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베드로전서 5장 8∼9절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삶의 모든 면에서 도전을 받고 그에 대하여 응전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끝없는 투쟁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연구에서 문명의 성장은 계속되는 도전에 성공적 응전으로 이루어지며 이것은 역사 및 한 개인 발전에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황하문명은 도전과 응전의 살아있는 역사적 교훈입니다. 황하강은 여름철이면 살인적인 더위와 홍수로, 겨울에는 혹한으로 인한 시련과 절망의 강입니다. 사람들은 이 황하의 절망적인 도전에 응전해서 승리하여 황하문명을 이룩했습니다. 로마도 원래는 풀 한포기 없는 언덕과 돌자갈밭, 열병이 들끓는 황야였지만, 이제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건설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황야의 도전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 해마다 나일강이 범람하기 때문에 태양력, 기하학, 천문학이 발달되었다”라고 말합니다.
1. 삶의 도전에 진 아담
우리 조상 아담은 삶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고 패배한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삶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면 종이 됩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마귀의 도전에 패하여 마귀의 처참한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와는 창세기 3장 2∼3절에서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며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이에 창세기 3장 6절에는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하여 아담과 하와가 도전에 패한 일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뱀의 유혹과 하와의 권면에 아담은 적절히 응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귀의 종이 되고 삼중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아담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으며, 육체는 질병과 약함과 죽음의 노예가 되었고 환경적으로는 간음과 저주와 실패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부애에서도 도전을 받아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창세기 3장 11∼12절에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의 부부애에 도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실과를 먹었느냐 물으시자 아담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여자가 먹으라고 유혹하므로 먹었다는 책임감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가 아내를 사랑했다면 스스로가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려했을 것입니다. 최소한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부부애에 대한 도전에 그는 응전하고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벌써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깊은 불신의 골이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부부애는 사랑 대신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는 비참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는 부부애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도전에 져서 처참한 결과를 맞고 있습니다. 부부란 남남끼리 만난 것이므로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인내하며 사랑하여 상대방을 인정하고 보조를 맞추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책임을 짊어지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러한 일들로 인해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부부는 남남이 만나서 살기 때문에 살다보면 부부애에 도전을 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도전에 적절하게 응전하지 못하고 실패하기 때문에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애의 도전을 받았을 때 그에 응전하지 못함으로 형제간에 살상이 일어났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것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이에 분한 마음이 들어 안색이 변했습니다. 창세기 4장 8∼9절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가인과 아벨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미움이 생기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이므로 형제애의 도전에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형제애에 도전을 받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감옥으로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재산 문제로 인해 형제끼리 고소하는 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부모님의 유산상속을 둘러싼 소송이 2001년에는 1만 1340여 건으로 하루 평균 60가구 이상이 돈 때문에, 재산 때문에 형제간에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날 형제애의 도전에 형편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2. 삶의 도전에 이긴 예수님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당했습니다. 예수께서 40주야를 금식하신 후 사단의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 마귀가 예수께로 와서 육신의 정욕으로 도전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배고픔의 식욕을 먼저 채우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라도 배고픔을 먼저 채우는 것이 최고’라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안목의 정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며 도전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보다 명예를 더 중하게 여겨라’,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명예를 얻으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응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도전에 응전하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세상 자랑을 가지고 도전했습니다. 하나님보다도 부귀와 권력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8∼11절에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며 예수님을 유혹하자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도전에 매번 단호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서서 응전하여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종으로 삼지 못하고 떠나가고 예수님은 마귀를 다스리는 왕 노릇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마귀의 도전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의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으로서 33세의 젊음이 십자가에서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처참하게 죽을 것을 생각할 때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39절에서 예수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한 고통과 괴로움의 도전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 도전에 대해 예수님은 응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복하시므로 그 도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2절에서 예수님은 또 한 번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45절에서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의 욕구가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를 헌신하므로 그 도전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탐욕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탐욕은 우리 사람들을 지배해서 우리를 탐욕의 종으로 만듭니다. 탐욕의 도전에 응전해서 승리하지 못하면 탐욕의 종이 되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국제 투명성기구에서 조사한 국가부패지수에 따르면 한국이 세계에서 42위입니다. 한국의 공직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부패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탐욕에서 오는 것입니다. 탐욕을 이기지 못하면 범죄하게 되고 결국 파탄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세상 유혹과 탐욕에 대한 싸움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지속적인 기도와 말씀으로 이러한 도전에 응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3. 우리 삶 자체가 도전의 연속
우리는 도전받는 것이 우리 삶의 현실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싸움입니다. 이는 마치 불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이 인생은 고난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욥기 5장 6∼7절에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는 세 가지 싸움이 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입니다. 둘째는 인간과 사회와의 싸움이고 셋째는 인간과 마음과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늘 도전을 당합니다. 여기서 지면 종이 되고 이기면 왕 노릇하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당하는 싸움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죄의 도전을 받고 죄에 대한 싸움을 싸웁니다. 죄에 대한 도전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시편 38편 4절에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죄가 우리들을 습격하고 우리를 도적질하는데, 우리가 이 죄에 대해서 응징하지 못하면 우리는 죄의 종이 됩니다.
또한 세상의 유혹과 탐욕도 쉬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유혹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23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권면하고 있으며 골로새서 3장 5절에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는 죄악의 유혹과 욕심의 도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심보감에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절제하지 못한데서 찾아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 내 16만 명의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수감자의 92%가 절제하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범죄하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욕망은 그것을 채움으로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절제함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다가오는 도전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것 중 하나가 질병입니다. 병은 정말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귀영화와 공명이 있어도 몸이 약하고 병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꽤 많은 것을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모두 다 잃어버린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병의 도전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의하면 지난 30년 간 35가지 이상의 신종 전염병이 생겨나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고 전합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에이즈인데 1981년 미국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20여년 동안 전세계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약 4000만 명 의 에이즈 감염자가 있고, 그 중에 2000만 명이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재작년에는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신종 질병, 사스가 발생해 작년 9월까지 8098명의 환자가 발생했고, 그 중에 774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외에도 인류를 위협하는 질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 현재 그 질병 중 가장 무서운 것이 암입니다. 암의 발생도수는 해마다 많아집니다. 우리나라에도 국민 200명 중 한 명이 각종 암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질병에 대한 싸움은 평생 끊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러한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의 삶은 항상 인간관계 속에서 일을 하고 생활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대한 싸움도 계속됩니다. 서로 시기와 분노와 질투와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사람 사이에 있는 끊임없는 시기와 분노, 질투와 분쟁의 싸움을 우리가 극복하면 왕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종이 되는 것입니다. 생활고에 대한 싸움도 계속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디에서 살까 등의 문제입니다. 창세기 3장 18∼19절에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은 이미 고생과 수고가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사회에 패배자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전도서 2장 22∼23절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매일 당하는 싸움입니다. 이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국제연합산하기관인 세계식량계획의 발표에 따르면 세계기아인구가 8억 420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해마다 1400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7초에 한 명이 굶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가난과 굶주림은 우리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입니다. 거기에 인간 최후의 도전은 죽음의 공포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우리에게 다가온 최후의 도전으로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영원한 지옥의 종이 되고, 이를 극복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고 도전 당할 때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싸움과 도전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도 도전하지 않고 싸움을 걸어오지 않으며, 아무런 염려와 근심과 괴로움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늘 고통 받으며 염려와 근심을 당하는 것에 대해 이상히 여길 것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모든 사람이 당하는 삶의 도전이요 괴로움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오직 응전하여 이길 것이냐, 패배하여 종이 될 것이냐의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4.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인생 가운데 우리는 수없이 도전을 당하는데, 응전해 이겨야 왕 노릇 합니다. 도전에 실패하면 개인, 가정, 생활, 자녀 뿐 아니라 사회, 국가, 집단이 종 노릇하게 됩니다. 삶에 여러 가지 도전이 다가올 때 사람들은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또는 “왜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 왜 내게 이런 문제가 다가오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여러 가지 고통이 다가오고 도전이 다가올 때 이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저항하고 부정하면 고통은 더욱 심해집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16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을 수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고통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바울 선생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주님도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인생 고난의 도전에 대해 응전할 때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응전하십니다. 우리가 약하면 약할 수록 주님은 우리에게 더욱 능력을 주셔서 고난을 이기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가오는 고난을 원망과 불평, 탄식하지 말고 내 몫의 태인 십자가, 내 운명으로 생각하고 끌어안아야만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도전을 녹여 버리고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브링클린이라는 미국의 뉴스 캐스터는 “신은 가끔 우리 앞에 빵 대신 벽돌을 던져 놓기도 한다. 어떤 이는 원망으로 그 벽돌을 걷어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벽돌을 주춧돌 삼아 아름다운 집을 짓기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도전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응전하는가에 따라 우리 개인의 삶 뿐 아니라 국가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도전 당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한 약속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삶 가운데 도전을 당할 때 그에 응전할 수 있는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찾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늘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가 그 고난에 응전할 수 있는 말씀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말씀 없이 우리는 고난에 대해 응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또한 우리는 매섭게 기도로 응전해야 합니다. 여기서 ‘매섭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기도를 하되, 희미하게 유연하게 하면서 응전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내 살을 찢고 뼈를 깍으며 다가올 때 그에 대한 응전의 기도도 매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이상 우리는 도전이 올 때마다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다가오는 심하고 고통스러운 도전이 지나고 나면 큰 유익이 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도전을 당하기 전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큰 시련과 환난, 질병의 도전을 당하게 되면, 그래서 마음이 깨어지면 그 때 우리는 하나님께 몸부림치고 매섭게 기도하게 됩니다. 뜨겁게 하나님을 찾아 기도하여 결국 도전은 극복되고 우리는 왕으로 승리하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기도는 아래에서 줄을 당겨 하나님의 귀 밑에 있는 종을 울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우리를 해하려던 그 어떤 마귀도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몇 년이 걸려도 기도하여 이루리라는 각오와 인내로 우리 삶의 도전에 대한 응전을 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바울 선생과 같이 도전에 대해 응전하면서 굳은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이기셨고 주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그 어떤 도전도 종국에는 우리가 이깁니다. 이런 믿음을 굳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승리의 꿈을 꾸고 입술로 이에 대해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도전을 당할 때 하나님 말씀에 서서 믿고 기도할 때 우리 마음속에 패배의 꿈을 가지면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을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시편 30편 11절에는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고 이기면 이처럼 기쁨으로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에 대한 응전을 할 때 결코 뒤로 물러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승리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은총을 의지하고 말씀에 서서 승리의 꿈을 꾸어야 합니다. 사망 대신 생명을, 패배 대신 승리를, 질병 대신 건강을, 실패 대신 성공을 꿈꾸어야 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말씀 가운데 우리 입을 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꿈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또한 생산적인 생각과 꿈을 가지고 끊임없이 승리를 입술로 시인하며 나갈 때 우리는 도전에 응전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모든 문명에는 도전과 응전의 법칙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모든 문명은 탄생하고 성장하는 1막과 성장을 멈추고 점차 쇠퇴하여 붕괴되어 가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문명이건 그 문명이 직면하는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면 성장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느 하나의 응전에라도 실패하면 그 문명은 쇠망한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도 다가오는 도전에 응전하여 성공해야 계속 자라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패배하면 그 인생은 그로부터 쇠퇴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사회와 국가도 다가오는 도전에 대해서 끊임없이 응전하여 성공하면 성장하고 축복 받지만 패배하면 쇠퇴하고 망하게 될 뿐입니다.
크고 작은 싸움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하여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는 전쟁과 시련의 산과 강을 건너야만 합니다. 삶의 도전에 응전하지 못하면 노예가 되고 이에 응전하여 이기면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응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각 개인은 물론 사회와 국가의 온 삶이 승리하고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담과 하와는 삶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하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사단의 도전에 대해 말씀에 서서 단호하게 응전하여 이기고 왕 노릇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종된 우리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왕 노릇 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의 도움으로 어떠한 삶의 도전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도전을 받아들여 극복하여 승리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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