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건조한 글쓰기 방식은 당대의 대 철학자였던 Christian Wolff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볼프는 글쓰기에 있어 대중성이 과학에 필요한 엄밀한 사고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칸트 자신도 스스로를 엄밀성을 추구하는 과학적 일꾼 (scientific laborer)이지, 보다 많은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문학적 수사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표현의 난해함은 과거 철학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시도했던 칸트 비판 철학 자체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 프러시아 퀘니히스베르그 (Koenigsberg)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 퀘니히스베르그는 러시아의 영토로 독일 문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칸트는 Johann Georg Kant와 Anna Regina Reuter의 9명 자식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마부?(humble saddler or leather worker)였으며 두 부부는 독실한 경건파 교도 (Pietist)였다. 경건파는 17세기에 일어난 종교적 부흥운동이며 18세기 독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같은 시기 영국에서 일어난 퀘이커교 (Quakerism)나 감리교 (Methodism), 그리고 유대교 하시디즘 (Hassidism)에 비교할 수 있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영특함을 알아본 교회 목사가 그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선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칸트는 1740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 입학한다. 이 해는 또한 프레데릭 대제가 프러시아의 왕이 된 해이기도 하다. 프레데릭 대제가 왕이 되면서 수행한 첫번째 일 중 하나가 볼프를 Halle 대학의 교수로 다시 불러오는 것이었고, 이는 그가 계몽 운동을 지지한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볼프는 라이프니쯔의 제자인데,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가르치다 라이프니쯔의 추천으로 할레대학의 정교수가 되었었다. 그 후 빌헬름 1세 (프레데릭의 아버지)에 의해 국외 추방을 당했다가 프레데릭이 왕이 되면서 다시 할레로 돌아온 것이다. 빌헬름이 볼프를 추방하고 계몽주의를 반대한 것은 계몽주의자들이 대학에서 종교적 영감과 도덕적 경건성은 가르치지 않고 무미건조한 이성적 학문만을 가르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이 시기에 볼프는 학문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유교의 저작들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계몽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러한 라이프니쯔-볼프 철학과 경건파 종교의 갈등이 칸트가 지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칸트는 처음에 라틴 문학을 공부했는데 (그의 저작들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용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얼마 못가 유명한 수학, 자연과학 교수였던 Martin Knutzen의 영향을 받았다. 크누첸은 볼프철학과 경건주의가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칸트의 자연과학적 사고에 막대한 영향력을 주었다.
칸트는 1744년에 대학을 잠시 중단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기간동안 칸트는 두번이나 약혼했으나 가족을 부양할 만한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주저했으며, 기다리다 못한 약혼자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과 결혼해버렸다. 가정교사 생활은 11년 동안 계속되었고, 1755년 대학으로 돌아와 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하고 사강사 (Privatdocent: 대학에서 신분만 인정받고 강사료는 학생들에게 직접 받는다.)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닥치는 대로 강의했는데, 그가 한 강의에는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자연 신학, 자연 과학 뿐 아니라 물리, 화학, 자연 지리학, 심지어는 군사 축성법, 불꽃 제조술 ( ...) 까지 포함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은 사실상 칸트가 그 창시자이다. Universal Natural History and Theory of the Heavens (1755)에서 칸트는 우주 성운설을 최초로 주장하였다. (참고: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 (-星雲設 Kant-Laplace nebular hypothesis))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칸트는 지식의 기초와 관련한 철학적 성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철학 저서는 New Elucidation of the First Principles of Metaphysical Cognition이었는데, 이 저작에서 우리는 그가 볼프의 형이상학 이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그가 볼프 철학에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로서 칸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62년 형이상학의 기초에 대한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면서 부터였다. 그 공모에서 일등으로 수상한 사람은 Moses Mendelssohn이었고 칸트는 on the Distinctness of the Principles of Natural Theology and Morals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이등상을 수상하였다. 칸트의 윤리 이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Jean-Jacques Rousseau이다. 칸트는 처음에 감정에 기초한 윤리 이론에 매력을 느꼈으나, 루소의 Emile과 Of the Social Contract를 읽고 나서 보편적 윤리 이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은 이십년이 지나서 였으며, 그보다 먼저 과학의 기초에 대한 탐구 및 경험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56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 임용이 있었으나 칸트는 지원하지 않았고, 58년에 있었던 임용에서도 그는 자신이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하여 지원하지 않았다. 그가 용기를 얻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62년의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고 부터였으며, 64년 같은 대학에서 시학 전공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66년에 대학에서 사서직을 제안하였고 드디어 칸트는 대학에서 주는 첫번째 봉급을 받았다. 1769년에는 Jena대학과 Erlangen대학 (독일의 유수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이 있었으나 동 프러시아를 떠난다는게 내키지 않아 또다시 거부한다. 그러나 사실상 칸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음해에 있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 논리학 교수직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물건너 가고 1778년에는 할레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또다시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대목에서 Wood는 칸트를 베토벤에 비유하고 있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되고나서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듯이 칸트의 삼대 비판서들도 그가 퀘니히스베르그에 고립되었을 때 탄생했다나...)
마침내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서 교수로 승진 (사서직에서 교수로)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Pregel강 위에 있는 조그만 섬에서 살았다. 그 섬에는 대학 건물과 교회가 있었는데 칸트는 도서관이 딸려있는 건물의 조그만 방에서 혼자 살았으며, 그가 자신의 집을 구한 것은 13년 후라고 한다.
1781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했다. 이로써 그는 인간 지성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기대한 만큼의 반향이 없자 적잖이 실망하였다고 한다. 특히 칸트가 존경했다고 하는 Christian Grave가 쓴 리뷰에서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을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답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격분한 칸트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위해 1783년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를 출판하였으나 그의 비판 철학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몇년이 더 지나서 였다.
이렇듯 칸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 시기부터 인생 역전은 시작되었고 1790년에 그가 받은 봉급은 그 당시 프러시아 교육계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가 59세 였던 1783년에 그의 친구이자 퀘니히스베르그 시장이었던 J. G. Hippel의 주선으로 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근사한 주택을 구입하였다. 이 집의 일층에는 그가 강의를 할 수 있는 홀이 있고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는데 요리사도 고용했다. 이층에는 칸트의 침실과 공부방 (이 방의 유일한 장식품은 루소의 초상화였다고 한다.), 거실, 식당이 있다. 삼층에는 칸트의 하인 Lampe가 기거했다.
식사라고 할만한 식사는 저녁 한끼였다.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칸트는 주로 손님들과 저녁을 즐겼다. 비록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난 적이 없지만 퀘니히스베르그가 항구였던 탓에 명망있는 여러 외국인들이 그의 저녁 손님이 되었다.
그는 새벽 다섯시에 규칙적으로 일어나 아침 식사로 차 한잔과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나서는 바로 오전 강의를 준비하고 일주일에 5일 아침 7시에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면 공부방으로 들어가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자신의 글을 썼다. 저녁 다섯시가 되면 그는 산책을 시작한다. 산책을 나서는 시간이 얼마나 규칙적이었던지 퀘니히스베르그 주부들이 칸트 교수가 자기 집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마추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규칙적인 산책은 철학적인 작업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리라...
칸트의 철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786년 예나 대학의 철학자 Karl Leonard Reinhold가 영향력 있는 철학지인 Deutsche Merkur에 칸트에 우호적인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였다. 급기야 칸트의 비판 철학이 독일 철학계의 화두가 되었으며, 모든 철학적 문제는 칸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느냐 혹은 어떻게 뛰어넘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1787년에 그는 "순수이성비판"의 제2판을 출간했다. 이 때 그는 실천 (혹은 도덕) 이성의 부분을 첨가하려 하였으나 책이 너무 두꺼워 질까봐 단념하고 별도의 제 2 비판서를 계획한다. 그의 제 3 비판서인 "판단력비판"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에 벌어진 공백을 매꾸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1786년, 칸트의 말년에 위기가 시작되었다. 프레데릭 대제가 서거하고 그의 사촌인 Friedrich Wilhelm 삼세가 즉위하였다. 계몽운동에 우호적이었고 종교적 문제에 자유로웠던 프레데릭 대제에 반해, 이러한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가졌던 빌헬름 삼세는 즉위한 이듬해에 교육담당 대신이었던 Baron von Zedlitz를 사임시키고 J. C. Woellner를 그 자리에 앉혔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제들리츠에 헌정한 바 있고, 뷀르너는 프레데릭 대제가 권모술수에 능한 책략가로 묘사했던 인물이었다. 빌헬름 삼세와 그의 하수인들은 국가의 안정이 국민들의 굳건한 신앙심에서 온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국가의 안정을 저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칸트의 철학 역시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칸트가 주장한 '계몽주의'라는 것은 그들이 보기엔 '무정부주의'를 선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교육당당 대신이 된 뷀르너는 곧 교회와 대학으로부터 계몽사상을 없애기 위해 칙령을 발표하고 성직자와 학자들이 자신들의 강의, 강론과 출판에 종교적 정통성을 지키도록 명령한다. 신분의 위협을 느끼게 된 계몽주의자들은 변절하거나 자신의 직장을 잃게 되었다. 빌헬름 삼세 왕조는 종교적 내용의 문건들을 검열하였고 성직자와 학자들은 강의, 강론을 하거나 출판하기 전에 이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1791년, 빌헬름 왕조는 칸트에게도 종교적 주제와 관련한 집필을 금지하였으나, 이미 칸트가 유명해진 이후라 왕조에게는 칸트가 껄끄러운 대상이었다. 칸트는 종교와 관련한 출판을 기획하고 어떠한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자신의 신변은 물론, 도덕적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 권력과의 마찰을 가급적 피했다.
사실상 칸트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의 정치관은 홉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국가가 개인과 사회제도를 보호할 임무가 있다고 보고 때로는 국가가 악에 맞서 힘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개인의 자유가 '사적'으로 사용될 때는 적절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그의 정치관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은 한편으로 프러시아 왕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칸트는 뷀르너의 칙령에 유감을 표시했으며, 이 칙령이 위선적인 성직자들만 양산하는 효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태도가 얼마나 단호하였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칸트는 (합법적) 권력이 비록 부당한 명령을 하더라도 복종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믿었다. (Argue as much as you want and about whatever you want but obey!) 칸트는 프러시아 왕조가 자신의 강의와 집필을 금지할 경우 그 명령에 복종할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칸트는 (계몽이 안 된) 빌헬름 왕조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1792년 칸트는 후에 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의 1장이 되는 논문을 Berlin Monthly에 기고했고 검열이 행해지자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논문은 개제불가 판정을 받았고, 후에 검열을 피해 책의 전체를 예나 대학에 기고하여 제 1판이 1793년에, 그리고 제 2판이 1794년에 출판되었다. 이러한 행각에 발끈하여 베를린 당국은 칸트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 해 10월 뷀르너는 칸트에게 왕이 서명한 서한을 보내 불만을 표시하고 그가 기독교의 정통성에 부합하게 될 때까지 종교와 관련한 일체의 집필과 강의를 중단하도록 명령한다. 답장을 통해 칸트는 자신의 입장과 출판의 합법성을 변호하였으나 결국 왕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의 집필은 계속되었다. 1795년,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 바젤 협정이 체결되었고 칸트는 Eternal Peace에서 이 협정을 지지할 뿐 아니라 프랑스 공화정에 우호적인 의사를 표현했다. 영구 평화론은 이후 2 세기동안 전쟁과 평화, 국제 관계에 관한 모범적인 저술로 평가된다.
1796년, 72세가 되던 해에 칸트는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다. 이듬해에 빌헬름 3세가 서거하자 그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졌고 종교와 관련한 저술을 한 것이 1798년에 출판된 Conflict of the Faculties이다.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을 완성하고자 했으며 Metaphysics of Morals의 전반부가 1797년에 출판되었으며 이듬해에 전체를 출판했다. 또 다른 작업으로 그는 지금까지 행했던 그의 강의록을 출판하고자 기획했다. 대학에서 은퇴한 이후 그가 행했던 가장 특별한 작업은 그가 선험 철학과 경험 과학의 관계에 관한 집필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 작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1804년, 80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하고 서거한다. 이 작업의 일부는 20세기 초 Opus Postumum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칸트의 철학은 자신의 이성적 한계를 인정하는 인간 존재의 자기 가치와, 자신의 한계를 이성의 자기 입법적 능력을 통해 자기한계로 전환할 줄 아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철학이었다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 프러시아 퀘니히스베르그 (Koenigsberg)에서 태어났다. 이 당시 퀘니히스베르그는 러시아의 영토로 독일 문화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칸트는 Johann Georg Kant와 Anna Regina Reuter의 9명 자식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은 마부?(humble saddler or leather worker)였으며 두 부부는 독실한 경건파 교도 (Pietist)였다. 경건파는 17세기에 일어난 종교적 부흥운동이며 18세기 독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같은 시기 영국에서 일어난 퀘이커교 (Quakerism)나 감리교 (Methodism), 그리고 유대교 하시디즘 (Hassidism)에 비교할 수 있다.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영특함을 알아본 교회 목사가 그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선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칸트는 1740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 입학한다. 이 해는 또한 프레데릭 대제가 프러시아의 왕이 된 해이기도 하다. 프레데릭 대제가 왕이 되면서 수행한 첫번째 일 중 하나가 볼프를 Halle 대학의 교수로 다시 불러오는 것이었고, 이는 그가 계몽 운동을 지지한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볼프는 라이프니쯔의 제자인데,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가르치다 라이프니쯔의 추천으로 할레대학의 정교수가 되었었다. 그 후 빌헬름 1세 (프레데릭의 아버지)에 의해 국외 추방을 당했다가 프레데릭이 왕이 되면서 다시 할레로 돌아온 것이다. 빌헬름이 볼프를 추방하고 계몽주의를 반대한 것은 계몽주의자들이 대학에서 종교적 영감과 도덕적 경건성은 가르치지 않고 무미건조한 이성적 학문만을 가르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이 시기에 볼프는 학문적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유교의 저작들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계몽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러한 라이프니쯔-볼프 철학과 경건파 종교의 갈등이 칸트가 지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칸트는 처음에 라틴 문학을 공부했는데 (그의 저작들에 등장하는 라틴어 인용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얼마 못가 유명한 수학, 자연과학 교수였던 Martin Knutzen의 영향을 받았다. 크누첸은 볼프철학과 경건주의가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칸트의 자연과학적 사고에 막대한 영향력을 주었다.
칸트는 1744년에 대학을 잠시 중단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기간동안 칸트는 두번이나 약혼했으나 가족을 부양할 만한 경제력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주저했으며, 기다리다 못한 약혼자들이 모두 다른 사람들과 결혼해버렸다. 가정교사 생활은 11년 동안 계속되었고, 1755년 대학으로 돌아와 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동시에 취득하고 사강사 (Privatdocent: 대학에서 신분만 인정받고 강사료는 학생들에게 직접 받는다.)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닥치는 대로 강의했는데, 그가 한 강의에는 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자연 신학, 자연 과학 뿐 아니라 물리, 화학, 자연 지리학, 심지어는 군사 축성법, 불꽃 제조술 ( ...) 까지 포함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은 사실상 칸트가 그 창시자이다. Universal Natural History and Theory of the Heavens (1755)에서 칸트는 우주 성운설을 최초로 주장하였다. (참고: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 (-星雲設 Kant-Laplace nebular hypothesis))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칸트는 지식의 기초와 관련한 철학적 성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철학 저서는 New Elucidation of the First Principles of Metaphysical Cognition이었는데, 이 저작에서 우리는 그가 볼프의 형이상학 이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그가 볼프 철학에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로서 칸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62년 형이상학의 기초에 대한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면서 부터였다. 그 공모에서 일등으로 수상한 사람은 Moses Mendelssohn이었고 칸트는 on the Distinctness of the Principles of Natural Theology and Morals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이등상을 수상하였다. 칸트의 윤리 이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Jean-Jacques Rousseau이다. 칸트는 처음에 감정에 기초한 윤리 이론에 매력을 느꼈으나, 루소의 Emile과 Of the Social Contract를 읽고 나서 보편적 윤리 이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은 이십년이 지나서 였으며, 그보다 먼저 과학의 기초에 대한 탐구 및 경험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56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 임용이 있었으나 칸트는 지원하지 않았고, 58년에 있었던 임용에서도 그는 자신이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하여 지원하지 않았다. 그가 용기를 얻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62년의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고 부터였으며, 64년 같은 대학에서 시학 전공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66년에 대학에서 사서직을 제안하였고 드디어 칸트는 대학에서 주는 첫번째 봉급을 받았다. 1769년에는 Jena대학과 Erlangen대학 (독일의 유수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이 있었으나 동 프러시아를 떠난다는게 내키지 않아 또다시 거부한다. 그러나 사실상 칸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음해에 있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 논리학 교수직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물건너 가고 1778년에는 할레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또다시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대목에서 Wood는 칸트를 베토벤에 비유하고 있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되고나서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듯이 칸트의 삼대 비판서들도 그가 퀘니히스베르그에 고립되었을 때 탄생했다나...)
마침내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서 교수로 승진 (사서직에서 교수로)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Pregel강 위에 있는 조그만 섬에서 살았다. 그 섬에는 대학 건물과 교회가 있었는데 칸트는 도서관이 딸려있는 건물의 조그만 방에서 혼자 살았으며, 그가 자신의 집을 구한 것은 13년 후라고 한다.
1781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했다. 이로써 그는 인간 지성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기대한 만큼의 반향이 없자 적잖이 실망하였다고 한다. 특히 칸트가 존경했다고 하는 Christian Grave가 쓴 리뷰에서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을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답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격분한 칸트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위해 1783년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를 출판하였으나 그의 비판 철학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몇년이 더 지나서 였다.
이렇듯 칸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 시기부터 인생 역전은 시작되었고 1790년에 그가 받은 봉급은 그 당시 프러시아 교육계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가 59세 였던 1783년에 그의 친구이자 퀘니히스베르그 시장이었던 J. G. Hippel의 주선으로 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근사한 주택을 구입하였다. 이 집의 일층에는 그가 강의를 할 수 있는 홀이 있고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는데 요리사도 고용했다. 이층에는 칸트의 침실과 공부방 (이 방의 유일한 장식품은 루소의 초상화였다고 한다.), 거실, 식당이 있다. 삼층에는 칸트의 하인 Lampe가 기거했다.
식사라고 할만한 식사는 저녁 한끼였다.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칸트는 주로 손님들과 저녁을 즐겼다. 비록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난 적이 없지만 퀘니히스베르그가 항구였던 탓에 명망있는 여러 외국인들이 그의 저녁 손님이 되었다.
그는 새벽 다섯시에 규칙적으로 일어나 아침 식사로 차 한잔과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나서는 바로 오전 강의를 준비하고 일주일에 5일 아침 7시에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면 공부방으로 들어가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자신의 글을 썼다. 저녁 다섯시가 되면 그는 산책을 시작한다. 산책을 나서는 시간이 얼마나 규칙적이었던지 퀘니히스베르그 주부들이 칸트 교수가 자기 집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마추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규칙적인 산책은 철학적인 작업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리라...
칸트의 철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786년 예나 대학의 철학자 Karl Leonard Reinhold가 영향력 있는 철학지인 Deutsche Merkur에 칸트에 우호적인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였다. 급기야 칸트의 비판 철학이 독일 철학계의 화두가 되었으며, 모든 철학적 문제는 칸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느냐 혹은 어떻게 뛰어넘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1787년에 그는 "순수이성비판"의 제2판을 출간했다. 이 때 그는 실천 (혹은 도덕) 이성의 부분을 첨가하려 하였으나 책이 너무 두꺼워 질까봐 단념하고 별도의 제 2 비판서를 계획한다. 그의 제 3 비판서인 "판단력비판"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사이에 벌어진 공백을 매꾸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1786년, 칸트의 말년에 위기가 시작되었다. 프레데릭 대제가 서거하고 그의 사촌인 Friedrich Wilhelm 삼세가 즉위하였다. 계몽운동에 우호적이었고 종교적 문제에 자유로웠던 프레데릭 대제에 반해, 이러한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가졌던 빌헬름 삼세는 즉위한 이듬해에 교육담당 대신이었던 Baron von Zedlitz를 사임시키고 J. C. Woellner를 그 자리에 앉혔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제들리츠에 헌정한 바 있고, 뷀르너는 프레데릭 대제가 권모술수에 능한 책략가로 묘사했던 인물이었다. 빌헬름 삼세와 그의 하수인들은 국가의 안정이 국민들의 굳건한 신앙심에서 온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국가의 안정을 저해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는 칸트의 철학 역시 위험한 것으로 보였다. 칸트가 주장한 '계몽주의'라는 것은 그들이 보기엔 '무정부주의'를 선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교육당당 대신이 된 뷀르너는 곧 교회와 대학으로부터 계몽사상을 없애기 위해 칙령을 발표하고 성직자와 학자들이 자신들의 강의, 강론과 출판에 종교적 정통성을 지키도록 명령한다. 신분의 위협을 느끼게 된 계몽주의자들은 변절하거나 자신의 직장을 잃게 되었다. 빌헬름 삼세 왕조는 종교적 내용의 문건들을 검열하였고 성직자와 학자들은 강의, 강론을 하거나 출판하기 전에 이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1791년, 빌헬름 왕조는 칸트에게도 종교적 주제와 관련한 집필을 금지하였으나, 이미 칸트가 유명해진 이후라 왕조에게는 칸트가 껄끄러운 대상이었다. 칸트는 종교와 관련한 출판을 기획하고 어떠한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자신의 신변은 물론, 도덕적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 권력과의 마찰을 가급적 피했다.
사실상 칸트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의 정치관은 홉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국가가 개인과 사회제도를 보호할 임무가 있다고 보고 때로는 국가가 악에 맞서 힘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개인의 자유가 '사적'으로 사용될 때는 적절히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그의 정치관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내용은 한편으로 프러시아 왕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칸트는 뷀르너의 칙령에 유감을 표시했으며, 이 칙령이 위선적인 성직자들만 양산하는 효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태도가 얼마나 단호하였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칸트는 (합법적) 권력이 비록 부당한 명령을 하더라도 복종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믿었다. (Argue as much as you want and about whatever you want but obey!) 칸트는 프러시아 왕조가 자신의 강의와 집필을 금지할 경우 그 명령에 복종할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하지만 칸트는 (계몽이 안 된) 빌헬름 왕조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1792년 칸트는 후에 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lone의 1장이 되는 논문을 Berlin Monthly에 기고했고 검열이 행해지자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논문은 개제불가 판정을 받았고, 후에 검열을 피해 책의 전체를 예나 대학에 기고하여 제 1판이 1793년에, 그리고 제 2판이 1794년에 출판되었다. 이러한 행각에 발끈하여 베를린 당국은 칸트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 해 10월 뷀르너는 칸트에게 왕이 서명한 서한을 보내 불만을 표시하고 그가 기독교의 정통성에 부합하게 될 때까지 종교와 관련한 일체의 집필과 강의를 중단하도록 명령한다. 답장을 통해 칸트는 자신의 입장과 출판의 합법성을 변호하였으나 결국 왕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의 집필은 계속되었다. 1795년,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 바젤 협정이 체결되었고 칸트는 Eternal Peace에서 이 협정을 지지할 뿐 아니라 프랑스 공화정에 우호적인 의사를 표현했다. 영구 평화론은 이후 2 세기동안 전쟁과 평화, 국제 관계에 관한 모범적인 저술로 평가된다.
1796년, 72세가 되던 해에 칸트는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다. 이듬해에 빌헬름 3세가 서거하자 그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졌고 종교와 관련한 저술을 한 것이 1798년에 출판된 Conflict of the Faculties이다. 칸트는 자신의 윤리학을 완성하고자 했으며 Metaphysics of Morals의 전반부가 1797년에 출판되었으며 이듬해에 전체를 출판했다. 또 다른 작업으로 그는 지금까지 행했던 그의 강의록을 출판하고자 기획했다. 대학에서 은퇴한 이후 그가 행했던 가장 특별한 작업은 그가 선험 철학과 경험 과학의 관계에 관한 집필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 작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1804년, 80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하고 서거한다. 이 작업의 일부는 20세기 초 Opus Postumum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칸트의 철학은 자신의 이성적 한계를 인정하는 인간 존재의 자기 가치와, 자신의 한계를 이성의 자기 입법적 능력을 통해 자기한계로 전환할 줄 아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철학이었다
출처 : To the World! For the Future!
글쓴이 : 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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