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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티루스 Tyrus -두로

by 이덕휴-dhleepaul 2019. 1. 12.

티루스 Tyrus, Tyre 섬의 역사

제3차 십자군 원정을 공부하다가 눈에 띄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이 해양교역의 중심지였던 티루스라는 섬이다. 티루스는 BC. 11세기에 페니키아의 해상도시였는데 구약성경 열왕기상에는 '두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티루스는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섬으로 전체가 견고한 천연 요새였다. 원래 독립된 섬이었지만 정복왕 알렉산더Alexandros가 동방원정 때 제방을 쌓아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중세시대에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육지권와 해상권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각축전이 벌어지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1. 이스라엘의 솔로몬Solomon 왕이 있을 때 티루스는 히람Hiram이 통치하던 해상왕국이었다. 솔로몬 이전에 이미 강력한 통치자였던 히람은 솔로몬을 존경하고 우대하여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957 BC.~964 BC.) 백향목과 잣나무, 금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구리 공예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가 성전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솔로몬도 티루스 왕 히람을 극진히 대우했다.

2. 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2세Nebuchadnezzar II (느부갓네살. 605~562BC. 이 시기는 앞 왕조와 다른 왕통이므로 신바빌로니아라고 불림. 나보폴리살이 개국 1세왕, 네브카드네자르는 2세왕)가 이곳을 차지하지 않으면 에게해 해상을 장악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없으므로 13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공격했다. 그러나 티루스 거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네브카드네자르는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3. 이 섬의 중앙에는 헤라클레스 신전이 있었다. 마케도니아Macedonia 왕 알렉산드로스(356BC.~323BC.)가 이 섬에서 제사를 드리고 싶어했다. 사실은 해상도시 점령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겠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사사한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것이 국가 정복의 열망에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는 육지에서 800미터(1km라고도 함) 떨어진 티루스 섬과 연결하는 제방을 쌓아 결국 함락시켰다. 육군은 매우 강하나 해군력이 거의 없었던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이 방법 외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나 누가 봐도 무모하면서도 기상천외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제방을 쌓아갈 때 많은 곤경에 처했다. 갈수록 깊어지는 수심에 흙, 자갈, 나무 등의 소요량이 급격히 늘었고 파도도 심해졌으며 또한 성벽 두께도 매우 두터웠다. 더욱이 가까이 갈수록 티루스 군이 쏟아내는 화살 공격은 감당하기 어려웠으나 짐승 가죽으로 막으며 결국 티루스를 함락시켰다. 알렉산드로스는 8천 명의 티루스 군인을 몰살했고 3만 명의 남녀노소를 노예로 끌고 갔다.

4. 제1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을 탈환(정복. 1099)하는 시점에 티루스 섬도 확보하였다. 이때 해상교역도시면서 해군력까지 보유한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의 도움이 컸다.

5.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제3차 십자군 전쟁은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가 도착한 때가 아니라 몬페라토 후작이었던 코라도가 티루스 수성을 위해 이슬람의 살라딘Saladin과의 공방전이 있었던 1189년으로 본다. 3차 십자군 원정팀은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영국의 리처드 1세의 군대로 꾸려졌다.

6. 티루스는 이집트와 시리아, 이라크를 통합한 술탄 살라딘이 공략하다 최초로 실패한 섬이다. 살라딘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처음으로 통합한 이슬람 세계의 막강한 권력자다. 이전까지는 바그다드를 장악한 수니파의 술탄 누레딘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시아파를 공략하지 못했다.
하지만 통합 이슬람의 강력한 살라딘도 코라도가 지휘한 티루스를 함락시키지 못해서 살라딘의 명성에 오점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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