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편에 나타난 신학적 인간학 -Theocentricism 신중심주의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김이곤, 한국신학연구소, 1991 pp. 207-224
Ⅰ. 서론
이스라엘 시를 인근 나라의 시들과 비교하면 인간과 자연을 신격화 한다거나 왕이나 왕국에 대한 찬양을 하는 "순수한 제왕시"가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 시의 특징적 현실을 시편8편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다. 시편 시의 고전적 인간학은 인간 그 자체가 명상과 사색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라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시편 8편과 파스칼의 {팡세}를 비교해 보면 파스칼은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을 강변하고 있지만 시편 8편의 경우는 창조자의 지혜를 찬양하는 맥락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시편의 인간이해가 구약의 인간이해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고대 수메르인들의 인간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고대 수메르인들에게 완전한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과 평행어로 쓰이는 "루갈"(lugal/great mankind)개념을 홀로 지니고 있는 "왕"만이 완전한 인간이며, 개개의 인간은 완전히 이 배후에 물러가 있는 존재다. 하지만 히브리 시의 한 특성은 위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시대의 인근 다른 나라의 찬양시들과 현격한 차이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 시의 인간학은 소포크레스(Sophocles), 파스칼, 칸트 등의 헬라 철학자들이 제기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순수 인간학적 주제와는 다른 connotation(언외의 뜻, 함축)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판넨베르크(Pannenberg)는 히브리적 인간학에 관한 함축적 암시를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히브리적 인간은 그가 의존하고 있는 분, 즉 모든 유한한 것을 초월하고 있는 그 분과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는 것을 언제나 전개하고 있다." 실로 인간에 관한 한 신학적 명상을 찬양시의 시적 수사구로 묘사하고 있는 시편 8편은 바로 신학적 인간학의 현실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Ⅱ. 시편 8편의 비평학적 컨텍스트
1. 구약성서의 컨텍스트에서 본 시편 8편
구약에 나타난 인간학을 폭 넓게 다룬 책은 아이히로트(W. Eichrodt, Men in the Old Testament)와 볼프(H.W. Wolff, Anthropology of the Old Testament)의 것들인데 여기서는 희랍적 사유에 흔히 볼 수 있는 이분법(몸과 영혼, Փ،ՌՁ와 Օׁ 또는 Փ֢ՑՎ와 ՐՍՅՌՁ), 삼분법적(몸, 영, 혼,Փ،ՌՁ 또는 Փ֢ՑՎ, ՐՍՅՌՁ, Օׁ) 인간이해를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는 위와 같은 인간 이해가 결코 나타나고 있지 않다.
창세기 1장과 시편 8편과의 관계 속에서 구약의 인간학에 대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시편 8편은 "하나님보다는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주신"으로 표현되고 창세기1장에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소위 이마고 데이(imago Dei)표현되어 있다. 두 텍스트는 모두 창조주가 창조한 피조물을 인간에게 위임 통치하게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구약성서신학에서는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에 대해 폰 라트가 그의 창세기 주석과 구약성서신학에서 "창조론"이란 구약신앙의 중심대상이 아닌 구원사의 보조적 기능 이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시편 8편과 창세기 1장의 인간학은 어떤 역사신학적 의의를 가지는가? 이 문제는 시편 8편과 창세기 1장 사이의 전승사적 연결관계를 통하여 질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답이 두 갈래로 나뉜다. 시편 8편이 창세기 1장 보다 이전에 쓰여진 고대의 저작이라는 것과 시편 8편은 창세기 1장의 인간학을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는 두 가지 답이 나온다. 또 하나 가나안 문학의 이스라엘 개작이라는 이스라엘 신학의 특수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유동적이다.
2. 신약성서의 컨텍스트에서 본 시편 8편
시편 8편에 대한 신약성서의 응용들은 전적으로 본래의 순수한 인간학이 철저하게 그리스도론으로 재해석되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히브리서 2장의 경우는 시편 8편의 신약적 재해석이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하겠다.
히브리서 기자의 시편 8편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재해석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잠시 동안" 낮아지셨지만 마침내는 모든 사람의 위에 높이 오르셨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강조점은 "잠시 동안"(ՂՑՁ״)인데 이것이 히브리어 원문에서 말하는 "조금"(ࠈࠖࠐ॔)이라는 질적 의미를 시간적 의미로 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와 '영광의 때' 사이의 시간적 전이(transition)가 여기서 강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학적 진술을 "주제의 전이"라는 수사적 형태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시편 8편과 신약 히브리서 사이에는 놀라운 수사적 상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신학적 반성의 컨텍스트에서 본 시편 8편
시편 8편의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 문맥을 떠나 생각해 보면 분명 철학적 질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철학적 존재론적 추구가 구약성서에는 없으며, 득수한 맥락 안에서 인간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구약의 인간이해와 희랍적 인간이해 사이의 다른 점을 주지해야 한다.
첫째, "몸"을 "무덤"으로 보는 이른바 "소마"(Փ،ՌՁ)를 "세마"(ՓՇՌՁ)로 보는 희랍적 비극주의의 페시미즘을 구약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예를들어 호머(Homer)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제우스의 비탄과 같은 희랍적 비극이 구약 야비스트(J)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구약에도 생에 대한 탄식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과 그 피조물과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둘째, 위에서 알아 본것과 같이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이해를 이분법 혹은 삼분법적이 희랍이해를 하지 않고 인간을 "생명을 가진 몸"즉 통전적인 한 생명체로 본다. 그리하여 생명체란 말 즉 "네피쉬"라는 말은 인간을 구성하는 구성체가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통전적 인간" 그 자체를 말한다.
셋째, 신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한 편견, 즉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역자 소위 70인역 역자의 신학적 편견과 오해에서부터 기인된 인간이해가 여기서 문제가 된다. 창세기 1장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평행법적 어휘 즉 "첼렘"(ࠎछং)과 "데무드"(ࠛࢮࠍࢄ)라는 어휘를 "에이콘"(ՅדՊՙՃ)과 "호모이오시스"(ץՌՏדՙՓՉՒ)라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인간의 타락이후 데무드는 상실되고 하나님의 형상은 체렘만이 인간의 이성, 자유 등과 같은 것으로 남게 되었다고 인식하는 초기신학자들의 오해가 있다. 그러나 히브리의 언어적 사용과 인간이해는 헬라적 사유의 특과는 다른 컨텍스트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Ⅲ. 시편 8편 시인의 인간이해
시편 8편 시인의 인간이해는 인간의 피조성(J)과 존엄성(P) 사이의 역설적 관계를 시적 어법으로 교묘히 종합하고 있다.
1. 시적 평행법에 나타난 신 중심적 인간학
시편 8편이 그의 인간학을 서술하는 시적 수사법은 시구의 그 배열 구조로 볼 때 2절과 5절 10절에서 세 번 나타나는 "마-"(mah: ࠄࠍ) 즉 "무엇입니까"라는 의문사가 이끄는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수사적 구조가 말하고 있는 첫 번째 의미는 시인의 인간학이 철저히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찬양하는 찬양 틀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과 두 번째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업적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에 비해 인간의 연약함과 비천함이 대비적으로 대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냐?"라는 이 시인의 물음은 철학적 존재론적 물음이 아닌 신학적 성격의 물음이다. 위에서 본바와 같이 창조자와 인간의 존귀함과 빈약함의 대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창세기 1장(P)보다는 창세기 2장(J)의 신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편 8편 5절의 인간을 나타내는 "에노쉬""벤 아담"이란 단어를 언어학적 연구의 도움으로 살펴봐도 허약한 존재, 연약한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에노쉬"는 히브리어 "아나쉬"(ࠚࠏࠀ) "불치의 병을 가진"이란 의미를 가진 어휘의 수동형 등과 같은 어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전적으로 이 말과 대표적으로 평행어로 쓰이는 "벤 아담"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시인의 인간학은 인간의 허약성과 허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강조되는 신중심적 인간학(theo-centric anthropology)라 할 수 있다.
2. "와우"(waw)반어문장에 의하여 시의 분위기가 바뀐 시편 8편 후반부에 나타나는 이마고 데이 신학
시편 8편 5절에서 6절로 넘어가는 접속사 "와우"는 특수한 기능으로 나타난다. 단순한 접속사 "그리고"라는 의미만을 갖지 않고 아카드어의 전접어(前接語) "-마"에서와 같이 "주제전이"를 알리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5절의 야비스트(J)적 인간이해에서 제사문서적(P) "이마고 데이"의 인간이해로 주제전이를 하는 접속사라고 하겠다. 5절의 "에노쉬"와 "벤 아담"과 평행하게 6절의 "영광과 존귀로 그에게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로 나타나고 있다. 6절의 표현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어휘 사용은 분명히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피조물에 대한 위임 통치권에 대한 부분에서 "이마고 데이"를 가진 존재로 보는 견해라 하겠다.
Ⅳ. 결론
첫째, 시편 8편의 시인은 야비스트(J)와 제사문서 기자(P)의 인간학을 모두 수렴하고 종합함으로써 구약적 인간학의 양면성 즉 "먼지"로 표현되는 하약과 허무한 피조성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최대의 존엄성을 총화하고 있다. 둘째, 야비스트와 제사문서 기자의 인간학을 급전이 형식으로 연결시킴으로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한바 "잠시동안"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의 급전이해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극적인 생애와 그리스도론적 유형론의 한 가능성을 남겨 놓았다. 셋째, 바빌로니아 포로기의 좌절 속에서 사실됐던 히브리인의 신학적 이간이해를 "이마고 데이"신학으로 새로운 희망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Theocentr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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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centricism is the belief that God is the central aspect to our existence, as opposed to anthropocentrism or existentialism.[citation needed] In this view, meaning and value of actions done to people or the environment are attributed to God. The tenets of theocentrism, such as humility, respect, moderations, selflessness, and mindfulness, can lend themselves towards a form of environmentalism.[1] In modern theology, theocentricism is often linked with stewardship and environmental ethics or Creation care.[2] It is the belief that human beings should look after the world as guardians and therefore in the way God wants them to. Humans should be considerate to all, from animals to plants to humans themselves. It maintains that human beings are merely here for a short time and should be looking after the world for future generations.[3]
In Christian theology, theocentricism has sometimes been used to describe theologies that focus on God the Father, as opposed to those that focus on Christ (Christocentric) or the Holy Spirit (Pneumocentric). Theocentrism was a key element of the Christology of Saint Augustine.[4] This view is resisted among some theologians on the grounds that it poses a challenge to trinity. one of these theologians is Carl Baaten who said, "If one can speak of God who is really God apart from Christ, there is indeed no reason for the doctrine of the Trinity. Some kind of Unitarianism will do the job."[5] Paul F. Knitter, in his defense as a Theocentric Christian, said it depends on how the unity between God and Jesus Christ within trinity is seen. He says that, "we cannot so neatly or exclusively affirm that the Logos/Christ is Jesus. The 'incarnating' activity of the Logos is actualized in but not restricted to Jesus. The God manifested in and as Jesus of Nazareth is the only true God".[6]
However, the term can be confusing because theocentrism can also refer to a theology that does not center on any one person of the Trinity, but rather emphases the entire Godhead as a whole. Theologies that center on the Father are sometimes referred to as paterocentric instead.[7]
It is popular with Christianity, Judaism and Is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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