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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종교간 대화의 신학

by 이덕휴-dhleepaul 2023. 7. 6.

종교간 대화의 신학

2019년 1월 22일
 

I. 삶의 증인

I.1. 나의 공부와 나의 삶

       공부와 인생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 이 기사의 뒷부분에서 그 이유를 알아낼 것입니다. 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I.2. 나는 누구인가?

       제 이름은 이브라힘이고 니제르에서 왔습니다. 우리 가족은 수년 동안 니제르의 수도인 니아메에서 살았습니다. 니제르에서 공부한 다음 부르키나파소에서 공부했습니다. 저는 8년 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철학, 신학 학생 및 사제로서 여러 본당에서 일했습니다.

       아버지는 은퇴하셨고 어머니는 학교 교장입니다. 우리 가족은 5명입니다. 저는 형제 1명과 자매 3명이 있습니다. 큰 누나는 사회학을 공부했습니다. 제 형은 정치법을 공부했습니다. 둘째 누이는 의학을 공부했고 집안의 막내는 양장점입니다.

I.3. 우리나라: 정치적, 사회적 상황

       니제르는 서아프리카 국가로 면적은 1,267,000km2이고 인구는 21,546,595명입니다[1].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실상 사막화가 계속되는 문제가 있다. 때때로 사막의 상황은 끔찍하고 많은 사람들이 극한 상황으로 사망합니다. 예를 들어, 몇 달 전에는 사막에서 95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타고 가던 차가 고장났기 때문입니다. 운전사는 그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물이 바닥나고 승객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52명의 어린이, 32명의 여성, 17명의 남성이 있었습니다. 슬프다.

       니제르에서는 빈곤율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니제르의 인구는 매우 젊고 모든 사람을 위한 충분한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직업이 없습니다.

       반면에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는 좋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이지리아의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우사어로 '현대에 반대하다'라는 뜻의 '보코하람'이라는 테러리스트 집단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꿈, 열정, 취미가 있습니다.

I.4. 고백

       아버지 가족의 많은 구성원이 이슬람교도입니다. 아버지는 가족 중 유일한 기독교인입니다. 우리가 함께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 롭습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을 보기 드물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관용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본보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관계는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저는 정의, 화해, 평화의 경험으로 평생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항상 결혼식, 세례식, 크리스마스, 부활절, 라마단, 타바스키 등 다양한 축하 행사를 함께 가졌습니다.

       따라서 우리 관계의 중심에는 어려운 순간에도 사랑, 존중, 형제애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행사가 있을 때 교회나 모스크에 가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중 누구에게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무슬림인 삼촌이 타바스키를 축하하기 위해 양 한 마리를 선물로 주셨어요.

       '습관이 제2의 천성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투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투쟁이 우리의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은 투쟁이고 우리는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하며 투쟁하는 사람만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인생은 이렇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인생에서 사람들마다 목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함께 일하고 사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함께 일해야 합니다. ''la langue et les dents appelées à cohabiter tout une vie se querellent''. 우리 가정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만나는 많은 어려움은 특히 오해의 문제입니다. 무슬림에 따르면 우리(기독교인)는 그들처럼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 기도하는데 이는 그들에게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금지된 음식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죄입니다.

문제는 다른 종교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충돌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종교의 방식인 계시록의 의미를 언어로 정의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신자들 사이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I.5. 나의 공부와 나의 즐거움

        저는 아랍어와 이슬람 연구를 전공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지만 교회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여러 언어를 모르면 다른 사람들(무슬림과 기독교인)과 대화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에 영어와 같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입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는 무술, 노래, 기타와 드럼 연주, 음악 감상, 달리기입니다. 그들은 내가 긴장을 풀고 기분이 좋아지도록 도와줍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미쳤지만 노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II. 종교 간 대화

II.1. 종교간 대화의 성경적 토대

       기독교-무슬림 대화의 맥락에서 교회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사전에 성경적 출처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교회의 사명인 기독교-이슬람 대화의 기반이 되는 기반을 해제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따른 대화의 기초를 명확하고 간결하게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하느님이 인간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주도권을 갖고 계신 분임을 단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 전체를 목격하십시오.

II.2. 구약에서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대화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창조 이래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동맹을 맺기 위해 자신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개인적으로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담에서 예언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는 인간과의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대화를 통해 자신을 존재로 계시하셨습니다.

II.2.1. 아담과 맺은 언약 창세기 1장 27장과 창세기 3장 15장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창세 1,27).

하나님은 확실히 온 인류의 구원에 헌신하셨습니다. (창세 3,15).

II.2.2.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창 15,18

       모든 위대한 일신교는 그가 신자들의 아버지라고 주장합니다.

II.2.3. 모세와의 언약 출 3:1-6

       모세와 함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지위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이야기에서 모세와 대화에 참여하셨습니다.

II.3. 신약에서

       “하나님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후에 마지막 때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1,1-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대화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분입니다.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충성심, 소외된 자들과의 여러 번의 만남은 증거입니다.

II.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자신을 대화로 만드십니다

       그의 아름다운 서문에서 성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3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우리 중 하나로 만들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더 잘 이야기하고, 더 잘 대화하고, 더 잘 토론하고, 더 잘 대화하기 위해 우리와 가까워졌습니다.

II.3.2.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차별 없이 만남과 대화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II.4. 몇몇 교부들이 말하는 대화의 신학.

       늦게 기독교로 개종한 성 저스틴(165년 사망)의 예를 들어 모든 사람 안에는 말씀의 흔적과 씨앗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Paene의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 첫 번째 다리를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215년 사망)는 부계 출신으로, 철학이 그리스도와 함께 결정적인 빛을 받아들이는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사실이 특징입니다.

St. Irenaeus(202년 사망)는 St. Justin의 특정 요소를 다시 포착합니다. 그에게 기독교는 인류만큼 오래된 것이다.

성 어거스틴(430년 사망)은 이단과 모든 철학적 일탈과 이데올로기를 공격하면서도 모든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신비한 임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III. 교회의 교도권

       종교 간 대화의 선구자라고 하면 교황 바오로 6세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교도권 문서에서 대화라는 용어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교황은 1964년 8월 6일자 회칙인 Ecclesiam Suam에서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의 두 문서는 가톨릭 교회와 이슬람교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64년 11월 21일에 채택된 교의헌장: Lumen Gentium입니다.

       구원의 계획은 또한 창조주를 인정하는 사람들,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공언하고 마지막 날에 인간의 심판자이시며 자비로우신 유일한 하나님을 우리와 함께 경배하는 무슬림들을 포함합니다. (루멘 젠티움 16)

     교회와 이슬람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두 번째 공의회 본문은 Nostra Aetate 선언입니다. 이 문서는 1965년 10월 15일에 승인되었고 같은 해 10월 28일에 공포되었다. 상당히 중요한 서문이 이 진술을 구성합니다. 그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날이 갈수록 인류가 서로 가까워지고 민족 간의 유대가 강화되는 우리 시대에 교회는 비기독교 종교와의 관계를 더욱 면밀히 검토합니다. 사람들 사이, 아니 국가들 사이에 일치와 사랑을 증진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교회는 이 선언에서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그들을 친교로 이끄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합니다. (n°1)

       이 서문 다음에 공의회 선언 Nostra Aetate는 인류의 위대한 영적 전통, 특히 힌두교와 불교를 광범위하게 환기시킵니다. 그런 다음 유대교에 대한 오랜 발전에 전념하기 전에 그녀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은 용어로 환기시킵니다.

       교회는 이슬람교도도 존중합니다. 그들은 그분 안에서 살아 계시고 존재하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경배합니다.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시며 천지의 창조주이시며(5) 사람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들은 마치 이슬람의 믿음이 자신과 연결되는 것을 기뻐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종한 것처럼 그분의 불가해한 법령에도 전심으로 복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선지자로 존경합니다. 그들은 또한 그분의 동정녀 어머니인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때때로 그들은 헌신적으로 그녀를 부릅니다. 또한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로를 갚아 주실 심판의 날을 기다립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도덕적 삶을 소중히 여기며 특히 기도, 자선, 금식을 통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인과 회교도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적대감이 발생했기 때문에 이 신성한 총회는 모든 사람이 과거를 잊고 상호 이해를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고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해 함께 보존하고 증진할 것을 촉구합니다. 사회 정의와 도덕적 복지, 평화와 자유.

 IV. 다양한 형태의 대화[2]

IV.1. 삶의 대화

       삶의 대화는 사람들이 기쁨과 고통, 인간의 문제와 염려를 함께 나누면서 선한 이웃 정신으로 함께 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특징입니다.

IV.2. 행동의 대화

       그것은 인간의 온전한 발전을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함께 일하는 대화입니다.

IV.3. 신학의 대화

       학자들이 대표하는 종교적 유산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각각의 영적 가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적 교류 대화.

IV.4. 종교적 경험의 대화

       자신의 종교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영적 부를 나누는 대화입니다.

IV.5. 집중

       종종 사람들은 종교 간 대화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하지만 교회가 다른 종교와 협상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언제나 교회가 첫 걸음을 내딛는다는 사실을 지지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가는 것이 교회의 선교적 본질임을 재확인하고 싶습니다. 교회와 다른 종파, 특히 무슬림과의 관계에서 문제의 핵심은 교리적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수준이라고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서도 양쪽 모두가 제공하는 노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공유할 것이 바로 이 경험입니다.

       저는 제가 한 경험에 대해 간증하고 싶습니다. 내가 3년 동안 일했던 한 본당에는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이 위원회를 구성한 사람들은 무슬림과 기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위원회와 함께 일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전국 7개 지역이 참여했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한편으로는 코란과 이슬람 전통에 있는 대화의 근원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 있는 대화의 근원에 대해 3일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전통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슬림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냈고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많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함께 있고, 함께 토론하고, 우리 형제자매들의 종교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매우 어려울 수 있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어려움은 현실이며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불행히도 때로는 대화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대화는 무기의 '대화', 전쟁의 '대화', 폭력의 '대화'가 된다. 이런 종류의 ''대화''의 결과는 인류의 어리석음과 어리석음 때문에 죽음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기도의 대화가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대화는 우리에게 걷기의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종교 간 대화를 실천한다는 것은 이론일 뿐만 아니라 그 중심에는 대화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대화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기 위해 다양한 교육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습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말하는 사람보다 행동하는 사람, 말하는 사람보다 증인을 더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무엇보다 믿음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믿어야 하고, 그 다음에 일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베네딕토 16세, 프란치스코 교황 등과 같이 이런 종류의 대화를 믿는 신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V. 아시시 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예언[3]

    1986년 10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12개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함께 회의를 소집하여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모임을 위해 선택한 장소는 로마가 아니라 단순한 삶을 살았던 성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장소인 아시시(Assisi)는 평화의 사람이자 신자들 사이의 대화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술탄 Malek al-Kamil을 만나기 위해 이집트로 갔고 무슬림 영토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무슬림 국가에 사는 형제들에게 확고하고 겸손하며 갈등과 분쟁을 피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Francis의 모습은 회의의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 프란치스코를 종교 간 대화의 후원자로 삼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좋을 것 같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가 확실히 이 회의가 아시시에서 열렸던 이유라는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이 예언적 직관은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새로운 기회입니다. 따라서,

VI. 오늘날 교회의 종교 간 대화 경험

      2014년 6월 8일 일요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몬 페레스(이스라엘 대통령)와 마흐무드 압바스(팔레스타인 대통령) 사이에 바티칸 정원에서 기도 모임을 가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도 참석했습니다. 선택된 날은 가톨릭 교회가 성령이 교회에 강림하는 날인 오순절을 기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었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이 능력입니다. Mais s'il est vrai, comme l'a si bien asserté Antoine de Saint Exupéry dans son ouvrage Le Petit Prince que : ''l'essentiel est invisible aux yeux, et qu'on ne voit bien qu'avec les yeux du cœur '', 마음의 중심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의 중심을 볼 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마음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VII. 내 마음의 중심에

힘들고 고단한 삶에 지치고 지친 이들을 위해 마음 속 깊이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말씀하십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희망이 없는 이들을 위해 마음 속 깊이 기도합니다. 그러나 희망의 불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도, 화해도, 평화도 없기 때문에 살아갈 수 없는 곳을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의 미소는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밝혀줄 수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의 언어만 말하는 이들을 위해 마음속 깊이 기도합니다. 이런 종류의 언어는 모든 빈곤과 불행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은 진리를 위합니다!

마음 속 깊이 모든 종교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불교도, 힌두교도, 유대인, 아프리카 전통 종교 수행자, 무슬림, 기독교인을 위해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조용히 기도합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이 나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고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 함께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오 하나님, 당신이 계십니다. 항상 마음 속으로 만나고 싶어요! 오 신 이시여!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특별히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신다고 확신합니다. 마음 속으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브라힘 세이두 C.Ss.R

서지

Atlas des populations et pays du monde, statisques 2018.

Bible de Jérusalem, les éditions du Cerf, 1996.

진리와 사랑의 대화, 종교 간 대화를 위한 목회 방향,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14.

에클레시암 수암 1964년 8월 6일.

Hamman A., Guide pratique des Pères de l'Eglise, Desclée de Brouwer 1967.

La documentolique catholique, 21 Février 1993, n°2066, Assise, La prière des croyants pour la paix.

루멘 젠티움, 1964년 11월 21일.

Nostra aetate, 1965년 10월 15일.

각주:
[1] 참조. Atlas, populations et pays du monde. 통계 2018.
[2] Cf. 교황청 종교 간 대화 평의회, 진실과 사랑의 대화,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사목 방향,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14, 26, 27, 28, 29, 30쪽. [3]
Cf. la documentolique catholique, 21 Février 1993, n°2066, Assise, La prière des croyants pour la paix, 페이지 166,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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