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신 것을 보았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것은 기쁨의 삶이었습니다.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또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정말 행복한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불행이 들어왔습니까? 왜 우리의 삶이 행복해야하는데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설명해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 보면 이 뱀을 가리켜 사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에덴동산의 뱀) 마귀요 사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중에 하나인 실제 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사탄이 뱀을 통해서 여자에게 접근을 해서 시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불행이 들어오게 된 것이 사탄의 시험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너희가 사탄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무엇이 사탄의 시험인지 아닌지를 잘 분별해야합니다.
그러면 사탄이 어떻게 우리를 미혹하고 시험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사탄은 항상 부정적인 부분들을 부각시키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1절에 보시면 “뱀(사탄)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에덴동산에 있던 각종 열매들을 먹는 것에 강조점을 두셨습니까? 아니면 먹지 않는 일에 더 강조를 두셨습니까?
“창2장16.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표준새번역)."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먹지 말아야할 것보다 먹을 것을 더 많이 두셨습니다. 그리고 먹지 말아야할 것보다 먹을 것에 더 많이 강조를 두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수많은 과일보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에 집중하도록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에 마음대로 먹을 수 열매가 10000개라고 하면, 먹지 말아야할 열매를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에 사탄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10000개의 열매보다 먹지 말아야할 한 개의 열매에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항상 우리의 삶 가운데서 부정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부각시킴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목회란 행복과 불행의 혼합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행복과 불행의 혼합물입니다. 우리가운데 100프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100프로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50은 행복한데, 50은 불행한 부분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50의 행복한 부분을 확대해서 나머지 50프로의 불행을 극복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최악의 상황 속에서라도 최선을 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에덴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드실 때도 우리가 보기에 100프로 완전하게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만드셨지만, 그 땅은 아직 딱딱하여 사람으로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황무지와 같은 땅을 옥토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또 에덴동산에 처음부터 사람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만드시고 우리가 그 생명나무를 따 먹음으로 영생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사람을 만드실 때도 처음에는 남자 혼자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남자 혼자서 하나님께서 맡겨두신 일을 감당하기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돕는 배필로서 여자를 만드셔서 함께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또 수많은 과일은 먹게 하셨지만,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인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처럼, 우리의 삶도 행복과 불행, 좋은 점과 부족한 점,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들이 항상 함께 섞여져있습니다.
이때 사탄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행복하고 좋고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에 집중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그 부정적인 부분을 집중하게 함으로 결국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예레미야애가에 보면 예레미야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애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가운데서 그가 당하고 있는 고초와 재난을 기억하고 생각할 때 그의 마음가운데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서도 “애3: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들고 낙심해도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끊어지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인생의 어두운 부분들만을 생각하니까 심지어 하나님께 대한 소망조차도 끊어졌습니다. 그랬던 예레미야가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삶에 대한 소망을 다시 회복합니까?
애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기서 이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가운데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가운데서 아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지 아니하시고 살려두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죽지 않고 살려두신 것을 다시 마음에 담았습니다. 이성적인 머리로서는 여전히 어렵고 힘든 상황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아직 그에게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삶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소망이 생기니까 이제 하나님께 대한 소망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성경을 잃어보겠습니다.
“애3:27. 젊은 시절에 이런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고, 28. 짊어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고, 29. 어쩌면 희망(소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가만히 땅에 엎드려) 겸손하게 사는 것이 좋다. 30.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어라. 31. 주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32. 주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33.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어떤 고난과 고통이 있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삶 가운데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소망입니까? 우리가 그 어떤 고난과 고통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근심하게 하시고 고통하게 하심이 절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삶의 어두운 부분만을 기억했을 때는 삶에 대한 소망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소망조차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삶의 긍정적인 부분을 마음에 두게 될 때 하나님께 대한 소망만 아니라 삶에 대한 소망까지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의 관점에서 창세기를 보고 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에는 그들은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문제는 철저한 패배의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들은 할 수 없다 해도 안 된다는 부정적인 패배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의 땅인 가나안 땅을 보고도 가나안땅의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에 더 강조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민13: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정탐꾼들은 “민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합니다. 같은 땅을 두고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거주민조차도 삼키는 땅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열 정탐꾼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적으로 보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네피림이 후손인 아낙자손의 뼈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보니까 지금 사람들보다 몇 배나 큰 두개골과 전신 뼈였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과장된 면은 있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의 이야기가 전혀 틀린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과 같이 가나안땅도 100프로 완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과일들이 있는 땅이었지만, 또한 여전히 개척을 해야 하는 거친 땅이었습니다. 이때 대부분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땅의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들을 더 부각시켰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에덴동산에서의 사탄의 시험을 말하면서, 그것이 사탄의 시험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은 우리 인간의 본성은 어떠합니까? 긍정적인 부분보다 부정적인 부분을 더 확대해서 보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내게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에 주목하지 아니하시고, 있는 것이 주목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와 같이 우리에게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들을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약점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그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바울로 절망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고 죽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바울에게 있어서 약점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머무는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여러분들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겠습니까? 100프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100프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나를 잘 이해하지 않아서 나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더 집중하고 계십니까? 만일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집중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너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옆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고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하는 부정적인 말들에 집중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믿음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탄의 시험은 무엇입니까?
둘째,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함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창2장 17절에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에서 “사탄은 참으로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제기합니다. 이때 하와가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선악과는 절대 먹지 말라하셨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다”고 했다면 사탄은 절대 하와를 시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가 어떻게 이야기를 합니까?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그때 사탄이 어떻게 말합니까?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성경에 1절에 “참으로”와 3절에 “죽을까”와 4절에 “결고”라는 말에 줄을 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맞나” 라고 의심을 제기합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그럴까”라고 하면서 말씀에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와 같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시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마5:3절에 “시험하는 자(사탄)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합니다. 또 마5:6절도 “(사탄이)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사탄이 시험하기 직전에 마2장 17절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탄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의심을 제기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또 “내가 너의 아버지가 되어 반드시 네 삶을 책임을 주겠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내가 너를 반드시 복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상황을 나쁜 쪽으로 유도를 하고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사탄은 5가지의 나쁜 상황으로 욥을 유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소유물이고, 둘째는 자녀이고, 셋째는, 건강이고, 넷째는 아내이고, 다섯째는 친구입니다. 사탄은 처음에는 욥의 경우처럼 우리에게 있는 소유물을 빼앗아 가면서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내게 있는 물질을 빼앗아 가시는가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라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다가 “그래 내게 물질이 없어도 내게 내 사랑하는 자녀가 있지 그래도 역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라고 사탄의 시험을 이깁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가 어떠했습니까? 사탄은 심지어 사랑하는 우리 자녀를 빼앗아가면서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때도 사탄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자녀가 없어졌는데 과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더냐” 라고 합니다. 이때도 처음에는 괴롭다가도 “그래 나에게는 그래도 육신의 건강이 있지, 그래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셔” 라고 하면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칩니다. 그런데 욥의 경우처럼 사탄은 건강조차도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때 사탄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고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는 의심을 들게 합니다. 그러다가 또 “그래도 내게는 사랑하고 나를 지지해주는 아내가 있지 않는가” 하면서 사탄의 시험을 이깁니다. 그런데 사탄은 사랑하는 아내조차 잃어버리게 합니다. 이때도 사탄은 욥의 아내의 말처럼“그럴 바에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죽으라”고 우리를 시험합니다. 이때 정말 죽고 싶은 고통이 있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위로해주는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하면서 사탄의 시험을 이깁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나를 사랑하고 위로해 주어야하는 친구들에게서 도리어 배신을 당합니다. 친구들은 우리를 위로하기는커녕 그것이 너희 죄 때문이라고 추궁합니다.
이것이 욥기에 나타난 사탄의 시험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시간에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는 절대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집에 돌아갑니다. 그래서 욥이 당한 시험가운데 한 가지라도 당하면 그 상황을 통해서 사탄은 끊임없이 여러분들을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를 향한 사탄의 시험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돈을 잃어버리고, 자녀를 잃어버리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아내를 잃어버리고,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탄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물질문제로, 자녀문제로, 건강문제로, 가정문제, 인간관계문제로 끊임없이 나쁜 상황으로 인도하고, 그 가운데 우리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사탄은 그 나쁜 상황을 통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탄의 시험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내게 물질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육신적으로 건강을 잃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건강을 잃어버린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일이 분명히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게 그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반드시 이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멘 믿습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가장 무서운 재앙은 자연적인 재앙이나 물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암8장 11절에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재앙의)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제일 큰 사탄의 시험은 마음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어렵고 힘든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음으로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째, 사탄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주인노릇하게 함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사탄은 오늘 본문 5절에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인생과 세상의 주인 노릇하여)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이 말씀을 보면서 아니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하는 것이 무슨 사탄의 시험이란 말인가? 주인노릇이란 주인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가정의 가장으로 주인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가장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은 주인노릇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은 주인노릇이란 나의 주인 됨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책임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아담에게 왜 먹었느냐 하니까 그 책임을 여자에게 돌렸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책임을 뱀에게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자신의 주인 됨에 대한 권리주장만 있고, 책임의식이라고는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같이 주인 노릇하여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서 내 기준에서 선이다 악이다 판단만을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같이 주인 노릇하여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아무 책임도지지 않고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려 하는 것이 사탄의 시험으로 말미암은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주인노릇만을 하려고 합니다. 모두 자기가 역사에 있어서도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또 염려만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어떤 누구도 그 어떤 문제에 있어서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사탄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탄의 시험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진짜 우리의 주인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밤낮으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30년 넘게 제자훈련을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요13장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 제자는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만을 꾸미고 있습니다. 또 나머지 제자들은 서로 누워서 자신의 발만 씻겨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짜 주인이신 예수님은 너희들이 왜 그러느냐 고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왜 이런가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희생하고 책임지고 섬기려 하지 않는 상황가운데 혼자 조용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섬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팔려는 제자도차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인간들이 다 네 탓이라고 하는 세상가운데, 아무 잘못도 없이 모두 내 탓이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펴주심으로 이 온 세상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탄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으로 다스리시고, 희생함으로 봉사하고, 끝까지 누구라도 사랑함으로 충성함으로 사탄의 모든 시험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 행복의 에덴동산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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