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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칼럼

그리스도인을 위한 자기 반성

by 이덕휴-dhleepaul 2023. 4. 17.

그리스도인을 위한 자기 반성

고전 3:16-17;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시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교회와 그 지도자

1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성령으로 행하는 자로 말할 수 없고 오직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에 불과한 자로 말할 수 없노라 

2 내가 너희에게 젖을 주고 단단한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아직 먹을 준비가 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실제로, 당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3 여러분은 여전히 ​​세속적입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으니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냐? 당신은 단순한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울 편이라 하고 어떤 이는 나는 아볼로 편이라 하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냐

5 아볼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주께서 각각 맡은 일을 맡기신 대로 너희로 말미암아 믿게 된 종뿐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느니라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하나이나 각각 자기가 수고한 대로 상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 3:8

 

1 Corinthians 3:8 - God's Fellow Workers

He who plants and he who waters are one in purpose, and each will be rewarded according to his own labor.

biblehub.com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하나이나 각각 자기의 수고한 대로 상을 받으리라 

고린도전서 4:5 그러므로 정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사람의 마음속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 때에 각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1 Corinthians 4:5 - Servants of Christ

Therefore judge nothing before the appointed time; wait until the Lord comes. He will bring to light what is hidden in darkness and will expose the motives of men's hearts. At that time each will receive his praise from God.

biblehub.com

고린도전서 9:17 만일 나의 설교가 자원하는 것이라면 나는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발적이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4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일을 시험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는 남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자랑할 것입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동역자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10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로 나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놓았고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니 그러나 각자는 주의를 기울여 건축해야 합니다. 

11 이미 닦아 놓은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귀한 돌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기초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나타날 터이니 이는 그것은 불로 드러나고 그 불은 각 사람의 일의 질을 시험할 것입니다.

14 만일 지은 것이 남게 되면 지은 자가 상을 받을 것이요 15 만일 그것이 불타면 건축하는 자가 해를 입으나 구원을 얻으리니 마치 불 가운데서 피하는 자 같으니라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이 너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가 함께 성전이라.

18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시대에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지혜 있는 자가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되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지혜 로운 자들을 그들의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이 헛된 줄을 아신다 하였느니라 21 그러므로 더 이상 인간 지도자들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 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 것임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속하였느니라

 

각주 :
 19 욥 5:13
 20 시편 94:11
 22

 

 서론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화된 상식과 성숙한 판단력을 따라 신앙적 지침을 찾아야 한다. 구원의 효력과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사회적 관계와 모든 피조물과의 상호 관계에까지 확장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문제의 도덕적 결정을 위해 동기와 결과, 자신과 이웃과 공동체를 항상 함께 생각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당시 헬라인들의 종교의식 속에 나타난 육욕적 황홀경(sensual ecstasy)이나 난교(亂交)적 열정(orgiastic enthusiasm)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생활, 즉 깨어 있고, 단정하고 올바른 삶을 살았다. 헬라인들의 종교의식은 음란과 방탕과 술 취함, 즉 윤리적 문란이 그 특징이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부관계, 부자관계, 노사관계(엡 5:22-6:9)를 올바르게 맺는 윤리적 생활을 강조했다. 방탕한 상태에서 쾌락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지배되는 삶을 강조하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다(엡 5:18).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에 걸맞는 삶이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그렇게 살지 못할 때에는 심한 경고를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술 취함은 '깨어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잠든 상태'의 심각한 죄이다.

 

본론

 

1. 신학적 반성

 

성경에는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아디아포라’라고 한다.

아디아포라란 그 자체로는 선악이 될 수 없는 것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행위들, 신자 각자의 판단과 양식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는 일들을 말한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루터와 칼빈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개혁을 말했다는 점에서 이 두 개혁자의 형식적 원리(formal principle)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루터나 칼빈만이 아니라 쯔빙글리나 멜란히톤에게 있어서도 동일했다. 루터는 교황의 무오성의 문제도 만일 로마교가 성경에 근거하여 그 점을 밝혀낸다면 받아드릴 수 있다고 보았을 만큼 개혁에서의 성경의 권위에 의존적이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교황의 무오성을 성경으로 증명하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해야 할 것이다.

루터와 칼빈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디아포라의 문제였다. 루터는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전통(관습)은 구속력이 있고, 따라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 로마교회의 모든 전통이나 관습들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원리는 교리적인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교회관이나 교회정치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디아포라(diaphora)라고 하는데, 이것을 존 머리(John Murry)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라고 불렀다. 규정적 원리란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는 간섭받은 영역을 의미한다. 이 용어 자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 원리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는 이 문제를 1 6항에서 다루고 있다.

 

규정적 원리와는 반대로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있고, 따라서 임의로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말한다. 이것을 불간섭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배의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몇 시에 예배드릴 것인가, 예배 시에 어떤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할 것인가, 예배순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여기 속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신앙과 양심과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을 카이퍼(R. B. Kuiper) 성화된 상식’(sanctified common sense) 이라고 불렀다.

교회 내에서는 신앙이 연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 같은 행위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취향, 견해 등이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복장 문제, 소비생활, 가제 도구나 자동차, 각종 문화 생활 술 담배에 관한 기호식품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개성을 중시한다고 하여 이런 것들을 잘 다루지 않으면 서로가 많은 어려움을 당한다. 이런 것들은 어떤 기준으로 다루어야 하나?

 

(3) 아디아포라를 위한 원칙

성경 시대에는 예배의 날이나 절기, 우상숭배를 하고 난 후 시장에서 판 고기를 먹는 경우가 문제가 되었다(롬 14장; 고전 8-10장).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선악의 기준이 되지 않지만 믿음의 정도에 따라,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서로의 의견이 달라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직접적인 문제가 되지 않지만 술 담배의 문제등, 이런 성격을 가진 다른 것들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기나 고기 먹는 문제를 다룬 그 원칙으로 오늘날의 문제들을 다룰 수 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 .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9, 12-1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내 행동으로 인해 형제가 실족하지 않게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3-16).

 

2.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내 자신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19-22).

 

- 이끌든지, 비끼든지, 따르든지

 

나폴레옹 황제 휘하에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병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 나폴레옹 일병이 행동이 안 좋고, 늘 문제를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 황제가 나폴레옹 일병을 불러서 말하기를 :

“네 이름을 바꾸든지, 네 행동을 고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3. 기독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따라다니니,

나의 언행을 통해서 그리스도영광을 받기도 하고, 을 돌릴 수도 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1) 율법(계명,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23절)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유대인들의 문제율법(계명)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쳤으나, 자기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ㄱ) 도적질 말라 반포하면서 자신은 도적질하고,

ㄴ)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신이 간음하고,

ㄷ) 우상 숭배하지 말라고 하면서 신전 물건도적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자랑하는 네가 율법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 말을 거꾸로 말하면 율법(말씀)지켜 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된다.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 착한 행실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이고 소금이다.

 

(마 5:16) 너희 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한다.

자기 희생을 통한 착한 행실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착한 행실은 문자 그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불우한 이웃을 돌보며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벧전 4:11) 만일 누가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두 가지가 나온다.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열매 맺는 삶을 통하여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3가지가 있다.

의(義)의 열매 구령의 열매 ③성령의 열매이다.

의(義)의 열매는 : 거룩에 이르는 열매, 성결의 열매이다.

그래서 의의 열매회개가 먼저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빌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구령의 열매 :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서 영혼구원하는 열매이다.

이것은 주님의 지상 명령해당(該當)된다.

 

(막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전파하라.

 

(마 28:19-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아들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딤후 4:1-2) 하나님 앞과 산 자죽은 자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성령의 열매 :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인격의 열매이다.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

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1:14) 나로 말미암아 영광하나님께 돌리니라.

 

 

결론

 

-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기독교인의 가장 큰 덕목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한 가지 목적을 목표로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결정하되 주 안에서 참된 신앙의 기준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문화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영위해 나가는 모든 정신적 육신적 활동과 그 결과를 말한다. 사람이 누리는 문화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이 말씀을 문화 명령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문화도 타락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과 사탄을 위해 오, 남용되기도 하므로 문화에 대한 성경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기독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플라톤주의가 기독교의 뼈대가 되었다면서 둘의 조화를 주장했다.

문화를 변혁시키는 기독교 -어거스틴과 제롬의 입장으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탈취물”로써 성막을 지었듯이 세상의 좋은 것은 취하고 잘못된 것은 변혁시키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신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문화는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과 사탄을 위해 오, 남용되고 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문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문화 속에 사셨지만 죄 없는 삶을 사셨다. 우리도 그 본을 따라야 한다.

 

기독교 윤리에서는 비본질적인 것, 중립적인 것이라는 아디아포라를 매우 중요한 주제로 취급하여 왔다.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적극적으로 금하고 있지 않는 것은 선과 악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신대원(환원신학)에서 공부(M.DIV)하였다.

그 학교는 "본질적인 것은 성서에 따르고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하라"라는 환원신학의 배경에서 공부하였다. 사도바울의 말씀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로마서 14장은 로마교회 안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을 것이냐 먹지 말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는 절대 하지 말아야하는 본질적인 문재입니다. 그러나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는 비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한 말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는 사랑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문제를 아디아포라라고 했습니다.

 

아디아포라에 대한 사도바울의 가르침

첫째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양심의 자유대로 하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양심은 제사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사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야한다는 양심을 가진 내가 먹는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그 음식을 먹는 것이 죄가 아니라 양심을 어긴 것이 죄가 됩니다. 그런데 양심이라는 것은 내 양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양심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의 양심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합니다.

두 번째 사도의 가르침은

나와 다른 양심을 가진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입니다. 왜 우리가 나와 양심의 생각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나와 양심이 다른 사람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월권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을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면 주님의 종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같은 주님의 종입니다. 절대 우리가 그 사람의 주인이 아닙니다. 또 나만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의견이 다른 그 사람도 주님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위하지만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서로 비판한다면 마지막 주님의 심판대에서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합니다.

오늘은 아디아포라에 대한 세 번째 사도의 가르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디아포라에 대한 사도의 세 번째 가르침은 형제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먹어도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양심의 자유가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상처를 입는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형제에게 상처를 주면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8: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합니다.

 

 “롬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술)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상처를 주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본질에 일치, 비본질에 자유, 모든 것에 사랑(롬1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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