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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東醫寶鑑에 대한 의사학적 고찰

by 이덕휴-dhleepaul 2018. 8. 13.

東醫寶鑑에 대한 의사학적 고찰



1. 서론

醫史學이란 의학과 의료의 기술적 발전의 자취 그리고 의학발전을 둘러싼 사회적 정신적 환경과 각 시대의 상호관계를 밝히는 학문이다. 醫史學의 의의는 내적으로는 의학의 연원을 소급·추구하고 의학의 이론과 의료기술의 변천과정을 구명하여 오늘의 의학을 바로 인식함으로써 의학의 미래를 예견하고 외적으로는 의학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등과의 관계를 구명하는 것이다.

또한 진대순에 의하면 “의가의 학술사상은 醫家자신의 의식형태 세계관 방법론과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또한 당시의 시대배경, 사회배경, 지역환경 정치 輕劑 문화 과학기술의 발전상황과도 관련되어있다. 그러므로 醫家의 학술사상을 평가할 때는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영향에 주의하여야한다.”


한편 “조선시대의 醫學은 東醫寶鑑으로 흘러나와서 東醫寶鑑으로부터 흘러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東醫寶鑑이 우리 나라 醫學史상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라는 허정의 언급과 같이 우리 나라 韓醫學은 東醫寶鑑에서 성립하여 이후 우리 나라 醫學界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때문에 東醫寶鑑에 대한 연구는 韓醫學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다양하여 한국의학사의 양 巨木인 미끼사까에(三木榮), 金斗鍾으로부터 시작하여 최근에는 역사학자 김호나 과학사전공의 신동원 등에 이르기까지 韓醫學, 醫學관계자뿐만 아니라 철학, 서지학, 체육학, 생물학, 과학사, 역사학 등 실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東醫寶鑑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이는 최근에 있었던 許浚열풍(드라마)과도 연관이 있는데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풍부한 자료와 내용들이 보강되었으나 불행히도 韓醫學的인 시각에서 東醫寶鑑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를 시도한 논문은 드문 것 같다. 필자는 이런 맥락에서 이제까지 있었던 東醫寶鑑에 관련한 다양한 논의들을 한 곳에 모아 정리해보고 韓醫學的인 시각에서 이를 하나로 묶어내는 작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단순히 東醫寶鑑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東醫寶鑑이후의 의서 들과의 연관성을 알아보고 현재 韓醫學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따라서 本稿에서는 우선 東醫寶鑑의 저자에 관해 살펴보고 연후에 東醫寶鑑이 성립할 당시의 醫學외적인 상황과 醫學내적 상황에 대해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후에 濟衆新編과 醫宗損益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東醫寶鑑이 후대에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본론


제1절. 東醫寶鑑의 저자에 대한 고찰


1-1. 東醫寶鑑의 저자(들)는 누구인가?

처음에 東醫寶鑑 편찬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許浚을 비롯하여 儒醫 鄭碏, 太醫 楊禮壽, 金應鐸, 李命源, 鄭禮男 등 6인이었다. 처음에 선조가 許浚을 책임자로 하는 의서편집국을 만들었을 때 약 1년간 이들은 공동으로 의서 편찬작업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동의보감의 肯肇(뼈대, 골격이라는 의미)가 이루어 졌는데 이 표현의 해석 여부에 따라서 東醫寶鑑의 저자를 許浚 개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6인의 공동작업으로 볼 것인가가 결정된다. 조선시대에 의서편찬에 이와 같이 대규모의 프로젝트팀이 구성된 경유는 의방유취를 제외하면 본서가 가장 큰 규모였다. 팀원 각각의 면모를 살펴보면 팀장인 許浚은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簒圖方論脈訣集成>이래 선조와 광해군 때의 官撰醫書를 도맡아 편찬한 경험이 있고, 鄭碏(1533-1603)은 朝鮮丹學派의 대표자인 그의 형 鄭?과 함께 당대 최고수준의 단학수련가이자 詩人으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이와 같이 민간의 유의였던 정작까지 참여시킨 것은 본서의 편찬이 단순히 疾病을 고치는 處方書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신분에 관계없이 醫學에 밝은 사람은 누구나 망라하고자 한 선조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한편 楊禮壽는 조선시대 최초의 개인 종합의서인 <醫林撮要>를 지은 당대 최고의 명의로 손꼽히던 인물이며, 金應鐸은 왕세자의 병을 고쳐 의술을 인정받은 당대 명의이며, 李命源도 어의로서 노련한 의사이며 특히 선조의 수침을 주로 한 점으로 보아 특히 침에 정통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鄭禮男은 詩人으로 문장력이 뛰어난 인물이면서 金應鐸과 함께 왕세자 진료에 참가하여 공을 인정받은 바 있는 명의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許浚은 양예수나 정작보다 뒤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본서의 편찬 책임을 許浚에게 맡긴 것은 그가 단순히 의술에만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며 동시에 의서의 출판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는 許浚에 관한 기록들에서 그의 학문적 소양과 해박한 지식을 꼽고 있으며 <簒圖方論脈訣集成>에서 보여준 뛰어난 편찬 능력이 이미 선조로부터 신뢰를 얻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許浚은 6인 중에서 편집의 전체적인 조정과 틀을 짜는 작업을 지휘한 것으로 보이며, 鄭碏은 주로 養生術에 능한 인물이므로 東醫寶鑑의 養生부분에 대한 기초를 다진 것으로 여겨지고 楊禮壽는 당시 어의 중 최고서열에 있으면서 종합의서를 편찬한 경험을 바탕으로 東醫寶鑑의 체계를 잡는 일을 맡은 것으로 보이고 나머지 의원들은 실무작업을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肯肇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허정은 ‘肯’은 뼈위에 붙은 살을 의미하고, ‘肇’는 근육이 모여 결합하는 部位를 가리키는데. 비유적으로 쓰여 사리의 핵심 또는 관건을 의미한다고 보아서 東醫寶鑑의 내용은 다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서술지침과 글의 차례 등 상당부분 체제가 갖추어 졌음을 뜻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東醫寶鑑의 우수성은 상당부분 체계의 우수성에 기인하므로 肯肇의 구상이 이루어진 이 시기가 본서의 편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본서의 저자는 許浚 개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체계구상단계의 공동작업을 무시해선 안된다고 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결국 東醫寶鑑의 저자는 처음에 肯肇를 구상한 단계를 무시해선 안되므로 이상 6인의 공동저작으로 보아야하지만 이후에 실질적인 업무를 추진하고 내용을 채워 넣은 것은 거의 許浚 개인의 공이므로 許浚이 다른 5인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때문에 이하의 모든 논의는 주로 許浚을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1-2. 許浚의 나이 및 家系에 관하여

1-2-1. 허준의 나이에 관하여

기존 학계의 통설은 許浚의 생년을 족보에 나와있는 출생년을 기준으로 1546년(병오년)과 1547년(정미년) 설이 있었는데 이는 족보마다 약간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에 발견된 <태의원선생안>에는 정유생(1537년)이라고 기록되어있어 기존 학설과는 10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한편 한대희는 <실록 許浚은 살아있다>에서 1604년에 있었던 扈聖功臣 모임인 태평회맹도에 쓰여진 許浚의 史蹟을 근거로 하여 기해년인 1539년(중종 34년)이 정확하다고 보았는데 1604년이면 아직 許浚이 살아있을 무렵이고 또한 功臣의 출생기록을 틀리게 적었다고는 보기 어려우므로 이 설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신동원도 최근에 발굴된 자료인 최립의 문집인 <간이집>에 나오는 ‘贈宋同庚大醫許楊平郡還朝自義州’라는 시가 결정적인 단서라고 보아 한대희의 설에 동조하였다. 왜냐하면 위 시에서 ‘同庚’이란 ‘同甲’이란 의미이고 최립은 출생년이 1539-1612년으로 밝혀져 있으므로 許浚의 나이는 분명 1539년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許浚의 나이가 기존학설보다 7-8년 정도 늦춰짐으로써 그간 문제시되었던 내의원첨정이라는 벼슬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의미도 있다. 왜냐하면 許浚이 1569-1571년 사이에 벼슬이 내의원 첨정(종4품)에 올랐는데 이는 내의원 행정직 중 두번 째로 높은 자리로 20대 중반의 許浚이 이런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였었다.

 

1-2-2. 許浚의 출생지에 관하여

(1) 경상도 산청설

이 설은 앞에서 인용된 노정우의 견해인데 주요근거는 許浚의 스승이 유의태이고 조부가 경상우수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이설이 나중에 疎泄동의보감에 채택되어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나 이 설은 사실과 멀다. 왜냐하면 유의태는 許浚의 스승이 아닌 가공의 인물이며 역사속의 유의태는 許浚보다 한참 후의 의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부모의 연고만으로 許浚의 출생지를 단정짓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2) 전라도 담양설

이설을 주장한 사람은 역사학자 김호다. 그는 許浚의 출생지는 확실치 않으나 성장한 곳은 분명히 담양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우선 허준의 생모인 영광 김씨 집안이 담양에 살았다는 것과 許浚이 나중에 서울에서 활동할 때 담양지역에 연고가 있는 유희춘과 유팽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다는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許浚이 적어도 전라남도 지방을 중심으로 지방의생이었거나 혹은 審藥이라는 낮은 직책으로 醫學 공부를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설은 신동원의 주장과 같이 신빙성이 떨어진다. 우선 許浚이 심약을 했다는 것은 許浚이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에 밝았으며 특히 의술에 밝았다.”는 의림촬요의 내용과 어긋나고 당시에 심약출신으로 내의원에 진출한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 할 수있다. 또한 모친이 영광 김씨라고 하여 출생지가 許浚의 생가가 영광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유희춘이 해남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許浚이 그와 친분이 있다고 해서 許浚이 원래 해남이나 담양출신이라는 주장은 논리의 脾約이 심하기 때문이다.

(3) 서울설

서울설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한대희인데 그는 강서구 가양동 부근의 공암을 許浚의 출생지로 보았다. 그 근거는 가양동의 옛지명이 양평, 공암, 파릉 등인데 許浚의 읍호가 양평군이며 許浚의 아들인 겸의 읍호가 파릉군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읍호는 출생지가 아니라 본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므로 이 설의 근거는 薄弱하다.

(4) 파주, 개성설

서지학자 이양재씨가 주장하는 설로 許浚의 직계조상 및 許浚 자신의 묘소가 있는 곳이 이곳이고 대개 선산과 생활 터전은 일치하므로 이 설이 타당한 것 같다.

결국, 許浚의 출생지는 서울과 가까운 파주, 개성 부근으로 許浚이 학문적 滋養을 충분히 흡수할 만한 문화적인 환경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2-3. 허준의 가계에 관하여

許浚의 가계에 대해서는 양천 허씨 족보에 許浚은 경상우수사를 역임한 조부 許琨 -용천군수를 지낸 父 許碖의 서자로 1546년 공암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위에서 이종형이 제시한 許芝는 許浚의 조부가 아니라 증조부에 해당한다. 한편 許浚의 모친은 이종형이 말하는 손씨가 아니라 영광 김씨 金有誠의 자인 金郁瑊의 첩 소생인 김씨로 金郁瑊의 적자인 金時洽이 許浚의 외삼촌에 해당하며 나중에 유희춘과 교류하여 許浚의 내의원 진입에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許浚의 가계에 주목하는 이유는 유희춘의 <眉巖日記>에 보면 유희춘이 許浚의 외가와 친밀하여 許浚도 자주 방문하였고 1569년에는 직접 내의원에 천거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관계는 유희춘이 사망하기 전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1-2-4. 小結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許浚은 1539년(중종 34년 기해년)에 부친 許碖과 모친 영광 김씨 사이에서 경기도 파주개성부근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그런데 양평 허씨 집안은 대대로 문과 급제자를 여러 명 낼 정도로 당대의 대표적인 양반가문이었으며 許浚의 祖父와 父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대대로 벼슬을 한 당당한 집안이었고, 모계쪽도 당당한 양반가문이었다. 특히 당대의 대학자이자 문신이며 여러 차례 의서편찬의 경험도 있어 醫學에도 조예가 깊은 김안국, 김정국 형제가 許浚의 5촌 당숙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許浚은 어릴 때부터 비교적 부유한 가문에서 제대로 된 유학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서자였던 까닭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기에 醫學을 공부하였고 그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유희춘의 천거를 받아 일약 내의원 첨정이라는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이상이 許浚이 내의원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해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許浚이 내의원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단지 醫學적 능력만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학식과 경륜을 인정받아 천거를 통해 내의원 행정직에 올랐다는 점이다. 의사이면서도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다는 것이 許浚의 장점이었고 이 때문에 당대의 거의 모든 의서를 許浚이 도맡아 편찬하게 된 것이다.


許浚연보

연 대

나이

주요 행적

1539(중종34)년

1세

湧泉부사 허론과 소실인 영광 김씨 사이에서 출생. 김씨는 김안국,김정국 형제와 4촌지간.

유년-청년기

 

남은 행적이 없음. 단,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밝았다고 함.

1568(선조1)년

30세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처음 등장.유희춘에게 老子등의 서적을 선물.

1569(선조2)년

31세

유희춘이 이조판서에게 편지를 보내 許浚을 내의원에 천거.

1571(선조4)년

33세

미암일기에 許浚을 내의원 첨정(종4품)으로 기재

1575(선조8)년

37세

어의 안광익을 보좌하여 선조를 진료함.

1578(선조11)년

40세

許浚이 선조로 부터 책을 하사받음

1581(선조14)년

43세

왕명으로 <찬도방론맥결집성>을 교정. 통훈대부(정3품 당하관)

1590(선조23)년

52세

왕자(광해군)의 痘瘡을 완치하여 정삼품 당상관 통정대부에 오름

1592(선조25)년

54세

임란발발. 許浚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당시 호종인원은 극소수)

1596(선조29)년

58세

동궁(광해군)의 병을 완치하여 東班(양반)이 되고 승계. 東醫寶鑑 편집의 책임을 맡음

1597(선조30)년

59세

정유재란으로 의서편찬 작업 중단. 선조 許浚에게 단독 편찬을 명.

1601(선조34)년

63세

어의중 최고인 首醫에 오름. 언해태산집요,언해구급방,언해두창집요를 편찬함. 이 때 벼슬이 정2품 정헌대부.

1604(선조37)년

66세

임란때 세운 공으로 숭록대부(종1품) 충근정량호성공신 3등이 됨

1606(선조39)년

68세

왕의 疾病을 治療한 공으로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명했으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격렬한 반대로 취소.

1607(선조40)년

69세

1601년에 편찬한 언해태산집요 발간.

1608(선조41)년

70세

언해구급방과 언해두창집요가 출간. 이 해에 선조가 승하하여 그 책임으로 유배. 東醫寶鑑 본격집필 시작.

1609(광해군1)년

71세

광해군의 강력한 의지로 귀양에서 풀려나 복권.

1610(광해군2)년

72세

東醫寶鑑 25권 완성.

1612(광해군4)년

74세

찬도방론맥결집성이 출간. 내의원에서 후학을 가르침

1613(광해군5)년

75세

東醫寶鑑이 훈련도감 활자를 이용해 최초로 출간.<신찬벽온방> <벽력신방>을 편찬함.

1615(광해군7)년

77세

許浚 졸.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추증


1-3. 許浚이 편찬한 다른 의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許浚의 저서는 확실한 것이 7종이고 그 외에 저자에 관해 논란이 있는 臘藥症治方까지 합하면 8종에 이르지만 그 동안 東醫寶鑑을 제외하고는 별로 연구된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東醫寶鑑이 완성된 시기는 이미 수십년간의 임상경험을 마친 노년의 許浚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우리가 보는 東醫寶鑑이란 저서는 許浚의학의 정수이자 완성품에 해당한다면 그가 자신의 醫學관을 정립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연구도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許浚의 醫學사상이 고정불변 된 것이 아니며 많은 의학경험들 속에서 완숙해졌고 정작 東醫寶鑑 본문에는 許浚 자신의 글이 별로 보이지 않기에 許浚의 다른 의서 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許浚의학의 전체를 조망해 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許浚이 편찬한 다른 의서 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4-1. 纂圖方論脈訣集成

<脈訣>이란 <王叔和脈訣>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육조의 高陽生이 왕숙화를 가탁하여 <脈經>의 내용을 1권으로 간단하게 요약하고 암기에 편하게 노래형식을 띠었고 脈經에는 없던 7표, 8리, 9도 이론을 추가하여 임상에 편리하게 바꾼 것이다. 그렇지만 내용이 너무나 간단하고 설명도 不足한데다 수준도 떨어져서 후대의 많은 醫家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대대로 診斷서로서 脈經보다는 脈訣이 중시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당, 송, 금 시대 여러 醫家들의 注釋을 가하고 그림을 더한 <簒圖方論脈訣集成>이 <簒圖脈>이라 하여 조선초기부터 매우 중시되었다. 본서는 1430년 세종12년에 처음 시작된 의과에서 시험과목에 선정된 후에 조선시대 내내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본서의 성서시기는 1581년이지만 출간된 것은 그보다 한참후인 1612년에 이루어 졌는는 그간의 정확한 사정은 알 수가 없으나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당시 許浚의 벼슬이 이미 통정대부 내의원 첨정에 올라있었다는 사실과 본서를 감교한 인물이 東醫寶鑑의 감교를 맡았던 두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어찌 됐든 본서는 許浚의 교정을 거친 이후 조선말기까지 의과고시용 교재로 일관되게 그 위치를 유지하여 조선 진맥학의 통일교과서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의 의사들이 중국보다 상대적으로 진맥에 대한 관심이 적은 이유도 어찌 보면 본서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 된다.


.1-4-2. 언해구급방에 관한 고찰

1) 구급의학의 전통

중국의 경우 구급의학은 內經에서 이론을 정립하고 傷寒論에서 外感病에 관한 이법방약을 갖춘 후에 전문적인 의미의 구급의학이 정립된 것은 진 갈홍의 주후구급방에서였다. 이후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諸病源候論, 千金方, 外臺秘要, 등의 저서에서는 구급이론을 체계화하였고 宋代의 和劑局方은 處方을 정리하였다. 한편 국내에서는 향약구급방에 각종 中毒, 外傷, 內傷, 婦人, 小兒, 雜病 등 54항목으로 구성되어 조선 초기까지 널리 쓰였다. 이후 조선중기에 이르기 까지 구급에 관한 의서들은 救急方, 救急簡易諺解方, 救急易解方 村家救急方 등이 더 출간되어 구급의학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었던 조선중기 이전에 백성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가의료체계의 대응이었기 때문이었다.

2) 본서의 내용

본서의 간행본은 현재 전해진 것이 없고 필사본만이 남아있는데 편집이 엉성한 편이고 인용문헌도 밝히지 않아 許浚의 저서임을 의심하는 견해도 있으나 목록에 분명 어의 許浚의 이름이 밝혀져 있고 刊記에는 만력 35년 6월 일 內醫院開刊傳書라고 씌어 있고 당시 도제조인 영의정 유영경과 제조인 이조판서 최천건, 부제조인 도승지 권희, 감교관인 내의원주부 이락 과 내의원직장 신득일의 이름이 적혀있다. 여기서 보다시피 당시에 구급방간행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그 중요성이 대단히 컸다는 것이 증명되는데 즉, 東醫寶鑑에도 나오지 않는 내의원을 총괄하는 도제조, 제조, 부제조 3명 대감의 이름이 모두 나열되어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본서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

본서의 내용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상권에는 1-中風, 2-破傷風, 3-中寒, 4-陰陽易, 5-中暑, 6-氣厥, 7-痰厥, 8-食厥, 9-尸厥, 10-卒死, 11-中惡, 12-鬼魘, 13-邪祟, 14-癲狂, 15-上氣, 16-頭痛, 17-心痛, 18-腹痛, 19-疝痛, 20-霍亂, 21-喉閉, 22-舌腫, 23-諸骨鯁, 24-誤呑金鐵, 25-誤呑諸蟲, 26-飛絲入口眼, 27-眯目, 28-失音, 29-咳逆, 30-吐血, 31-衄血, 32-九竅出血, 33-眼睛突出, 34-失欠脫頷, 35-大便不通, 36-小便不通, 37-入井塚卒死, 38-自鎰死, 39-溺水死, 40-凍死, 41-餓死, 42-斷穀不飢藥 등 42항목이 있고 하권에는 43-諸獸傷(狂犬傷), 44-諸蟲傷, 45-諸蟲入七竅, 46-金瘡傷, 47-打撲傷, 48-墮壓傷, 49-筋斷骨折傷, 50-諸刺傷, 51-湯火傷, 52-飮食毒, 53-諸藥毒, 54-諸肉毒, 55-諸魚毒, 56-諸果毒, 57-諸菜毒, 58-蠱毒, 59-疫癘, 60-大頭溫, 61-癰疽, 62-大風瘡, 63-天疱瘡, 64-陰蝕瘡, 65-烟薰毒, 66-難産, 67-胞衣不下, 68-急慢驚風, 69-痘瘡黑陷, 70-諸穴論, 71-俗方藥, 72-瘧疾藥, 73-常食相忌, 74-藥酒方文 등으로 일상생활과 관련된 症狀들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고 쉽게 사용 가능한 單方이나 針灸 지지는 방법 등을 기재하고 있다.

3) 본서의 특징

본서의 가장 큰 특징은 이전의 구급방에 비해 내용은 간략해졌으나 항목은 오히려 더 세분화되었다는 점이다. 즉, 세조 당시에 나왔던 구급방은 病證은 36가지였으나 한가지 病證에 대해 여러가지 處方을 실었고 그나마 복합처방이 많아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기에는 실용성이 떨어졌다. 이는 구급간이언해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중종 때 구급이해방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病證은 간단히 추려졌으나 處方은 여전히 복합처방이 위주였기에 역시 실용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본서는 내용이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針灸, 單方, 熨과 같은 경제적이고 간편한 방법을 싣고 있어 응급상황에 효과가 좋았다.또한 신은 본서 이후에는 정부차원의 구급방 간행이 없는 이유는 우선 본서의 내용이 좋아 널리 퍼졌기 때문이며 둘째, 醫藥의 不足이 조선후기이후에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이고 셋째로는 조선후기에 민간의료의 성장과 더불어 간편한 의서 들이 출현하여 구급방의 가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1-4-3 언해태산집요

1) 조선시대 태산학의 역사

태산학이란 姙娠과 출산에 관한 醫學의 韓醫學에서도 일찍부터 태산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미 기원적 2세기의 마왕퇴 한묘에서 태산학관련 문헌이 출토되었다. 또한 張仲景의 金匱要略에도 婦人科 항목이 따로 설정되었고 이후 諸病源候論이라 千金方등을 거치면서 그 내용이 더욱 風府해졌고 宋代에는 당시까지의 産婦인과학을 총정리한 陳自明의 婦人大全良方이 발간되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본서의 영향력은 우리나라에서 지대했는데 향약집성방의 경우 54권-66권까지 13권이 산부인과학을 다루고 있는데 婦人大全良方, 千金方, 聖濟總錄 등 72종의 문헌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본서는 국내에서 발달한 향약의 전통을 대폭 수용하여 경험방의 형태로 많이 실었다. 반면 의방유취에서는 207권-238권까지 32권이 産婦인과 내용이며 이중 18권이 태산학과 연관이 된다. 婦人大全良方, 諸病源候論, 千金方 등 78종의 의서를 인용하였고 내용의 배열순서가 婦人大全良方의 체계를 따르고 있다. 위 두 서적을 통해 우리 나라의 태산학은 비로소 체계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으나 그 양이 방대하고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서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세종 때 향약집성방의 저자 중 1인인 노중례가 1434년 향약집성방에서 姙娠, 출산과 관련된 부분만을 모아 간편한 책으로 만든것이 바로 태산요록이다. 본서는 상하 2권 1책으로 되어있다.

2) 언해태산집요의 내용

언해본이란 漢文으로 된 서적을 일반에 널리 보급시킬 목적으로 한글로 풀이를 달아 간행한 것을 의미하는데 대체로 언해본이 일반화된 시기는 17세기 이후로 본다. 주로 유교경전이나 불경내지는 기술서적등이 언해되었는데 본서가 나오게 된 배경에도 생활에 긴요하지만 어려운 醫學지식을 일반민중들이 이해하기 쉽게하려는 목적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본서의 목차를 살펴보면

1-求嗣 諺解, 2-孕胎, 3-胎脈, 4-驗胎, 5-辨男女法, 6-轉女爲男法, 7-惡阻, 8-禁忌, 9-將理, 10-通治, 11-安胎, 12-欲産候, 13-保産, 14-半産, 15-察色驗胎生死, 16-下死胎, 17-下胞衣, 1産前諸證, 18-子癎, 19-子煩, 20-子腫, 21-子淋, 22-子痢, 23-子瘧, 24-子嗽, 25-子懸, 26-感寒, 27-不語, 28-兒在腹中哭, 29-腹中鍾鳴, 産後諸證, 30-兒枕痛, 31-血暈, 32-血崩, 33-衄血, 34-喘息, 35-咳逆, 36-不語, 37-發熱, 38-乳懸, 39-陰脫, 40-過月不産, 41-下乳汁, 42-臨産預備藥物, 43-貼産圖法, 44-附初生小兒救急 순서이다.

신동원은 본서가 東醫寶鑑 婦人문의 집필과정 중에 약간의 손질을 가해 집필한 언해본 요약판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양자의 차이점도 뚜렷한데 東醫寶鑑은 비교적 전문적인 내용을 포괄한 전문가층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의서인 반면 본서는 간결한 구성과 꼭 필요한 소수의 處方으로 구성된 민간의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대중적인 의서라는 점이다.

또한 김중권의 연구에 의하면 본서와 東醫寶鑑의 處方을 비교해본 결과 모두 15군데에서 용량이나 수치법등의 차이가 있는데 그 원인은 주로 저자의 식견과 醫學적인 경험의 心火에 따라 용량을 조절한 것이고 부차적으로는 인용서의 오류나 간행상의 오류도 일부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본서는 태산요록을 토대로 하고는 있으나 내용면에서는 전혀 새로운 서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금원명대의 醫學을 종합한 위에 우리 고유의 전통을 겸비하여 일반 대중들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醫學지식을 보급하는데 이바지함과 동시에 자신의 醫學사상을 한층 심화시키는 계기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에 초기부터 태산학을 분과학문의 하나로 중시한 것은 나중에 東醫寶鑑에서 婦人科 질환을 內景篇의 胞門에 따로 배치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다. 즉, 동의보감에서 婦人科학 관련 조문은 月經病은 內景篇의 胞門에 나오고 乳房질환은 외형편의 乳門, 腫瘍이나 낭종등의 질환은 주로 雜病편의 積聚문에 나오며 산과관련 부분만 婦人문에서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東醫寶鑑에서는 태산학에 관련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 婦人문을 泄精했을까? 필자의 견해로 그 해답은 역사적으로 조선에서 역대로 태산학에 관한 부분을 중시하여 온 전통과 연결된다고 본다. 이는 김호가 “이전의 의서들이 疾病군으로 분류하고 편차 한데 비해 東醫寶鑑은 인간의 종류에 따라 疾病을 분류하였다.”는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즉, 김호는 東醫寶鑑에서 인간을 臟腑-부인-소아의 순서로 사회적 중요성이 있고 때문에 내용의 배열도 이 순서대로 인간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인데 이는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이 東醫寶鑑에 婦人병과 관련한 조문은 여러 곳에 나오고 小兒의 경우도 小兒문에만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일반론적인 의미로 男女노소 모두에게 적용되는 내용을 먼저 서술한 후에 일반론으로 다루기 힘들거나 특별한 가치가 있는 내용들을 따로 편차를 두어 뒤에 덧붙이는 형식을 취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또한 김호는 마치 婦人과 小兒를 나누어 고찰하는 것이 마치 東醫寶鑑에만 독특한 것 인양 언급하고 있는데 이 또한 醫學의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자신의 견해를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의사학적으로 婦人科와 小兒과에 대해 따로 편차를 두는 전통은 이미 金匱要略이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이다.

1-4-4 언해두창집요

1) 痘瘡에 대하여

痘瘡이란 천연두 또는 마마를 의미하는데 역사상 痘疹, 瘡疹, 痘瘡, 行疫, 時痘 등의 이름므로 불려왔다. 천연두라는 말은 서양의학의 종두술이 널리퍼진 이후에 인위적으로 두를 심는 종두에 대비하여 천연의 痘란 의미로 쓰인 용어이다. 여기서 痘란 병의 症狀이 콩알모양의 구슬이 皮膚에 돋아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瘡이란 皮膚가 곪아서 헌데가 나는 각종 피부질환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예전에 흔히 곰보라고 하는 것은 이 병의 흔적으로 皮膚에 생긴 헌데로 인해 생긴 것이다. 결국 痘瘡이란 皮膚가 헐고 콩모양의 구슬이 돋는 疾病을 의미한다. 그런데 조선 초기 까지는 痘瘡이란 용어보다는 창진이란 용어가 더 널리 쓰였는데 이는 痘瘡뿐 아니라 麻疹등의 여러가지 皮膚질환을 의미하는 보다 광의의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 痘瘡이 최초로 流行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 疾病이 流行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국내에 들어온후 일본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병이 어느 정도 위력이 강했는가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태종에서 광해군 사이에 무려 50여조가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주요내용은 왕자나 공주 등이 이 병에 걸려 죽거나 겨우 살았다는 기사가 주류이다. 또한 이 병에 걸리면 왕실에서조차 약을 쓰기보다는 금기를 지키며 痘瘡신에게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어서 세종대왕같은 분도 창진이 생기자 대궐내에 술과 고기를 금지시키고 금기를 지키는데 힘썼다.

2) 언해두창집요의 편찬

먼저 본서의 跋문을 살펴보면

“신이 살펴보건대 옛사람이 말하기를 ‘臟腑 10명을 돌보기보다 婦人 한명을 돌보기가 어렵고 婦人 10명을 돌보기 보다 小兒 한 명을 돌보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이는 대체로 小兒의 병은 맥을 살피기도 어렵고 문진도 용약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小兒의 병은 痘瘡이 가장 심한데 우리나라의 오랜 풍습에 약쓰는 것을 최고의 금기로 여겨서 癘氣가 流行하거나 毒疫이 치성하면 마을마다 경계를 굳게 닫아 소아들에게 먹일 것이 없으니 우리 동방의 백성이 번창하지 않는 까닭은 진실로 여기에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祖宗조에 瘡疹集이 세상에 간행되었으나 백성들이 옳게 여기지 않아 거의 虛文일 따름입니다. 전날에 왕자가 痘瘡에 감염되어 증세가 不順하였으나 세속의 금기에 얽매여 감히 약을 쓰지 못한 채 의관들이 수수방관하다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성상께서는 왕자가 비명에 간 것을 가슴아파하시고 약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경인년(1590) 겨울에 또 왕자가 이 병에 걸렸는데 성상께서 지난 일을 기억하시고 신에게 특명을 내려 약을 써서 救療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병의 毒熱이 심해서 험악한 症狀이 잇따라 발생하여 中外의 그 누구도 약을 써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왕자의 病勢가 점점 위급해지자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데 성상께서는 틀림없이 고칠 수 있다는 용단을 내려 빨리 조치를 취할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신이 성지를 받들어 靈丹 몇 종을 찾아서 문득 세 번을 투여하니 세번 왕자를 일어나게 했습니다. 잠깐 사이에 험악한 症狀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게 돌아와서 오래지 않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지난날 허물로 생각했던 藥이 따를 만한 것임을 실토하면서 자식을 잃은 백성들이 한탄하면서 후회했습니다. 痘瘡환자가 있는 집에서 소문을 듣고 달려와 약을 얻어가면 아이가 곧 회생하니 열번 약을 쓰니 열명이 살아나기를 신과 같이하였습니다. 그 후 왕자와 왕녀가 痘瘡에 걸렸을 때 약을 써서 모두 회복시킨 것과 여염집의 환자를 모두 고친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난 신축년(1601) 봄 어느 날 신에게 하교하시기를 ‘평시에 태산집, 창진집, 구급방이 간행되었으나 전란후에 모두 없어졌으니 너는 마땅히 의방을 가려 모아서 세책을 만들어라. 내가 직접보고자 한다. 內臟한 고금의 醫書를 내어 줄 터이니 검토하여 편찬에 자료로 써라’ 하셨다. 신이 명을 듣고 삼가 두려워하여 새벽부터 밤 늦도록 잠시도 허비하지 않고 1년여 만에 세 서적을 마치고 바쳐 올리니 또 하교하시기를 ‘최근 몇 해 동안에 두역이 종식되지 않고 있어 痘瘡집요가 가장 절실하니 너는 創藥의 이유를 책뒤에 발문으로 적어라. 내가 간행하여 널리 펴고자 하노라’하시니 신이 감히 고사하지 못하고 삼가 아래와 같이 적는다. 대개 사람이 태중에 있을 때 더러운 독[穢惡之毒]이 命門에 쌓여 화운이 司天하는 해를 만나면 內外가 서로 감응하여 疙瘡이 된다. 무릇 血氣에 속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小兒에서 노년까지 반드시 일생에 한번은 거치는 까닭에 이름하여 百歲瘡이라고 한다. 사람이 이 병을 겪지 않으면 기예도 다스리지 못하고 혼인도 불가능하고 친척들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혹 감염되면 그 부모는 오직 기도나 드리고 감히 약으로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길흉과 生死를 귀신에게 의탁한다. 삼한이래로 명군과 철보가 어느 시대인들 없으리요마는 이 오래된 폐단을 개혁할 한마디도 나오지 않음은 왜인가? 대개 天下의 일은 비색할 때가 있고 태평할 때가 있으니 때가 이르러 운이 형통하면 하늘이 장차 사람에게 손을 빌려주어 반드시 성인이 일어나 바르게 한다. 지금 성상께서는 홀로 決斷을 내리시고는 백성을 구할 결의를 다져 비로소 대궐에서 왕자부터 시범을 보여 신묘한 處方이 한 번 퍼짐에 만 백성이 모두 감화되어 온 나라의 어린 아이들이 요절을 면하고 壽域에 건져졌으니 성인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先醫가 이르기를 ‘천명을 살리면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하물며 온 나라 팔도의 백성들을 약으로 다시 소생시켰으니 어찌 이보다 더 할 수 있으리오? 마땅히 當時에 陰德을 쌓았으니 나라의 복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다만 이 책은 거칠고 졸렬하니 진실로 古人들께 부끄러울 뿐이니 신은 재주가 없으면서도 참람되이 성상의 명을 받들어 정성을 다하여 고금의 의서를 섭렵하여 정수만을 골라 엮어서 形色의 선악을 변별하고 證候의 輕重을 나누어 책을 펼쳐 상대하면 물거울과 같이 환히 드러나 환자의 집에서 이 책 하나를 얻으면 구급하는데 작으나마 도움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猪尾膏와 龍腦膏子는 백발백중의 藥餌니 기사회생하는 것이 그림자나 소리보다 빨라서 비록 司命이라도 더 신묘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선 오히려 그것이 이르지 못할까 근심하시어 신에게 명하시기를 ‘방약을 언해하여 그 오묘함을 곡진히 하고 깊은 규방의 부녀자라도 모두 얻어 증을 보고 방을 찾는데 자재하여 공을 씀이 더욱 드러나게 하라’ 하시었으니 성상께서 어린이를 살리시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도욱 도타우시니 상제의 호생하는 덕과 부계와 같이 들어맞습니다. 그 깊은 은혜와 두터운 혜택이 만세에 드리워져 다함이 없을 것이 틀림이 없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며 어찌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때는 신축년 8월 모일에 어의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신 許浚은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이 글을 씁니다. 만력36년 정월 모일 내의원개간“

위 글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본서 출간의 직접적인 동기는 전란이 끝난 후 선조임금께서 이전에 사용되던 태산요록, 창진집, 구급방 3서가 사라졌으니 시급히 이를 다시 복원하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본서의 중요성은 당시에 痘瘡이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疾病이었음에도 의사나 일반 백성들이 전통적인 인습에 얽매여 제대로 약을 써서 治療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조의 전폭적인 신뢰하에 왕실에서부터 이 구습을 타파하여 결국은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낸 데 있다.

때문에 선조는 본서를 언해시켜 규중의 부녀자라도 쉽게 알도록 하여 누구나 증을 보면 적합한 약을 찾아 쓸 수 있게끔 배려하였다. 여기서 한가지 음미할만한 대목은 許浚이 왕자의 痘瘡을 治療하기 위해 고금의 여러 방서를 두루 섭렵하여 찾아낸 명방이 바로 활인서에 나오는 猪尾膏와 龍腦飮子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얻은 활인서에 대한 믿음이 東醫寶鑑 상한문에서 활인서를 중시하는 체계나 瘟疫문의 구성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다. 즉, 이전까지 본격적인 治療의 대상이 아니었던 痘瘡을 治療하는 과정은 許浚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인데 마침 활인서에서 찾아낸 處方이 백발백중의 신묘한 효과를 발휘하여 선조의 신임을 얻는 동시에 수많은 목숨을 살려낸 공을 세우게 하였으므로 許浚이 朱肱과 활인서에 대해 갖는 견해가 남달랐을 것이다. 특히 四象醫學의 창시자 東武 李濟馬가 醫學의 역사상 가장 큰 공을 세운 의가로 張仲景, 朱肱, 許浚을 꼽게 된 사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4-5 신찬벽온방

1) 瘟疫에 관한 고찰

瘟疫이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傳染병과 관련된 용어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疫이란 말의 의미는 勞役을 치르듯이 몸이 고단한 상태를 야기하는 疾病을 의미한다. 특히 역이란 말에는 집단적으로 傳染성을 띠는 질환을 의미한다. 여기에 溫이 붙은 경우는 의사학적으로 상한과 구별하기 위해 惡寒發熱대신 惡熱이 심한 급성열병질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계절과 연관시켜 겨울이 아닌 봄에 발생하는 급성열병질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瘟疫이란 돌림병중에서 惡寒보다는 惡熱이 심한 형태의 傳染병을 의미한다. 이외에 疫癘나 厲疫이란 용어가 사용되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 여의 의미는 모질다는 의미로 병의 症狀이 격렬하고 지독하다는 의미로 역병중에서도 심한 질환을 의미한다. 한편 時機내지 時機病이란 말의 의미는 정상적인 기후변화와 반대의 불순한 기후변화에 의해 야기되는 질환을 의미하며 특히 男女노소를 불문하고 동시에 이환되는 傳染병을 의미한다. 傳染병에서 기후적 요소를 강조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染病이란 말은 주로 傳染성을 강조한 말이고 痘瘡이나 두진은 병의 症狀중 皮膚상에 돋는 發陳의 양상에 따른 분류법이다. 대체로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서에서는 구체적인 병명보다는 역내지 역병이라는 약간 모호한 형태의 용어를 선호했는데 이는 疾病의 종류보다는 疾病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중시하는 통치자나 사관의 입장에서 볼 때 병의 속성보다는 피해규모에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2) 본서의 내용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瘟疫은 당시 위정자들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였기에 대책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주로 종교적인 대책, 醫學적인 대책, 행정적인 대책 등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종교적인 대책이란 역병의 원인을 귀신이나 원귀의 소행으로 보아 그들의 억울한 혼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시행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이런 제사를 厲祭라고 한다. 반면 醫學적인 대책이란 中央에서 의원과 약을 流行지역에 보내 구료를 시행하는 방법을 의미하는데 당시로선 의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不足한데다 약재가격이 상당히 고가였기에 대개는 시늉만한데 그치고 본격적인 治療활동으로 보기엔 한계가 많았다. 여기서 醫學적인 대책 중의 하나로 실시된 것이 瘟疫을 물리치는 處方을 모은 벽온방을 간행하여 流行지역에 보급하여 疾病을 예방하고 傳染을 방지하거나 治療하고자 했다. 그러나 벽온방의 내용도 순전히 醫學적인 대책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고 대중들을 위무하는 주술적 방법들이 동시에 병행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런 맥락에서 출간된 의서들은 세종대에 출간된 辟瘟方, 중종13년(1518년)에 김안국이 편찬한 언해벽온방, 중종19년(1524년) 김순몽등이 편찬한 간이벽온방, 다음해인 중종20년에 나온 속벽온방, 중종32년(1542)에 간행된 분문온역이해방 등이 있었다.

1612년부터 1613년까지 조선 전역에 역병이 流行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1612년 9월 함경도의 6진에서 시작한 流行이 12월에 남하하여 강원도에 대유행이 있었고 잇달아 한성에도 流行하였다. 다음해 6월까지 피해가 이어져 1612년 함경도에서만 약 2900여명이 사망한 대형유행병이었다고 한다. 특히 한성에서 流行했다는 것이 중요한데 수도인 한성의 流行은 보통 때 같으면 전파방지와 소극적인 관망이 위주였던 역병대책에서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없게 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간이벽온방의 반포였는데 이것만으로는 不足하여 다시 許浚에게 새로운 벽온서를 편찬하게 명한 것이다. 본서는 새로 펴낸 벽온방이기에 신찬벽온방이라 이름 붙여졌고 급하게 출간된 관계로 언해없이 원문만 출간되었다.

3) 본서의 특징과 의의

본서는 주로 東醫寶鑑 瘟疫문을 기초로 하고 있으나 내용상 서로 다른 점이 있다. 우선 運氣론에 대한 강조가 눈에 띄는데 사실 東醫寶鑑에서는 雜病편의 모두에 천지운기문이 따로 편성되어 있으나 실제로 運氣를 이용한 임상예는 瘟疫문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러나 東醫寶鑑이 완성된지 3년 후에 씌어진 본서에서는 처음부터 火運之歲多疫癘조로 시작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五運중에 戊癸가 화에 속하는데 화에는 君火와 相火가 있다. 君火는 少陰이고 相火는 少陽人데 少陰이 司天할 때에는 天下가 疵疫하고 少陽이 司天하면 疫癘가 크게 행한다. 축미년에 少陰이 加臨하면 백성들의 瘟疫이 성행하는데 遠近이 동일하다. 화운의 해에는 형혹성이 밝게 빛나고 天下는 역려한다.[內經]“

또한 두번째 단락에서 運氣의 변화는 역병을 일으킨다[運氣之變成疫]는 조문에서는 “대개 五運六氣는 天地陰陽運行升降의 常道이다. 五運유행에는 太過와 不及의 차이가 있고 六氣의 승강에는 逆從勝復의 차이가 있다. 대개 德化政令에 합하지 못하는 자는 辨眚이 되고 모두 사람을 병들게 한다 때문에 時氣라고 부른다[三因]. O 일년 중에 病證이 같은 것은 五運六氣가 일으킨 疾病이다[綱目]. O 疫氣의 발작이 큰 경우는 天下에 流行하고 그 다음은 한 지역[一方]을 流行하고 그 다음은 한 지방[一鄕]을 流行하고 그 다음은 한 집안에 치우치는 것이 모두 運氣가 鬱滯되어 발하여 勝復이 있고 遷正退位의 所致가 된다[得效].” 뒤이어 四時失節 또한 역병이 된다는 조문에서는 東醫寶鑑에도 나오는 활인서의 문장을 인용하여 사시의 이상기후가 역병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고 뒤이은 疫雜鬼厲조에서는 入門과 의방유취의 문장을 인용하여 鬼厲之氣에 의해 역병이 생김을 말하고 있다.

결국 본서에서는 東醫寶鑑 瘟疫문에서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던 運氣에 대한 내용을 전면에 부각시켜 임자년, 계축년에 流行한 역질에 대해 許浚나름의 병인 설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즉, 그러나 크게보면 東醫寶鑑 運氣편의 내용 중에서 당시에 流行한 역병을 잡는데 필요한 내용만 추려서 본서의 앞머리에 내세우고 이후 구체적인 병인과 형증에 있어서는 寶鑑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싣고있음을 알 수 있다.

두번째 본서와 東醫寶鑑의 차이는 본서에서는 入門을 인용하여 治法에 있어 표, 리, 半表半裏로 나누어 治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도 東醫寶鑑과 근본적으로 다른 내용은 아니고 瘟疫과 연관되는 東醫寶鑑 상한부분을 끌어들여 함께 정리한 정도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신동원은 이 부분에 대해 許浚이 入門을 이용하여 병의 轉移과정을 나누어 각 단계별로 處方을 제시함으로써 병을 훨씬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신이 東醫寶鑑의 전체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양서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본서의 순서나 내용상에 있어서 東醫寶鑑 瘟疫문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東醫寶鑑 전체를 대상으로 판단해보면 오히려 東醫寶鑑을 충실히 이용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즉, 東醫寶鑑의 바탕 위에서 治法을 좀더 세분하고 處方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본서의 특징이자 의의이다. 끝으로 여기서 한가지 덧붙일 말은 중국에서는 청대에 들어와 溫病학 분야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일종의 수준 높은 傳染병학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 때문에 醫學의 체계가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을 띄게되었으나 조선에서는 여러차례의 傳染병 流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瘟疫에 대한 입장이 명대의학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주자학을 정통으로 陽明학 등 다른 사상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조선 후기의 사상사와도 연관되어있다.

1-4-6 벽력신방

1) 당독역의 流行

1613년 광해군 5년은 傳染병이 크게 流行한 시기로 1612년 부터 시작한 역여가 이 해 까지 氣勝을 부렸고 가을, 겨울에 들어서는 당독역이 氣勝을 부렸다. 조정에서는 여제를 지내고 백성을 위로하며 의서와 藥物을 보내는 등 각종 조치를 취했는데 이중 1613년 2월에 편찬한 의서가 앞서 언급한 신찬벽온방이고 12월에 새로 쓴 것이 벽력신방이었다. 이 당시 역병이 어느 정도 심했는가는 당시의 광해군 일기에 잘 나와있다.

“예조가 아뢰기를 ‘근래 사시의 운행이 차례를 잃어서 염병이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천행반진이 가을부터 크게 성해서 민간의 백성들이 많이 죽고 있는데 이는 예전엔 거의 없던 症狀입니다. 혹은 금기에 구애되고 혹은 治療할 줄 몰라 앉아서 죽는 것을 쳐다만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돌림병에 일찍 죽는 것이 진실로 측은하니 내국의 명의로 하여금 의방에 관한 책을 널리 상고하여 경험해 본 여러 處方을 한 책으로 만들어서 널리 반포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허준 등으로 하여금 속히 편찬해 내게 하고 여단에도 다시 기도하여 빌도록 하라.’ 하였다.”

2) 본서의 내용 및 특징

본서의 첫머리인 [唐毒疫]에서 許浚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독역은 신이 고금의 方書들을 두루 살펴 보았으나 당독역이란 병명이 없었고 또한 治療방법도 없었습니다. 대개 세상에 드문 혹독한 병인 것 같습니다. 금년 봄부터 여름까지 疫癘가 성행하였고 여름이후 독역이 병발하여 사람들이 많이 사망하였는데 대개 계년은 화운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병됨이 혹독하고 사나우면서도 급속하니 실로 일반적인 瘟疫과는 다른 까닭에 민간에서 고통스러워하여 이름하기를 당독역이라 하니 대개 병이 나쁜 것을 일러 당이라 하니 唐瘧, 唐瘡의 유가 이것입니다.”

이어 두번째 문단에서는 [火運之歲多熱疾]조에서는 內經의 글을 요약인용하여 “천지간에 六氣중에 무계년에는 화운이 사천하고 子午년에는 少陰군화가 司天하며 인신년에는 少陽相火가 司天하니 이런 해에는 대대 痘瘢疹 삼종류가 서로 섞여서 행하는데 대개 瘡瘍이란 화에 속하므로 모두 君火와 相火 두가지 화의 所爲이다[內經]” 라고 하여 화가 원인이 되어 독역이 流行하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번째 문단인 [毒疫則疹也] 조에서는 역시 內經을 인용하여 열독을 3가지로 분류하고 그 원인을 6기와 臟腑를 통해 구명하고 있는데 內經의 관련된 문장들을 인용하여 熱毒을 3가지로 분류하고 이중에서 가장 예후가 나쁜 것이 痘瘢疹에서 疹으로 보고 당독역을 진의 일종으로 파악한 후 6기로는 화가 문제가 되고 臟腑로는 주로 심과 폐가 문제가 됨을 밝혀내었다.

다음으로 [毒疫換刑]조에서는 독역을 앓고 난 후에 머리가 빠지거나 좁쌀모양의 진이 말라서 떨어져 나간 후에 몸의 형상이 달라지는 것이 마치 짐승이 털을 갈고 곤충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모두 화가 물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음에 [毒疫善暴死]조에서는 “내경에 이르기를 ’火鬱이 發하면 悶冒, 懊憹하고 善暴死한다.‘ 라고 하였고 또한 ’소음이 이르면 暴死하는데 화가 臟에 들어갔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장이란 심을 말한다. 만약 이와 같은 疾病을 앓으면서 飮酒와 犯房을 하는 자도 역시 잘 暴死한다.” 라고 하여 독역으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고 그 진행속도가 빠른 이유를 화가 심에 들어간 때문으로 보았고 동시에 금기를 지키지 못해 죽는 경우도 많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여기서도 內經의 문장을 인용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許浚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고 특히 뒤에 덧붙인 생활의 금기는 許浚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편 [毒疫形證]에서는 “처음 병을 앓을 때 症狀은 頭痛, 身疼, 惡寒, 壯熱, 頭面身體赤腫痒痛, 遍身 부스럼, 精神昏憒, 煩躁譫語하고 심하면 躁, 狂, 妄증을 발하고 혹은 咽喉가 腫痛 閉塞한다. 대개 이 병은 傷寒熱病의 六經傳變과는 달리 오로지 手少陰 心과 手太陰 肺와 足陽明 胃 삼경만 관계하며 특히 心火가 주관한다. 처음 3일은 表에 있고 다음 3일은 裏에 들어가는데 그 盛衰가 불과 7-8일 사이에 있는데 혹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기간이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나타난 症狀이 성홍렬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일찌기 미끼사까에부터 제기되었는데 미끼는 “비록 후대의 傳染병 역사상 거의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진실로 흥미진진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어서 동아시아 疾病의 역사상 특기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許浚이 분석한 당독역을 왜 성홍렬로 보았는가에 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동원은 케임브리지 세계질병사에 나오는 “성홍렬은 삼킬 때 고통이 엄습하며 고열과 頭痛을 수반한다. 小兒초기 症狀때는 嘔逆질을 한다. 감염 2일 내에 붉은 發陳이 생기는데 처음에는 가슴위와 등에 생기고 곧 전신으로 퍼지게 된다. 설색이 짙은 자주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언제나 皮膚박편화가 생기는데 이는 셩홍렬의 큰 특징중 하나이다. 초기에는 5일안에 늦게는 4-5이후에 발생한다. 빈혈, 중이염, 류마티스성고열, 수막염등이 나타나기도 한다.을 인용하여 성홍렬의 주요症狀이 咽喉痛, 고열, 붉은 斑疹, 皮膚박편화 등임을 들어 許浚이 분석한 당독역이 분명히 성홍렬임에 틀림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許浚의 이런 업적은 세계의학사적인 차원에서 볼 때도 대단한 업적으로 서양에서도 성홍렬을 제대로 구분한 것은 17세기 중엽이후의 일로 許浚보다 시기적으로 뒤질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홍역, 디프테리아, 성홍렬의 구분을 중시했던 서양과 달리 성홍렬에 대한 관심이 麻疹학속에 포함된 일부분으로 밖에는 취급되지 않았던 東洋적 전통에서 이토록 정확하게 성홍렬의 임상적 특징을 잡아낸 許浚의 업적은 실로 찬탄을 금할 수 밖에 없다.

 

한편 다시 원문으로 돌아와서 독역의 형증을 잡아낸 許浚의 관심은 당연히 治法에 있었는데 [毒疫治法]에서 治法의 핵심은 열을 몰아내는 것인데 전후를 나누어 전삼일은 병이 표에 있으므로 發汗시키고 후삼일은 병이 리에 있으므로 下法을 시행하였다. 또한 뒤에는 약재를 구입하기 힘든 백성들이 單方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을 언급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독역예방법, 독역침법이 나오고 약방으로는 앞서 언급되었던 十神湯, 九味羌活湯, 淸熱解毒散 등이 순서대로 適應症, 處方구성, 전탕법 및 복약법과 함께 그대로 나온다.

 

1-4-7 언해납약증치방

臘藥이란 매년 납월인 음력 12월에 내의원에서 다음해에 사용할 상비약으로 만든 약을 말하는데 본서는 납약의 效能과 용법, 금기 등에 관해 원문과 언해문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그 동안 본서의 刊記가 없어서 간행연대나 작자에 대해 미상이라고만 알려져 왔었다.단지 미끼사까에가 본서의 언해표기법이 영조시대의 것으로 보이므로 영조 무렵에 발간된 책으로 여겨져 왔을 뿐 그 작자가 누군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중국에서 입수된 <태의원선생안>의 許浚조에는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청원이며 정유년생이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양주에 묻혔다. 숭록호성공신 양평군으로 호는 구암이다. 동의보감, 두창집, 구급방, 태산집, 벽온방, 납약증치방을 편찬했다.”라고 기록되어있음이 밝혀졌다. 이와 관련하여 신동원은 본서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정확하고--출생년도가 약간 다른 것을 빼면 모두 정확하다.--또 실제 본서의 내용이 90%이상 東醫寶鑑과 일치하는 것과 언해방식이 다른의서에서 보여지는 許浚의 방식과 비슷하다는 근거를 들어 본서를 許浚의 저서로 추측하였다.필자도 신의 의견에 타당성이 있다고 사료되어 일단 잠정적으로 본서가 許浚의 저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가정하고 본 단락을 추가하였다. 설령 본서가 許浚의 저작이 아닐지라도 그 내용이 거의 모두 東醫寶鑑에서 빌려온 것으로 당시 조선에서 東醫寶鑑이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나 알아볼 수 있는 사료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본서의 내용은 총 37종의 납약(일종의 상비약인 셈이다.)으로 모두 응급상황에 사용하는 명약들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순서대로 牛黃淸心元, 九味淸心元, 蘇合元, 至寶丹, 木香保命丹, 龍腦安神丸, 牛黃凉膈元, 加減薄荷煎元, 龍腦膏, 解毒雄黃元, 瀉靑丸, 水煮木香膏, 感應元, 神保元, 九痛元, 萬病元, 溫白元, 靈寶丹, 備急元, 捉虎丹, 好合茵陣丸, 紫金丹, 玉樞丹, 鬼哭丹, 勝金丹, 脾寒丹, 安胎丸, 保安丸, 催生丹, 小兒淸心元, 稀痘兎紅元, 至聖保命丹, 抱龍丸, 牛黃抱龍丸 臘香膏, 神聖辟瘟丹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본서에는 處方이 나와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본서의 사용대상이 비교적 부유한 계층에게 국내에선 구하기 힘든 비싼 재료들을 사용하여 국가의 보증하에 고급제품을 공급한 까닭에 處方내용보다는 服藥法이나 금기가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 이미 韓醫學 서적이 널리 보급되었고 납약의 형태로 된 한약이 대량 유통된 상황을 알려 주고있다. 왜냐하면 납약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면 굳이 본서와 같은 해설집이 나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제2절. 東醫寶鑑의 성립배경

2-1.사상적 배경

1) 유교

朝鮮왕조의 개국 후 정치가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주자학은 주로 국가의 정책적인 장려 속에서 발전하였다. 주자학은 官學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朝鮮의 건국을 도왔던 학자들도 관료계층이 되어 국가정책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을 역사적으로 勳舊派  官學派, 혹은 保守派라고 지칭한다. 이들은 관료로서 가지는 국가행정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추구한 학문의 세계도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의 변화에 치중되었다. 즉 유교문화를 철저히 우리 사회 속에 복원시키기 위하여 오히려 중국보다 더 유교적 제도와 문물의 원형을 복원하려 노력하였고, 국가 주도의 대대적인 문화사업을 통하여 그것을 사회 속에 투영시키려 하였다. 그로 인하여 15세기의 朝鮮문화는 양적으로나 내용 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국가체제의 정비가 완료된 이후로 15세기의 학문적 성과는 하나의 규범과 전형으로 굳어졌고 계속 변화하는 현실로부터는 조금씩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勳舊派의 독점적인 정치도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주자학은 일반 사대부사이에 꾸준히 보급되었고 학문적 심화 일어나 길재의 학풍이 김종직을 지나면서 이른바 영남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朝鮮왕조의 기틀이 확립된 9대 성종 때에 이르러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기존의 훈구파와 양립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들을 사림파라고 부른다. 지방에서 주자학을 연구하며 道學의 실천을 주장하던 이들은 세조의 집권과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였고 그 과정에서 기득권을 유지한 훈구파에 대하여 반대하고 나섰다. 학문적으로 볼 때, 훈구파는 유학을 官學으로서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詞章學을 숭상하였으나, 사림파들은 주자학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왕도정치의 구현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간의 대립은 16세기 전반기를 중심으로 士禍라는 政變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1498년(燕山君 4)의 戊午士禍를 시작으로 하여 1504년(燕山君 10)의 甲子士禍, 그리고 1506년(中宗 元年)의 中宗反正 등으로 이어졌다. 中宗反正도 사림파들의 왕도정치의 회복이라는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 것으로서 주자학적 정치사상으로의 복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사림파들의 급성장과 함께 주자학적 정치사상은 趙光祖(1482-1519)의 등장으로 그 頂点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흐름은 1519년(中宗 14)의 己卯士禍를 계기로 반전되어 사림파 세력에 일대 타격이 가해짐에 이르렀다. 己卯士禍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사림파들은 죽임을 당하고 그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낙향하여 다시 주자학의 연구에 힘을 기울이며 후일을 기약하게 된다. 주자학에 있어서 그들의 연구는 주로 宇宙論과 人性論에 집중되었는데 초기에는 曺漢輔와 孫叔暾과의 無極太極 論爭이 있었지만 그것은 순수한 이론의 논쟁에 지나지 않았고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의 理氣 論爭은 士林派를 嶺南學派와 畿湖學派의 양대 산맥으로 나누어 놓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두 세력의 정치적 관점에 차이를 만들기도 하였다. 理氣論爭의 초점은 인간이 포함된 이 우주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主理論을 주장한 학자들은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현실세계도 결국은 이치의 반영이며 이치가 氣의 세계를 통솔하여 움직인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主氣論者들은 理와 氣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종속적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氣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심성도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主理論과 主氣論의 선구자는 각각 李彦迪과 徐敬德이었는데 이언적의 主理論을 계승 발전시킨 李滉을 중심으로 嶺南學派가 형성되었고, 서경덕의 氣一元論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李耳의 主氣論을 중심으로 畿湖學派가 형성되어 서로 대립하였다. 이 두 학파의 대립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16세기말부터 임란이후 朝鮮말기까지 政爭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2) 불교

고려 말기부터 일기 시작한 성리학자들의 불교비판은 鄭道傳의 斥佛論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왕조의 계속적인 抑佛政策의 추진은 불교의 사회경제적인 토대가 박탈당하는 상태에 이르게 하였다. 특히 成宗代 이후 士林의 대두와 함께 불교에 대한 억압은 보다 철저해져서 불교 교단은 山間叢林으로 축소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轉落해 버렸다.

3) 도교

朝鮮時代에 들어와 도교사상은 전반적으로 유교의 國敎化에 의하여 침체되었으나 현실 속에서는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朝鮮초기 도교는 불교에 비하여 볼 때 큰 탄압을 받지는 않았는데 地理圖讖思想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祈福道敎가 어느 정도 朝鮮왕조의 건국에 부합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地理圖讖思想은 朝鮮개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거나 서울 遷都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입장에서 필요하였다. 圖讖思想은 삼국時代부터 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점을 이용하여 朝鮮건국의 명분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국가체제가 정비된 이후에도 도참사상은 정치적으로 소외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상제에 제사를 지내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을 科儀道敎라 하는데 朝鮮개국 초부터 昭格殿을 설치하여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개인적으로 도교의 祈祝法에 대하여 관심이 많기도 하였지만 그 동안 민간에서 행해지던 天祭를 국가에서 통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물론 儒臣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으나 15세기 왕권이 강화된 속에서 昭格殿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중종 때 조광조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폐지되고 말았다.

16세기 이후 소격전의 폐지로 도교는 외형적으로 위축되었지만 수련도교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발전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우리 나라 도교의 맥은 상고時代 檀君에서 시작하여 고유의 神道·仙道思想과 신라의 崔承祐 金可紀 慈惠 등으로 이어졌고 統一新羅 末期의 崔致遠을 거쳐 朝鮮前期의 金時習까지 내려왔다. 修鍊道敎를 丹學이라 하는데 還返之學, 혹은 不老長生之術이라고도 한다. 朝鮮時代 丹學의 특징은 단련에 대한 이론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여러 파를 형성하여 그 방법을 전수하였다는 점이다. 朝鮮時代 道脈을 형성한 사람은 趙云仡 金時習으로 시작하여 洪裕孫 鄭希良 尹君平 徐敬德 郭致虛 僧大珠 鄭? 鄭碏 등과 朴枝華 韓無畏 密陽孀婦朴氏 張世美 姜貴千 張道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직접 수련에 전념하기도 하였고 ?周易參同契註解? ?丹歌要訣? ?龍虎秘訣? 등의 道書를 註釋·硏究하기도 하면서 이론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 圖讖秘記를 만들어 자신들의 세계관을 전파하기도 하였으며 의학의 연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도교가 惑世誣民한다는 이유로 배격하였지만 主氣派를 중심으로 한 일부의 유학자들은 순수한 학문연구의 목적으로 도교사상을 연구하였다. 특히 16세기 사상계가 주자학 중심으로 경직되면서 현실에서 벗어난 면이 나타나자 그것에 대한 반향으로 도교를 연구하는 유학자가 늘어났다. 이들은 도교 자체의 관점과는 달리 유학자의 입장에 서서 도교를 바라보고 연구하였으며 李耳의 ‘醇言’등이 여기에 속한다.

결국 朝鮮 전기의 도교는 외형적으로는 科儀道敎의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16세기 이후 사회의 혼란 속에서 다시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발전되었다.

 

2-2. 醫學內的 상황

2-2-1.中國醫學의 상황

한의학 이론의 기본 골격은 이미 2천여 년 전 秦·漢 時代에 ?黃帝內經?이 만들어진 때부터 확립되었다.

?黃帝內經?은 陰陽五行과 天人相應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정상적인 생리를 臟腑 經絡 氣血 등 신체의 내부 구성요소들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각종 질병의 양태를 臟腑와 經絡에 따라 분류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治療 면에 있어서도 養生을 중요시하는 등 韓醫學 理論의 각 방면을 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黃帝內經?은 실제로 질병을 치료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거의 없고 주로 원리적인 면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약물의 운용과 처방의 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제시는 後漢代에 만들어진 張仲景의 ?傷寒論?에서 본격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傷寒論?은 著者 張仲景의 임상경험과 ?內經?의 陰陽五行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六經辨證體系를 확립하고, 그것으로 질병의 성질을 규정하여 치료의 방향을 정하였다. 그리고 각 조문마다 치료원칙에 합당한 처방을 附加하여 이론과 임상을 효과적으로 연결시켰다. 즉 韓醫學의 辨證施治 체계가 ?傷寒論?에서 확립된 것이다. 그러나 ?傷寒論? 이후로 唐·宋代까지의 오랜 기간동안 韓醫學의 理論方面의 발전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魏·晋·南·北朝 時代의 혼란기 속에서 의료의 필요성은 더욱 증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張仲景이 제시한 六經體系의 원리가 일반 臨床家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 제대로 응용되지 못하였다. 病理를 깊이 탐구하여 정확한 이론의 바탕 위에서 치료의 정밀성을 높이기보다는 對證處方 위주로 수많은 처방들을 모아놓는데 불과하였다. 따라서 唐·宋代 醫學은 주로 그 이전까지의 임상경험 처방들을 수집하고 종합하여 다시 분류하는 쪽으로 발전하였고, 鍼灸 本草 婦人 小兒 ?傷寒論? 연구 등 일부 분야에서 성과가 있었다.

 

金·元 時代에 이르러 한의학은 이전과 다른 면으로 발전되었다. 이 시기 의학의 특징은 임상가들을 중심으로 이론과 임상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설명하려한 것인데, 그들은 대부분 많은 임상경험을 쌓은 名醫들이었다. 그들은 宋代에 간행된 여러 방서들을 통하여 이전까지 기록된 많은 처방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오랜 임상을 통하여 검증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처방들을 응용하는 과정에서 각 약물의 性味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쌓을 수 있었다. 加減을 통하여 약물의 임상적 효능을 다시 인식하는데서 이론정립의 출발점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張元素의 歸經學說로부터 시작하여 이른바 金·元 四大家의 各派가 전개되었고 그들 대부분이 약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四大家들은 ?內經?과 ?傷寒論? 이후 오랜 기간 임상가들에게 소외되어 있던 臟腑生理를 다시 발전시켰다. 藏象에 대한 이론은 宋代의 錢乙이 小兒의 臟腑生理를 연구하면서 다시 싹트기 시작하였는데, 金·元 四大家들의 연구로 더욱 발전되었다. 金·元 時代와 비교해볼 때 이전까지의 의학은 發病의 原因을 外部環境 속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는데, 風·寒·暑·濕·燥·火 등의 六淫이 강조되었으며 運氣學이 발달하였고 內部臟腑의 虛實로 因한 病理論은 크게 발전되지 않았다. 張元素는 각 약물의 성질을 五臟六腑와 연결시킨 歸經學說을 제시하였고, 劉完素는 ?內經?의 十九病機를 연구하여 火와 熱이 모든 병의 원인임을 강조하였으나 그것은 五臟六腑·氣血 등의 內部生理와의 관계 속에서 나온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은 張從正도 外部邪氣의 逐出을 위주로 한 汗·吐·下 三法을 주로 응용하였지만 단순히 外邪의 성질에 따라 처방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 들어온 邪氣와 그것에 대응하는 正氣의 상황에 따라 治法을 달리한 것이다. 후에 李東垣은 臟腑論을 총괄하여 後天의 氣를 만들어내는 土臟, 즉 脾胃의 中氣를 補하는 補土理論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金·元 四大家의 마지막인 朱震亨은 이전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여 인간내부의 가장 근본적인 先天의 精氣를 補해야 하며 陰精의 虧損으로 인한 相火의 妄動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金·元 時代 의사들의 또 한가지 특징은 그 동안 등한시되어 왔던 ?內經?을 다시 연구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臟腑論을 비롯하여 診斷 本草의 性味와 處方의 運用 治療原則 등의 모든 방면에서 ?內經?을 바탕으로 하여 설명하였고 반대로 그들의 입장에 의하여 ?內經?의 章句가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內經?에 대한 연구가 金·元代에 와서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金·元醫學의 성립으로 인하여 生理 病理 本草 方劑 診斷 豫防 등의 각 방면의 이론이 체계화되고 계통화 되었으며 明이후의 綜合醫書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2-2-2. 국내의학의 상황

高麗時代부터 시작된 鄕藥과 처방중심의 연구는 朝鮮初期에도 계속되어 世宗 때에 만들어진 ?鄕藥集成方?에 와서 집대성된다. 그러나 ?鄕藥集成方?이 만들어질 당시에 이미 상당한 양의 金·元醫學의 서적이 들어와 있었고 불과 12년 후에 완성된 ?醫方類聚?의 인용서에는 ?鄕藥集成方?보다 더욱 많은 金·元·明의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世宗 당시에 중국 金·元醫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明代의 서적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데 ?醫學正傳? ?萬病回春? ?醫學入門? 등이 특히 流行하였고 이중?醫學正傳?과 ?醫學入門?은 우리 나라의 醫科試驗 및 醫學取才의 講書로서 국가의 法典에 明示되었으며 중앙 및 지방을 통하여 수 차례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후 16세기말 ?東醫寶鑑? 직전에 만들어진 楊禮壽의 ?醫林撮要?는 金·元醫學의 체계를 우리 나라에 정착시키려는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이 ?東醫寶鑑?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면 이하에서는 조선 3대 의서인 鄕藥集成方과 醫方類聚 및 東醫寶鑑의 저술에 큰 영향을 끼친 醫林撮要에 대해 좀더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1) 향약집성방

가. 향약집성방의 편찬과정

1431년(세종 13)에 권채(權採) ․유효통(兪孝通) ․노중례(盧重禮) ․박윤덕(朴允德) 등이 재래의 여러 의서를 참고하여 편찬, 1433년에 완성하여 간행한 것으로 1488년(성종 19)에 부분적으로 된 한글 번역본이 간행되었고 다시 1633년(인조 11)에 중간(重刊)되었다. 수록 내용은 병증(病症) 959종 ․약방문(藥方文) 1만 706종 ․침구법(鍼灸法) 1,416종 ․향약본초(鄕藥本草) ․포제법 등으로 되어 있다.

나. 향약집성방의 체제

모든 질병을 57대강문(大綱門)으로 분류하고 다시 그것을 959조의 소목(小目)으로 나누어 각 강문과 조목에 해당되는 疾病의 론(論)과 방(方)을 출전(出典)과 함께 일일이 논거(論擧)하고 있다. 주로 인용한 중국서적은 太平聖惠方, 直指方, 聖濟總錄, 醫方集成, 婦人良方 등이고 그 밖에 책머리에는 자생경(資生經)에서 가려 뽑은 침구목록을, 책 끝에는 향약본초의 총론(總論)과 각론(各論)을 각각 첨부하고 있는데, 특히 총론 중에는 제품약석포제법이 실려 있다. 이 책은 高麗이래 향약을 사용하려는 전통을 계승하여 麗末鮮初의 향약을 활용한 處方과 향약에 대한 경험적 지식의 축적및 이론화 과정의 총 결과물이다.

서명

편간시기

편저자

濟衆立效方

고려 의종대(1147-70)

金永錫

御醫撮要方

고려 고종 13년(1226)

崔宗準

鄕藥古方

고려말?

?

鄕藥救急方

고려고종20-32년(1243-45)

?

鄕藥惠民經驗方

공민왕 20년(1371)

惠民局

三和子鄕藥方

고려말기

三和子

鄕藥簡易方

고려말기

權仲和, 徐贊

東人經驗方

고려말 조선초

?

本朝經驗方

조선초

?

표1. <향약집성방>에 인용된 고려, 조선본 의서들

 

이와 같이 본서는 전래의 향약의 전통을 집대성하였고 여기에 중국 의서 들을 안배하여 결합한 후 針灸法까지 삽입하여 실용성이 뛰어난 일대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76-85권까지는 本草부로서 <證類本草>의 배열을 따라 동물, 식물,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에서 産生되는 630여종의 本草를 두루 고찰하여 鄕名을 쓰고 味, 性, 效能과 각종 本草書의 설을 싣고 채집시기를 附하였다. 즉, 본서는 處方에선 太平聖惠方을 기본으로 하고 本草에선 經史證類備急本草를 모범으로 한 위에 麗末鮮初 이래의 향약연구를 집대성하고 민간에 활용되던 單方등의 경험방 전통까지도 흡수하여 당시까지의 處方및 本草에 관한 지식을 총 정리한 대작이다. 한편 본서의 편제를 살펴보면 處方편과 本草편으로 나눌수있고 處方편은 47개 대문하에 959문의 세부병증으로 나누어져있는데 각 病證별로 간단한 이론과 處方이 나열식으로 편제되어 있고 마지막에는 針灸법을 소개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본서의 체계가 이렇게 다소 엉성하고 산만하게 된 이유는 애시당초 본서의 편제가 《향약제생집성방》을 母胎로 하여 증보 확충 및 고정에 주력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후에도 본서는 성종 조에 이르기까지 醫學取材講書로도 이용되었으나 이후 중국의학과의 활발한 교류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衰退하게된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明이 망하고 淸과의 교류가 뜸했던 仁祖시대에 이르러 다시 부흥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東醫寶鑑 성립 이후에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대신 東醫寶鑑에 영향을 끼쳐 東醫寶鑑 各門의 單方이나 湯液편에 상당부분 흡수되어 녹아 들어가 있다. 이 책은 조선 1478년(성종 9)에 重刊되었고, 1488년(성종 19)에 ?鄕藥本草?를 諺解하여 간행되었으며, 1633년(인조 11)에 훈련도감에서 小活字로 重刊되었는데 이 때 ?補遺?(?神仙方?) 1권이 더하여졌다. ?鄕藥集成方?은 모든 질병을 총망라하고 관련된 국내외 모든 醫書들을 참조하여 모든 질병을 우리 체질에 맞는 우리 약재로 치료함으로써 중국약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또 치료효과도 높이는 一擧兩得의 효과를 거두고자 편찬된 의서였다. 고려의 ?鄕藥救急方?이 자주의학을 이룩하는데 그 기틀이 되었다면, ?鄕藥集成方?은 우리의학이 한층 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의학으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의 편집과 간행은 우리 나라 고유의학의 자주적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획기적인 대사업의 하나였으며, 우리 나라 醫學史上 매우 중시하여야 할 서적이다.

2) 醫方類聚

가. 의방유취의 편찬과정

의방유취는 세종 때(1445년) 1차 완성된 후 성종 조에 간행된 현존하는 최대의 韓醫方書이다. 원래는 365권에 이르는 거질이었지만 세조 때 재편과정에서 100여권이 줄어 총266권이 성종 조에 출간되었다. 이 책에 인용된 의서는 당, 송, 원, 명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및 고려와 조선의 醫學이 총 집대성된 의서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책이 워낙 거대하다보니 성종 때에도 30여 질 밖에는 인출되지 않아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고 그나마 임란 등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정조이후에는 국내에선 거의 인용되지 않고 있다. 단지 임란 때 일본이 약탈해간 1질이 남아 전해지고 있을 뿐인데 나중에 이를 복간한 취진판이 발행되었고 이후 1965년 영인작업이 이루어 졌고 80년대 중국에서 교점본이 나왔고 북한에서는 번역본이 나왔다. 편찬 과정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2. 의방유취 편찬과정 개요

기 간

주요편찬인물

경 과

비 고

세종

1443

金禮蒙, 柳誠源, 閔普和등

世宗命撰 ‘裒集諸方, 分門類聚’

1차 초고본

 

--

金汶, 辛碩祖, 李芮, 金守溫(文官) 全循義 崔閏, 金有智(醫官)

편집

 

 

1445

安平大君 瑢, 李思, 李師純, 盧重禮(監修)

365권 완성, 世宗賜名

 

문종

1445-1451

집현전, 승문원, 내의원(서사)

문종 散官職 除授

취소

 

세조

1459

梁誠之에게 교정을 명함

5년 11월-9년 9월: 1차교정기

2차 교정본

 

-

孫昭, 柳瑤, 韓致良,安克祥등 파직

9년 10월-10년 1월: 세조의 검토와 교정자 교체

 

 

-

繼美, 崔永潾등 교정완료 포상

10년 1월-10년 9월: 2차교정기.세조의 재신임

 

 

1464

醫書習讀官

12년 10월- : 제서유취

 

성종

1475-

繼禧, 任元濬, 權攢, 柳湑

(감수관) 白受禧(전교서 별제)

30질(266권 264책)을 을해활자로 발간

3차 초간본

 

나. 의방유취의 체제

의방유취의 체제는 전체적으로 91문으로 나뉘어져있고 각 문은 또 理論, 方藥, 食治, 禁忌, 針灸, 導引등의 내용순서로 수록되었다. 여기서 食治이하 4가지를 治療란 측면에서 방약에 포함시키면 대체로 이론과 방약의 비율이 2:8정도 된다. 특히 본서의 醫學사상과 방약이론이 집중되어있는 총론부 3권은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부분인데 총론의 체계는 제 1권 冒頭에 배치된 千金方의 인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千金方의 인용내용을 살펴보면 論大醫習業-論大醫精誠-論治病略例-論診候-論處方-論用藥-論合和-論服餌-論藥藏등 9편의 주제로 되어 있는데 이를 다시 나누면 大醫精誠까지가 立論에 해당하고 診候까지가 治法에 해당하며 合和까지가 處方에 해당하고 이후 3편은 用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의방유취 총론부는 立論-治法-處方-用藥이라는 4단계의 起承轉結식의 구조로 파악할 수 있다. 이어 뒤이은 인용서에서 유사한 주제가 부연 확충되어 반복되는데 聖惠方에서 敍爲醫, 三因方의 太醫習業으로 비슷한 논조의 글이 거듭되다가 권2.3에서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있어 마치 學說史를 읽듯이 이중복합적인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역대 의방서의 내용을 빠짐없이 수록하고 방대한 분량의 대형 方書를 다수의 인원이 분담하여 처리하기에는 최적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앞부분의 원론부분에선 處方이나 세세한 논설들은 모두 생략하고 기본원칙만을 제시하고있다는 점인데 이는 편찬자의 의도가 반복을 하되 만약 더 나은 부분이 뒤에 나오는 경우에는 앞의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立論에 있어서는 先代의 論說을 중시하여 먼저 제시하고 제가의 臨證例나 세부 藥物 등의 詳論에 있어서는 비교적 최신의 활용 예와 신지식을 위주로 편제되어 있어 경전을 존중하면서도 실용성을 잃지 않기위해 배려하고 있다. 또한 引用諸書에서는 분명히 內經등의 醫經類가 언급이 되고있으나 실제 본문에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즉, 黃帝內經素問-靈樞-運氣7편-明堂灸經-鍼經-鍼灸經-難經-難經本義-傷寒論-王叔和 脈訣 -王氏脈經등은 직접인용이 안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원래 세종 조에 들어 있었으나 후대에 편집과정에서 삭제되었거나 아니면 인용서목이 단순한 인용서적의 나열이 아니라 의서 수록의 원칙을 드러낸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 조의 365권이 성종 조에는 266권이 발간된 것으로 볼 적에 세종대의 편집본에 있었던 것이 나중에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본서의 중요성은 편찬과정에서 대량의 방대한 醫學자료와 先進의학서가 소요되었으며 구급과 傳染性질환에 대한 시급한 實用醫書가 속속 편찬되었다는 것인데 조선의학은 의방유취와 같은 거대의서의 편찬 및 교정, 간행과정을 거듭하면서 방대한 정보를 비축하여 이후 醫學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때 발간된 의서 들에는 <救急方> <瘡疹集> <救急簡易方> <續辟瘟方>등이 있다. 또한 본서에는 지금은 찾기 힘든 當代의 진귀한 판본들을 대량으로 보존하고 있는데 한가지 종류의 의서를 기록할 때에도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판본을 취사선택하여 정확하고 신중하게 채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중국에서는 본서를 주로 여러 의서들의 校勘에 이용하고 있다.

다. 의방유취와 東醫寶鑑

표3. 의방류취 조선판본과 이차의서 출판

 

판본/이차의서

편찬/간행시기

편찬인물

편제

서지사항

전거

1.세종초고본 의방유취

1443-1445

김예몽등

365권

초고본

세종실록 권110

救急方

세종연간

?

?

목판 1책

규장각 소장

瘡疹集

세종연간

?

?

창진방

실전, 暑門만 존재

辟瘟方

세종연간

?

?

?

실전, 중종실록

2.세조교정본

세조5년-10년(1459-1464)

양성지 등

266권 264책

교정본

실전, 세조실록

瘡疹集

세조3년

임원준 등

3권

부:본조경험

최근 발견

醫藥論

세조9년

세조

?

?

세조실록

救急方(언해)

세조연간

?

상하2권 2책

을해자 혼용. 목판본

일본 소재

3차 성종초간본

1474-1476

한계희 등

266권 264책

을해자

일본 소재

救急簡易方

성종 20년

윤호, 임원준 등

8권 127문

9권 9책

신찬구급간이방, 구급간이방언해

잔존

救急易解方

연산군 4년(1498)

윤필상 등

1권 1책

연산군 사명

현존

續辟瘟方

중종 20년(1525)

?

1책?

간이벽온방?

실전, 중종실록

醫門精要

연산군 10년(1504)

권건, 김심등

50권 87문?

허종 서문

이락정집 권 8

 

3) 醫林撮要

주지하다시피 東醫寶鑑의 편찬은 許浚 개인의 노력만 들어간 것은 아니다. ?동의보감?의 완성에 관하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광해군 2년, 서기 1610년 8월 6일 기록).

“?東醫寶鑑?이 成하다. 先朝(宣祖) 丙申에 太醫 陽平君 許浚에게 醫方의 撰集을 命하므로 浚이 儒醫 鄭碏 太醫 楊禮壽 金應鐸 李命源 鄭禮男 等과 局을 設하고 撰集하여 거의 成就될 때에 丁酉亂을 만나 諸醫가 四散하여 일이 中止되다. 뒤에 宣祖가 또 浚에게 命하여 혼자 撰케 하고, 內藏方書 500卷을 出하여 그 考據에 資케 하다. 浚이 精勵하여 竄移의 사이에도 그 功을 不廢하고 이제 그 業을 마치니 凡 25卷이라. 諸方을 彙粹하여 類를 分하여 秩을 成하다. 書名은 ?東醫寶鑑?이라 하다. 內醫院에 命하여 印出廣布케 하고, 熟馬 1匹을 面給케 하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東醫寶鑑의 편찬과정에 등장하는 중요인물 중의 하나가 楊禮壽이고 양예수의 저작인 의림촬요가 東醫寶鑑 인용서목에 국내 개인 저작으로는 유일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東醫寶鑑의 저술과정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한데 그 동안 상대적으로 양예수에 대한 연구가 부진하였다. 우선 양예수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김두종의 한국의학사에는 “명종 및 선조시의 내의. 자는 敬甫 호는 退思翁. 명종 18년에 내의원 주부, 同 19년 12월에 禮賓寺 判官에 승차하여 東班에 敍하였다. 官이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명종 20년 10월에 通政의 資를 가하고 동 22년 6월에 명종 승하시의 의원. 선조 19년 10월에 어의로서 嘉義의 자를 가하였다. 그 당시의 名醫로서 中樞府事를 受하였으며 선조 29년에 왕명을 받들어 許浚이 東醫寶鑑을 편집 할 때에 太醫로서 참가하였다. 선조 32년 7월에 중전께서 수안, 해주에 머물 때 호종의관으로 중전을 호위하였다...중략...의술로서 일세를 울렸고 의림촬요 13권이 세상에 전해진다.”

 

한편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박찬국은 조선에 金元四大家 醫學을 본격적으로 흡수하여 內經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킨 데에 본서의 의의가 있으며 이를 토대로 하여 東醫寶鑑이 韓醫學의 새로운 醫源으로서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楊禮壽는 본서에서 醫學正傳과 世醫得效方에서 주로 인용하였는데 得效方은 古方을 위주로 정리한 책이고 正傳은 丹溪의 이론을 중심으로 金元四大家의학을 충실히 전하고 있는 의서라고 보아 당대 최신의 중국의학을 국내에 도입하였다고 한다. 반면 안상우는 의림촬요가 金元四大家의 영향을 별로 받고 있지 않다고 보고 대신 본서가 당시 중국의 새로운 지식을 도입하는데 기여하였다고 본다. 즉 方廣의 <丹溪心法附餘>, 곽감의 <醫方集略>, 손응규의 <醫家必用方>, 王綸의 <明醫雜著>, 李梴의 <醫學入門>, 龔信의 <古今醫鑑>, 龔廷賢의 <萬病回春>등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였고 덧붙여 고려시대 부터 내려오던 향약방에 대한 이용과 <醫方類聚>나 <鄕藥集成方>등의 이용과 急疾에 쓸 수 있는 <救急方>이나 <瘡疹集>, <簡易辟瘟方>등을 이용해 본서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양예수는 許浚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였을 것이고 특히 東醫寶鑑의 초기 편찬과정에서 책의 체제를 잡는데 큰 기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본서는 우리 나라 최초로 시도된 종합 의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제3절 ?東醫寶鑑?의 出現과 韓醫學의 成立

3-1 동의보감의 편찬과정과 명칭 및 편찬배경에 관한 고찰

3-1-1. 동의보감의 편찬과정

본서의 편찬과정은 크게 보아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첫째 단계(1596-1597) : 기획 및 긍계를 세우는 단계

東醫寶鑑 서문을 보면

“우리 선종대왕(宣宗大王)께서는 몸을 다스리는 방법[理身之法]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시려는 어진 마음에서 의학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근심하시었다. 일찌기 병신년(1596년)에는 태의(太醫)로 있던 허준(許浚)을 불러 다음과 같이 하교하셨다.

?요즘 중국의 의서들을 보니 모두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로 볼만한 것이 없도다. 여러 가지 의서들을 모아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修養)법을 먼저 쓰고 약석(藥石)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방서들이 번잡(煩雜)하므로 되도록 그 요점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향약(鄕藥)이 많이 나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鄕名]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준(許浚)이 물러나와 유의(儒醫) 정작(鄭碏)과 태의(太醫) 양례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례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집국(編輯局)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대략적인 체계[肯肇]를 세웠을 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만나 의사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편찬이 중단되었다.”라고 하여 선조 29년 병신년인 1596년에 본서의 편찬이 시작되어 이듬해인 정유년 왜란을 당하여 일이 중단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기가 본서 출판의 제 1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 할 것은 도교 養生술에 정통한 유의 정작과 태의 양예수가 이 시기에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내용을 검증하긴 힘들지만 이 시기에 어느 정도 본서의 체계가 잡힌 상황에서 이후 許浚이 구체적인 내용들을 채워 넣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2) 선조 생존시 許浚 단독 작업단계(1597-1608)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서 편찬작업의 1단계는 정유재란과 함께 끝이 나고 이후 한동안 전란으로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팀원들이 뿔뿔히 흩어져 편찬 작업은 지지부진해졌고 결국 선조의 용단에 의해 許浚이 단독으로 본서의 편찬을 진행하는 과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문에서는

“그 후 선종대왕께서 또 허준에게 혼자서 편찬하라고 하교하시고는 내장고(內藏庫)에서 의서 500여 권을 내주시면서 참고하도록 하셨다. 이 책의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되어 선종대왕께서 승하하셨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왜 선조가 許浚에게 단독으로 작업을 하도록 독려하였는가 하는 사실인데 허정은 상게논문에서 유의 정작이 사망하고 양예수가 너무 老衰하여 실질적인 작업이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3) 귀양살이 중 東醫寶鑑의 완성단계(1608-1610)

1608년 3월 선조 임금이 오랜 병환 끝에 붕어하신 후 許浚은 수의로서 그 책임을 추궁 당해 1608-1610년 11월까지 근 2년 반 정도를 귀양생활을 하게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이전에 절반도 이루지 못했던 본서의 편찬작업이 許浚에 의해 드디어 마무리가 되는 丹溪이다. 이를 서문에서 살펴보면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경술년(庚戌年, 1610년)에 비로소 허준이 일을 끝내고 책을 진상하니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 하여 모두 25권이었다.

성상께서 보시고 가상히 여겨 하교하시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은 일찍이 선왕께 의학책을 편찬하라는 특명을 받고 여러해 동안 깊이 연구하였다. 심지어는 옥중과 유배살이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일을 포기하지 않고 이제 마침내 책을 완성하여 올렸다. 생각하면 선왕께서 편찬할 것을 명하신 책이 어리석은 과인이 즉위한 후에야 완성되었으니 비감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라고 하시면서 허준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주시면서 노고를 치하하셨다.”

 

4) 東醫寶鑑의 출간단계(1610-1613)

서문에는 광해군이 급히 내의원에 명령하여 출판청을 설치하고 국내외에 널리 반포하라고 하였으나 당시는 전란직후라 여러가지 상황이 어려워서 내의원의 사정이 어렵자 일단 하삼도로 내려보내 출간케 하였으나 이 또한 책의 양이 방대하고 기술적인 문제점이 많아 작업진행이 더디게 된다. 결국 재료는 하삼도에서 준비하되 출간은 다시 내의원에서 맡아 훈련도감 활자로 1613년 성서 3년만에야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3-1-2. 東醫寶鑑의 명칭에 관한 고찰

1) 東醫라는 명칭에 관하여

이와 관련해서는 동의寶鑑 집례에 근거가 있는데

“왕절제(王節齊)가 말하기를 ?동원 이고(李杲)는 북방의자(北方醫者)인데 나겸보(羅謙甫)가 그 법을 전함으로써 강절(江浙)지방에 알려졌고, 단계 주진형(朱震亨)은 남의(南醫)인데 유종후(劉宗厚)가 그를 배움으로써 섬서(陝西)지방에서 이름났다?고 하였은즉 의(醫)에는 남북으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동방에 치우쳐 있고, 의약(醫藥)의 도(道)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왔으므로 우리나라의 의학은 가히 동의(東醫)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한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위에 인용된 왕절제의 원래 의도는 이와는 약간 다른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확인해보면

“혹이 물어 (節齊에게) 가로되 지금 사람들의 말에 東垣의 법은 마땅히 북에서 사용해야 하고 丹溪의 법은 남쪽에서 행해질만 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답하기를 東垣은 북의인데 나겸보가 그 법을 전하여 江浙지방에 알려졌고 丹溪는 남의인데 劉宗厚가 그 학문을 배워 섬서지방에서 이름이 났을 뿐이다. 만약 사람들의 말과 같이 본다면 本草와 內經도 모두 神農, 黃帝, 岐伯의 설로 北方에서 베풀어져야만 할 것이 아닌가? 5방에 따라 疾病 발생의 차이가 있고 治法도 다름이 있음은 內經 이법방의론이나 五常政大論에 이미 상세히 나와 있다...중략...그러나 한을 열로 治療하고 열을 한으로 治療하는 (의학의 이치)는 5방이 모두 같으니 어찌 남과 북의 차이가 있겠는가?...중략...단계가 나와 內經의 뜻을 천발하고 국방의 치우침을 변별하였으며 濕熱상화의 병을 논하여 전인이 미처 밝히지 못한 내용을 밝혔는데 후세인들이 이를 모르고 단지 黃芩, 黃連, 梔子, 黃柏 등 苦寒한 약을 사용하는 것만 보고는 남쪽에서 행해질 만 하다고 하는 것은 그 앎이 얕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원래 節制의 의도는 醫學에 남과 북을 나누어 얘기하는 세인들의 관점이 틀린 것임을 역설한 부분이다. 그러나 하여튼 당시에 이미 남의와 북의에 관한 말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許浚은 이를 근거로 동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또한 위 문장에서 보듯이 東垣은 북의이지만 그 법이 널리 퍼져 나중에는 남쪽까지 퍼졌고 丹溪는 남의지만 역시 설이 널리 퍼져 북쪽게까지 널리 퍼져 보편성을 획득했으므로 조선의 醫學인 동의도 이제 東垣이나 丹溪에 못지 않게 널리 퍼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의 산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동의라는 말은 사용된 적이 없고 대신 우리 의학을 지칭하는 용어는 주로 향약이었다. 그런데 향약이라는 말에는 주로 醫學이론보다는 약재에 관한 관심이 위주였다. 즉, 당약에 대응한 우리 나라의 약재를 향약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향약 고유의 이론과 效能에 관한 체계적인 이론은 제시되지 못했다. 한편 지금은 실전된 고려 때 의서인 <東人經驗方>이라는 저서가 있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동인은 중국사람이 아닌 우리 나라 사람의 경험을 집대성했다는 의미가 강하여 우리 나라 고유의 醫學체계라고 보기엔 곤란한 점이 있다.

또한 지금 쓰이고 있는 韓醫라는 용어는 대한제국 당시에 일시적으로 쓰여진 적이 있으나 조선 전기에는 없던 용어였고 얼마 전까지 쓰여온 漢醫라는 표현은 주로 일제가 중국의학을 지칭할 때 쓰던 용어로 우리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용어이다. 결국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許浚은 우리의학에 대한 자부심을 동의라는 용어 속에 담아 표출해려는 의도로 본서의 이름에 동의라는 명칭을 넣었다고 볼 수 있고 본서가 출현한 이후 우리의학을 가리키는 명사로 동의라는 표현이 일반화 되었으나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韓醫라는 명칭이 잠시 사용되었고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漢醫 또는 漢方이라는 일본식 잔재가 남아있다가 1980년대 이후 韓醫로 통일되기에 이른다.

 

2) 寶鑑이라는 명칭에 관하여

먼저 보라는 말의 의미는 보배롭다는 의미이므로 그 뜻이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감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역시 집례에 설명이 있는데

“감(鑑)이라 함은 ?만물을 환히 비쳐서 그 형태를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니, 원조(元朝) 나겸보(羅謙甫) 저서에 『위생보감(衛生寶鑑)』이 있고, 명조(明朝) 공신(龔信) 저서에 『고금의감(古今醫鑑)』이 있는데, 모두 감(鑑)으로써 이름한 뜻이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이제 이 책을 펼쳐서 한번 보면 길흉(吉凶) 경중(輕重)의 환함이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이 환하므로 마침내『동의보감』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옛사람들의 유지를 본받은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즉, 나겸보와 龔信(사실은 龔廷賢이 정확하다.)의 뜻을 본받고 어떤 병이던 간에 본서만 펼치면 환히 비추게 하는 독특한 편집체계를 가진 의서라는 의미로 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본서의 편집체계을 잘 알아야 하는데 이 내용도 역시 집례에 있다.

“이제 이 책에서는 먼저 내경(內景)의 정, 기, 신과, 장부로 「내경편(內景篇)」으로 하고, 다음에 외경(外境)의 두(頭), 면(面), 수(手), 족(足), 근(筋), 맥(脈), 골(骨), 육(肉)을 가지고 「외형편(外形篇)」으로 하였습니다. 또 오운육기(五運六氣), 사상(四象), 삼법(三法), 내상(內傷), 외감(外感) 등 여러가지 병증(病證)을 따라 배열하여 「잡병편(雜病篇)」으로 하고 끝으로 탕액(湯液), 침구(鍼灸)를 붙여서 변화를 다하였읍니다. 따라서 병인(病人)으로 하여금 이 책을 펼쳐 보게 하면 허실(虛實), 경중(輕重), 길흉(吉凶), 사생(死生)의 징조가 수면에 물체가 비쳐 보이듯이 환하게 되어 잘못된 치료로 인해 요절하는 폐단을 거의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오늘날 백과사전의 상호참조기능을 연상시키는 우수한 체계를 만들었고 이를 위해 다른 의서들에 비해 목차의 기능을 대폭 보강하여 목차순서대로 찾거나, 疾病명으로 찾거나, 處方명이나 單方명으로도 필요한 부분능 찾아갈수 있게끔 상세히 구성되어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본서의 명칭을 寶鑑이라 한 것이다.

한편 서문에서 이정구는

“이 책은 고금(古今) 의서들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였고 많은 이론들을 절충하여 근본을 찾고 근원을 궁구하여 강령(綱領)을 세우고 요점을 제시하였다. 상세하면서도 간결하며 간결하면서도 빠진 것이 없다. 내경(內景)과 외형(外形) 으로부터 시작하여 잡병(雜病), 제방(諸方)으로 나누고 맥결(脈訣), 증론(症論), 약성(藥性), 치법(治法), 섭양요의(攝養要義), 침석제규(鍼石諸規)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갖추었고 조리가 정연하여 문란한 것이 없다. 따라서 환자의 증상이 비록 천백(千百)가지라 할지라도 치료에서 보사(補瀉)와 완급(緩急)이 두루 응하여 모두 적절하게 응용되도록 써놓았다. 구태여 옛날 고전(古典)이나 근래의 여러 학설을 광범히 참고하지 않아도 병목(病目)에 따라 처방을 찾으면 여러 가지 이론이 여러번 겹쳐 나오게 되어있어 증상에 따라서 약을 쓰면 부절과 같이 꼭 들어맞는다. 진실로 의가(醫家)의 보배로운 거울이며 백성들을 구원하는 좋은 법[濟世良法]이다.”

라고 하여 (1) 고금의 方書를 모두 포괄하여 요점을 제시하였고 (2) 상세하면서도 간결하고 집약되어 있으면서도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3) 脈訣, 증론, 약성, 治法, 攝養요의, 침석제규에 이르기 까지 조리가 정연하며 (4) 각 병증에 대한 고금의 處方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라고 본서의 서술체계를 설명하였다. 이는 결국 養生의 도를 말하는 의경의 정신에 충실하여 분분한 여러 의학이론과 處方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鑑의 원칙이란 넓은 의미로 볼 때는 養生의 도에 따른 醫學체계의 구성을 뜻한다.

疾病보다는 건강을 중시여기는 養生사상이 본서편찬의 기준이 됨에 따라 기존 의설과 이론을 과감하게 正理해 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東醫寶鑑의 養生사상이 단순히 피상적으로 養生과 醫學이론을 병렬식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心火된 철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생명과 몸에 대한 일관된 체계를 세울 수 있게되었다. 또한 여기에 덧붙여 인용문헌의 명기와 중복에 대한 상호 언급은 본서 서술의 또 다른 특징으로 임상가들에게 손쉽게 고금의방을 열람할 수있는 길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정교한 목차구성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결국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鑑의 원리란 養生사상에 따른 건강, 예방, 疾病의 治療라는 원칙, 醫學이론에 따른 病證과 處方의 제시, 인용문헌에 대한 정확한 표기, 중복부분의 확인, 정교한 목차구성 등의 편집방식에 의해 드러나는데 이를 바탕으로 서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병의 虛實과 경중, 길흉, 死生의 徵兆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되었다.

결론적으로 東醫寶鑑이란 우리의학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醫學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리라는 확신을 줌과 아울러 우리민족의 보배로운 글이며 상호참조기능을 극대화시킨 뛰어난 편집체계로 이루어 진 고금에 보기 드문 뛰어난 의서임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3-1-3. 東醫寶鑑의 편찬배경(저술동기)에 관한 고찰

1) 전란 후 향약중심으로 本草지식을 통일할 필요성 때문이라는 설

홍문화는 “전란 후유증인 백성들의 병고를 구하기 위해서는 향약의 활용으로써 疾病치료를 하는 우리의 의방서가 필요함에 따라 本草지식의 통일과 보급에 있었다.”라고 하여 향약을 주로 하는 本草지식의 통일을 東醫寶鑑편찬의 중요한 목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寶鑑의 湯液편은 향약집성방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단지 향약에 한글표기를 단 것을 제외하고는 許浚의 향약에 대한 독창성의 의미가 희박하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향약에 대한 정리가 본서 편찬의 한가지 목적이라고 볼 수는 있으나 이것이 주요한 목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데 본 설의 문제점이 있다.

2) 전란 중 망실된 의서의 복구 때문이라는 설

이 주장은 두 차례의 왜란을 겪은 후에 행해진 의서 복간의 연장선상에서 본서의 간행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노정우에 의해 제기되었다. 즉, 전쟁이 끝난 후 백성의 피해를 복구하는 차원에서 의서의 간행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이 때문에 전란 직후 언해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등과 같은 국내의서의 출간이나 醫學正傳이나 醫學入門과 같은 중국의서들의 복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설의 문제점은 망실된 의서를 보충할 목적이라면 구태여 東醫寶鑑과 같은 방대한 규모의 새로운 의서를 편찬 할 필요가 적다는 것에 있다. 다시말하면 만약 없어진 의서들을 대신할 요량이면 굳이 어렵게 새로운 의서를 편찬 할 것이 아니라 기존에 사용했던 의서들 중에서 꼭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의서들을 위주로 복간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3) 전후 피해복구와 관련있다는 설

이진수에 의하면 “선조가 東醫寶鑑의 저술을 許浚에게 명한 1595년은 바로 임진왜란이 끝난해로 국민은 피폐의 극에 달해 있었다. 전국의 농토는 황폐해져 국가의 재정은 파탄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인명피해도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그러므로 난후의 氣逆대책이 시급을 요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정도 東醫寶鑑의 성립에 커다란 요인으로 등장하게 되었음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東醫寶鑑 서문에는 전란으로 인한 사회적 필요성을 언급한 대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선종대왕(宣宗大王)께서는 몸을 다스리는 방법[理身之法]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시려는 어진 마음에서 의학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근심하시었다. 일찌기 병신년(1596년)에는 태의(太醫)로 있던 허준(許浚)을 불러 다음과 같이 하교하셨다...중략...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향약(鄕藥)이 많이 나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鄕名]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선조는 평상시부터 醫學에 관심이 많았으나 전란을 당하여 피폐한 백성들의 고통을 안타까이 여겨 우리 땅에서 나는 향약을 이용한 내용을 포함한 새로운 의서를 만들어 백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을 가지고 전란으로 인해 醫藥이 없어서 요절하는 사람들을 위해 본서를 편찬하라는 말로는 해석이 어렵다. 왜냐하면 만약 백성들의 일용에 도움이 될 목적이라면 언해구급방과 같은 형태의 짧고 쉬우면서 언해된 형태의 의서가 더 시급하지 구태여 본서와 같은 거대한 의서를 새로 만들 필요성은 적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각 시기 별로 백성들의 傳染병 대책의 일환으로는 벽온방 등의 대중적이며 간단한 전문 의방들을 이용했고 기근의 대책으로는 구황촬요 등의 각종 구황서를 이용하였으며 구급용으로는 구급방 등의 서적이 언해되어 널리 배포되었다. 따라서 본서를 전란으로 인한 기역용으로 만들었다는 설은 절박한 현실과 맞지않는다. 더 상세한 것은 앞절에 있는 許浚의 다른 의서들 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4) 醫學학술사의 필요성 때문이라는 설

이 견해는 미끼 사까에가 가장 먼저 제기한 것으로 “조선 초기에는 세종 때 나온 향약집성방과 송,원,명초의 醫學을 합해서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중종, 명종 초에 이르러서는 明化된

이주의학이 수입되었고, 조선의학계는 이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許浚의 출현으로 이 둘이 통합되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허정은 상게 논문에서 東醫寶鑑의 서문에 나오는 선조의 말과 집례에 나오는 許浚의 말을 종합하여 본서의 편찬 동기로 제시될

수 있는 4가지를 제시하였다.

가. 당시의 혼란스런 醫學상황의 정리

東醫寶鑑 서문을 보면 이정구의 글에서

“황제와 기백은 위로는 천기(天紀)에 정통하고 아래로는 사람의 도리[人理]를 지극히 하였다. 그들이 책쓰기를 즐겨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묻고 대답하여 어려운 문제를 해명(解明)하는 식으로 써서 후대(後代)에 전하였으니 의서가 나온 지는 이미 오래라고 말할 수 있다. 멀리는 태창공(太倉公)과 진월인(秦越人)으로부터 가까이는 유하간(劉河間), 장자화(張子和), 주단계(朱丹溪), 이동원(李東垣)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학자(醫學者)들이 연이어 나왔으나, 논설이 분분하고 경전의 일부분을 표절하여 각기 다투어 자기의 학파를 내세웠다. 그래서 의서는 점점 더 많아졌으나 의술은 더욱 더 애매해져서 『영추(靈樞)』의 본뜻과 어긋나는 것들이 적지않게 되었다. 세상의 평범한 의사들은 깊은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혹 『내경(內經)』의 말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처방을 쓰거나 혹은 옛날 방법에만 집착하여 변통(變通)해서 쓸 줄을 몰랐다. 따라서 판단이 어둡고 핵심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이는 일이 많았다.”라고 하여 당시의 혼란스런 醫學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허정은 김두종의 한국의학사를 인용하여 조선초에서 중엽까지 중국에서 간행된 100여종이 넘는 의서들이 국내에 수입, 간행되었던 사실을 근거로 하여 당시 金元四大家 이후 여러 유파가 난립한 상황 속에서 국내의사들은 어느 醫學이론이 옳은지 조차 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선조 임금도 당시 流行하던 중국 의서들에 대한 불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요즘 중국의 의서들을 보니 모두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로 볼만한 것이 없도다. 여러 가지 의서들을 모아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이와 같이 당시에 조선의 지배계층은 복잡한 醫學체계를 일대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며 그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본서의 편찬이라고 볼 수 있다.

나. 養生사상에 입각한 의서의 편찬

한편 이어지는 선조의 교시는 “그런데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修養)법을 먼저 쓰고 약석(藥石)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방서들이 번잡(煩雜)하므로 되도록 그 요점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의서의 편찬에 있어 그 근본은 약보다는 修養을 으뜸으로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修養이 우선이고 약석이 부차적이라는 원칙에 대해서는 당시의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이미 널리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이었다. 이는 16세기 성리학의 심화과정 속에서 다양한 사상가와 學派가 분화되기 시작하던 조선에서 도교사상이나 養生이론 등이 별 사상적 갈등 없이 쉽게 흡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東醫寶鑑에 나타나는 도교사상이나 養生술이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이단사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성리학의 심화과정속에서 발달한 성리학에 걸맞는 생명과 몸에 관한 체계적인 이해의 틀을 제공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 향약의 권장

선조는 이어지는 서문에서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나라에는 곳곳에 향약(鄕藥)이 많이 나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鄕名]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라고 하여 본서의 편집방향중에 한 지침으로 향약에 대한 권장과 일반 백성들이 알아 볼수있도록 약재명을 향명으로 표기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 문제는 결국 우리 나라 醫學의 전통과도 연계가 되는 문제로 조선전기까지 우리의학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향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경험과 전통이 축적되어 있었기에 이것을 흡수함과 동시에 전란직후 약재구입이 지극히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일반 백성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약을 명시하여 실용에 편리하게끔 한 것이다.

라. 약재 분량의 조절

이와 관련한 근거는 東醫寶鑑 집례에 나오는데

“옛사람들의 처방(藥方)은 거기에 들어가는 약재의 양과 종류가 지나치게 많아서 졸지에 갖추어 쓰기에는 어렵습니다. 더우기 <국방(局方)>에서는 일제(一劑)의 수(數)가 더욱 많으니 빈한(貧寒)한 집에서 어찌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득효방(得效方)』과 『의학정전(醫學正傳)』에는 모두 5전(五錢)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이는 심히 터무니없는 일로써 대개 한 처방에 그저 4, 5종이면 5전도 가능하겠지만, 약의 종류가 20-30종에 이른다면 한가지 약재(一材)가 겨우 1, 2분중(分重) 밖에 못 들어가므로 함량(性味)이 적어서 어찌 효과를 바랄 수 있겠읍니까? 근래에 나온 『고금의감(古今醫鑑)』과 『만병회춘(萬病回春)』에는 약 1첩의 분량을 7, 8전 혹은 1냥까지로 하였는데, 이것은 약미(藥味)가 완전히 드러나고 다과(多寡)가 알맞아서 금세인(今世人)의 기품(氣稟)에 합당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모두 이 표준에 따라 1첩을 만들어 제용(劑用)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였습니다...중략... 또한 당약(唐藥)과 향약(鄕藥)을 같이 실었는데 향약(鄕藥)인 경우에는 향명(鄕名)과 더불어 산지(産地), 채취시기, 건조법[陰陽乾正]등도 실어 사용에 용이하게 하였으며 멀리서 구해 온다거나 구하기가 어려운 폐단이 없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여 당시에 혼란한 약재양에 대해서도 조선중기의 입장에서 당시로서 가장 적합한 약량의 표준을 정한 동시에 약재의 수치법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 약재분량의 적절한 조절을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선조의 부탁설

윤창렬은 본서의 편찬동기에 관해 무엇보다도 선조의 부탁을 꼽고 있다. 또한 신동원도 비슷한 맥락에서 선조 임금이 중국의서의 잘못을 시정할 것과 修養을 위주로 하는 의서의 편찬을 지시한 것을 근거로 하여 본서의 편찬에 있어서 선조의 영향을 강조하였다.

6) 소결

결국 이상의 논의를 요약해보면 본서의 편찬동기는 미끼사까에가 말한 것과 같이 “금원의학이 혼융되어 있는 새로운 명의학의 수입을 뼈대로 해서 조선에서 발달해 온 醫學사상을 엮어서 자국화할 필요성”에서 찾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단, 여기에 養生사상에 대한 고려와 향약의 이용장려 및, 약재분량의 조절 등의 시대적 요구가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고 선조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3-2. ?東醫寶鑑?의 思想적 배경

東醫寶鑑의 독특한 편제와 관련하여 이전부터 東醫寶鑑이 도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주장이 있어왔는데 그 근거는 우선 東醫寶鑑의 저자중 유의 정작이 있었는데 그가 朝鮮丹學의 핵심인물이었던 鄭?의 친동생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東醫寶鑑의 편찬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작의 의견이 반영되었기에 비교적 도교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許浚 스스로도 집례(集例)에서 “道家는 그 정미로움을 얻었고, 醫家는 그 조잡함을 얻었다(道得其精, 醫得其粗也)”라고 하여 道本醫末論을 주장하였고 책의 편제에 있어 도가서적인 ?황정경(黃庭經)?의 편명인 “내경(內景)”을 사용하여 “내경(內景)”편의 앞부분을 신형(身形) 정(精) 기(氣) 신(神)의 순서로 구성하는 등 도가적 색채를 강하게 띠게 하였다. 그렇다면 許浚은 왜 도교이론을 끌어들여 새로운 이론체계를 만들게 되었을까? 또한 당시의 상황이 어떠하였기에 성리학이 국시인 나라에서 성리학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단적인 요소가 강한 내용들까지 끌어들여 하나로 융합시킬 수 있었을까? 이하에서는 이런 주제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3-3-1. 東醫寶鑑과 三敎會通사상

김호는 허준의 사상은 楊禮壽나 鄭碏등의 영향뿐만 아니라 당시에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있었던 유교를 중심으로 佛敎와 道家를 아우르는 三敎會通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근거로서 우선 東醫寶鑑의 편찬에 참여하였던 유의 정작이 그의 형인 북창 정렴과 더불어 道家인사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스스로도 女色을 멀리하는 등 道家적인 삶을 살다 간 것으로 보아 許浚에게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東醫寶鑑에 <鄭北窓方>에서 인용한 處方이 두 군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정렴과 정작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당시에 임란을 전후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삼교회통적 경향을 띠는 일단의 학자들이 형성되어있었고 이들은 특히 李滉이나 李耳계열보다는 金時習-徐敬德으로 이어지는 한강이북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었다. 주요한 인물들로는 徐敬德의 제자이자 周易과 道家사상에 통달한 朴枝華나 陽明學에 심취한 南彦經, 洪仁祐및, 유희경을 중심으로한 李睟光, 유몽인, 김현성, 신흠 등을 들 수 있다. 이수광은 <芝峰類說>에서 “醫는 救世濟生하고 卜은 避凶趨吉하는 것으로 모두 가볍게 볼 수 없다”고 지적하는 등 이들은 국가와 실생활에 필요하다면 정학이나 이단을 가리지 않고 수용하려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중국에 다녀온 인물들이 많아 당시 국제정세와 변화하는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때문에 이들은 상공업이나 기술개발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들 중 대표적인 例을 들자면 許浚과 사돈지간인 노수신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醫藥에도 밝아 나중에 선조의 侍醫 역할도 하였고 養生법에 관한 논술도 많이 있다. 그의 문집인 <蘇齋集> 중에서 “治心養胃補腎之要”편에 보면

“사람은 천지의 기운을 받아 五行의 性을 갖추었으니 안으로는 五臟六腑가 있고 밖으로는 筋骨肌肉 등이 있어 신체를 형성한다. 특히 氣血은 신체의 움직임과 정신활동을 가능케 하는데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여 사물에 접하니 밖으로 六淫에 관계하고 안으로는 七情을 낳는다. 그런데 한번이라도 調攝에 실패하면 百病이 여기에서부터 비롯한다. 孟子가 浩然之氣를 잘 길러야한다고 말했으며 太乙眞人이 七氣를 기르는 도를 언급한 것은 원기를 보호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략...일신과 만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心이니 心이 五臟六腑의 君主之官이기 때문이며 다음은 脾胃로 臟腑에 영양을 주어 氣血의 根源이 되며 다음은 腎이니 精을 보존하고 뼈를 주관하니 일신의 근본이라고 할만하다. 고로 治心-養胃-補腎의 중요성을 순서대로 말한 것이다.”라고하여 東醫寶鑑의 精氣神론과 유사한 논의를 펼치고있다.

이외에도 삼교회통사상의 비조로 간주되는 김시습의 경우도 道敎養生法을 중시하여 眞元지기의 修養을 강조하는데

“지나치게 화를 내면 氣가 상하고, 생각을 많이 하면 神이 없어지며, 神이 피로하면 氣가 약해지고, 氣가 약해지면 병이 생긴다. 눈은 神의 창이고 코는 神의 문이며 尾閭는 精의 길이다. 사람이 神을 많이 쓰면 神이 소모되고, 숨을 많이 쉬면 氣가 허해지고, 지나치게 色을 밝히면 精이 마른다. 그러므로 반드시 눈을 닫아 神을 길러야하며 調息하여 氣를 길러야하며, 아래의 뿌리를 굳게 닫아 精을 길러야한다. 精이 충만하면 氣가 풍부해지며, 氣가 풍부하면 神이 완전해진다. 이를 道家의 三寶라 하는 것이다.”

한편 이들과는 다르지만 이황이나 이이와 같은 정통 성리학자들도 養生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精-氣-形으로 이어지는 精氣論에 관해 동의하고 있었다.따라서 인간의 삶이 기의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지며 기의 움직임과 소모가 불가피하다면 病이란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므로 기의 소모를 방지하는 養氣가 養生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단, 기를 仁義의 마음을 기르는 浩然之氣와 眞元의 기를 기르는 眞元之氣로 나눈다면 성리학자들의 주관심사는 眞元之氣가 아니라 浩然之氣를 기르는데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반면에 道家사상이나 東醫寶鑑과 같은 의서에서는 상대적으로 眞元之氣를 기르는데 더 주안점을 두게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조선후기에 이르러 유학자들의 필독서로 東醫寶鑑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3-3-2. 東醫寶鑑과 도교

1) 우주생성론(원기론)

金洛必은 <東醫寶鑑의 道敎的 性格>이라는 논문에서 東醫寶鑑을 소재로 하여 도교사상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는데 특히 內景篇에 주목하고있다. 그는 東醫寶鑑이 도교적 본체론과 인간관을 받아들여 이론적 기초로 삼아 당시의 혼란한 醫學상황을 재통합하는 근거로 도교사상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를 집례에 나오는 許浚의 말을 따라 “道本醫末論”이라 하고 인용된 도교서적들이 주로 도교 남파의 사상적 영향이 두드러진다고 한다. 한편 東醫寶鑑에서는 身形門의 形氣之始에서 『건착도(乾鑿度)』를 인용하여 우주의 본체론적 기초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天形은 건(乾)에서 나오는데 이에는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가 있다. 태역은 아직 氣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고 태초는 기의 시초이며 태시는 形의 시초이고 태소는 質의 시초이다. 형과 기가 이미 갖추어진 뒤에는 아(痾)가 되는데 아란 것은 피로한 것(瘵)이고 피로한 것은 병(病)인데 병이 여기에서부터 비로소 생긴다. 사람은 태역으로부터 생기고 병은 태소로부터 생긴다“

여기에 대해 김은 위 내용이 列子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이 앞에 ”有形者生於無形, 則天地安從生“라는 글이 생략되어있고 뒤에는 ”氣形質具而未離 故曰混淪 混淪者 言萬物相渾成而未相離 視之未見 聽之不聞 得之不得 故曰易也“란 글이 첨가되어있다. 결국 위 인용문은 우주생성의 根源을 기에서 찾으며 그 기는 혼연하여 미분화되지 않은 太易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東醫寶鑑에서 위 문장을 보충 설명하여 ”『참동계(參同契)』의 주해에는 형과 기가 다 갖추어지지 못한 것을 홍몽(鴻濛)이라고 하였고 형과 기가 갖추어졌으나 갈라지지 않은 것은 혼륜(混淪)이라고 하였다.“라고 한것이다”. 결국 東醫寶鑑의 관점은 太極이 元氣에 해당하며 太易이 元氣이전의 道에 해당하는데 이는 周易과 老子의 사상을 종합시키려는 易緯계통의 사상을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대에 성립된 최초의 도교경전인 太平經에서는 세계에 관한 해명을 元氣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있다. 즉, 원기는 세계를 구성하는 根源적 실체로서 세계 안의 사물들에 생명을 꽉 채워주는 존재인데 원기의 작용은 道의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야하며 원기의 작용은 음과 양이라는 두 기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생성한다. 아울러 태평경에서는 원기를 老子의 一과 연결시켜 종교적 성격을 강화하는데 그 목적은 단순히 원기를 一이라는 신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 뿐만 아니라 養生을 강조하고 도교적 守一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하였다. 이는 동시에 인간이 천지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원기를 받고 태어난 존재이기에 생명력이 충만한 원초적인 상태로 돌이킬 수만 있다면 신선과 같이 먹거나 마시지 않아도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으며 인간이 천지자연의 운행을 본 받으면 주어진 수명을 다하거나 수명을 늘릴 수도 있다는 도교 특유의 사고방식과 연결된다. 한편 이와 유사한 우주생성론이 회남자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虛霩에서 道가 시작하고 도에서 우주가 나오는데 우주는 (원)기를 생성하고 원기가 천지음양만물을 낳는다는 도식이 그것이다. 이를 도식화하면 虛霩(太始)→道→宇宙→元氣→天地, 陰陽→만물로 연결된다.

2) 精氣神과 도교

태평경의 三合相通사상은 전통적인 三才사상을 반영하는 동시에 도교적 세계관의 특징이 부각되는데 세계를 셋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방식은 태평경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표현이다.또한 삼분법적 세계 파악방식은 후대도교의 관념창출에 선구적 역할을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三官사상, 三一神관념, 三元, 三尸, 三天, 三皇 三淸 등의 사상이며 이외에도 경전을 세부분으로 나누는 방식도 여기서 기원한다. 태평경에서 삼재론적 사고가 가장 잘 반영된 곳을 인용해보면 “ 원기에는 세가지 이름이 있으니 太陽, 太陰, 中和가 그것이다. 形體에는 세가지 이름이 있으니 天, 地, 人이 그것이다. 천에는 세가지 이름이 있는데 日, 月, 星이 그것이며 북극이 中央이다. 地에는 세가지 이름이 있는데 山, 川, 평지가 그것이다. 인에는 세가지 이름이 있는데 父, 母, 子가 그것이다. 다스리는 데는 세가지 이름이 있으니 君, 臣, 民이 그것인데 이들 모두는 태평을 바란다. 이 셋은 항상 마음으로 복종하여 조금이라도 잃지 말아야한다. 같은 것을 하나로 걱정하며 합하여 한 가족을 이루고 태평을 세워 수명을 늘리게 되니 의심이 없도다.”

醫學적 측면에서 삼분법적 사고가 적용된 대표적인 예가 바로 精氣神론이다. 태평경에서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에 대해 “夫人本生混沌之氣 氣生精 精生神 神生明. 本於陰陽之氣 氣轉爲精 精轉爲神 神轉爲明”이라 하여 사람이 혼돈의 기인 원기를 稟受받아 태어나며 중화의 기가 전환하여 정을 만드는데 여기서 정이란 氣體로서 사람이 구체적 인간의 모습을 갖추기 직전의 상태로서 신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생명력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한편 神은 정에서 생기는데 이는 미묘한 정신을 말하고 明은 사람의 인식능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사람의 몸은 원기중화지기정신명의 생성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를 요약하면 결국 精氣神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精氣神은 사실 천지중화라는 천지인 삼재의 도식과 연결된다. 그런데 나누면 셋이지만 根源은 원기라는 일자이므로 다 함께 동일한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精氣神의 관점에서 사람을 보면 건강하기위한 필수요건이 세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것인데 태평경에서는 특히 신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신을 지키지 못하면 몸이 죽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신을 지킨다는 것은 곧 인간의 본질을 지킨다는 것이고 이는 또 精氣神 셋을 잘 지킨다는 것이되며 이중 신에 우위를 두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핵심적인 본질이 바로 정신활동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을 잘 지킨다는 사고는 곧바로 守一사상과 연관이 되며 이것이 후대 도교에서 내단적 養生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東醫寶鑑의 精氣神론에 관해서는 精氣神 삼자를 통해 인간의 생명활동을 설명하려는 견해는 後漢末부터 있어왔는데 이는 이시기에 성립된 太平經에서 “三氣共一爲神根也. 一爲精 一爲氣 一爲神 此三者共一位也 本天地人之氣 神者受之于天 精者受之于地 氣者受之于中和 三者共爲一道”라는 문장이 등장하기때문인다. 이외에도 한대에 道家적 입장에서 사상적 통일 을 꾀하고자 한 회남왕 劉安(BC 179-122)에 의해 저술된 淮南子에서도 하늘, 땅, 사람에게 통하는 보편적 우주원리로서의 道와 천변만화하는 事를 통괄하여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形, 氣, 神 셋으로 나누어 “形과 神, 氣志는 각각 그 마땅한 바에 처하여 천지가 하는 바에 따른다. 대저 形이란 생명이 거주하는 집이요 氣란 생명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며 神이란 생명을 主宰하는 것이다. 하나라도 위치를 상실하면 셋은 손상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지위에 居處하게 하고 그 직분을 지키게 하여 서로 간섭함이 없게 한다.”라고 하여 인간에 대한 形氣神論을 전개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인간존재를 세가지로 나누어 보는 것이 한대 도가철학의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였다.

이후 精氣神론은 중국 도교의 남파와 북파를 막론하고 內丹思想에서 중요한 이론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東醫寶鑑에서는 내단사상중에서 일부만을 취했을 뿐인데 精氣神의 先後天 구별이 없이 주로 後天의 精氣神을 말했을 뿐이고 精氣神론을 우주론적 맥락에서 활용하기보다는 주로 인체에 대입시켜 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東醫寶鑑이 본격적인 修鍊書라기 보다는 醫書이기 때문에 醫學에서 필요한 부분에 한해 취사선택하여 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더구나 東醫寶鑑에서는 內經이래의 形神論을 융합하여 인체를 精氣神血이라는 4요소의 구성으로 보는데 이는 내단사상과는 다른 점이다.

 

3) 내단사상과 東醫寶鑑

한편 김은 또 다른 저서에서 선조 19년(1585)-효종 10년(1659)에 실존했던 권극중이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의 조선에서 내단사상에 대해 고찰하고있다. 여기서 그는 陰陽生成의 根源적 一者로서 제기된 한대의 元氣論이 인체에 적용되었을 때 인체의 內氣에 해당하는 것이 丹으로 발달하였다고 보는데 丹學에는 藥物을 통한 煉丹이 위주가 되는 外丹思想과 내적인 기 수련을 통해 단을 만드는 內丹思想으로 크게 나뉘어진다고 한다. 이중에서 권극중은 첫째, 내단을 위주로 한 內丹主體論, 둘째, 丹學과 參同契, 周易을 연결시키는 丹易參同論, 셋째 命공부가 위주인 仙道와 性공부 위주인 佛敎를 융합시키려는 仙佛同宗사상, 넷째로 宋代이래 발전한 性命雙修論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권극중이 비록 韓無畏의 <海東傳道錄>등에서 조선 내단사상의 중심인물로 설정된 것과는 달리 그의 문집인 <청하집>은 유학을 위주로 자연주의적 文風이 보일 따름이며 그의 묘비에도 “大儒”라고 씌어 있으며 내단사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김시습의 경우도 유사한데 그가 내단사상의 기초가 되는 여러 서적들을 읽은 것이 분명하고 아마도 중국의 체계적인 내단수련을 접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스스로는 내단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조선이 성리학을 국시로 하는 나라이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위주로 다른 학문을 섭렵하는 실정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권극중이나 김시습의 말대로 유학자로서 다른 학문에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이를 수용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하여튼 중요한 점은 이 당시에 이미 조선에는 내단사상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이루어져 있었고 특히 周易參同契와 같은 주요한 내단서적들이 학자들 사이에 널리 유포되었음이 확실하다. 결국, 許浚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체계적인 내단사상을 접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를 바탕으로 유불선을 아우르는 삼교회통의 사상으로 東醫寶鑑의 이론적 기초를 재정립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許浚에게 도교사상이 필요했을까?

생각해보면 근본적으로 유교와 도교의 차이점 때문인 듯하다. 즉, 도교의 기본사상은 “我命在我, 不在於天”이라 하여 스스로의 수련을 통해 자신의 命을 다스릴 수 있다는 적극적인 양생관점이 부각되는 반면 유교의 順天관념이나 호연지기만으로는 적극적인 의미의 養生이 어렵기 때문이다. 즉 내단사상에서 중요시하는 “降本流末”하여 道->一->二->三->萬物로 이어지는 순서를 따르면 사람이 되고 죽음에 이르며 반대로 “返本還原”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신선이 되어 長生不死한다는 “順則人 逆則仙” 사상과 연관이 있다. 더구나 韓醫學의 聖典인 內經의 기본사상이 이와 일맥상통하며 內經의 이상인 眞人이야말로 도교에서 추구하는 신선의 본모습이기에 더욱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3-4. 東醫寶鑑의 醫學적 배경

3-4-1. 의경중심의 사상

중국의학을 대별하면 크게 보아 黃河유역의 북방의학을 醫經派라 하고 長江유역의 남방의학을 經方派라 하는데, 醫經이라 하면 지금의 ?黃帝內經?과 ?難經?을 그 대표적인 책으로 들 수 있고, 經方이라 하면 ?傷寒論?과 ?金匱要略?을 들 수 있다. 醫經은 질병치료에 앞서 養生을 중시하고, 辨證에 있어서는 經絡보다 臟腑를 중시하며, 치료에서는 針灸를 위주로 한다. 반면에 經方은 養生보다는 질병의 驅逐을 목표로 하여 六經辨證 을 바탕으로 약물치료를 위주로 한다. 물론 후세에 이 두 의학은 융합되어 보다 발전된 하나의 의학으로 통합되지만 후세 醫家가 어느 쪽을 위주로 하는가에 따라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東醫寶鑑?을 보면 본서는 養生을 중시하고 五臟六腑를 위주로 辨證을 하고 있으며 內經연구를 위주로 새로운 학설을 개발한 金元四大家의 학술을 따르고 있다. 또한 傷寒을 단순히 雜病편의 일부로 보아 六氣중에서 하나인 「寒門」으로 비교적 소략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東醫寶鑑은 분명히 醫經의 계통을 따르고 있는 책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東醫寶鑑은 왜 內經을 중시하였을까? 얼핏생각하면 당연해 보이지만 이 문제야 말로 東醫寶鑑의 평가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관건이 된다. 왜냐하면 박찬국이 주장한 바와 같이 東醫寶鑑이전에는 국내에서 內經을 깊이있게 연구한 성과가 전혀 없었다.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뿐 아니라 동이보감과 거의 같은 시대 작품인 의림촬요에서 조차도 內經연구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許浚은 東醫寶鑑에서 모든 주장의 시작을 거의 內經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대가의 영향, 그 중에서도 朱丹溪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東醫寶鑑이 기본적으로 丹溪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朱丹溪가 內經의 연구에 대해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면 丹溪의 재전 제자인 劉純의 저서 <醫學小經>에 보면 제자의 질문에 대한 丹溪의 답변이 있는데 “問曰 醫書何先? 答:必修先讀 內經 本草 脈經. 非內經無以識病 非本草無以識藥 非脈經何以診候? 然後可參諸家之說”이라 하였고 또한 이어지는 상한을 먼저 보는 것은 어떠한가에 대한 질문의 답변에서는“凡先入者爲主 內經盡陰陽之妙 變化無窮 諸書皆出于此. 如越人演八十一難 止得內經中一二 仲景取其傷寒一節 河間以熱論變仲景之法 東垣以飮食勞役立論. 恐先仲景書者 以傷寒爲主 恐誤內傷作外感 先東垣書者 以胃氣爲主 恐誤外感爲內傷 先河間書者 以熱爲主 恐誤以寒爲熱. 不若先主于內經 則自然活潑潑地”

두번째로는 內經과 도교양생사상과의 연계 때문이다. 분명 許浚은 사대가의 영향을 크게 받고는 있지만 丹溪학파나 李梴과는 달리 도교양생법과 내단사상의 적극성과 논리적인 방법론에 매료되어 주자학적인 사상을 醫學에 접목시키려는 그들의 시도가 무언가 不足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때문에 許浚은 內經의 養生사상에 주목하여 內經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를 도교사상과 연관시켜 精氣神론을 끌어들여 새로운 체계를 완성하게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東醫寶鑑은 內經에 대한 深化된 이해를 바탕으로 處方은 상한방부터 명대 處方까지 모두 종합한 위에 국내의학의 특징인 향약의 전통까지 加味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의서가 되었다.

즉 ?東醫寶鑑?은 단순한 임상의서가 아니라 중국의학의 기본인 ?黃帝內經?의 이론을 완전히 흡수하고 여기에 금·원의학과 한국 향약을 합하여 만든 의서로서 한민족 의학의 총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때문에 본서가 출간된 이후 한국에서 새로운 醫學의 根源으로 자리잡게 된것이다.

3-4-2. 金元四大家의 영향

東醫寶鑑이 金元四大家 학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은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는데 우선 東醫寶鑑 인용빈도순으로 중요한 서적을 보면(본초나 針灸와 같이 이론상 큰 의의가 없는 것을 제외하면) 醫學入門>丹溪心法> 得效방> 醫學綱目> 醫學正傳> 東垣> 萬病回春 순이다. 여기서 丹溪心法과 東垣은 직접적으로 四大家의 저작이므로 의심할 바가 없고 醫學入門이나 正傳, 回春등은 모두 丹溪학파에 속하는 醫家들의 저술이므로 결국 東醫寶鑑의 전편에는 丹溪와 東垣을 중심으로 한 四大家의 학설이 녹아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東醫寶鑑안에서 살펴보면 雜病편의 用藥門 近世論醫에서

최근 의학이론에서 유하간(劉河間, 유완소(劉完素))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장역주(張易州, 장원소(張元素))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장씨의 약 쓰는 방법은 4철 음양이 오르내리는 데 따라 약을 가감하여 쓰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경』에 4철 기후에 따라 몸을 조리해야 한다고 한 뜻과 같다. 의사가 이것을 알지 못하면 잘못된 것이다. 유씨의 약 쓰는 방법은 묵은 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생기게 하며 약간이라도 막혀 있는 것이 없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새것이 계속 생겨나게 하는 자연법칙에 맞는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의사는 의술이 없는 것이다. 장씨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장씨의 방법을 잘 알지 못하면 작용이 센 약을 대담하게 쓸 수 없고 때를 놓쳐서 치료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유씨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유씨의 의술을 다 알지 못하면 당장 효과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남모르게 원기[正氣]를 상하게 하여 후일에 해를 입게 하는 일이 많다. 이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을 본받고 약점을 버리면 치료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해장]

위 인용문은 張易水의 제자이자 李東垣의 高弟인 王好古가 쓴 것으로 당시의 醫學상황이 火熱을 위주로 攻邪를 주장하는 河間학파와 기의 升降을 중시하여 脾胃를 보해야 한다는 補土波(=易水學派)간의 學派 대립을 보이고 있는 현실임을 실감나게 보여주면서 결국은 양자의 이론을 종합적으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이는 王好古의 말을 인용하여 許浚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한편 朱丹溪의 사대가론을 살펴보면 유순의 <의학소경>에

“劉張之學 其論臟腑氣化有六 而于濕, 熱, 相火, 三氣致病爲甚, 多以推陳致新 瀉火之法療之. 此固高出前代矣. 然有陰虛火動 或陰陽兩虛 濕熱自甚者 又當消息而治之. 東垣之謂飮食勞倦 內傷元氣 則胃脘之陽不能擧 幷心肺之氣陷入于中焦 而用補中益氣等藥治之 此前人所無也. 然天不足于西北 地不滿于東南 天陽而地陰. 西北之人陽氣易降 東南之人陰氣易升. 苟不知此 而從取其法 則于氣之降者 固可以獲效 而于氣之升者 亦從而用之 吾恐反增其病矣. 當以三家之論 去其短而取其長”라고하여 삼가의 長短점을 논하고 그 단점을 보완하여 장점을 취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같은 책에서 素問과 難經이외에 어떤 책을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제자의 질문에 丹溪는 “外感法仲景 內傷法東垣 則仲景治法 更合內經. 然于諸書皆須覽過 以長識見”

이라 하였다. 이상을 종합하면 丹溪는 內經을 주로 삼되 仲景, 河間, 子和, 東垣은 모두 內經의 일부분을 천착하여 각기 일장일단이 있으므로 이들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는 방법이 공부의 올바른 길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東醫寶鑑 곳곳에서 사대가의 이론을 위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며 明代 兩大學派중 하나인 溫補學派의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고 단지 외과편에서 薛己의 <外科發揮>만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즉, 東醫寶鑑은 철저히 丹溪학파의 입장에서 서술되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지어 최근에 차웅석은 <李梴 醫學사상의 학술계통 및 특징에 대한 연구>를 통해 醫學入門의 학술계통에 대한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張仲景이 상한에 대해 醫論을 세운 이후에 만세의 법이 되었다. 河間은 溫暑의 이론을 제창하고 방법을 보충하여 나머지 계절에도 상한의 법을 쓸 수 있게 하였을 따름이지만 傳經直中과 陰陽雜病의 분별은 丹溪가 상한의 큰 의의를 홀로 본 것이다. 그리고 西北은 바람이 많고 지대가 높아 상한을 앓는 자가 많지만 東南은 평지가 많고 기후가 따뜻하여 內傷을 앓는 자가 많다. 그래서 東垣은 內外傷論을 지어 그것을 변별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상한의 글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것이다. 지금의 의사들이 상한의 한두가지 이치만을 보고 雜病과 內傷을 보지 않으며 혹은 內傷과 雜病의 한두가지 이치만을 보고 상한을 이해하지 않아 오로지 發散에 치중하거나 또는 溫補에 치중하여 內外를 변별하지 않으니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다반사이다.”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丹溪의 再傳제자인 劉純은 <醫經小學>에서 “나는(단계) 병을 治療할 때 항상 東垣의 약 쓰는 법을 사용하지만 약품의 가짓수가 적어 약력이 專精한 仲景의 處方하는 법을 본받는다. 外感은 仲景을 본받고 內傷은 東垣을 본받는다. 仲景의 治法은 또한 內經에 부합한다.”

한편 丹溪의 방계제자로 알려진 王綸(호 節齊) 은 <明醫雜著>에서

“단계에 이르러서는 여러 유의들의 업적을 집대성하였고 특히 內傷과 外感에서의 陰虛發熱이 생기는 이치와 濕熱이 중요한 병인이 된다는 것을 밝혀 전대의 醫學者들이 미처 하지 못한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外感에서는 仲景을 본받고 內傷에서는 東垣을 본받으며 熱病에서는 河間을 본받고 雜病에서는 丹溪를 본받아야 醫學의 道가 완전해진다.”

한편 醫學入門에 나타난 丹溪의 영향을 보기 위해 차는 入門의 총론에 해당하는 保養論(陰騭, 天眞節解, 筎淡論, 陰火論,保養說)을 고찰하였다. 이 중 陰騭과 保養說은 李梴의 작이고 天眞節解는 內經 上古天眞論을 재구성한 것이고 筎淡論과 陰火論은 모두 丹溪의 <格致餘論>에서 정리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陰騭은 陰德과 孝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사회적인 덕목의 실천이 건강의 요체가 됨을 주장하고있다. 이는 지극히 유학자적인 발상으로 보여진다.. 다음으로 天眞節解는 內經의 上古天眞論 중에서 수명과 연관된 부분을 인용한 것으로 “虛邪賊風 避之有時 恬憺虛無 眞氣從之 精神內收 病安從來”를 강조하여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筎淡論과 陰火論은 음식과 방사의 節制를 강조한 것으로 음식을 偏厚하게 먹으면 心火가 조장되고 사람이란 본래 陽有餘陰不足하므로 항상 陰氣가 고갈되기 쉬우므로 收心養性하여 心을 잘 다스려야 陰火의 발생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끝으로 保養說에서는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마음을 잘 다스려 氣血의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해진다는 것을 주장하여 醫學과 유교의 융화를 시도하였다. 결국 李梴의 주장은 丹溪의 설에 근거하여 이를 약간 보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체적으로 丹溪학파의 주장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外感과 內傷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內經에는 內傷과 外傷이란 용어가 나오긴 하지만 이는 원인개념과 部位개념이 혼재되어 있어 內傷外感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데 그쳤다. 따라서 양자의 구별을 구체화시킨 것은 陳無擇의 三因方이 최초인데 그는 六淫에 의한 손상이 外因이며 七情傷이 內因이고 나머지 飮食傷, 勞倦傷, 打撲傷, 邪祟 등은 모두 不內外因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內傷과 外感을 논하고 구별한 것은 李東垣인데 그는 상한을 治療하는 과정에서 外感사기를 몰아내는 방법 외에도 脾胃를 補하는 治療법이 있음을 강조하였고 양자의 구별에 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東垣은 陳無擇과는 달리 內傷의 범주에 七情傷뿐만 아니라 飮食傷,勞倦傷, 房勞傷까지 덧붙여 內經 調經論에 나오는 陰陽生病에서 음에서 생긴 병을 內傷이라고 한 것이다. 후에 丹溪가 이를 이어받아 外感은 仲景, 內傷은 東垣이라는 공식을 확립하였고 덧붙여 자신의 氣血痰鬱論과 六淫邪氣의 傳變과정을 재정립하여 비로서 內傷, 外感과 雜病을 治療하는 醫學의 전 체계가 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서가 丹溪학파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는가를 확인하는 주요 기준은 우선 의사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內經을 위주로 仲景과 金元四大家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함께 이것을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朱丹溪라는 관점이 있어야하고 둘째로는 痰鬱論이라고 할 수 있는데 入門이나 東醫寶鑑의 전편에는 이와 같이 담과울로 인한 병리관이 책 전체에 전제로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차의 주장에 의하면 醫學入門의 저자인 李梴은 朱震亨을 중심으로 金元四大家의 醫學을 집대성한 丹溪학파의 학술특징을 따르고 있다고 평가하였는데 이는 東醫寶鑑에 대해서도 그대로 성립한다. 따라서 東醫寶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丹溪의 학설을 중심으로 金元四大家의 학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 불가결하다고 볼 수 있다.

3-5. ?東醫寶鑑?의 편제

?東醫寶鑑?의 편제를 살펴보면 중국의 綜合醫書나 이전의 ?鄕藥集成方? ?醫方類聚?와는 다른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질병을 구분할 때 한의학에서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명칭을 붙였다. 外因에 따라서 風·寒·暑·濕·燥·火 六氣로서 命名하기도 하였으며, 구체적인 질병의 樣態에 따라 病名을 붙이기도 하였고, 또 辨證體系에 따라 陰陽虛實로 구분하기도 하였고, 濕·痰·癥瘕 등 원인에 따라 분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許浚은 이전까지의 질병을 위주로 한 의서의 배열에서 탈피하여 養生사상을 중시하여 사람의 몸을 중심으로 분류하였다. 즉, 도교서적인 黃庭經의 체제를 본 따서 몸의 내부에 해당하는 「內景篇」과 몸의 외부에 해당하는 「外形篇」, 疾病의 세계에 해당하는 「雜病篇」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고 이후 治療와 직결된 藥物에 대한 부분을 「湯液篇」으로 하고 針灸치료에 관해서는 「鍼灸篇」으로 나누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어떤 의서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류방법으로 나중에 淸代에 발행된 고금도서집성의 목차배열에까지 영향을 주었을 정도이다.

그러면 東醫寶鑑에서 중시하는 內外의 개념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우선, 黃庭經의 체제를 본 따서 몸의 정신적 修養을 의미하는 내와 몸 밖의 신비적 주술적 효과를 의미하는 외로 나눈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둘째로 장자 內外편이나 抱朴子 內外편에서 보듯이 내는 몸의 養生적 측면을 다루고 외는 세속의 인간사를 다루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다. 셋째로는 앞서 언급한 내용과는 달리 內外의 범위를 축소하여 정, 기, 신의 내적작용이 중시되는 신체의 안과 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신체의 밖을 나누어서 몸을 살펴 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서술은 宋代 朱肱의 <內外醫經圖>에서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이상을 요약하면 東醫寶鑑의 체제는 신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內外의 구분을 통해서 분류하고 그것을 정, 기, 신이라는 생명의 본질로서 관통하여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때문에 內景篇--여기서 景이란 神의 의미이다--에서는 인체 내에 있는 五臟六腑와 精氣神의 내용과 작용을 다루었고 반면 몸 밖의 부분은 외형편이라 하여 생명의 본질인 景(神) 이 작용할 수 있도록 몸의 형태를 유지해주는 경계를 의미한다고 보아서 外景이라 하지 않고 형태란 의미가 강한 외형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생명관인 形神론과도 상통하는데 형에 해당하는 것이 외형이고 신에 해당하는 내용이 內景에 포괄되는 것이다. 한편 雜病이란 內外가 아닌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한다. 만약 雜病을 丹溪학파에서 일반적으로 보듯 外感과 內傷이 중첩된 협의의 의미로만 파악하면 東醫寶鑑 雜病편에서 다루고 있는 풍부한 내용들을 포함시킬 수 없게 된다. 가령 천지운기, 심병, 풍,한,서,습,조,화 등의 내용은 협의의 雜病이라는 용어로는 담아내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許浚은 확실히 내와 외에 속하는 나머지 모든 내용들을 雜病편에 담아내고 있는 독특한 체계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결국 본서의 內外雜이라는 편제는 장자에서 보듯이 도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3-6 ?東醫寶鑑?의 의의

?동의보감?의 출간 의의에 관해서 전병기(全炳機)는 “한국 의학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동의보감?은 오랫동안 염원해 오던 대륙으로부터의 독자적인 체계를 성취하였고, 민족의학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여 동의학(東醫學)의 명예와 긍지를 제고(提高)한 것이다”고 하였고, 고 하였다. 조선 전기의 한의학은 자주적인 향약정책, 중국으로부터의 의학서 수입 및 간행, ?의방류취(醫方類聚)?의 편찬 및 간행, 의서의 언해 등으로 이미 높은 수준이었다. 세종시대에 향약은 크게 장려되어 그 발전은 극에 달해 있었으니, 향약의 분포실태를 조사한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 채취시기 등을 적어놓은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처방서(處方書)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의 간행은 조선 전기 의학정책이 향약 중심이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수입된 수많은 의학서적을 종합정리한 ?의방유취?의 편찬은 이 시기의 한의학술의 수준을 한단계 높여주는데 일조를 한 것으로 생각된다. ?동의보감?은 조선 전기의 이와 같은 의학적 전통을 후기로 이어주었다. 이 책이 나옴으로써 한국의 한의학은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적 의학체계를 갖게 되었다. 이에 許浚 스스로 “동의(東醫)”라 칭하여 우리 민족고유의 의학이 단순히 중국의학의 변방이 아닌 독자적 이론체계와 장구한 임상경험이 축적된 의료의 산물이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신토불이 사상은 이후 1749년(영조 25) 조정준(趙廷俊)이 저술한 ?급유방?의 「동방육기론(東方六氣論)」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데 “우리나라는 대륙의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므로 그 기후·풍토가 중국과는 다르다. 동원 단계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있었다면 필연코 주되는 경(經)과 고유한 기후에 적응하는 저작이 있었을 것이고 약을 쓰는 표준을 만들었을 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의보감?은 이와 같이 우리의 민족의학을 만드는데 거대한 획을 그었다.

이 책은 또한 학술사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당시 한의학은 여러 가지 의설(醫說)들이 각각 문파(門派)를 형성하고 자신의 고집만을 주장하는 풍조에 경도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이정구(李廷龜)의 “동의보감서(東醫寶鑑序)”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위로 倉公 秦越人으로부터 아래로 劉完素 張從正 李東垣 朱丹溪에 이르기까지 百家가 계속 일어났으나 論說이 어지러이 많더니 緖餘를 표절하여 다투어 門戶를 세우므로 책은 더욱 많아졌지만 의술은 더욱 어두워져 ?靈樞? 본래의 뜻과 서로 멀리 동떨어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동의보감?은 이와 같은 의학이론상의 혼란상황 극복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띠고 탄생한 서적이다. 이전에 나온 거의 대부분의 의서들이 이 안에 융회관통되어 일목요연한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조차 해내지 못한 것을 한국에서 허준이 해내었다. ?동의보감?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의보감?의 학술적 가치는 의서의 분류·정리에도 있지만, 당시까지 유행한 도교적 양생사상을 의학에 구체적으로 구현하였다는 데에도 의의가 크다. 허준은 집례(集例)에서 “道家는 그 정미로움을 얻었고, 醫家는 그 조잡함을 얻었다(道得其精, 醫得其粗也)”라고 하여 도가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편제에 있어 도가서적 ?황정경(黃庭經)?의 편명인 “내경(內景)”을 사용하였고, “내경(內景)”편의 앞부분을 신형(身形) 정(精) 기(氣) 신(神)의 순서로 구성하여 도가적 색채를 띠게 하였다.

3-7 ?東醫寶鑑?이 후세에 미친 影響

우선, ?동의보감?은 조선 전기에 힘쓴 향약의 보급, 중국 의서의 수집과 편찬 등을 통해 다져진 조선의학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이의 결실을 맺어 한국의학의 醫源으로 자리잡아 이후 국내 임상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후에 조선의학의 변화는 東醫寶鑑에서 미진하였던 痘瘡이나 麻疹등의 분야에 관한 연구 또는 小兒과나 婦人科와 같이 일부분을 특화시키는 쪽으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東醫寶鑑의 방대한 분량을 줄이려는 간이화의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둘째, 의학의 혜택이 백성들에게 고루 돌아가게 하고자 한 의도가 성공하였다. 특히 당시의 발달하고 있던 민간의료의 성장과 더불어 ?동의보감?은 조선의 표준의서로서 역할을 하게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의료혜택이 미치게 되었다. 사실 당시에 의학의 혜택이 일반백성들 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선조대왕의 다음과 같은 교시에서 보듯이 정권차원의 중대한 문제였다.

“궁벽한 시골과 도회지의 후미진 거리에 의약이 없어서 요절하는 자가 많으니, 우리나라에는 향약이 많이 생산되는데도 사람들이 능히 알지 못하니, 마땅히 분류하고 아울러 향명(鄕名)을 기록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여라.”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유교적 민본정치의 실현이라는 유교의 이데올로기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許浚은 편집상에 있어서 이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즉 전문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어려운 작업이 요구되었다. 許浚은 이를 향약명에 한글표기를 하거나 각 문마다 간단한 單方과 針灸법, 熨法등을 附記하였고 병명이나 處方명 또는 本草명이나 針灸穴자리만 알아도 해당 편을 쉽게 찾을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다음의 언급이 이런 사정을 잘 반영한다.

“병든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펴서 눈으로 보면 虛實 輕重 吉凶 死生의 징조가 수면에 물체가 비치듯이 밝아 거의 함부로 치료하여 요절하는 근심이 없게 하고자 한다.”

?동의보감?의 이러한 민본주의적 전통은 이후 의서들에도 영향을 끼쳐 우리의학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에 관하 대표적인 예가 고종때 나온 처방서로써 ?동의보감?을 계승한 ?방약합편(方藥合編)?(1884년 출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이 쓴 醫學책 들 중의 하나가 ?의방활투(醫方活套)?인데 그 내용이 간명하면서도 활용범위는 넓으며 또 체계가 조리있고 명확하여 이 책을 한번 보기만 하면 누구나 병의 증상에 따라 약을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의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책 한권을 구해 두려고 하였지만 인쇄하여 제공되지 못함을 안타까와 하였다.” 이외에도 홍만선(洪萬選: 1664∼1715)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나오는 「구급방(救急方)」의 항목 대부분 ?동의보감?의 원문을 이용하였고, 조선 후기 생활종합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동의보감?의 내용이 보이고,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내의 「보양지(葆養志)」에도 ?동의보감?의 인용문들이 자주 보이는데, 이것은 ?동의보감?이 지방 사대부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어 읽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셋째, ?동의보감?의 출간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향약전통의 쇠퇴다. 조선 초기에 정책적 지원을 받으면서 발전한 향약은 중종 이후로 높아진 명나라 의학의 비중에 눌려오다가 ?동의보감?의 출판에 의해 그 衰退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1633년(인조 11)에 重刊된 ?향약집성방?에 나타난 최명길(崔鳴吉)의 다음과 같은 「발문(跋文)」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증상을 살펴 처방함에 모두 새로 나온 중국처방을 위주로 하고 향약 처방은 마침내 버리고는 사용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동의보감?은 이후 한국 한의학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한국 한의학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東醫寶鑑?이 편찬된 이후로 朝鮮朝에서는 臨床醫書가 대량 출판되었다. 專門醫書를 제외하고도 ?醫門寶鑑? ?濟衆新編? ?醫宗損益? ?方藥合編? ?東醫壽世保元? ?醫鑑重磨? 등 많은 綜合醫書가 나왔다. 물론 ?東醫壽世保元?이나 ?醫鑑重磨? 등은 독특한 自身의 學說을 가지고 冊을 著述하였지만 대부분의 醫書는 ?東醫寶鑑?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다. 즉 ?醫門寶鑑?이나 ?濟衆新編?이 編制, 論述, 선용한 처방도 다르지만 그러나 그 내용을 음미하여 보면 모두 ?東醫寶鑑?의 내용을 축약하였거나 일부를 加減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조 23년(1799)에 강명길(康命吉)이 왕명을 받들어 편술한 ?濟衆新編?을 보면 그 내용은 허준의 ?동의보감?중에서 의방(醫方)들을 발췌하여 풍한(風寒) 서습(暑濕) 조화(燥火)로부터 내상(內傷) 허로(虛勞) 신형(身形) 정(精) 기(氣) 신(神) 혈(血) 몽(夢) 성음(聲音) 언어(言語) 진액(津液) 담음(痰飮) 등 70여목(餘目)에 걸쳐 각목(各目)의 아래에 먼저 맥법(脈法)을 들고, 다음에는 그 목(目)에 해당되는 병증(病證)을 분류하여 각(各) 병설(病說)의 아래에 주로 ?동의보감?에서 상용된 방문(方文)을 채록하였으며, 곳에 따라서는 내의원의 상용약방(常用藥方)들을 “내국(內局)”이라는 이름으로서 기입하였다. 그리고 끝으로는 「양노(養老)」의 편(篇)과 「약성가(藥性歌)」의 일편(一篇)을 신증(新增)하였다. 이 책은 ?동의보감?의 호번함으로 인해 생겨난 비실용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실용적 의서의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들여다 보면 목차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東醫寶鑑을 시대실정에 맞게 일부 개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李濟馬의 ?壽世保元?의 경우에도 引用文이 거의 모두 ?東醫寶鑑?에서 나오고 있고 醫學의 공적을 논하는 단란에서 許浚을 仲景, 朱肱과 더불어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보아 四象醫學의 성립에 있어서조차 東醫寶鑑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은 당시의 東武선생이 다른 醫書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보다도 그 만큼 ?東醫寶鑑?의 醫書引用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조선후기에 東武와 비슷한 시기에 東醫寶鑑을 비판하면서 독특한 醫學체계를 세웠고 지금도 素問학회 등을 통해 영향력이 있는 石谷 李圭晙의 醫鑑重磨의 경우에도 비록 석곡이 朱丹溪의 양유여음부족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東醫寶鑑이 부양사상을 강조하는 素問의 원에 위배된다고 비판하고는 있으나 애초애 책을 쓰게된 동기나 책의 내용이 東醫寶鑑에서 발췌요약 한 것이므로 이 역시 東醫寶鑑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있다. 결국 東醫寶鑑이 성립한 이래 이 땅의 한의사는 그 누구도 東醫寶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4-3 東醫寶鑑이 중국의학에 끼친 영향

4-3-1. 東醫寶鑑의 간행

東醫寶鑑은 출간 이후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는데 최근에 연변 민족의학연구소에 있는 張文宣씨의 연구에 의하면 東醫寶鑑은 명말청초에 중국에 전래된 후 25회 출간 되었고 28가지의 서적과 잡지에서 높은 평가문이 실렸으며 6항목의 정리연구사업이 진행되었다. 이런 사실은 東醫寶鑑이 중국의학발전에 미친 영향이 아주 크고 중국의학계의 높은 찬송과 숭배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이 내용을 살펴보면 영조실록 권 47에 영조 14년인 1738년에 중국에서 사신이 와서 “勅使求東醫寶鑑及淸心丸五十丸 卷髮二束以去”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건륭연간에 이미 東醫寶鑑이 중국에 널리 알려져서 중국에서 오는 사신이 요청한 물품목록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선 시기인 1726년에는 陣夢雷 주편의 고금도서집성 의부전록에 인용서적으로 본서가 나열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위의 두 사실은 東醫寶鑑이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미 중국에 유입되어 널리 전파되었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본서가 중국에 정식으로 유입된 18세기 중엽이후에는 거의 10년에 한번 꼴로 총 25회나 정부당국 및 개인이 출간한 셈이다. 1949년 이후에도 2회에 걸쳐 무려 13750부나 인쇄된 사실로 미루어 본서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4-3-2. 東醫寶鑑에 대한 평가

1) 청 건륭계미년(1763년) 凌魚간본 東醫寶鑑

능어의 서문에는 “동의보감이란 조선 양평군허준이 편찬한 것이다. 그가 말한 동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가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븥인 이름인 것 같다.원래 의에는 동이란 없었다. 옛적에 李東垣이 십서를 저작하고 북의라 하여 江浙에서 행의하였고 朱丹溪가 심법을 저작하고 남의라 하여 關中에서 이름을 날리었다. 양평군은 편벽한 異族나라에 살고 있지만 그가 저작한 책이 華夏에 들어왔으니 언행에는 지역을 제한할 필요가 없다. 그가 말한 寶鑑이란 무엇인가? 햇빛이 조사되니 어두운 곳이 환해지고 皮膚 주름살이 말끔히 보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단 책을 펼치기만하면 일목요연하여 거울처럼 맑다. 옛적에 나천익이 저술한 衛生寶鑑, 龔信이 저술한 古今醫鑑 등도 모두 감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 과대한 것은 아니다. 그 편집내용을 보면 우선 內景篇과 외형편을 설치하고 본말을 따지고 소통시켰으며 그 다음 雜病편에서 증을 변별하였고 끝에 湯液과 針灸편으로 방문을 정하였다. 고인들의 기성법에 따르면서도 醫理를 신통하게 천명하여 예전의 不足한 점을 보충함으로써 사대를 빛내었다. 궁정에 바쳤더니 궁정에서 본 후 나라의 보서로 삼아 秘閣에 보관시켰다. 天下의 보배를 天下에서 함께 나누려는 左君의 인의는 아주 크다.”라고 하였다.

2) 1982년 흑룡강성과학기술출판사에서 출판한 <三百卷醫籍錄> 중에 실린 東醫寶鑑 편에서 출판자의 말에는 “동의寶鑑 가운데는 우리나라에서 산실된 대량의 진귀한 醫藥문헌들이 기재되어 있는바 조국의학을 學習, 提高함에 상당한 참고가치가 있다. 이 책은 임상참고서로 삼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대의학문헌을 연구함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될 자료이다.”

3) 1983년 최수한 씨가 저술하고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中國醫史醫籍述要>에는 “이책은 고금의서를 참작하고 자기의 주견에 따라 내용을 취사하였는데 체재가 정연하고 기재가 상세하고 정확하며 채택한 處方이 아주 風府하고 실용적이며 임상가치와 학술가치가 큰 醫學전서이다. 그는 한국의학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사상에도 중요한 지위를 점한다.”라고 하였다.

4) 1990년 이경위 씨가 저술하고 하북과학기술출판사에서 출판한 <中古代醫學史略>에는 “조선 醫學자 許浚은 東醫寶鑑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한국의학발전사상에 걸출한 공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여러나라의 醫學발전에도 큰 성과가 있었으며 그 영향은 아주 컸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중국역대 간행본이 16종이나 되는데 평균 2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에 한번씩 각인발행된 것으로 보아 중국에 대한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 하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고 썼다.

5) 1974년 대만의 劉伯驥 씨가 저술하고 대북시 華岡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의학사>에는 “동의보감은 李朱醫學派의 의서를 중시하고 고대의 의경과 한국의 고유한 의서들을 종합한 集成이다. 전인들의 것은 내용이 번잡하고 갈래가 복잡하다. 본서는 매개문제마다 탐색연찬하고 세심하게 의리를 밝힘으로써 이해하기 쉽게 하였다. 그 당시의 醫學수준으로서는 획기적인 일대방서이며 醫學의 통합이고 醫學의 大海이다. 許浚은 한국고금의 제일류 명의로서 扁鵲과 비길수 있다. 그는 實證의학자이며 고금의학을 貫通統一하였다. 본서는 조리있고 상세하고 정밀한 바 이조 동의학을 최고봉으로 추진시킨 저작이다.”라고 하였다.

6) 이종형은 陳念祖의 醫學三字經에도 東醫寶鑑이 거명되어있고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우리 동국의 문헌이 중국에서 간행되는 일이 별로 없는데 유독 東醫寶鑑 25권만은 판을 거듭하여 간행되고 있고 그 출판된 것이 너무도 정묘하여 한 본을 사가지고 가려고 하나 매우 고가여서 다만 능어의 서문만을 겨우 베껴 가져올 뿐이다.”라고 하여 본서의 영향을 설명하였다.

7) 한편 신동원은 엄세운의 중국의적통고를 인용하여 東醫寶鑑과 유사한 종합의서중에서 중국에서 자주 발간된 서적의 목록을 제시하며 본서가 중국시장에서 상당히 경쟁력이 있는 의서였음을 입증하였다. 즉, 발간횟수만을 기준으로 할 때 중국에서 東醫寶鑑에 필적할 만한 의서는 千金方(26회), 소침양방(28회), 醫學入門(21회), 萬病回春(26회), 壽世保元(44회), 의관(20회), 의종필독(36회), 의방집해(43회), 탕두가결(28회), 石室秘籙(24회), 醫學心悟(20회), 신질추언(25회), 회생집(23회), 醫學삼자경(25회), 필화의경(26회), 醫林改錯(38회), 험방신편(27회) 등이다. 이중 寶鑑의 출간횟수(25회)보다 많은 것은 고작 10권 남짓하고 20회 이상 출간된 것도 20종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렇게 東醫寶鑑의 인기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술적 인용은 거의 드물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동원은 본서의 경쟁력이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한 것이라기 보다는 기존의론들을 잘 正理하여 임상적인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淸代이후 溫病학의 등장으로 醫學의 관심이 명대 이전과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학술적인 영향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이다.

 

5절. 東醫寶鑑의 영향을 받은 국내의서

5-1. 제중신편과 강명길의 의학사상

5-1-1. 제중신편의 편찬배경

東醫寶鑑이 편찬된지 약 2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제중신편이 나왔는데 당시의 편찬 배경을 발문에 있는 정조의 말을 통해 확인해보자.

“우리나라의 의서중에 오직 許浚의 東醫寶鑑만이 詳悉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문장이 혹은 繁冗(번잡하거나 쓸모가 없다는 의미)하고 말이 간혹 重疊하며 證이 간혹 厥漏하였으며 응요할 만한 處方중에 빠져서 기록되지 않은 것이 많다. 內經에 ‘知其要者一言而終, 不知其要者流散無窮’이라 하였으니 너는 널리 方書를 취하여 번잡한 것을 없애고 그 요점을 취하여서 별도로 하나의 方書를 만들라.”

위와 같이 정조당시에도 東醫寶鑑의 내용이 상세하고 충실하여 국내에서 널리 읽혀졌음을 알 수 있는데 단지 東醫寶鑑의 체계상 중복된 내용이 많았고 시대적으로 東醫寶鑑 이후 200년이 흘러 정조가 보기에 유용한 處方이 간혹 빠진 것이 있었으므로 이를 간략하게 정리한 의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당시 어의로 있던 康命吉에게 새로운 方書를 만들 것을 지시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본서의 범례에도 드러나는데

“ 옛 방문이 비록 많으나 病證을 논한것이 더욱 복잡하여 후에 醫學을 배우는 사람들이 요령을 알지 못하였다. 이제 모든 방문을 취하여 症狀과 맥을 각각분류하였다. 당장에 사용할 處方을 그 아래에 서차로 기록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펼쳐 놓으면 환하게 앟 수있게 하였다.” 위와 같이 이 책은 ?동의보감?의 호번함으로 인해 생겨난 비실용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실용적 의서의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같은 편찬 방향은 東醫寶鑑이후 등장한 조선후기의서들에 대부분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醫門寶鑑>, <廣濟秘芨>, <醫宗損益>, <方藥合編> 등이다. 이 의서들은 하나같이 인용의서로 東醫寶鑑을 가장 주요한 근거로 삼아 이의 不足한 점을 나름대로 보충하고 있는데 제중신편의 경우에는 약 80%이상의 處方이 東醫寶鑑에서 인용한 것이다.또한 당시의 국제정세도 제중신편의 편집방향에 영향을 끼쳤는데 당시 중국은 청나라가 집권한지 150여년이 지난 상태였고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을 오랑캐로 간주하여 적대적인 감정을 지니면서 朝鮮中華主義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에따라 醫學에 있어서도 그 이전까지는 중국과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해왔지만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중국과의 醫學교류가 줄어들고 대신 東醫寶鑑을 중심으로 우리식의 醫學체계를 형성해나가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책의 편찬에 관하여 李秉模는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성상께서 부모의 병을 간호하는 사이에 인민들을 병마에서 구원할 것을 깊이 생각하시고 太醫 康命吉에게 명령하여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의서들을 연구하여 번잡한 것을 빼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면서 선별하고 알맹이를 추려 정연하게 정리하여 편찬함으로써 비록 벽촌의 사람들이라도 이 책만 보면 증상에 따라 약재를 쉽게 구하여 쓸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이 책의 편집에 관하여 ?조선왕조실록?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濟衆新編?은 12월 11일에 성립되었다. 上이 春邸에 있어 10년 동안이나 侍湯을 하던 중에 朝夕으로 脈訣과 藥論을 尋繹하여 醫理를 旁究하여 ?素問? ?難經? 등 歷代諸方을 閱覽하였다. 本朝의 醫書중 오직 許浚의 ?東醫寶鑑?이 가장 詳悉하나, 文繁意疊하며 踈漏가 亦多하다. 上이 內醫院에 명하여 諸方을 博採하며 繁을 芟하고 要를 취하여 간간히 經驗方을 附하여 ?濟衆新編? 8卷 目錄 1권을 編集케 하였는데, 風·寒·暑·濕으로부터 藥性歌에 이르기까지 무릇 70餘目에 달하였다. 每目에 먼저 脈訣 形證을 叙하고 다음에는 用藥의 方을 附하여 遐鄕窮村의 民으로 開卷瞭然케 하였다. 다시 鑄字所에 付하여 鋟板印頒하고 內醫院 都提調 李秉模에게 명하여 序를 짓게 하였다.”(?정조실록? 23년 12월 11일)

위와 같이 본서의 내용은 허준의 ?동의보감?중에서 상용의 의방(醫方)들을 발췌하여 風寒暑濕燥火로부터 내상(內傷) 허로(虛勞) 신형(身形) 정(精) 기(氣) 신(神) 혈(血) 몽(夢) 성음(聲音) 언어(言語) 진액(津液) 담음(痰飮) 등 70여목(餘目)에 걸쳐 각목(各目)의 아래에 먼저 맥법(脈法)을 들고, 다음에는 그 목(目)에 해당되는 병증(病證)을 분류하여 각(各) 병설(病說)의 아래에 주로 ?동의보감?에서 상용된 방문(方文)을 채록하였으며, 곳에 따라서는 내의원의 상용약방(常用藥方)들을 “내국(內局)”이라는 이름으로서 기입하였다. 그리고 끝으로는 「양노(養老)」의 편(篇)과 「약성가(藥性歌)」의 일편(一篇)을 신증(新增)하였다.

5-1-4. 본서의 특징(芟繁補漏)

삼번보루란 이병모의 서문에서 본서의 특징으로 들고있는 말이다. 이는 “번잡한 것을 없애고 빠진 부분을 보충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본서의 특징을 잘 나타낸 말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芟繁

제중신편에서 東醫寶鑑의 내용을 생략한 부분을 살펴보면 經絡생리부분의 생략, 疾病서술의 부분, 診斷부분, 疾病의 분류, 유사症狀, 병리기전, 運氣적인 내용 등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임상에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은 과감히 삭제해버린 것이 본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외에도 針灸편을 거의 삭제하고 단지 30여 곳에서 東醫寶鑑을 요약하고 있으며 單方도 없애고 本草는 약성가로 대신하였다 .이 중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우선 東醫寶鑑의 毛髮門에는 소제목이 ‘髮屬腎’, ‘髮者血之餘’, ‘十二經毛髮多少’, ‘髮眉鬚髥髭各異’, ‘髮眉鬚各有所屬’, ‘婦人無鬚’, ‘宦官無鬚’, ‘鬚髮黃枯’, ‘染白烏鬚髮’, ‘髮宜多櫛’, ‘髮占凶證’ 등 인체에서 모발의 생리, 병리, 臟象, 예후, 診斷 등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있다. 반면 본서는 ‘鬚髮黃枯黃落’이라는 단 1개의 조문을 통해 毛髮의 疾病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2) 補漏

제중신편에서 東醫寶鑑에 없는 내용을 덧붙인 곳에 관해 살펴보면 주로 許浚이 저술하는 과정에서 생긴 誤瀉를 수정하거나 내용상 상충되는 내용들이 나오는 경우 이를 바로잡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외에 新增醫論, 老人處方, 藥性歌 등은 寶鑑에 없는 내용들을 자신의 醫學경험에 따라 새롭게 추가한 부분이다.

(1) 東醫寶鑑의 내용을 補漏한 부분

東醫寶鑑 口舌門 虛火口瘡 조에 나오는 處方은 찬약을 먹어도 낫지 않으면 理中湯(심하면 가 부자), 陰虛면 四物湯加 知母黃栢, 虛火가 위로 뜨는데는 甘草, 乾薑가루를 사용한다.

반면, 제중신편에서는 虛火口瘡을 따로 조를 만들지 않고 口糜에 소속시켜서 설명하고 있는데 寶鑑에는 없는 補中益氣湯加 麥門冬, 五味子라는 處方이 理中湯 뒤에 추가되어 있다 즉, 寶鑑에서는 理中湯만을 제시하고 있는데 강명길은 補中益氣湯 加味가 유효함을 경험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皮門의 陰證發斑조에서는 寶鑑 에서는 활인서를 인용하여 “陰證發斑, 出胸背及手足, 亦稀少而微紅, 若作熱, 投之凉藥, 大誤矣. 此無根失守之火 聚於胸中, 上獨薰肺, 傳於皮膚而爲斑點...중략...宜用調中湯, 升麻鱉甲湯之類 其斑自退[活人書]”라하여 조중탕과 升麻鱉甲湯 처방만을 제시하고 있다. 반면 본서는 “癍出胸腹及手足, 亦稀少微紅 此無根之火 聚胸熏肺 如蚊蚤咬狀虛甚脈沈 身無大熱 理中湯或加附子玄蔘”라하여 寶鑑에 없는 理中湯 加味방을 제시하고 있다. 본서에 인용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醫學入門을 보면 “陰證亦有發斑者 乃相火乘肺 故但出於胸背 手足稀少 脈沈 身無大熱 爲異 宜理中湯 或加附子玄蔘”라하여 제중신편의 원문과 거의 같은 문장이 나와있다.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중신편은 특히 醫學入門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入門의 글을 寶鑑에서 인용하지 않고 직접 인용한 경우가 많고 경우에 따라 寶鑑과 入門의 내용이 다른 경우에는 入門의 입장을 따라 寶鑑을 수정한 경우도 많이 있다. .

(2) 新增臨床經驗

신증경험은 강명길 자신의 임상경험을 밝힌 부분으로 자신의 의론을 피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痎瘧門 六經瘧 조문의 끝에는 신증으로 “大法 瘧初 先瀉後補 以柴芩等藥 淸熱發散 若用蔘附 必久而不愈 間或有老人虛極之症 雖用蔘劑 不可以爲例也”과 같이 저자의 오랜 임상경험상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을 신증이란 형식으로 자신있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東醫寶鑑이후 우리나라 醫學의 발달과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본서의 목차는 주로 東醫寶鑑의 편제를 따르고 있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먼저 東醫寶鑑과 목차순서가 다른 예가 있으니 우선 東醫寶鑑에서 뒤에 편성하였던 六氣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어 外感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內傷, 虛勞를 뒤에 실은 후에 비로소 東醫寶鑑의 內經, 외형편이 나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본서가 東醫寶鑑과 같이 이론이나 醫學체계를 정립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실용성을 강조하였기에 초학자가 쉽게 임상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 內外상을 변별해서 막바로 疾病 治療에 들어갈 수있게 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이는 또한 본서가 병인을 강조하여 목차 편성에서 병인에 따른 분류를 내세워 마치 寶鑑의 雜病총론과 같이 본서 전체의 총론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삼은 것이다. 즉 강명길은 醫學의 기본은 內傷과 外感의 변별에 있다고 보아 각각의 경우에 따라 治法이 달라짐을 강조하기 위해 이와 같은 체계를 택한 것 같다. 물론 寶鑑 이외의 거의 모든 중국의서들이 모두 6기부터 시작하는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한편 寶鑑의 목차 중에서 빠진 부분을 보면 먼저 內景篇에서는 五臟六腑 총론이 없어지고 간, 심, 비, 폐, 신 5개문이 五臟문 하나로 줄었고 膽, 胃, 小腸, 大腸, 膀胱, 三焦 6개 문이 六腑문 한개로 줄었다. 이는 본서가 寶鑑에 비해 臟腑 辨證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외에도 胞門이 內景篇에서 雜病편 婦人문으로 이동되었고 내용에 있어서도 命門에 대한 언급이 없이 바로 婦人의 子宮으로 보고 있다. 이는 寶鑑에서 포를 중시하여 三焦와 대응되는 의미에서 命門이나 丹田의 의미를 지니는 것과는 배치되는 견해이다. 외형편에서는 육, 근, 골 문이 빠져있다. 이는 이 3문의 중요성이 다른 것에 비해 떨어진다고 보아 뺀 것 같은데 이경우 寶鑑에서 원래 강조했던 皮肉맥근골의 5체가 유명무실해지는 문제가 생긴다. 五體는 五臟과도 직접 연결되는데 이를 보면 본서가 五臟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寶鑑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있다. 雜病편의 경우에는 일단 총론에 해당하는 천지운기, 심병, 辨證, 진맥, 용약, 토, 한, 하 등 8개 문이 생략되었고 이어지는 六氣와 內傷 虛勞 부분이 맨 앞으로 이동하였다. 이는 寶鑑 雜病 총론의 내용이 다른 의서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체계이고 또 강명길의 당시에는 어느 정도 일반화된 상태이므로 더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의사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으로 보아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이후의 목차는 寶鑑가 같으나 단지 괴질문이 빠진 것이 다른 점이다. 이는 괴질문의 내용이 괴이하고 특이한 疾病 들만 나열되어 실용적인 가치가 없다고 보아 없앤 것 같다. 한편 婦人문에는 뒤에 胞門이 붙어있고 小兒문에는 寶鑑에서는 小兒문과 痘瘡문을 하나로 붙여 1개 문으로 보았었는데 본서는 痘瘡을 독립시키고 특히 당대에 문제가 심각했던 麻疹을 따로 편을 설정하여 두진문과 麻疹문을 따로 두고 있다. 또한 寶鑑에서는 身形門의 부록으로 있던 老人門을 小兒편의 뒤에 두고 있는데 내용은 寶鑑과 동일하나 단지 새로운 處方을 증보하였다. 이런 사정은 범례에도 나타나는데 “노인의 병은 小壯과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증보하였다.”라고 하여 老人병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寶鑑에서는 身形문 뒤에 老人을 배열하였고 본서는 小兒문뒤에 老人을 배열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寶鑑의 身形문은 寶鑑전체를 포괄하는 총론에 해당하여 인체의 생성에서부터 生長, 발육, 생식, 養生, 노화 등을 담고 있으므로 노화의 자연스런 단계로 老人을 상정하여 身形문의 부록으로 老人을 덧붙여 놓은 것이니 內經, 외형, 雜病, 湯液, 針灸등 寶鑑 전편에 걸쳐 老人을 같이 고려해보라는 의미로도 볼 수있다. 반면 본서에서는 身形문의 내용을 대폭 줄여서 단지 양성연년약을 위주로 治療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있다. 때문에 虛勞문의 뒤에 身形문을 위치시켜 虛勞로 인한 疾病이라는 관점에서 身形문을 바라본다. 이 때문에 老人병의 治法은 身形문에서 제시하고 있지만 老人의 생리와 병리 등의 특징을 여기에 두기에는 문제가 생기므로 男女와 노소의 대대적

관점에서 小兒와 대칭된다고 보아 小兒문의 뒤에 老人문을 따로 편성한 것이다.

또한 寶鑑의 湯液과 針灸편은 본서에서는 아예 삭제하였는데 이는 寶鑑이후 醫學의 발전상황과 직접연결된다. 우선 針灸서의 경우에는 寶鑑이후에 17-8세기에 조선 針灸學이 괄목할 발전을 보이고 전문서적도 많이 출판되어 더 이상 종합의서에 針灸를 같이 편성하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針灸의는 일반한의와 명확한 역할 구분이 있어서 處方을 쓰는 의사와 針灸의 간에는 상호간에 영역을 존중해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때문에 寶鑑이후의 종합의서에서 針灸편을 따로 설정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本草학의 경우에는 寶鑑이전에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주로 證類本草의 영향이 컸는데 단지 이 책의 내용이 너무 호번하고 여러의가의 견해를 한데모아 일관성이 적은 관계로 각 유파마다 本草를 이해하는 관점이 약간 씩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本草라 하면 證類本草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롤 큰 영향을 끼쳤고 東醫寶鑑에서도 본서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寶鑑과 거의 같은 시기에 중국에서는 이시진의 本草綱目이 출간되어 당시의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이후 本草학의 발전은 本草綱目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즉, 더 이상의 本草 내용의 확장은 이제 무의미해지고 綱目의 내용을 요약하여 실용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本草 연구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었다. 이 중에서 특기할만한 내용은 국내의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龔廷賢의 萬病回春과 壽世保元에서 本草를 암기와 실용에 편리하게 약성가의 형태로 만들어 임상에 활용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국내의서들은 제중신편이래 龔廷賢의 약성가를 받아들여 本草를 약성가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즉, 寶鑑식의 本草 나열은 백과사전의 기능은 있을지 몰라도 막상 임상을 하는데는 호번하고 답답하게 느껴졌을 터이므로 약성가의 형태로 미리 암기하고 있으면 임상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본서는 龔廷賢의 영향으로 약성가를 인용하고 자신이 새로만든 약성가를 83수 더하여 本草편을 약성가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강명길의 약성가는 龔廷賢과 같이 4언 4구 16자로 되어 중국식을 유지한 반면 나중에 나오는 의종손익의 황도연은 7언 절구로 바꿔서 우리민족의 운율에 맞게 하였다.

 

5-2. 의종손익과 황도연의 의학사상

5-2-1. 黃度淵(惠庵)의 生涯

黃度淵의 號는 惠庵이요, 本官은 慶南 昌原이다. 昌原 黃氏 侍中公派 18世孫으로 1807年(純祖 7)에 경남 창원에서 출생하였다. 哲宗때부터 高宗初期까지 서울 武橋洞에서 의업을 경영하여 성명을 떨쳤다.

그는 醫務에 종사하면서 당시 우리나라에서 많이 實用되던 ?東醫寶鑑?의 浩繁함과 未備함을 集約補完하여 간명한 체계의 醫書를 편집코저 하였다. 그 결과 서기 1855年(哲宗 6)에 ?附方便覽? 28卷, 1868年(高宗 5)에는 ?醫宗損益? 12卷과 ?醫宗損益附餘?(本草) 1卷을 編成하였으며, 그 翼年에는 다시 ?醫方活套? 1卷을 刊行하였다. 그 이후 이미 年老하고 기력이 衰함에 스스로 抄錄을 할 수 없어 그의 아들인 泌秀에게 序例를 전하여 王忍庵의 ?本草備要?와 ?醫方集解?를 合編한 法을 模倣하여 ?醫方活套?에 ?損益本草?를 合하고 다시 「用藥綱領」과 「救急」, 「禁忌」 등 十數種을 補充하여 ?方藥合編?이라 命名하고 編輯케 하던 중 그 著役이 절반도 채 못되어 惠菴이 1884年(高宗 21) 8月17日 卒함에 享年 77才였다.

이에 泌秀가 父親의 有志를 繼承하여 父의 死亡後 약 4개월후인 1884年(高宗 21)12月 上旬에 編輯을 끝내고 出刊하였다.

5-2-2. 황도연의 저서

(1) 附方便覽(14책 28권, 1855년)

본서는 東醫寶鑑을 기준으로 각병증에 따라 유용한 治療방만을 발췌하고 處方의 본촞거 지식은 청 蔡繭濟의 <本草針線>을 첨부하여 處方과 本草를 합하여 疾病치료에 용이하게 할수있도록하였다.

(2) 醫宗損益(6책 12권, 1868년)

본서는 부방편람을 보다 용이하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근본적으로 손익개정하여 권수를 축소시킨 것으로 당시에 가장 인기높은 醫學전서의 하나였다.

본서는 醫學의 간명성과 실용성을 지향하여 東醫寶鑑의 방대한 내용을 축소시키고 여기에 제중신편 등의 국내의서와 景岳全書 등의 중국의서들을 폭넓게 수용하였고 부록으로 약성가를 덧붙여 本草지식을 확산시켰다. 이를 醫宗損益附餘(1권)이라고 하는데 주로 萬病回春의 약성가를 인용하여 아래에 향명을 붙여 참고에 편하게 하였다.

(3) 醫方活套(1책, 1869년)

본서는 의종손익에서 핵심문자만 추출하여 응급과 암기에 편리하도록 편집한 것으로 上統(補益), 中統(和解), 下統(攻伐) 의 삼단으로 분류하여 處方내용을 표시하고 處方아래에 일련번호를 붙여 색인에 편리하도록하였다. 즉, 본서는 대증치료에 중점을 두고 편의성을 도모한 실용적인 方書라 하겠다. 나중에 본서를 바탕으로 방약합편이 나오게 된다.

 

5-2-4. 방약합편을 통해 살펴본 황도연의 醫學사상

1) 방약합편의 편성경위

황도연의 나이 78세로 이미 연로하고 氣力이 쇠진하여 스스로 채록을 할수없어 아들인 泌秀에게 書例를 전하여 청 왕인암의 <本草備要>와 <醫方集解>를 합편한 방식과 같은 방법을 본 따서 상,중,하 삼통의 <醫方活套>에 <損益本草>를 합하고 다시 ‘用藥綱領’, ‘救急’, ‘禁忌’ 등 수십종을 보충하여 <方藥合編>이라 이름하고 1884년(고종 21년) 12월 상순에 편집을 끝내고 출간하니 이것이 본서의 원서가 된다. 이후 오늘까지 수십종의 판본이 증보 출간되었으니 가히 韓醫學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 할만하다.

 

본서의 가장 큰 특징은 <의방활투>보다 가일층 평이화되어 간이의학의 극치에 달하였다 할 수있다. 따라서 醫學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醫學의 근본지식이나 診斷 등 여러면으로 不足한 점이 있더라도 병의 症狀만 알면 간단히 증에 맞추어 투약을 할수있으니 그 실용성에 있어서 당시 실정에 꼭 부합하는 의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혜암은 方藥合編原序에서 “초보자는 例方에서 뽑아 쓰기가 어렵기에 방문을 분류한 다음 이를 3계통으로 나누어 補益, 和解, 攻伐의 세가지 품성을 알게하고 별도로 운용법을 달아서 배우는 이가 책을 펴보면 다 治療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비록 옛사람이 전한 것은 아니나 역시 對症投藥의 일례는 될 것이니 이대로 따라 갖가지로 널리 응용하는 길을 추구하면 醫門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하여 본서의 대상이 의문에 入門하지 못한 醫學의 초보자를 위한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2) 책의 구성과 내용

본서에 인용된 處方은 醫宗損益에서 인용된 것으로 이중 東醫寶鑑에서 인용한 경우는 ‘寶’라고 명기하고 기타 의서에서 인용한 경우에는 ‘益’이라고 명기하였다. 대개 익이라 쓴 處方은 주로 景岳全書의 處方이다. 한편 손익본초의 내용은 총 514종인데 초목에서 금석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배열하여 찾기 쉽게 하고 4언으로 구성된 萬病回春의 약성가를 암송에 더욱 편리하게 하기 위해 노래용인 7언 절구로 만들었다. 특히 향약이 아닌 외국산 藥劑는 음각으로 처리하여 구분이 쉽게 하였다.

 

5-2-5. 황도연의 醫學사상

以上의 내용들을 볼 때 惠菴의 醫學的 立論을 다음 몇가지로 要約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理論이 廣範하면 산만해져서 宗旨를 喪失하기 쉬우므로 理論을 集約하여 그 核心을 把握하자는 것이다.

둘째로 書籍은 浩繁하면 論理를 集約시키기 어려울 것이므로 眞髓를 拔萃하여 編著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東洋醫學은 原典을 重要視한다. 그러나 거기에 收錄된 내용이 오늘의 현실과 완전히 부합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原典을 理解함에는 반드시 著書의 時代的 背景과 聯關하여 그 原理를 파악하지 않으면 정확한 理解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疾病 자체가 古代와는 많이 變化로 상이해졌으니 이와 같은 여건의 變化에 따라 醫學의 내용도 淘汰되고 부단히 變하며 發展되어가야 한다는 ‘宜於時 適於用’의 論說, 즉 醫學은 時宜에 適合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배경하에 혜암은 東醫寶鑑을 중심으로 제중신편 등 우리민족 전통의 의서들을 모두 총합한 바탕위에 淸代 말까지의 중국의서들을 집대성하여 무려 100종이 넘는 방대한 의서들을 정리하고 이중 우리실정에 맞는 내용들만을 엄선하여 하나의 책으로 엮었으니 이것이 바로 의종손익이오, 醫學에 入門하지 못한 초보자들을 위해 또다시 이를 간단히 하여 드디어 간이의학의 극치인 방약합편을 저술하여 도탄에 빠져있던 당시 민중들에게 광범한 의료혜택을 입혔으니 그 공이 가히 적지않다 할것이다. 그러나 한의계에서는 단지 그의 醫學사상중 방약합편이라는 극히 일부분만을 보고 韓醫學을 대증투약에 불과한 증치의학으로 퇴보시켰다고 폄하하거나 간이의학의 장점만을 들어 추켜세우기 일쑤이다. 필자는 이런 양 견해는 모두 황도연의 醫學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단면만을 보고 침소봉대한 것으로 본다. 즉, 황도연 醫學사상의 핵심은 의종손익에 담겨있는데 의종손익은 당시까지 내려오던 東醫寶鑑의 전통을 잘 계승한 위에 景岳全書를 중심으로 중국 온보학파의 입장을 절충하고 溫病이나 麻疹등에 관한 당대의 新知見까지 모두 아우른 방대하고 치밀한 醫學체계를 갖춘 우리의학사상 보기드문 거인이다. 즉, 동의보감이 丹溪의 학설을 중심으로 명대 中氣까지의 醫學을 집대성하였다면 의종손익은 靑黛후기까지의 醫學을 寶鑑과 경악을 중심으로 집대성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 寶鑑의 독특한 醫學체계가 단순화되고 대상관에 있어서도 男女노소는 잘 살렸으나 비수흑백론은 많이 누락되어 形色을 중시하는 寶鑑의 특징과 五臟변증을 중시하는 전통이 단절된 것은 婦人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신 경악의 寒熱허실음양표리를 강조하는 8강 辨證이 강조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체질론에 있어서도 혜암이 체질을 무시하진 않았으나 그 내용이 경악류의 虛實위주의 분류로 이는 증치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형상을 중시하는 寶鑑의 체질이론과는 내용에서 차이가 난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상한에서 形證의 개념이 빠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때문에 혜암은 形色을 대신하기위해 맥을 강조하게 되어 맥문의 내용이 寶鑑에 비해 강화되었다.

한편 방약합편에 대한 평가는 韓醫學史上 醫學理論에 대한 論爭보다는 臨床治療面에 중점을 두었던 醫學史的 特徵이 서구문명의 유입과 외세의 침략 등 혼란과 전환의 와중에 처하였던 사회적 분위기와 결합하여 창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背景속에서 著述된 ?方藥合編?은 새로이 도입된 西洋醫學에 對應하여 방대하고 추상적인 韓醫學을 보다 簡易하게 하고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여 시대적 조류에 맞추면서 韓醫學의 대중화에 큰 일익을 담당하였다.

 

3. 결론

필자는 지금까지 東醫寶鑑에 대해 그 성립배경을 중심으로 의사학적인 고찰을 시도해 보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조선전기의 정치와 사회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초기에는 진취적으로 새로운 유교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관학위주로 발달하다가 점차 보수화 되었고(훈구파)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원을 배경으로 한 사림들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회분위기는 불교나 도교 등 이단사상을 배척하긴 했으나 실용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었고 이황이나 이이 등의 성리학 연구가 심화되면서 점차 養生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는 조선사회의 독특한 면이었다. 물론 유학자들에게 있어서 養生은 眞元지기보다는 호연지기를 기르는 수심양성이 위주였지만 당시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養生사상은 친숙한 존재였다.

2. 당시 중국의 醫學상황은 선조임금이

?요즘 중국의 의서들을 보니 모두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로 볼만한 것이 없도다. 여러 가지 의서들을 모아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위와 같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金元四大家의 학설이 서로 혼재하여 몹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즉, 內經이래 仲景이 傷寒論에서 六經辨證체계를 확립하였지만 당송대에는 주로 處方을 이용하는데 급급하여 內經의 이치를 밝히지 못했다. 이후 금원대에 와서 비로소 學派가 생기고 이론이 발달하여 화열의 병리는 河間이, 內傷은 東垣이, 雜病은 丹溪가 각기 밝혀놓았으나 서로 長短점이 있고 각기 문호를 내세우니 醫學의 혼란상이 심각하였다. 다행히 명대에 들어 丹溪학파를 중심으로 醫學의 체계를 잡으려는 시도들이 있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긴 했으나 여전히 확실한 통합을 못하던 상태였다. 또한 內經에서 잘 발달되었던 養生위주의 근본을 중시하는 醫學은 어느덧 후퇴하고 治療위주의 기술적 醫學이 流行하여 조선의 사대부들에겐 이것이 더욱 큰 불만이었다.

3. 국내의 상황은 조선전기 세종대왕의 빛나는 업적에 힘입어 고려이래 지속적인 발전을 보이던 향약론을 집대성하여 향약집성방을 완성하였고 이후 명대 초기까지의 의서들을 집대성하여 당시로선 세계최대규모의 醫學백과전서인 의방유취를 완성하여 우리의학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후 선조 때의 명의인 양예수가 국내 최초의 개인 종합의서인 의림촬요를 완성하여 우리의학과 의사의 수준을 과시하였다.

4. 실직적으로 東醫寶鑑을 완성한 許浚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료가 빈약하여 제대로 알 수 없었으나 최근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許浚의 가계와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졌다. 許浚은 비교적 유복한 집안의 서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훗날 그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단번에 내의원 행정직 중 두 번째로 고위직인 첨정(종4품)까지 오를 수 있던 배경이다.

5. 東醫寶鑑의 가장 큰 특징인 養生위주의 도교사상을 醫學체계로 끌고 올수 있었던 배경은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삼교회통적인 사조의 영향과 조선초기부터 이어져온 사대부들의 養生중시의 풍조가 한 몫을 했고 결정적으로는 선조임금의 교시에 修養을 위주로 할 것을 명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內經이 원래 도교적인 養生사상과 醫學의 전통을 훌륭히 보여 주고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6. 東醫寶鑑의 사상적 배경이 養生위주의 도교사상이면 醫學적인 배경은 丹溪학파의 醫學체계였다. 許浚은 內經을 위주로 상한과 온서 內傷을 아우르고 여기에 氣血담화론을 통해 雜病에 이르기까지 醫學의 체계를 완성한 丹溪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는 東醫寶鑑의 의사학적 시각과 전편에 흐르는 사유를 고찰해보면 쉽게 알 수있다.

7. 그러나 許浚은 疾病치료위주의 醫學적인 전통만으로는 무언가 不足함을 느껴 인간을 중심으로한 몸 중심의 새로운 醫學체계를 구상하였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도교사상에서 강조하던 養生을 틀로 삼고 여기에 세부적인 醫學적 내용들을 內經을 위주로 최신의 治療법을 첨가하여 이론과 임상 양자에 걸쳐 치밀하게 덧붙이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더구나 그가 인용한 서적이 무려 240 여종에 이르고 극히 전문적인 내용에서부터 일반 백성들도 쉽게 알 수있는 간단한 處方에 이르기까지 전문성과 실용성을 겸비하였다. 또한 자신의 수 십년 간의 임상 경험을 통해 우리 백성들에게 실효성 있는 處方만을 엄선하여 지금까지도 임상가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8. 東醫寶鑑의 출간의의는 한마디로 말해 韓醫學의 성립에 있으며 본서가 성립된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醫學을 얘기할 수 있다. 이후 국내의학은 東醫寶鑑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東醫寶鑑을 간이화하거나 시대상황에 맞게 새롭게 손질하여 중국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본서는 중국이나 일본, 대만에서조차 널리 애용되어 역사상 우리 나라 사람의 저작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서적이 되었다. 지난 역사를 통 털어 우리 나라에서 許浚만큼 유명한 의사는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東醫寶鑑 만큼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의서도 역시 전무후무하다.

9. 그러나 우리가 오늘에도 東醫寶鑑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본서가 단지 역사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까지도 다양하고 風府한 이론과 뛰어난 治療효과가 있었기에 남북을 막론하고 韓醫學의 가장 중요한 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비록 한의계 일부에선 東醫寶鑑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부류도 있으나 대개는 무지의 所致이다. 오히려 지나간 醫學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우리 나라에서 東醫寶鑑을 능가할 서적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고 만약 나온다면 그 책은 분명히 東醫寶鑑을 철저히 이해한바탕 위에서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고 東醫寶鑑이 不足한 부분들을 채워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마치 중국의학자들이 역사의 격변기마다 內經이나 傷寒論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다른 관점에서 활로를 모색해온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있어 東醫寶鑑은 중국의 內經과 傷寒論을 합친 것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본고를 끝맺으면서 결론적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제 우리 韓醫學이 나아갈 길은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한시바삐 東醫寶鑑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길 그 길만이 우리의 나아갈 길이다. 물론 그 전제는 본 서및 본서의 사상적 醫學적 배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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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의보감 서문  

의사들은 늘 황제(黃帝)와 기백(岐伯)에 대하여 말한다. 황제와 기백은 위로는 천기(天紀)에 정통하고 아래로는 사람의 도리[人理]를 지극히 하였다. 그들이 책쓰기를 즐겨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묻고 대답하여 어려운 문제를 해명(解明)하는 식으로 써서 후대(後代)에 전하였으니 의서가 나온 지는 이미 오래라고 말할 수 있다. 멀리는 태창공(太倉公)과 진월인(秦越人)으로부터 가까이는 유하간(劉河間), 장자화(張子和), 주단계(朱丹溪), 이동원(李東垣)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의학자(醫學者)들이 연이어 나왔으나, 논설이 분분하고 경전의 일부분을 표절하여 각기 다투어 자기의 학파를 내세웠다. 그래서 의서는 점점 더 많아졌으나 의술은 더욱 더 애매해져서 『영추(靈樞)』의 본뜻과 어긋나는 것들이 적지않게 되었다. 세상의 평범한 의사들은 깊은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혹 『내경(內經)』의 말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처방을 쓰거나 혹은 옛날 방법에만 집착하여 변통(變通)해서 쓸 줄을 몰랐다. 따라서 판단이 어둡고 핵심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이는 일이 많았다.  

우리 선종대왕(宣宗大王)께서는 몸을 다스리는 방법[理身之法]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시려는 어진 마음에서 의학에 관심을 두고 백성들이 병으로 앓는 것을 근심하시었다. 일찌기 병신년(1596년)에는 태의(太醫)로 있던 허준(許浚)을 불러 다음과 같이 하교하셨다.

?요즘 중국의 의서들을 보니 모두 보잘 것이 없는 초록(抄錄)들로 볼만한 것이 없도다. 여러 가지 의서들을 모아 좋은 의학책을 하나 편찬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사람의 병은 다 몸을 잘 조섭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므로 수양(修養)법을 먼저 쓰고 약석(藥石)은 그 다음에 쓸 것이며 또 여러 가지 방서들이 번잡(煩雜)하므로 되도록 그 요점만을 추려야 할 것이다. 산간벽지에는 의사와 약이 없어서 요절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향약(鄕藥)이 많이 나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이를 분류하고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鄕名]도 같이 써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라.?

허준(許浚)이 물러나와 유의(儒醫) 정작(鄭 )과 태의(太醫) 양례수(楊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례남(鄭禮男) 등과 함께 편집국(編輯局)을 설치하고 책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대략적인 체계를 세웠을 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만나 의사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편찬이 중단되었다. 그 후 선종대왕께서 또 허준에게 혼자서 편찬하라고 하교하시고는 내장고(內藏庫)에서 의서 500여 권을 내주시면서 참고하도록 하셨다. 이 책의 편찬이 아직 절반도 못되어 선종대왕께서 승하하셨다.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경술년(庚戌年, 1610년)에 비로소 허준이 일을 끝내고 책을 진상하니 이름을 『동의보감(東醫寶鑑)』이라 하여 모두 25권이었다.

성상께서 보시고 가상히 여겨 하교하시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은 일찍이 선왕께 의학책을 편찬하라는 특명을 받고 여러해 동안 깊이 연구하였다. 심지어는 옥중과 유배살이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일을 포기하지 않고 이제 마침내 책을 완성하여 올렸다. 생각하면 선왕께서 편찬할 것을 명하신 책이 어리석은 과인이 즉위한 후에야 완성되었으니 비감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라고 하시면서 허준에게 좋은 말 한 필을 주시면서 노고를 치하하셨다. 그리고 급히 내의원(內醫院)에 명령하여 출판청(出版廳)을 설치하고 인쇄하여 국내외에 널리 배포하라고 하셨다. 또 제조(提調)로 있던 이정구(李廷龜)에게 서문(序文)을 써서 책머리에 싣도록 명령하셨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태화(太和)가 한번 흩어지고 6기가 조화롭지 못하면 온갖 질병이 번갈아 생겨서 백성들이 화(禍)를 입게 되는데 의약(醫藥)으로 죽어 가는 환자[夭死]를 구원(救援)하는 것은 실로 제왕(帝王)이 인정(仁政)을 베푸는데 있어 급선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의술(醫術)은 책이 아니면 기재할 수 없으며 책은 잘 선택하지 않으면 정밀하게 쓸 수 없고 폭 넓게 수집하지 않으면 그 이치(理致)가 명료하지 못하며 널리 배포하지 않으면 혜택이 널리 베풀어지지 못한다.

이 책은 고금(古今) 의서들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였고 많은 이론들을 절충하여 근본을 찾고 근원을 궁구하여 강령(綱領)을 세우고 요점을 제시하였다. 상세하면서도 간결하며 간결하면서도 빠진 것이 없다. 내경(內景)과 외형(外形) 으로부터 시작하여 잡병(雜病), 제방(諸方)으로 나누고 맥결(脈訣), 증론(症論), 약성(藥性), 치법(治法), 섭양요의(攝養要義), 침석제규(鍼石諸規)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갖추었고 조리가 정연하여 문란한 것이 없다. 따라서 환자의 증상이 비록 천백(千百)가지라 할지라도 치료에서 보사(補瀉)와 완급(緩急)이 두루 응하여 모두 적절하게 응용되도록 써놓았다. 구태여 옛날 고전(古典)이나 근래의 여러 학설을 광범히 참고하지 않아도 병목(病目)에 따라 처방을 찾으면 여러 가지 이론이 여러번 겹쳐 나오게 되어있어 증상에 따라서 약을 쓰면 부절과 같이 꼭 들어맞는다. 진실로 의가(醫家)의 보배로운 거울이며 백성들을 구원하는 좋은 법[濟世良法]이다.

이는 모두 선왕께서 가르쳐 주신 묘책이고 성상꼐서 계승하신 높은 뜻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을 아끼는 덕[仁民愛物之德]과 이용후생의 도[利用厚生之道]가 앞뒤로 한결같아서 중화위육(中和位育)의 다스리는 법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논어>에서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마음을 쓰면 그 혜택이 널리 미친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믿을 만하다.

 

만력(萬曆) 39년 신해년(辛亥年=광해군 3년 1611년) 4월에 숭록대부(崇祿大夫) 행이조판서(行吏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춘추관(知經筵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인 신(臣) 이정구(李廷龜) 교지를 받들어 삼가 서문(序文)을 쓴다.

만력 41년 (광해군 5년, 1613년) 11월 내의원 봉교(奉敎) 간행

감교관(監校官) :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내의원(行內醫院) 직장(直長) 이희헌(李希憲)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내의원(行內醫院) 부봉사(副奉事) 윤지미(尹知微)

 

동의보감 집례(東醫寶鑑集例)

(어의충근정량호(御醫忠勤貞亮扈) 성공신종록대부(聖功臣崇祿大夫) 양평군(陽平君) 신 허준(臣許浚)이 하교(下敎)를 받들어 지음)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인체의 구성은 안으로 5장 6부(五臟六腑)가 있고, 밖으로 근골(筋骨), 기육(肌肉), 혈맥(血脈), 피부(皮膚)가 있어서 그 형태를 이루지만 정(精), 기(氣), 신(神) 또한 장부(臟腑)와 백체(百體)의 주(主)가 됩니다. 그러므로 도가(道家)의 삼요(三要)와 석씨(釋氏=불가)의 사대(四大)가 다 이것을 일컫는 것입니다. 『황정경(黃庭經)』에도 내경(內景)에 관한 글(文) 이 있고, 의서에도 역시 『내외경상지도(內外境象之圖)』가 있습니다. 그런데 도가는 청정수양(淸靜修養)을 근본으로 삼고, 의가는 약이(藥餌)나 침구(鍼灸)로써 치료의 수단으로 삼았으니, 이는 도가가 그 정미로움[精]을 얻은 것이요, 의가는 그 거친 것[粗]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옛사람들의 처방(藥方)은 거기에 들어가는 약재의 양과 종류가 지나치게 많아서 졸지에 갖추어 쓰기에는 어렵습니다. 더우기 <국방(局方)>에서는 일제(一劑)의 수(數)가 더욱 많으니 빈한(貧寒)한 집에서 어찌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득효방(得效方)』과 『의학정전(醫學正傳)』에는 모두 5전(五錢)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이는 심히 터무니없는 일로써 대개 한 처방에 그저 4, 5종이면 5전도 가능하겠지만, 약의 종류가 20-30종에 이른다면 한가지 약재(一材)가 겨우 1, 2분중(分重) 밖에 못 들어가므로 함량(性味)이 적어서 어찌 효과를 바랄 수 있겠읍니까? 근래에 나온 『고금의감(古今醫鑑)』과 『만병회춘(萬病回春)』에는 약 1첩의 분량을 7, 8전 혹은 1냥까지로 하였는데, 이것은 약미(藥味)가 완전히 드러나고 다과(多寡)가 알맞아서 금세인(今世人)의 기품(氣稟)에 합당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모두 이 표준에 따라 1첩을 만들어 제용(劑用)에 편리하게 쓰도록 하였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술을 배우려면 먼저 본초학(本草學)을 읽어서 약성(藥性)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본초(本草)는 활번(活繁)하고, 제가(諸家)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이 알지 못할 약재가 그 반이나 됩니다. 따라서 지금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을 가려 뽑아야 하는데 신농본경(神農本經, 본초) 및 일화자주(日華子註)와 동원(東垣) 단계(丹溪)의 요어(要語)에 실린 것만을 기재했습니다. 또한 당약(唐藥)과 향약(鄕藥)을 같이 실었는데 향약(鄕藥)인 경우에는 향명(鄕名)과 더불어 산지(産地), 채취시기, 건조법[陰陽乾正]등도 실어 사용에 용이하게 하였으며 멀리서 구해 온다거나 구하기가 어려운 폐단이 없도록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