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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판단력비판』에 나타난 문화개념

by 이덕휴-dhleepaul 2019. 2. 11.

『판단력비판』에 나타난
'문화'개념의 성립과 의의에 관한 연구*

2)조 연 수**



머리말

'문화'개념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유의미한 틀로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정신의 도야와 도덕적 완성이라는 규범적 의미가 강했던 문화개념은, 인간활동의 객관적 산물 일반을 記述하는 용어로서 중립적이면서도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1)

문화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진보에 대한 인류의 자기확신과 환멸이 기묘하게 착종되어 있었던 근대 이후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적 능동성에 대한 역사적 자의식이 강했던 근대는 자연사와는 구분되는 인간 특유의 역사적 소산에도 어떤 법칙성이 있음을 구명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입각하여 진보적인 변혁을 추동해 내려고 시도하였다. 다른 한편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낙관적 신뢰가 그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근대의 내부에서부터이다. 물질문명의 폐해와 허식이 낳은 여러가지 모순들이 드러나면서, 근대의 모토인 인간의 자유의 실현이 근본적으로 회의되고, 원초적 자연에의 회귀를 희구하는 낭만주의적 反문화론들이 등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들의 바탕에는 새로운 시대를 담당해 나가야할 인간의 모습과 바람직한 문화의 이상, 그리고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맺음의 방식을 새롭게 이해하려는 열망이 숨어 있다. 칸트의 문화에 대한 사색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판단력비판』에 나타난'문화'개념의 성립과 의의에 관한 연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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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대한 성찰들이 전제할 수 밖에 없는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이다. 이는 흔히 문화의 대립항으로 이해되는 자연의 자연됨도 결국은 인간에 의해 파악되고 규정된다는 점 때문에 더욱 중요한 질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새롭게 주역이 되기 시작한 근대에 문화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의 모색이 절박하게 이루어지는 전환기일수록 문화나 문명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심도있게 요청되기 마련인 것이다. 유래 없는 격변기인 현대에 근대가 모색했던 물음의 '형식'을 탐구하는 의미도 바로 이점에 있다. 그 물음의 내용은 변할 수 있고 또 응당 변해야 하지만,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규정하는 질문의 형식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나 그 소산인 문화에 대한 특성의 현상적 기술만을 목표로 삼는 오늘날의 주류인 인류학의 성과를 넘어서는 작업을 요구한다. 문화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우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우리 자신의 규정을 포함해야 한다. 이는 경험적 요소 뿐만 아니라 이념적 요소가 반드시 게재되어야 하는데, 그 토론가능성은 항상 열어놓아야 한다. 둘째로 인간/자연의 관계나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역동적인 조정의 노력을 담보해야 한다. 이들 관계 자체는 고정된 형태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시대마다 새롭게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집합적 인류에 대한 고려 뿐만 아니라 개별적 주체의 몫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집합적이고 생물학적인 규정(類로서의 인간)은 자칫 개개인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억압하고 도덕적 책임의 영역을 무시하게 될 수가 있다. 개체의 자율성과 성숙에의 가능성은 문화의 교육적 기능에 대한 고려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문화철학의 주제라 할 만한 것을 위와 같이 설정해 보았을 때 우리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이같은 문화철학적 함축을 갖는 텍스트로 바라보고자 한다. 실상 칸트는 문화를 본격적인 주제로 삼은 저술은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인가'2)'라는 물음을 자신의 철학의 궁극적 질문으로 삼아 거의 모든 문제들에 관한 비판적 작업을 행했던 칸트는, 그의 여러 저작들에서 문화에 대한 사상적 편린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판단력비판』은 개별적 주체의 심미적인 자기 인식에서 출발하여 유기적인 생명세계 속의 인간의 문화가 지니는 위치와 사명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가 있다. 칸트는 문화를 이성의 궁극적인 목적인 자유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자연의 메카니즘과 인간의 실천에 대한 복합적인 관계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의 초점은 근대인 자신이 당대의 문화를 역사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거기서 드러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에 맞춰질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3비판서인 『판단력비판』을 이같은 문제에 대한 구체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텍스트로서 보고자 할 것이다.





1. 『판단력비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



근대 철학의 태동 이래 과학적·수리적 방법론의 전횡에 대항하는 他者의 담론 체계로 출발했던 미학이라는 새로운 교과는, 감성과 미적인 것의 고유한 대상 영역을 확보하고 그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작업을 수행하고자 노력해 왔다. 바움가르텐(1750-1758) 이후 미학의 방법론적 기본 개념이 되어온 '미적 자율성'을 결정적인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확립한 것은 보통 칸트『판단력비판』(1790)의 공로로 돌려진다. 칸트가 그의 이 제3비판서에서 취미판단을 인식판단이나 윤리적 판단과는 독립적인 기제를 가진 것이라 설정함으로써, 그것의 독자적인 철학적 자리매김이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같은 문맥에서 이후의 대부분의 미학적 논의는 다른 것들과 대비되는 미적인 것의 특이한 존재방식이나 자립적인 가치를 논증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한편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미적 영역의 구획과 정당화 작업으로만 한정시키는 해석의 경향은 칸트미학을 과학 일변도의 근대의 억압적 패러다임에 대항하는 해방적 기획의 일환으로 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학에서 모든 사회적 실천적 함축을 제거해 버렸다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화살을 칸트에게 집중적으로 겨누기도 한다.3) 이같은 독법에 따르면, 칸트의 제3비판의 성립은 세 가치 영역(과학, 도덕, 예술)이 분열된 채로 각각 합리화되었음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며, 칸트는 다만 미와 예술의 극단적인 자율성과 그 무관심적 형식성에만 주목하는 순수 유미주의의 태두 정도로 간주되기 쉽다.

미적 자율성 개념의 함의가 이처럼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근간에 이루어지고 있는 '근대성' 논의와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도 분분하지만, 사상적으로 보았을 때 대체로 17-8세기에 성립된 근대 계몽주의의 기획과 연결되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이 자연력을 통제할 수 있고 세계와 자기를 투명하게 해석할 수 있으며, 도덕적 진보와 인간의 행복의 증진마저도 과학과 예술과 철학이 해 줄 수 있으리라는 낙관주의적인 계몽기의 확신은, 오늘날에 와서는 자명한 것이기는 커녕 현금의 온갖 문제들의 원초적 근원지로서 의혹받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은 동일하지가 않다. 이는 지금 우리에게 닥친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는가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는 문제인데, 이런 문맥에서 미적 자율성 개념은 근대의 파괴적인 주관중심적 경향의 극단화된 형태로 비난받기도 하다가,4) 근대의 폭력적인 이성중심적 세계에 대항하는 마지막 보루로서 각광받기도 한다.

근대 자체의 문맥에서 미적 자율성 개념이 이성의 폭력에 대한 대항담론으로 출발했는지, 아니면 인간 이성의 궁극적 기획의 일부분으로 고안이 되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적 근대가 추구했던 새로운 인간상, 즉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신학적 자연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인간이라는 계몽의 이념을 촉진시키는 하나의 계기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한 흐름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칸트의 사상이다. 칸트의 전 철학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 실현이라는 계몽의 이념이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우리 자신의 조건과 한계를 예비적으로 탐색해 본 것이 바로 그의 『비판』작업들이다. 칸트의 사상은 기존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새롭게 규정한다는 근대의 가장 절박한 문제에 대답하고자 하는 과정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스스로 입법하는 자유로운 인간' 개념은 그의 사상이 가지는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도달되어야 할 이념이자 목표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인간개념은 우리가 실체적으로 그냥 주어진 주체가 아니라 어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형성되어야 할 주체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미와 예술 또는 감성의 자율성 또한 그 자체 고립적인 것이 아니라 자율적 인간이라는 전체적 이념의 한 계기로서 정당화되어야 한다. 칸트의 미학은, 아니 미학 뿐만 아니라 그의 전 사상은, 당대의 혁명적 상황에서 새로운 인간상을 창출하려는 실천적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칸트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는 그가 '이성의 궁극적 의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실천적 주체'의 확립에 있었다. 칸트철학의 핵심인 '자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근대 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이 자유가 자연에 대한 본질적인 대립항으로 이해되는 한, 존재와 당위는 각각 별개의 것으로 분할되며, 그 두 가지 성격을 똑같이 구유하고 있다고 파악되는 인간은 분열될 수 밖에 없다. 또 그것이 개별적인 행위 주체인 '개인'의 자유로만 이해되는 한, 사회와의 대립과 갈등이 필연적으로 초래된다. 이와 같은 문제는 현상과 물자체의 영역들을 엄격히 분별하고 각각의 영역에 대해 나름대로 가치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못한 채로 남는다. 비판시리즈의 마지막 저작인 『판단력비판』은, 앞의 두 비판서를 통해 이미 평화 공존을 이룬 듯한 자연의 인식 영역과 자유의 실천 영역이 서로 매개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의 요구에서 귀결된다. 자연과 자유의 매개가 별개의 두 부분들을 단지 이론상으로만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성을 단지 이론적이고 사변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에서 실천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이행'(Ubergang)이 필요하다. 이 이행을 입증해주는 인간의 경험 영역이 바로 어떤 '매혹의 영역'인 바, 자연과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세계를 조화롭게 질서잡힌 목적론적인 체계로 바라 볼 수 있는 인간은 바로 이곳 현실(자연) 속에서 자유의 실현을 꿈꾼다. 자유가 한갓 '이념'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자유는 자연에 '영향'을 미쳐야만 하며, 또 자연은 자유의 실현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만 한다.5) 칸트는 이와 같이 본성상 서로 이질적인 두 영역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인간의 '반성'(Reflexion)활동에 귀속시킨다. 개별자 속에서 보편을 찾아나가는 판단력의 반성활동은 일정한 원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선험적'인 '능력'(Vermogen)으로 간주된다. 칸트는 이성과 지성과 같은 다른 능력들과는 달리 판단력을 일종의 '기술'(Kunst)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술은 단순한 앎과는 달리 숙련(Geschicklichkeit)과 연마(도야:Kultur)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기술은 자연적인 인간의 소질을 훈련시켜 극대화함으로써 자유를 획득하는 기교(Technik)인 것이다. 그리고 칸트에게 있어서 이 기술의 유능성이 궁극적으로 발휘되는 분야는 개인의 행복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개념을 칸트는 그의 『판단력비판』에서 미학과 목적론을 다루는 가운데 발전시키고 있다. 물론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그의 『실용적 견지에서 본 인간학』(1798)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의 현상에 대한 반성 원리에 근거하여, 인간학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 역사철학, 종교철학 등 칸트가 그 이후에 발전시키고 있는 구체적인 실천철학의 단초를 마련하고 있는 『판단력비판』에만 국한하기로 한다.





2. 『판단력비판』의 문화개념 검토를 위한 예비적 고찰



2.1 근대문화 비판과 칸트철학 일반의 실천적 문제의식



그렇다면 칸트의 비판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실천적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가 살았던 18세기는 과학혁명과 새로운 시민계급의 정치적 성공에 힘입고 17세기부터 우세하게 된 이른바 계몽주의적 흐름이 계속 진행되던 시대이다. 그러나 초기의 막연한 낙관론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여러가지 근대의 폐해로 인해 이때부터 의심의 대상으로 올려지게 된다. 구제도와 낡은 관습에 대해 인간이성의 무한한 자유라는 이념을 기치로 해방을 구가하던 근대 초기 사상들은 지고의 형이상학적 善 대신 개인의 자연스럽고도 불확정적인 욕망의 추구를 목적으로 삼는 인간관에 기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각자 자기 관심에 기반한 여러 욕망들의 상호충돌과 대립관계가 불가피해졌으며, 이성은 그 욕망들을 만족시키는 한갓 종속적인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이와 같은 도구주의적 이성관에 따르면 근대 최고의 이념이었던 이성의 자율성은 그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게 되며, 갈등이 첨예화된 상태에서는 자유의 실현을 향한다는 진보의 이념마저 흔들리게 된다. 칸트는 이와 같은 회의적 상황에서, 이성의 낳은 문제는 이성이 모두 해결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믿음 아래, 이성 자신의 내재적 비판작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입법적이고 자율적인 이성의 여러 관심들이 동시에 만족되도록 하는 하나의 건축술적 체계를 구축한다. 이때 비판 체계의 정점을 이루는 것은 칸트의 전 철학을 지배하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실현이라는 계몽의 이념이며 다른 관심들이 여기에 종속되도록 배열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자유의 실현이 이성의 궁극목적이며 이성의 새로운 체계는 이를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는 모종의 목적론적 사고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자기자신에 대한 규정이 없이 맹목적 회의나 독단론에 맞서, 이성의 자기 입법에 근거한 새로운 목적규정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칸트의 목적론적 발상은 물론 신학적인 고전적 목적론과는 궤를 달리한다. 즉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진 목적의 내용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목적을 설정하는 능력을 지니고 그 목적 개념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형식적 조건을 문제삼는 것이다.

외부 아닌 자기 속에서 스스로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이성능력은 당연히 그 목적의 '실현'에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목적이 실현되어야 할 장소인 현상계(자연)는 『순수이성비판』이 보여 준 바에 의하면 자신의 기계적 법칙에만 따를 뿐 전혀 그 어떤 목적도 보여 주지 않는 우리에게 낯선 곳이다. 다른 한편 『실천이성비판』에서의 무조건적인 정언명령은 구체적 인간의 현실태를 전혀 돌보지 않는 듯이 나타나지만, 이중적인 인간의 분열된 목적(행복과 도덕성)들의 통일(최고선)을 또한 의무로 삼게 하고 있다. 목적을 보여주지 않은 듯한 냉혹한 자연과 그래도 우리 스스로 설정한 최고선을 실현하라는 우리의 자유의지 간의 모순은 칸트에 의해 '건널 수 없는 하나의 심연'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자연/자유'로 일반화되는,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존재론적 심연을 이성은 어떤 사고방식의 전환을 통해 건널 수도 있음을 확증하고 싶어한다. 즉 현상으로 드러나는 자연 자신이 우리의 도덕적 이념의 실현을 위한 소질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최고선의 실현을 위한 두 영역 간의 '이행' 계기로 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실천적 관심의 소산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판단력비판』이며 여기서는 미와 유기체에 대한 우리의 반성활동에서 목적 개념과 그 실현에 대한 비판적인 정당화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 『판단력비판』은 "세계 내에서 최고선을 촉진하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을 스스로 부과한 인간이 감성적 자연 안에서 그 실현과정을 담당할 수 있는 존재 즉 '궁극목적'(Endzweck)일 수 있는지의 여부에 초점을 맞춘다.



2.2 칸트의 역사철학에 나타난 문화개념의 전개



칸트의 시대의식과 문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시민적 문화상태에 대한 논의와 그의 역사철학에 관한 논문들에서 그 일단을 보이고 있다. 17-8세기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의 시대의 확실한 토대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시대를 담당해 나갈 만한 인간관과 세계관의 구축을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인간이 성취해낸 산물과 제도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찼던 근대인들은 신에게 부여받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상태로부터 인간 스스로가 꾸려낸, 이른바 '시민적(문화적)' 상태에 대한 성찰을 요구했는데, 이 문제는 역사 또는 문화의 기원과 목적의 문제와 맞물려 근대의 핵심적인 쟁점 중의 하나를 이루었다. 역사의 진전과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현재의 위치를 살피는 것은 근대 사상가들이 당면한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칸트 역시 이 문제를 회피할 수가 없었는데, 그는 자신의 특유한 비판논리로써 자기 시대의 정당성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개별적 주체들이 기존의 전통적 권위에서 벗어나 하나의 새로운 시민사회6)를 형성하려 할 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새로운 체계의 보편성과 구속성이 어떤 근거에서 확보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철학적 관심에서 국가나 시민사회의 존재의 정당화문제에 접근할 때, 일반적으로 자연상태론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많았다. 즉 자연상태라는 가상적 경험으로부터 국가존재의 정당성과 국가에 대한 복종의무의 이론적 근거를 공통적으로 구하려 했다. 주로 사회계약론으로 수렴되는 이같은 경향은 국가성립의 필연성, 즉 자연상태에서 시민상태로 이행하게 되는 필연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칸트는 다분히 경험주의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이같은 분석을 반대한다. 그는 제도에 대한 역사적 사실적 해명의 문제와 윤리적 정당화 내지는 규범적 분석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7) 그는 자연상태를 어느 누구도 규약에 의해 구속될 필요가 없는 가상적 상황이자 이론적 매개개념으로 이해한다. 이때 그는 그것을 추론의 출발점으로 삼되 "결코 실재한 적도 없고 실재할 수도 없었던 철학적 허구"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자연상태란 보편적인 불확실성의 조건으로서, 개인들이 서로 불일치와 분열상태에 처해 있는 불확정적인 공간이다. 자연상태가 꼭 폭력과 부정의의 상태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정의의 부재상태임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칸트는 루소적인 낭만적 근원으로서의 자연상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칸트는 자연상태 자체를 어떤 윤리적 악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거기에 내재하는 갈등 상황은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자체로는 오히려 선한(좋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칸트는『순수이성비판』에서 자신의 비판(Kritik)작업의 과제를 "시민상태의 확립"8)이라고 언명하고 있다. 가상(Schein)이나 도착상태를 수반하기도 하는 '자연상태'는, 그것이 인간의 소질 속에 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민상태 수립 후에도 연명해 나간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칸트는 소질적이고 맹목적인 상태를 세련화시키고 그 폭력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체제와 조직 또는 위계를 세우는 것을 또한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본성) 중 하나인 이성의 과업(Aufgabe)으로 본다. 이는 자신의 유한성과 분열적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기반 위에서 자율적인 이성의 소질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계몽이 탈출하고자 했던 어둠의 세계는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모른 채로 다만 타율적인 질서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미숙함(Unmudigkeit)의 상태였다. 시민 상태는 여기서 벗어나 자기사유와 자기행위를 확보하는 계몽된 상태이며, 이는 단순히 제도의 확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칸트의 계몽개념9)의 특징은 "성숙성"(Mundigkeit) 개념의 도입이라 할 것인데, 이는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혁명에 버금가는 것이라 설정되고 있다. 이 계몽된 성숙함을 이룩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교육과 문화의 과정이며, 이는 개별적 주체 앞에 영구적으로 내던져지는 하나의 과제가 된다. 진정한 시민상태는 제도와 문화의 확립을 기본조건으로 한, 끊임없는 내면의 혁명에 의해서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시민 상태, 즉 문화적 상태에 대한 반성은 『판단력비판』 이전에도 이미 그의 역사철학에 관한 소논문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칸트는 여기에서 당대에 닥친 문화적 갈등 현상의 원인과 그 메카니즘을 규명하고 미래를 예견하기 위해 문화의 역사를 철학적으로 전개시킨다. 여기에서는 그 중 두 논문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하나는 1784년에 발표된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Idee zu einer allgemeinen Geschichte in weltburgerlicher Absicht)10)이고, 다른 하나는 1786년 작인 「추측해 본 인류 역사의 기원」(Mutmaßlicher Anfang der Menschengeschichte)11)이다. 이 논문들은 '목적'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역사를 사변적이거나 한갓 상상적으로 구성하고, 그것도 도덕적 역사 아닌 한갓 정치사에 국한시킨 것이라 하여 칸트의 체계와는 양립할 수 없는 텍스트로 알려져 왔다.12)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역사의 과정이 마치 폭력과 투쟁을 통해 법칙적으로 작용하는 자연의 숨겨진 의도에 귀속되는 듯이 서술되어 있어서, 비판적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독닥적인 주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들에서 나타난 역사의 동인으로서의 '자연' 개념은, 『판단력비판』에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규제적 이념으로 처리됨으로써 비로소 그 정당한 자리가 마련되기에 이른다.

이들 논문에 따르면 문화는 자연에서 자유로, 감각의 압제에서 자유로운 입법상태에로 나아가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함에는 틀림없으나, 그 역사적 전개를 관찰해 볼 때는 매우 불평등하고 과도할 정도로까지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취미가 한갓 사치로 흘러 버리고 학문은 관념들의 유희로 타락하는 등의 사태가 곳곳에서 목도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지의 발달과 취미의 세련화가 낳을 수도 있는 병폐 때문에 근대의 많은 사상가들은 매우 우려를 금치 못했으며 심지어는 루소처럼 反문화론에 이르기조차 하였다. 칸트도 그의 역사철학과 종교철학의 텍스트들에서, 타인과의 비교활동에 기반하는 인간성의 소질이 근원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선한 도덕성으로 고양되어 가는데 필수적인 단계로 보고 있다가도 '문화의 악덕'이라 할 만한 현상들을 심히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문화의 잠재력에 대해 그는 이른바 '자연의 간지'론을 펼쳐 해결해 보고자 한다. 즉 지금은 불평등하고 혼란스럽기만한 문화의 현상들은 갈등과 모순을 통하지 않고는 완전히 계발되지 못할 인간의 자연적 소질 발현을 위해 자연이 의도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문화발전의 동인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는 '자연의 계략'과 같은 목적론적 개념은 물론 현상을 통일적으로 해석해 보고자 하는 반성적 판단력이 고안해낸 개념일 것이다. 반성적 판단력은 그 안목을 길게 늘이고 인간을 개인 아닌 종 전체로 파악함으로써, 인류의 자연적 소질의 완전한 발현이 언젠가는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자연의 의도이고 이를 위해 자극 요소가 되는 갈등의 계기들조차 자연의 배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보편사의 지평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어야 할 사회의 모습은 보편적으로 법이 지배하는 시민사회라는 언명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 완전한 시민사회는 이성의 역사가 시작할 때부터 드러났던 자연과의 갈등관계를 발전적으로 승화시키고, "완전한 기술이 다시 자연이 되"13)는 '완전한 문화'로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체계이다.

이와 같은 낙관적인 역사의식의 배면에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절박한 인식을 전면적인 회의론으로 빠지지 않게 하려는 이성의 열망이 숨어 있다. 이성의 완전한 만족을 위한 궁극목적 실현에의 노력은 인간의 끊임없는 도덕적 진보와 더불어 무한히 부과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목표를 영원한 미래에만 끊임없이 유보시키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때 현시점에서의 도덕적인 자각은 계몽(Aufklarung)이라는 전환점을 이루고 문화의 기형적 전개를 바로잡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드러난다. 인간 역사의 전개를 마치 자연이 의도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이성 자체가 설정한 목적과 유사한 목적을 자연자체의 진행이 보여주고 있음을 가정해야만 자유실현의 가능성이 확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의 과정은 이성의 과정과 유사하기는 하나 이성의 의도한 결과로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연을, 적어도 이성의 계몽 이전에 우리에게 그저 냉혹한 자체의 메카니즘으로 주어져 있는 이성의 타자로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타율에서 자율로 전환시키는 힘이자 일종의 사고방식의 개혁인 계몽은, 자연의 의도를 내면화하고 이를 현실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무로 삼게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계몽은 미래에 대한 실천적 규정을 가능하게 해 주고 "위대한 예술가 자연"에게만 진보의 흐름을 위탁하지 않게 하며, 역사의 궁극목적의 이념을 한갓 정치적 공동체의 성립 아닌 도덕적 공동체에 두게 한다. 위의 두 논문에서 우리는 칸트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성과 자유의 전개과정을 어떠한 틀로 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판단력비판』의 '이행'기획과 '준비'의 테마가 명백히 이와 같은 역사철학적 함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고찰은 『판단력비판』 성립의 배경 중의 하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자연과 자유의 통일"이라는 대과제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시사받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보면 칸트가 문화와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판일변도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칸트는 역사를 더 악한 상태로의 퇴보과정이라고 보는 속류 루소적 해석을 거부한다. 또한 역사를 더 선한 상태로의 직선적 진보과정이라 바라보는 맹목적이고 소박한 낙관론도 거부한다. 칸트는 이성과 함께 하는 문화의 탄생과 성장을 그 자체 속에 원초적인 불균형과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렇다고 반(反)문화론으로 귀착하지는 않았다. 이는 인간이 문화의 토양에서만 살 수 있게 되어 있는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의 이상으로 즐겨 추구되는 조화로운 자연상태라는 것은, 잃어버린 낙원과 같은 과거의 상태가 아니라 원초적 불균형상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통해 개척해 나가야 할 '미래의 상태'로 정의된다. 그래서 칸트의 문화에 대한 생각은 암울한 현실 인식을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가운데 자유의 이상을 미래지향적으로 설정하고 있다.14) 이 점이 비관주의로 점철된 여타의 문명비판론과 확연히 다른 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 문명 자체의 폐기 선언은 이성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3. 『판단력비판』에서의 문화개념의 정당화와 그 형성과정



3.1 『판단력비판』의 일반적 문제와 문화개념의 비판적 도입



3.1.1 최고선의 세계 내 실현에의 관심



우리가 앞의 2장에서 살펴본 칸트철학 일반의 실천적 문제의식에 비추어 본다면, 『판단력비판』은 '최고선'의 이념의 실현이라는 문제와 떨어져서는 이해될 수가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판단력비판』 서문에서 칸트는 자신의 의도를 실천철학과 이론철학 간의 거대한 심연에 다리를 놓는 것으로 특징짓고 있는데, 바로 이 '다리놓기' 작업이 실천적 관심의 소산인 것이다. 인간의 인식상황의 유한성에서 비롯하는 자유와 자연 간의 존재론적 심연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반성하는 우리의 능력은 "자유가 자연에 영향을 미쳐야" 함을 요구한다.(KU, E(서론), IX.)

최고선 이념에 대한 칸트의 이해는 특히 이 제3비판서에서 결정적인 전환을 보인다. 즉 앞의 두 비판서에서 매우 무역사적이고 피안적으로 다루어졌던 이 개념15)이, 구체적 시간 과정 중에서 실현되어야 할 이 세계의 완전한 상태이자 역사의 목표를 서술하는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최고선의 한 계기였던 '행복' 개념의 개인중심적 함축이 탈각되고 그것이 '경험적인 자연적 요소'(인간과 사회적 조건과 물리적 조건들 일반)로 일반화됨으로써, 무제약적으로 명령되는 자유의 이념이 과연 현상적인 자연에 각인될 수 있는 지의 '가능성'에 그 촛점이 모아지게 된다. 『판단력비판』이 새롭게 문제삼고 있는 것은, 최고선 개념 자체의 제시가 아니라, 그것의 실현이 우연적인 경험적 차원에서 과연 기대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현상적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공시적.통시적 자연 경험은 자연을 언뜻 보면 개별적이고 파편적으로만 보이고 아무런 연관성도 없이 다만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이성의 궁극목적이 실현되는 장소는 곧 '자연'의 한계 안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자연 또한 "그 형식의 합법칙성이, 자유의 법칙에 따라 자연에 있어 실현되어야 할 목적들의 가능성과 합치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어야만 한다"(E, XX.)는 요구가 이성의 체계지향적이고 실천적인 관심에 따라 발동하게 된다.

『판단력비판』에서 최고선 이론은 궁극목적(Endzweck) 이론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궁극목적이란 "자유에 의해 가능한, 이 세계에 있어서의 최고의 선"(저자 강조)(제 88절)으로서, "도덕적 법칙 아래에 있는 인간(모든 이성적 존재자)"이 바로 세계 창조의 궁극목적으로 설정되고 있다. 제3비판서에서 나오는 궁극목적으로서의 최고선 이론은, 이 과제를 담지하는 '지상의' 존재자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조건을 문제삼는다. 그런데 도덕법칙의 정언 명령이 그 적용과 실현문제와 결부될 때, 그 장소가 되는 자연 일반,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자연'에 대한 어떤 가정이 필요해진다. 칸트는 인간의 감성적 본성 즉 '자연소질'(Naturanlage)(KU, E, I.)에 대해서 그 자체로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를 견지한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회의주의가 곧 인간에 대한 독단적인 비관론으로 빠지는 것도 거부한다. 칸트의 해결책은 인간의 자연상태에 대한 어떤 목적론적 '가정'을 하나의 방편으로 전제한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가정 아래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궁극목적 실현을 위한 '준비'상태16)로 파악하여 실천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감성적 본성에 목적론적 술어를 적용시키면 이른바 "기술적-실천적 이성"(technisch-praktischen Vernunft) 개념이 도출된다.17) 이는 자연 세계 내에서 인간이 가지는 특수한 위치를 규정하는 술어인데,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사실은 인간이 목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지상 유일의 존재라는 점이다. 인간은 목적을 자연 세계에 투입하여 기술적 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이다(제 84절). 이와 같이 인간의 기술적-실천적 의지규정 능력들의 총체가 바로 칸트가 이야기하고 있는 '문화'인데, 이는 이후 목적론에 대한 고찰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3.1.2 '목적' 개념의 정당화18) - 반성적 판단력의 도입과 '자연의 합목적성' 원리의 전개



『판단력비판』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의미의 자연은 우리에게 조화롭고 합목적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유기적 체계이다. 칸트는 이와 같은 자연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적 능력으로서 반성적 판단력(reflektierende Urteilskraft)을 새로이 도입하고 있다. 이 능력은 제3비판의 모토인 자연과 자유의 통일 또는 이행기획을 가능하게 해 주기 위한 주관적인 기능으로 설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판단력은 항상 이질적인 것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논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성과 지성 등의 다른 능력들과는 달리 판단력을 일종의 기술(Technik ; Kunst)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은 단순한 지식과는 달리 숙련과 도야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술은 자연적인 인간의 소질을 극대화함으로써 자유를 획득케 하는 일종의 기교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차이를 전제하고 이들에 대한 비교를 유추와 귀납 등의 특유의 원리(『Logik』)에 의해 수행하는 우리의 반성 능력은, 혼돈스럽게 보이는 주어진 현상들을 무규정적인 체계의 이념을 지도 원리로 삼아 개별에서 보편으로 지향해 나가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는 이론적 요구(체계적 인식)의 극한에서 마주친 목적론적인 자연 개념을 통해서, 맹목적인 인과 사슬에 얽매인 기계적 자연으로부터 도덕적인 초감성적 자연에로 이행하게 하는 데 그 자신 테크닉을 발휘하는 능력이다.

이 반성적 판단력이 자신의 원리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합목적성'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 원리는 지성의 입법작용을 넘어서는 다양한 경험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체계적 통일성을 전제해야 함을 요구한다. 반성적 판단력의 이같은 요구에 마치 합목적적으로 조화하는 듯이 나타나는 자연의 모습에 대해 칸트는 "자연의 기교(Technik der Natur)"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교를 부리는 것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판단력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원리를 외부의 자연에 투사한다. 다시말해, 반성적 판단력이 자연을 기교적인 조망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자연이 '마치' 기교적인 '것처럼' 해석되는 것이지, 자연 자체가 객관적으로 기교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19) 이처럼 반성적 판단력은 대상을 규정하지 않고 자기자신에게만 판정의 규칙을 제공하기 때문에 '자기자율적'(heautonom)(EE(제1서론), XX.)인 능력이라고 일컬어 진다.

인식이론적 관심20)에서 구명되던 자연의 합목적성의 원리는 칸트가 생각하는 목적론 일반을 이해하는 주요 원리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맥락에서 그것이 초월론적으로 타당한 지에 대한 연역(Deduktion)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칸트가 합목적성의 원리와 목적 개념을 정당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지점은, 바로 『판단력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언명(KU, <서언>, VIII.)되는 <미적 판단력 비판> 부분이다. "판단력이 전혀 선험적으로 자연에 관한 그의 반성에서 기초로 삼고 있는 원리, 즉 자연이 그의 특수한(경험적) 법칙들에 따라 우리들의 인식능력들에 대해 가지는 형식적 합목적성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오직 미적 판단력 뿐이며, 이 형식적 합목적성이 아니면 지성은 자연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E, X). 자연의 합목적성 원리는 쾌감과 직접 연관되는 심미적인 주관의 경험에서 비로소 확증되고 연역된다. 심미적인 반성적 판단력은 다른 어떤 목적과는 무관한 활동을 수행한다. 즉 대상의 인식이나 실현이라는 이론적.실천적 의도(목적)에는 무관심적으로, 오직 자신의 표상들과 자기 자신의 '관계'가 합목적적임을 쾌감을 매개로 하여 지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규정 이전의 '자유로운 자연'과 주관의 원초적인 관계이며(이 관계를 투사하고 현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연미이다), 여기에 심미적인 계기가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합목적적인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와 자연의 관계'이며, 이를 아름답다고 판정할 떄 사용하는 선험적인 기준은 외부 아닌 우리의 "내부"에서 찾아진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자연은 심미적으로 완결된 세계로서 드러나며, 쾌감이 이를 증언해 준다. 그리고 이는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에서 논의되는 자연의 객관적이고 질료적인 합목적성 원리(자연목적)로 확장되는 발판이 된다. 세계나 자연의 목적을 설정할 수 있게 하는 것는 이제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고전적 목적론이 아니라, 세계를 심미적으로 조망하는 반성적인 주관에 의한 것이 된다.



3.2 <미적 판단력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비판>에 나타난 문화개념의 도출과정



3.2.1 심미적 반성 - 감정을 매개로 한 인간(주체)의 발견



대상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 해석과 판정의 준칙만을 갖는 반성적 판단력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어떤 암호를 읽고자 한다. 복잡하고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에서 과연 조화로운 세계상을 바래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칸트는 그 징후가 될만한 현상들을 재해석한다.

칸트는 개별적인 주관의 판단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모종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주장하는 무관심적 취미판단을 일단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 특수한 종합판단의 가능성에 대해 연역(권리증명)을 할 필요성을 뒤늦게 느끼게 된다. 연역의 결과 드러나는 것은 감정의 보편적 전달(소통)가능성(이는 상상력과 지성간의 자유로운 조화관계에 의존한다)이라는 심미적 공통감(sensus communis aestheticus)의 이념이 취미판단의 원리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심미적 공통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전제되는 주관적 조건으로서, 이에 기반한 미적 반성의 쾌감(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주관적 합목적성이다)을 다른 모든 이들에게 전달하고 주장할 수 있는 토대이다. 칸트가 말하는 공통감은 생리적 기관이나 경험적 공감이 아닌 일종의 이념이다. 이념은 '인간성'(Humanitat)이라는 어떤 무규정적인 지평으로서, 판단자는 이에 기대어 다른 사람들의 가능한(실재적이지 않은) 판단의 입장을 고려하는 가운데 보편성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취미판단이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미리 규정된 개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순수한 쾌감과 더불어 '인간성'이라는 보편을 새로이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가 이야기하는 인간성은 어떠한 개념도 도달하지 못하는 "주관의 모든 능력의 초감성적 기체" 또는 "인간성이라는 초감성적 기체"(das ubersinnliche Substrat der Menschheit)로서 취미판단의 규정근거 역할을 하고 있다. 취미판단의 이율배반을 해결하는 원리구실을 하는 이 인간성이라는 규정불가능한 이념은 일개 개인의 판단을 다른 모든 이들에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권리와 더불어 개방적인 토론가능성을 가능하게 해준다. 칸트가 미에 있어 완전성 개념을 배제하는 이유는 취미판단자의 자율성 뿐만 아니라 타인들과의 논의의 여지를 남기기 위한 것이다. 이때 산출되는 인간성의 이념은 보편적 관여의 감정임과 동시에 자신을 가장 성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편협한 동물성과는 구별되는 사회성(사교성:Geselligkeit)을 통하여 공동체의 윤리적 보편성에로 나아가는 매개의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감정을 보편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그것도 마치 의무처럼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현상 내에서의 자유 이념의 감수가능성을 타진하는 칸트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칸트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자율성을 구가하고 그러면서도 보편성을 당위적으로 요구하는 것 같은 취미 현상에서 도덕적 자유상태의 맹아를 보는 것이다.

한편 沒형식적인 숭고의 경험은 감성의 한계 속에서 우리의 무한한 이성능력이 부정적으로 현시되는 것이다. 숭고에서 감성과 이성간의 충돌은 같은 주관 안에서 그들의 공존을 의식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상상력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총체성에 대한 노력을 하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부정적인 방식으로 무한한 능력인 이성의 존재를 증언해 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감성적인 경험인 숭고 또한 자유와 도덕법칙의 능력인 이성을 발견하게 하는 그 나름의 초감성적 사명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숭고에서 환기되는 불쾌감 또한 현재 처한 상황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세계를 꿈꾸려는 인간의 지향성을 보여주는 합목적적 기능을 가진 것이라 하겠다.



3.2.2 목적론적 반성 - '인류'의 '문화'개념으로의 지평 확장



미와 숭고라는 주체의 심미적 경험에서 구체적인 확증을 얻게 된 합목적성의 원리는 외부 대상에 목적 개념을 확장시켜 적용할 권리를 갖게 한다. 이때 이러한 확장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우리의 경험에 주어진 '유기체'라는 사실(Faktum)이다. 유기체는 그 각각의 내부에 하나의 내적 인과성을 상정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현상이다. 즉 단순히 기계론적 설명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관념상으로나마 마치 기술적 이성과 같은 조직원리를 지닌 것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는 지성이 더이상 규정할 수 없는 대상의 실질적 통일성의 개념을 '자연목적'(Naturzweck)이라는 반성개념으로서 고찰한다. 개별적인 유기체 각각의 형식적인 내적 구조를 의미하는 이 자연목적은 상호간의 유용성으로 연결되는 외적 합목적성의 체계를 형성한다. 생태계의 먹이사슬 고리를 연상시키는 이 자연의 체계에 대한 목적론적 반성은 체계 내 개별항들의 현존의 이유를 묻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연 전체의 현존의 이유, 즉 도대체 왜 그것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 물음은 전체 체계를 완결시키는 자연의 최종목적(letzte Zweck)을 설정하게 하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자연 자체를 목적의 체계로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자연 체계의 최종항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목적을 이해할 수 있고 합목적적으로 형성된 사물들의 집합을 자기의 이성에 의하여 목적의 체계로 만들 수 있는 지상 유일의 존재자"(제 84절)로서 "지구상 창조의 최종목적"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최종목적은 아직 자연의 한계 내부에 갇혀 있는 개념이다. 인간은 이를 넘어서 자신의 가능의 조건으로 자기 자신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필요로 하지 않는 무제약적인 목적 그자체 즉 궁극목적의 존재를 요구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것이 존재하는가'를 더이상 물을 수 없는 궁극목적이 현존해야만 세계는 존재의 우연성에서 구제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천이성이 부과하고 있는 이 최고의 목적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존재는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다. 이는 인간이 지향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을 경주해야할 최고선 개념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지상의 조건, 즉 "인간이 궁극목적이 되기 위해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하도록 인간에게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이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가"(제 83절)를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궁극목적을 실현해야 할 장소로서의 자연의 최종목적은 그 가능성의 관점으로 고찰되는데, 이때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입각하여 구현되는 조건들의 체계를 칸트는 '문화'(Kultur)로 파악한다. 문화는 인간이 외적.내적 자연을 사용할 수 있는 온갖 목적들에 대한 유능성(Tauglichkeit)과 숙련성(Geschicklichkeit)의 체계로서 칸트를 이를 오직 형식적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문화는 "자기자신 목적을 세우고 또(자기의 목적규정에 있어 자연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을 자기의 자유로운 목적 일반의 격률에 맞도록 수단으로 사용하는 유능성", 또는 "임의의 목적 일반에 대한 이성적 존재자의 (따라서 그의 자유에 있어서의) 유능성을 산출함"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칸트는 문화를 두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하나는 '숙련성'(Geschicklichkeit ; skill)의 문화이다. 이는 이성을 기술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여 외적 자연을 제도화한 것을 일컫는다. 학문과 예술, 정치체제 등의 제도적 체계와 그 수단들을 가리키는 숙련성의 문화는 집합적인 인류가 불평등과 갈등을 원동력으로 하여 발전시켜온 것이다. 목적론의 견지에서 바라볼때, 사치스러운 예술, 현학적인 학문, 파괴적인 전쟁, 불평등한 계급차이 등 자연적 메카니즘에 따르는 온갖 갈등들은 인류의 자연적 소질의 발전을 극대화하려는 자연의 의도를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해석된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적 조건으로 칸트가 들고 있는 것은 보편적으로 법이 지배하는 시민사회와 각 시민사회들의 연합인 세계시민사회이다. 이는 갈등의 영구종식을 의미하지는 않고 갈등을 생산적으로 제도화시키는 세련된 구조의 마련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순화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한갓 자연적 존재로 머물고 말 뿐, 목적합리성을 가지는 지상 유일의 존재라는 이름에 값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칸트는 암시한다.

문화의 또다른 측면은 '훈련'(Zucht ; discipline)의 문화이다. 『실천이성비판』에 따를 때, 인간이 스스로를 목적으로 사유함으로써 다른 여타의 동물들과의 차별성을 설정한다면 자연적 경향성보다는 스스로의 이성에 의해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자연경향성을 지배하는 도덕적 힘을 소유하기 위해 '훈련'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개별적인 주체가 "자기의 목적을 규정하고 선택함에 있어 의지를 촉진"하는 데에는 제도적 체계만으로는 충분하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의 욕망의 전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훈련은 문화의 소극적인 조건이지만, 그칠 줄 모르는 개개의 욕망의 발화가 낳을 수도 있는 여러가지 해악을 제어할 수 있게 하는 요소이다. 학문적인 허영이나 취미의 사치 등 문화가 기형적이고 극단화되는 것을 피하고 직접적인 본능적 욕망에 구애받지 않게 하는 장치를 문화는 지녀야 한다. 자기통제력을 갖춘 문화인만이 건전한 문화를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훈련의 문화는 문화의 교육적 측면에 해당하며 이는 진정한 도덕적 깨달음을 주기 위한 예비적 단계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훈련의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학문과 예술은 "보편적으로 전달되는 쾌에 의해서, 그리고 사회에 대하여 세련과 순화를 줌으로써, 비록 인간을 도덕적으로 개선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인간을 개화시키거니와, … 관능적 애착의 압제를 극복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이성만이 위력을 가져야 하는 지배권의 준비를 해"주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맺음말 - 칸트 문화개념의 의의



칸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당대의 문화일반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처방으로서 자신의 철학 체계를 구축했던 사상가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 위기(Krisis)에 처해 있음을 직시하고 이를 특유의 비판(Ktitik)작업을 통해 극복해나가고자 한 것이다. 그가 제시한 처방은 인간이 스스로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성 자신의 목적을 이념으로나마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념이 그가 말하는 '최고선'이다. 이는 '자연과 자유의 통일'이라는 말로 수렴될 수 있는 조화롭고 역동적인 상태를 일컫는다. 칸트에게 있어서 언제나 이중적 존재로 전제되는 인간은 분열된 현존을 어떻게든 넘어서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과정적 존재로서 파악된다. 그리고 인간이 이 땅에 발붙이고 서 있는 구체적 존재인 한 자신이 설정한 목적의 실현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을 칸트는 간과하지 않았다. 이에 우리는 근대의 새로운 인간상과 문화의 역할을 모색했던 시도의 하나의 『판단력비판』을 읽기를 제안했다. 우리는 『판단력비판』을, 인간이 세계에 투사하는 목적과 그것의 실현을 위한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자연과 문화 일반의 합목적성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저작으로 보고자 한 것이다.

『판단력비판』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주체는 자연과 세계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자연과 자유의 통일을 기획하는 주체이다. 이는 또한 고립적.절대적.개별적인 개체가 아니라, 외부의 자연이나 다른 주체들 간의 상호 교섭과 긴장을 전제로 하는 개방적인 주체이다. 이 반성의 주체야말로 역동적이고 다원적인 문화의 공간을 형성해 나가는 주인공인 것이다. 이때 칸트가 말하는 문화란 이러한 주체들의 자연적 소질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총체인 동시에 훈련의 체계를 일컫는다. 문화는 자연과 자유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니는 인간이 세계의 궁극목적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도덕적인 자율적 존재라는 이상을 향해 노력해나가는 '과정' 자체인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살펴본 『판단력비판』에서의 '문화'개념에 기반하여, 그 특징을 간단히 검토해보기로 하겠다. 우선 칸트의 문화개념은 당대에 풍미한 독일 역사주의의 그것과 대조된다. 예컨대 헤르더는 일종의 문화유형론을 개진하여 각문화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강조하고 특정집단의 특정산물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문화를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것으로 보며, 개인의 도덕적 추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특정문화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21) 그러나 칸트는 이들 역사주의자와는 달리 문화의 정당성에 대한 일종의 규범적 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칸트는 역사주의자처럼 문화를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진 독특한 현상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도덕적 완성을 촉진시킨다는 의미까지 부여하고 그 정당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문화를 인류 일반의 발전을 자연과 야만적 개인주의의 극복과정이라 보긴 하지만 자연을 전적으로 배제하거나 개별성을 억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 문화적 실천은 개개인의 훈련과 자기계발을 도덕적 행위를 위한 기반으로서 장려하는 의도를 가지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은 지리멸렬한 문화유형론이나 문화적 상대주의의 폐단을 시정하여 해롭지 않은 문화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한다. 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헤겔 사상과의 비교이다. 칸트의 문화개념은 헤겔과 같은 방식으로 역사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전개를 정신의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으로 보는 헤겔은 문화의 발전을 항상 나중의 항이 이전의 것보다 우월한 가치를 갖는 통시적 구조로 파악한다. 가령 이성의 자기실현의 역사에서 예술은 종교로 또 종교는 철학으로 발전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칸트는 대상을 모두 이성의 자기실현과정 안에 포섭시키지 않고 이성과 자연, 또는 개인과 공동체 등의 섬세한 차이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 양 계기를 공시적으로 포괄하는 가운데 역동적인 조화를 모색하는 과정들의 연쇄로서 문화의 역사를 바라본다. 이때 자연/문화/도덕성이라는 구분지들은 인간성의 항구적인 요소들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간의 조정과 조화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칸트의 문화적 진보에 대한 사상은 물질이나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자연과 인간 간의 합목적적 관계의 체계라 할 수 있는 문화는, 한갓 관조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칸트에게 있어 문화는 인간이 기획한 실천적 활동으로 미래를 창출하는 것이며 진정한 문화의 진보는 계몽과 자율성의 증가라는 척도로 가늠되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근대의 이상적 인간상인 '자율적인 인간'의 실제적 가능성이 순수하게 보여지는 곳은 자기 고유의 반성 원리에 기대고 있는 취미 현상이다. 문화의 대표적 분야라 할 수 있는 취미의 논의 공간에서는 그 특유의 개별성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이 끊임없이 추구되어 왔고 상호소통의 문제가 항상 거론되어 왔다. 또한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격심한 논쟁의 장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는 언제나 천재적 독창성의 발현과 시간을 소요하는 취미의 도야(훈련)가 서로 건설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긴장력을 잃지 않고 있다. 칸트는 근대 사회의 이상인 자율적 인간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취미 현상에서 직시하고 여기에다 선험적인 원리를 부여하려 하였다. 이른바 자연과 자유를 매개한다는 기획을 가진 『판단력비판』의 출현은 물론 칸트 철학 자체 내의 체계 완성을 향한 충동에 의탁한 것임과 동시에 당시 점증하던 미학적 담론들의 중요성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한 것이다. 칸트는 취미의 자율성 추구의 노력에 대한 통찰을 목적론적 사고와 결합시켜 새로운 문화론의 단초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이다.

심미적 반성을 목적론적 반성과 필연적으로 연결시켜 이해하는 전략은 오늘날 예술에만 한정시키는 듯한 미학적 논의의 대상을 확장시키고 문화와 자연과의 총체적 관계설정의 방식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넓은 의미에서의 '새로운 문화의 형성'이라 한다면, 자신이 처해있던 계몽기의 상황에서 나름의 새로운 인간상과 문화를 창출하려 했던 한 근대인의 치열한 고민의 현장을 더듬어 보는 것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 생각된다.

*이 글은 필자의 삭사학위논문(96년 2월)을 축약한 것이다.

**미학과 석사과정 졸업(96년 2월).

1) 강영안, 「문화개념의 철학적 배경」, 『문화철학』(철학과 현실사, 1995).

2) 이 물음은 칸트가 1비판에서 철학의 고유업무로 들었던 세가지 질문, 즉 (1)우리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2)우리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3)우리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라는 질문들과 모두 관련된 것으로 그의 『Logik』에서 네번째 항목으로 열거되고 있다. 이는 포괄적인 인간학(Anthropologie)의 물음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학이란 용어는 영미식의 문화인류학보다는 보다 철학적인 함축을 가진다.

3) 이와 같은 입장으로는 아도르노나 가다머, 루카치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대체로 칸트 미학이 모든 내용을 사상한 '형식주의적 곤경'에 빠져있음을 지적하면서, "거세된 쾌락주의", "모든 실천적 함축에 대한 무관심", "인식적 함축의 박탈" 등의 용어로 칸트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미적 자율성 개념의 긍정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거기에 사회, 실천적인 내용부여를 도모한다는 점에서는 실상 칸트와 다를 바가 없다고 Kramling은 지적한다. Kramling, Die Systembildende Rolle von Asthetik und Kulturphilosophie bei Kant(1985), S. 85 참조.

4) 이는 미학적 담론을 근대 철학 일반의 이른바 '존재의 주관화' 경향이 극단화된 형태로 보는 해석과도 맞물려 있다. 이는 근대적 '주체'개념에 대한 급진적인 반성을 주제로 하는,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 논자들의 중심적 견해를 형성한다. 이러한 흐름은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5) KU, E(서론), IX.

6) 여기서 논의되는 시민사회나 국가의 문제는, 칸트가 그것을 문화가 발현하는 기본적인 토대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문화개념 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7) 이한구, 「칸트의 시민사회론-정치적 권위의 철학적 기초」, 동국대 철학과 석사논문(1983)과 임미원,「칸트 법철학에 관한 일고찰」, 서울대 법학과 석사논문(1992) 참조.

8) KdrV, B 304, 766 ff.

9) "Beantwortung der Frage : Was ist Aufklarung?"(1784), 이한구 역, 『칸트의 역사철학』(서광사) p. 13-22.

10) 앞의 책, p. 23-43.

11) 앞의 책, p. 75-94.

12) Y. Yovel, Kant and the Philosophy of History(1980), ch. 3 참조.

13) 이한구, 앞의 책, p. 87.

14) 그리하여 Velkley는 칸트의 도덕적 이상주의가 홉즈나 마키아벨리류의 근대적 현실론과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Freedom and End of Reason(1989), ch. 3, n. 5 (p. 191). 그에 따르면 칸트는 인간의 당위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필요함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즉 연사의 연구는 진정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원리상 언제 어디서나 접근가능한 이상을 발견하는데 필수적인 예비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의 도덕적 이상주의는 인간성의 정점을 인간의 본성(자연)과 동일시한 고대의 도덕적 이상주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15) 칸트가 전개하고 있는 상이한 의미의 최고선 개념에 관해서는 Kramling(1985), S. 61 f 참조.

16) 이 준비상태가 목적보다 하위의 개념인 것은 사실이나 단지 수단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목적을 향한 끝없는 도정 위에서 구체적인 인간은 항상 준비상태에서 자신의 실천을 담보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7) 이는 Kramling의 용어이다. 칸트 역시 인간의 기술적 측면을 서론에서 밝혀 놓고 있다. KU E, I, S. 23 참조.

18) '목적'(Zweck)개념은 영혼 신 등과 같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개념들과 함께 칸트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1비판과 2비판에서 인식의 영역에서는 배제된 채로, 단지 규제적 이념이라거나 실천적 요청의 차원에서 소극적 기능만을 부여받았다. 그러다가 『판단력비판』 이후 이 목적 개념은 '반성적 판단력'을 매개로 하여 비판철학의 틀 내부로 재도입되기에 이른다. 칸트는 미학, 유기적 세계, 경험적 역사(문화) 등의 영역에서 기계적 법칙들에로만 환원될 수 없는 어떤 통일성이 있는 현상들을 발견한다. 이 현상들에 대한 반성은 선험적인 것이 하니라 후험적으로, 즉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에 대해 事後的(ex post facto)으로 일어나는 것이다.(Yovel, p. 159) 그러나 이떄 대상을 반성하는 주체의 이해형식3에는 모종의 선험적이고 초월론적인 원리가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원리는 대상 자체를 규정하는, 실재의 존재론적 가능성의 조건은 아니지만, 이들 현상의 이해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19)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반성적 판단력의 원리를 Kaulbach는 자연에 적용되는 하나의 유사범주(Quasi-Kategorie)로 취급한다. 이 범주에 따라 자연은 지성에 의한 기계적 방식이 아닌 기교적(technisch) 방식으로 고찰된다. F. Kaulbach, Asthetische Welterkenntnis bei Kant(1984), S. 15 f.

20) 『판단력비판』의 제2부인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 부분도 이론철학의 맥락에서 설명된다.

21) Salim Kemal, Kant and Fine Art-An Essay on Kant and the Philosophy of Fine Art and Culture, Clarendonpress,(1986). p. 7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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