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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학

한국교회의 선교역사

by 이덕휴-dhleepaul 2023. 5. 1.

 

 

 

                                 한국교회의 선교역사

 

I. 개신교 선교의 여명: 복음과 만남

한국교회의 선교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반도에 복음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접촉하고 들어왔는지를 찾아보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개신교 선교의 관점에서 복음이 들어오게 된 과정을 살펴본 후에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동참하는 과정을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이 땅에 공식적인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기 전에 여러 방면으로 복음의 접촉점이 있었다.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이 일시적으로 조선을 방문하면서 성경을 전해 주었고, 일본과 만주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을 통해 개신교에 입교한 소수의 신자가 있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만난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을 돕고, 이렇게 번역된 우리말 성경을 조선에 들여오면서 개신교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이렇게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선교사가 정식으로 들어오기 전에 우리말로 만들어진 성경이 먼저 이 땅에 들어와 개신교 선교의 초석을 놓는 세계선교역사의 독특한 전례를 남겼다.

 

1. 개신교와의 접촉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한국 땅에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의 시도가 있었다. 이들은 단기간이지만 한문 성경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며 선교의 기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1) 최초의 선교사 칼 귀출라프 선교사는 누구인가?

1832년 한국에 온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laff, 1803-1851)이다. 그의 조선 선교 방문은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는 34,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선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독일 프로이센 제국 프릿츠에서 경건한 크리스토교 가풍을 가진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나고 성장했다. 18세가 되던 해 1821년 독일 최초의 선교사 양성 학교인 베를린 선교학교(Missionsschule in Berlin)에서4월부터 학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베를린 선교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회심을 경험했다. 그러면서 귀츨라프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주님의 이름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즉 선교사에 대한 강한 사명을 확립했다.

그 후 귀츨라프는1823년 부활절부터 베를린 대학교(: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다가 중병으로 중도에 하차하게 되었다. 그 때 네덜란드 선교회에 선교사로 자원했고 중병도 그때 기적적으로 나았다.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출발한 귀츨라프는 인도네시아,싱가폴,태국을 거치면서 독립선교사로 전환했다. 1828년 태국을 방문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방콕에서 선교하면서 태국어로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일부를 번역했다. 실제로 귀츨라프는 언어의 귀재였다. 당연히 모국어인 독일어와 영어, 그리스(헬라), 태국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해서 이들 언어로 다양한 저술과 번역 활동을 하였다.

태국에서의 선교 기간 중1831년은 귀츨라프에게 육신적으로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의 아내 메리 뉴엘(Mary Newell, 1794-1831)이 그해 216일에 쌍둥이 여아의 출산 과정에서 사망하고, 쌍둥이 딸들도 곧 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츨라프의 1차 아시아 선교 여행(1831. 6. 3-12. 13)은 이러한 슬픔을 만난 직후 행해졌는데, 방콕을 출발해서 마카오에 도착하기까지 낡은 중국 돛단배를 타고 중국 연안을 6개월 동안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선교하였다. 조선을 방문한 것은 2차 선교 여행(1832.2.26-9.5) 동안인데, 마카오에서 출발했다. 그는 선교를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와 용선 계약을 맺은 507톤의 범선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에 선의(船醫)와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했다. 이 배는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했던 최초의 서양 선박으로 기록된 바로 그 배이다. 1832717일 오전10시경 귀츨라프 일행에게 조선의 연안이 눈에 들어왔으며 오후 5시경에는 처음으로 조선인들과의 우호적인 만남이 있었다.

귀츨라프가 타고 있는 애머스트호가 조선에 최초로 정박한 곳은 몽금포 앞바다의 몽금도(대도)앞이다. 애머스트호는 다시 남하하여 뱃길을 따라 외연도(721)-녹도(722)-불모도(723)-고대도(725)순으로 항해하였다. 특히 고대도(古代島)는 귀츨라프가812일 그곳을 떠날 때까지 선교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대도를 기점으로 하여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할 수 있었음으로 한국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섬이다.

귀츨라프가 국왕을 위해 준비한 진상품에는 지리,천문,과학서 외에 천,모직물,망원경,유리 그릇 등의 선물이 있었고 중요한 것은 한문 성경 한 권과 크리스토교 전도 책자들이었다.

특히 한문 성경은신천성서’(神天聖書)인데,이 성경은 중국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완역 성경으로서 귀츨라프의 동역자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1823년 말라카(Malacca)에서 출판한 21권 낱권을 선장본으로 엮어 한 권으로 만든 성경이었다.

귀츨라프가 고대도를 중심으로 펼친 선교 활동은 문화적 중개 활동으로 이어졌다. 선교하면서 귀츨라프는 조선 언어를 통한 소통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727일 귀츨라프는 오랜 설득 끝에 고관의 비서 양이(Yang-yih)로 하여금 한글 자모 일체를 쓰게 하였다.

또한 그에게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주면서 읽게 하고,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귀츨라프는 2차 선교 여행 후 이 때 배운 한글을 183211월에 모리슨이 편집자로 있는중국의 보고’(The Chinese Repository)라는 잡지에 소논문 형태로한글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을 발표하였다.

당시로서는 선교 현지에 와서 현지인을 통해 현지 언어인 한글을 채집하여 서양에 구체적으로 발표한 것은 귀츨라프가 최초였다. 이처럼 귀츨라프의 번역 선교는 현지 방문을 통한 성경 번역 선교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말을 익히고,한글을 세계에 첫 번째로 소개한문화적 중개자의 역할도 수행한 것이다.

귀츨라프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당시 먹을 것이 없어 빈궁한 삶을 사는 조선인들을 위해 감자를 직접 심고, 생산하는 방법을 글로 써주었다. 이는 한반도 감자 전래의 최초의 구체적 기록이다. 아울러 같은 이유로 야생 포도의 재배와 그것의 과즙제조 방법도 설명해주며 글로 써 주었다.또한 그는 선교 사역의 한 방편으로서 의술을 베풀며 사람들을 돌보았다.

예를 들면 이미 태국과 중국에서 했던 것처럼 조선에서도 무료로 약을 나누어 주었고,어느 날은 독감에 걸린60명의 노인 환자들에게도 충분한 양의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그는 가능한 한 선교지에서 의료적 도움을 주는 것이 그의 열망이라고 하였는데, 그에게 의술을 베푸는 것이 전형적인 그의 선교의 방편이었다. 그가 만약 조선에 더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었더라면 중국에서처럼 고아원과 학교 같은 사회적 봉사를 통한 선교를 더욱 체계적으로 감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귀츨라프는 조선에서 약 한 달간 선교하면서 얻은 문화적,지리적 정보를 토대로 조선 뿐 만 아니라 동아시아 선교 전략을 세운다.

817일에 애머스트호는 제주도 연안에 도착했는데,

귀츨라프는 제주도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조선,만주 그리고 중국을 잇는 선교기지로서 적합할 것으로 보았다. 귀츨라프의 동아시아 항해기 독문판(1835)에서는 영문판(1834)에서 언급하지 않는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 공동체인 크리스토의 교회의 시작에 관한 언급이 그것이다. 그는 제주도에 선교 기지가 세워진다면

제주도가 인구가 많은 지역들(조선,일본,만주,중국)안에 처음으로 크리스토의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최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조선을 위시한 이들 지역에 복음의 전파와 교회와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귀츨라프가 조선 선교 시에 교회에 대한 언급을 한 것처럼, ‘주님의 교회의 확산’(Ausbreitung der Kirche des Herrn)을 소망한 것이다.

이는 선교 거점인 제주도를 사용하여 조선선교,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대한 선교를 피력한 것으로 한반도를 통한 개신교 선교 전략의 최초 입안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에 자신의 대한 자신의 방문이 효과 있는 선교의 결실, “이 외딴 나라(remote country)에 좋은 씨가 뿌려졌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기대했다.

18518948세의 일기로 홍콩에서 숨졌고,홍콩공원묘지( Hong Kong Cemetery in Happy Valley)의 개신교구역에

 

칼 귀츨라프 선교사의7가지 최초의 기록
1. 최초로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는1866년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 1884년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1885년 입국한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아펜젤러 보다 53년이나 앞서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2. 최초로 한글로 주기도문 번역 시도: 성경에 나오는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단편적이지만 한글 성경번역의 효시라 불릴 만하다.
3. 최초로 한문 성경 전달: 귀츨라프는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이나 한문 전도 서적을 나누어 주었으며,순조 대왕에게는 로버트 모리슨과 밀른 선교사가 번역한 한문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를 진상하였다.
4. 최초로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체계적으로 소개: 당시 조선이 한자 문화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만의 문자인 한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을 배워서 최초로 서양에 체계적이고 학술적으로 한글을 소개하여 세계에 알렸다. 그의 영문 소논문, “한글에 대한 소견은 영어권은 물론 독일어로 일부 번역되어 독일어권에 소개 되어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5. 최초로 서양 감자의 파종: 먹을거리가 제대로 없어 곤궁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실제로 조선인들의 눈앞에서 보여 주었고,또한 글로 써 남겨 주었다(1832730).또한 야생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을 전수하였다(1832731).
6. 최초로 서양 선교사로서 서양 근대 의술을 베풂: 충청도 기착지인 고대도 도착(1832725)이후 줄곧 환자들을 위해 약을 처방하였다.한 예로60명의 노인 감기환자를 위한 충분한 약도 처방해주었다(183282).이 기록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최초의 서양의술을 베푼 기록이다.
7. 최초로 동북아를 위한 체계적인 선교전략의 구상: 귀츨라프는 제주도 일대를 둘러본 후,조선,중국,만주,일본을 잇는 선교기지(Missionsstation)로 알맞다는 생각을 했다.그는 선교기지인 제주도를 통해 조선을 비롯한 동북아 여러 나라에 크리스토의 교회의 첫 번째 시작을 언급하면서 동북아 선교를 위한 기본적인 전략을 처음으로 구상했다.

 

 

2)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제너럴셔먼호사건과 통역관 로버트 토마스

1866(고종 3)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타버린 일이다.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 9,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Rhayada)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대학 과정과 신학 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갓 결혼한 부인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해 가을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을 겪기도 했다.아내를 잃은 슬픔에다 현지 런던 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자 토마스 목사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芝罘, 현재 옌타이) 세관에 취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 목사를 만나면서 선교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토마스 목사는 우연히 한국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천주교 신자 두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에게서 한국 천주교회 박해의 소식을 듣고, 한국 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단 세관에 사표를 내고 한국 선교의 기회를 엿보던 중,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 그는 1865 9, 많은 양의 한문 성경을 가지고 이 배를 타서 황해도 연안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하였다. 약 두 달 반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는 한편, 한국어를 배우면서 열심히 전도한 후 중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국에 올 기회를 찾고 있던 토마스 목사는 때마침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가 무역을 위해 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1866 7, 그는 이 배의 통역 겸 안내자로 동승하여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한국으로 다시 향하게 되었다. 제너럴셔먼호는 한 달 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는 조선은 쇄국 정책으로 외국과의 교류가 국법으로 금지된 시대였으므로 조선의 관리는 배를 돌려 퇴각하라고 명했다.그런데 제너럴셔먼호는 무역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무시하고 강 깊이 항진을 계속하였고, 배에 오른 조선 관리를 억류하며 강압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렇게 되자 결국에는 제너럴셔먼호와 조선 군대 사이에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투로 제너럴셔먼호의 선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 성경 몇 권을 품고 강으로 뛰어내려 헤엄쳐 나왔다. 그 때, 강변에 이른 토마스 목사를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쳐 죽였다. 이로써 토마스 목사는 한국 초기 선교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 박춘권은 자기 칼을 맞고 죽어가는 서양 사람이 건네주는 책을 받지 않았으나, 상황이 끝나고 돌아갈 때,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갔다. 갖고 간 성경을 정독한 그는 후에 예수를 영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어, 안주(安州)교회 영수(領袖)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 목사는 개신교 목사로서 조선 땅에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데, 이때가 1866 9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 갔지만,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2. 선교사 입국 전의 성경 번역과 선교

한국은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말로 된 성경이 먼저 번역되어 들어온 나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하신 특별한 은혜였고, 이러한 조선교회의 선교역사는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별하다.

1)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

조선 후기 관서 지방에 속한 의주는 청나라와의 국경 무역의 요충지여서 상업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했으며 다른 지방보다 개방적이고 독립적이어서 새로운 문화와 사회에 대한 욕구가 강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택하셔서 만주 지역의 선교사들을 만나게 하시고, 더불어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도록 하셨으며 조선에 복음을 수용하고 전파하는 통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셨다. 1872년 만주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와 그의 처남인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만주로 파송한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산동성 지푸에서 사역하는 동역자 윌리엄슨에게 중국과 만주에서 조선인들을 사귀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듣고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역사 91그들은 선교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고려문 국제시장에서 많은 조선인과 접촉하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곳은 조선인들이 중국을 왕래하는 길목이기도 해서 조선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으며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이 서로 합법적으로 교역을 하는 장소였다. 1874 10월부터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선교지부가 있던 지푸를 떠나 만주 고려문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로스는 조선 상인들을 만나 한문 성경을 팔며 전도하려 했지만, 조선인들의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이곳에서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노력하던 중, 당시 장사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져 있던 이응찬을 고용하고 조선인들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조선인들은 무리를 지어 로스가 머물고 있던 여관에 찾아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복음을 들었다. 두 조선인 이응찬과 김진기를 만난 로스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성경 번역에 착수하였다. 이 두 조선인은 1876년에 맥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조선의 첫 개신교인들이 된 것이다. 이들은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자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그 후 이성하, 백홍준, 서상륜, 서경조 등 의주에서 온 젊은 상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 역시 뜻을 합하여 성경 번역에 합류하였다. 로스와 그의 협조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었으며, 1883년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사도행전을 인쇄하였고, 1887년에는 신약 전체를 번역하여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셔 3,000부를 출판하였다. 또한, 로스는 1874년에 한영입문을 저술하여 발행하였으며, 1879년에는 한국의 역사, 예절, 관습을 연이어 내놓았다.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유능한 조선인 협력자들을 얻어 한글 번역 성경을 출판하고, 이들과 힘을 합하여 부지런히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만주에서 이렇게 첫 번째로 형성된 개신교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은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우리말 성경책을 펴냈고, 또 권서인(勸書人=賣書人)이 되어 그 성경책을 직접 우리나라에 가지고 들어와 전하였다. 번역된 쪽복음 성경들이 1882년 로스를 도와 식자공 일을 하던 김청송에 의해 그의 고향인 집안현 안도 한인촌에 배부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의 조선인들은 동족의 입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되었으며, 중국어가 아닌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884년에 안도에서는 75명의 조선인이 신앙을 고백하고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들의 주 활동무대는 만주였으나, 사실상 조선 안까지 복음의 씨를 뿌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성경 번역에 참여한 서상륜을 비롯하여 이성하, 백홍준 등이 성경을 파는 매서인으로, 또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와 대영성서공회는 성경번역을 위하여 로스에게 자금을 지원하였다. 1883, 서상륜은 새로 번역된 복음서 성경을 지참하고 비밀리에 국경을 넘어 조선 안으로 옮겼다. 그러나 국경을 넘다가 관헌에게 책이 발각되는 바람에 구금당하여 책을 압수당할 뻔한 위험에 처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관리로 일하던 먼 친척이 밤에 몰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덕분에 무난하게 책을 반입할 수 있었다. 1884년 봄에 서상륜은 인천에 배편으로 보내온 6,000부의 복음서를 인수하여 여러 지방으로 순회하면92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서 배포하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입수가 국법으로 금지된 복음서를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천세관에서는 몰래 들여오는 책을 적발하여 압수하였으나, 서상륜은 이때에도 묄렌도르프(P. G. von Mollendorf)의 힘을 입어 무사히 통관하였다.서상륜의 고향은 본래 의주였는데, 동생 서경조와 함께 의주를 떠나 인척이 살고 있던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조선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소래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부지런히 전도하여 많은 결신자들을 얻었다. 1886년에는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북쪽 지방 신앙의 구도자들에 대해 현황을 보고한 바 있고, 언더우드는 이에 대한 답례로 1887년 가을에 소래를 방문하여 일골 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서상륜은 이러한 사실들을 만주에 있는 로스에게 알렸다. 그해에 로스는 항로를 통해 입경하여 언더우드를 방문하였으며, 언더우드에 의해 조선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다.

 

2)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한글 성경 번역작업이 이루어졌다. 1882년 개화된 선진문물을 시찰하러 가던 수신자 박영효(朴泳孝)의 신사유람단에는 보조수행원으로 참여한 이수정(李樹廷)이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3개월의 공무가 끝나자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배울 의욕으로 공직을 떠나 일본에 계속 머물렀다. 그는 친구 안종수(安宗洙)의 소개로 농학박사인 독실한 기독교 신자 쯔다센을 찾아 교류하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한문 성경과 한문으로 된 기독교 서적을 읽은 적이 있어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숙부가 병인교난 때 순교한 천주교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깊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와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와 교제를 나누었다. 이들은 일본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후 조선 선교를 위한 교량 역할을 감당한 사람들이다.쯔다센의 소개로 알게 된 일본인 야스까와 도루(Yasukawa Toru) 목사에게서 기독교를 배운 후, 1883 4 29일 일본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 녹스(G. W. Knox)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이수정은 일본에 공부하러 온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였고, 이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수정은 일본의 기독교 잡지 로꾸고 1883 5월호에 요한복음 14장을 읽고 신앙을 고백하는 글을 써서 기고하였다. 이 글을 읽은 일본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enry Loomis)는 그의 신앙이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 후, 루미스의 요청으로 이수정은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수정은 1884년에 현토한한신약성서(懸吐漢韓新約聖書)를 완역하여 출간하였다. 1885년에는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언해가 요꼬하마의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간행되었으며 1884 12월에 1,000부를 인쇄하한국교회 선교역사 93였다. 이수정은 일본에 있는 교포들과 유학생들을 가르치고, 선교잡지를 통하여 미국 기독교에 조선 선교의 시급함을 호소하였다.1885 4 5일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미국 북장로회의 파송을 받고 제물포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이수정에 의하여 번역된 마가복음언해를 지참하고 들어왔다. 이수정을 비롯한 한국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자생적 신앙공동체는 1885년 이후 조선에 입국하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주로 미국이나 캐나다 또는 호주에서 오는 선교사들이 당시 뱃길 때문에 일본을 거쳐서 내한하였는데, 일본에서 조선인 신앙공동체를 만나 언어와 풍습을 미리 경험하고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얻을 수 있었다.

 

3. 개신교 조선 선교의 특징

서구 선교사들의 조선 선교는 먼저 선교가 진행되었던 중국을 통하여 시도되었다. 여러 선교사에 의해 선교가 시도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 땅에 복음이 처음 전파되고, 첫 교회가 설립된 것은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인에 의해서였다. 당시 조선의 선교는 중국 땅에서 주님을 영접한 조선 상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에 돌아와 복음을 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880년대에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서상륜 등 조선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들고 중국을 떠나 조선의 국경 압록강을 건넜을 때 자신들의 조국을 위한 선교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현상이다.성경 번역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된 우리말 성경이 비록 조선교회에서 사용한 번역 성경의 모체가 되지 못했지만, 이 번역 성경을 통하여 첫 개신교 신자들이 처음부터 성경 말씀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본을 거쳐 조선을 찾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초기 선교사들은 이미 이수정이 한글로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지참하고서 입국할 수 있었다.이렇듯 조선교회의 역사는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과정이 있었다. 선교역사를 볼 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외국 선교사가 어느 나라에 정착하여 먼저 선교사 공동체를 이루고, 그 나라의 사람들을 점차 복음화함으로써 차츰 본토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교회가 발전하는 양상을 띠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런 보편적인 현상과는 달리, 먼저 본토인들에 의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성장하고 있는 과정에서 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 즉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만나서, 발전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민족의 복음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94 세계선교의 길라잡이

 

II.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복음의 수용

 

1. 개신교 선교의 시작과 초기 선교사들

1)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한국의 개신교는 1884년 미국 북장로교가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을 한국에 파송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원래 중국 선교사로 자원하여 1883 10월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한국 주재 외국인을 위한 의사가 조선에 없다는 말을 듣고 1884 9 20일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의료선교사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의사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가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1884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개화파의 공격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되었는데 알렌이 3개월 동안 그를 치료하여 완치시켜 주었다. 이를 기회로 알렌은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시의(侍醫)로 임명되었다. 그는 1885 4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을 세우고 조선인 환자들을 돌보았다(후에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 변경). 이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기관일 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이어 들어오는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조선 땅에 머물 수 있는 거소 역할을 하였다.

2)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

의료선교사 알렌이 들어오고 이듬해인 1885 4월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입국하면서 진정한 개신교 선교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는 인도(1706), 중국(1807), 일본(1859) 등 아시아 다른 나라의 개신교 역사와 비교할 때 짧은 역사이다.언더우드는 1859년 영국에서 태어나 1872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화란 개혁교파에서 경영하는 뉴브런즈웍신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부흥목사였던 이스톤(Easton)의 영향을 받아 구세군 전도대에 끼어 노방전도에 나섰다. 신학교를 졸업한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에 뜻을 두고 인도의 지리, 환경, 풍토 등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인도 선교를 위해서는 반드시 의학적인 소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1년 동안 의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일본 명치학원(明治學院)강사로 있었던 알트만(Altmann)박사로부터 조미수호조약으로 조선에 선교의 길이 열렸지만 이를 위한 선교대책은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한국교회 선교역사 95들었다. 그는 인도와 조선 두 곳 중 어느 나라에서 선교사로 사역해야 할 것인가 번민하던 중 조선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조선 선교를 결심하였다. 언더우드는 미국북장로회 선교부 파송으로 1884 12 16일에 조선을 향해 출발하였다. 1885 1월 일본에 도착하자 2개월간 머물면서 이수정(李樹廷)으로부터 조선어와 관행을 배웠으며 그가 번역한 한글 마가복음을 건네받았다. 마침내 같은 해 4 5일 부활주일에 미국북감리회 선교부로부터 파송받은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개신교 첫 목사로서 제물포에 입항하였다. 언더우드는 조선의 어수선한 사정 때문에 일단 자신의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광혜원을 운영하던 알렌의 조수로 들어갔다. 그는 광혜원에서 일하는 동안 의학을 배우던 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치는 한편, 노방전도에도 힘썼다. 1886년에는 고아들을 모아 자기 집에 예수교학당을 설립하여 숙식을 제공하였는데, 이 학당이 바로 경신학교(儆新學校)의 전신이 되었다. 또 그는 조선에 온 지 1년 만에 한글을 익혀 가며 마가복음을 새로 번역하였다. 입국 처음 1년 동안은 선교의 열매가 거의 없었으나 1886 7월에 이르러 드디어 알렌의 한국어 선생이었던 노도사(盧道士: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풂으로써 첫 전도의 결실을 거두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에 자기 집 사랑채에 장로교회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솔내교회의 요청으로 솔내를 직접 방문하여 일곱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아펜젤러와 동역하며 성서번역 사업에도 크게 헌신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미국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이 속속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들은 정식으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선교의 윤허를 받기 위해 힘썼고, 결국 이들의 노력으로 1898년에 정식으로 선교의 윤허가 내려졌다.

 

3)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1885 4 5일 아펜젤러(Appenzeller)와 언더우드가 입국하면서 개신교의 실질적인 조선 선교가 시작되었다. 아펜젤러는 1858 2 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손더톤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펜젤러는 1882년 드류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였고 여기에서 공부하는 동안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피스(Griffis)가 지은 은자의 나라 한국(Korea, The Hermit Nation)이라는 책을 빌려 읽은 다음부터 조선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 그의 선교 목적지는 조선이 아닌 일본이었다.그는 1883 10, 하트포드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연합회 집회에 드류신학교 신학생 대표로 참석하여 해외 선교에 대한 열띤 강연을 듣고서 선교에 대한 열정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이 집회에서 뉴브론즈웍신학교 신학생 대표 언더우드를 만났다. 1884년 그가 졸업반이었을 때, 미국감리회 해외선교부에서는 조선 선교를 단행하기로 하고 우선 학교와 병원사업을 수행할 선교사 후보를 물색하였다. 병원사업에는 의사인 스크랜톤(W. B. Scranton)이 임명되었고 96 세계선교의 길라잡이학교사업은 아펜젤러가 임명받게 되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입국 전 두 달 남짓 일본에 머무는 동안 이수정으로부터 한글을 배웠으며, 그가 번역한 한글본 마가복음을 전해 받았다. 한국에 들어온 그는 교육사업부터 시작하여 두 조선인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 교육과정이 훗날 배재학당의 기초가 되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기독교 신앙과 자립정신도 함께 심어주었다. 그의 행적이 알려지자 곧이어 많은 학생이 몰려들었다. 조금 지나서는 고종까지도 관심을 보여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지닌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교명까지 하사받았다.아펜젤러는 육영사업에 힘쓰는 한편 열정적으로 선교사역에 임하였다. 그는 1885년과 1886년에 각각 두 일본인에게 세례를 주고, 1887년에는 밤마다 그에게 찾아와 성경을 배웠던 배재학당 학생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해 1월에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지금의 정동교회 자리에 벧엘교회를 세우고 10월부터 조선 기독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아펜젤러는 전도는 물론 성서번역과 청년운동에도 주목하였다. 특히 그는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이상재, 이승만, 남궁억 등에게 옥중전도를 전개하여 이들이 기독교에 귀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과도 손을 잡고 기독교청년회(YMCA)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여 1901년에는 배재학당 내에 기독교청년회 써클을 조직하였다. 그는 1902 6월 첫 주일, 목표에서 열릴 예정이던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려고 인천에서 배편으로 목포를 향해 가던 중 군산 근처에서 안개로 인해 항로를 벗어난 일본 상선과 충돌하는 바람에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 개신교 선교사의 활동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크게 복음화, 근대화로 나눌 수 있다. 복음화 활동에는 성경 번역, 성령 운동, 교회 개척과 신학교 설립, 네비우스 정책이 있다. 근대화 사역으로는 의료, 교육 사업과 문서 운동 및 한글 보급 등이 있다.

1)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교회 개척, 신학교 설립

선교 초기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매우 젊은 선교사들이었고 본국에서도 목회와 선교에 경험이 별로 없는 선교사들이 많았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본국 선교본부에 선교경험이 많은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어 그의 경험과 선교방법을 배울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받아들인 본부에서는 당시 중국 산동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네비우스(John Nevius) 선교사를 보냈다. 네비우스는 1890 6월에 와서 2주간 선교전략과 방법론을 강론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다. 이 정책을 바로 한국 선교현장에 적용하여 실천함으로 한국 장한국교회 선교역사 97로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게 된 중요한 요인이며 한국교회 선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조선에서 활동을 시작한 젊은 선교사들은 네비우스와 두 주간을 함께 지내면서 선교방법의 원칙을 배웠으며, 네비우스 정책은 신학교 설립과 기독교 지도자 양성으로 토착화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네비우스가 제시한 원칙은 대개 다음과 같다. 선교사들은 각자 복음 전도와 광범위한 순회 전도를 실시한다.

 자립선교(自立宣敎): 곧 신자 개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성서의 교사가 된다.

 자립정치(自立政治): 신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봉급을 받지 않는 지도자 아래에서 전도와 교회경영을 한다.

 자립보급(自立補給): 모든 교회 건물은 그 교회의 교인들의 힘으로 장만하고 교회의 조직과 동시에 전도인의 봉급을 지급하기 시작한다.

 체계적인 성서연구와 모든 활동에서의 성서의 중심성을 관철한다. 성서연구는 반드시 여럿이 함께 모여서 한다.

 성서의 교훈에 따라서 엄격한 생활훈련과 치리를 한다.

 다른 교회 혹은 기관과 협력 및 일치하려는 노력을 계속하며, 최소한도 다른 기관과는 피차 뜻에 맞게 지역을 분할하여 전도한다.

 지역과 프로그램의 분할 이후에는 상호 간에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나 그 외의 문제에 있어는 항상 폭넓게 서로 돕는 정신을 가진다.강력한 자립정신과 광범위한 순회 선교, 성경에 대한 강력한 강조가 그 기조였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원칙의 핵심에는 이 세상의 생활과 의무에서 떠나는 것이 종교의 본분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통상의 생활을 하면서 교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기독교의 참모습이라는 정신이 짙게 깔려 있었다.네비우스 선교방법론은 조선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 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방법을 한마음으로 수용하였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였다. 이는 선교역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이다. 네비우스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조선교회는 급성장할 수 있었고, 성공적인 선교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선천 선교지부의 보고에 의하면, 1906년에 이 지역에 있는 기독교학교는 56개교, 기독학생은 1,192명이었다. 그런데 이 학교들은 외국 선교회로부터 한 푼의 보조도 받지 않았다. 또 이 지역에는 교회 건물을 가진 교회가 70개나 되었는데, 단지 두 교회만이 선교회의 보조를 받았을 뿐이었다. 1910년에는 전국을 통틀어 80%의 교회가 자립하고 있었다.

2) 장로교의 선교정책

조선에서 선교가 활발해지자, 교파별로 경쟁할 우려가 생겼다. 선교사들은 장시간 토의를 거쳐 네비우스 방법을 선교정책의 원칙으로 수용하여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선교방법은 이미 조직된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지에서의 초창기 선교를 위하여 적절한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었다. 장로교 공의회는 1893년 첫 회합에서 합의를 보아 이미 시행되고 있던 네비우스 방법에 핵심적인 몇 가지 원칙을 수정 보완하여 아래와 같이 선교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상류 계층보다는 근로 계층을 상대로 하여 전도하는 것이 좋다.

 부녀자에게 전도하고 기독교인 소녀들을 교육하는 데 특별히 힘을 기울인다. 왜냐하면 가정주부들, 곧 여성들이 후대의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 정도의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크게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학교사업을 통해 젊은이들을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보내도록 한다.

 장차 조선인 교역자도 결국 이런 곳에서 배출될 것이라는 점에 유의한다.

 사람의 힘만이 사람을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신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빨리 안전하고도 명료하게 번역된 성서를 이들에게 주도록 한다.

 모든 종교 서적은 외국어를 조금도 쓰지 않고, 순 한국어만 사용하도록 한다.

 진취적인 교회는 자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선교사의 도움을 받는 사람의 수는 가급적 줄이고, 자급하여 세상에 봉사하는 개인을 늘린다.

 조선의 대중들은 동족의 전도에 의해서 신앙하게 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 자신(선교사들)이 나서서 하는 것보다는 전도자의 교육에 진력해야 한다.

 의료선교사들은 환자들과 오래 친숙하게 지냄으로써 가르칠 기회를 가지게 되고, 또 깊은 마음의 문제에 골몰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투약만 가지고서는 별 효과를 낼 수 없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은 자기 고향 마을에 자주 왕래하게 해서 의료선교사들의 인애(仁愛)에 넘치는 간호의 경험을 본받아 전도의 문을 열도록 한다.

3) 보건 의료사업

최초의 국립병원인 광혜원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알렌의 요청으로 조정의 허락을 받아 1885 4 9일에 설립되었다. 광혜원은 곧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87년 알렌이 워싱턴 국무성의 조선담당 서기관으로 임명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되자 후임으로 헤론이 제중원을 운영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에 제중원은 구리개(현재의 을지로 2)로 이전하였다. 1888한국교회 선교역사 99년에는 미스 호튼(Lilias S. Horton)과 함께 여성들을 치료하기 위한 여성전용 부인병실을 증설하였다. 의료사업이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면서 여러 선교부에 의해 각지에 병원들이 설립되었다. 1893년 선교연합회는 전국의 주요 도시에 병원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1893 11월에 애비슨은 제중원 원장이 되자 재정적인 책임을 맡은 장로교 선교회 기관으로 체제를 변경하였다. 이때부터 제중원은 매달 연 500명의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으며, 점점 늘어나는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서 병원을 확장해야만 하였다. 특히 제중원에 있던 애비슨의 의학교육과 의학교재의 역간과 편찬은 의료발전에 필수적이었다. 애비슨은 안식년에 뉴욕에서 열린 선교회의에서 조선에서의 병원 확장계획을 보고하며 협조를 구하였다.의학교육 분야에서도 기독교의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비록 관립의학교가 있기는 하였으나 최초의 의학교육은 알렌에 의해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되었고, 이는 서양의학 교육의 효시였다. 여기서 조선인 의사들이 배출되었다. 초기 외국에서 교회나 선교사의 후원으로 의학교육을 받고 귀국하는 이들도 있었다.

 

4) 교육사업

감리교의 아펜젤러는 1885년 말에 두세 명의 학생을 데리고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1885 8월에 학교를 설립하고 이해 11월에 미국공사를 통하여 고종으로부터 학교설립 윤허를 얻어 이듬해인 1886 6월에 2명의 학생을 받아 배재학당을 개교하였다. 신학문의 학교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유교의 전형적인 교육기관인 서당과 향교가 있었다. 서당은 초등학교에 해당하고, 향교는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으로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 해당하는 기관이 서울의 사부학당 내지는 성균관으로서 고등교육기관에 해당된다. 1911년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16,540개의 서당과 141,604명의 학생이 있었다. 서당은 이후 1920년대까지도 존속하였다. 유교 교육은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 실제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에 새로운 교육이념과 제도가 시급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선교사들의 육영사업은 보수층을 제외한 많은 사람에게 환영을 받았다.스크랜톤 대부인은 1886 5 30일에 최초의 근대 전문여학교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다. 양반사회에서 여태껏 등한시했던 여성교육이 실시되면서 여성들이 남존여비의 예속적 지위에서 해방되는 사회적 혁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경신학교는 1886년 초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아들을 데려다 숙식을 제공하고 교육한 데서 시작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가 미국에 귀국한 사이 마펫선교사가 책임을 맡아 운영하면서 한동안 학교를 예수교학당이라고 하였다. 장로교에서 경영한 최초의 여학교는 정신여학교인데, 이 학교 역시 미스 엘러즈(Annie J. Ellers)가 한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학교들은 초기에 100 세계선교의 길라잡이학생들을 전적으로 학교 내에 기숙하게 하면서 교육하였다.우리나라의 근대식 의학교육의 효시는 세브란스 의학교이다. 1886 3 29일에 병원에 의학부를 개설하였는데, 1899년 정식으로 의학교로 설립되어 애비슨 선교사가 초대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1908년에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으며, 1913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서 연합하여 경영하여 경영하도록 하였다. 연희전문학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노고로 1915 3월에 장로교와 감리교 공동으로 설립되었다.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는 이보다 먼저 1906년에 설립되었으며, 1907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양 교파가 공동으로 경영하다가 1913년부터 운영체제를 바꾸어 장로교 선교회가 단독으로 경영하였다.

 

5) 문서 운동과 한글 보급

기독교 문서 운동 역시 복음전파에 큰 몫을 차지하였으며 한국의 근대 문화운동 창달에 기여하였다. 말이 서툰 선교사들로서는 성경, 소책자, 전도지 같은 것을 발간하여 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이었으며 다수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방도였다. 그래서 선교사들이나 전도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전도문서를 소지하고 다녔으며, 매서인들을 많이 두어 성경과 전도문서들을 보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사용했으므로 자연스럽게 한글 전파에도 공헌하였다.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여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성경사업부터 추진하였다. 1887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중심이 되어 성서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아래 성서번역위원회를 두어 한글로 성서를 번역하고 개정, 출판, 반포하는 일을 위하여 힘썼다. 1904년에 신약전서가 개역되었고, 1906년에 이것을 재수정하여 결정본 공인역으로 출판되었으며, 1910년에 구약성경이 각각 공인역으로 완역되어 나왔다. 1893 1월 제1차 장로회공의회에서는 모든 문서에 일체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만 기록한다는 방침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한글 창제 이후 언문’(諺文=상말)이라며 지식층에게 멸시당하여 빛을 보지 못하던 한글을 선교사들이 직접 연구하였다. 1894년 게일(James S. Gale)은 한국어의 동사를 연구하여 한국어의 문법 형식을 펴냈으며, 1896년에는 한영사전을 편찬하여 출판하였다. 베어드 목사 부인은 한글을 처음 배우는 이들을 위하여 50가지 도움이라는 소책자를 펴냈다. 이러한 책들은 외국인은 물론이고 조선 본토인들에게도 유익한 자료였으며, 젊은 학도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게 하는 도전의식을 심어주었다.한국교회 선교역사 101

 

III.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 시작

 

동북아 주요 3국인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선교사 파송 역사를 비교해보면, 한국교회는 1884년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 29년만인 1913년 중국 산동에 첫 선교사를 파송했다. 중국교회는 1807년 개신교가 들어온 이후 123년만인 1929년에 동남아 화교들에게 첫 해외선교사를 파송했고, 일본은 1859년 개신교가 들어온 지 37년만인 1896년에 한국에 첫 선교사를 파송했다.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더 빠른 속도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룩한 한국교회는 이들 나라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선교사 파송을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순수한 타문화권 선교 1913년 산동 선교이지만, 1907년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를 타문화권 선교의 시작으로 본다. 왜냐하면, 당시의 제주도는 타문화권이라고 할 정도로 육지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는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에 흩어져서 살던 디아스포라 해외 한인 동포(diaspora) 선교와 타문화권 선교의 두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1864년부터 굶주림과 가난 그리고 일제의 폭정을 피하여 연해주 등지로 이주해 살기 시작하던 한인 동포를 위한 선교사 파송은 1909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거주 한인들을 위해 최관흘 선교사를 러시아에 파송하고, 같은 해 10월 일본 동경의 한인 유학생들을 위해 한석진 목사를 일본에 파송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또한 순수한 의미의 타문화권 선교사 파송은 한국장로교회 총회가 1913년 중국 산동에 3명의 선교사(박태로, 사병순, 김영훈)를 파송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가 된 데에는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도 있었지만,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당시 복음을 수용하는 한국인들의 신앙적 열정을 높이 사고 있다. 박수도 양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말씀을 받아서 헌신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특별히 1904~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였으며 기독교 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를 통해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고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었다. 1907년의 부흥 운동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로 역사하신 성령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한국교회가 비로소 민족 교회로서의 틀을 잡아나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가가 위기의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일어났고 이것을 계기로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났다. 두 운동(대부흥운동, 백만인 구령운동)은 일본의 식민통치가 가져온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었고 기독교가 정착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102 한편, 1905년 한국은 독립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고, 1907년에는 행정권까지 빼앗김으로 무장해제를 당했다. 1909년에는 사법권이 이양되었고 1910년에는 경찰력을 박탈당했다. 한반도에서 열강의 전쟁과 1910년 한일병탄, 신사참배 강요, 사람들의 가난은 의지할 데 없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예수만을 의지하게 하였다.

 

1. 독노회 설립과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파송

1890 1월 한국에 들어온 사무엘 마펫(S. A. Moffett) 선교사는 1901년 평양에 조선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한국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1903년 장로회공의회로부터 신학반을 신학교로 인준받고, 임시 교과과정을 승인받아 학업이 진행되어 1907년 첫 졸업생 7명을 배출하게 되었다. 졸업생을 안수하여야 하는데 노회가 없기에 미국 남·북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에 장로교 노회를 설립할 것을 합의하고 본국교회의 허락을 받아 1907 9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창립노회(독노회)를 하였다. 창립노회에서는 선교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말에 따라 전도부를 설립하고 전도에 박차를 가하기로 하였다.

첫 사업으로 일곱 명의 목사 중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제주도 선교는 조선교회의 첫 번째 타문화권 선교였으며, 이후 조선교회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주도 선교는 자체 선교뿐만 아니라, 순수한 해외 선교 사역인 중국 산동성 선교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당시 국내 정황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정미조약을 맺고 국권을 장악하고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켜서 암울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독노회를 조직하고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이때 함께 갈 두 명의 조사를 후원하기 위한 헌금을 전국교회에 요청하였다.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로 이주하여 사역을 시작하였고, 1908년 남전도인 김홍련이 파송되었다. 1909년 평양 여전도회에서는 이관선 여전도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였다. 이 전도사는 외지 전도의 모범이 되어 여전도회가 파송한 첫 선교사가 되었다. 1910년 평양 숭실대 기독학생회는 김형재를, 매큐첸 선교사 부인은 개인헌금으로 여전도인 2명을 보내어 전도하게 하였다. 1908 20여 명에 불과하던 교인수가 1911 410명으로 증가하였고 3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15년까지 제주도에 1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1913년 한국 장로교회가 중국 산동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제주 선교는 내지 선교로 간주하고 전라노회가 맡게 되었다. 1917년에 전남노회가 제주 선교를 전담하였고 1930년 전남노회에서 분립하여 제주노회는 독립노회가 되었다. 한국교회 선교역사 103제주도 선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한국교회의 타문화권 첫 선교였다.

 제주 선교는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라는 선교적 교회론을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목회자가 필요한 지역이 많았음에도 선교를 위해 목회자를 파송하였다.  제주 총회 산하 모든 교회가 헌금을 하여 동참한 선교였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전도사, 조사, 평신도 남녀 전도인, 매서인, 학생들이 참여한 협력 선교사팀 구성을 통한 선교였다.

 교회 구조와 선교 구조가 함께 협력한 선교였다.

 표적과 기사를 동반한 능력 전도가 나타난 선교였다.

 

2. 총회 설립과 해외선교

1912 9월 장로교 총회를 창립하면서 한국장로교회는 그 기념사업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또한 장로교 총회는 산하에 속한 모든 교회가 매년 감사주일 헌금을 전도국에 보내 선교비로 사용하도록 결의했다. 이는 한국교회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 사업으로 1913년부터 시작되어 중국이 공산화되고서도 1957년까지 44년간 계속되었다.

 

1) 중국 산동 선교(1913-1957)

한국교회가 산동성을 첫 해외 선교지역으로 택한 이유는 이곳이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가깝고, 한국장로교의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1862년부터 50여 년간 선교하고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00년에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義和團事件)이 일어났을 때, 많은 선교사가 순교한 곳이며, 미국 북장로교뿐 아니라 미국 남침례교, 독일 루터교 등 여러 교파 선교사들이 오래전부터 사역했지만, 선교의 열매가 미진한 지역이었다.1912년 총회전도국 위원이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헌트(William B. Hunt, 한위렴)는 중국 현지에 가서 한국장로교 선교사 파송 문제와 선교 가능지역을 조사했다. 헌트는 중국교회뿐 아니라 중국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을 만나 협의하고, 중국교회가 한국 선교사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확인한 후 이를 한국장로교 총회에 보고했다. 1913년 한국장로교회는 중국에 파송되는 선교사는 중국에서 한국장로교회를 별도로 세우지 말고 중국노회에 속하는 교회를 세우라는 선교지침을 하달했다.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중국노회에 한국 선교사 파송 소식을 104 세계선교의 길라잡이알리고 중국장로교회와 연합하여 선교 사업을 진행하도록 했다.산동에서 사역하셨던 방지일 선교사는 첫 해외 선교지역으로 산동이 결정된 이유로 산동은 공자와 맹자의 출생지로서 당시 유교문화권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한국인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기독교 전래 이전에 공맹의 도를 전해 준 중국인들에 대한 보답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였다. 당시 한국 목사들은 한자를 읽고 쓰는 것이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필담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도 그 이유가 되었다.1913 9월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의 선교사 가정이 산동으로 떠났다. 중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중국말을 배우며 선교하기 시작하여 2년이 채 안 되어 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915년 총회전도국은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이 중국장로교 노회에 소속하여 일하도록 하기 위해 이들을 중국 산동노회로 이명해줄 것을 청원했다. 총회는 중국 선교사들이 산동노회로 이명하는 것을 허락하되 귀국 시에는 총회의 회원이 됨을 결의하여 1916년부터 이들은 중국노회에 소속되어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1915년 제4회 장로교 총회에 참석한 김영훈 선교사는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산동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교인수가 3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그중 3명에게 세례를 주었음을 보고했다. 또한 산동 선교사들이 예배처소, 선교사 거주가옥, 선교사 자녀교육 등의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리며, 총회가 이를 신속히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다. 1916년 중국선교는 교인 수 40여 명, 세례교인 12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1916 4월 박태로 선교사는 질병에 걸려 2 6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는 산동지역에 발생한 큰 흉년과 생활비 부족으로 인해 1917 4월 귀국하였다. 초기 산동 선교사 팀이 파송된 지 3년여 만에 와해되자 1917 10월 총회전도국은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를 재차 파송했다. 총회전도국은 초기 산동선교의 실패를 거울삼아 산동선교 2기부터 선교사 사택과 선교기지를 매입하고, 이전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선교사 지원체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사들은 1918 5월 화북대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래양성 주변 12km 지점을 선교지역으로 넘겨받았다. 또한 선교사들은 산동대회(노회보다 좀 더 큰 단위) 소속으로 교회개척을 하였는데, 산동 선교가 확장되면서 한국장로교회는 1919년 중국 산동대회에 선교지역 확장을 요청하였고, 같은 해 11월 중국교회는 래양 전 지역을 한국 선교부에 이양해주었다.장로교 총회는 1918 11월 박상순 선교사를, 1922 6월 이대영 선교사를 산동에 추가로 파송하였고 산동 선교는 지속적으로 성장해갔다. 또한 장로교회의 평신도 의사들이 산동지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병원을 개원하고 의료사업을 통해 목사 선교사들의 사역을 도왔다. 이후 1920년경 산동 선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1928~1931년에 접어들면서 장로회 총회는 산동에 여선교사 파송 문제를 논의하였고, 1931년 여전도회 총회는 김순한국교회 선교역사 105호 여전도사를 한국교회 최초의 독신 여선교사로 중국 산동에 파송했다.흥미로운 점은 산동에 간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이 네비우스(John Nevius)의 자립선교 원리를 그곳에 적용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미국 북장로교의 산동지부 선교사 네비우스의 자립선교 원리는 그 진원지 중국에서 환영받지 못했는데, 한국 선교사들에 의해 산동에 다시 추진되었던 것이다.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던 산동 선교는 1924년 총회의 선교비 예산축소로 심한 타격을 입는다. 그 여파로 즉묵과 래양 선교부가 하나로 통합되고 즉묵의 홍승한, 이대영 선교사는 한국으로 철수하고, 방효원은 래양에 그리고 박상순은 래양에서 즉묵으로 이주하는 선교 인력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또한 학교 보조비 삭감 조처와 자급정책의 강화로 인해 교육사업은 학생 수 감퇴로 어려움을 겪다가 1936~1938년에 이르러 학교 교육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산동선교는 1930년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해가다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까지 산동을 둘러싼 전쟁과 정국불안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정체기에 접어든다. 그 결과 1937년 박상순, 이대영, 김순호 선교사가 일시 귀국하고, 1937년 파송된 방지일은 산동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도에서 사역하게 된다. 1940년 이후 이대영, 방지일 두 선교사가 잔류하다가 1955년 이대영 선교사가 귀국하고, 1957년 방지일 선교사마저 추방당하면서 1913년부터 1957년까지 44년간 지속되던 산동 선교는 끝나게 되었다. 중국 산동선교는 8명의 목사 선교사와 1명의 여성 독신 선교사, 조사, 평신도 전문인(의사), 선교사 자녀학교 교사 등의 협력으로 추진되었다.

산동 선교의 중요성과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외국 땅에서 행한 첫 번째 타문화권 선교였다.

 외국 선교자금의 도움 없이 한국교회 자력으로 선교 인력과 자원을 조달한 사역이었다.

 본국 총회 선교부의 철저한 지도와 감독 아래서 이루어졌으며 전국교회가 기도와 물질로 참여한 사역이었다.

 선교정책(자치, 자립, 자전의 원리)을 철저하게 적용한 사역이었다.

 선교사들은 현지 노회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현지의 교단 교회를 설립하였기 때문에 현지 교단의 협력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교회 개척 사역만이 아니라 의료 사역, 교육 사역, 문맹 퇴치 사역 등 종합적인 사역

 1917년부터는 행정적으로 현지 언어공부와 안식년 제도가 마련되었다.

 동양인에 의하여 동양에 복음이 전파되는 새로운 선교운동의 시작이었다.

 

2) 러시아 선교(1909-1929)

러시아의 한인동포(고려인)들은 구한말 1860년경부터 이후 일본의 강점기 동안 기근과 압박을 피하여 고국을 떠나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후 수가 급증하여 1909년 당시 연해주에 약 20만 명이 집중 거주하게 되었다. 1909년 이들을 위해 선교사 한 사람을 급히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장로회 제3회 독노회는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 9명 가운데 한 명인 최관흘 목사를 매서인과 함께 시베리아 동남쪽 항구 블라디보스톡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 러시아 한인선교의 시작이다. 최관흘 선교사는 1909년 블라디보스톡에 입국한 후 연해주 주지사에게 자신이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에 거주하면서 한국 국적의 장로교인 60명을 목양하는 목사임을 밝히고 이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하겠다고 장로교회 설립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효과적인 선교를 모색하는 중 러시아정교회와 교회 연합 및 하나님 중심 선교를 실천하였는데, 정교회로 넘어간 뒤에도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식하고 고통을 받는 한인 곁에서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정교회로 넘어간 일로 인하여 그는 총회에서 1916년에 목사면직을 당하였지만(1922 9월 총회에서 복직), 이는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정 때문이었다. 러시아에서 선교를 그만두면 어느 누구도 한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다는 정황을 보고 대처한 것이다. 이 일은 한인들에게 정교회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고 한국 개신교의 선교사 및 권서인, 매서인의 활동 또한 중단되었기 때문에, 유리하는 한인들에게 누가 복음을 들고 가겠는가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러시아에 남아 정교회의 일원이 되어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는 교파나 교단의 목사직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또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역하는 것이 더 귀중한 일임을 알고 몸소 실천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최관흘, 매서인 이재순, 신윤협은 전도 중에 핍박을 받고 한 달간 투옥되어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다가 1911 12 26일 추방명령을 받았다. 이 일로 인하여 1912 9월 총회전도국은 최관흘 목사의 시무가 중단됨으로 블라디보스톡 선교가 중지되었다고 선언을 한다. 1912 9월 이후 중단되었던 블라디보스톡 선교는 한인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1918년 김현찬 목사를, 1922년 최홍종 목사를 파송함으로 재개되었다. 이후 교회가 부흥하여 1922년에 교회는 32, 교인 1,935, 목사 5, 장로 9, 소학교 5, 야학 35개의 교세로 성장하여 시베리아노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탄압으로 선교 상황이 악화되어 1925년 총회는 시베리아 노회를 폐지하고 1929년 선교 보고를 마지막으로 20여 년의 블라디보스톡 장로교 선교는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최관흘 목사의 사역은 이후 개신교 선교 활동의 근거가 되었다. 1997년 러시아 정부의 새 종교법으로 인해 기존의 모든 종교단체는 재등록을 해야만 했는데 이는 개한국교회 선교역사 107신교를 억제하고 정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속셈이었으나, 최관흘 선교사가 블라디보스톡 지역에서 선교한 역사적 기록과 사료가 발굴되어 한국 장로교회 선교의 정통성이 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보다 안정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러시아 선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방황하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한인 동포를 위한 목회적 돌봄의 차원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한인교회의 묘판(苗板)이 되었다.

 새로운 선교협력 혹은 에큐메니칼 연대적 관계를 맺은 후 선교를 해야 함을 알게 해주었고, 일치하기 어려운 교리적 영역은 배제하고 협력이 가능한 사역을 찾아서 에큐메니칼 차원의 공동의 증거를 지향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선교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과 사료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3) 일본 선교(1909-1948)

1876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개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한국은 명치유신 이후 발전하기 시작한 일본에 1880년대부터 유학생들을 보내기 시작했으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본 유학생이 크게 늘어났다. 1908년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인 YMCA 학생들이 교회설립을 제안하였고 이후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교회 설립이 추진되었다. 동경의 한인 유학생 대부분이 장로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모국의 장로교 독노회에 목사 파송을 요청하였고, 1909 10월 장로교회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한석진 목사를 임시로 동경에 파송하였다. 이후 1910년 장로교 독노회는 일본 동경에 정식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1911년 동경의 유학생 가운데 감리교 출신들이 감리교회를 별도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생겨나자, 1912년 한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동경의 유학생 선교를 연합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감 연합위원회가 합의한 주요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경교회 명칭은 연합예수교회’(Union Christian Church)로 하고,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 3인씩 총 6인의 위원을 택하여 3년 동안 교회 일을 맡아 처리토록 하고,  위원들은 목사를 택하여 2년간 목회하도록 하고,  교회는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라 부르지 않고,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연회는 매년 1인의 선교사를 임명하여 동경에 가서 교회 일을 돌아보고 도와주도록 하고,  동경 유학생 교인이 귀국하면 (비록 서울로 가더라도) 각자의 고향교회가 속한 교파교회 교인이 되고,  모든 동경교회 경비와 월급은 장·감 교회가 반반씩 부담한다. 108 세계선교의 길라잡이한국교회의 일본 유학생 선교는 장로교회가 먼저 추진했지만, 감리교와 연합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12년부터 장·감 교회는 동경 연합교회의 목회자를 1~3년씩 교대로 파송하기 시작했다. 1912년 장로교 주공삼이 파송되어 2년간 사역했고 1914년 감리교 오기선이 파송되어 3년간 사역했다.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연합사업으로 추진된 한국장로교와 감리교의 동경선교는 해방될 때까지 진행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장·감 교회는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일본 유학생 선교를 연합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장·감 교회가 해외 선교지에서 별도의 교파교회를 세우지 않고 하나의 연합교회를 설립했다. 1905~1910년 한국에서 장·감 두 교회가 추진하던 하나의 개신교회(‘대한예수교회’) 설립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선교지 일본에서 장·감 교파주의의 장벽을 극복하고 연합교회 설립에 성공했다. 한국장로교의 일본선교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교파교회의 확장이나 설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 추진한 에큐메니칼 협력의 첫 번째 사례였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한 지역에 여러 교파교회가 경쟁적으로 생겨나는 교파주의의 해악을 극복하고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한인 동포 선교를 했던 캐나다의 영(L. L. Young) 선교사는 일본에서의 장·감 연합사역은 쌍방 모두가 보여준 훌륭한 협력(cooperation) 정신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일본 선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교파의 장벽을 해외에서 뛰어넘어 추진한 에큐메니칼 선교의 협력사례였다.

 유학생 혹은 이민 목회 사역에는 장기 선교사뿐 아니라 단기선교사도 파송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교회가 사회에서 억압을 받고 정당한 권익을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의 편에 서야 할 때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4) 만주 선교(1901-1930)

만주는 한국인들에게 간도라고 알려졌는데 간도는 섬이라는 뜻이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 놓여 있는 만주는 오랜 역사에 걸쳐 중국과 한국의 영토권 주장으로 분쟁을 일으킨 지역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많은 한국인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만주지역의 선교는 1901년 만주에서 사역자를 보내 달라는 요청에 의하여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평안북도 여선교회가 후원하는 사역자 한 사람이 압록강 근처에 정착한 한인 가운데서 사역하였다. 평안북도 각 교회는 압록한국교회 선교역사 109강 건너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매서인이나 전도인을 파견하여 전도에 힘썼다. 1909년에는 김영제 목사와 김진근 목사를 전도목사로 파송하였다.

만주 지역은 남만주 동만주 북만주로 나뉘는데 남만주는 평북노회와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회가, 동만주는 주로 함북노회와 캐나다 선교부가, 북만주지역은 미감리회와 조선연회가 선교를 담당하였다. 만주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은 평북노회나 함북노회 등 여러 노회에 소속되었다가 한인교회 수가 많아지면서 독자적인 노회를 설립하였다.

만주지역에 6개 노회가 창립되었다. 간도에는 오래전부터 많은 한국인 교포들이 살고 있었고 이곳 교포들은 일찍이 성경 번역에 종사한 로스와 맥킨타이어, 그리고 그들을 도와 성경을 번역한 한국인들을 통해 먼저 복음을 접할 수 있었다. 1925년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간도 지역의 교세는 116개 교회와 신자 17,538명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만주 지역에는 한국인 사역자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협력 사역을 하여 꾸준히 성장했지만, 반기독교적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의 반종교 운동, 마적단의 습격,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교회 발전에 많은 지장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선교하는 일에 항상 위험이 동반되었고 중국 관리들은 한국인들이 허가 없이 교회를 설립함으로 중국의 법을 어겼다고 하며 선교를 불허하는 등 선교사역에 많은 지장을 주었다. 그러나 한국어 성경 번역이 그곳에서 이루어졌고 한국 선교사와 서양 선교사들 간의 협력 사역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만주 선교사역은 사역자들, 조사들, 권서인들의 협력 사역이었다. 만주 선교는 한국인 선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 선교로 확장되었다.

 

3. 독립 후 선교(1945- )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총회는 재건파(1945), 고려파(1951), 기장파(1953), 합동과 통합(1959)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고난까지 감내해야만 했다. 한국전쟁(1950-1953) 동안 장로교회는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겨났고 1,541개처(북한교회 1,000개처, 남한교회 541개처)의 예배당이 폭격을 당했다. 재난은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동기가 되었다. 그 결과 1950년부터 1955년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교회개척 운동을 전개하여 1,200개 처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고난과 부흥의 결과로 다시금 세계를 향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1956 6월 최찬영 목사, 1956 11월 김순일 목사를 해방 이후 최초의 장로교회 선교사로 태국에 파송하였다. 파송예배 사회는 당시 총회전도부장이던 한경직 목사가 맡았고, 산동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귀국한 이대영 목사가 예수의 대명령”(마태복음 28:16-20)이라는 제하로 설교하였다. 이들은 태국 기독교단(Church of Christ in Thailand)의 초청을 받아 선교동역자(fraternal worker)로 파송되었다. 해방 이후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로 추진된 태국선교는 태국교회의 요청에 응답하여 그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선교로 진행되었다. 두 선교사는 모두 태국에서 가장 오래된 태국 기독교단(CCT) 총회의 초청으로 파송되었다. 이처럼 태국선교는 한국교회의 일방적 선교가 아니라 현지교회의 요청과 필요에 의해 선교사역의 내용과 방향이 결정되었다. 이후 태국 기독교단은 지금까지도 한국장로교회(PCK)와 긴밀한 에큐메니칼 선교협력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이후로 멕시코(1966년 우상범 목사), 브라질(1966년 김계용 목사), 대만(1968년 김응삼 목사), 에티오피아(1969년 박희민 목사), 베트남(1970년 박성준 목사), 인도네시아(1971년 박창환 목사), 방글라데시(1976년 정성균 목사), 독일(1976년 김종렬 목사), 이란(1976년 강동수 목사), (1976년 윤만준 목사), 싱가포르(1978년 손중철 목사)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지속하였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의 통계에 의하면 2019년도 기준으로 한국교회는 171개국에 28,039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또한, 세계도처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와 그들 가운데 설립된 수많은 해외 한인교회들도 한국교회와 함께 많은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선교 현지교회와 협력하여 다양한 선교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

 

IV. 결론

 

한국교회의 해외 선교는 세계에 흩어져서 유리하던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디아스포라 선교로 시작되었다. 한인 디아스포라 동포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요청하였으며, 한국교회는 이들을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타문화권의 선교사역과 해외동포를 위한 디아스포라 선교를 같이 추진해왔다. 1970-80년대 이후 세계 주요 도시에 세워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선교자원으로서 오늘날 세계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현재 170여 개국에 약 750만 명의 한인 디아스포라가 거주하며 그들 중에 세워진 수많은 한인교회가 있다. 이들은 현지 문화와 언어에 익숙하여 현지인에게 쉽게 선교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 사업과 함께 한인교회는 한국교회의 중요한 선교자원이 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개신교 역사 29년만인 1912년 총회가 창립되면서 중국 산동에 선교사 파송을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색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를 기한국교회 선교역사 111념하여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교단이 크게 성장한 이후가 아니라 교단조직과 동시에 선교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인접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가난했고 더 짧은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들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선교사 파송을 시작했다. 복음을 받은 지 29년 만에 시작된 한국교회의 중국 산동 선교에 대해 산동 선교사 방효원 목사(1917-1935 사역, 방지일 목사의 부친) 피선교지인 조선교회가 선교를 받은 지 25[29] 만에 외국에 선교하는 일은 현금 20세기 피선교국으로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 신기록이라고 평가하였다.

197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의 선교사 파송이 교단별로 다변화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높아진 경제력과 국제적 위상을 바탕으로 한국교회는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활발하던 여러 선교단체(para-church)에서 훈련받은 대학생들이 지역교회와 신학교에 들어가거나, 선교사로 헌신하면서 한국교회 영적 수준이 높아졌다. 한국교회의 선교사 파송은 해외 한인교포를 상대로 하는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와 원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타문화권 선교의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 한인 동포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고 본국에 목회자 파송을 요청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21세기를 맞이하여 다양한 도전을 받고 있다. 가난한 자에게 선교하는 교회의 자세는 겸손과 희망이다. 선교는 만남이다. 교회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만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여 참 생명을 얻게 해야 한다. 그는 구원의 은혜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로 훈련받고 재생산을 해야 한다. 그 일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날까지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새로워진 자세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해야 하는 책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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