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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동굴의 비유’ 요약

by 이덕휴-dhleepaul 2018. 10. 28.

‘동굴의 비유’ 요약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가지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첫째, 동굴의 비유는 <국가>의 총 세가지 비유 중 마지막으로 제시되는데, 앞선 것은 ‘태양의 비유’(508b-509b)와 '선분의 비유’(509d-511c)로 '이 전체의 비유(동굴의 비유)를 앞서 언급한 것(태양과 선분의 비유)에 적용’ 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517a) 태양의 비유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이며, 선분의 비유는 가시적인 것들과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네 단계의 앎의 단계에 대한 비유이다. 동굴의 비유는 앞선 두가지 비유를 종합하여 여기에 앎의 실천에 대한 부분까지 추가된 종합적인 비유이다. 둘째, 동굴의 비유는 '교육 및 교육 부족과 관련된 우리의 성향을 비유’(514a)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여기서 교육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다. 따라서 동굴의 비유에 언급되는 죄수들은 통치자 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두가지 사항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동굴의 비유에는 앞선 두 비유에 비해 동굴 안쪽의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된다. 동굴의 안쪽은 선분의 비유에 언급된 '지성이 없이도 알 수 있는 곳으로 의견(doxa)의 영역이다. 반면 동굴 바깥쪽은 지성에 의해 알 수 있는 참다운 진리가 있는 곳으로 진리(episteme)의 영역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대로 동굴의 비유는 국가 통치자의 교육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며, 이 교육은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내용을 종합하고 이를 정합(coherent)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며, 교육의 목표는 ethical(도덕적 또는 윤리적)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의 지도자가 올바른 것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도 한 '좋음'을 알게하는 것이 목표이다. 'ethical'은 복합적인 개념으로 도덕적이기도 하고 정치적(혹은 법률적)으로 능력있는 것이기도 하며, 신체적으로 우수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교육의 단계에 대해 말하면서 시가 교육, 신체단련 등을 거쳐 수학 등 추상적인 교육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교육을 완성하기 위해 동굴의 비유를 제시하였다.


동굴의 비유는 다섯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514a-517c) 첫째는 최초의 상황으로 기다란 동굴에 모닥불이 있고 중간에 동물이나 인물의 인형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 이 너머에 어릴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 당하여 벽만 바라보고 있는 죄수들이 있는데, 이들은 복사물의 그림자를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이 그림자가 실제 사물의 허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자조차도 실제 사물의 모사물인 인형이며, 모닥불도 태양의 모사물이므로 이는 중첩된 허상이다. 이는 죄수들이 '좋은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자각이 없는 상태임을 나타낸다. 둘째, 이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입구로 올라간다. 고개를 돌리는(periagoge) 행위가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제시되지 않는다. 셋째, 풀려난 죄수는 입구로 올라가 태양 아래 실물을 보고(thea) 태양을 본다. 그는 어둠에 있다가 갑자기 태양 아래로 나가기 때문에 눈이 부셔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까지는 죄수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 이론적으로 발생되는 단계이다. 이 이후는 죄수의 의지가 개입되는 실천적 단계이다. 왜냐하면 태양을 본 죄수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내려오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periagoge) 위로 올라가서(walk upward) 진정한 원인(aitia)인 태양을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내려오는(katabainein) 과정이다. 마지막 과정으로 동굴로 내려온 죄수는 어둠속에서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 볼 것을 요구 받는데, 그는 밝은 곳에 있다가 다시 어둠속에 내려왔으므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와중에서 그는 예전의 동료였던 자들에게 비웃음을 받거나, 올라가는 일이 애쓸 가치조차 없는 일이라는 소리를 듣거나,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 비유에 대한 철학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태양은 궁극적인 원인이며, 좋음의 이데아이자 모든 빛과 생명의 원인이다. 불은 이 태양의 모사품이며 인형은 동굴 바깥에 있는 실제 사물들의 모사품이다. 전에는 그림자만 봤던 죄수는 동굴을 올라가면서 불과 실제 사물과 태양을 보게 되는데, 이는 무엇인가를 '안다'라고 말하려면 태양(좋음의 이데아)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좋음의 이데아인 태양은 동굴 바깥이면서도 하늘에 떠 있는 것, 즉 초월적인 것이며 신적이고 불멸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사품인 그림자만 보면서 평생을 살 수도 있고 신적인 것을 볼 수도 있는 존재인 셈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죄수는 지혜에 대한 사랑이 있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빛의 세계를 알고(철학자로서의 삶) 다시 어둠의 세계로 내려오는(교육자이자 정치가) 사람으로 전혀 다른 두가지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실존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불행한 사람이며, 경제적, 육체적 삶을 완전히 박탈당한 사람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이러한 철인정치가를 이상적인 통치자라고 하였으나 칼 포퍼는 이를 '열린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국가>는 이러한 이상적인 지도자가 다스리는 이상국가에 대한 이야기이나, (592b)에 언급된 대로 이 지도자는 이데아를 알지만 각 동굴에 맞게 현실적인 정치를 할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무조건 이상국가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