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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모음/영화

한니발

by 이덕휴-dhleepaul 2023. 7. 14.

https://www.youtube.com/watch?v=bTK4BYPzFMA 

한니발

한니발 바르카(라틴어: Hannibal Barca, 그리스어: Ἀννίβας Βάρκας,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83년 또는 기원전 181년)는 고대 카르타고의 군사 지도자로, 대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니발 바르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있었다. 또 공정한 하스드루발과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개요[편집]

전쟁사에서의 발자국[편집]

한니발은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 제국마케돈 및 시라쿠사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국가들 모두 얼키고설킨 지중해 패권투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를 살다 갔다.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반도에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가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알프스를 거친 이탈리아 본토 습격 이후 한니발은 세 차례의 전투(트레비아강 전투트라시메네호 전투칸나에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로마의 주력 정예군을 괴멸시킨 이후 로마의 동맹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 하에 두며 로마를 숨통을 조였다. 그러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베리아반도에 웅거하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까지 토벌하고 북아프리카를 역침공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게 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함으로써 로마 역사 상 최강의 적수였던 한니발을 무찌르고 구국의 영웅이 되었다. 한니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율리우스 카이사르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피로스와 함께 고대 지중해 세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장으로 꼽힌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일화가 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와 피로스를 말하고 그들을 이어 세째 가는 것이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댁은 자신에게 지지 않았냐는 스키피오의 물음에 한니발은 자신이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앞서 말한 두 대왕마저 뛰어넘어 제일이 되었을 것이라 답했다.[1] 이 이야기의 또다른 판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신 스키피오가 들어가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다.[2]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는 한니발의 적이었던 로마마저 한니발을 무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전술과 전략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불렀고, 이 별명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3]

죽음[편집]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이후 한니발은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재정적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개혁은 기득권을 침해 당했다고 생각한 카르타고의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니발은 자발적 망명이라는 형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가서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 고문관이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고문에 불과했던 한니발은 별 발언권도 없었으며 안티오쿠스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결국 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쳤다. 결국 한니발은 도피를 거듭하다가 비티니아까지 가게 되는데 이때 생애 마지막으로 지휘권을 부여받아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고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 한니발은 로마에게 팔아넘겨지게 되었고,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니발은 음독 자살했다.

성장 배경과 어린 시절[편집]

하밀카르 장군의 아들[편집]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카'는 페니키아어로 '천둥'을 뜻한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였다.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그의 집안은 카르타고에서도 해외 식민지 경영을 중요시하는 해외파에 속하는 명문 가였으며 아버지 역시 1차 포에니 전쟁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마지막까지 로마에 맞섰던 인물이었다.

이베리아반도[편집]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한다. 아마도 전쟁의 패배로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대농장 지주들 위주로 구성된 내부파들과의 정쟁에서 밀려 쫓겨났을 것이라는게 정설이며, 실제로도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본국의 지원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밀카르 바르카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키워갔고 광산 경영에 성공하면서 카르타고 역시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며 로마를 두렵게 하였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제1차 포에니 전쟁으로 시칠리아가 로마공화정의 속주가 되고, 로마공화정과 모국인 카르타고가 무역을 하는 관계가 된 시기동안 에스파냐의 과달키비르 강 유역을 정복한 후에, 라틴어로 새로운 카르타고라는 뜻인 Carrthago Nova(카르타고 노바) 또는 카르타헤나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로마공화정과 카르타고는 지중해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국가였으므로, 로마공화정은 카르타고의 힘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결국 기원전 219년 사군툼을 한니발이 정복함으로써 전쟁이 일어난다.

제2차 포에니 전쟁[편집]

한니발의 침입로를 보여주는 지도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활약했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9살에 로마를 쳐부술 것을 카르타고의  타니트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와 매형의 뒤를 이어,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했다.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은 이유[편집]

알프스를 넘고 있는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기원전 218년 여름, 고작 28살에 불과한 젊은 장군인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그때 군사는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는 한니발의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한니발에게 불리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세유 일대는 로마화가 충실히 되어 로마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역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에게 우호적이였으므로 한니발이 우군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싶어했는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의 식민화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였으므로 한니발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훗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은 그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먼 훗날의 나폴레옹에 의해 재현되나 후대의 두사람이 여름에 산맥을 넘은 것에 비해 한니발은 겨울에 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이나 나폴레옹에겐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한니발 이전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장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니발의 행군이 훨씬 더 어려웠음은 자명하다

한니발의 리더십[편집]

한니발의 군대가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에 대해 역사저술가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을 잃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작전에 몰두한 한니발의 열정과 자신들을 방해하는 원주민 포로들 중 용맹한 전사는 고향에 돌려보내는 관용으로 복종시킨 지도력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과학자 이종호는 한니발에게 과학지식이 있었다고 본다. 고대 군인들은 갈증과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식초를 갖고 다녔는데, 한니발은 산성인 식초를 이용해서 행군을 방해하는 바위를 갈라지게 하여 제거했다는 것이다.[4] 실제로 한니발이 이끈 군대는 모두 용병이었으며 다양한 민족이 뒤섞인 다국적 군대였던데가 15년이 넘는 세월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워야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군대가 내부 균열로 붕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완벽하게 통솔해낸 한니발의 리더십은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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