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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고난주간 설교) http://gw.wkujim.co.kr/gw/uat/uia/egovLoginUsr.do 본문 : 골1:23-29절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강론 오늘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2천년 전 오늘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 12:13)하고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0:18-19절에서 주님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속제물로 십자가를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요일 밤에 잡히시고 금요일 오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① 이제 본문 1:2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합니다. ㉠ 한절 안에 “복음”이 3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합니다. “일꾼”이라는 “디아코노스”는 “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만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저도 여러분도 “복음의 일꾼”들인 것입니다. ㉡ 그러면 바울, 그리고 우리들이 복음을 전파할 종들로 부름을 받았다면 “복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고 묻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누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주신 것인가?”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에 확고해야만 “복음의 일꾼”노릇을 바르게 감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복음에 대해 남다른 감격과 열정이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이 “누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주신 복음인가”에 확고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점에 확고해서 이 시대에 바울과 같은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②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는 말을 하기 전에 1:13-22절에서 “예수가 누구신가?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는가”를 먼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로 “예수가 누구신가?” 13-22절 안에 예수님을 가리키는 “그”라는 말이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표시를 하면서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몇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까? 15번입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라고 말씀합니까? ㉮ 1:15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을 요한복음 1:18절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 1:16절에서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하고 창조주라고 말씀합니다. 이점을 요한복음 1:3절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 그러면 둘째로 그런 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습니까? ㉮ 1:13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씀합니다. ㉯ 1:14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해졌습니까? ㉰ 1:20절에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가능해졌다고 말씀하고, ㉱ 1:22절에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해주셨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셨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행해주신 일입니다. ③ 그런 후에 1:23절에서부터 우리들이 행해야 할 일들을 말씀하는 문맥인 것입니다. 23-29절 안에 “나, 너희”가 몇 번이나 나오는지 표시를 하면서 읽겠습니다. “나”가 7번, “너희”가 5번 등장합니다. ㉠ 23절 안에는 “너희”라 한 성도들이 행해야 할 일과, “나”라 한 바울이 행할 일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행할 일은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합니다.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는” 일입니다. ㉡ 그러면 “나”라 한 바울이 행할 일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합니다. 1:25절에서는 “내가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복음의 일꾼”,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④ 이제 오늘 설교의 중심점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1:24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합니다. 이 말씀 안에는 ㉮ 바울이 “받는 고난”이 있고,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복음을 증언하다가 로마 옥중에 갇힌 몸입니다.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이라한 바울의 고난입니다. ㉠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받으신 고난이 무엇인가부터 알아야만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받으신 고난은 앞에서 말씀드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입니다. 요한복음 12:27절에 보면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하시고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먼저 받으신 고난, 즉 십자가고난을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에베소서 2:17절을 보겠습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으로 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 누구들에게 오셨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하신 제자들 곧 여러분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합니다.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들을 가리키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이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어야 할 “먼데 있는 자와, 가까운데 있는 자”는 있는 것입니다. ㉣ 그러면 “또 오신” 주 성령께서는 누구들을 들어서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습니까?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 요한, 스데반, 빌립” 등을 들어서 가까운데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바나바, 실라, 디모데”등을 들어서 먼데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고 바울은 잠수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苦難)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⑤ 그러면 이들이 받은 고난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인가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은 우리의 죄를 다 대속하셨다는 “복음”을 이루어놓으신 것이지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온전히 회복이 되는 것일까요? ㉮ 복음을 전파하여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야”합니다. 이를 추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그리하여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게 되는”(계 21:3), 이때 비로소 “이루었도다”(계 21:6)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전한 것은 제자들이 한 일, 즉 사람이 전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지 아니합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분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해서 거듭나게 하는 일은 인간의 수단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 1:29절을 보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자신의 힘으로 전했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가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이분이 주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 그래서 바울 자신도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합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주의 영으로 또 오셔서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데 나 어찌 게을러서 “힘을 다하여 수고”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각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 전도자들이 받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점이 이해가 되셨습니까? ⑥ 마태복음 10장은 주님께서 12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0-42)하십니다. 이런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에게 “수고하십니다”하면서 “냉수 한 그릇”을 준 것도 여러분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을 박대하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하시는 것입니다. ㉠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고 명심해야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苦難)”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주간”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것이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운다”는 말입니까? ㉮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신을 주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 피 흘려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 그리스도의 신부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삶을 살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양 여길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순교 현장으로 가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 만일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1-12).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자신의 육체에 채워지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는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후 4:22)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떠났습니다. 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 주님은 이제 형제와 함께 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다만 “힘을 다하여 수고하느냐” 여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우리가 결단할 차례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몸소 받은 고생도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439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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