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칸트라고 하면 우리 지구 인류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의 하나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칸트가 무엇을 적고, 무엇을 논했는가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칸트라는 사람이 엄청난 철학자란 사실만 알지 그 이상으로 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칸트에 대해 작년부터 본인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칸트의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이번에 <판단력비판>까지 읽게 되었다.
칸트의 3대 비판으로 널리 알려진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이 세 가지의 비판을 읽으며, 솔직히 이해하는 것은 후자로 두더라도 책 자체를 읽는 것 자체가 지독한 악몽이었다. 문구가 매우 난해하고, 낱말의 전개나 단어의 해석, 그리고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내용들이 이때까지 내가 본 서적 중에 가장 난해한 도서 베스트로 올라갈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전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솔직히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정식으로 칸트를 배우지 않고서는 힘든 작업이란 것을 이번 <판단력비판>을 읽으면서 더욱 느꼈다.
그런다고 해도 배움의 길에는 끝이 없고, 모른다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나갈 수만은 없다. 언제 다시 한 번 3대 비판을 다시 읽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때까지 3가지의 비판을 보면서 난이도가 <순수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실천이성비판>이었다. 책의 두께가 굵거나 혹은 서적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난이도가 높았다. 그런데 이 3가지의 서적을 보면서 느낀 점은 칸트의 3대 비판을 읽으면 같이 서로 비교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판단력비판의 경우에는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책 자체 내용만으로 어려우나 순수이성비판의 사전지식의 누락은 이 책에서 다루는 진실한 의미를 놓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문구는 판단력비판에 제시된 내용을 적어 놓았는데,
1부터 4까지의 능력과 원리, 대상별로 어떤 점들이 인간의 내부의 의식을 작용하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일단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판단력비판은 단순히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판단능력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력이란 자체가 판단할 수 있는 대상을 토대로 그것을 보고 있는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대한 정신활동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판단력비판은 판단과 비판이 같은 의미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하는 능력 자체를 비판하고 있기에 비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순수이성비판이 중요한가에서 그 판단해야할 대상에 대해 인식하거나 사고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원리들이 숨어있는지 말이다. 어떻게 보자면 물리학적인 요소가 많이 통용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칸트의 철학은 순수철학인 형이상학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미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취미능력 판단에서 우선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바로 지성이 필요한 이유가 그러하다. 만약 지식이 없다고 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을 배워 암석에 대한 구조와 더불어 건축학을 알지 못하면 건축미학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조경학을 모르고서는 공원미학을 알 수 없다.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미학(美學)이란 미를 공부하는 학문이기는 하나, 미학 자체에 대한 학문적 배움은 없다. 단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잡다한 것들을 습득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학이란 것은 철학이란 칼로 예술을 찌르거나 잘라보는 학문이니, 기본적으로 철학이란 토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만으로는 그것을 다 정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철학적인 영역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인간의 사고로서 취미에 대한 감성적 판별을 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알아가는 것에서 과연 단순히 자연에 대한 미만 존재하는 것일까? 칸트의 미는 단순히 자연의 숭고함이나 위대한 신앙심을 담은 건축물만도 아닌 것 같았다.
본문과 주석을 잠시 찾아보면 <나는 인민의 땀을 그처럼 불필요한 것들에 소비하는 권력자들의 허영을 꼭 루소와 같은 투로 꾸짖을 수 있다 - 아마도 “굶주린 다수에게는 필수품도 없는데 한 줌의 사람에게는 사치품이 넘친다.”의 끝 대목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인간학 강의⌋>처럼 칸트가 직접적으로 루소가 언급한 문구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글을 전개하지 않으나, 적어도 앞의 문장들을 보고 있자면 칸트의 미적인 감각에서 아름다움을 눈에 당장 보이거나 귀에 들리거나 냄새를 맡거나 피부에 닿거나 입 안에서 맛을 느끼는 것처럼 개인이 직접적으로 신체의 오감을 통해 대상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가령 칸트의 <판단력비판>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의 미의 가치를 논하므로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이 가지는 감각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수이성비판>을 읽어야 이 책이 어느 정도 연결되듯이 한편으로 <실천이성비판>까지 파악하는 편이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야할 사항이다. 루소의 문구처럼 루소의 주장은 결국 가난한 자들은 당장 생계에 곤란하여 큰 위기와 고뇌로 슬퍼하고 있는데, 어느 소수의 인간들은 사치품으로 장식하여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점이다.
따라서 저 문구를 보자면 칸트가 루소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처럼 프랑스나 혹은 가난한 유럽의 가난한 사람이 어려워하는 것을 공감하는 셈이고, 그것은 정치가나 혹은 권력자들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함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미라는 것은 <순수이성비판>처럼 선험적인 이성 안에서 지성을 통해 판단하여 그것에 대한 원리와 논리를 찾는 것도 좋으나, <실천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선(Goods)을 베푸는 것 역시 중요한 미라는 점이다.
결국 미라는 것은 진과 선의 영역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그것이 예술이란 하나의 체계에서 다루고 있으나, 예술 역시 인간의 삶과 밀접하고, 인간의 정신과 상당히 밀접하다. 인간이 가진 사고가 그대로 예술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술을 광학으로서 삶을 보고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만큼 판단력비판에서 인간의 지성을 쌓고 판단하여 그것에 대한 윤리적 이성으로 그 대상을 판단하는 것 자체까지 재비판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칸트는 인간의 교조주의적인 관념과 논리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논리를 위한 논리가 아니라 윤리가 아닌 논리라는 점이다. 칸트의 인간에 대한 가치란 인간은 수단이 되는 대상이 아니라 목적이 되는 대상이란 점이다. 즉 인간의 존재는 고귀하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 <실천이성비판>에서 자기의 이성적인 가치 아래 자신의 선을 남에게 건네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목적의 대상이기 때문이란 점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남에게 선을 주거나 혹은 남의 선을 빼앗아 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전자의 경우 쾌감을 남에게 주는 것이고, 후자는 남에게 불쾌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럼 점에서 위에서 보이는 4개의 세로와 4개의 가로로 이루어진 도식에서 1번 라인은 명제를 구분되는 셈이고, 2번은 <순수이성비판>으로 연결되고, 4번은 <실천이성비판>으로 연결된다. 결국 판단력의 비판은 자신이 사물을 보는 것도 그러하나 자신이 하는 판단하고 실천하는 행위 자체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학에 대하여 적은 <판단력비판>에서 정말 아름다움 것들이 무엇으로 봐야 할 것인가? 일단 우리가 예술가 중에 유명한 인물을 상기시켜보라고 하면 보통 파블로 피카소가 생각날 것이다. 미적 감각을 다루는 점에서 보편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것에서 천재화가 피카소의 거명은 매우 적절하다. 하지만 피카소는 우리가 다 알고, 그가 무슨 그림이 있는지 대략 몇 가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가 무슨 삶과 사고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일단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좋은 예술은 천재만이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천재만이 남이 만들지 않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의 예술에 대한 담론에서는 진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천재의 창조성이었다. 그 뒤에 그 누구든지 완벽하게 따라 해도 그것은 원래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할 모조품이고 복제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리 인간이 아름다운 새의 울음소리를 잘 내어도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 자체 역시 자연적이고 이루어지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나는 피카소를 예로 들었을까? 어느 책에서 재미있는 피카소의 일화가 등장한다. 피카소가 아주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너는 정치를 하면 대통령이 되고, 신부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피카소가 말 한 마디를 더 붙이어 문구를 완성했다. “나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리고 나는 피카소가 되었다.” 천재화가 피카소의 탄생이란 이렇게 되었다. 피카소가 어떻게 하여 큐비즘으로 혹은 초현실적으로 그린 그림들을 만들었을까?
그는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보았고, 제2차 세계대전 시의 나치의 포로로 잡혔으며, 그 외에도 프랑스 자체의 정부로부터 억압도 받았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위로하고 싶었고, 그들의 슬픔을 일그러진 이미지로서 그림판으로 내세웠다. 웃기게도 그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부르주아적인 가치관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던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엄청난 거액이 붙여질 정도로 높은 가격이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신의 예술로서 저항했으나, 결국 자신의 예술품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엄청난 상품이 되는 반전을 겪었다.
문제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그는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인간의 가치관이 상실하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 그리고 보니 피카소의 그림들은 결국 전쟁과 기아, 분쟁이 원인이었다.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독재자의 최후의 목표는 대부자라는 점에서 물질만능주의자들의 탐욕에 희생되어간 자들을 그렸는데 말이다. 어째든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예술이 왜 천재로부터인가에서 피카소의 예로 보면 된다. 일단 천재가 기존에 없던 것을 보고 만들고 했으니, 천재만이 예술을 크게 기여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에서 창조하는 것은 모방이란 말이 있다. 비록 제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이 없으면 불가한 것이다. 피카소가 그림을 아주 훌륭히 그려도 그가 처음에 미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그가 만든 위대한 작품은 없었다. 단지 다른 방면으로 예술이 나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예술에서 칸트가 최고로 보는 것은 미술이었다. 미술에 인간의 감성과 의식이 가득하며, 그것을 보는 인간으로 하여금 왜 저렇게 되었을까? 라는 사고와 그 사고에 대한 판단을 주게 되면, 그 판단으로 통해 삶에 대한 윤리적인 사고로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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