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2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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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古典100 (45) ㅡ 김희보
에밀 (Emilleou de l’Education, 교육사상, 1762) ㅡ루소 (jean-Jacques Rousseau, 프랑스, 1712-78)
인위적인 사회 질서에 대한 순응주의를 거부하고, 어린이의 본성 존중을 주장한 자연교육론.
전 5편의 거작. 추상적인 아름다운 말로 교육의 이상을 말하기는 쉽다. 교육부에서도 할 수 있다. 어떠한 인간을 어떠한 방법으로 육성하는가? 그것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구체적으로 이론을 확립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을 시도한 것이 루소의 <에밀>이다.
이상적인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그 출생에서 결혼 때까지 생동감 있게, 그것을 어느 비평가가 말하듯이 “황금의 펜”으로 묘사한 점에서, 실로 한 편의 낭만이며, 그 성장을 정열로써 이론을 수립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하나의 교육 원리이다. 출판은 1761년. 집필은 루소의 나이 49세 때.
제1편은 젖을 먹는 유아기의 육체 단련. 제2편 3~15세는 감각 교육. 제3편 12~15세는 판단력 양성을 중심으로 하는 이성의 훈련과 手工業(수공업) 기술을 배우는 일. 제4편 15~20세는 “제2의 탄생”에 해당하는 청년기이며, 도덕적 및 종교적 감정의 양성에 따른 이성적 능력을 완성해야 하는 시기.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자연종교론”은 “자연으로 돌아가라” 하는 것을 강조하는 루소의 근본 사상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제5편은 감정을 안정시키고, 가정을 이루며, 사회 생활에 들어가는 인격의 완성기. “혁명이 다가오고 있다” 하는 <에밀> 속의 예언대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789년.
여관의 하녀를 아내로 삼고, 태어난 아이 다섯 명을 잇따라 양육원에 맡긴, 냉정하다기보다도 무정한 아이들의 아버지 루소가 왜 이 자연교육론 <에밀>을 썼는가?
첫째로 부모라는 존재를 교육자로 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세상의 부모는 한결같이 서툴기 짝이 없는 代理(대리)교사가 아닌가. 아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결혼하는 남녀는 전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이 책의 주인공 에밀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다. “나”라는 이름의 哲人(철인)이 뒤따라 에밀을 교육하는 격이다.
둘째로 天命(천명)을 아는 [知天命(지천명)] 오십이 되어서야 인간은 비로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밀>은 단순한 교육론이거나 교육방법론이 아니다. 충생과 동시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職工(직공)이 되어, 그 이후 바랑과 情事(정사)와 명성과 박해의 반생을 살아온 루소의 인생철학이 <에밀>의 배경인 것이다.
“문명인은 나면서 搖籃(요람)에 눕히고, 죽으면 관 속에 놓여 못질을 당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온갖 제도에 묶여 있다. 어디에도 자유는 없다. 하지만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따라서 갓난애 에밀은 우선 발의 자유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어린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보증한다. 갓난애의 울음소리는 어른들의 부정에 대한 분노인 것이다”.
루소의 이 생각 [考察(고찰)]은 문학적인 비유가 아니다. 오늘날 이동심리학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다섯 살 때까지의 감정과 육체 조건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는 어리광을 부리게 버려두어서는 안 되지만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어린이는 어른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어린이는 어디까지나 어린이다”. ㅡ이 루소의 선언에서 오늘의 어린이의 世紀(세기)가 출발한 것이다.
열다섯 살 때까지의 에밀은 단지 事物(사물)과 경험만으로 교육을 받는다. 말이 아니라 경험만이 교육의 원리인 것이다. 전원 가운데서 경험에 의하여 정확하게 닦아진 과학적 지식의 소유자인 에밀, 만일 그가 파리에 나타났다면 에밀은 “도시 속의 야만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밀은 열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받아 읽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 단 한 권뿐이다.
열다섯 살이 된 에밀. 그것은 교육의 원리가 경험에서 이론으로 바뀌는 시기이다. 에밀의 생활과 교육은 理性(이성)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뒤를 쫓듯이 청춘기가 온다. 이성과 정욕은 격투를 벌인다. 에밀은 “열병을 앓는 사자”가 될 것만 같다.
이제 필요한 것은 性(성)교육이며 연애 지도이다. 에밀은 소박한 처녀 소피를 만나게 된다. 첫눈에 사랑이 이루어진다. 청순한 입맞춤, 아름다운 오해. 에밀은 ‘여자’를 배우고, 소피는 ‘남자’를 배우게 된다.
理性(이성)의 ‘남성’과 수줍음의 ‘여성’, 이것이 에밀과 소피의 자랑이며 보물이다. 여성이 남성화하고 남성이 여성화하는 性(성)의 혼돈시대에, 순수한 남성이며 순수한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랑이며 矜持(긍지)가 아닐 수 없다ㅡ.
청년기를 부유한 미망인의 ‘젊은 제비’로서 지낸 이 책의 작자 루소의 연애관과 여성관이 책의 후반을 차지한다. 여성이 지닌 본능적인 교활함, 남성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남성을 지배하는 여성의 지혜, 사랑의 기쁨, 남편을 조종하는 방법ㅡ<에밀>의 후반은 실로 현대에 살아 있는 고전의 견본이다.
<에밀>에는 청년기의 문제로 또 한 가지 이슈인 종교론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루소의 ‘자연종교’ 사상이다. ㅡ”신이 인간에게 말씀하는 사항이라면 인간인 나는 신의 소리를 직접 듣고 싶다. 신의 소리는 교직자나 교회의 중개 없이 직접 들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신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신이 어떤 존재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내가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은 이 질서에 따른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이다”.
ㅡ이와 같은 사상을 교회가 허용할 리 없다. <에밀>은 금지 도서로 불태워졌고, 저자 루소에게는 체포 명령이 내렸다. 이와 같은 사건의 전말은 그의 <참회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에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혹>과 톨스토이의 <나의 懺悔(참회)>와 더불어 세계 3대 고백록으로 일컬어지는, 고백문학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루소의 <참회록>을 아울러 읽어야 한다. 루소의 <참회록>에는 살아 숨쉬는 루소가 있다.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과 감정으로 가득한 ‘피부를 가지지 않고 태어난 인간’이 숨쉬고 있다”(흄). 더구나 수백 권의 퇴색한 교육 관계 서적과 이 <에밀>을 근본적으로 갈라놓는 것, 그것은 바로 날카로운 감각과 감정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적인 지혜이다.*
[출처] 45. 에밀 ㅡ루소 |작성자 고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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