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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終末과 새 創造 -바울의 終末論을 中心으로

by 이덕휴-dhleepaul 2018. 10. 29.

神學論壇             終末과 새 創造
                 -바울의 終末論을 中心으로-

                                                                  李  德  休
                                                                
                - 目 次 -

Ⅰ. 序 論 / 2
  1. 종말론의 개념 / 3
  2. 종말론의 어원 / 4
  3. 종말론에 있어서 바울의 위치와 유대교의 전통 / 4

Ⅱ. 바울의 終末論的 神學思想의 要諦 / 6
  1.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관계 / 6
   (1) 부활의 개념 / 8
   (2) 구원의 개념 / 8
   (3) 칭의의 교리 / 9
   (4) 성령의 문제 / 10
  2. 주님의 강림에 대한 바울의 관점 / 10
   (1) 파루시아 / 11
   (2) 계시 / 11
   (3) 그 날 / 12
  3. 이미와 아직의 긴장 / 14

Ⅲ. 救援史로서의 創造와 새 創造 / 15
  1. 구원의 새로운 경험으로서의 창조 / 16
  2. 성령에 의한 새로운 창조 / 17  
  3. 성령의 은사로서의 종말론 / 19     
   (1) 보증금 / 20
   (2) 첫 열매 / 21

Ⅳ.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 結 論에 갈음하여 / 22

* 참고문헌 / 23


Ⅰ. 序 論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고백하여 왔다. 하지만 성서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삼위일체라는 용어로 표현된 역사상의 교리를 비성서적이요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은 창조론(創造論)을 논의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태초의 창조사역의 주역은 성부 하나님이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和解)의 역사의 주역이었고 성령은 구원과 새 창조 사역(事役)의 주역이다.
   성령의 새 창조사역은 일차적으로 인간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는 사역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을 중생 시키고 새로운 피조물(被造物)로 만들고 거룩하게 만드는 사역은 성령(聖靈)의 새 창조사역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이 영적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는 것은 인간을 새롭게 만드는 성령의 매우 중요한 사역이다. 인간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새 창조사역의 종국(終局)은 인간의 육체를 마지막날에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사역의 종국은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미래를 향한 창조사역이다.
   종말론이란 마지막에 대한 교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와 관련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cf. 사 65:17, 66:22)을 이 지상에 실현되는 유토피아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현 질서의 연장이 아니고 예수의 강림과 관련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 창조사역은 종말론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종말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종국적 사건은 부활과 심판이다.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에 빠진 세계의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 필연적인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잡혔던 것을 회복시키는 구실을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진 곳에서는 그 성취자체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보이면서 또한 그것을 배제하는 역할도 한다.
  
  1. 종말론(Eschatology)의 개념

   종말론은 최후의 사건에 대한 교의학적(敎義學的)인 진술이다. 전통적으로 종말론의 문제는 다음 두 가지 범위와 지평에서 이해되었다. 하나는 인간의 부활(復活)과 영생(      )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의 종말(終末)과 완성(完成)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전자를 개인적 종말론 또는 현재적 종말론이라 하고, 후자를 세계적 종말론 또는 우주적 종말론이라고 한다. 성서의 종말론은 현재적일 뿐만 아니라 미래적이며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이므로 총체적 종말론의 문제는 양자를 조화 있게 다룬 종말론이어야 한다.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의 최종적 완성을 목표로 하는 성서의 교훈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용어로써, 이 세대가 끝난 후의 일인 주의 강림(降臨), 심판(審判), 부활(復活), 천년왕국(天年王國), 영원한 세계의 상태 등이 포함된다. 성서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활동(救贖活動)을 보여 주며, 따라서 그 역사는 새로운 질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은 창조의 교리 및 구속의 교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구체적으로 신약의 종말론은 다음과 같은 교리적 요소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즉 소망과 육체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강림 그리고 심판 및 영생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약속과 그 실현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의 제반 국면들이다. 신약교훈의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의 인격적 강림이 하나님 나라와 천년왕국에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최후의 심판사이에 있을 그리스도의 천년간의 통치를 의미한다. 또한 천년왕국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통치(무천년설)로 간주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그 개념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전세계에서 이루어질 복음의 지배에 대한 비유로 간주하기도 한다(후천년설).
   그러나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변화를 통하여, 그리고 불멸의 상태를 기대하는 영광스러운 천년왕국을 통하여 이미 신약에서 실현된 것으로 본다. 믿는 자들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은 복음의 초석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고전 15장). 부활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그의 부활의 기적과 그리고 창조에 의하여 인간 생명 안에 영적인 실재가 있다는 신앙적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2. 終末論의 語源 

   종말론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파생한 것인데, 70인 역 헬라어 구약성경에서 그 언어적 선행어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즉 헬라 구약성경에서 "에스카타이 헤메라이"(              )와 "에스카톤 톤 헤메론"(                  )이 그것이다. 이는 시간적·공간적으로 마지막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아헤리트'(     )라는 단어가 어원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아헤리트'는 '아하르'(   , 'a ar)에서 파생된 말인데, '아하르'는 '가장 뒤'를 뜻한다. 이처럼 구약성서에서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아헤리트'(     )가 헬라어 '에스카토스'(       : 마지막)라는 말로 번역되면서 영어의 'Eschatology'가 되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종말론'이라는 개념의 Eschatology는 희랍어 '       '와 '     '라는 합성어이다. 
 
 3. 종말론에 있어서 바울의 위치와 유대교의 전통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에 대하여 여러 시대에 걸쳐 매우 다양한 진술을 하여 왔다. 사도 바울은 성경 전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종말론적 신념의 편린들을 잘 파악하고 그것들을 요약적이고 잘 정리된 체계로 엮되 사람의 예로 말하자면, 이제부터는 이를 그 어떤 고귀한 구조에서 빠뜨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될 정도로 아주 정합적(整合的)인 것으로 엮은 것이다. 소망에 대한 하나 하나의 편린들을 발견해서 그것들을 하나로 모아 아주 균형 있는 형태로 결정화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이다. 다른 어떤 사소한 은사(恩賜) 때문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그를 기독교 종말론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본고의 주제와 관련하여 '종말과 새 창조'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사도 바울의 신학사상에 결부시키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탁월한 종말신학사상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새로운 창조질서 의식을 심어준 영원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종말사상은 신약성서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언급들은 성서들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초대교인들은 이 종말사상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종말사상은 유대교의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으로 유대교의 전통에 익숙해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유대교에서의 종말사상은 찾아볼 수 없다. 초기의 유대교인들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현세에서의 부와 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리고 가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응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 유대주의로 넘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의인(義人)임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당해야 하는 고통, 반대로 악을 일삼는 자이면서도 잘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들의 종말관을 의심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후기 유대교의 종말관은 자연히 내세적 응보사상(應報思想)으로 진전하게 되었고, 신약시대에 접어들면서 종말사상은 두 가지의 커다란 축으로 발전하게 된다. 즉 우주의 파멸과 심판이라는 '미래적 종말관'과 창조질서의 회복이라는 새 창조의 희망을 상징하는 '현재적 종말관'이 두텁게 자리잡게 된다.
   유대교 종말론과 바울사상의 견련성에 있어서 현세대와 오는 세대의 대조가 바울에 의해서 유대교로부터 도입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물론 유대교의 종말론이 구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서 유대교와 바울사상의 유사성을 다 설명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살전4:15절은 바울의 종말론적 프로그램의 중요한 논점을 제시하는 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의 오심이 밤중에 도적이 오는 것과 같다는 표상도 참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바울의 종말론은 몇 가지 근본적인 면에서 유대교 묵시문학과 차이가 난다. 첫째, 바울의 종말론은 비정치적이다. 즉 바울의 그것은 지상적이고 잠정적인 메시야 왕국의 여지가 없다. 다음으로 바울의 종말론은 유대교의 종말론에서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또한 좀더 신중하고 건전하며, 뚜렷한 환상이 그렇게 많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유대교 종말론보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울의 종말론은 종교적이라는 지적을 해야 한다. 유대교 종말론에서는 서로 조화되지 않는, 나아가서 조화될 수조차도 없는 수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울에게서는 상당히 단순하고 일관성 있는 종말론 구조를 찾을 수 있다.
  

Ⅱ. 바울의 終末論的 神學思想의 要諦
 
   바울 사상의 중심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종교개혁시대의 여러 신학자들은 칭의(稱義)가 바울 사상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바울 신학의 중심문제를 종말론적으로 보았던 슈바이쳐(A. Schweitzer, 1875-1965)는 칭의가 바울 신학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게 하는 시발점이라고 지적하면서, 바울에 있어서 칭의란 유대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일시적인 논쟁적 개념에 불과한 것이며 바울 사상의 일부라고 하였다. 우리는 바울 사상의 중심을 새 시대의 출현에서 찾아야 하며 그 출현을 입증하는 것은 성령의 오심이다. 그러나 칭의 교리는 구약의 의(義)개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져야 하며 구약에서의 의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종말론 사상의 태동은 원시기독교 사상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적 문헌의 산출이 늦어진 것도 이 종말론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임박한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던 초대 기독교도들은 구전적 복음과 성령의 다스림으로 만족하였으며, 따라서 기록된 신약성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강림이 예상외로 지연되자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바울은 그의 심오한 신앙으로 이 종말론의 교리에 관하여 경계의 글을 써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1.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
 
  우리는 여기서 종말론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를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그의 "신약의 종말론"(Eschatology of the New Testament)에서 "기독교는 그 기원 속에 종말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의미는 메시야의 출현, 그의 사역의 시작을 말하는데 구약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이것들은 종말론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보스는 구약성경이 메시야의 오심을 내다보면서 "주의 날"을 미래의 가장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으로 간주한 반면에, 신약성경은 이 사건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즉 현재적 메시야의 시대와 미래의 완성적 상태, 그러나 신약은 올 세대가 현재의 속에서 기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몇몇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고 신자들은 이미 최소한의 종말론적 특권들의 부분적 향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신념을 구체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스에 따르면, 신약의 신자들에 있어서 구원론을 형성시킨 것은 종말론이었지 결코 종말론을 형성시킨 것이 구원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강림시(降臨時)에 궁극적으로 유업으로 받게 될 완전성을 매우 예민하게 의식하였으므로 현재의 구원을 바로 이러한 최종적 완전성의 빛 아래서 보게 된 것이다. 넓은 시야에서 볼 때, 종말론적 구조가 구원론의 본체와 형식을 미리 결정지었다는 사실처럼 바울의 사상체계 속에 있어서 더 중요한 사실은 없다.
   우리의 과제는 바울 사도에 의해서 전달되어 계시된 복음 안에 있는 사유의 관점을 확정하는 일이다. 즉 종말론적 진리와 구원론적 진리가 바울에게는 동일한 때에 주어졌을 수 있으나, 그들 관계의 상호성은 그때로부터 불분명하고 파악되지 않은 채, 후기의 계시와 파악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었다. 이는 바울에게는 구원론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이 동시에 계시되었으나, 그들의 상호관련에 대해서는 좀더 계시되어야 할 것이 남아 있었고, 또한 이는 좀더 생각되어져야 할 주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상호관련의 논리적 순서는 결코 바울과 같은 이의 정신 속에서 무한히 연기될 수는 없었다.
   바울의 가르침에는 네 가지 중요한 구조선(structural lines)이 있으므로 우리의 주장을 정당하게 검증하는 가장 쉽고 설득력 있는 방법은 이에 따르는 것이 될 것이다. 그 네 가지 구조선이란 각각 부활에 관한 사상, 심판과 칭의에 관한 교훈, 그리고 성령에 관한 개념이다.
  
  (1) 부활의 개념
   바울의 네 가지 구조선(構造線)에서 '부활(resurrection,            )의 개념'을 먼저 놓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것은 여기서 종말론적인 것의 우선성과 구원론적인 가르침에 대한 그것의 실제적 영향이 가장 뚜렷하기 때문이다. 부활이란 특히 종말론적이라는 점은 더 지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신자들이 그를 통해 새로운 상태에로 들어가는 구원적 경험이 사도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남,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음으로 성격지워지는 것을 발견하면, 구원과정에 미치는 종말론의 소급력 있는 형성적 영향력은 분명한 것이다. 부활의 개념은 명백히 언급된 것은 없지만, 근본적 사고를 담고 있는 것으로서 '새로운 피조물'(            , a new creation)과 '중생'(            , regeneration)의 개념을 들 수 있다.'          -   '는 고린도후서 5, 6장 그리고 갈라디아 6:15에서 그리고 '            '는 디도서 3:5에 나타난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용어의 종말론적 성격에 관해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는 표현에서, 옛 것들은 사라지고 새 것들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더욱 구체화된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어구가 나타나는 곳마다 그리스도는 사물의 새 질서요 중심요소이며, 세계질서의 창시자로 묘사하고 있다.
   디도서 3:5에 나타나는 '            '는 용어도 고유한 구원론적 의미의 '       (bath, washing of baptism: 씻음, 세례)을 나타내는 데, 성령으로 깨끗이 씻어서 다시 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심을 강하게 드러낸다. 우리 양심에 관한 씻음(세례)은 분명히 현재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속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링게네시아'에 속한다는 사실은 중생의 개념이 미래의 삶에 대한 명확한 함의를 나타낸다.
 
  (2) 구원의 개념
   현재와 미래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 주는 '구원'(       )의 문제는 아주 실제적인 관심 때문에 다른 어떤 곳에서 보다 쉽게 도출되리라는 기대는 배제하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바울의 가르침 중에는, 현재의 경험을 그 원래의 배경으로부터 구분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현재의 구원 향유와 그 선취가 명백한 구별 없이 혼합된 개념만이 나타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라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구원을 미래적인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가장 쉽게 해석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여기서 구원을 이루라는 동사는 이 본문에 대한 주해에서 흔히 지적되는 것처럼 노력을 통하여 그 안에 포함된 잠재력을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활동을 통하여 마지막 구원에 자신이 적합하게 하고, 그 구원을 확신하라고 권고 받는 것이다(cf. 고후 4:17; 5:5, 7:10). 바울은 자신의 구원은 자신의 시련에, 그리고 독자의 구원은 그들의 시련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3) 칭의의 교리
   칭의(Justfication)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처음에 그것을 형성했던 종말론적 기원과 후에 그것을 계속하여 특징지었던 그 관점과 미래 삶과의 상호의존을 찾아내는 일은 아주 세밀한 조사를 필요로 한다. 칭의(稱義)란 '생명의 칭의'(              )이고 여기서 의롭다고 선언된 생명은 그 결과 끝없는 삶이고, 신자들이 그 생명 안에서 "다스리라"고 약속된 그런 삶이다(cf. 롬 5:8-21). 종교개혁시대의 여러 신학자들은 칭의가 바울 신학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브레데(William Wrede)를 위시한 현금의 많은 신학자들은 칭의를 유대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일시적인 논쟁적 개념으로 일축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칭의 교리를 새 시대의 출현과 동시에 거론하여야 한다. 그 출현을 입증하는 것은 곧 성령의 오심이기 때문이다. 칭의란 마지막 날에 있을 종말론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이미 역사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칭의는 실현된 종말론이다. 칭의는 구약의 의(義)개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져야 한다. 구약에서의 의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의로운 분인 동시에 심판주이다. 불의한 사람은 정죄 받고, 의는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따라서 의는 법정적이며 마지막 날에 종말론적으로 심판하실 하나님에 의한 사면을 전제로 한다.
     다른 신약저자들과 같이 바울에 있어서도 마지막 심판은 행위에 근거한다. 행위심판의 교리는 바울신학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율법의 완성을 최후의 심판과 일관성 있게 연결시키고 있다.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의 각 조항을 낱낱이 모두 행함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율법의 참된 목적과 정신이 만족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율법의 완성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자에게는 율법의 종말론적인 정죄(定罪) 선언이 있게 된다. 그런 자는 영생에 이를 수 없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율법의 완성이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다스림에 순복하는 삶의 결과이다.
  

  (4) 성령의 문제
   사도의 구원론에 미친 가르침의 네 번째 요소는 성령(      )의 중요성과 그 기능에 관한 것이다. 바울의 성령론의 독특성은 그가 성령의 사역을 신자들 전체에 보편적으로 그리고 골고루 퍼지며, 개개인의 삶의 전 영역(의식, 무의식, 종교적, 윤리적을 망라함)에 깊이 미친다고 보는 데 있다. 바울에 있어서 성령적(혹은 영적, pneumatic)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초자연적(supernatural)이라는 것과 동의어로 쓰인다. 사도에 있어서 성령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오는 세상에서의 삶과 그 실존 방식과 오는 세상이 하늘에서 지금도 이미 실현된, 그것의 선취된 형태를 특징지우는 종말론적이고 천상적 영역의 요소였다는 가정에 의해 제시될 수 있다. 사도에 있어서 성령의 임재와 활동은 필연적으로 구속의 영역 내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요소들이 받아들여진다면, 바울의 사상체계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것이 구원론적인 것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선규정적(predeterminative)인 것으로 나타난다.
 
 2. 주님의 강림에 대한 바울의 관점  

   종말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두 가지 종국적 사건은 부활과 심판이다.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성에 빠진 세계의 진전과정의 필연적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 잡혔던 것을 회복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진 곳에서는 이 두 가지 성취 자체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를 하나하나 보이며, 그것을 배제하는 역할을 한다. 구속사의 마지막 사건에서 부활과 심판이라는 이 양면은 특별한 메시야적인 색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구약에서는 여러 번 심판과 변혁에 의한 사물의 종결이 메시야적 도움이 없이 여호와 자신의 현현(顯現)과 연관되었다. 우리가 종말론을 고찰할 때, 그리스도의 강림은 매우 중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신약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국면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기대이다. 사실상 이러한 기대는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다.

  (1) 파루시아
   그리스도의 강림이 파루시아(Parousia)란 형식으로 나타난 경우로서는 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8을 들 수 있다. 이 용어는 원래 일반적인 말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하나의 고유명사로 변하였다. 즉 예수의 강림이란 파루시아를 일컫게 되었다. 그러나 유대 문헌 가운데는 파루시아가 메시아의 강림을 지칭한 일은 없다.
   원래 이 말은 '도착과 현존'의 두 가지 밀접히 연관된 개념을 표시하였다. 즉 파루시아는 도착과 어느 정도의 시간적으로 현존해 있음을 나타낸다. 파루시아란 그 정적(靜的)인 의미가 원래적인 것이었고, 이것으로부터 다른 의미가 발전된 것으로 생각되어져 왔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말에는 '다시'란 개념은 없다. 즉 이 명사는 도착을 의미하지 귀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말은 '재림'(再臨, second coming)이라고 옮길 수 없는 것이다.
   바울에 있어서 사건으로서의 파루시아는 격변적(激變的)이다. 그 개념 내적 발전이나, 그 사건의 이중화나 삼중화의 흔적은 어디에나 없다. 그러므로 파루시아는 일련의 사건이 아니라, 어느 한 점에 이루어질 사건이다. 물론 강림이 천년왕국을 가져오는가, 아니면 영원한 상태를 가져오는가 하는 문제는 이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결정될 수 없는 것이다.

  (2) 계시
   그리스도의 강림을 뜻하는 두 번째 용어로서 계시(revelation,           )라는 말은 살후 1:7, 고전 1:7, 3:13, cf. 롬 2:5; 8:18에 나타난다. '메시야의 계시'란 개념은 기독교보다 더 오랜 것이다. 이 개념은 예수가 승천함으로써 그의 숨겨진 삶이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마지막 날 그가 다시 공개적으로 나타나심을 통하여 그쳐지게 되리라는 신념에서 발생한 말이 아니다. 옛 종말론은 이미 이 계시함의 이중적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 개념이 전적으로 지상적인 영역 안에서 움직였다. 즉 숨기는 것과 드러내는 것 모두가 땅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          '라는 용어에 부과된 의미는 파루시아란 말에 의해서 전달되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 파루시아는 주로 신자들에 관심하고, 계시(啓示)는 하나님 백성의 대적들에게 관심한다. 살후 1:7-8에는 형벌적인 계시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라." 신자들도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계시'의 성격을 갖는다. 예수의 종말론적 계시는 명백히 순간적이고, 이적적인 행위의 특성을 갖는다.
  
  (3) 그 날
그리스도의 강림을 지칭하는 세 번째 용어는 '그 날'(       , 살전 5:4; 고후 3:13; cf. 히 10:25)이다. 이 말은 여러 부가어와 함께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바울의 서신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긴 지칭들이 나타난다.
1) "주의 날"(                  , 살전  5:2; 살후 2:2; 고전 5:5;  cf. 행 2:20; 3:10) 
  2) "우리 주의 날"(                     , 고전 1:8)
  3) "주 예수의 날"(                        , 고후 1:14)
  4) "예수 그리스도의 날"(                     , 빌 1:6)
  5) "그리스도의 날"(               , 빌 1:10; 2:16)
   이중 "주의 날"(                  )이란 말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이란 어구를 옮긴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구절에서는 그 구절에서 언급된 주가 여호와(여호와  아도나이  주)를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 예수를 언급하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또한 날이란 말의 취지와 그 함의에서도 여러 이론들이 주장되고 있는데, 그 어느 것도 절대로 확실한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날을 가지실 승리의 용사로서 여호와의 개념이 있다고 한다.
   바울의 글에도 이러한 생각을 지지할 만한 몇몇 구절들이 발견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개념의 기원이 법정적(法定的) 의미에서 심판 용어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한다. 즉 재판장이나 법정은 그 법정이 개정된 그들의 날을 갖는다는 말이다. 심판 날 개념은 "주의 날"(                  )이란 어구와 쉽게 연관될 수 있었으니, 바울은 이 개념을 사용하는 곳마다 거룩한 삶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재적 형벌 개념과 순전히 법정적인 개념(forensic conception)이 항상 분명하게 구별될 수 없었다는 것은 유념되어야 한다.
   몇몇 구절에서 바울은 '날'이란 말을 연대기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서의 빛을 밤의 어두움과 대립되는, 주의 날을 상징하는 낮에 속하는 속성으로 연관시킨다. 정서적이든 종교적이든 빛이란 영적 기쁨에 대한 물리적 유비 구실을 한다. 최소한 부분적 해석에 의해서라도 이런 용법과 연관되는 두 가지 대표적 구절은 롬 13:11-14절과 살전 5:1-8절이다. 전자에 의하면, 세상의 밤이 대개 그러하듯이 방탕, 음란, 질투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악한 때를 가리키고 있다. 밤이 깊었으므로 깨어서 부도덕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빛의 갑옷'(armor of light)을 입고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급박한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살전 5:5절의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는 로마서 13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것을 상기시킨다. 이런 사유의 선을 따라 가면 위의 언급된 구절에서 "여호와의 날"에 대한 정당한 의역은 "여호와의 빛의 통치(의 날)"과 "그것을 도입하는 여명의 때" 모두가 될 것이다. 사도는 이러한 주제를 아주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용어들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가졌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사상에서 작용하고 있었던 종말론의 構成的이고 歷史 形成的 역할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도의 종말론적 위기 자체가 역사 과정과 연관이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두 개의 연속된 세계라는 구조 자체가 恣意的으로 선택된 어느 순간에 갑자기 오는 세상이 현 세상을 대치하리라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사도는 구체적으로 현 세대의 지속이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동시에 오는 세상의 도착점을 분명히 확정시킨다. 여기서 진정한 바울적인 종말론의 매우 조직적인 구도, 즉 바울 종말론의 모델이며 정점은 로마서 8:18-23에 나타난다. 이 단락의 사유는 현재적인 고난으로 출발하여 이 고난에 대조되는 영광으로 나아가며(18절), 이 고난의 미래적인 실제 이유를 세 단계의 점층적인 표현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피조물의 탄식"(19-22절), "그리스도인의 탄식"(23-25절), 그리고 "성령의 탄식"(26-27절)이다. 이를 분설 하면 다음과 같다.
1) 피조물의 탄식: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피조물의 탄식은 믿는 자들의 현재적인 아들 됨이(14-16절) 아직은 세상에 감추어진 실체임을 보여 준다.
2) 그리스도인의 탄식: 위와는 반대로 의심의 여지없이 구원은 일어났다. 그러나 이 구원은 이 세상에서는 희망으로 변화된다. 그렇다고 현재적인 종말이 거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현재적 종말의 개념 규정이 중요하다. 즉 이 희망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개입에 근거하며, 그 자체로서 구원의 현재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인 유보와 현재적인 종말론이 사도에게는 전혀 대립적이 아니며 오히려 현재적인 선물이기 때문에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주어졌다.
3) 성령의 탄식: 구원에 대한 확신은 세상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도 파기될 수 없으며 무효화할 수도 없다. 또 구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믿음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에게는 모든 것, 즉 시간과 역사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 善을 이룬다.   

 3. 이미와 아직의 긴장

   신약의 종말론을 특징지워 주는 특성은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란 신자들이 향유(享有)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은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란 종말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이, 다시 말해서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됨'(already fulfilled)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함'(not yet completed)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감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신약의 전체 신학구조는 바로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종말의 가장 중요한 신호는 예수의 부활과 교회에 강림하신 성령이다.
   갈라디아 4:4에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                  )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 바울이 의도하는 "때가 차매"라는 이 말은 확정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사의 이전 단계들의 질서 있는 전개를 말한다. 물론 이 구절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뜻한다. 그러나 두 '강림'사이에 있는 전체적인 드라마가 바울에 있어서는 하나의 단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어서 마지막까지의 질서 있는 진전이 초림의 특성이었다면, 전체의 절정적인 종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접근을 하여야 한다. 
  여기서 "       "(충만, 가득참, fulness)라는 헬라어는 '성취', 혹은 '완성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시간이 차매 나타나셨다는 뜻은 역사의 위대한 중심점이 도착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말들이 의도하는 중심사상은 구약의 색조로 바라보면, 신약시대는 "성취의 때"라는 것이다. 수년 후 서신에서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희에게 당한 일들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여기에서도 분명히 '성취'의 의미가 나타나 있다.
 

Ⅲ.  救援史로서의  創造와  새 創造

   성서의 창조신앙은 구약성서에 있어서는 물론, 신약성서에 있어서도 구원의 사건의 경험과 구원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통하여 규정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기독교는 그들의 방법에 따라 창조의 사역에 대한 구원론적인 이해와 구원의 사건에 대한 종말론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구원의 경험에 있어서 '나의' 혹은 '우리의' 구원만이 경험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이 경험되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구원의 경험에는 언제나 우주적인 의미가 숨어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구원의 경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성서적 창조신앙의 첫 번째 형태는 출애굽, 계약, 성지점령 등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생성되었으며, 이 경험들을 통하여 결정되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한 하나님은 세계를 카오스로부터 이끌어 내었고 이 세계의 질서들을 그의 계약의 질서로 삼으시는 창조자이시다. 태초의 창조는 파라디스의 원초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 이전의 前歷史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이해된다. 창조의 순서는 하나의 역사의 형태로 이야기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세계와의 역사는 타락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함께 시작한다. 세계의 창조는 세계의 역사를 향하여 열려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창조와 함께 시간(      )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창조세계를 본질적으로 구성하는 한 가지 요인은 시간(Zeit)이다. 세계는 하나의 역사(Geschichte)를 지닌다. 그리스도가 세계의 중심이라면, 그는 시간의 중심이기도 하다. 이 시간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이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으로 살아 있을 동안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시간은 새 시간이고 새로운 것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최종시간이다. 그러나 최종시간 그 자체가 시간의 종말은 아니다. 최종시간이란 그리스도 사건의 빛 속에서 장차 도래할 모든 시기에 살게되는 인간들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고, 그리하여 영원으로부터 시간 속에서 기초가 마련되어 있는 것을 빛에로 이끌어 와야 하는 것이다. 

 1. 구원의 새로운 경험으로서의  창조

   창조의 메시야적 의미는 태초의 창조를 완성한다. 창조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새로운 경험을 통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과 계약의 경험이 최초의 창조기사를 결정하였고 구원에 대한 예언자들의 희망이 새로운 창조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기독교적인 구원의 경험과 희망은 기독교적인 창조의 신앙을 결정한다. 실제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Mediator)로서 예정되어 있었다. 현재의 구속운동은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실제로 그의 지상의 몸을 형성하는 교회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신앙으로만 오로지 이해할 수 있지만, 교회로부터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하신 통치권을 하늘과 땅에서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더욱이 종말에 있을 전체 구속계획의 완성을 이룰 중보자 이시다. 그런 사실이 그가 지상에 강림하는 이유이다. 종말에 있을 창조는 전체 구속과정과 같이 인간 구원의 중보자인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의 사역을 근거해서 성령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죽을 몸과 함께 모든 피조물을 변형시킬 것이다. 또 거기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새 하늘 새 땅'이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성취될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자기에게로 복종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니라"(고전 15:28)라는 말씀처럼 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실제 그리스도의 線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창조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고난의 종으로서 전체 과정을 완성시키고 현재 통치하시는 주로서, 새 창조의 중보자의 신분으로서, 강림의 인자이신 그리스도, 오직 한 분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구속사에서 시간의 연속적인 단계 가운데서 나타난 그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동일한 그리스도이시다. 사실 예수가 하나님의 수난의 종으로 그리고 구름을 타고 강림할 인자로서의 사명, 곧 이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하며 결합시킬 때 그는 우리에게 구원사로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는 것이다.      

2. 성령에 의한 새로운 창조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위한 근거가 된다면, 그는 또한 피조물 자체의 존재에 대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구원의 근거로서 창조 전체의 목표라면 영원 전부터 창조의 근거이다. 이러한 진술들에 대한 최초의 출발점은 바울에게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주권의 세계성을 근거시키고, 신앙인들의 범세계적인 자유를 기술하기 위한 보조적인 생각들이 나타났다. 고린도에서 우상에 바친 고기를 살 것인지 혹은 그것을 멀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여기서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병행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한데서 창조가 아버지와 아들 양쪽에 관련해서 달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사도 바울의 구원 사상에 있어서의 핵심은 "주안에"(         ) 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되며 죄 많던 인간이 그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고 성화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 되기 위해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하였으며,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고 하였다.  또한 이를 지키는 자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3).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니라"(롬 6:11) 표현하였다. 이 성화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신자가 도덕적으로 정결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서 거룩해짐을 성화 또는 거듭난 성도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하나님께 성별 되어 택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믿어져 그 은혜가 우리 마음에 들어옴으로 이루어지며, 이로 인하여 신자들이 마음의 악한 생각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다 하였다(롬 1:1-2; 고후 3:17).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 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였으며(롬 8:1-2),  그러므로 우리는 주신 은혜와 진리 안에서 거듭난 자 되어 그 안에서 지혜를 얻어 의와 거룩함으로 날로 새로와 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과정으로서 그 출발이 중생과 함께 시작되지만, 죽음에 이르러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즉 중생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형성되지만 모든 부분에서의 완전성은 아직 부족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지만, 믿는 자로서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도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삶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썩을 몸을 자신의 신령한 몸, 영원한 영광의 몸에 동참하도록 변화시킨 것이며(고전 15:42-49),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이며 이것이 성화의 과정에서의 영광스런 결실이라 하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 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 되면 새로운 피조물, 즉 죄로 말미암아 썩어질 몸이 해방되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완전한 새 것으로 성화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여 예수의 말씀, 사역, 그리고 인격에 의해 종말의 성취와 완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실패한 방랑 설교자로서의 예수의 양상과 죄수로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외관상 그의 도래에서 나타난 "종말"의 개시로서의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나 인자의 도래로서의 왕국의 종말론적 현실화가 깊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폐성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인격 안에서 구약성서적 약속의 실현은, 하나님의 임박하심이 시간적 임박으로서 진술되어야 할 정도로, "임박한 하나님"을 시급한 문제로 만든다. 예수의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러한 통치가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에서 시간적 진술들의 부적합성은 "아직 아님"과 "이미 이루어짐"과 같은 명백히 역설적인 진단들 속에서 완화된다.
 
 3. 성령의 은사로서의 종말론

   사도 바울에 있어서 성령은 종말론적인 은사(恩賜)의 표지(標識)로 이해하였다. 즉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새 생명이라고 인식하였다. 성령과 종말론의 연관성은 멀리 구약에서부터도 나타난다. 히브리어와 다른 셈어에서 '루아흐'(   )의 근본적 의미는 대기의 움직임(air in motion)이고, 희랍어 '프뉴마'(      )에서는 주로 정태적(靜態的)인 공기(air at rest)와 연관된 듯 하다. 이것은 성령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는 히브리어가 적합하다. 또한 이는 높은 영역에서의 초자연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궁극적, 종말론적 기능과도 잘 어울린다. 이 같은 연관에 따라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본다.     첫째, 성경은 어떤 초자연적인 비상한 표현을 통하여 미래 세계의 가까웠음을 선포한다. 요엘 2:28ff에서는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는 것이 여호와의 두렵고 큰 날이 이르기 전에 일어난다고 묘사되고 있다. 둘째, 성령은 메시야를 그 직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구비시킴으로써 종말론 영역 안으로 들어온다. 이는 메시야가 성령을 영구한 소유로 받는 일이 언급된 구절들에 나타나 있다(사 11:2; 28:6; 42:1). 셋째, 성령은 이스라엘의 미래 새 생명의 원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종말론적 상태 자체를 시사한다(사 32:15-17; 44:3; 겔 36:27; 37:14). 넷째, 무엇보다도 구약에서는 성령이라는 말이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성령의 종말론적 기능의 양면을 안내자로 취할 수 있다. 즉 성령은 부활의 원천이고, 또 한편으로는 부활 생명의 기층(基層), 즉 그 안에서 오는 세대의 삶이 살아질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창조주이며, 유지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현존하는 요소로서의 성령의 구원론적이고 그로부터 미래에로 움직여 나가서 성령의 종말론적 과제는 어떤 독특한 개념이 아니라, 마지막이라는 특정한 상황에 적용되는 성령의 일반적인 과제라는 것이 언급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과 관련된 바울의 두 가지 개념, 즉 보증금(arrabon)과 첫 열매(aparche)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보증금
   '보증금'(       )은 상업적으로 사용되는 말로써 전체 지불금 중의 최초의 금액을 뜻하는 헬라어이다. 현재 신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은 양적으로 부분적이긴 하지만, 내세에 속한 것이다(고후 1:22, 5:5). 내세가 오면, 신자는 성령을 충분히 받을 것인데, 그 때는 성령을 통해서 몸까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엡 1:14).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상태에 걸맞는 새로운 하늘의 몸을 준비하셨다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의 보증'(                     )을 주셨다는 것에서 찾고 있다. 성령이 보증의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자신이 나중에 충분히 주어질 것의 잠정적 할당분(a provisional instalment)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을 바라보면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게 될 날을 기대하였다(cf. 고후 5:4). 그날이 오면 우리는 신령한 몸(cf. 고전 15:44), 곧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한(빌 3:21) 몸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있게 될 부활과 내세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신자의 그 삶은 미래의 충만한 삶을 보증하는 삶으로 그치지 않는다. 신자의 현재의 삶은 미래의 충만한 삶의 최초의 단계이며, 양적으로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질적으로 하등의 차이가 없다. 실현된 종말론은 실재적인 종말론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바울 연구자들이 바울 신학의 중심은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첫 열매
   바울이 신자들의 종말론적인 삶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또 다른 표현이 '성령의 첫 열매'(                    , 롬 8:23)이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에게 드려진 첫 열매를 뜻하는데, 바울은 이 단어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사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아직 이 피조계에 만연되어 있는 죄악과 부패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부패와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세의 생명의 첫 열매인 성령을 갖고 있다. 첫 열매는 추수 자체와는 다르지만, 추수할 열매들의 첫 수확임에는 틀림없다. 현재 성령 안에서의 삶은 내세의 삶이며, 충만한 추수의 삶은 아니지만 종말론적인 추수의 최초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이 종말론적인 부활의 시작으로 보았다. 종말론적인 사건인 하나의 부활이 여러 단계를 거쳐서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날에 있을 모든 신자의 부활의 시작이다. 모든 신자의 부활을 추수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 열매로 비유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의 첫 단계이며, 그리스도의 강림의 때에 있게 될 신자의 부활은 두 번째 단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림 후에 있게 될 천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통치가 끝나면, 곧 '     '(telos: 끝)가 오면 부활의 세 번째 단계가 오게 될 것으로 보았다(고전 15:20-24).
   어쨌든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으로 발생하였던 종말적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현된 종말론을 구성하는 여러 종말론적 사건들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이 부활을 기준으로 구속사의 드라마를 재구성하였다. 부활은 역사 안에 생명과 불멸을 가져온 사건이다(딤후 1:10).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연구할 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일시에 나타난 것(고전 15:4-8)과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그들은 또한 '부활의 증인'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Ⅳ.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 結 論에 갈음하여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종말 때의 구원의 '취득과 획득'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한 신앙은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전제하여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의 인격 내지는 성령의 현재로서 현실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지하도록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종말론적 새 창조는 현실성이다. 비록 종말론적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감추어졌지만, 거기에는 선취하는 약속과 성취하는 완성의 대립이 결코 지배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그 대립을 시간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창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화신학을 역설한 샤르댕(Teihard de Chardin)이 발견한 중요한 사상은 진화, 즉 생물의 진화는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이다. 샤르댕의 사상 이후, 20세기 최후의 해(年)를 맞이하고 있는 현재의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다음 두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다. 먼저 태초의 창조는 진통적 신학이 알고 있듯이 無로부터의 창조이다. 이후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계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단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有에서 有에로의 시간적 계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속성에는 새로운 창조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이 새로운 창조행위의 종국을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태초의 창조로만 단순화하여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가 된다. 이에 따라서 태초의 창조행위가 가장 이상적인 창조행위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가장 이상적인 창조는 역사의 여기에 지금, 그리고 미래에 있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기독교 창조신학의 목표는 창조의 보전이라는 말과 함께 창조의 완성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 전자를 우리는 수구적인 원상회복의 창조라고 한다면, 후자는 미래를 향한 진취적인 새로운 창조를 완성해 나아가는 도상에 있다고 하여야 한다. 성령의 새 창조사역은 창조세계를 완성시키는 사역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의 새 창조사역의 종국은 눈물과 슬픔과 애곡과 죽음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것이다. 성령은 온 세계를 새롭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주의 영을 보내어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령사역의 종국적인 목표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한 모습과 같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가르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롬 5:21)이라고 하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산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롬 6:11)라고 말함으로써 종말의 사건은 세상의 종말이라기보다 삶이 회복된 현재적인 체험으로 인지시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결합과 일치는 기독교 종말론의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다. 전체로서의 세계 창조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지향하고, 이 일치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류의 일치 속에서 실현된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저 멀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종말론적 완성을 위해서 교회는 지속해서 그리고 취소할 수 없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머물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이 주님의 지상명령인 말씀의 선포와 교회의 선교활동이 필요하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창조세계의 발전은 그 목표에 이르게 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 이 상 -          1999.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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