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동의어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다른 표기 언어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저작자 |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
---|
요약 구소련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국가들은 물론, 각국의 노동 운동에서 이론적인 지주의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현실적인 행동 지침서가 되기도 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공산당 선언』만큼 전 세계에 널리 읽히며 또한 현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정치적 문서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문서는 1959년까지 8개 국어로 출판되었다는 보고가 있는데, 사회주의 국가뿐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존재 양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전체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제목으로,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 역사를 되돌아보며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2대 계급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제1장의 첫 문장에는 이와 같은 유명한 구절이 적혀 있다. 실로 명쾌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너무나 명쾌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란 도대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인가, ‘계급 투쟁’이라는 말의 ‘계급’이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내용을 의미하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이같이 단정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 등이다.
이 책은 1847년 12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저술되었는데, 1888년에 출간된 영어판에서는 엥겔스가 바로 이곳에 주를 달아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란 ‘문서로 기록된 역사의 전체’를 의미하므로 그 이전의 사회 조직은 원시 공동체로서 계급 분열이 없었다고 기술했다. 너무나 단정적이라는 비판으로 인해 이 부분에 이 같은 제한 조건을 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계급’이란 무엇인가. 두 사람은 이 문장의 뒤를 이어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장인과 직인각주1) 의 사례를 들고 있다. 생산 관계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서로 다르고 생산 수단에 대한 관계가 서로 다른 것은 물론, 그에 의해 사회적 노동 조직 속에서 수행하는 역할이나 사회적 부의 할당을 손에 넣는 방법과 양 또한 서로 다르다고 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론되는 엄밀한 의미의 ‘계급’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억압을 가하는 그룹과 그 억압을 받는 그룹으로 나누어 생각한 것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곧, 두 사람이 문제 삼고자 한 것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근대에 등장한 2대 계급이며 또한 그 부분에 논의 전개를 집중시키기 위해 근대 이전을 소홀히 다룬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 책이 역사 연구서가 아닌 정치적 문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의 논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신대륙의 발견과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항로의 발견은 동인도와 중국 시장을 개척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미국과 함께 그 밖의 식민지와의 교역도 활발하게 해 주었다. 따라서 공업과 상업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봉건 사회의 조합적 공업의 경영 방식은 매뉴팩처로 바뀌게 되었다. 자본가가 소유하는 작업장에서 노동자는 분업 체제를 통해 수공업적 작업을 수행하는, 이른바 매뉴팩처는 생산력은 높여 주었지만 시장 확대에 따른 수요 확대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증기 기관과 기계가 도입되면서 근대적 대공업이 형성되었고, 그 통솔자로 근대적 부르주아지가 출현했다. 세계 시장을 배경으로 한 공업과 상업, 교통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지는 자본을 증가시키며 근대의 의회제 국가에서 독점적으로 정치적 지배력을 쟁취하게 된 것이다.
지배권을 손에 넣은 부르주아지는 봉건적이며 가부장제적이고 목가적인 모든 관계를 한꺼번에 파괴하고 그것을 적나라한 금전 관계로 교체했다. 나아가 부르주아지는 생산 도구 등 생산에 관련된 모든 관계와 사회적 여러 관계 등 모든 것을 쉬지 않고 변혁해 나갔다. 생산과 소비를 세계적 규모로 확대하고 교통 역시 세계적 규모로 확장해 농촌을 도시의 지배 아래로 종속시키며 자유 경쟁에 적합한 사회 제도 및 정치 제도를 구축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의 지배와 그 기초를 이루는 소유 관계는 마침내 두 가지 측면에서 위협받게 되었다. 그 하나는 주기적으로 닥쳐오는 공황이었다. 이는 거대해진 생산력이 생산 수단의 사유를 축으로 한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에 적합하지 않아 장애를 일으킨 것을 뜻한다. 또 하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이다.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임금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것 이외에는 생계를 유지할 수단이 없었다. 더욱이 기계의 도입으로 노동이 단순화되면서 노임 역시 겨우 생활이 가능한 최저선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 시간의 연장과 기계의 운전 속도의 상승으로 노동의 양은 계속 증대되었다. 또한 여성을 노동 현장에 동원함으로써 임금은 더욱 저하되었다. 이에 따라 마침내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노동자들은 직접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는 부르주아 고용주에 대해 개별적으로 들고일어나 개선을 요구하거나 기계를 때려 부수었다. 그렇지만 결국은 같은 처지에 놓인 다수의 노동자들이 공장 지대의 일정한 곳에 모여 단결하며 투쟁하게 되었다. 투쟁은 패배할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도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게 되어 더욱 단결을 확대했다. 이와 같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대다수의 이익을 위한 대다수의 자주적인 운동이었다. 마침내 프롤레타리아트는 공공연하게 혁명을 일으켜 부르주아지를 폭력적으로 타도하고 지배권을 손에 넣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스스로 그 자신의 무덤을 파 줄 묘지기를 키워 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
제2장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에서는 공산주의자의 목적과 과제를 명확히 하며 공산주의자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 장은 매우 난해하여 건너뛰고 읽는 경우도 많지만 정독해 보면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귀중한 내용이 담겨 있다.
공산주의자는 항상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통된 이익을 강조하고 주장한다. 이들은 실천적으로는 매우 강경하며 끊임없이 전진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여러 조건과 진로 그리고 일반적 결과를 잘 이해하고 있다. 공산주의자의 당면 목적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형성과 부르주아 지배의 타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권력 획득이다. 이는 그것을 통해 모든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와 모든 소유 관계를 폐지하고 생산 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개체적 소유각주2) 를 실현시켜 계급 차별을 소멸하기 위함이다. 실로 이와 같은 진정한 목적이 달성된다면,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지배가 즉각 폐지되고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 조건이 되는 연합체’의 형성이라는 궁극적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당면 목적과 진정한 목적, 궁극적 목적 등 세 가지 목적이 거론되고 있는 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당면 목적을 절대화하여 진정한 목적을 잊게 되면 공산당의 독재적 지배라는 실로 두려운 사태가 생겨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적 소유를 폐지하는 것이 실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열심히 설명하며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하고 있다. 사적 소유의 폐지란 부르주아적인 사적 소유의 폐지를 의미한다. 부르주아적인 사적 소유란 임금과 노동을 착취하는 소유, 곧 원래는 사회적인 힘이었을 자본을 개인이 갖게 된 소유와 다수를 무소유 상태로 몰아넣는 소유, 노동이 자본 · 화폐 · 지대와 같이 독점 가능한 것으로 전화되는 소유 등을 말한다.
따라서 그러한 소유의 폐지는 노동이 노동자를 위한 소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개인의 개체적 소유가 부르주아적 소유로 전화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생산 수단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의 폐지는 모든 개인의 개체적 소유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진정한 개체적 소유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와 교양, 법, 가족, 교육 등도 부르주아적 특수 양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와 같이 설명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지배권을 손에 넣을 때의 구체적인 여러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 계급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두 사람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의 다수자이므로 그들에 의한 지배는 당연히 민주주의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두 번째,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변혁시키는 여러 정책은 ‘국가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서술한 점이다. 국가마다 구체적 조건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혁명을 추진하는 방법 역시 당연히 다르다고 두 사람은 생각했다. 혁명이 가장 진전된 나라에서 전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책으로, 토지의 국유화와 강도 높은 누진 소득세, 상속권의 폐지,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 몰수, 국가 자본에 의한 국립 은행의 설립, 전체 운송 기관의 국유화, 국유 공장의 확대와 공동 계획에 의한 토지의 개간 및 개량, 만민에게 평등한 노동의 의무, 농경 산업군의 설치, 농업 경영과 공업 경영의 통합, 도시와 농촌의 대립 제거, 공공의 무상 교육, 아동의 공장 노동 폐지, 교육과 물질적 생산과의 통합 등의 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통합 사회를 만들어 낸 모든 개개인의 손에 전체 생산이 집중될 때,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지배 역시 폐지되며 궁극적 목적이 실현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적 문헌
제3장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적 문헌’에서는 이제까지 나온 문헌을 검토하면서 반동적 사회주의각주3) 와 보수적 사회주의 또는 부르주아 사회주의, 비판적, 곧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로 분류하고, 각각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 지어 비판했다.
내용적 검토가 필요한 항목은 상속권의 폐지로, 두 사람은 생시몽과 푸리에, 오언 등이 주장한 이 체계가 본래적 의미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적 체계’라고 평가했다. 이는 그들이 고안한 사회 조직이 노동자의 계급 이익을 대표하고 있으며, 계급 대립의 소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에는 아직까지 계급 투쟁의 형태가 발달해 있지 않았고 또한 그들 자신이 노동자 계급과 함께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개혁을 사회 전체에, 그리고 오히려 지배 계급에 호소해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의 정치적 · 혁명적 행동을 비난하고 소규모의 실험을 통해서만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의 한계라고 두 사람은 지적하고 있다.
여러 반대 당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
제4장 ‘여러 반대 당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입장’은 기본적 전략을 제시한 내용이다. 공산주의자는 노동자 계급의 목적과 이익에 일치하는 한 다른 야당과의 공동 전선을 취할 수 있지만, 이럴 경우에도 항상 미래에 대한 전망을 분명히 하여 노동자들에게 명확한 계급 의식을 갖추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고 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예를 들면 독일의 경우에서처럼 부르주아 혁명을 곧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서막으로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산당 선언』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연히 끝맺고 있다.
“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혁명을 통해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이 손에 쥐게 될 것은 전 세계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공산당 선언』(1848)은 1848년 2월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 형태로 런던에서 발표된 것이다. 1836년 파리에서 독일 망명자들에 의해 결성된 ‘정의자동맹’은 이후 활동 중심을 런던으로 옮겨 1847년 봄부터 마르크스(1818~1883)와 엥겔스(1820~1895)에게 접근해 애초에 바이틀링 등이 전개한 공산주의와 음모적 형태로부터 탈피하려고 했다. 1847년 여름에 런던에서 열린 대회를 통해 이 동맹은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후 11월의 대회에 출석해 발표한 마르크스의 견해가 토론을 거쳐 승인됨으로써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강령을 기초하도록 위임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5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공동으로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미 포이어바흐의 비판을 통해 ‘역사적 유물론’의 골격을 형성해 놓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새로운 역사관에 입각한 이론적이며 실천적인 강령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 ‘선언’이 사회주의가 아닌 공산주의 선언으로 이름 지어진 것에 대해서, 엥겔스는 1888년 영어판의 서문 속에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847년 당시 사회주의라고 하면 오언파, 푸리에파 등 유토피아적 체계의 신봉자나, 자본과 이윤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사회적 폐해를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대체로 그들은 노동 문제 밖에 놓여 있는 ‘교양 있는’ 계급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한편 노동자 계급 중 당시 자신들의 정치 혁명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자각하며 전면적인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들이 펼치는 운동은 비록 거칠고 조잡한 공산주의일지라도 노동자 계급 자신들의 운동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공산주의는 이런 조잡한 공산주의와는 달랐지만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노동자 계급 스스로가 실현시켜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어 이들의 이름, 곧 공산주의와 공산당의 이름을 택한 것이었다.
『공산당 선언』의 프랑스어판은 1848년의 6월 반란 직전에 파리에서 출판되었으며, 최초의 영역본은 1850년 런던에서 간행되었다. 이리하여 『공산당 선언』은 국제적 노동 운동 및 혁명 운동에 관한 지침으로 또한 사회주의의 이론적 기초로서 불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회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폴레옹 2세 (0) | 2018.07.26 |
---|---|
마르크스 (0) | 2018.07.08 |
교회 분열의 역사와 교파의 탄생 (0) | 2018.06.30 |
[스크랩] 기독교 전래와 분열의 역사 (0) | 2018.06.30 |
한국 장로교회 약사 (0) | 2018.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