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와 프쉬케
Sir Edward Burne-Jones. Pan and Psyche
프쉬케는 두 언니를 찾아가 자기가 겪은 그간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하면서 오직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두 언니는 함께 후회하고 슬퍼해 주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각기 딴 마음을 먹 었다. '오냐, 그것이 과분한 분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너는 이제 화를 입었으니 내가 그 복을 다시 지어 보아야겠다. '
두 언니는 날이 밝자마자 앞을 다투어 프쉬케가 살던 바위산을 기어을 랐다. 산꼭대기까지 오른 두 언니는 제퓌로스를 불러 프쉬케가 살고 있던그 궁전까지 실어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제퓌로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벼랑 위에서 뛰어내렸다. 제퓌로스가 있던 자리에서 비컥 버리자 자매는 천길 벼랑에서 떨어져 그 의롭지 못한 삶을 좀 일찍 끝내고말았다.
프쉬케는 한동안 정을 붙이고 살았던 신랑 에로스를 찾아서 온 그리스땅을 다 누볐다. 하지만 사람들은 에로스가 신인지라 그 행방을 알지 못했다 신들은 알 테지만 프쉬케로서는 신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쉬케는 산을 넘다가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신전앞을 지나게 되었다. 누구의 신전인지 짐작할 도리도 없었다 프쉬케는 신전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신의 신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전이 있으니 반드시 임자가 있겠지. 그래, 이 신전에서 신랑에게 지은 죄를 속죄하자. 신랑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떠랴? 신랑에게 지은 내 죄를 용서받는 길은 땀을 흘리고 수고를 들이는 길 밖에 없다.'
프쉬케는 신전으로 들어갔다. 신전 안에는 뜻밖에도 곡식 낟가리가 있었다 낟가리 중에는 단으로 묶인 것도 있었고, 베어서 실어온 채로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것도 있었다. 낫, 갈퀴 같은 연장도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프쉬케는 무더위에 지친 농부들이 그냥 팽개치고 달아났으려니 생각하고는 곡식과 연장들을 종류별로 고르고 나누어 제각기 있어야 할 자리에 마땅한 상태로 깔끔하게 정돈했다.
프쉬케는, 어떤 신에게든 죄를 얻었더라도 믿음으로 덕행을 쌓으면, 등을 돌렸던 신도 다시 돌아앉는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에로스를 잃고 방황하며 나름대로 겨눈 가늠이고 헤아린 짐작이었다. 과연 그랬다. 그 신전은 다름 아닌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에게 바쳐진 신전이었다.
하지만 프쉬케는 나이가 어려, 낟가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데메테르 여신의 신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는프쉬케가, 신전 제단의 휘장 뒤에서 여신이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어찌 짐작할수 있었으랴.
데메테르 여신은 며칠 동안 프쉬케가 일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프쉬케여, 네가 복을 지었다. 내 비록 아프로디테의 저주에서 너를 풀어 줄 힘은 없으나, 여신의 분노를 삭일 방도쯤이야 어찌 일러 줄 수 없겠느냐. 네 신랑이었던 이가 아프로디테 여신의 아들 에로스임을 네가 알았느냐? 어서 가서 여신의 손에 네 몸을 붙이고 겸손과 순종으로 용서를 빌어라. 인간과 금수와 초목 중에 인간만큼 신을 노엽게 하는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인간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돌아앉은 신을 다시 돌아앉힐수는 없다. 그러니 나에게 용서를 빌지 말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용서를빌어라."
스탠호프Spencer Stanhope(1829-1908),
[프쉬케와 샤론]Psyche & Charon, detail
프쉬케는 데메테르가 가르쳐 준 대로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찾아갔다.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프쉬케가 문안을 여쭙기도 전에 꾸짖기부터 했다.
"이 하찮고 믿음이 적은 것아, 네가 신을 섬기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느냐? 네 신랑은 내 말을 귓가로 흘리고 너같이하찮은 것에게 사랑을 기울이더니 어깨에는 화상, 가슴에는 상처를 입고돌아와 몸져누웠다. 참으로 밉살스럽고 비윗장이 틀리는 것아, 내가 이제부터 너를 시험하리라."
아프로디테는 프쉬케를 신전의 곳간으로 데려갔다. 신전 곳간에는 비둘기의 모이가 될 밀, 보리, 기장, 살갈퀴, 볼록콩 등이 섞인 채 수북이 쌓여있었다. 비둘기는 바로 아프로디테를 상징하는 새였다.
"네가 데메테르에게 길을 물어 내게로 왔으나, 내가 데메테르를 탓할수는 없다. 자, 여기 있는곡식을 종류별로 고르되 한 알도 남김없이 골라무더기로 각기 쌓아놓아라. 저녁 때가 되기 전에 끝마치지 못하면 네 입에들어갈 것은 하나도 없다."
여신은 이렇게 말하고 신전 곳간을 떠났다. 프쉬케는 그 엄청난 일감에 기가 꺾여 손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망연자실 앉아 눈물만 떨구었다. 에로스는 비록 프쉬케의 철없는 행동 때문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프쉬케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식은 것은 아니 었다.
에로스는 프시케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 들판의 임자인 위르미도네스에게 가서 프쉬케를 도와 주라고 했다. 위르미도네스는 '개미떼' 라는 뜻이다. 개미 왕은 에로스의 명에 따라 부하를 이끌고 신전 곳간으로 갔다. 개미떼는 차 한 잔 끓여서 마실 만한 시간 동안 낟알을 종류별로 골라 각각 있어야 할 곳에 말끔히 정리했다.
일을 마친 위르미도네스는 삽시간에 곳간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아프로디테는 저녁 무렵에야 신들의 잔치에서 돌아와 앙칼진 목소리로 프쉬케를 꾸짖었다. 장미꽃 관을 쓰고 호령하는 여신의 입에서는 신들의 술인 향긋한 넥타르 냄새가 풍걱나왔다.
"앙큼한 계집이로구나. 네가 일은 잘 했다만, 나는 네 일 솜씨를 본 것이 아니고 내 아들에게 아직 너를 향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신은 저녁 끼니로 검은 떡 한 조각을 던져 주고는 프쉬케를 곳간에 가두었다. 가엾은 프쉬케는 포도주도 없이 그 빵을 먹고는 싸늘한 곳간에서밤새 떨었다.
다음날 아프로디테는 또 하나의 일감을 주었다.
"저기 숲, 물가로 길게 나앉은 숲을 보아라. 가면, 주인 없는 양떼가 있을 것이다. 가서 보면 알 테지만 털이 모두 금빛이다. 냉큼 가서 한 마리한 마리의 털을 한 줌씩 뽑고 이것을 모두 모아 오너라. 한 마리라도 빠뜨리면 경을 칠 줄 알아라."
프쉬케는 물가로 내려갔다 하지만 양의 수가 너무 많았다. 며칠 동안뽑아도 다 뽑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하염없이 눈물만 떨구고 있는데, 강가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가만히 들어 보니 강의 신이 갈대를 흔들면서 프쉬케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 었다.
"모진 시험에 걸리신 아가씨, 강을 건너려고도 마시고, 저 무서운 양떼에게 다가갈 생각도 마세요. 떠오르는 해의 정기를 받고 있을 동안에는 저것은 여느 양이 아니라 인간을 뿔로 찌르고 발길로 걷어차는 무서운 짐승이랍니다. 그러니 한낮의 태양이 양떼를 나무그늘로 보내면, 내가 양떼를그 그늘에서 쉬게 할 테니 가만히 있기나 하세요. 내가 도와드리지요. 해질녘이 되거든 다시 이리 나오세요. 그러면 덤불과 나무둥치에 양털 견본이 가득 걸려 있을 테니, 그것을 거두어 가시면 됩니다."
강의 신의 도움으로 프쉬케가 양털을 거두어 갔지만 아프로디테의 앙칼진 호령은 여전했다.
"미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네가 아느냐? 한번 눈 밖에 난것은 미운 짓을 해도 미워지고 예쁜 짓을 하면 더 미워지는 법이다. 내 너에게 또 일을 맡기겠다. 여기 상자가 하나 있으니 가지고 저승으로 내려가 저승의 왕비 페르세포네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제 주인이신 아프로디테 여신께서 얼굴 단장에 필요한 단장료를 조금 나누어 주셨으면 하더이다'
몸져 누우신 아드님을 돌보시느라고 그 아름답던 얼굴이 조금 수척해지셨다고 하더이다.'알겠느냐? 한 자 한 획도 틀림없이 전해야 한다. 심부름을 반듯하게 해야 한다. 나는 오늘도 신들의 잔치에 나가야한다. 네가 단장료를 가져 와야 그걸 얼굴에 찍어 바르고 갈 수 있을 테니. 심부름에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심부름꾼은 주인이 하는 말을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게 외고 가야 했다. 프쉬케는 그제야 죽을 때가 온 것을 알았다. 제 발로 걸어 저승에 간다는 것이 곧 죽는 것임을 프쉬케가 모를 리 없었다.
프쉬케는 천길 낭떠러지 위에 있는 첨탑으로 올라가 거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곧 저승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프쉬케가 막 뛰어 내리려고 하는데 형상이 없는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여러번 신들의 가호를 입은 그대가 이렇게 목숨을 끊어 이제껏 도와 주던 신을 슬프게 하고 이제껏 미워하던 신을 즐겁게 해서야 되겠는가?"
목소리의 임자는 이어서 저승으로 가는 길, 저승의 문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 옆을 무사히 지나는 방법 그리고 되짚어오는 길을 소상하게 일러 주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페르세포네가 그 상자에 단장료를 넣어 주거든 고이 품고 나오되, 절대로 뚜껑을 열어 보아서는 안 된다 그대는 인간이다. 여신들의 단장료를 너무 궁금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여라."
프쉬케는그목소리의 임자 덕분에 무사히 저승에 이르러 페르세포네를 배알할 수 있었다. 프쉬케가 아프로디테 여신의 말을 한마디도 틀리지 않게 전하자 페르세포네가 말했다.
"나와 아프로디테 여신 사이에는 풀어야 할 감정의 매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찮은 것으로 내 속을 보이고 싶지는 않구나."
Greuze, Jean-Baptiste,
Psyche krönt Amor, 1788-1792
그러고는 프쉬케에게 편한 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귄했다. 그러나 프쉬케는 이를 사양하고 죄인에게는 거친 자리, 하찮은 음식이 오히려 죄값을 무는 보람이라고 했다. 게다가 프쉬케는 잠시 다니러 저승에 간 사람은 무엇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상자는 뚜껑이 닫힌 채 페르세포네의 손에서 프쉬케의 손으로 넘어왔다. 프쉬케는 가던 길을 되짚어 다시 태양이 비치는 곳으로 나왔다. 그러나 인간은 역시 어쩔 수 없는가, 아니면 여성은 어쩔 수 없는가? 프쉬케는 호기심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감히 신들의 단장료를 가지러 저승에까지 갔던 내가 아니냐? 내가 고생을 사서 하는 뜻은 다 신랑을 찾고자 함인데, 단장료의 힘을 빌려 신랑의 눈길을 조금 끌고 싶어하는 것을 누가 지나친 욕심이라고 할 것인가?얼굴을 단장하는 것은 여성의 의무이자 권리가 아니 던가?'
프쉬케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단장료가 아니었다. 프쉬케는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페르세포네 여신이 하던 말을 떠올렸다.
'나와 아프로디테 여신 사이에는 풀어야 할 감정의 매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찮은 것으로 내 속을 보이고 싶지는 않구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얼굴 단장하는 데 쓰는 단장료가 아니라 잠의씨였다.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신 하데스의 아내가 된 것도 다 아프로디테와 그 아들 에로스 때문이 었다. 페르세포네는 그때 자기가 당한 것을 앙같음하느라고 상자에다 단장료 대신 잠의 신 휘프노스에게서 얻어 둔 잠의씨를 넣어서 프쉬케에게 건네 준 것이었다.
상자의 뚜껑이 열리자 잠의 씨들이 일제히 나와 프쉬케를 쓰러뜨렸다. 저승의 잠에 떨어진 프쉬케 옆에서는 초목도 자라기를 멈추었으니, 이제 프쉬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프쉬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에로스는 나비 편에 그 소식을 듣고는 급히 그곳으로 날아갔다. 에로스는 신이어서 프쉬케를 덮친 잠의 씨를 모두 거두어 다시 상자에 넣을 수가 있었다. 잠의 씨 수습이 끝나자 에로스는 화살 끝으로 프쉬케를 건드렸다. 프쉬케가 깨어나자 에로스는 부드럽게 꾸짖었다.
"분수를 몰라서 신세를 망치고 의심을 물리치지 못하여 만고의 고생을 사서 하더니, 이제 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이 꼴이 되다니‥‥‥‥. 어서 일어나 내 어머니 신전에 가서 기다리세요. 나는 다녀올 곳이 있으니‥‥‥‥. 에로스는 하늘을 가르는 화살처럼 올림포스를 날아올라가 제우스 대신에게 프쉬케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탄원했다.
제우스 대신은 에로스가 어느새 훤칠한 청년이 되어 제 각시를 걱정하는 것을 어여삐 여기고, 아프로디테에게 청했다.
Abraham BLOEMAERT (1564- 1651),
The Marriage of Cupid and Psyche, c. 1595
"신들도 의심과 호기심을 이기지 믓하는데, 한갓 사람이 그걸 어떻게다 이길 수 있겠어요? 그만하면 되었으니, 그대가 인간들의 어려운 사랑의 끝도 아름답게 맺어 주듯이 그대의 아들 에로스와 프쉬케의 사랑도 그 끝을 아름답게 해 주면 좋겠어요. 이는 내가 바라는 것이에요."
아프로디테는 다 자란 아들을 쓸쓸한 눈길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쓸쓸한 눈길로 바라본 것은 아들이 드디어 자기 슬하를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우스 대신은 발빠르기로 유명한 헤르메스를 보내어 프쉬케를 올림포스로 데려오게 했다.
프쉬케가 오자 제우스 신은 신들의 음식과 신들의 술을 몸소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프쉬케여, 마음이여, 이것을 먹고 마시어 내가 베푸는 불사의 은혜, 영원히 사는 은혜를 얻으라. 네가 설 자리를 네가 든든하게 다지고 지혜로써 너를 지켜라. 너는 이제 불사의 몸이 되었으니 신랑 에로스도 이 인연을 끊지 못할 것인즉, 이 혼인은 영원하다.
"에로스와 프쉬케는 이로써 하나로 맺어졌다. 아프로디테가 육체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프로디테 포르네(음란한 사랑의 여신)' 라고 불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프로디테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보라, 그 아들인 에로스는 '프쉬케(마음)'를 사랑하여 마침내 사랑을 한 단계 드높이지 않았는가?
마침내 인간이 본받아야 마땅한 사랑의 본보기를 보이지 않았는가? 에로스와 프쉬케 사이에서 딸이 태어난다. 이 딸의 이름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기쁨'이다. '사랑'과 마음'이 짝을 이루니 그 딸이 '기쁨'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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