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교회 분열의 역사와 교파의 탄생
1. 용어에 대한 이해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은 하나인 교회의 분열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 분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교파들의 상이한 해석 때문에 교회 분열을 말 그대로 분열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참된 그리스도의 하나의 교회를 드러내기 위한 다양성으로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분열의 역사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여기서는 먼저 분열된 교회 역사 속에서 흔히 사용해온 교회 용어들에 대하여 몇 가지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반석 위에 12제자를 중심으로 세우신 교회는 인류 역사 안에서 하나이고 단일한 교회이다.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결코 저승의 세력도 이길 수 없을 만큼 그 단일성과 거룩함이 보존된 교회이다(마태 16, 18 참조). 동시에 이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오면서, 모든 시대를 거쳐 특정 언어와 인종, 민족과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온 인류에 열린 참으로 공번된(catholicus), 즉 “보편적인 교회”라고 고백된다. 우리의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교회를 믿나이다’에서 교회란 바로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세우신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된 교회를 말한다.
2) 가톨릭 교회는 초기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발전된 서방 교회와 동방의 비잔틴 문화 속에서 발전한 동방 교회로 구분되어 상호 협력 관계에 있었다. 특히 동방교회는 초기 그리스도교 교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공의회들이 개최된 지역들, 가령 니케아(325년), 콘스탄티노플(381: 오늘날의 이스탄불), 에페소(431), 칼케돈(451년)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서방과 동방 교회는 성화상 공경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 서로 다른 전통과 신앙 교의에 대한 해석, 특히 교회 수위권에 대한 논쟁에 휩싸이면서 마침내 서로를 불신하고 상호 단죄의 형태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1054년). 이러한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면부터 교회의 수위권을 간직한 로마의 교황에 순명하면서 서방 교회의 전통과 교회법에 따르는 가톨릭 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라 부르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를 중심으로 동방의 고유한 전례와 고대 교회의 일곱 개의 공의회의 결정들을 따르는 사도적 신앙 전통을 간직한 교회를 ‘정교회(Orthodox)’ 혹은 ‘동방 교회’라고 불렀다. 동방 교회는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분열된 교회의 첫 번째 형태로 유지되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양 교회가 상호 파문을 공식적으로 철회한 후(1965년) 화해와 일치를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동.서방 교회의 분열 이후 동방 교회들 중에서 동방 전례를 따르면서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와 일치한 교회들을 “동방 가톨릭 교회(Eastern Catholic Church)” 혹은 “동방귀일교회”라고 부른다.
3) ‘프로테스탄트’란 말은 16세기 서구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마르틴 루터(M. Luther)를 시작으로 칼뱅(J. Cavin)과 츠빙글리(U. Zwingli)등의 개혁가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진 교회 개혁 운동에서 나온 말이다. ‘프로테스트(protest)’란 말은 1529년 2월 21일에 시작된 독일의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종교개혁 측에 선 소수파의 제후와 도시가, 다수파의 가톨릭측의 황제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공적으로 표명해서 항의(protestatio)한 것에서 유래하였다.그래서 이들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간 ‘프로테스탄트’란 이름으로 불렸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교파의 생성은 종교 개혁이후 하나의 교회가 분열된 중대한 위기의 현상이기도 했다.
4)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구교’란 용어는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를 대비하여 부르는 말이다. 하나의 성경을 구약과 신약 성경을 구분해서 말하듯, 가톨릭 교회가 옛 교회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구교’란 말을 썼고, 개신교는 새로운 신앙 전통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신교’란 말을 쓰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신·구교란 용어가 지닌 다소 애매한 내용 때문에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
5) ‘천주교’란 용어는 16세기 말경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를 통해 중국에 전해지면서, 라틴어의 하느님을 뜻하는 ‘'Deus’ 또는 그리스어 ‘Theos’를 ‘천주(天主)’라는 말로 번역하여 사용하면서 통용되기 시작하였다.가톨릭의 보편성을 표현해내는 한자어로 중국 유교 전통에서 말하는 ‘천(天)’이 통용되었고, 인격적인 “천(天)의 주인(主)를 섬기는 종교”라는 의미로서 천주 신앙이 18세기 한국에 전래되면서 후기 유학자이자 초기 천주교 학자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그 결과 가톨릭 교회는 만물의 주인이고 섭리자이신 하느님을 표현하는 인격적 천(天)의 주인(主)을 믿는 종교라는 의미에서 ‘천주교(天主敎)’란 용어가 오랜 토로과정 끝에 공식적으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한 지역 교회를 의미한다.
6) ‘개신교’란 용어는 ‘천주교’란 한자식 용어에 대비하여, 믿음(信)을 새롭게 개혁한(改) 종교란 의미에서 한국의 개신교를 표현하는 용어로 한국 사회에 정착되었다. 그러나 개신교란 표현은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란 용어에 대한 한자식 표현이지만, 대체로 한국의 개신교 선교 초기 역사에서 천주교의 박해로 인한 신앙 기피 현상을 탈피하기 위해서 선교 전략상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교회란 의미보다는 천주교와는 차별화된 다른 ‘종교(宗敎)’의 의미로 전래되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국 개신교는 개신교란 용어보다는 ‘그리스도교’란 용어를 음률만 따서 한자식으로 표현한 ‘기독교(基督敎)’란 용어로 자신들을 지칭해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란 모든 그리스도교를 포괄하는 용어이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개신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토착화된 셈이다.그래서 한국 가톨릭 교회는 천주교와 개신교란 대칭적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반면,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와 기독교’로 대비하거나, ‘프로테스탄트’란 부정적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기독교란 용어를 가톨릭과 대비해서 쓰는 데 익숙해져있다.
7) ‘교파(denomination)’란 용어는 “종교적으로 특수한 견해나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의 단체 또는 종파, 주로 개신교 내의 루터파 교회, 개혁파 교회 등과 같은 여러 종교 공동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래는 특정한 믿음에 대한 개인이나 집단적인 신앙고백 내지는 신조를 뜻한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의미는 독일을 중심으로 특정 신앙의 교리체계에 대한 규범적인 진술을 고백하는 특정 교회들이나 공동체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즉 하나의 종교로서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신앙적 전통과 교리, 전례와 신심의 차이를 안고 있는 다양한 교회들 혹은 교회 공동체들을 가리킨다.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신앙도 다양한 이유로 서로 갈라져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침례교, 성결교 등으로 분열되었는데, 이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교파’들로 부른다.
반면에 ‘교단’이란 용어는 “공통된 신앙 및 교리를 가진 신도들로 조직된 종교단체” 혹은 “여러 교파가 모인 단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 안에서 교파들 간에 다양한 이유로 분열되어 있는 개신교 분파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통상적으로 교파란 용어와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장로교와 같이 다양한 이유로 교회 연합을 독립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교회들의 모임을 ‘교단’으로 부르기도 한다. 가령 장로교 안에서도 ‘대한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있고, 이들 안에서도 ‘고신’, ‘통합’, ‘합동’, ‘합신’ ‘개혁’, ‘호헌’ 등의 수백 개의 교단들로 독립되어 있기도 하다.
2. 하나인 교회의 분열인가? 다양성 속의 일치의 표징인가?
교회의 분열의 역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항상 해석을 필요로 하며 해석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져나간 형제들에 대한 역사적 기술은 타교파의 관점에서 보면 사뭇 다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교회 분열의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에는 과거 ‘논쟁형식’을 통해 서로 대립되는 점을 강조하거나, 배타적인 관점에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호교론적 관점이 강조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정교회와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통의 전통을 드러내고 대립적인 논쟁보다는 공통의 영적 유산에 주목하는 ‘화합형식’이 나타나고, 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교회 분열의 표면적인 이유에 숨겨 있는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혀내려는 교회사적 노력도 일어났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일치를 위한 보다 발전적인 교회사적 관점은 “에큐메니칼 문학형식”을 필요로 한다. 이는 교파 간에 대화하려는 의지, 즉 상대방의 정당한 요청에 응하기 위해 상대방의 입장을 그 역사적 발전과정 안에서 가능한한 완전한 객관성을 갖고 내면에서부터 파악하려는 것을 말하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 분열의 역사를 여기서 기술하려는 것은 공의회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의 교회의 분열이 “어떤 때에는 양쪽 사람들의 잘못”(일치교령 3항)이 없지 않았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물론 가톨릭 교회가 교회의 분열을 바라보는 입장에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교회 역사 속에 발생한 동방 교회와의 상호단죄를 통한 분열(1054)과 종교개혁(1517)을 통한 개신교 신앙의 출발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이자 유일한 가톨릭 교회의 단일성이 훼손된 사건이라고 규정해왔다. 따라서 교회 일치란 예수가 세우고 사도로부터 계승된 가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진 교회들이 재결합하는 것임을 천명해왔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가톨릭 교회가 교회의 분열의 원인을 갈라진 형제들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가톨릭 교회 스스로에게도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회 분열을 바라보는 입장도 변화하고 있다:
“하느님의 이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미 분열이 생겨났으며(1코린 11,18-19; 갈라 1,6-9; 1요한 2,18-19 참조) 사도는 이 분열을 단죄하여야 한다고 엄중히 책망하였다.(1코린 1,11 이하; 11,22 참조) 후세기에서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공동체들이 가톨릭 교회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졌으며, 어떤 때에는 양쪽 사람들의 잘못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공동체들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분열 죄로 비난받을 수는 없으며, 가톨릭 교회는 그들을 형제적 존경과 사랑으로 끌어 안는다.”
또한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달라졌다. 과거 교회를 가시적인 교계제도로 이루어지는 제도교회로만 강조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대로 하느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영적인 면모를 되찾으려 하였다. ‘교회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세상이 생길 때부터 이미 예표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고, 마지막 시대에 세워져 성령 강림으로 드러났으며, 세말에 영광스러이 완성될 것이다. 그 때에는, 거룩한 교부들의 기록대로, ‘의인 아벨부터 마지막 뽑힌 사람까지’아담 이래의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 일치’란 “이미 예표 되었고, 준비되었으며, 세상에 드러난” 예수의 교회가 세말에 완성될 교회의 ‘신비’에 속한다. 가톨릭 교회의 일치운동은 갈라진 형제들과 화해와 하나의 교회 안에서 가시적 일치를 이루기까지 서로의 일치를 방해하는 비성경적, 비신학적 요소들을 넘어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적 일치를 이루는 순례의 여정을 살고 있다고 고백한다.
개신교의 경우 교회의 분열이 교회의 스캔들임을 인정하지만, 오히려 예수가 세운 하나인 교회가 세상에 드러낸 삶의 다양성을 증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미 초기 교회부터 예수가 세운 교회는 획일화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생을 믿는 이들의 신앙 공동체들의 다양성 안에서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교회 일치를 서로에게 달리 이해된 교회의 모습 속에서 참된 교회를 이루어나가기 위한 배움의 과정이자, 다양성 안에서 일치된 교회의 모습을 찾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개신교는 가톨릭의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교회 해석과는 달리 관계를 토대로 각 교회가 ‘협의회성’을 회복할 때, 참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대한다. 여기서 ‘협의회적 교제’라는 말은 교회의 일치를 가톨릭 교회처럼 위계적 권위와 질서에 의해 뒷받침되는 교회의 일치보다는 충만한 상호책임과 연대성 속에서 서로를 자매로 인정하는 하나의 역동적 운동이며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협의회적 교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상호인정과 성찬례의 공동 거행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고, 획일적 일치나 구조적, 기능적 일치가 아닌 교인 개인과 개교회의 은사, 타자성에 대한 깊은 존경이 결합된 능동적 관용과 상호 개방과 인정을 통한 배움의 자세를 요구한다.
3. 교회 분열의 간략한 역사와 그 쟁점들
역사 안에서 교회의 분열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여기서 갈라져나간 그리스도교 교파들의 서로 다른 해석에도 불구하고 교회 분열을 이해하는 하나의 공통된 관점이 존재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께서 세우신 하나인 교회를 역사 안에서 온전히 보전하고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는 복음 선포적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점이다. 모든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의 사명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기로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를 통하여 지속될 것이다(마태 28, 19-20 참조).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신앙을 공동으로 고백하고 표현하기 위한 그리스도 신앙의 순수성은 역사 안에서 왜곡되고 반대되기도 하였다. 교회 분열의 역사는 사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이단(heresy)’과의 투쟁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 교회의 상처이기도 하다.
교회 역사는 교회 분열의 두 가지 커다란 흐름 속에서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일치교령’은 교회의 분열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 첫째는 동방에서 생긴 것으로서, 에페소와 칼케돈 공의회의 교의 정식 논쟁에서, 또는 그 후대에 들어 동방 총대주교좌와 로마 사도좌 사이의 교회적 친교의 단절로 생겨난 것이다. 또 다른 분열은 그 뒤 4세기가 더 지난 다음,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들에서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서 국가나 교파의 공동체들이 로마 사도좌에서 갈라져 나갔다. 가톨릭의 전통과 제도가 부분적으로 존속되고 있는 교회들 가운데에서는 영국 성공회가 특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는 교회 분열의 역사를 교회 일치적 관점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도시대
신약성경, 특히 초기 교회의 실상을 자세하게 전달해준 사도 바오로와 사도들의 서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계약으로 맺어진 신약의 하느님의 백성이자,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에서 이미 처음부터 분열이 생겨났고, 이 분열은 엄중하게 책망되어야 함을 전해준다.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당시의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반도, 이집트 등지로 전파되었고, 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어서 칼데아 지방과 아르메니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1세기 중엽부터는 제국의 수도 로마에 신앙이 전해졌고 거기서 서부, 즉 서유럽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초기 사도들의 교회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 과정에서 나타난 교회의 첫 번째 분열의 위기가 등장한다(사도 15, 1-21; 갈라 2, 1-10 참조).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면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법규 적용에 대한 문제로 적지 않은 갈등이 발생하였다. 몇몇 유대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하여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방계 선교에 힘쓴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고(사도 15,1-6),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모교회에서 첫 사도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사도 교회는 베드로의 코르넬리우스 개종 사건(사도 10, 1- 11)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대한 언급과 야고보의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언한 칠십인역 인용문(아모 9,11-12; 이사 45,21)을 들어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결국 바오로 사도의 이방계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도적 권한을 인정하고,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삶의 원칙들을 강요하지 않는 상호 인정주의를 통하여 분열의 위험을 넘어섰다.
이렇듯 사도 교회가 당면한 교회 분열의 첫 위기는 다른 민족 출신들이 유대교의 굴레를 쓰지 않고 곧바로 그리스도교에 영입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의지에 따른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극복되었고,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자체를 다 지키지는 않아도 유대인들에게 혐오가 될 행동을 자제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교회 내 분열을 극복하였다.
2) 초기 교부시대 - 이단과의 투쟁
유대인 공동체와는 구별된 초기 예루살렘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의 선교활동은 고대 근동국가들과 희랍 문명의 영향을 받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공동체 신앙의 형성을 이끌었다. 무엇보다 교회의 박해시대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는 더욱 전파되어 갔고,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일찍부터 종교적 중심지로서 서로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갔다. 1세기부터 2세기 초에 걸친 사도 교회 시기에는 다양한 전례와 보편화된 교계제도와 주교직과 더불어 독자적이고 때로는 서로 차별화된 형태의 그리스도교 전례가 부흥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예수의 직접 목격자들이었던 사도들이 죽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성령께 대한 신뢰로 살아간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정통성 시비에 대한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정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이단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단 출현의 가장 큰 원인은 플라톤과 신플라톤의 이원론적 희랍 사상의 영향이었다. 가장 심각한 위협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원에 관한 정통 교리와는 다른 이단적 사상들이었다. 선과 악의 이원론적 신관을 주장한 ‘영지주의(Gnosticism)’는 육신을 경시하고 영적인 지식, 영적인 깨달음(gnosis)을 통하여 인간이 구원된다고 주장하여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에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선과 악의 이원론을 강조한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마르치온(Marcionism)은 구약의 창조자를 악신 데미우르고스라고 주장하여 창조주 하느님을 부인함으로써 구약성경을 거부하였고, 육신의 죄성을 강조하여 구원은 영혼에만 해당하기에 육체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철저한 금욕생활을 강조하였다. 금욕생활에 대한 강조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대한 부정과 교회제도와 체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다. 동시에 하느님이 죄에 물든 육체를 취할 수 없다하여 예수는 단지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나타났을 뿐이라는 ‘가현설’을 주함으로써 예수의 인성을 통한 그리스도교의 육화 신비를 거부하는 결과까지 낳았다.
초기 교회에 영지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또 다른 이단은 ‘몬타누스주의(Montanism)’였는데, 이들은 2-3세기에 걸쳐 교회 박해를 통해 나타난 종말에 대한 사상을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와 연결해서 극단적인 생활규범의 쇄신과 예언운동을 전개하였고, 열광주의적인 성령의 은사운동을 펼쳤다. 몬타누스는 재림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엄격한 윤리규범을 강조하고, 성령론에 입각하여 율법주의적 삶을 정당화함으로써 제도화된 교회와 교계제도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교부시대에 들어서면서 동방과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예수의 인격에 대한 정체성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과연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온전한 결합은 가능한가라는 그리스도론적 질문은 안티오키아 학파를 중심으로 예수의 인성이 강조된 아리우스 이단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 이단과의 논쟁을 일으켰다.
4세기경 아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에 있어서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게로 종속시키는 단원론을 주장한 오리게네스의 영향으로 “성부와 성자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고 비슷할 뿐이다”(homoiousios)라고 주장하여 예수의 신성을 거부하고, 그를 순수한 인간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homoousios)’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에 영향으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았지만, 로마가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린 후 동로마 황제가 아리우스를 지지함에 따라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정통 교리를 주장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체사레아의 바실리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의 그레고리우스와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양산하게 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주의를 금지했고 니케아 신경이 승인되면서 아리우스 이단은 극복되었지만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아리우스 이단과는 반대로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428)는 예수를 한 인간이 아닌 신의 아들로만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따라서 마리아는 니케아 공의회 결정대로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라 불릴 수 없고, 다만 그녀가 한 인간 예수를 낳은 한에서 단순히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주장을 하였다. 이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간의 첨예한 논쟁으로 번졌고, 정치적인 문제로 연결되어 교황과 황제 간의 세력다툼으로 이어졌으며, 교회 분열의 위험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에 대한 논쟁 속에서 초기 교부들은 사도전승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교회적 규범들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치쁘리아누스,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는 1) 성경의 정경화, 2) 사도신경의 제정, 3) 교도권의 확립을 통하여 이단들과의 논쟁 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중대한 규범들을 제정하였다.또한 공의회를 개최하여 교회와 신앙을 위협하던 이단들을 단죄하고 신앙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와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제정 및 정통 신앙고백을 통하여 예수의 신성을 거부한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했고, 이어 열린 에페소 공의회(431)에서는 예수의 인성을 거부한 네스토리우스 이단에 맞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을 낳은 자’라는 뜻의 ‘테오토코스(theotokos)’ 로 선포하였다. 칼케돈 공의회(45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의 양성을 강조하면서,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론적 논쟁을 종식시켰다.
3) 고대 교회의 첫 분열
동방 교회에서 발생한 첫 번째 교회의 분열은 바로 에페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의 교의 결정에 불복하여 발생했다. 당시 동로마 황제의 영향을 받아온 5개의 지역들, 즉 로마,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와는 달리 더 동쪽에 위치한 교회, 즉 셀루시아-크테시폰 교회(Seleucia-Ktesiphon)는 페르시아의 정치적 영향권 안에 놓여 있었다.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으로 인한 교회들 간의 소통의 어려움은 이들 동방 교회들이 에페소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에페소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 출신 네스토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결정된 ‘하느님의 모친’ 교리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분열은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결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에 대한 교리를 수용하지 못했던 고대 동방교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역시 정치적 문제로 공의회에 참석하지 못했고, 단성론에 빠져 있던 알렉산드리아 치릴루스(Cyrillus +304)와 그의 후계자인 디오스쿠로스(Dioscuros +530)에 대한 입장에 서서 칼케돈 공의회의 교의 결정에 불복하기에 이르렀다. 537년 이래로 알렉산드리아에는 교계제도를 갖추고 공의회에 참석한 두 개의 작은 교회들이 공존했는데, 하나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연결된 멜키(Melchite)교회들과 이집트 문화에 더 깊은 뿌리를 둔 이른바 ‘곱트 교회(Coptic)’였다. 640년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멜키교회들은 더 이상 정치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교회가 쇠락한 반면,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곱트 교회는 수도공동체 형태로 유지되어 왔다.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에서는 칼케돈 결정에 대한 찬반의 입장이 서로 뒤바뀌다가, 결국 6세기 중반에 야곱 바르다이오스(Jakobos Baradaios) 총대주교는 주교들을 서품하면서 반칼케돈(non-chalcedonisch) 교회와 독자적인 교회 조직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칼케돈 결정에 따르던 신자들은 시리아 민족의 반대자들이었던 그리스 민족에 속하게 되었다. 10세기부터 12세기 사이에 칼케돈 결정을 따른 소수 교회들이 전례와 콘스탄티노플 신학의 일부를 수용하면서 본래의 전례와 신학의 중요한 부분들, 가령 직무, 교회관 등은 반칼케돈 교회들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결과 20세기 중반까지 단성론자들로 치부되던 반칼케돈 교회들을 오늘날 ‘고대 동방 교회’ 혹은 ‘고대 오리엔트 교회’(Old Oriental Church)라고 부르게 되었다.
4) 11세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
교회가 로마 제국으로 편입되어 제국교회의 형태를 갖추면서 서로 다른 문화와 사유 방식의 차이로 인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방 교회(orthodox church)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라틴 문화권에 있던 서방 교회(roman catholic)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동·서방의 교회들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닌 언어와 문화적 차이, 관습과 신심의 차이와 더불어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분열이었기에 이는 이단논쟁이 아닌 상호파문(Schisma)의 형태로 갈라지게 되었다.
동·서방의 갈등과 분열은 정치적인 영향이 컸다. 작은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의해 330년에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어 황제가 상주하면서 강력한 세력을 발휘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4세기부터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콘스탄티노플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지였을 뿐만이 아니라, 동로마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신로마’로 불리기도 하였다.반면에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이 있은 이후에, 비잔티움의 정치적 라이벌 이었던 서방의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베드로와 그 후계자인 로마 주교에 의한 교회의 중앙집권적 개념을 주장한 반면 동방에서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단에 의한 교회의 과두정치적 개념을 주장했는데 이 두 편 사이에는 필연적인 대립은 없었다. 동방교회는 로마의 주교를 ‘동급자중의 수위자’로 생각했으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재치권(裁治權)이 우선적이란 의식을 갖지 않았다. 이 교의는 로마 교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나 동방교회는 이 문제는 권한 밖에 있는 것이었으므로 무관심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당시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그리스도교 세계를 로마 대관구, 콘스탄티노플 대관구,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 대교구로 5개의 대관구 순서를 정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체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있을 경우 이 다섯 개 대관구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교회 공의회를 개최하여 해결하였다. 그러나 동방의 대관구들이 교회 역사에서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격렬한 신학적 논쟁에 빠져 혼란을 겪은 반면 로마는 별다른 신학적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로마의 교황권의 강화는 590년 그레고리오 1세가 교황직에 오른 이후 로마 대관구는 다른 4개의 대관구를 훨씬 능가하는 교세와 영향력을 갖게 했으며, 이후 로마 대관구는 다른 나머지 4개의 대관구들과 문화적, 정치적, 신학적으로 소외와 갈등을 겪어왔다. 특히 동방의 황제가 남이탈리아에 영향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교황 레오 3세(795-816)가 프랑크 왕국을 지지하면서 카를 대제(Karl der Grosse 742-814)의 보호를 받고자 하였다. 동방 대관구들은 이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로마 대관구와 대립하였고, 로마 교황이 수위권을 주장하자 오랜 교회적 전통과 교세를 들어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교회를 둘러싸고 깊어가는 동·서방의 갈등을 해결하기 교황 레오 9세(1049-1054)는 실바 칸디다(Silva Candida)의 훔베르트 추기경과 몬테 카시노 수도원 원장인 프리드리히와 아말피의 주교 베드로를 교황사절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Donatio Constantini)’ 문서와 베드로의 후계로 이어지는 교황의 절대적인 수위권에 의거하여 로마의 재치권상의 수위권과 그들이 유일하게 유효하고 또 전통에 따른 것으로 여기던 서방 관습들의 승인을 요구하였다.황제는 이들을 정중하게 맞아 해결을 모색하였으나, 총대주교는 이들과의 접견을 회피하였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던 중 교황의 서거 소식에 접한 교황 사절들은 이를 빨리 해결하기 위하여 소피아 성당의 제대 위의 총대주교의 파문서를 낭독하며 “하느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실 것이다(Videat Deus et judicet)”라고 외친 후 떠났다(1054년 7월 16일).이에 맞대응으로 체룰라리우스 총대주교는 시노드를 소집하여 파문서의 저자와 그 추종자들을 그 해 7월 24일 파문하였다.
그러나 동·서방교회의 분열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양 교회가 가져온 고유한 관습과 문화적 차이가 더 컸다. 그 가운데 8-9세기에 벌어진 ‘성화상 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은 큰 내적 갈등의 시작이었다.동방 교회에서는 이미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요 참 하느님이시다.”라는 교의에 대한 신학적 논란을 거친 후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성화상 공경이 특별한 의미로 대중적인 영성으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신인양성설’을 교리로 선포한 이후 로마 교회에서는 이 성화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드러낼 뿐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즉 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그려낸 성화상이 자칫 당시 이단으로 단죄 받아 인성만을 강조한 아리아니즘이나 신성만을 강조한 단성설을 조장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성화상 파괴논쟁으로 벌어진 동·서방 교회의 갈등은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교제의 단절을 가져오고 말았다.
결국 논란 끝에 성화상 공경은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사람들이 성화상들을 주의 깊게 바라볼수록 이 형상들이 그려내려던 원형(Urbild)들을 더 기억하고 깊게 관조할 수 있도록 이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교회들은 이들이 깊은 경배와 찬미를 드리도록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신성의 참된 경배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보고, 이와 더불어 값지고 생생하게 만들어진 십자가들과 화려하게 치장된 복음서, 그리고 아름답게 축성된 성물들에게 분향과 촛불을 통해 더 깊이 경배를 드릴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공의회는 대 바실리오 성인의 말씀대로 “성화들의 공경이 원형을 향하고 있고, 성화를 공경하는 이는 그 안에서 표현하고자 한 인격(Person)을 경배하는 것이다.”(DH 601)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신심의 차이는 추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의 내적인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었다.
동·서방교회의 분열 이후 12,13세기의 십자군들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점령과 동방 교회 구역 안에서 라틴계 주교구의 설립은 동·서방교회의 갈등을 일반 신도들 사이에까지 심화시켰다.사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1054)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사건이 아니라, 기원후 1세기부터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가 발전해 나오던 초기 시대부터 발생한 동·서방교회 간의 소외 관계가 중세시대까지 계속되면서 점점 악화되어 폭발한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정치적 사건뿐만이 아니라 언어적 차이와 문화적 차이도 그 불화의 요인 중 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동로마와 라틴어를 사용하던 서로마 사이에 문화적 차이와 교리의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의 두 교회의 대립으로 극대화되었다.즉 그리스 철학에 근본을 두고 있던 동방교회와 로마법에 근본을 둔 서방교회의 신학은 여러 가지 오해를 낳게 되었다.
특별히 동·서방 교회의 성령에 관한 신학적 대립은 두 교회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필리오퀘(Filioque) 논쟁’은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동·서방의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동방교회는 성령의 발출을 “성자를 통하여 성자에게서 발한다(qui ex Patre per Filium)”라고 고백하면서 성령에게 무게를 둔 반면, 서방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qui ex Patre Filioque) 나온다(發)라고 해석하였는데,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이 같은 해석을 신경의 변조라고 비판하였다. 즉 ‘필리오퀘’의 삽입이 성삼위의 인격 사이에 균형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성령의 활동에 대한 잘못된 오해를 유발시킨다고 비판했다.그 밖에도 서방교회는 성직독신주의를 강요하고, 견진성사의 권한을 주교에게만 부여하며, 성체성사 때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하는 등 동방교회와의 충분한 교류가 없이 정식화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결국 11세기 초에는 전례상의 관습의 차이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양측 교회 간에 있었던 전례상의 교류의 중단까지 초래했다.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리옹 공의회(1274)와 페라라-플로렌즈 공의회(1438-39)를 통해 재일치가 모색되었으나, 1453년 터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한 이후 독재와 압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5)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교회 쇄신과 관련된 중세의 노력은 이미 중세 초기부터 다양한 교회 개혁을 위한 집단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의 노력은 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를 아우르는 신학 사상들(성경, 신관, 교회관, 은총과 의화, 성사이해)과 이들 사상에 뿌리를 둔 교회의 실천적 신심들(보속, 사죄, 성지순례, 선업, 성인공경, 미사성제의 이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정치적으로는 중세에 들어서면서 무슬림의 정치적 압박과 유럽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군주제가 도입되면서 오랫동안 교계제도를 중심으로 발전한 로마 가톨릭의 교황권과 왕권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막대한 부를 누리는 부유민들의 도덕적 타락과 빈농들 사이의 감정이 악화되었고, 이러한 세속적 부에 교회가 결탁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교회 쇄신에 대한 요청은 교회 안팎에서 거세게 몰아 닥쳤다.
독일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사이자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 Luther, 1483-1546)로부터 시작된 교회 개혁의 열망은 개혁신앙의 탄생으로 이어져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진 개신교의 탄생을 낳았다. 그러나 종교 개혁은 사실상 순수한 교회 쇄신의 요청으로 시작되었으나, 단순히 교회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 사회, 문화적인 충돌로 야기된 다양한 문제들이 결국 교회의 분열이라는 상처를 낳게 하였다.
정신사적으로는 성경과 희랍사상에 대한 복고적 열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혁신을 요청한 르네상스와 문예부흥, 인본주의 운동이 종교 개혁의 배경이었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교회의 세속화에 따른 성직자들의 부패와 성사적 은총의 남발로 인한 교회의 사죄권에 대한 오용과 이에 따른 대사(indulgence) 논쟁에 기인하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쇠퇴한 교황과 교회의 권위에 반발하고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며 교회의 개혁을 요청했던 요한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와 요한 후스(John Huss 1372-1415), 그리고 에라스무스(Erasmus 1469-1536)는 종교 개혁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인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화논쟁이 부각되었다.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 외에 필요한 조건으로서 스스로 죄를 기워 갚기 위한 인간의 선업(善業)을 강조한 반면,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서는 이러한 인간의 선업적 협력이 구원에 필수조건이 될 수 없다는 반대에 부딪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515년 이른바 ‘탑체험’을 통하여 인간들이 구원을 받기 위한 스스로의 노력의 무위성을 강조하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sola fide)이 구원을 가능하게 하고, 하느님의 은총만(sola gratia)이 유일하게 죄인을 조건 없이 수용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만든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계시 신앙의 원천인 성경과 교회의 전승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지나친 성경적 권위보다 더 우월하게 받아들인 성전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 반대하여,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이 하느님 말씀의 계시 원천임을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된 마르틴 루터는 당시의 연옥사상과 보속의 지나친 강조와 성사론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하면서 당시 로마 베드로 성전의 보수를 위해 무분별하게 남발되던 ‘대사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회 비판과 개혁 사상을 담은 95개조 반박문을 제시하고, 로마 교황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지역 영주들이 이에 동조하면서부터 교회 분열이 가시화되었다. 그는 세 편의 논문을 통해서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강조하였다.
루터의 교회 쇄신의 요청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의 사상에 대한 몇 번의 토론을 거쳐(1518/1519) 마침내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단죄되었다.그리고 그의 사상은 미사의 희생적 의미와 복음적 자유의 본질, 독신제와 수도원 서원 등에 대한 대중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는 1523년에 교회 분열을 막기 위해 화해를 요청했으나 정치적 상황은 교회와 수도원 재산에 대한 분쟁으로 빚어져 결국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러한 종교개혁은 교파 신앙의 탄생은 물론이고, 신앙의 구체적인 표현과 형태에 가톨릭 교회와는 많은 차이점을 가져왔다. 개신교는 앞에서 언급한 3대 신조(성경만으로, 은총만으로, 성경만으로)를 토대로 가톨릭 미사의 제사적 성격을 거부하고,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적 성격을 강조하였으며, 주교, 사제, 부제의 교직권자들의 특별한 사제권과 독신제를 부정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제로 불리었다는 일반 사제직을 강조하였다. 이와 더불어 라틴어로 이루어진 미사전례와는 달리 자국의 공용어를 이용한 예배형태와 사제들에게만 허용된 성혈을 모든 이들이 모실 수 있도록 개방하는 개혁 신앙의 형태들이 나타났다.
6) 개신교 교파들의 탄생
종교 개혁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만이 아닌, 개신교회들 사이에서의 분열을 이끌어 내는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개신교 교파들의 탄생은 개혁신앙의 성격상 자유로운 성경 해석과 교파들의 상이한 신앙적 관점들을 통일시켜줄 교도권과 같은 규범이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신교 신앙이 끊임없이 교회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하는 개혁신앙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개신교의 ‘교파화 과정’은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관점에서 보는 상실과 분열의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될 사건이 아니라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교회와 사회의 내부적인 재조직과 기틀 마련이라는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사회변혁의 과정으로 보기도 한다. 즉 교파의 발생은 한편으로는 교황권의 약화와 국가권력의 팽창의 결과로 교파들의 관계 문제가 국가의 선택에 맡겨지게 되고 그 결과 각 교회의 교파들이 국가권력과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각 교파마다 신앙을 민족적 특성과 정서에 맞도록 자율적으로 해석하여 사회의 규율과 통제를 이끌어내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교파화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첫째로, 1555년에 아우구스부르크 종교 의회는 오랜 분쟁 끝에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고,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에 합의하면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개신교 교파 신앙이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루터의 신앙 고백도 제국 안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후 발생한 30년 전쟁에 따른 협약과 프랑스 왕과 독일 제후들과의 권력 싸움, 슈말칼덴(Schmalkaden)에서의 프로테스탄트의 방위동맹, 그리고 제국의 정책은 신앙의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바꾸게 하였다.
둘째는 민중들의 빈곤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서부터였다. 농민들의 반란, 빈곤에 빠진 기사들, 환속한 수도사들과 수녀들도 기존의 교회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개혁 신앙을 요청하였다.
셋째는 독일 제국 내에서 루터신앙이 1580년 협약서를 통해 통일된 기초교리로 발전하면서 제국의 교회통치에 예속되는 현상이 발생한 점이다. 물론 여기서 교파화 과정이 교회분열을 직접적으로 의도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제국의 교회통치가 교계제도의 부재의 위기를 극복하려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당시 개신교가 독자적인 직무를 내세움으로써 주교직에 관한 신학이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교파화의 과정 속에 가장 먼저 종교 개혁을 시작한 마르틴 루터는 독일의 아우구수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이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서 성경연구를 통하여 복음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써 의롭게된다”란 의미의 개신교의 구원론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다른 교리적 변화를 요청했다(1517). 그러나 루터의 교리 개혁에 대한 의지는 당시 교회 자체의 개혁을 요구하는 급진주의자들과의 대립과 인문주의자들, 농민들과의 결별을 통하여 난관에 처했다. 동시대의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이면서 인문주의자였던 츠빙글리(1484-1531)와의 협력에서도 구원과 하느님의 의지에 관한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발생한 성찬례(성만찬)에서의 현존문제에 대한 이해가 달라 갈라졌다. 이후 루터를 추종하는 루터파는 북유럽과 동유럽에 전파되었고, 특히 북유럽 지역의 덴마크(1539), 스웨덴(1593), 노르웨이 등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세속적 귀족들의 정치적 권익을 위하여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수용하면서 루터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독일의 인문주의자이자 종교개혁가였던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은 1530년 개신교 신앙 고백의 중심이 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를 작성하면서 ‘교파’(confession)의 개념을 탄생시켰다. 그는 마르틴 루터와의 친분관계로 그의 사상을 옹호하면서, 1519년 루터의 사상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요한네스 에크(Johannes Eck)에 맞서 성경의 권위를 옹호했고, 루터보다 먼저 실체변화(화체설) 교리를 배척하면서 의화론을 중심으로 개신교 개혁사상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스위스와 독일 서남부 지방의 대부분에서 인정을 받은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는 신앙의 출발점을 성경으로 두고, 성사가 아닌 신앙을 구원의 도구로 이해하였다. 미사의 제사적 성격을 거부하면서 성체를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표지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개혁사상은 이후 ‘블링거(Heinrich Bullinger, 1484-1531)’가 계승하고, 1549년 칼뱅과 연합하여 루터파와 구별되는 ‘개혁파’를 만들어내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대한 보다 급진적인 입장을 취했던 그레벨(Conrad Grebel), 만쯔(Felix Manz), 후프마이어(Balthasar Hubmeier)는 유아 세례에 대한 유효성 논쟁 속에서 신앙과 지식에 근거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세례를 다시 요구하는 과격파 종교개혁의 운동을 펼쳤는데, 이를 ‘재세례파’(Anabaptist 1525) 운동이라고 한다.이들의 처형과 많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부르크를 중심으로 계속 확산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말기에 재세례파 운동에 1536년 메노 시몬스(1469-1561)가 가톨릭 신부를 그만두고 이에 가담하면서 독일 뮌스터에 성인왕국을 세우려다 추방당한 후 네덜란드에서 재세례파 교인들을 모아 ‘재세례파 교회’, 혹은 ‘메노나이트 교회(Mennonite)’를 세웠다. 이들은 종교와 세상을 분리하여 은둔과 엄격한 집단 규율을 통한 문화적 연대감을 갖은 경건주의적 성격을 뗬다.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존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본래 유대인이었지만, 개종 이후 신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에서의 개신교 신앙의 박해로 밀려나 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1535년부터 1564년까지 스위스 바젤에서 복음주의를 강조하는 신앙인으로서 거듭나 개혁파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이냐시오 로욜라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영성과 유사하게 1536년에 하느님의 영광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를 저술하고, 하느님의 의지 이외의 어떠한 선업의 기준도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기 이전에 이미 축복과 저주에로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는 ‘예정설(predestination)’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 행정제도는 교황제도가 아니고, 신도들의 투표로 선출하는 장로회 제도임을 주장하면서, 성경만을 신앙 규범으로 삼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 속에서 성사의 표지적 의미(signum fidei)만을 강조하는 ‘장로교’를 창설하였다(1536년).
개혁교회인 장로교가 교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의 신앙과 칼뱅의 신앙이 성찬례 문제에서 서로 화해를 하면서 1549년에 ‘취리히 합의(Consensus Tirurinus)’을 맺으면서부터였다. 그 결과 1566년에 이 둘은 공동으로 ‘제2스위스 신조(Confessio Helvetica Posterior)’에 합의하였고, 이윽고 독일 영주 프리드리히 3세가 칼뱅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1563년에는 이른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이 생겨났다. 프랑스 칼뱅주의자들은 1559년에 그들의 신앙을 요약한 프랑스 신앙고백서(Confessio Fidei Gallicana)를 펴내면서 장로교의 교파 교회의 사상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개혁교회인 장로교는 이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원했던 네덜란드의 반 가톨릭운동과 결합하면서 선교에 성공하였고, 독일에서는 가톨릭과 루터파의 강세로 몇몇 지역만 선교에 성공했지만, 이후 프랑스, 헝가리, 스코틀랜드, 영국 등 여러 유럽국가에 선교하면서 미국의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으로 인한 교회의 쇠락에 맞서 내부적 교회 개혁을 단행하였다. 트렌토 공의회(1545-1563)는 개신교와 차별화된 가톨릭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 이들에 대한 단죄의 성격을 띤 가톨릭 교파 신앙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주로 종교개혁 당시 문제가 된 신학적, 교회적 문제들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는 초기 교회부터 지켜온 교회의 전통을 수호하고, 논란이 된 교회적 문제들을 새롭게 정비하는 데 성공하였다. 사제 독신제와 7성사의 확립, 교회법과 관련된 오늘날의 대부분의 가톨릭 신앙은 이 공의회를 통하여 그 골격이 완성되었다.
개신교 신앙의 자유 이후에도 교파 간의 분쟁은 지속되어 신성로마제국인 독일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간의 분쟁에 복잡한 정치적인 목적이 결합되어 30년간 종교전쟁(1618-1648)을 일으켰고, 1648년 체결된 다국가간 조약이었던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으로 북유럽 국가들에서는 개신교 신앙이 확산되었고, 결국 독일 교회의 붕괴와 유럽의 국제 정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7) 영국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단절
개신교 신앙이 가톨릭 신앙에 대한 개혁신앙의 성격으로 시작되었다면, 영국의 성공회는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이유가 교파 탄생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영국 교회는 오랫동안 토착신앙으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영국 교회 역시 15세기 말부터 로마가톨릭에 반발하는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옥스퍼드 대학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영국의 복음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교황의 잘못을 지적했고, 수도원과 성직자들의 부의 축적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영국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륙의 종교 개혁 운동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황제 헨리 8세(1491-1547)는 처음에는 루터와 종교 개혁에 반대해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sor Fidei)”란 칭호까지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왕비인 아라곤의 카타리나 사이에서 딸 메리 외에 자신을 계승할 아들이 없자, 그녀와의 혼인무효를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요청했으나 거부당함으로써 분열의 불씨를 만들었다. 1534년 영국 의회는 정치적이고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로마 교회의 관할권으로부터 독립된 교회가 되고자 하면서 교황이 아닌 국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알리는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통과시켰고, 헨리 8세는 궁녀 앤 불린(Anne Boleyn)과 결혼하였다. 1536년에는 로마의 감독권을 폐지하는 법령을 발표하면서 로마 교회와 결별하여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헨리 8세를 뒤이어 즉위한 에드워드 6세(1547-1553)는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면서 1549년에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제작하고 1553년에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캐서린의 딸인 여왕 메리 1세(Mary Stuart 1553~1558)가 가톨릭 교회로 복귀하여 종교개혁자들을 무수히 처형했으나, 앤 볼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가 즉위하면서 통일령(統一令)을 반포하여 유일 최고의 수장을 ‘유일 최고의 통치자’라는 칭호로 바꾸어서 국교회(國敎會)’ 체제를 강화시켰다. 엘리자베스 1세는 로마의 가톨릭과 제네바의 칼뱅주의 사이에서 ‘중용의 길(via media)’을 택하겠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성공회주의(Anglicanism)가 확립되었다. 그 이후 1559년 로마가톨릭과 개신교를 포용하는 기도서를 제정하고, 1563년 중용 노선을 추구하는 39개 신조를 발표하면서 가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였으나, 1570년 교황 비오 5세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자 성공회는 로마교회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이러한 영국 교회의 독립과 더불어 청교도(Puritan) 정신을 지닌 이들이 주교직의 폐지와 새로운 성경번역과 주해를 시도하였다. 그러자 1604년에 즉위한 제이콥 1세(Jacob I) 왕과 캔터베리의 주교 리차드 반크로프(Richard Bancroft 1604-1610)는 주교직은 지키면서도 새로운 성경번역을 지원하여 19세기까지 영국에서 이른바 ‘제이콥성경’이 사용되었고, 중세의 교회법도 다시금 부활시켰다.
그러나 의회의 청교도와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고교회(High Church)’가 점차 갈등을 빚으면서 캔터베리의 대주교 라우드(Louds)가 카알 1세 왕에 의해 처형되었고, 의회가 구성되어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의장에 선출되었다. 죽기 직전 가톨릭으로 개종한 카알 2세 왕과 가톨릭 신자가 된 후계자 제이콥 2세(Jocob II.)는 옛 전통을 부활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제이콥 2세가 물러난 후 그의 누이인 마리아가 전권을 이어 받자, 가톨릭 부흥운동에 반대하면서 제이콥 2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던 성직자들과 캔터베리 대주교가 새 여왕에게 충성을 거역하자 투옥되고 말았다. 이들은 성직 계승권이 없이 서품을 시도해 교회로부터 파문되고 말았다.
8) 18세기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대두와 감리교의 출현
18세기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계몽주의의 흐름은 기존의 신앙 세계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를 통한 이성(理性)의 새로운 각성은 신앙을 삶의 중심에 놓던 서구인들에게 교회 신앙에 대한 위기의식을 증대시켰다. 인간 이성의 합리성에 대한 깊은 신뢰와 여기서 나타난 이신론(理神論 Deism), 즉 신을 존재의 원리로만 이해하는 극단적인 이성주의는 종교의 비합리성에 대한 비판과 그리스도교 계시 사건에 대한 합리성에 대한 의문을 자아냈고, 이는 19세기 회의주의와 불가지론 등의 무신론적 사조를 낳게 되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과거 교회와 신에 종속되었던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강조한 자유주의 사상과 인간의 감성적 요소들을 재발견하고자 한 낭만주의 사조들로 말미암아 교회와 신학 안에서도 이들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은 개신교의 교파 탄생에도 영향을 미쳐 다양한 교파들이 독특한 사유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교파 간의 신학적 비교와 가톨릭 신앙과의 화해가 시도되고, 개신교 내부에서의 공동의 신앙을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부터는 영국으로부터 많은 성직자들에 의해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나 개신교 신앙 공동고백이 이뤄지면서, 영국 성공회의 사제인 요한 웨슬리(1703-1791)에 의해 1738년 감리교(Methodist Church)가 탄생하였다. 이들은 노예매매와 같은 매우 사회적인 문제에 깊이 관여하면서 칼뱅의 예정설에 깊이 심취하였다. 이는 1784년 미국 감리교감독교회 창설(Methodist Episcopal Church)로 이어졌다.
9) 19세기 경건주의(pietism)와 교단의 연합과 발전
19세기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공동체 보다는 개체로서의 인간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개인적 회심과 치유를 목표로 한 신심이 공식적 교회질서보다 더 중시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는 상이한 신앙적 이해에 따라 갈라졌던 교파들 간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
19세기 신심주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살아있는 삶의 증언 속에서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공동의 신앙과 삶의 원천을 성경에서 찾는 각성운동과 성령쇄신 및 부흥운동을 시도하였다.특히 19세기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은 청교도 정신을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성과 철저한 성화, 개인적인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성결교’의 창설로 이어졌다. 이어 지역 교회별로 갈라져있던 개신교회들은 자기 교단 안에서의 연합운동을 시작하여, 성공회(1867), 루터교(1868), 장로교(1875), 감리교(1881), 침례교(1875), 성결교(1901)의 교단 내의 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영향 속에 19세기 영국에서는 이른바 친가톨릭적 옥스퍼드 운동도 일어났는데, 이는 사도 전승들을 중요시하고 교회의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강조하였다. 1829년에 제정된 법규에 따라 가톨릭 신자들은 공식적으로 예배를 거행할 수 있게 되었다. 옥스퍼드 운동은 영국 교회 안에서 교황제도를 제외한 전통적인 가톨릭의 교리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존 로크(John Locke) 등의 합리주의자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들이 무시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운동의 결과로 영국 교회는 19세기 중엽에 이른바 합리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저교회파(Low Church)’와 영국 가톨릭적 성향을 가진 ‘고교회파(High Church)’로 갈라져 불리게 되었다.
10)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70)의 개최와 구가톨릭 교회
계몽주의 사조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자연적인 성격이 배제되고, 계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이신론(理神論)에 대항하여 초자연적 신앙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가톨릭 신앙을 호교론적 입장에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직전에 교황 비오 9세는 오류목록(Syllabus errorum)을 발표하여 근대주의에 대해 단죄하여 교황의 수위권을 강화하였고, 공의회를 통하여 교황의 무류지권(Infallibilitas)의 교의화가 이루어졌으며, 초자연적 신앙에 기반을 둔 제도 교회로서의 가톨릭 교회가 타교파들에 대해 우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자, 교회를 완전사회체(societas perfecta)이자, “가톨릭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 결과 교황권의 강화에 대한 교회 안팎의 반발이 야기되었고, 네덜란드에서는 극단적인 엄격주의를 전개한 얀세니즘이 교회 안에서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신의 은총과 예정설을 강조하여 1856년 이단으로 단죄되었으나, 그 영향력은 오랫동안 미치게 되었다.
동시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권과 수위권에 반대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진 “구가톨릭교회(Old Catholic church)”혹은 “복고 가톨릭교회”가 출현하였다. 뮌헨의 교회역사학자인 될링거(Ignaz von Döllinger)는 공의회의 교황 수위권과 무류권의 교의화가 사도적 전통을 무시하고, 신경에서 고백하는 교회의 모습이 단절된 것으로 보고 비판하였다. 1871년 독일 뮌헨에서 국제 회의를 갖고 다음 해에 독립된 교파로 형성된 이후 이들은 과거의 가톨릭의 정통교리를 수호하고, 새로운 로마 가톨릭 교리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사제 독신제의 선택과 고해성사 의무의 철폐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와 현대 가톨릭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1, 2차 세계 대전 이후 인류의 역사에서 새롭게 자각된 실존주의적 입장과 인격주의적 철학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앙에 새로운 쇄신에 가져다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과거 호교론적 입장만 강조해온 가톨릭 신학은 계시를 더 이상 교회 조직을 위한 이론적 체계가 아닌, 인간 현존재의 실존적 입장에서 경험적으로 파악 가능한 하느님의 계시 사건에 대한 인격-통교적-친교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면서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그리스도교 신앙의 현대적 해석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내었다.
특별히 일치와 성령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 밖의 종교인들과 신앙인들, 비그리스도교와 비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화해와 일치를 강조하면서 이들을 대화의 장으로 초대하였다. 동시에 공의회가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있어서 교회의 현대 세계에로의 적응과 쇄신, 사목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임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쇄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가톨릭의 쇄신 정신을 교회의 세속화로 비판한 르페브르(M. Lefebvre 1905-1991) 대주교와 그의 추종자인 성 비오 10세회는 전통 가톨릭의 근본주의적 신앙을 고수하고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 개혁에 대해 반대하면서 미사 전례에 있어서 라틴어로된 트렌토 방식의 전례만 사용하고, 1988년에 교황의 승인 없이 4명의 주교를 서품해 1988년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20세기 이후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다원주의 사상과 신흥영성운동, 즉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뉴에이지(New Age) 운동’이 발전하면서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앙과 영성을 대체하고자 하는 현대적 영성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에 기반한 신흥 종교와 사이비 종교들의 난립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교회관에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오면서 오늘날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교회 일치 운동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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