 없는 일자(一者, the one)에서 유출되어 지성의 영역(완전한 직관적 지식)과 그 아래 감각세계(산만한 사상과 행동)를 구성한다. 그러나 만물은 관조(contemplation)를 통해 다시 일자로 되돌아 가려는 상향운동을 하게 된다. 만물은 상하 두 방향의 운동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인간을 진리를 찾기 위해서 감각세계를 벗어나 신비적인 황홀(ecstasy)를 통해 일자와 직접적인 합일을 추구해야 하며, 탈아(脫我)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신플라톤주의는 물질을 악하게 보았고, 일자와 가까우면 선하고 멀어지면 악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악이란 물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선이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384년 어느 날, 모니카는 로마에 있는 어거스틴을 찾아와서 그를 밀라노의 유명한 설교자 암브로시우스(Sanctus Ambrosius, 340?-397 주교에게 데려갔다. 암브로시우스는 390년 데살로니가 주민을 학살한 데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부활절에서 성탄절까지 성사를 집행하지 않고 교회 밖으로 좇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암브로시우스는 어거스틴의 두 가지 의심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선 기독교 신앙은 합리적 근거하에서 옹호될 수 있고, 구약의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보지말고 은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제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암브로시우스 386년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다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롬10: 17). 어거스틴은 어느 날 "하나님, 왜 지금 나의 더러움을 벗어 버릴 수가 없습니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그때 "들고 읽어라."(tolle lege) 하는 어린아이의 음성을 듣고 어거스틴이 성경을 폈을 때 로마서 13: 13-14절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회심 어거스틴은 387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성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기도하는 어머니와 암브로시우스라는 좋은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전기는 방탕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위대함을 보여 주었고, 또한 인생에서 좋은 신앙의 스승을 만나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것을 함께 알려줏낟. 어거스틴은 회심을 하고 모니카와 함께 로마를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에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하였고, 곧 모니카는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수도원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17세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면서 성직자로 안수를 받고 히포의 주교(395)가 되어 목회를 하면서 신학적 작업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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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5장 성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1) 생애|작성자 물길손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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