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學의 가르침
◉ 유학은 어떠한 가르침인가?
拜金主義 利己主義 快樂主義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픔과 괴로움만이 가득할 뿐이다. 人間社會에 사랑과 理解 그리고 讓步와 協力이 아닌 猜忌(시기)와 嫉妬(질투) 그리고 다툼과 싸움이 아픔과 괴로움의 상처만을 남기고 가기 때문이다. 人生의 苦痛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인간은 本來부터 이러한 苦痛을 피하고 幸福한 人生 健康하고 떳떳하며 밝고 아름다운 삶을 追求하면서 文化와 文明은 人生이 苦痛에 대한 挑戰(도전)으로 이루어낸 인간 삶의 良識이나 樣態인 것이다.
아픔과 괴로움은 같지 않다. 아픔은 肉體的인 傷處 그리고 不均衡이나 疲勞에서 오는 느낌으로 苦痛 중에서 痛에 해당된다. 頭痛이나 齒痛 腹痛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은 그것과 다르다. 友情이나 愛情에 대한 懷疑(회의)에 빠질 때나 失職이나 失敗로 삶의 無意味하고 空虛하다고 느끼는 경우 그리고 父母에 대한 不孝 社會的인 非理나 不正腐敗를 行하고 난 뒤 自身의 삶과 行爲를 後悔하고 부끄러워하는 등의 心情이 바로 괴로움 즉 苦에 해당된다. 人生苦 生活苦 등과 같은 것이다.
人間은 아프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하는 存在이다. 그러므로 人間에게는 道德的인 生活이 必然的으로 要請된다. 道德的인 生活이 우리의 마음을 健康하고 幸福하게 만들어 밝고 明朗한 삶을 꾸려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醫學은 몸의 아픔을 治療하지만 道德은 마음의 괴로움을 治癒한다.
우리 人間은 항상 몸의 아픔과 마음의 괴로움 속에 처해있다. 그러나 人間은 몸의 아픔보다 마음의 괴로움을 더 참지 못한다. 인간은 先天的으로 良心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人間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孔子가 殺身成仁을 말하고 孟子가 捨生取義를 말했으며 朱子가 存天理 法人欲을 말한 것 모두가 그것을 의미한 것이다.
儒學思想에서는 人間의 肉體的인 慾望과 道德的인 良心이 衝突할 때 道德的인 良心을 選擇하면서 살아갈 것을 强調한다.
이러한 道德意識은 文化水準과 直結된다. 文化水準의 基礎는 바로 道德意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政治 經濟 社會 文化 모든 方面에서의 發展은 道德的意識을 基礎로 하지 않을 경우 無意味한 것일 수밖에 없다. 無秩序 不正腐敗 頹廢(퇴폐) 悖倫(패륜) 등이 蔓延된 國家에서는 모든 것이 成功的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혹 一時的인 發展이 있더라도 그것은 畸形的인 現象으로 오래지 않아 밑바닥으로 墜落하고 말 것이다. 美國의 社會學者 에드워드 벤필드는 道德的 基礎가 없는 社會에서는 資本主義이건 社會主義이건 아무런 意味가 없다고 하였다.
孔子도 일찍이 人間들에게 警告한 바 있다. 國家社會의 秩序가 確立되어 있는데도 社會에 參與하여 熱心히 일하지 않아 가난뱅이나 천한 못난이가 되는 것도 부끄러울 일이며 國家社會가 不正腐敗로 無秩序한데도 거기에 妥協하고 알랑거려 富者가 되고 地位를 얻는 것도 부끄러울 일이다.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儒學은 어떠한 가르침인가? 하는 물음에 解答을 分明하게 밝혀 道德的인 대동 사회를 다시 建設해야 한다.
◉ 儒學은 現實的이고 實際的인 가르침이다.
儒學에서는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것을 問題 삼지 않고 지금 이 社會에서 잘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問題 삼는다. 儒學에는 천당이라는 말이나 극락이라는 말이 없으며 지옥이라는 말도 없다. 다만 지금 이 社會를 어떻게 하면 秩序가 유지되고 調和가 이루어진 아름다운 人間社會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이 最大의 關心事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죽음이나 귀신을 섬기는 것에 대한 제자의 물음에 “삶도 아직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살아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未知生 焉知死 未能事人 焉能事鬼)
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계로는 성격이 조금 성급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또 아직 사람을 잘 섬기는 방법도 모르고, 사람이 제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그가 공자에게 귀신 섬기는 것과 죽음에 관해 성급한 질문을 합니다. 먼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이유를 묻자 공자가 답했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조차 위로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이번에는 계로가 죽음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 때 공자의 대답은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였습니다.
“삶조차도 아직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공자의 대답은 논어 선진편에 나옵니다. 즉, 성급한 계로에게 공자는 나중에 올 귀신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는
현실의 인생에 관해 더욱 깊이 생각하고, 사람 섬기는 법과 삶에 관해서 먼저 알 것을 주문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을 더욱 중요시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삶조차도 아직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공자의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를 생각하며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장래를 걱정하기보다는.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분명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면 그 결과로 매우 뚜렷한 내일이 보일 것입니다. 원하는 미래의 문을 여는 열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오늘 하루하루 노력의 축적입니다.
◉ 儒學은 사람답게 살자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반드시 제 地位 제 자리를 갖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자리 아들의 자리 남편의 자리 아내의 자리 兄의자리 雅友의 자리 朋友의 자리 관리와 국민의 자리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따라서 이름이 있게 되고 또 이름에 따라서 마땅히 행해야 할 倫理的인 當爲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人倫의 名分을 밝히는 道德의 가르침이라는 意味에서 儒敎를 名敎라고 한다.
儒學은 人間社會의 秩序를 維持하면서 아름답고 安樂한 사람다운 世上을 가꾸는 가르침이다. 人間이 아니면 어버이도 없고 子息도 없다. 어버이와 자식은 인간세계에만 있는 도덕언어이다. 도덕언어가 아니면 각각 독립되어 서로 무관한 늙은 사람이고 젊은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남편과 아내 형과 아우 친구와 친구 통치자와 국민도 마찬가지이다. 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어질 仁자를 보자 사람 人자 두 개를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가 아닌가? 그러므로 仁자의 가장 평범한 뜻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조화 협력과 창조를 내용으로 하는 도덕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孔子는 제자들과 정치문제를 토론하면서 名分을 올바르게 實踐하는 正名을 强調하였다. 즉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답고 統治者는 統治者답고 國民은 國民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는 등의 社會的인 名分에 따라 올바르게 處身하는 것이 社會를 지탱해가는 政治에 있어서 가장 重要한 德目이라는 것이다. 孔子는 또 정명의 重要性을 더 具體的으로 說明하였다. 즉 “名分이 바로서지 않으면 말이 順調롭게 疏通되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게 소통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모든 일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禮樂이 興盛하지 못하고 禮樂이 興盛하지 않으면 刑罰이 正確하게 施行되지 못하고 刑罰이 正確하게 施行되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과 발의 둘 곳이 없게 된다.”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라고 하였다.
이름이 바르지 아니하면 말이 순하지(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아니하면 일을 이룸이 없고. "이름이 그 실상에 합당치 못하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아니하고, 말이 순하지 아니하면 실상을 상고함이 없어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일을 이루지 못하면 예와 악이 흥하지 못하고 예와 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맞지(공평) 아니 하고 형벌이 맞지 아니하면 백성이 손과 발을 둘 바가 없게 된다.
"일이 그 차례를 얻는 것을 예라하고 물건이 그 화(화음,조화)를 얻는 것을 악이라고 한다. 일을 이루지 못하면 차례가 없고, 화하지 못하는 고로 예와 악이 흥하지 못하고, 예와 악이 흥하지 못하면 정사를 베풀어도 다 그 道를 잃을 것이다. 고로 刑罰이 公平하지 아니한다.
◉ 儒學은 物質價値보다 道德 가치를
本能적인 快樂보다 精神的인 즐거움을 崇尙하는 가르침이다.
儒學에서는 物質의 必要를 不正하거나 拒否하지 않는다. 다만 物質의 얻음과 씀을 道德的으로 하라는 것을 주장하며 物質의 價値만을 最上의 價値로 崇尙하지 말라는 것을 强調할 따름이다.
孔子는 말하고 있다. “義롭지 못하게 얻은 富貴는 나에게 있어서 부질없는 뜬 구름과 같은 것이다.” (不義而富且貴 於我浮雲)라고 옛 선비들은 安貧樂道 信條로 살았다. 이 말은 가난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가난처럼 어려운 處地에서도 良心的으로 편안히 여유를 갖는 人生의 姿勢와 絶對不變의 天理를 즐기는 아름다운 人格 그리고 偉大한 人間상을 말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욕망을 끊으라고 하지만 儒學에서는 慾望이나 本能을 있는 그대로 認定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을 道德的으로 다스리라고만 强調한다. 땀 흘려 얻은 財産은 자랑스럽지만 不勞所得과 不正蓄財는 부끄러운 일이다. 眞正한 親愛로 父母를 모시는 일은 孝子로 칭송받을 일이나 財産을 目的으로 父母를 모시는 일은 개나 돼지 같은 가축을 飼育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토록 儒學은 物質第一主義를 排擊하며 本能的 快樂主義를 경시하고 道德價値와 精神的 즐거움을 더 숭상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 儒學은 君子를 길러내는 가르침이다.
기독교는 목사나 전도사를 길러내는 종교이고 불교는 스님이나 보살을 길러내는 종교이다. 그러나 유학은 군자를 길러내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군자는 어떠한 인간상인가? 그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보면
첫째 :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군자는 친밀하게 지내되 사리사욕을 위하여 결탁하지 않고 소인은 사리사욕을 위하여 결탁하되 인간적으로 친밀하지 않다.
군자는 자기의 본성이 다른 사람의 본성과 같다는 것을 체득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대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과 거리낌 없이 어울릴 수 있고, 소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들만의 무리를 이루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은 아직 자기의 본성이 다른 사람의 본성과 같다는 것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루어서 이익을 얻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많은 사람과 두루두루 어울리지 못한다.
둘째 :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君子는 義를 따라 생각하고 小人은 利益을 따라 생각한다는 뜻이다.
君子는 어떤 일을 判斷하고 決定할 때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基準 삼는다.
君子는 損害가 나도 옳지 않으면 行하지 않고, 억만금 利益이 생긴다 해도 옳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그러나 小人은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損害가 나면 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설령 不義한 일이라고 하여도 利益이 된다면 行한다. 그것이 君子와 小人의 差異다.
셋째 : 君子之道風 小人之道草
군자는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고 소인은 모든 사람의 풀과 같다.
넷째 : 君子泰而不驕 小人驕而不泰
군자는 여유 있고 자부심이 크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지만 여유가 없고 자부심이 없다.
다섯째 :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또한 성내지 않음이 참된 사람이 아니겠는가.
◉ 儒學은 人格을 닦아 積極的으로 社會에 參與하자는 가르침이다.
周易에서 보면 “天地가 있는 後에 萬物이 있고 萬物이 있는 後에 男女가 있고 男女가 있는 後에 夫婦가 있고 夫婦가 있는 後에 父子가 있고 父子가 있는 後에 君臣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지극히 素朴하고 平凡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人間의 存在樣相과 그에 따른 道德的 當爲가 獨立된 個人만의 問題가 아니라 社會 全體에 관련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전 宇宙法則의 帆柱 안에 所屬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 일개인은 오직 나만의 存在가 아니다. 그러므로 내 멋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儒學에서는 個人을 全體와 連結되어 있는 存在로 把握한다. 家族과 連結되어 있고 이웃과 連結되어 있으며 社會 構成員들과 모두 함께 있는 存在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生成變化하고 있는 宇宙自然과 서로 通하고 있는 存在인 것이다. 그러므로 儒學에서는 “나 개인의 닦음”(修己)은 반드시 “社會의 參與”(治人)를 目標로 하며 宇宙의 生成法則에 同參함을 理想으로 삼는다.
儒學에서 强調하고 있는 人生만의 요정은 修己治人의 人生態度와 內聖外王의 인간상이다.
修己는 나 개인의 人格을 닦는 것이고 治人은 社會에 參與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 個人의 人格을 부단히 닦으면서 社會에 同參하는 人生의 姿勢를 修己治人으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聖人은 人格의 完成者요 王은 社會的인 完成者인 것이다. 꼭 王의 地位를 차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人格의 지극한 德이 公寶하게 미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孔子가 실제 왕의 자리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그 덕이 公寶하게 미쳤기 때문에 소왕으로 稱訟받고 있는 것과 같다.
儒學은 修己治人의 人生姿勢를 갖고 內聖外王의 人生境地에 到達하는 것을 窮極 目標로 하는 가르침이다. 孔子는 이러한 생각을 구체적의로 忠恕思想(충서사상)으로 말하고 있다. 즉 “내가 서고자 하는 곳에 남도 세워주고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남도 도달하도록 하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자기가 하기 싫어한 것을 남에게 지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한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推己及人이다.
그리고 亞聖 孟子는 孔子의 忠恕思想을 어어 받아 王道政治思想을 展開시켰다. 왕도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은 與民同樂이니 유학만큼 現代 政治社會에 切實한 것이 또 있을까?
◉ 儒學은 人間本性(良心)을 涵養하고 省察하는 가르침이다.
人間의 意識機能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의 反省機能이고 다른 하나는 本能의 感覺機能이다. 反省機能은 우리가 先天的의로 갖고 태어난 良心의 道德能力이고 이것으로 얻어진 知性이 德性知이다. 儒學에서는 이러한 德性知를 人間의 固有 價値로서 人間이 萬物의 靈長이 된 소이라 하여 思想의 基礎로 삼고 있다.
感覺機能은 事物知를 얻는 能力이다. 事物知는 事物과의 關係 속에서 이루어진 交物知에 지나지 않는다. 交物知는 知識의 基準이 對象事物에 있으므로 對象에 따라 主體가 따라가는 知識이다. 대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면 人間 主體도 그에 따라 변해야 한다.
이러한 대상을 따르는 지식은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갖는 지식으로 동물의 경우와 큰 차이가 없다.
孟子는 이것을 心之官과 耳目之官을 들어 具體的으로 論證하고 心之官인 本性의 重要性을 强調하였으며 特히 性理學에서는 本性의 涵養과 省察을 儒學의 核心的인 學文內容으로 삼았다.
이러한 學文 內容은 儒學의 創始者인 孔子思想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孔子는 일찍
“인간의 본성은 유사하지만 습관에 따라 서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聖相近也 習相遠也)라고 말하면서 本能의 支配를 받은 習慣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그러나 孔子는 결코 本能을 全的으로 不正하거나 拒否한 것은 아니다. 다만 本能을 一次的인 人間의 本性으로 崇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本能的이고 快樂的인 價値觀과는 서로 對立的인 것이다.
☞ 배금주의(拜金主義) 재물을 지나치게 숭배하여, 모든 판단의 기준을 재물에 두고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이나 태도 (어학사전)
돈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 지나치게 집착하는 주의
황금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는 모든 관계를 돈과 연관시켜 생각하려는 행위이며, 또는 삶에 있어 최상의 가치를 돈이라고 믿는 행위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존의 필수 수단이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에 배금주의에 빠지기 쉽다. 적게는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어 '돈'을 숭배하고 그 외의 가치를 천대하는 경향도 있는데 이도 역시 극단적 배금주의의 한 예이며, 이러한 배금주의가 만연한 사회를 천민자본주의 사회라고 일컫는다.
☞ 이기주의(利己主義)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나 행복만을 고집하는 사고방식 (어학사전)
이기주의는 철학에서 때로 인식론적 문제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주로 윤리학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인식론적 입장에서 이기주의는 유아론의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윤리학에서는 이기주의를 “개인이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기주의는 이타주의 및 모든 자연법과 신 중심 체계(theocentric systems)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기주의는 또한 인간은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쾌락주의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을 인생의 주요 목표로 삼는 ‘권력에의 의지’ 또는 ‘초인적 존재’와 자아 발전을 유일한 존재 이유로 삼는 ‘완벽 주의적 이기주의’(perfectionistic egoism) 등과 공통된 부류에 속한다.
☞ 쾌락주의(快樂主義) 쾌락과 만족, 그리고 고통의 회피를 도덕의 근본 원리로 여기는 주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은 모두 선이라고 주장하는 행복주의의 한 형태이다.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라 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을 도덕원리(道德原理)로 삼는 윤리설이다.
쾌락을 육체적인 것으로 보는가,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가, 또는 자기만의 쾌락으로 하는가, 많은 사람의 쾌락으로 하는가. 등에 따라서 여러 가지 논의가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쾌락주의라고 할 경우, 상식으로서는 감각적·육체적인 쾌락만을 목표로 하는 견해를 말하는 듯하다.
인생의 목표는 행복이고 행복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달성된다는 쾌락주의의 전형은 고대 그리스의 키레네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나타난다. 키레네 학파의 쾌락주의는 이 학파의 창시자이자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아리스티포스가 처음 내놓았다.
☞ 양식(良識) 도덕적으로 바른 판단력이나 식견
☞ 양태(樣態) 사물이나 현상이 존재하는 모양이나 상태
☞ 피로(疲勞) 일에 시간과 힘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서 정신이나 육체 따위가 지쳐서 고단함
☞ 회의(懷疑) 의심을 품음 [철학] 충분한 근거가 없어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하고 있는 상태
☞ 공허(空虛) 아무것도 없이 텅 빔, 실속이 없이 헛됨
☞ 심정(心情)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감정이나 심리
☞ 치유(治癒) 치료하여 낫다. 치료를 받고 병이 나음
☞ 양심(良心)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
(도대체 너는 양심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 양심(養心) 심성을 수양함
☞ 살신성인(殺身成仁 , 杀身成仁) :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다.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말했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인을 행할 뿐이다.”(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지사(志士)’는 도덕과 의리에 뜻을 둔 사람을 말하고, ‘인인(仁人)’은 어진 덕성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공자도 ‘살신성인’을 접근하기 어려운 이상으로 보았던지 〈위령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성들의 인에 대한 필요는 물과 불보다 절실하다. 물과 불을 건드리고 죽는 사람은 내가 보았지만, 인을 실천하면서 죽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子曰, 民之於仁也, 甚於水火. 水火, 吾見蹈而死者矣. 未見蹈仁而死者.)」
(용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노약자나 취객을 구했다는 기사를 보면, 요즘같이 각박하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도 ‘살신성인’의 자세로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리고 의로움을 따른다는 뜻으로, 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은 일을 함을 이르는 말 (어학사전)
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지만, 비록 목숨을 잃을지언정 옳은 일을 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맹자(孟子)》의 <고자편(告子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자는 인의정치(仁義政治)와 왕도정치(王道政治)로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사상가이다.
맹자(孟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생선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곰 발바닥도 원하는 것이지만 이 모두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생선보다는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生)도 원하는 것이고 의(義)도 원하는데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二者不可得兼, 捨生而取義者也) 이는 정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의로움을 택하겠다고 하여 의를 향한 자신의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의로움을 쫓다보면 때로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생취의는 정의나 진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말한 살신성인(殺身成仁)과 같은 뜻으로, 목숨보다도 인(仁)과 의(義)를 더 중시하여 정의(正義)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는 유교사상을 담고 있다. 이 밖에도 유사한 표현으로 종용취의(從容取義)·사기위인(捨己爲人) 등이 있다.
☞ 만연(蔓延/蔓衍) 식물의 줄기가 널리 뻗는다는 뜻으로, 전염병이나 나쁜 현상이 널리 퍼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퇴폐(頹廢) 쇠퇴하여 결딴이 남. 도덕이나 풍속, 문화 따위가 어지러워짐
☞ 패륜(悖倫)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남.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벗어나다.
☞ 폐륜(廢倫) 혼인을 하지 않거나 못함. 성생활을 하지 않다.
☞ 현상(現象) 사물이나 어떤 작용이 드러나는 바깥 모양새.
☞ 지위(地位) 어떤 단체나 조직, 사회에서 차지하는 직위나 위치
☞ 아우(雅<맑을 아>友) 기품(氣品 : 고상하게 보이는 품위나 품격)이 있고 좋은 벗
☞ 아우 : 동기(同氣) 간이나 같은 항렬에 있는 사람 중에서 나이가 적은 사람.
☞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함께 갖춘 사람이라는 뜻으로, 학식과 덕행을 모두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
☞ 공보(公寶) 공중 일반이 함께 누릴 만한 가치를 갖는 공공의 보배
☞ 충서사상(忠恕思想) 공자가 말하길,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다.”고 하니 증자가 말하길, “네!” 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이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 하자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뿐이다.” 라고 하였다.
♠ <논어>를 읽었다하면 이 정도의 말은 알아야겠죠. 공자의 사상을 한 마디로 하자면 바로 인(仁)입니다. 사랑이죠. 사랑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자면, 예수의 사랑, 부처의 자비, 공자의 인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이라면, 부처의 자비는 사람은 물론 미물, 심지어 무생물까지 포함하는 제일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 할 수 있죠. 그러나 공자의 사랑은 위 두 사랑보다는 좁은 의미인 차별적인 사랑입니다. 공자의 사랑을 다른 말로는 극기복례(克己復禮), 애인(愛人)이라고도 합니다. 세 분의 사랑이 다 훌륭합니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겠죠.
공자의 사랑, 인을 다른 말로 하면 위에 나오는 충서라 할 수 있습니다. 충(忠)은 자기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서(恕)는 자기 마음을 미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충서는 자기를 미루어 상대방에 미치게 하는 마음, 즉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마음을 진심으로 다하면 진실로 남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자기에게 충실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공자의 사상은 한 마디로 자기에게 진실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충(忠)아닙니까. 흐트러짐 없는 진실한 마음! 이것이 충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것!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합시다!
충서(忠恕) 충서는 공자 사상의 중요 내용 가운데 하나로 그 제자 증자(曾子)가 스승 공자의 사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바 있다. 공자가 자신의 도(道)가 하나로 일관되어 있다(一以貫之)고 하자 증자는 그것을 바로 충서라고 해석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다. 충서란 공자의 중심사상인 인(仁)이라는 추상적 덕목을 실현하는 구체적 지침의 역할을 한다.
충(忠)이란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충(忠)은 가운데를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충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의 한가운데’를 뜻한다. 가장자리나 변두리에서 헤매지 않고 마음의 한가운데에 머물 때 정성을 다할 수 있고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서(恕)란 용서를 뜻한다. 서(恕)는 같음을 뜻하는 여(如)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결합된 글자다. 나의 마음이 타인의 마음과 같다는, 혹은 같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마음의 중심을 잡을 때(忠) 타인의 마음 또한 충(忠)하다고 믿을 수 있다. 충(忠)하지 못하면 서(恕)하지 못한다. 마음이 가장자리에 머물러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은 타인의 마음 또한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각박하고 옹졸해진다. 진정한 용서는 인내와 억누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나처럼 마음의 가운데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긍정적 태도에서 나온다. 서(恕)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통하게 하는 공감(sympathy)이다. 충서란 곧 ‘정성과 공감’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충을 서(恕)와 짝을 지어 말하지 않고 성(誠)과 짝을 지어 충성(忠誠loyalty)이라고 말한다. 충성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뜻하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이다. 충성에서 성(誠)이란 본래 충(忠)의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충성이 곧 충이다. 충은 타인, 혹은 외부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자기 자신을 향해 선언하는 인간학적 다짐이다. 충은 오히려 국가적 권위나 외부의 명령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확고한 믿음을 강조한다. 국가가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나갈 때 과감히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진정한 충이다.
따라서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충성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충이란 대상이 필요 없이 자기 홀로 실천하는 것이다. ‘충성한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이다. 스스로 마음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국가에 대한 헌신이 가능하고 타인에 대한 정성도 가능하다. 충의 결과를 충 자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본래 마음의 중심을 잃지 말고 타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처럼 대해야 한다는 실천 강령을 의미했던 충서 개념은 이후 주희(朱熹)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강화된다. 주희에 의하면 충은 단순히 실천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서까지 보장받는 인간의 본성(性)이 된다. 증자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라고 윤리적 측면에서 충을 강조했다면 주희는 ‘모든 인간이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것은 하늘에 의해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충을 규정함으로써 존재론적 측면에서 강조했다.
충(忠)하지 못한 사람을 윤리적으로 지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희는 그런 사람을 존재론적 층위에서 우주의 법칙에 벗어난 사람으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배척해 버린다. 윤리적 비난에는 인간적 끈끈함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배척에는 그러한 여지가 원천 봉쇄된다. 단죄는 엄하되 실천에 옮기도록 하는 힘은 미약하다.
주희는 충서를 형이상학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각박하게 해석하여 오히려 충서(忠恕)스럽지 못한 결과를 빚는다. 주희의 문집과 어록에서는 실제로 충서의 면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 여민동락(與民同樂 , 与民同乐)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통치자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 반성(反省) 자기 언행에 대해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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