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리뷰
- 2006/12/2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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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데아의 근대적 변용 칸트의 선험적 이성으로는 신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기에 물자체인 신은 불가지론의 영역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기반한 도덕종교 - 이성종교는 데이비드 흄이 그렇듯이 계몽시대의 주류인 이신론과 다르다 - 에서 신적 존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근대적 변용이 아닐 수 없다. 칸트는 비록 초월적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험적 주체로서의 이성은 ‘근복악’ 이나 ‘신의 은총’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칸트는 이질적 - 초월적 세계를 부정하면서도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라는 점에서 - 인 개념인 이성과 신을 조화시키키 위해 신비의 영역으로 살짝 비껴가는데, 이런 점이 바로 이데아의 근대적 변용에 해당한다는 거다. 도덕종교의 핵심은 결국 기독교적 신과 도덕적 이성의 조화다. 따라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란 초월적 계시신앙과 이성과의 조화를 뜻하며, 피안과 차안의 조화이기도 한데, 이런 칸트의 종교론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흡사하다. 이성을 견지하면서도 여전히 신을 상정해야 하니 말이다. 야스퍼스를 비롯한 유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신을 만나기 위한 단독자로서의 실존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비판하곤 하는데, 사실 칸트의 종교론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도덕적인데 반해 포이에르바하와 달리 비인간학적이며 차가운 신앙이 아닐 수 없다. 2. 바이블의 해석과 현재적 관점 “도덕적인 동기를 방해하는 문자주의적 해석보다는 이와 같은 도덕적인 해석을 더 좋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성서 속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고대의 모든 종류의 신앙들은 항상 이와 같이 취급되었으며,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대중의 교사들은 그의 본질적인 내용이 보편적, 도덕적 신앙의 교리와 점차적으로 합치될 때까지 이 신앙들은 계속 해석해 나갔던 것이다. (...) 상징들이나 또는 경전들에 부여하는 의미가 그 자체로서 철저하게 그렇게 의도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미결인 채 남겨두고, 단지 그것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해석들을 불성실한 것이라고 책망할 수가 없다. 왜냐 하면 경전들을 읽는 것이나 그의 내용을 묻는 일 자체가 더 선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일을 최종 목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칸트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P 128~129(이대출판부, 신옥희 옮김) 아무리 신성한 경전이나 신화, 혹은 역사적 사실조차 그것이 문자로 기록된 텍스트라면 해석의 대상에서 비껴갈 수 없다. 따라서 일 점 일 획 틀림이 없으니 새로운 해석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칸트는 바이블의 문자주의적 해석이 아닌 도덕적 해석을 주장하는데, 이는 마치 “모든 역사는 현대사” 라고 말한 크로체의 역사개념을, 또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부단한 대화” 라는 E. H 카아의 말을 연상케 한다. 텍스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현재적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또 문제의 연장선에서 뭔가 의미를 부여할 때, 텍스트는 비로소 살아있는 역사이자 새로운 의미체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칸트의 ‘문자적 해석’이 아닌 ‘도덕적 해석’은 도덕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며, 동시에 선험적 이성에 의한 현재적 관점, 현재적 물음들 배후에서 작용한다. 오늘날 한국기독교는 문자적 해석, 아니 성경에 기록된 자구 자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예컨대 예수는 죽은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물리적인 날개옷이나 기구를 이용 하늘로 날아갔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칸트의 도덕적 해석이니, 불트만 식의 비신화화론이 끼어들 틈이 있겠는가? 바이블의 기록은 일 점 일 획 틀림없으니 오로지 문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 그러니 만약 칸트가 알았다면 탄식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3. 도덕종교와 선비정신 “도덕종교(이것은 교리나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서 준수하려는 심성 안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의 근거를 수립해야 한다면, 역사가 그의 종교의 시초와 결부시키는 모든 기적은 결국은 기적 신앙 일반을 스스로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성에 의해 인간의 마음 안에 본래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의무의 명령이 기적을 통해서 보증되는 한에서만 그에게 충분히 권위를 인정하려고 한다면 즉, “너희는 징조와 기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도다”(요한복음 4:4)라는 말씀과 같이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정도의 도덕적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같은 책, P 99 칸트는 불가지론을 말했으면서도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의 도덕종교는 “밤하늘의 별과 양심” 에 기댄다는 점에서 결국 도덕으로 회귀하는데, 이러한 종교론은 마치 조선조 선비의 도덕적 도야와 흡사하다. 칸트는 기도를 하되, 일체의 청원이나 강청(强請)을 하지 말라고 한다. 신앙은 단지 기도의 용납을 확신하는 정도이니, 대쪽 같은 조선조 선비의 자세와 무엇이 다를까. 그러나 실제 인간은 얼마나 유약하며, 스러지기 쉬운 존재인가! 언필청 칸트의 종교론에 납득을 하면서도 왠지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실존적 곤혹스러움 때문이다. “신앙이란 기도의 용납을 확신한다고 하는 정도의 의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류의 신앙이라는 우리 안에 있는 도덕성에 대한 신앙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 청원이 단지 오늘 하루만의 빵에 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 기도의 용납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즉 빵을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 신의 지혜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빵이 없이 오늘 굶어 죽게 하는 것이 신의 지혜와 좀더 합치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고집스런 강청에 의해서, 신을 그의 지혜의 계획으로부터(우리의 현재의 이익을 위해) 떠나게 할 수 있지 않은가를 시험해 보는 것도 불합리하며 망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적이 아닌 대상을 갖지 않은 기도를 확실히 용납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즉 그런 것을 신앙 안에서 기도할 수는 없다.” - 같은 책, P 277 4. 성직자의 보수성 “성서의 단순한 공증을 위해서뿐 아니라, 성서의 해석을 위해서도 학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서를 다만 번역을 통해서밖에는 읽을 수 없는 무식한 자가 어떻게 성서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원어를 아는 해석자는 그 위에 또한 넓은 역사적 지식과 비판력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당시의 상황, 관습, 신념(민간 신앙)을 수단으로 하여 교회 공동체에게 성서 이해의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의 규칙들은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얻은 신념을 승인하도록 성직자들을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 같은 책, P131 “하나님은 하늘 어딘가에 초자연적으로 존재하며, 때때로 우리의 삶에 의도적으로 개입하여 영향을 주며, 우리의 믿음의 수준과 선악의 행동 수준에 따라 최후의 심판 날에 상과 벌을 내리는 인격적 존재, 라는 수준의 관념은 오히려 참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참다운 관계를 가리우는 방해물”이다. 라는 주장(펌글/ 이정모의 서평 인용)은 실제다. 그런데 이런 관념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성직자들의 성서 해석의 보수성, 이른바 곧이곧대로 식의 문자적 해석에 기인한다. 5 인류애와 무기력증 테오앙겔로풀로스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가 다루는 주요 주제는 ‘인류애’이다. 그래서 소시민인 우리들은 그의 영화들을 대할 때, 고개를 끄덕이며 당위성을 수긍하면서도 왠지 움츠러든다. 비루하고 소심한 나는 하루치 일상사를 헤쳐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화를 보고나면 한동안 무기력 증에 빠진다. 대체로 사람은 각자의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보니 그들의 큰 주제들은 곧잘 관념적으로 다가온다. 이에 반해 칸트의 도덕 종교가 말하는 “양심과 도덕” 은 일견 ‘인류애’와 흡사한 주제인 듯하지만 실제는 도덕과 선한 방향으로의 노력을 뜻하기 때문에 무기력 증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일종의 수신과 같은 형태이니 말이다. 6. 광신 “은총의 작용을 자연의(덕의) 작용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든가, 또는 은총의 작용에 의해 덕의 작용을 자기 자신 안에 생기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광신이다. 왜냐 하면 우리는 초감성적 대상을 경험 안에서 무엇에서이든 인식하는 일이 불가능하며, 더구나 그것을 우리에게로 끌어오기 우해서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제사라고 하는 종교적 행위에 의해 신 앞에서의 의인(義認)에 관해 무엇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은 종교적 미신이다. 이것은 소의 신과의 교제를 통해서 그와 같은 것을 시도하는 미망을 광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 인간 각자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행할 수 있는 행위에 의해(가령 법규적 교리의 신앙 고백이나 교회의 예식 또는 법규의 준수 등에 의해서) 신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것은 미신적 망상인 것이다.” - 같은 책, P 201 “믿자니 광신이 두렵고, 광신이 아니면 제대로 믿으려면 광신적이어야 하는데....” 라던 어떤 이의 말이 떠오른다. 흔히 신앙의 기본조건은 계시신앙과 초월자라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의 입장에서 칸트의 도덕적 종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수신제가를 목표로 하는 조선조 선비의 도덕군자를 목표로 하는 수신적 행위와 흡사한데, 과연 종교가 초월자 없이 어떻게 존립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초월자를 상정할 경우 불가피하게 광신을 피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믿음이 강하면 강할 수록 초월자에게 의지하기 마련이고, 그럴수록 신에 대한 믿음은 상승하게 된다. 광신이란 결국 신을 철저하게 최선을 다해 믿는 행위가 아니던가? 오늘날 한국기독교는 신의 은총과 계시 초감성적인 성령과 초월자인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한다면 아예 존립할 근거를 상실할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종교와 철저히 대립하는 것이다. 한국 기독 계에서 도덕은 일반인의 양심 수준에 불과하며, 종교적 행위는 단지 주일날 거행되는 예배의식이 거의 전부이다. 과장한다면, 설사 예수를 부인하더라도 거룩한 예배만 있다면 달리 문제가 없을 정도다. 그러므로 예배행위를 통해 신과의 만남을 기원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칸트적 의미에서 종교적 미신에 다름 아닌 것이다. 7. 무당과 샤머니즘 “퉁구스족의 샤먼으로부터 교회와 국가를 동시에 통치하는 유럽의 고위층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기교에서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의 원리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들의 원리에 관한 한 그들은 모두가 동일한 부류에 속한다. 즉 그들은 모두가 그 자체로서는 더 착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전혀 아닌 것(어떤 종류의 법규적 교리의 신앙 또는 어떤 종류의 임의적인 예식의 거행 등)을 그들의 신에게 예배로서 바치는 부류에 속한다. 신에 대한 봉사를 단지 선한 행실의 심성 안에서만 인정하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전자의 원리를 넘는 전혀 다른 더 높은 원리에로 옮겨감으로써 전자와 구별된다.” - 같은 책, P 203 <성과 속>의 저자인 엘리아데나 칸트에 따르면, 무당의 푸닥거리와 고등종교의 예배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를바 없다. 도대체 그리스도 상, 성모상, 크리스마스 트리, 천주교인들의 묵주, 미사 보 등의 대용물과 미신적 행위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성서해석학, 고고학 등의 눈부신 성과에 기대면, 역사종교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이란 낡고 낡은 고대 필사본 뭉치가 전부이다. 그런데도 역사적 예수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부산물들은 오늘도 넘쳐난다. 대체 마리아 상이 무엇이며, 12월 25일과 예수 탄생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기독교를 사실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모든 물건과 행위들은 단지 무당의 푸닥거리에 불과하며, 그것이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면 고등종교나 푸닥거리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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