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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

by 이덕휴-dhleepaul 2018. 8. 13.




BlueDays2009.04.20 07:57
퍼온글(출처: http://www.jk.ne.kr/main-01.htm 김영민 교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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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론(5)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 한 문장만 새겨보고 여겨들어도 공부의 벼리를 휘어잡을 수 있을 테다.


물론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데카르트)는 식상한 말처럼 인간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존재(ens cogitans)'다. 무념무상이 대체로 공염불에 빠지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또 다른 공상으로 미끄러질 때, 생각하기와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생각 사이의 사이길을 뚫어내기란 실로 어렵다. (내 지론을 서둘러 반복하면, 생각의 바깥은 역시 생활양식의 충실성을 통해서 드러날 뿐이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다(學而不思卽罔)'(논어)는 격언을 우리는 여태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면 씨알이 되고, 생각을 못하면 죽정이!'라고 절규하시면서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는 국훈(國訓)을 남겨주시기도 했다. '쯧쯔, 저 놈, 도무지 생각이 없어!'라고 하시던 이런저런 어르신들의 추억도 여전하다. 옛날, 아주 옛날, 내가 속했던 핸드볼 팀의 코치는 우리들을 개잡듯이 패면서 '이 x탱구리들아, 생각 좀 해라 생각!'이라고 시합에서 질 때마다 볼멘 소리를 내뱉곤 했다. 미국에서 만난 영리한 초등학교 교사 헤이즐은 그녀의 학생들을 향해서, '말하면서 생각을 해요!(Think as you speak!)'라고 버릇처럼 외쳐댔다.


이 모든 삽화 속에 등장하는 '생각'이란 한결같이 긍정적인 무엇으로 제시된다. 데카르트주의의 통속적인 변명처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긍지에 부합하는 활동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잘라 말해서 공부하는 인간이 그리 많지 않듯이, 생각이 곧 공부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라면 장삼이사 그 누구나의 것일 뿐 아니라 필부필부라면 오히려 멈출 수도 없을 지경으로 늘 과잉하지만, '공부'는 그처럼 값싸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그것은 해방적 '상상'의 근기가 '공상'의 백일몽적 변덕과 그 근본에서 다른 차원의 활동이라는 사실에 조응한다. 현명한 선인들은 ‘어디 가든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非往而無工夫)’며 아마추어들을 유혹하지만 오히려 눈여겨 살펴야 할 대목은 그들이 남모르게 치른 비용이다.


한 때 내가 있던 대학에서는 유달리 만학도(晩學徒)가 많았는데, 그 중의 일부는 철학-공부를 자신들의 나이와 경력과 고민('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의 바벨탑은 공부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 대체, '생각'이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경탄해 마지 않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한 토막을 인용해서 살펴보자: "평소에 나는 금방 자려고 하는 대신, 지나간 옛날 우리집의 생활, 꽁브레의 왕고모 댁에서, 발베끄, 빠리, 동시에르에서 베네치아, 또는 그 밖의 고장에서 보낸 생활을 회상하거나 그러한 장소,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해서 보고 들은 일 따위를 머릿속에 그리며, 밤의 대부분을 지새우곤 한다."(<스완네집 쪽으로>) 이 작품에 대한 은하수같은 상찬과는 별도로, 꼭 이런 짓---"..따위를 머릿속에 그리며, 밤의 대부분을 지새우곤" 하는 짓---을 일러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간 이런 식으로 자기-생각에 빠지는 짓을 일러 '자서전적 태도'라고 불러왔는데, 그 요체만을 지적하면 자기동일성을 심리적으로 강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생각' 따위를 일삼지 말라는 게 또한 순자(荀子)의 말씀이다. 요컨대,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 박혀 생각만 하느니 다 쓸 데 없고 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는 게 낫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험하다(思而不學則殆)'는 말인데, 이 위험이란 곧 자기-생각을 '자연화'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자기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혹은 (괴델을 원용해서 말하자면) 그 생각의 일부로써 그 생각의 틀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쳐서 자빠지는 일이다. 혹은 내 '생각'만으로는 영영 너의 '사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래서 내 생각의 막(膜)을 찢고 나가는 모종의 실천적 근기가 없이 들먹이는 관념적 상호소통의 이상이 종종 공소하다는 사실을 느리지만 지며리 깨쳐가는 과정들이다.


문제는, 자기-생각이라는 게 워낙 타인을 배제하는 속성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실은 생각이 적어서 공부가 모자란 것이 아니다. 실없이 생각이 많은 데다 결국 그 생각의 틀 자체가 완고한 테두리를 이루는 게 오히려 결정적인 문제다. 이 경우에 전형적인 증상은 냉소와 허영이다. 냉소와 허영이란 타인들이 얼마나 깊고 크게 자신의 존재에 구성적으로 관여하는 지를 깨닫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이 나/너(주/객)의 인식론적 이분법을 비판하고 둘 사이의 구성적 연루를 밝혀 온 것에 귀기울여 볼 노릇이다.


생각은 그 외래적 기원을 잊고 무서울 정도로 자기자신만을 돌아본다. 그리고 그 잡다한 생각의 다발들로 테두리를 짓고 벽을 쌓아 올리며 일희일비하는 것이다. 일찍이 하우저(Arnold Hauser)는 '심리학은 은폐되고 불철저한 사회학'이라고 갈파하기도 했지만, 좋은 심리학은 늘 심리의 바깥에서 조언을 구하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나의 모든 생각이 애초에 그 생각의 바깥에서 움터왔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일과 같다. 공부도 조직적인 생각이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생각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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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글을 읽고 많이 찔렸었다. 아니, 사실 무릎을 치며 주변 사람을 떠올렸다.  치밀하지 못한 생각이 완고한 테두리를 이루고, 타인을 공부와 삶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원딩들. 그러나 나도 그들중 하나이다. ㅡ.ㅡ OTL   (진한 부분은 본인이 강조한 것임)
Posted by YojefF




출처: http://altravolta.tistory.com/entry/닥치고-텍스트를-보라?category=192990 [Altra Vol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