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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중세' 관련 용어 정리

by 이덕휴-dhleepaul 2019. 2. 11.

교제 :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참고도서 : 젠슨의 '미술의 이해'


중세미술관련 -용어해설

* 프레스코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 덜 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으로 배어들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 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따라서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프리스코는 석고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려야하는 어려움이 있으며, 그리므이 수정도 거의 불가능해 정확하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또 사용할 수 있는 안료의 색깔도 제한되어 있으며(15· 16세기의 화가들은 프레스코에는 천연의 안료만이 적합한 것으로 믿었다), 벽이 마를수록 색깔도 옅어지며, 색의농담을 이용한 효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과 제약이 오히려 광범한 주제의 디자인과 과감한 방식의 도입을 권장하는 격이 도어, 이탈리아 르네 상스 회화의 순수함과 힘, 불멸성을 크게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레스코 화법에서 석고는 안료를 접착시켜주는 매체로 작용하며, 흰색만이 사용된다. 이와같은 전통적인 방법 의 프레스코를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 부오노 또는 부온 프레스코라 하며, 같은 안료를 사용하여 마른 회벽에 그리는 것을 프레스코 세코 또는 단순히 세코라고 불렀다. 프레스코 는 기념 건조물의 벽화를 그리기에 가장 적합하다. 다만 습기가 차면 석고가 부서지므로 그 림도 함께 떨어져나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건조한 지역에서는 가장 영구적이다. 그 결과 건조한 지방 - 특히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북유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프레스코 회화는 크레타와 그리스의 벽화, 폼페이의 그레코 로만 벽화 가 있다. 중세 초에는 벽화를 그릴 때, 여러 방법이 혼합 사용된 듯하며, 프레스코로만된 벽 화는 없는 듯 하다. 그러나 로마 수도원 건물 벽화를 보면 12∼13세기에는 프레스코가 모자 이크 둾예의 일부로도 사영된 것이 발견된다. 훌륭한 프레스코는 대부분 이탈리아의 대가들 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 일인자가 지오토이고 그밖에 마사치오, 프란체스카, 라파엘로, 미켈 란젤로, 코렛지오등이 있다. 프레스코의 융성기는 14∼15세기이며, 16세기 이후로는 점차 유 화로 대체되었다. 19세기에 독일 기독교들과 영국의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전통적인 이탈 리아 프레스코의 부활을 시도했으나 기법의 복귀가 어렵자 들라크루아, 퓌비 드 샤반 등 많 은 화가들은 그 대신에 표구(Marouflage)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프레스코는 20세기에 들 어와 멕시코의 리베라나 오로츠코에 의해 재발견되는 등 그 전통은 계승되고 있다. 한편 아 시아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벽화를 그릴 때 마른 석고 위에 아교로 그리는 방법을 사용해 왔으나, 인도 지방의 벽화 기법을 조사해 본 결과 11∼12세기의 프레스코 기법이 전해진 것 으로 보인다.

* 카타콤

나폴리 ·시라쿠사 ·몰타 ·아프리카 ·소(小)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카타콤은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하며, 로마 아피아 가도(街道)에 면(面)한 성(聖)세바스찬의 묘지가 두 언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하에 묘지를 두는 풍습은 동방에서 전래되었으나 그리스도 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지하묘지의 풍습이 더욱 성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게르만 침입 후 지하매장을 하지 않게 되어 카타콤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랑(通廊)을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통랑의 곳곳은 넓은 방처럼 되어 지도자급 교도의 묘실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통랑의 벽면(壁面)에도 시체를 두는 벽감(壁龕)을 일정한 규칙으로 설치하였다. 여기에 남겨진 수많은 벽화는 고대 이교미술(異敎美術)과 중세 그리스도교 미술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예술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흥미롭다. 그 밖에 비명(碑銘)과 초대 그리스도 교도들이 예술의 상징으로서 그린 물고기 그림 등이 남아 있다. 로마제국의 박해시대에는 그리스도 교도들의 피난을 겸한 예배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현재 그 유적은 로마시의 관광 코스에 포함된 것도 있으며, 순례자 등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 바실리카(basilica)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재판소나 집회장 . 시장 등의로 사용한 장방형의 회당을 지칭하 는 건축 용어. 로마 주택의 열주가 있는 큰 방을 가르키기도 한다. '바실리카'라는 말은 '왕족의' '왕에 관한' 이라는 뜻의 그리스 어에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 신전을 본떠 로마인들이 발전시켰다는 것이 알반적인 견해이다. 고대 이집트의 궁전에서 전형적인 형태의옥좌가 놓인 정방형의 방은 폭이 짧은 쪽 벽에 입 구가 하나 있고, 두 줄로 나란히 열주가 늘어서 있으며 천정창이 있는 등 건축사가들이 보 통 '바실리카' 라 부르는 양식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나 이는 우연의 일치이다. 최초의 바실리카로 알려진 기원전 2세기초 로마에 건설된 건물들은 이런 형태를 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포름 에 인접한 '지붕이 가리워진 시장' 으로 개방된 주랑을 토해 안으로 들 어가게 되어 있다. 공화정 시대의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바실리카는 주랑이 아닌 폭이 긴 쪽 의 벽에 나 있는 입구를 통하서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 . 바실리카가 상업적 용도보다 재판소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자 입구 맞은 편에 아프스를 덧 붙여 판사석으로 사용했다. 바실리카는 이런 형태로 제정 초기 여러 지역으로 전파됐다. 기 원 후1세기 후반 로마의 궁정에서 발견되는 긴 측랑과 동쪽 끝에 아프스가 있는 '집회실' 을 일컷어 바실리카라고 하기도 했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장방형의 집회장을 포함해서 여 러 형의 공공건물을 칭하기도 하였다. 2세기경 로마에서 처음 등장해 지중해 중심과 동부의 여러 지방에 전파된 바실리카는 312 년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 후 교회건물에 사용되었다. 4세기 문헌에서는 콘스탄틴 황 제 시대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건축 양식에도 바실리카라는 이름이 나타나 있다. 대체로 바실리카라는 말은 특정한 건축 유형을 칭하는 것이 아닌 건물의 용도를 일컫는 말 로 사용된 듯하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에 의해서 1919년 4월에 정식으로 출범한 바 우하우스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은 모든 조형미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에 있다는 생각과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 모자이크 ( Mosaic )

여러 가지 색상의 돌·유리조각, 도편(陶片)들을 사용하여 이것을 평면에 늘어놓고 모르타르나 석회·시멘트 등으로 접착시켜 무늬나 그림모양을 표현하는 기법. 건축 등에서는 바닥이나 벽면 등을 장식하고, 공예품에서는 표면에 회화효과(繪畵效果)나 장식성을 나타내는 미술방식이다.
고전기(古典期)의 그리스에서는 모자이크는 자연석(백색과 흑색)으로 그림모양을 구성하고 있으나, 헬레니즘시대의 바닥 모자이크에서는 유색(有色) 대리석이 이용되었다.
로마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융성하였다.
모자이크 양식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① 오푸스 테셀라툼(opus tesselatum)은 돌을 사각형의 작은 단편으로 만들어 이것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로마의 바닥 모자이크에서 흔히 볼 수 있고,

② 오푸스 베르미쿨라툼(opus vermiculatum)은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시대에 들어서면서 생긴 양식으로서 돌은 불규칙적인 형태이며, 색상도 다채로워 회화효과가 높아지면서 벽면에도 실시하였으며,

③ 오푸스 섹틸레(opus sectile)는 대리석이나 그 밖의 돌을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모양에 따라 잘라 짜맞추는 것이다.

보통 모자이크에 사용하는 돌은 고대보다 중세의 것이 크며 색채효과도 크지만, 12세기 무렵부터 다시 작아지고 색상도 다양해졌다. 작게 부수어 짜맞출수록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하지만 색채효과는 약해진다.

*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이곳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호칭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고, 터키 지배하에서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어 ‘아야 소프야’라고 불리었으며, 현재는 미술관이 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에 바친 구당(舊堂)(325) 대신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새로운 구상으로 재건되었다. 안 길이 81 m, 너비 70 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 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본당(nave) 중앙에 4개의 대지주를 세우고 그 위에 대형 아치와 펜덴티브 구법(構法)에 의한 대원개를 덮고 있다. 동서의 긴 방향으로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대소의 반원개(半圓蓋)로 받치고, 남북 방향의 횡압은 대지벽(大支壁)(563 증설)으로 받친 매우 독창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설계자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라고 하는데, 그들의 재능이 만들어낸 풍부한 내부 공간과 동산을 방불케 하는 장대한 외관을 보고 헌당식(獻堂式)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헌당 당시, 당내에 빛나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아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 투르크의 점거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근년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前室]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당내에는 대소의 주두(柱頭) 조각으로 대표되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 네이브

건축용어. 중랑(中廊)이라고도 한다. 영어의 nave를 번역한 말로서, 배를 의미하는 라틴어의 navis에서 유래한 말이다. 좌우에 측랑(側廊:aisle)이 붙어 있는 건물에서는 아케이드에 의하여 구획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며, 좌우의 측랑 사이에 끼인 중심부로서, 성당 내에서 가장 넓은 부분이고, 일반적으로 예배자를 위한 장소이다.

* 궁륭

볼트라고도 한다. 형식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① 반원통 볼트:배럴 볼트(barrel vault)라고도 하며 직사각형 평면을 덮는다. ② 교차(交叉)볼트:크로스볼트(cross vault 또는 intersecting vault)라고도 하며, 2개의 반원통 볼트를 직교시켜서 만든다. ③ 돔(dome):원개(圓蓋)라고도 하며 원형 평면을 덮는 반구곡면(半球曲面)인데, 반원형 평면에는 세미 돔이 사용된다. ④ 첨두(尖頭)볼트:포인트 볼트(pointed vault)라고도 하며 반원통 볼트에서 변형되어 단면이 뾰족 아치로 된 볼트를 말한다. 볼트 구조법의 발달과정을 보면 돌이나 벽들을 주건축재로 사용하는 지방에서 볼트는 조적식 구조(組積式構造)로 대공간을 덮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역사적으로 고대 이집트와 근동지방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후 이 구조의 변천은 로마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의 건축양식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로마 시대의 거대한 공간의 건축양식은 로마인에 의해 완성된 조적식 배럴 볼트구조법에서 이룩된 것이다. 로마의 볼트는 조적식 구조에 천연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응결된 일체식 콘크리트 구조는 벽돌구조와는 달리 측면의 횡력이 격감되므로 큰 공간을 구성하는 데 합리적이다. 로마 시대의 배럴 볼트는 먼저 목조형틀에 벽돌 또는 돌로 리브 아치(rib arch:골격아치)를 일정한 간격으로 짜나가면서 이 리브 아치 사이를 납작한 축심부재(軸芯部材)로 연결시켜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사각공간에 콘크리트를 충전하여 경화시킨 후 이 충전을 여러 번 반복하여 소정의 두께에 달하도록 시공하였다.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당은 직사각형 또는 다각형의 평면이 주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돔이나 세미 돔이 주로 쓰였다. 로마식의 콘크리트 구조법은 사용하지 않고 편평한 대형벽돌이나 다공질의 경석(輕石)으로 쌓았다. 로마나 비잔틴의 볼트는 곡면의 모든 부분이 아치 작용으로 압축력을 전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로마네스크 시대에 이르러서는 로마시대처럼 콘크리트를 사용한 일체식이 아니어서 인장력과 횡력을 일으키므로 교차 볼트를 이용하였다. 직사각형 평면의 경우 네 귀에 지지기둥을 두고, 사방의 인접기둥에 걸리는 4개의 리브 아치(2개의 월 리브와 2개의 트랜스버스 리브)와 2개의 대각선기둥이 이루는 X자형 리브 아치(다이애거널 리브 또는 그로인)를 가늘게 걸쳐서 구조골격을 짜고, 이 골격 사이의 빈틈에 엷은 석판을 얹어 천장이 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또 직사각형 평면의 경우 구조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긴 변을 2개의 리브 아치(월리브)로 분할하고, 그 중간기둥에 트랜스버스 리브(단변방향의 리브 아치)와 평행된 리브를 걸쳐 6개의 기둥이 받쳐진 곡면을 6개로 분할하였다. 이 로마네스크의 교차볼트에서 대각선상의 기둥 간격은 인접 기둥 간격보다 길고 리브 ·볼트의 정점만은 동일한 높이가 되어야 하므로, 그로인이 더 완만한 곡률이 되어 아치로서의 횡력작용을 일으킨다. 더구나 평면 계획에서 기둥간격이 등거리일 수만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딕건축에서는 첨두볼트를 채택하여 평면 및 구조계획상의 신축성을 주었다.

이것은 반지름길이를 자유로이 가감할 수 있으며, 정점을 같은 높이가 되게 조절할 수 있다. 다시 볼트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리브 골조를 보강하기 위하여 주요 리브의 중간에 중간리브를 두고,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보조 리브가 부가되면서 복잡한 형을 이루어 별 모양 ·부채 모양 ·꽃 모양 등의 고딕 특유의 모양을 낳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리브 방식은 볼 수 없고 주로 배럴 볼트를 사용하는 로마와 비잔틴 구법이 부활되었으며, 첨두볼트의 모습도 없어졌다. 19세기 이후 신재료의 출현으로 조적식 구조의 볼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철강과 철근콘크리트조의 볼트가 그때까지의 실례와는 비교할 수 없이 경쾌하게 대공간을 덮게 되었다. 현대구조체에서 볼트는 그 구조적 기능을 상실한 채 일련의 얇은 피막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아치 리브를 조립하는 것과 극면 자체에 의한 것이 있으며 특히 현대의 철근콘크리트의 곡면구조(셸 구조)는 새로운 건축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 더럼 대성당

1093년 잉글랜드 북동부의 더럼시(市)에서 주교(主敎) 윌리엄에 의해 착공되어 1133년까지는 주체 공사가 끝났으나 13세기와 15세기에 새로 보완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장(全長) 약 155m의 삼랑식(三廊式)으로, 좌우의 수랑(袖廊)과 합쳐서 라틴 십자형의 플랜을 형성하고 있다. 당내(堂內)의 신랑(身廊) 양쪽의 측주(側柱)는 속주(束柱)와 굵은 원주를 교대로 늘어 세운 노르만 건축 특유의 중후한 구성을 보여 주는데, 천장을 덮은 교차궁륭(交叉穹)은 대륙을 포함하여 극히 빠른 시기에 리브(늑골)를 실시한 예로서 주목되고 있다.

원주를 장식하는 사격(斜格)무늬 등의 홈파기나 궁륭 늑골의 가장자리를 두른 톱니무늬의 장식에서도 노르만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교차부의 주탑(主塔)은 높이 약 65m이며 서쪽 정면의 쌍탑과 함께 정상부가 평평한 영국의 전통적 사각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목록에 들어 있다.

* 피사 대성당

1063년 부스케투스의 설계로 착공, 1118년에 헌당식(獻堂式)을 올렸고, 1272년 이후에 라이날두스에 의해 회당부(會堂部)가 서쪽으로 연장(延長)되었다. 전체는 어느 것이나 바실리카풍의 단면(斷面)을 가진 5회랑식(五廻廊式) 회당부와, 좌우의 익랑(翼廊)으로 된 라틴 십자(十字) 플랜을 나타내며, 교차부(交叉部)에는 드물게 보이는 타원형의 원개(圓蓋)를 올려놓았다.
대리석의 가로무늬 모양의 석조물 배합이 선명한 외부는 전면에 장식적인 둥근지붕이 있는 복도와 측주(側柱)를 둘러쳤으며, 서쪽 정면(正面)의 상부 4층은 개방된 열주(列柱)로 장식되었다. 대성당의 앞에 독립해서 세워진 세례당(洗禮堂)은 디오티살비의 설계에 의해 1153년에 착공되었으며, 2층의 회랑을 가진 내부는 원추상(圓錐狀)의 궁륭(穹)의 천장으로 덮이고, 이것을 외부의 원개가 싸안은 특수한 이중구조로 되었다. 고딕풍의 외관은 N.피사노도 협력했다고 전하는 13세기의 개장(改裝)에 의한 것이다. 대성당의 배후에는 ‘피사의 사탑’으로서 이름높은 종탑(鐘塔:캄파닐레)이 있다.

* 노트르담 대성당

프랑스 초기 고딕성당의 대표작.
구분 : 대성당
소재지 : 프랑스 센강 시테섬
건립연도 : 1163년
건립자 : M. 쉴리
건축양식 : 고딕양식
센강(江) 시테섬에 있는 성당. 공사는 1163년 주교 M.쉴리의 지휘 아래 내진(內陣)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성왕 루이 치하인 13세기 중엽에 일단 완성되었으나 그 후에도 부대공사는 계속되어 18세기 초엽 측면 제실(祭室)의 증설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어 19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늑골교차궁륭(肋骨交差穹)으로 덮인 길이 약 130 m의 장대한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는 오낭식(五廊式)의웅대한 건축으로, 신랑 양측의 열주(列柱) ·트리포리움(명층 아래 연이은 층) ·명층(明層:높은 창)으로 된 명쾌한 3층 구성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단정한 서쪽 정면에는 최하층에 《최후의 심판》의 부조로 유명한 중앙 출입문 등 3개의 출입구가 있으며 여기에서 《제왕의 상》이 늘어선 가로가 긴 중간대를 거쳐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뜬 지름 9.6 m의 장미의 창을 중심으로 하는 층, 열주로 구성된 그랜드 갤러리가 잇달리고, 그 위에 지상 6.9 m 높이의 직사각형 쌍탑이 얹혀 있다. 힘차게 활 모양을 그린 다수의 비량(飛樑)으로 지탱된 남북의 측면에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명층이 줄을 잇고, 중앙 부근에 돌출한 익랑(翼廊) 끝 부분에는 지름이 13 m나 되는 유명한 장미의 창과 아름다운 조각을 볼 수 있다. 익랑과 신랑의 교차부에 치솟은 첨탑(尖塔)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또한 이 대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예배(1944.8.26) 등 여러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 공중 부벽

외벽면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벽체(壁體)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부벽(扶壁)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의 신전이나 궁전에서 볼 수 있는데, 로마 시대 이후 아치와 볼트(궁륭) 형식의 지붕이 생긴 뒤에는 지벽(支壁)의 중요한 구조 요소가 되었다. 특히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리브볼트(rib vault)의 발달에 따라서 버트레스는 벽체의 특징이 되었다. 또한 고딕성당 건축의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飛梁)는 주벽(主壁)과 떨어진 독립된 벽이 되어, 주벽의 횡압력을 아치 모양의 팔로 지탱하면서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이루고 있다.

* 아미앵 대성당

프랑스의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것으로, 1220년에 착공하여 몸체부 ·회랑 ·정면 ·본당(本堂)의 순으로 만들어져,1250년경에 완성하였다. 길이 145 m, 몸체의 너비 15 m, 높이 43 m. 특히 지상에서 20 m에 달하는 대(大)아치의 구조는 고딕의 특색인 상승성(上昇性)의 강조에 효과를 거두고 있다. 기술면의 완벽함과 미술적인 높이에 있어서 샤르트르와 랑스대성당과 더불어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이라고 일컬어진다. 정면의 쌍탑(雙塔) 구성과 3개의 문에 장식한 풍부한 조각군(群)은 파리의 노트르담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며 입상(立像)이나 돋을새김[浮彫]에 뛰어난 것이 많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샤르트르 대성당

프랑스 샤르트르에 있는 고딕양식의 대성당.

구분 : 대성당
설립연도 : 9~13세기
소재지 : 프랑스 샤르트르
설립목적 : 성당 건축
주요활동 : 종교의식
규모 : 신랑부 너비 16.4m, 천장 높이 36.55m, 성당 내 앞뒤 길이 73.47m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양식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특징으로 하는 고딕성당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 아미앵성당·노트르담성당·랭스성당 등과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성당의 역사는 화재와 재건의 역사로, 3차례의 화재와 재건이 거듭되었다. 9세기의 성당은 1020년 화재로 소실돼 재건되었으나, 1134년 다시 화재로 정면 현관부분이 파손되어 1150년 제2기의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복원되었다. 복원된 성당은 왕의 문이 있는 서쪽 정면 현관부와 좌우의 탑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1194년 화재로 파손되었으며, 1220년 제3기의 건조물로 완성되어 오늘날 성당이 되었다. 그뒤 내진부(內陣部)는 1221년, 남북 익랑부(翼廊部)는 1245년, 정면 북쪽 탑은 1513년 플랑부아양양식으로 완성되었다. 목골구조(木骨構造) 지붕은 1386년의 화재 뒤 철골로 비뀌고 지붕은 구리로 이었다.

성당 건물의 전장(全長)은 약 130m, 신랑부(身廊部)의 너비는 16.4m로 프랑스 제일의 규모이며, 천장 높이 36.55m, 성당 앞쪽에서 뒤쪽까지의 길이는 73.47m 이다. 이중의 주보랑(周步廊)으로 에워싸인 내진부와 삼랑식(三廊式) 회당부(會 堂部)의 경계에 남북으로 뻗어나간 수랑(袖廊)을 설치하고, 이 남북 수랑의 정 면과 서쪽 정면을 합한 세 곳에 출구를 내었다. 서쪽 정면의 좌우에는 높이 약 98m의 종탑이 솟아 있고, 좌우 측랑(側廊)의 지붕에 걸쳐 짜여진 플라잉 버트리 스[飛梁]가 높이 약 35m의 열주와 첨두교차(尖頭交差) 볼트로 지탱시킨 신랑의 상부를 밖에서 떠받치고 있다.

비교적 많이 분절되어 있는 구조적인 처리가 외관 디자인에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으며, 각각 다른 시대에 건축된 두 개의 첨탑은 이질적인 성격의 비대칭적인 역동성을 보여준다. 내부에 사용된 리브볼트방식은 4분볼트이며, 양쪽 측량에 정사각형 베이가 붙어 일종의 리듬적인 내부공간구성을 유도하고 있다.

초기 고딕조각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샤르트르대성당의 북쪽 현관을 장 식한 조각들이다.이곳에 새겨진 기둥의 인물조각들은 살아있는 듯 자유로운 몸과 긴장감 있는 얼굴 표정들이 조화를 이루며 매력있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성당을 유명하게 하는 것은 아케이드를 비롯하여 높은 창에 짜넣은 176개의 스테인드글라스 및 거대한 장미창이다. 장미창은 일부 12세기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13세기의 것으로, 서쪽 정면의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남쪽 장미창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북쪽의 장미창은 성모를 주제로 하였으며, 프랑스의 장미창을 대표한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랭스 대성당

구(舊)성당이 창건된 것은 400년경이며, 그 후 증축과 개축이 되풀이되었으나, 1210년의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건물은 그 이듬해 장 도르베의 감독하에 기공되어 내진익랑(內陣翼廊,1241), 신랑부(身廊部)와 파사드(13세기), 정면 탑(1430)의 차례로 낙성되었다. 세 개의 입구가 있는 파사드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둥근창이 있는 팀판, 박공(), 첨탑중층(尖塔重層) 아치, 기저부(基底部)에 배열된 인상조각(人像彫刻) 등으로 고딕 양식의 가장 화려한 외관 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조각은 프랑스 고딕 조각의 대표작으로서 중앙 입구에는 성모를 중심으로 한 《수태고지(受胎告知)》와 《마리아의 방문》, 오른쪽 입구에는 구약성서의 여러 인물, 왼쪽 입구에는 천사로 둘러싸인 성 니케즈 등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구성은 간략하지만, 조화를 이룬 방대한 규모(길이 150 m, 궁륭의 높이 38 m)와 정면 입구의 장미창(薔薇窓)은 압도적인 효과를 과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잔 다르크가 구해낸 샤를 7세가 1429년에 대관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영국 런던에 있는 성공회의 성당.
구분 : 성당
소재지 : 영국 런던
건립연도 : 1050년경 착공
건립자 : 에드워드 참회왕
설계자
건축양식 : 북프랑스 고딕양식

정식으로는 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라 부른다. 605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대체로 에드워드 참회왕(懺悔王:재위 1042∼1066)이 1050년경에 착공하였다. 영국 왕실과 인연이 깊은 대성당으로 역대 제왕의 묘소는 거의 이곳에 있고 또 윌리엄 1세의 대관(戴冠:1066) 이후로는 대관식장으로서도 알려져 있다. 저명인사의 묘도 많아 특히 남쪽 익랑(翼廊)은 시인(詩人)의 코너로 불리어 초서, 스펜서, 테니슨 등 많은 대시인들의 무덤이 있다. 중심을 이루는 현재의 대성당은 건축이나 미술에 의욕적이던 헨리 3세가 1245년에 착공한 것이다. 북(北)프랑스 고딕양식을 계승, 1298년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또 늑골궁륭(肋骨穹:리브 볼트)의 조형적 가능성을 추구한 영국 특유의 수직식(垂直式) 장식으로 알려진 화려한 헨리 7세의 예배당(1502∼1520)이나 영국이 낳은 대건축가 C.렌의 손으로 세운 탑(17세기) 등도 있다.

* 생트샤펠 대성당

프랑스 파리 시테섬에 있는 고딕양식의 성당.

구분 : 성당
설립연도 : 1248년
소재지 : 프랑스 파리 시테섬
설립목적 : 성유물 안치
주요활동 : 종교의식
규모 : 내부는 1층과 2층, 14m 높이의 15개 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

성왕 루이 9세의 명에 따라 1246년에 기공되어 1248년에 완성된 레요낭양식 고딕성당의 대표적인 성당이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로부터 입수한 가시면류관과 십자가 조각 등 성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왕궁(팔레 루아얄, 현재는 재판소) 안뜰에 세웠다. 내부는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은 왕족 전용으로 왕궁에 이어져 있고 1층은 일반인용이다.

비교적 세로 길이의 탑이 있고, 단순한 바틀레스와 높은 첨탑(尖塔)이 이루는, 하늘을 향한 포름이 아름답다. 2층은 측랑(側廊)이 없는 단순한 구조이고, 볼트는 가는 원주로 지탱되어 있다. 기둥 사이를 모두 창으로 만들었으며, 14m 높이의 15개 창은 구약성서를 소재로 한 1,134 장면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13세기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 스테인드글라스

주로 유리창에 쓰인다. 착색에는 구리 ·철 ·망간과 같은 여러 가지 금속화합물이 이용되며, 세부적인 디자인은 갈색의 에나멜유약을 써서 표현한다.

색유리를 창이나 천장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 중동지방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슬람건축에는 대리석판에 구멍을 뚫어서 유리 조각을 끼워, 채광과 장식을 겸하는 방식을 많이 이용하였다. 서구(西歐)에는 11세기에 이 기법이 전해졌으며, 12세기 이후의 교회당 건축에서 이 예술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고딕건축은 그 구조상 거대한 창을 달 수 있으며, 창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신비한 효과가 인식되어,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당 건축에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큰 발전을 해 왔다. 프랑스의 샤르트르대성당, 르망대성당, 영국의 요크 및 캔터베리 같은 여러 성당의 것은 12∼13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성당에 있는 예언자 다니엘상을 나타낸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65년 또는 12세기 전반이라고도 함).

일반적으로 초기의 것은 유리의 질이 고르지 못하여 착색에 얼룩이 지고, 섬세한 표현이 잘 안되었으나, 광선의 투과 ·굴절에 미묘한 변화가 있어서 오히려 매력을 더하고 있다. 14세기 이후 유리의 제작기술이 향상되어 세부적인 표현이 잘 되게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표현이 그림과 같이 되어 초기의 유리가 나타내는 독특한 미가 없어졌다. 19세기 후반 W.모리스, V.존스 등의 예술운동을 계기로 해서 중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의 미가 재인식되고,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F.레제, 마티스, H.루오 등이 현대건축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활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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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3] '중세' 관련 용어 정리|▣ 미학과 미술사               


교제 :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참고도서 : 젠슨의 '미술의 이해'  

[중세] 관련 용어 정리

* 프레스코

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탈리아어로 '신선하다'는 뜻. 덜 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으로 배어들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 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따라서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프리스코는 석고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려야하는 어려움이 있으며, 그리므이 수정도 거의 불가능해 정확하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또 사용할 수 있는 안료의 색깔도 제한되어 있으며(15· 16세기의 화가들은 프레스코에는 천연의 안료만이 적합한 것으로 믿었다), 벽이 마를수록 색깔도 옅어지며, 색의농담을 이용한 효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과 제약이 오히려 광범한 주제의 디자인과 과감한 방식의 도입을 권장하는 격이 도어, 이탈리아 르네 상스 회화의 순수함과 힘, 불멸성을 크게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레스코 화법에서 석고는 안료를 접착시켜주는 매체로 작용하며, 흰색만이 사용된다. 이와같은 전통적인 방법 의 프레스코를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 부오노 또는 부온 프레스코라 하며, 같은 안료를 사용하여 마른 회벽에 그리는 것을 프레스코 세코 또는 단순히 세코라고 불렀다. 프레스코 는 기념 건조물의 벽화를 그리기에 가장 적합하다. 다만 습기가 차면 석고가 부서지므로 그 림도 함께 떨어져나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건조한 지역에서는 가장 영구적이다. 그 결과 건조한 지방 - 특히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북유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프레스코 회화는 크레타와 그리스의 벽화, 폼페이의 그레코 로만 벽화 가 있다. 중세 초에는 벽화를 그릴 때, 여러 방법이 혼합 사용된 듯하며, 프레스코로만된 벽 화는 없는 듯 하다. 그러나 로마 수도원 건물 벽화를 보면 12∼13세기에는 프레스코가 모자 이크 둾예의 일부로도 사영된 것이 발견된다. 훌륭한 프레스코는 대부분 이탈리아의 대가들 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 일인자가 지오토이고 그밖에 마사치오, 프란체스카, 라파엘로, 미켈 란젤로, 코렛지오등이 있다. 프레스코의 융성기는 14∼15세기이며, 16세기 이후로는 점차 유 화로 대체되었다. 19세기에 독일 기독교들과 영국의 라파엘 전파의 화가들이 전통적인 이탈 리아 프레스코의 부활을 시도했으나 기법의 복귀가 어렵자 들라크루아, 퓌비 드 샤반 등 많 은 화가들은 그 대신에 표구(Marouflage)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프레스코는 20세기에 들 어와 멕시코의 리베라나 오로츠코에 의해 재발견되는 등 그 전통은 계승되고 있다. 한편 아 시아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벽화를 그릴 때 마른 석고 위에 아교로 그리는 방법을 사용해 왔으나, 인도 지방의 벽화 기법을 조사해 본 결과 11∼12세기의 프레스코 기법이 전해진 것 으로 보인다.

* 카타콤

나폴리 ·시라쿠사 ·몰타 ·아프리카 ·소(小)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카타콤은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하며, 로마 아피아 가도(街道)에 면(面)한 성(聖)세바스찬의 묘지가 두 언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하에 묘지를 두는 풍습은 동방에서 전래되었으나 그리스도 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지하묘지의 풍습이 더욱 성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게르만 침입 후 지하매장을 하지 않게 되어 카타콤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구조는 지하 10∼15m의 깊이에 대체로 폭 1m 미만, 높이 2m 정도의 통랑(通廊)을 종횡으로 뚫어 계단을 만들어서 여러 층으로 이어져 있다. 또한 통랑의 곳곳은 넓은 방처럼 되어 지도자급 교도의 묘실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통랑의 벽면(壁面)에도 시체를 두는 벽감(壁龕)을 일정한 규칙으로 설치하였다. 여기에 남겨진 수많은 벽화는 고대 이교미술(異敎美術)과 중세 그리스도교 미술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예술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흥미롭다. 그 밖에 비명(碑銘)과 초대 그리스도 교도들이 예술의 상징으로서 그린 물고기 그림 등이 남아 있다. 로마제국의 박해시대에는 그리스도 교도들의 피난을 겸한 예배장소로도 이용되었다. 현재 그 유적은 로마시의 관광 코스에 포함된 것도 있으며, 순례자 등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 바실리카(basilica)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재판소나 집회장 . 시장 등의로 사용한 장방형의 회당을 지칭하 는 건축 용어. 로마 주택의 열주가 있는 큰 방을 가르키기도 한다. '바실리카'라는 말은 '왕족의' '왕에 관한' 이라는 뜻의 그리스 어에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 신전을 본떠 로마인들이 발전시켰다는 것이 알반적인 견해이다. 고대 이집트의 궁전에서 전형적인 형태의옥좌가 놓인 정방형의 방은 폭이 짧은 쪽 벽에 입 구가 하나 있고, 두 줄로 나란히 열주가 늘어서 있으며 천정창이 있는 등 건축사가들이 보 통 '바실리카' 라 부르는 양식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나 이는 우연의 일치이다. 최초의 바실리카로 알려진 기원전 2세기초 로마에 건설된 건물들은 이런 형태를 하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포름 에 인접한 '지붕이 가리워진 시장' 으로 개방된 주랑을 토해 안으로 들 어가게 되어 있다. 공화정 시대의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바실리카는 주랑이 아닌 폭이 긴 쪽 의 벽에 나 있는 입구를 통하서 안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 . 바실리카가 상업적 용도보다 재판소로 사용되는 경우가 늘자 입구 맞은 편에 아프스를 덧 붙여 판사석으로 사용했다. 바실리카는 이런 형태로 제정 초기 여러 지역으로 전파됐다. 기 원 후1세기 후반 로마의 궁정에서 발견되는 긴 측랑과 동쪽 끝에 아프스가 있는 '집회실' 을 일컷어 바실리카라고 하기도 했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장방형의 집회장을 포함해서 여 러 형의 공공건물을 칭하기도 하였다. 2세기경 로마에서 처음 등장해 지중해 중심과 동부의 여러 지방에 전파된 바실리카는 312 년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 후 교회건물에 사용되었다. 4세기 문헌에서는 콘스탄틴 황 제 시대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건축 양식에도 바실리카라는 이름이 나타나 있다. 대체로 바실리카라는 말은 특정한 건축 유형을 칭하는 것이 아닌 건물의 용도를 일컫는 말 로 사용된 듯하다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에 의해서 1919년 4월에 정식으로 출범한 바 우하우스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은 모든 조형미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에 있다는 생각과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기본 이념으로 하였다.

* 모자이크 ( Mosaic )

여러 가지 색상의 돌·유리조각, 도편(陶片)들을 사용하여 이것을 평면에 늘어놓고 모르타르나 석회·시멘트 등으로 접착시켜 무늬나 그림모양을 표현하는 기법. 건축 등에서는 바닥이나 벽면 등을 장식하고, 공예품에서는 표면에 회화효과(繪畵效果)나 장식성을 나타내는 미술방식이다.
고전기(古典期)의 그리스에서는 모자이크는 자연석(백색과 흑색)으로 그림모양을 구성하고 있으나, 헬레니즘시대의 바닥 모자이크에서는 유색(有色) 대리석이 이용되었다.
로마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융성하였다.
모자이크 양식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① 오푸스 테셀라툼(opus tesselatum)은 돌을 사각형의 작은 단편으로 만들어 이것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로마의 바닥 모자이크에서 흔히 볼 수 있고,

② 오푸스 베르미쿨라툼(opus vermiculatum)은 4세기 이후 그리스도교시대에 들어서면서 생긴 양식으로서 돌은 불규칙적인 형태이며, 색상도 다채로워 회화효과가 높아지면서 벽면에도 실시하였으며,

③ 오푸스 섹틸레(opus sectile)는 대리석이나 그 밖의 돌을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모양에 따라 잘라 짜맞추는 것이다.

보통 모자이크에 사용하는 돌은 고대보다 중세의 것이 크며 색채효과도 크지만, 12세기 무렵부터 다시 작아지고 색상도 다양해졌다. 작게 부수어 짜맞출수록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하지만 색채효과는 약해진다.

*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이곳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호칭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교의 대성당으로 지어졌고, 터키 지배하에서는 이슬람의 모스크가 되어 ‘아야 소프야’라고 불리었으며, 현재는 미술관이 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가 ‘성스러운 예지(叡智)’(하기아 소피아)에 바친 구당(舊堂)(325) 대신에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새로운 구상으로 재건되었다. 안 길이 81 m, 너비 70 m의 광대한 3랑(廊) 바실리카 플랜과, 지름 약 33 m의 거대한 원개(圓蓋)를 교묘히 조합시킨 절충적인 원개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본당(nave) 중앙에 4개의 대지주를 세우고 그 위에 대형 아치와 펜덴티브 구법(構法)에 의한 대원개를 덮고 있다. 동서의 긴 방향으로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대소의 반원개(半圓蓋)로 받치고, 남북 방향의 횡압은 대지벽(大支壁)(563 증설)으로 받친 매우 독창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설계자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라고 하는데, 그들의 재능이 만들어낸 풍부한 내부 공간과 동산을 방불케 하는 장대한 외관을 보고 헌당식(獻堂式)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에게 이겼노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헌당 당시, 당내에 빛나고 있었을 6세기의 모자이크는 8∼9세기의 아이코노클래즘(성상 파괴운동) 때에 없어지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이슬람교 투르크의 점거하에 거의 없어졌으나, 근년의 조사에 의하여 앞방[前室]과 2층 복도의 벽면에서, 석회칠 속에 그려져 있던 9∼13세기의 모자이크의 일부가 발견되어, 그 고도의 기술과 뛰어난 표현이 주목을 끌고 있다. 당내에는 대소의 주두(柱頭) 조각으로 대표되는 비잔틴의 세련된 장식 조각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 네이브

건축용어. 중랑(中廊)이라고도 한다. 영어의 nave를 번역한 말로서, 배를 의미하는 라틴어의 navis에서 유래한 말이다. 좌우에 측랑(側廊:aisle)이 붙어 있는 건물에서는 아케이드에 의하여 구획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며, 좌우의 측랑 사이에 끼인 중심부로서, 성당 내에서 가장 넓은 부분이고, 일반적으로 예배자를 위한 장소이다.

* 궁륭

볼트라고도 한다. 형식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① 반원통 볼트:배럴 볼트(barrel vault)라고도 하며 직사각형 평면을 덮는다. ② 교차(交叉)볼트:크로스볼트(cross vault 또는 intersecting vault)라고도 하며, 2개의 반원통 볼트를 직교시켜서 만든다. ③ 돔(dome):원개(圓蓋)라고도 하며 원형 평면을 덮는 반구곡면(半球曲面)인데, 반원형 평면에는 세미 돔이 사용된다. ④ 첨두(尖頭)볼트:포인트 볼트(pointed vault)라고도 하며 반원통 볼트에서 변형되어 단면이 뾰족 아치로 된 볼트를 말한다. 볼트 구조법의 발달과정을 보면 돌이나 벽들을 주건축재로 사용하는 지방에서 볼트는 조적식 구조(組積式構造)로 대공간을 덮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역사적으로 고대 이집트와 근동지방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후 이 구조의 변천은 로마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의 건축양식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로마 시대의 거대한 공간의 건축양식은 로마인에 의해 완성된 조적식 배럴 볼트구조법에서 이룩된 것이다. 로마의 볼트는 조적식 구조에 천연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응결된 일체식 콘크리트 구조는 벽돌구조와는 달리 측면의 횡력이 격감되므로 큰 공간을 구성하는 데 합리적이다. 로마 시대의 배럴 볼트는 먼저 목조형틀에 벽돌 또는 돌로 리브 아치(rib arch:골격아치)를 일정한 간격으로 짜나가면서 이 리브 아치 사이를 납작한 축심부재(軸芯部材)로 연결시켜서 이루어지는 무수한 사각공간에 콘크리트를 충전하여 경화시킨 후 이 충전을 여러 번 반복하여 소정의 두께에 달하도록 시공하였다.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당은 직사각형 또는 다각형의 평면이 주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돔이나 세미 돔이 주로 쓰였다. 로마식의 콘크리트 구조법은 사용하지 않고 편평한 대형벽돌이나 다공질의 경석(輕石)으로 쌓았다. 로마나 비잔틴의 볼트는 곡면의 모든 부분이 아치 작용으로 압축력을 전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로마네스크 시대에 이르러서는 로마시대처럼 콘크리트를 사용한 일체식이 아니어서 인장력과 횡력을 일으키므로 교차 볼트를 이용하였다. 직사각형 평면의 경우 네 귀에 지지기둥을 두고, 사방의 인접기둥에 걸리는 4개의 리브 아치(2개의 월 리브와 2개의 트랜스버스 리브)와 2개의 대각선기둥이 이루는 X자형 리브 아치(다이애거널 리브 또는 그로인)를 가늘게 걸쳐서 구조골격을 짜고, 이 골격 사이의 빈틈에 엷은 석판을 얹어 천장이 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또 직사각형 평면의 경우 구조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긴 변을 2개의 리브 아치(월리브)로 분할하고, 그 중간기둥에 트랜스버스 리브(단변방향의 리브 아치)와 평행된 리브를 걸쳐 6개의 기둥이 받쳐진 곡면을 6개로 분할하였다. 이 로마네스크의 교차볼트에서 대각선상의 기둥 간격은 인접 기둥 간격보다 길고 리브 ·볼트의 정점만은 동일한 높이가 되어야 하므로, 그로인이 더 완만한 곡률이 되어 아치로서의 횡력작용을 일으킨다. 더구나 평면 계획에서 기둥간격이 등거리일 수만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딕건축에서는 첨두볼트를 채택하여 평면 및 구조계획상의 신축성을 주었다.

이것은 반지름길이를 자유로이 가감할 수 있으며, 정점을 같은 높이가 되게 조절할 수 있다. 다시 볼트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리브 골조를 보강하기 위하여 주요 리브의 중간에 중간리브를 두고,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보조 리브가 부가되면서 복잡한 형을 이루어 별 모양 ·부채 모양 ·꽃 모양 등의 고딕 특유의 모양을 낳았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리브 방식은 볼 수 없고 주로 배럴 볼트를 사용하는 로마와 비잔틴 구법이 부활되었으며, 첨두볼트의 모습도 없어졌다. 19세기 이후 신재료의 출현으로 조적식 구조의 볼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철강과 철근콘크리트조의 볼트가 그때까지의 실례와는 비교할 수 없이 경쾌하게 대공간을 덮게 되었다. 현대구조체에서 볼트는 그 구조적 기능을 상실한 채 일련의 얇은 피막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아치 리브를 조립하는 것과 극면 자체에 의한 것이 있으며 특히 현대의 철근콘크리트의 곡면구조(셸 구조)는 새로운 건축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 더럼 대성당

1093년 잉글랜드 북동부의 더럼시(市)에서 주교(主敎) 윌리엄에 의해 착공되어 1133년까지는 주체 공사가 끝났으나 13세기와 15세기에 새로 보완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장(全長) 약 155m의 삼랑식(三廊式)으로, 좌우의 수랑(袖廊)과 합쳐서 라틴 십자형의 플랜을 형성하고 있다. 당내(堂內)의 신랑(身廊) 양쪽의 측주(側柱)는 속주(束柱)와 굵은 원주를 교대로 늘어 세운 노르만 건축 특유의 중후한 구성을 보여 주는데, 천장을 덮은 교차궁륭(交叉穹)은 대륙을 포함하여 극히 빠른 시기에 리브(늑골)를 실시한 예로서 주목되고 있다.

원주를 장식하는 사격(斜格)무늬 등의 홈파기나 궁륭 늑골의 가장자리를 두른 톱니무늬의 장식에서도 노르만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교차부의 주탑(主塔)은 높이 약 65m이며 서쪽 정면의 쌍탑과 함께 정상부가 평평한 영국의 전통적 사각탑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목록에 들어 있다.

* 피사 대성당

1063년 부스케투스의 설계로 착공, 1118년에 헌당식(獻堂式)을 올렸고, 1272년 이후에 라이날두스에 의해 회당부(會堂部)가 서쪽으로 연장(延長)되었다. 전체는 어느 것이나 바실리카풍의 단면(斷面)을 가진 5회랑식(五廻廊式) 회당부와, 좌우의 익랑(翼廊)으로 된 라틴 십자(十字) 플랜을 나타내며, 교차부(交叉部)에는 드물게 보이는 타원형의 원개(圓蓋)를 올려놓았다.
대리석의 가로무늬 모양의 석조물 배합이 선명한 외부는 전면에 장식적인 둥근지붕이 있는 복도와 측주(側柱)를 둘러쳤으며, 서쪽 정면(正面)의 상부 4층은 개방된 열주(列柱)로 장식되었다. 대성당의 앞에 독립해서 세워진 세례당(洗禮堂)은 디오티살비의 설계에 의해 1153년에 착공되었으며, 2층의 회랑을 가진 내부는 원추상(圓錐狀)의 궁륭(穹)의 천장으로 덮이고, 이것을 외부의 원개가 싸안은 특수한 이중구조로 되었다. 고딕풍의 외관은 N.피사노도 협력했다고 전하는 13세기의 개장(改裝)에 의한 것이다. 대성당의 배후에는 ‘피사의 사탑’으로서 이름높은 종탑(鐘塔:캄파닐레)이 있다.

* 노트르담 대성당

프랑스 초기 고딕성당의 대표작.
구분 : 대성당
소재지 : 프랑스 센강 시테섬
건립연도 : 1163년
건립자 : M. 쉴리
건축양식 : 고딕양식
센강(江) 시테섬에 있는 성당. 공사는 1163년 주교 M.쉴리의 지휘 아래 내진(內陣)의 건축이 시작되었고, 성왕 루이 치하인 13세기 중엽에 일단 완성되었으나 그 후에도 부대공사는 계속되어 18세기 초엽 측면 제실(祭室)의 증설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혁명 때 건물이 심하게 파손되어 19세기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늑골교차궁륭(肋骨交差穹)으로 덮인 길이 약 130 m의 장대한 신랑(身廊)을 중심으로 하는 오낭식(五廊式)의웅대한 건축으로, 신랑 양측의 열주(列柱) ·트리포리움(명층 아래 연이은 층) ·명층(明層:높은 창)으로 된 명쾌한 3층 구성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단정한 서쪽 정면에는 최하층에 《최후의 심판》의 부조로 유명한 중앙 출입문 등 3개의 출입구가 있으며 여기에서 《제왕의 상》이 늘어선 가로가 긴 중간대를 거쳐 스테인드 글라스를 본뜬 지름 9.6 m의 장미의 창을 중심으로 하는 층, 열주로 구성된 그랜드 갤러리가 잇달리고, 그 위에 지상 6.9 m 높이의 직사각형 쌍탑이 얹혀 있다. 힘차게 활 모양을 그린 다수의 비량(飛樑)으로 지탱된 남북의 측면에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의 명층이 줄을 잇고, 중앙 부근에 돌출한 익랑(翼廊) 끝 부분에는 지름이 13 m나 되는 유명한 장미의 창과 아름다운 조각을 볼 수 있다. 익랑과 신랑의 교차부에 치솟은 첨탑(尖塔)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또한 이 대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예배(1944.8.26) 등 여러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 공중 부벽

외벽면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벽체(壁體)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부벽(扶壁)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의 신전이나 궁전에서 볼 수 있는데, 로마 시대 이후 아치와 볼트(궁륭) 형식의 지붕이 생긴 뒤에는 지벽(支壁)의 중요한 구조 요소가 되었다. 특히 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리브볼트(rib vault)의 발달에 따라서 버트레스는 벽체의 특징이 되었다. 또한 고딕성당 건축의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飛梁)는 주벽(主壁)과 떨어진 독립된 벽이 되어, 주벽의 횡압력을 아치 모양의 팔로 지탱하면서 아름다운 건축양식을 이루고 있다.

* 아미앵 대성당

프랑스의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것으로, 1220년에 착공하여 몸체부 ·회랑 ·정면 ·본당(本堂)의 순으로 만들어져,1250년경에 완성하였다. 길이 145 m, 몸체의 너비 15 m, 높이 43 m. 특히 지상에서 20 m에 달하는 대(大)아치의 구조는 고딕의 특색인 상승성(上昇性)의 강조에 효과를 거두고 있다. 기술면의 완벽함과 미술적인 높이에 있어서 샤르트르와 랑스대성당과 더불어 고딕 건축의 파르테논이라고 일컬어진다. 정면의 쌍탑(雙塔) 구성과 3개의 문에 장식한 풍부한 조각군(群)은 파리의 노트르담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며 입상(立像)이나 돋을새김[浮彫]에 뛰어난 것이 많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샤르트르 대성당

프랑스 샤르트르에 있는 고딕양식의 대성당.

구분 : 대성당
설립연도 : 9~13세기
소재지 : 프랑스 샤르트르
설립목적 : 성당 건축
주요활동 : 종교의식
규모 : 신랑부 너비 16.4m, 천장 높이 36.55m, 성당 내 앞뒤 길이 73.47m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양식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특징으로 하는 고딕성당의 가장 전형적인 예로, 아미앵성당·노트르담성당·랭스성당 등과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성당의 역사는 화재와 재건의 역사로, 3차례의 화재와 재건이 거듭되었다. 9세기의 성당은 1020년 화재로 소실돼 재건되었으나, 1134년 다시 화재로 정면 현관부분이 파손되어 1150년 제2기의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복원되었다. 복원된 성당은 왕의 문이 있는 서쪽 정면 현관부와 좌우의 탑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1194년 화재로 파손되었으며, 1220년 제3기의 건조물로 완성되어 오늘날 성당이 되었다. 그뒤 내진부(內陣部)는 1221년, 남북 익랑부(翼廊部)는 1245년, 정면 북쪽 탑은 1513년 플랑부아양양식으로 완성되었다. 목골구조(木骨構造) 지붕은 1386년의 화재 뒤 철골로 비뀌고 지붕은 구리로 이었다.

성당 건물의 전장(全長)은 약 130m, 신랑부(身廊部)의 너비는 16.4m로 프랑스 제일의 규모이며, 천장 높이 36.55m, 성당 앞쪽에서 뒤쪽까지의 길이는 73.47m 이다. 이중의 주보랑(周步廊)으로 에워싸인 내진부와 삼랑식(三廊式) 회당부(會 堂部)의 경계에 남북으로 뻗어나간 수랑(袖廊)을 설치하고, 이 남북 수랑의 정 면과 서쪽 정면을 합한 세 곳에 출구를 내었다. 서쪽 정면의 좌우에는 높이 약 98m의 종탑이 솟아 있고, 좌우 측랑(側廊)의 지붕에 걸쳐 짜여진 플라잉 버트리 스[飛梁]가 높이 약 35m의 열주와 첨두교차(尖頭交差) 볼트로 지탱시킨 신랑의 상부를 밖에서 떠받치고 있다.

비교적 많이 분절되어 있는 구조적인 처리가 외관 디자인에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으며, 각각 다른 시대에 건축된 두 개의 첨탑은 이질적인 성격의 비대칭적인 역동성을 보여준다. 내부에 사용된 리브볼트방식은 4분볼트이며, 양쪽 측량에 정사각형 베이가 붙어 일종의 리듬적인 내부공간구성을 유도하고 있다.

초기 고딕조각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샤르트르대성당의 북쪽 현관을 장 식한 조각들이다.이곳에 새겨진 기둥의 인물조각들은 살아있는 듯 자유로운 몸과 긴장감 있는 얼굴 표정들이 조화를 이루며 매력있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성당을 유명하게 하는 것은 아케이드를 비롯하여 높은 창에 짜넣은 176개의 스테인드글라스 및 거대한 장미창이다. 장미창은 일부 12세기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13세기의 것으로, 서쪽 정면의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남쪽 장미창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북쪽의 장미창은 성모를 주제로 하였으며, 프랑스의 장미창을 대표한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 랭스 대성당

구(舊)성당이 창건된 것은 400년경이며, 그 후 증축과 개축이 되풀이되었으나, 1210년의 화재로 불타버렸다. 현재의 건물은 그 이듬해 장 도르베의 감독하에 기공되어 내진익랑(內陣翼廊,1241), 신랑부(身廊部)와 파사드(13세기), 정면 탑(1430)의 차례로 낙성되었다. 세 개의 입구가 있는 파사드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둥근창이 있는 팀판, 박공(), 첨탑중층(尖塔重層) 아치, 기저부(基底部)에 배열된 인상조각(人像彫刻) 등으로 고딕 양식의 가장 화려한 외관 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조각은 프랑스 고딕 조각의 대표작으로서 중앙 입구에는 성모를 중심으로 한 《수태고지(受胎告知)》와 《마리아의 방문》, 오른쪽 입구에는 구약성서의 여러 인물, 왼쪽 입구에는 천사로 둘러싸인 성 니케즈 등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내부의 구성은 간략하지만, 조화를 이룬 방대한 규모(길이 150 m, 궁륭의 높이 38 m)와 정면 입구의 장미창(薔薇窓)은 압도적인 효과를 과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잔 다르크가 구해낸 샤를 7세가 1429년에 대관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영국 런던에 있는 성공회의 성당.
구분 : 성당
소재지 : 영국 런던
건립연도 : 1050년경 착공
건립자 : 에드워드 참회왕
설계자
건축양식 : 북프랑스 고딕양식

정식으로는 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minster라 부른다. 605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대체로 에드워드 참회왕(懺悔王:재위 1042∼1066)이 1050년경에 착공하였다. 영국 왕실과 인연이 깊은 대성당으로 역대 제왕의 묘소는 거의 이곳에 있고 또 윌리엄 1세의 대관(戴冠:1066) 이후로는 대관식장으로서도 알려져 있다. 저명인사의 묘도 많아 특히 남쪽 익랑(翼廊)은 시인(詩人)의 코너로 불리어 초서, 스펜서, 테니슨 등 많은 대시인들의 무덤이 있다. 중심을 이루는 현재의 대성당은 건축이나 미술에 의욕적이던 헨리 3세가 1245년에 착공한 것이다. 북(北)프랑스 고딕양식을 계승, 1298년에는 거의 완성되었다. 또 늑골궁륭(肋骨穹:리브 볼트)의 조형적 가능성을 추구한 영국 특유의 수직식(垂直式) 장식으로 알려진 화려한 헨리 7세의 예배당(1502∼1520)이나 영국이 낳은 대건축가 C.렌의 손으로 세운 탑(17세기) 등도 있다.

* 생트샤펠 대성당

프랑스 파리 시테섬에 있는 고딕양식의 성당.

구분 : 성당
설립연도 : 1248년
소재지 : 프랑스 파리 시테섬
설립목적 : 성유물 안치
주요활동 : 종교의식
규모 : 내부는 1층과 2층, 14m 높이의 15개 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

성왕 루이 9세의 명에 따라 1246년에 기공되어 1248년에 완성된 레요낭양식 고딕성당의 대표적인 성당이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로부터 입수한 가시면류관과 십자가 조각 등 성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왕궁(팔레 루아얄, 현재는 재판소) 안뜰에 세웠다. 내부는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은 왕족 전용으로 왕궁에 이어져 있고 1층은 일반인용이다.

비교적 세로 길이의 탑이 있고, 단순한 바틀레스와 높은 첨탑(尖塔)이 이루는, 하늘을 향한 포름이 아름답다. 2층은 측랑(側廊)이 없는 단순한 구조이고, 볼트는 가는 원주로 지탱되어 있다. 기둥 사이를 모두 창으로 만들었으며, 14m 높이의 15개 창은 구약성서를 소재로 한 1,134 장면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13세기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 스테인드글라스

주로 유리창에 쓰인다. 착색에는 구리 ·철 ·망간과 같은 여러 가지 금속화합물이 이용되며, 세부적인 디자인은 갈색의 에나멜유약을 써서 표현한다.

색유리를 창이나 천장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7세기경 중동지방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슬람건축에는 대리석판에 구멍을 뚫어서 유리 조각을 끼워, 채광과 장식을 겸하는 방식을 많이 이용하였다. 서구(西歐)에는 11세기에 이 기법이 전해졌으며, 12세기 이후의 교회당 건축에서 이 예술은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고딕건축은 그 구조상 거대한 창을 달 수 있으며, 창을 통해서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신비한 효과가 인식되어,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당 건축에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 큰 발전을 해 왔다. 프랑스의 샤르트르대성당, 르망대성당, 영국의 요크 및 캔터베리 같은 여러 성당의 것은 12∼13세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성당에 있는 예언자 다니엘상을 나타낸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065년 또는 12세기 전반이라고도 함).

일반적으로 초기의 것은 유리의 질이 고르지 못하여 착색에 얼룩이 지고, 섬세한 표현이 잘 안되었으나, 광선의 투과 ·굴절에 미묘한 변화가 있어서 오히려 매력을 더하고 있다. 14세기 이후 유리의 제작기술이 향상되어 세부적인 표현이 잘 되게 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표현이 그림과 같이 되어 초기의 유리가 나타내는 독특한 미가 없어졌다. 19세기 후반 W.모리스, V.존스 등의 예술운동을 계기로 해서 중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의 미가 재인식되고,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F.레제, 마티스, H.루오 등이 현대건축에 스테인드글라스를 활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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