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초기 주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어떠한 선교저략을 가지고 활동했을까? 그 당시에 내한 선교사들은 1880년대 미국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아 복음전파의 열정을 품고 파송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이국에서의 선교 경험도 없었고 뚜렷한 선교정책도 갖고 있지 못했다. 뜨거운 선교 열정을 가지고 선교현장에서 그 들이 행한 첫 단계 사역은 의료ㆍ교육봉사와 순회전도여행이었다. 조선 정부의 종교 활동 불허로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펼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후에 올 선교사들을 위해 좋은 선교정책의 기반을 마련할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성직자로서는 가장 먼저 상주하는 선교사로 내한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는 중국 산동성 지푸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네비우스(John L. Nevius) 선교사가 선교정책에 관련된 책을 출판한 것을 알았고 그를 초빙키로했다. 언더우드는 그를 초청하는 편지를 여러차례 중국 산동성의 네비우스에게 보냈다. 그 초청에 응하여 1890년 네비우스 박사가 안식년으로 도미 중에 서울을 방문했다. 네비우스는 두 주일동안 체류하며 선교사들과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다. 언더우드는 젊은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온 고참 선교사에게 “애정과 존경의 마음으로 많은 조언을 얻기를 구했다”고 그 때 일을 묘사했다.
2.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형성과정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923)는 1829년 3월 4일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니온 대학을 졸업한 뒤, 1850년에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했다. 1853년에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선교사로 지원했다. 그해에 코안(Helen Sanford Coan)과 결혼 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도보로 600마일(약 965km)에 달하는 선교여행을 하며 열심히 활동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중국의 선교사들이 시행했던 선교방법은 선교사가 돈을 주고 원주민을 고용하여 전도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의 선교는 ‘쌀신자(rice christian)’를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쌀신자’란 교회에서의 경제적 수입이 있을 때는 신자 노릇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는 교인을 뜻한다.결국 네비우스는 선교활동에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하던 중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과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 1796〜1880)의 3자원리의 선교 정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벤은 1860년에 선교정책에 관한 연구 논문에서 자급, 자전, 자치의 토착교회 원칙을 거론했다. 이 원칙들은 토착교회가 민족적 특성과 전통 및 관습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해야 한다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었다.
3자원리 이론이 나타난 배경은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 이후 개신교의 초기선교는 그들의 선교지회 (Station) 중심이었다. 지회 내에 선교사들의 숙소와 교회, 서구식 학교, 병원, 때로는 인쇄소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선교지회 내에 모여 살면서 초신자들을 선교지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이끌었다. 초신자들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운영되어지는 선교지회 내에서 선교사들에게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나 모두 의존하게 되었다.
3자원리는 이전의 선교지회 중심의 선교활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현지 토착인들 중심으로 전환이었다. 현지 토착교회의 설립을 자립, 자전, 자치의 3자 원리를 따르는 것이었다. 자립이란 토착교회가 선교자금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되어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자전은 토착 교회 교인 스스로가 선교사의 도움이 없이도 복음을 전파하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자치란 선교사들의 지도력을 벗어나서 토착교인 지도력에 의해서 교회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네비우스는 3자 원칙위주의 새로운 선교 비전을 갖고 토착교회 설립 전략을 활용하여 사역했다. 그 결과 많은 선교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네비우스가 이 정책을 주장하게 된 까닭은 1885년 상하이에서 발행된 『차이니즈 레코더』(The Chinese Recorder)지에 맨 처음 나타났다. 네비우스는 편집장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오랜 산둥 선교경험을 바탕으로 일련의 기사들을 써서 젊은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 기사들은 1886년에 『선교 사역 방법』(Method of Mission Work)이란 책으로 출판되었고, 1889년에 초기 주한선교사들에게 소개되었다. 이 책은 그 해에 다시 『선교 교회의 개척과 발전』(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이란 이름으로 선교위원회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자신의 선교 경험에 나온 생각을 모은 것이었다. 선교정책을 이론화하여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토착교회의 발전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
3. 네비우스선교정책
네비우스의 가장 큰 관심은 새로 믿은 사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어떤 선교회에서 첫 개종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좋고 나쁜 결실을 맺는 기원이 된다. 이 과정은 선례가 되어 정책을 정하고 장래의 교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면 이 첫 개종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새 신자 정책이 토착교회의 성장을 결정한다고 확신하였으나, 이들에 대해 두 가지 상충되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첫째로 개종자들이 선교사들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것이고 결국 토착교회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둘째로 그렇지만 이 잠재적인 지도자들을 유급 사역자로 고용하면 삯꾼 정신과 질투와 불만을 일으켜 피고용자들과 선교지부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오랜 경험이 이런 결과를 입증하고 있었다. 그는 닝포에서 28살 가량의 네 사람이 유급으로 고용된 후 전도의 열의를 잃었던 일을 예로 들었다. 그런 경험의 결과로 유급 고용이 소명 받은 지도자의 자원정신과 기독교정신을 침해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중국인들이 숨기는 데 숙련된 것은 중국에 오랜 머문 사람이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 의심할 바 없이 고용된 자들은 자주 자신을 속인다”고 하였다. 그는 중국인에 대한 나쁜 인상 때문에 첫 번째 선교지회가 예배당을 지어주면 다음에도 그렇게 해야 하게 되어 의존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가 ‘옛 제도’라 부른 당시의 관례를 깨고 유급 사역자의 고용을 최소화하는 ‘새 제도’를 사용했다.
네비우스는 고전 7:20의 “각 사람은 부름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명령이 자기의 새 정책의 기본원칙을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명령에 근거해서 네비우스가 낸 제안은 새 개종자가 지도력을 갖춘 증거를 나타낼 때까지 선교사들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견해는 교회생활을 권면과 격려의 과정보다 잡초를 뽑아내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갖게 하였다. 다른 한편 그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점진적인 교회조직 과정의 원리를 좇았다. 그에 따라 장로 장립은 호의적으로 보았으나 목사 장립은 전례가 없다고 하여 권장하지 않았다.
4.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실천
언더우드는 네비우스의 방한 직후 보고서에서 네비우스의 견해를 4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각 사람을 처음 부름 받은 대로 거하게 하여 각기 자신의 이웃 속에서 자신의 생업을 꾸리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살아가게 한다. 둘째, 교회의 방법이나 조직을 토착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발전시킨다. 셋째, 교회가 가능한 한 인력과 재정을 제공하게 하고, 복음을 이웃에게 더 잘 전하는 자를 별도로 세운다. 넷째, 토착민들이 자체적으로 교회건물을 세우되 그들이 감당할 수 있도록 토착적인 형태로 세운다.
클라크 선교사는 네비우스 정책을 10가지 조항으로 정리했는데, 그 조항들 가운데서 성경이 사역의 중심이 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자전ㆍ자치ㆍ자급(자립)이란 용어를 사용해 각각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이 정책은 다시 확대 적용되어 1893년 주한장로교선교공의회(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ernment)가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정책을 채택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선교정책은 가급적 상류계급보다 근로계급과 부녀자를 상대로 전도할 것, 초등학교를 경영하여 교사들과 교역자를 양성할 것, 성경보급에 힘쓰고 모든 교회서적을 순 한국말로 기록할 것, 자급하는 교회가 되게 하며 선교사에게 고용된 자의 수를 줄일 것, 한국인이 동족을 전도하게 하며 의료선교의 기회를 잘 활용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5.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수용의 긍정성과 부정성
네비우스 정책의 시행으로 나타난 가시적인 결과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고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첫 번째 긍정적 결과는 자급 강조가 어린 교회의 재정적 자립을 도운 것이었다. 만일 초기 교회가 전적으로 선교사들의 재정지원만을 의존했더라면 재정지원이 그칠 경우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을 것이었다. 달리 말해서 교회의 성장이 한국 교인들의 자체적인 동원능력보다도 외국 재정의 지원 정도에 좌우되었을 것이었다.
두 번째 결과는 복음전파 사업의 책임이 토착교회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복음사역은 선교사들이나 그들이 파송한 조사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토착교회의 자원사역에 의해 오히려 더욱 크게 이루어졌다. 유급 조사들은 교인들과 선교사들 간의 접촉 및 업무감독을 위해서만 필요했을 뿐이었다.
세 번째 결과는 한국교회가 성경 본문 위에 건립되도록 견인차의 역할을 했다. 클라크 선교사는 성경공부의 강조가 자립, 자치, 자전보다도 훨씬 더 큰 한국교회 성공의 비결이며, 사경회제도가 한국교회를 세계 극소수의 정예 교회 가운데 하나로 훈련시켰다고 주장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희생과 봉사의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게 만들었으며, 규칙적인 헌금 습관을 가르치고 한국 기독교의 서양화를 방지했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한국인의 근대화와 시민층 형성을 촉진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바 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부작용도 낳았다. 우선 한국교회의 성장이 과연 네비우스 정책 때문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엄밀히 따져서 자급에 대한 강조는 오히려 선교사들의 한국인 사역자 양성에 장애요인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자급의 원칙을 한국교회에 적용한 것에는 예방적인 성격이 들어 있었다. 이 예방정신은 1892년에 내한하여 1907에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쳤던 스왈른(W. Swallen) 선교사의 글에서 가장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그는 한국인 사역자 육성을 위해 많은 비용이 드는 점, 교회가 하나님보다 사람의지하기를 배우는 점, 삯꾼 사역자와 세속적인 교회를 가지게 되는 점 등의 문제들을 지적했다.
삯꾼이 출현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선교사들의 한국인 목회자 육성 의지를 저하시켰다. 이로인해 목사 교육이 장로 선출보다 지체되었다. 한국교회는 주한 선교사들에 의해 가능한 한 단순하게 유지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인이 치리하는 교회조직의 결성이 늦어졌다. 1904년에 장로교 선교회 내의 9개의 교회들만 1명 이상의 장로들이 있었고, 14개 교회들이 장로장립을 허락받은 정도였다. 그러나 1907년까지 한국인 목사는 세워지지 않고 있었다. 주한선교사들을 감독한 미국의 선교부는 한국인 회중을 적절히 대표하는 자가 없어 선교사들의 영향이 그들을 좌우하게 될 것을 염려도 하였다.
다음으로 네비우스 정책으로 인해 교회가 자립과 자급에 급급하다가 지나치게 개교회 중심적이 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교회가 재정을 개교회의 운영과 확장을 위해서만 이기적으로 사용하고 이웃에 대한 봉사를 외면하는 경향을 보인 것이 바로 이 정책의 부작용이란 지적이 오늘날 공감을 얻고 있다. 각 교회의 자립이라는 개교회주의는 1960년대 이후 황금만능주의와 대교회주의의 영향으로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교역자의 낮은 자질과 역사의식의 부재로 많은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켰다.
6.나가는 말
네비우스는 주한 선교사들에게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교방책을 제시한것이었다. 그 내용은 회의 참석자들뿐만 아니라 후에 내한한 선교사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에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라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곳은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였다. 이 정책에 따라 대부부분의 주한 선교사들은 현장에 적용했다. 자급 , 자치, 자전으로 요약 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종내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 자립(자급)(self-support)의 원칙에 대한 신념은 다른 어느 곳도 한국에 비할 데가 없었다.
자립하는 토착교회의 설립과 성경공부에 강한 역점을 둔 것으로 알려진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그 이론의 창시자라기보다 토착교회 건립 정책을 맨 처음 체계적으로 강조한 인물이었다. 네비우스의 선교방법은 중국에서보다 한국에서의 영향력이 더 컸다. 잘 수용하고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선교사들은 토착교회의 설립과 조직적인 성경공부, 전도를 열심히하고 한국인들 스스로가 힘을 모아 예배당을 짓고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했다. 그렇게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선교 정책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주한 선교사들은 한결 같이 한국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이룬 비결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주로 내세웠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관한 논문을 써서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클라크(Charles Allen Clark) 선교사는 이 정책이 지금까지 있었던 다른 어떤 정책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the Nevius Mission Method)은 1890년 이래로 한국교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정책은 첫째로 초창기에 한국 개신교 선교활동의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새로 온 선교사들은 네비우스의 책을 건네 받고 이 정책을 숙지해야 했다. 둘째로 신약성경에서 토착교회 설립의 모델을 찾아 성경적인 선교정책을 세우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다. 이 같은 성경적 선교 전략을 통해 선교사들은 정책적 연합을 유지했다.
주한 선교사들은 토착교회의 형성을 꿈꾸며 확신을 갖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해왔다.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역사상 놀라운 빠른 교회의 성장세를 보였고, 자급하고 자립하는 토착교회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원칙은 네비우스 박사가 중국산동성 선교현장에서 토착민으로부터 겪은 부정적인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다. 삯꾼 정신의 출현에 대한 두려움에서 재정지원이 교회발전의 장애요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사역자 육성이 위축되었다. 결국 이 정책은 자급 원칙의 과도한 강조로 토착 사역자의 부족과 교회조직화의 지체를 초래하여 토착교회 형성의 장애요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지나친 개교회주의와 반사회적 몰역사적인 행태를 초래시켰다는 혐의도 면키 어렵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백년이 넘게 실험하고 활용해 왔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유익한 점은 더욱 잘 활용해야 하겠지만 문제점은 교정하여 교회의 발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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