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신앙고백대로 충실히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맹세하는 것 보다 더 두려운 일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행위는 맹세하는 자의 행위보다 훨씬 더 신앙에 유해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고백을 하면서도 생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공공연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고백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등에 걸머지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 자신에 대한 경외가 필요합니다. 내 자신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산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 받은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귀중한 자신을 죄에게로 향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더럽힐 수 없습니다.
나 자신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이름도 더럽히게 됩니다. 혹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가 없는지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계명을 주시면서 경고를 하십니다.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는 반듯이 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 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신 28:58-59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레 24:1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 매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힘이 없어서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거룩히 해야 합니다.
신6: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거룩하신 하나님 (마태복음 6:9) 우리의 올바른 신앙생활의 기초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아버지를 경외하는 첫 걸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시며 주기도문에서 기도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먼저 우리가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리고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바로 알고 바로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받기를 원하는 축복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에 필요한 것들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이것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입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절대자이십니다.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영광과 위엄을 가지시고 굽어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피조물의 겸손한 자세로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전화로 대화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이 누구인지 물어봅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고 바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지 바로 알고 그 분의 임재를 늘 의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속된 것과 구별되어 계시고 떠나계십니다. 그 거룩하신 성품에서 영광과 위엄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죄인들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따라서 두려워(敬畏)하게 만드는 성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성막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와 아론 만이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몸을 성결케 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이사야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하고 외치는 스랍 천사들이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두려워 했습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 보았던 사도 요한도 엄위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자리에서 엎드러져 죽은 사람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계 1:17). 우리는 지금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접근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거룩하시고 존엄하신 분의 면전에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태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원하는 열망을 나타내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면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아버지께서 명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고 그 분의 존전에서 생활하다 나오면 우리도 자연히 거룩한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말세에 사람들의 언어와 행실이 점점 저속해지고 천박해지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며 올바른 자세로 기도 드림으로 하늘 아버지의 응답을 받으며 능력을 나타내는 귀한 그릇들이 되시고 두려움 없이 주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12장]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두 계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 바탕이 무엇이냐 입니다. 두 계명을 지키되, 그 바탕은 반드시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주”이기 이전에, 먼저 이 말씀을 듣는 자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곧 허상을 버리고 야곱의 길을 가서, 아버지의 아들이 될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께 매달려 끝내 “하나님이 상대해 주신 자”곧, 이스라엘이 된 자가 들어야하는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그 걸음을 뗀 후로 야곱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씨름이란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너는 조건이 안 된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조건이 안 되는 것은 나도 알고, 또 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는 것이 곧 야곱이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부족한 자기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은 ‘장자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자’인 야곱을 ‘하나님이 상대해 주신 자’, 곧 장자인 이스라엘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것은 다 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가 되게 하는 방법인 성령의 법은, 여전히 인생의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는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하여, 즉 유한한 것에 마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내용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법에 잠언이라는, 찌르는 말씀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이 잠언을 모르면 야곱이 되었더라도 이스라엘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되었다고 다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면 중도 신부도 수녀도 다 이스라엘이 될 수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양 상, 허상을 모두 버린 야곱이나 제자의 모습은 갖추었어도 이스라엘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고 따라갈, 인생적 사고로는 납득이 안 되는 믿음의 법, 마음의 법, 성령의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갖는 마음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을 살리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므로 영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살게 되는 것인지,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에 대하여 ‘믿음’ 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그 ‘방법’이 있어야 믿음을 가진 ‘따라감’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라는 약속도 없는데 어찌 그것에 대하여 믿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믿어봐” 라는 말은 그 말하는 자가 그 믿음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할 뭔가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분명한 것이 없으면서 믿음을 강요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명백한 사기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법을 완성하실 것이고,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령의 법을 토대로 한 가르침이었으므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한 바울은 모세율법에 대하여 “죄를 없게 하는 법이 아니라 죄 있게 하는 법” 이라는 말도 했던 것입니다. ‘주’란 나의 전부를 좌우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 가 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생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라도 좇아갈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고야 어찌 듣는 자가 그 전하는 자를 ‘주’로 삼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또 ‘유일한’ 주로 여기려면, 유한한 존재인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곧 영원한 존재가 되는 일에 있어서 그 방법을 가지고 계신 분이 유일하게 하나님 한 분 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의 대상이 될 방법을 가지고 계셨고, 자신이 그 방법을 완성하실 것이었으므로 “유일한 주‘로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라도 따라갈 만한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게 있습니까? 그것이 없고야 어찌 그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안 되는 상태라면 어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는지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되는 이유를 당신은 아십니까? 본문 말씀의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계명입니다. 모든 것을 걸고 지키려면 왜 그래야하는지에 대한 필연성이 당신의 머리와 마음 속에 정립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이유도 모르면서 어찌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잠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들로 삼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이 아닌 아는 대상이 되게 하여 아버지로 인식할 수 있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언급되어 있는 책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지금의 당신은 그것을 모르는 상태이므로 지금은 그 방법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믿을 만 하다는 기초논증이 곧 카페의 모든 글, 곧 일차적인 설명의 글입니다. 카페의 모든 글은 성경이 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논증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헤아려보고 믿을 만 하다고 판단이 되고, 성령의 법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믿고 따라갈 만한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그 이후부터 마음의 법이 지시하는 뜻을 배우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을 걸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여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계명의 뜻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 버리고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하였습니다. 후에 제자가 된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이전의 자기를 돌이켜 봄이 없이,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고,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되는 방법이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 첫걸음입니다.
장자란 ‘맏이’이며, ‘맏이’란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된 내가 가장 처음 맺는 열매는 바로 ‘자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하여 제자들과 야곱은 일단 자기가 버릴 수 있는 허상을 모두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허상을 버렸다고 해서, 중이 되기 위해, 신부가 되기 위해 출가를 했다고 해서 그 마음에 허상을 향한 마음도 지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인 성령의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깨끗함입니다. 아주 작은 흠이라도 바늘로 찍어내, 온전히 거룩한 존재, 영원한 존재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 잠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누구도 믿음으로, 누구도 믿음으로...하는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성령의 법을 말하면서 그것을 믿음의 법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믿음을 강조하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에 대한 믿음인지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은 막연히 ‘성경’의 글귀에 대한 믿음이었고, 그 성경의 글귀가 가지고 있는 뜻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당신은 여기에 와서 이런 글을 읽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분명한 것이 있다면 어찌 다른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어찌 다른 말이 들렸겠습니까,
흔히 목자라는 자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하여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신이 아닌데 어떻게 성경을 완전하게 알 수가 있나?” 만일 성경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완전한 방법이 있다고 적혀있지 않다면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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