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신학과 철학의 오늘
 
 
1. 인간과 종교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가 분파의 결과로 인해서 문화 의식과 사회의 근거로서의 당연한 효력을 상실한 이후로, 즉 17세기 이후로 근대 문화에서는 인간 이해가 일종의 화두로 부각되었다. 빌헬름 딜타이는 이런 과정을 서구 문명의 문화사에서 그 효과가 완전하게 나타난 가장 중요한 사실로 인식했다. 신관으로부터 일어난 세계 개념의 재건은 순수하게 철학적으로, 즉 종교 영역의 종파적 대립과 무관하게 관철되었는데, 초기 근대철학은 이러한 세계 개념의 재건을 위해서 그 단초를 제공했다. 죤 로크는 이런 기능을 계속적으로 기독교적인 계시종교에 넘겨줌으로써 이런 관점에서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흄과 칸트는 인간의 경험과 주관에 집중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종교를 반대하는 논쟁적인 전환은 없었다. 헤겔은 신관으로부터 발생하는 세계 개념의 철학적 재건을 다시 한번 더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이런 기본 구상을 확정적인, 그리고 고전적으로 완성된 형태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헤겔을 반대하는 입장은 철학적 의식의 토대를 인간학에 정초 했으며, 또한 사실적인 상위를 주장하는 신관의 요구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워나갔다. 이러한 예민해진 형식으로 인간학을 향한 방향전환은 철학적 의식에서 오늘날도 여전히 근본을 형성하고 있다. 비록 한편으로 막스 쉘러, 헬무트 플레스너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또는 칼 야스퍼스나 앙리 베르그송의 실존철학에서처럼 이런 기반에 근거해서 인간의 현존형식에서 특별하고 포기될 수 없는 주제인 인간의 종교성이 정당화되고 있지만 말이다.
기독교 신학도 역시 오늘날 일단 인간학적 기반에서 기독교 신앙의 인간적 보편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비록 이런 기반이 기독교 신관과 그 계시의 진리를 확증하는 데 충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기독교적 하나님이 진리라고 주장하려면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작품인 세계와 역사를 최소한이나마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인간은 당연히 다시금 세계와 그 역사에 속하기 때문에 인간학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보편 타당성이 연관되어 있어야 할 제1의 주제이며, 제2의 주제가 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결코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으며, 종교는 오히려 인간의 자기 오해에서 발생하여 인간의 자기 의식에서 공상적으로 배가된 것이라는 포이에르바흐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종교적인 하나님 이해가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여타의 모든 질문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도 역시 여기서 예외가 되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기독교 신학에는 일종의 선결되어야 사안이 있는 셈이다. 비록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리 요청에 대해서 최종적인 결정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경우에 다음과 같은 쉴라이에르마허의 논증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즉 인간의 정서에 있는 “고유한 영역”이 종교에 해당된다는 논증이 말이다. 이런 사태가 포이에르바흐가 말하는 의미에서 심리학적으로 상대화되고 만다면 이것은 아예 말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이미 헤겔은 이런 의미에서 쉴라이에르마허의 경험 주관주의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옳은 비판이다. 우리가 쉴라이에르마허의 핵심적 논증을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밝혀보기 위해서는 (그가 두 번째 강연에서 피력하고 있듯이) 종교적 직관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허의 개념을 데카르트에 근거해서 확실하게 해석해야만 한다. 즉 그의 논증은 무한자를 유한자에 대한 모든 이해 앞에, 또는 그 안에서 상위에 놓으려는 시도라고 말이다. 인간의식의 본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통찰은 인간의 생명 형식 일반의 독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광범위한 토대를 그 나름대로 필요로 한다. 이러한 토대는 막스 쉘러와 헬무트 플레스너에 의해서 인간적 생명 형식을 “세계 개방적인”, 편심적으로 규정된 본질로 설명됨으로써 세워졌다. 이 설명은 인간 태도의 독특성이라는 관점과 인간의 육체적 조직에서 볼 수 있는 그 독특성의 토대에서 전개된 것이다. 이로써 인간학적 기반은 주어진 셈이다. 무한자에 대한 앞서의 직관을 통해서 모든 유한한 지각의 조건에 대한 데카르트의 통찰은, 또한 종교적 직관에 대한 쉴라이에르마허의 개념은, 그리고 자기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아의 자기 구성적 가능성을 향한 피히테의 통찰은 이런 인간학적 기반과 연관되어서 그 무게를 획득하고 자리를 찾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놓여있는 유한한 자아의 불가피한 자기 절대화에 대해서 내린 헤겔의 명제가 이것에 연루되었다. 자기 절대화로 인해 빚어지는 생할태도의 의심하는 성격에 대한 키에르케고오르의 증명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에르케고오르는 초기 헤겔주의를 통해서 주어진 논쟁점에 걸맞도록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대립을, 유한자와 무한자의 대립을 지나칠 정도로 교의학적으로 논증해보고자 했다. 이런 논증의 취약성은 데카르트와, 특히 헤겔의 판단에 의해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결국은 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된, 그리고 보다 새로운 철학사에 깊이 뿌리를 둔 현상적 토대가 주어졌다. 이는 곧 종교적 주제가 인간의 본성에서 구성적이지 않다는 관점에서 인간을 해석하는 입장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를 갖고 반론을 제기하려는 것이다. 포이에르바흐, 니이체, 하이덱거, 싸르트르 등과 같은 이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 말이다.
 
 
2. 철학적 신학과 역사적 종교
 
신학과 철학은 종교적 주제가 인간 본성에 구성적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상호 협조하여 철학적 신학의 토대를, 즉 철학적 神개념의 토대를 새롭게 세울 수 있을까? 여기에는 의심을 받을만한 동기가 있다. 만약 우리가 고대 시대에서 철학적 신학이 발생하게 된 조건들을 곧이곧대로 유지한다면, 그리고 신학과 철학의 중세기적 공생 기능을, 또한 17세기와 19세기 사이에 있었던 철학적 신학의 기능을 곧이곧대로 유지한다면 이러한 의심은 증폭되고 말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전통적 종교의 神표상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신화적 전승을 비판한 철학자들은 철학의 우선적인 과업이 신적인 것의 참된 본성을 코스모스의 단일성에 있는 근원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었다. 철학이 종교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그것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은 철학자들이 다신론적 민족신앙에 대립시켰던 유일신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와 철학의 역사성에 대한 관점이 단순하다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 역사성은 철학의 경우에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철학적 유일신론은 기독교의 역사적 토대에서 더 이상 역사적인 종교의 대안으로 등장할 수 없었다. 오히려 역사적 종교를 준비하거나, 아니면 과도하게 높이 평가되었다. 역사적 종교를 준비한다는 말은 기독교의 계시를 인식하기 위해서 철학적 신론을 자연적 神인식의 前단계로 이해하는 중세기적 모델이었다. 이런 모델은 자체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철학자들의 자연 신학은 그 역사적 유래와 본질적 성격에 따라서 초자연적인 보충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히려 신성의 본성에 속한 그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은 기독교가 유럽 교회의 분열과 그 결과로 인해서 문화와 사회에 토대하고 있던 권위를 상실했을 때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데카르트 이후로 철학적 신학의 갱신은 문화의 공식적 의식에서 신학의 보편 타당한 토대를 제시하는 기능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을 교체해야한다는 요청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종파적 싸움 때문에 기독교 신학은 이런 기능을 이성의 판단에 충분히 납득할 정도로 생산해낼 수 없었다. 데카르트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적 체계는 신학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의 가능성은 인간적 삶의 역사성과 문화적 체계의 발견 이후로, 즉 이미 헤르더 이후로, 확실하게는 헤겔 이후로 끝장나고 말았다.
헤겔은 철학적 신론을 그저 단순하게 역사적으로 현존적인 종교의 자리에 정립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앞서 주어진 종교를 개념화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로써 종교와 철학의 관계가 새롭게 규정되었다. 즉 철학적 신론은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종교에 의존하고 있으며, 다만 그 내용을 개념화할 수 있을 뿐이며, 또한 종교에 대립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인 게 아니다. 헤겔은 물론 개념작업이 철학적 개념 안으로 종교를 지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적 인식이 절대적인 이성에 토대를 둔 진리의 인식으로 구상될 수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자기 내부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진리의 인식으로서 구상될 수 있다는 사실의 이중성이 이것과 연결되었다. 자기 스스로 실현되는 절대 관념의 논리학에 대한 헤겔의 학설에 근거한 입장은 철학적 신론이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종교의 단계에 연결되어 머물러 있다는 그의 통찰과 긴장관계에 있다. 철학적 반성이 그 철학보다 선행하는 종교에 자리하고 있는 철학의 역사적 예정조건을 결코 완전하게 불러낼 수 없으며, 혹은 능가할 수도 없다는 인식이 이런 통찰의 수미일관에 속해 있어야만 하는지 모른다. 철학적 반성의 거점적 속박이 종교적 진리에 고백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로써 유한성과 잠정성이 드러날 지도 모른다. 철학의 반성적 거점이 갖는 유한성이 더 이상 종교에 대해서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헤겔 철학은 후세대를 통해서 그렇게 용이하게 뒷받침을 받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지 철학보다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종교를 통해서 절대를 철학적으로 주제화하는 역사적 조건을 통찰함으로써 얻어진 귀결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순수 이성에서 발생하는 독립적이고 철학적인 신학 대신에, 한편으로는 절대 일자의 기능에 걸맞은 神표상의 기능에 대한 조건을 명확하게 하는 것만이,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철학의 기능에 대한 조건을 명확하게 하는 것만이 철학의 입장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선행하는 종교 의식의 진리 내용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그것이다.
철학보다 선행하는 종교에 대한 이러한 반성은 신성에 대한 종교적 표상이 단지 인간의 영상(映像)으로, 또한 그 인간적 불안과 갈망의 영상으로 제시되는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다. 만약 인간 본성과 모든 유한자가 종교철학을 능가하는 현실성에, 즉 종교에서 주제화된 현실성에 놓여있다는 점을 숙고한다면 종교철학은 종교가 신적인 현실성의 (자기)계시를 자기 증거로 삼는 것에 대해서 진지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철학은 신성에 대한 종교의 주장을 자기에게 부여된 기능에 근거해서 재단할 수 있다. 이것은 초기 그리스 철학이 종교를 비판한 것과 같으며, 또한 헤겔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기독교의 신학적 언급을 판단하기 위해서 실제로 무한한 것의 개념을 명확하게 그 준거로 삼은 것과 같다. 철학은 철학적 신학을 종교 전통에 대한 대안으로 삼지 않은 채 종교적 진리요청의 타당성을 판단하기 위해서 이러한 준거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 철학은 일정한 종교 전통에 비판적인 태도만을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종교를 비교함으로써 그런 작업을 펼쳐나갈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어떤 분명한 종교적 전승에 얽매인 신학과 다르며, 또한 그 종교적 전승의 진리 요청을 단순히 해명하는 신학과도 다른 것이다. 이로써 결국은 상이한 종교 전승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주제화할 수 있는 종교철학이 일정한 종교 신학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전망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주장을 해명해서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가 명백한 철학적 비판의 준거에 타당하도록 애를 쓰게 될 것이다. 이 준거가 그 나름대로 재검사를 버텨내는 한에서 말이다. 인류의 종교史를 고려하지 않은 채 구성된 단순 이성에서 발생하는 독립적이고 철학적인 신학의 목표는 철학의식의 낡아빠진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분명히 제거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낡아빠진 의식의 자리에서는 철학적 신학이 그 고유한 사상의 역사적 先조건들을 충분히 의식해내지 못했다.
 
3. 세계 개념과 신관
 
실증학문의 시대에도 역시 기지(旣知)의 생명에 대해서 종합적이고 반성적인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과업이 철학에게 있다(Dieter Henrich). 자기 의식의 문제나 자리매김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장 넓은 의미에, 동료성의 영역에서, 또한 세계 경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경험 의식도 역시 여기에 속한다. 철학적 반성이 기지의 생명 전체에 대한 질문을 포기했기 때문에 세계개념을 우리의 경험에 대상적인 자리에 있는 현실성의 총괄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철학적 반성에게 주어진다. 비록 세계를 전체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경험 지평의 실제적인 제한성을 늘 벗어나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세계 지평의 상대성으로 인해서 철학은 칸트가 생각하는 대로 세계 전체의 단일성을 단순 관념으로 다룰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 전체는 바로 모든 유한한 경험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자연과학적 우주론에서 우주는 현재적 앎의 토대로부터 특별히 마무리하는 자연과학적 이론형성의 대상이 되었다.
기지의 생명 단일성을 철학적으로 확증하기 위한 세계 개념의 불가피성은 세계 개념과 신관이 끊임없이 상호적으로 연관되어있기 때문에 신학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의미심장하다. 다음과 같은 사실도 이에 대한 이유이다. 즉 세계의 근원이며 창시자인 한 하나님을 생각해야만 한다는 사실, 또한 단일성으로서의 세계는 그 단일성의 현상이 다수라는 점에서 이런 단일성의 기초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 기초는 단순히 세계의 구성요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세계 이해는 하나님 개념에 반응하며, 그 역으로도 작용한다. 만약 세계가 시작할 때 이미 그 기초가 짜여진 질서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미 그때부터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질서라고 한다면 세계의 창시자로 생각되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사상은 역사 과정으로서의 세계가 여전히 개방된 미래를 지향한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비쳐질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역으로 하나님이 자기 본성적 필연성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자유에서 세계를 창조한 자이며, 세계의 자유로운 근원이라고 한다면, 세계를 이해할 때 세계 현존의 우연성은 전체적인 사건에서, 그리고 모든 개개 사건에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자면 다음의 몇 가지가 이에 해당된다. 초기 기독교가 세계 생성에 대한 플라토니즘적인 표상과 벌였던 논쟁, 高중세기의 기독교 신학이 세계 근원의 우연성에 대해서 아라비아 철학과 벌였던 논쟁, 칸트가 라이프니쯔의 주장에 대해서 반대했던 입장이 그런 것들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쯔의 주장은 하나님의 지혜에 토대를 둔 창조 모델에 따라서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전체 사건이나 개체 사건에서 세계가 우연하다는 주제는 오늘날 신학과 세계 개념의 관계에서도 여전히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여기서 세계 개념과 특수한 리얼리티에 대한 존재론적 기초는 서로간에 상관적이다.
사물의 리얼리티를 궁극적으로 생기에 기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우연성의 동기에 가장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자연 철학적 체계에서 제시된 것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과 반대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리얼리티에 담긴 역사성이 그 생기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딜타이가 다른 전제로부터, 그러나 비슷한 결과를 통해서 발전시킨 관점이다. 즉 인간 경험의 역사성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그와 조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연구함으로서 발전시킨 관점이다. 화이트헤드는 딜타이처럼, 혹은 과정철학의 설립자인 베르그송처럼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 이외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는 열쇠로서의 인간 경험에 근거를 두고 시작했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그 열쇠는 윌리엄 제임스의 철학적 심리학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출발점이다. 이 철학적 심리학은 모든 것에 기초적인 생기의 주관성 학설을 설명하는 데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다. 딜타이는 개인적인 경험의 역사성을 분석하고, 그 분석을 보편화 시켜서 역사를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데 적용시켰다. 그러나 자연 사건으로 연장되지는 않았다. 물론 딜타이의 철학은 생명철학으로서 베르그송 같은 이들과 이웃지간이었다. 생명철학은 나름대로 자연철학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다른 한편으로 생기 주관성이라는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은 경험과정의 역사성에 대한 딜타이의 분석을 통해서, 또한 베르그송이나 새뮤얼 알렉산더 같은 이들과 더불어 그가 작용을 일으킨 관점을 통해서, 즉 전체가 부분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라는 관점을 통해서 보충될 필요가 있다.
이런 상이한 성향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 형식이 갖는 無시간성과 달리 존재와 시간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내적인 유사성이 있다. 이미 언급된 이런 성향들이 융해되는 데서 철학적 세계 개념이 유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미래 지향적으로 진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미래는 모든 개체 사건의 본질을 뛰어넘어, 그리고 전체 세계의 감각을 뛰어넘어 완전히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이러한 세계 개념은 아마 오늘날 팽창하는 우주라는 자연과학적 세계 모델을 선(善)의 미래가 모든 개체의 본질을 기초한다는 플라톤의 사상과, 또한 기독교적 종말론과 일치시킬 수 있을지 모르며,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 나라의 미래로부터 창조의 역사를 제어한다는 생각과 일치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기초구상은 이미 시간 안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들의 전체를 영원(永遠)이 지켜냄으로써 미래는 영원이 시간 속으로 돌입하는 차원이라는 사상을 통해서 앞서 알려진 같이 보인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모든 피조물과 동시적으로 함께 하는 지평이 곧 공간이라는 이해가 이에 상응하는데, 이 안에서 하나님은 바로 이 독립적인 현존을 자기 옆에 두며, 그리고 병립시킨다.
이상으로 신관과 세계 개념의 공속에 관해서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주제와 그 가능성의 몇 가지가 예시된 셈이다. 이런 공속은 신학과 철학의 공속이 더 이상 전통적 의미에서 철학적 신관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인간학을 동반한 채 철학적 세계 개념 작업을 계속 펼침으로써 종교에서 주조된 하나님 표상이나 혹은 절대 현실성 표상을 판단하기 위한 준거를 얻게 되는 경우에 철학적 주제로 머물러 있게 된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과 세계의 현실성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점에서 공동의 주제를 갖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신학이나 철학을 여러 방식으로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식은 이러한 근본적 과업의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물론 철학은 이런 과업에 나섬으로써 자신들의 거대한 전통에 어울리게 된다. 또한 이럴 경우에만 철학은 그 어떤 개체 학문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기능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다루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인간과 세계의 현실성에 대한 전체 이해와 연관시킬 때만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신학은 철학의 비판적이고 교도적인 반성과 상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가 주제로 삼는 신적인 현실성으로부터 인간과 세계가 전체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 철학은 이러한 인간과 세계의 전체적인 구성과 인간의 본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와 그 종교의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는 채 세계 속에서 인간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 철학은 종교를 일종의 순수 철학적인 신론으로 대체해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더라도 신학과 철학 사이의 긴장은 늘 충분할 정도로 상존한다. 왜냐하면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로부터 인간적 현존의 전체와 세계 전체를 숙고해야하지만, 철학적 사유는 인간과 세계 경험으로부터 절대 가운데 있는 자신의 토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12장 신학과 철학.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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