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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지기칼럼

과학자와 글쓰기

by 이덕휴-dhleepaul 2019. 10. 3.

과학자와 글쓰기

 

과학자는 과학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다. 보통은 이 뒷 부분 역할을 과학자의 요건에서 빼먹기 쉽다. 그러나 그건 결코 그렇지 않다. 글을 못 쓴다는 건 과학자에겐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다. 과학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걸 반드시 익혀야 한다.

 

과학자는 기본적으로 자연을 대상으로 그 원리를 파악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예측해 그걸 현실에 적용, 더 큰 효용을 얻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신기한 것들을 채집해 분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보통 사람은 평생 가 볼 일도 없을 외딴 곳이나 극지만 찾아다니고 또 어떤 사람은 제한된 환경의 실험실을 만들어 외부의 영향을 모두 차단한 채 몇 날 며칠을 실험에 몰두하거나 혹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에 나열된 숫자 무더기에서 숨겨진 패턴을 분석하느라 골머리를 싸맨다. 이 모든 활동이 과학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이고 사람들이 "과학을 한다"라고 할 때 보통은 이런 걸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학자 그러면 다들 이 "과학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하는 과학자의 중요한 한 부분이 있다. 바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사회에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파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 바로 학술 논문이다. 과학을 하겠다는 사람은 바로 이 학술 논문을 쓴다는 부분을 자연스러운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과학자는 본래 글을 써야만 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건 과학을 하는 사람은 논문만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당연히 과학자는 자신의 의견을 신문이나 방송 매체에 자신의 의견을 칼럼의 형태로 기고할 수도 있고 자신이 아는 분야에 대해 일반 대중을 위해 개론서를 쓰거나 혹은 외국의 연구자가 쓴 책을 번역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도 아주 많고 이런 활동도 과학 일반이나 해당 분야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이해와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아주 중요하다. 일반 대중의 이해와 지원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과학을 위해 이런 활동을 벌이는 과학자도 분명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학자 본연의 임무는 첫째 소위 “과학적 활동”을 제대로 잘 수행해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거나 혹은 알려진 것과 다른 걸 찾아내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새로운 결과를 공개적으로 전파해 알리는 것이다. 이 지식의 공개적 전파에서 학술 논문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왜냐하면 논문이 주장하려는 사안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이 아닌 그 분야의 전문가가 검토해 논문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해 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과학적 활동”이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도를 위한 것이라면 학술 논문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무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행위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이게 꽃길을 걷는 것처럼 늘 흥미롭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보단 오히려 자신의 뇌를 갉아먹는 듯 괴로운 과정에 가까워 대부분의 시간은 아주 고통스럽다. 실마리 하나가 풀리지 않아 몇 날 며칠이 지옥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지만 거기엔 또 한 편 흥미롭고 모험적이면서도 재미난 구석도 있다. 바로 여기에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과학자들만 느낄 수 있는 마력과 같은 어떤 게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건 추리 소설을 읽는 것과 같아 오리무중의 사건 현장에서 갈피를 못 잡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듯 좌절하고 낙담하길 반복하다 어느 순간 아주 조그마한 단서를 찾고 그 단서가 이어주는 그 다음 단서를 찾고 그러다 끊어진 갈래를 다시금 잇길 수없이 반복하다 마침내 전체 얼계가 다 맞춰졌을 때의 그런 희열이 마지막 범인을 지목하는 장면에서 마침내 폭발한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게 다 분명하게 눈앞에 싹 드러나면서 모든 의문과 의혹이 한 번에 다 해소되는데 과학자들은 바로 이런 순간을 기억하며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학적 활동”이 괴롭고 힘들어도 묵묵히 해내고 과학자가 되는 대부분의 훈련도 바로 이 지점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이걸 정리해 논문을 쓰는 일은 의외로 반기지 않고 오히려 꺼리는 경우가 더 많다. 이 일이 단서를 쫓아가는 "과학적 활동"만큼 재미있지 않다고 느낄 뿐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만 한 웬만하면 남에게 떠넘겼으면 싶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도 엄연히 과학자의 일일 뿐만 아니라 이건 실제로 “과학적 활동”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과학자가 "과학적 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논문을 써 전문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다. 과학은 본래 그런 것이다.

 

과학은 진리를 쫓는 과정이 아니다. 과학을 한다고 진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가깝게는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얼마나 가까워지는지도 알 수 없다. 만약 진리만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과학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활동이다. 이제까지 나온 수많은 과학적 이론 가운데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실로 부정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이렇게 한동안만 맞고 시간이 지나 새로운 것이 나오면 틀린 것이 되는 어떤 사실이 진리일 수는 없는 것이고 그렇게 끊임없이 현재의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어떤 일을 해야 할 이유도 없다. 과학은 진리와는 무관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도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이해해야 대비할 수 있고 활용하고 보존할 수 있다. 그런데 진리라는 족쇄를 벗어던지는 순간부터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과학에는 과학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정말 잘 이해한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과학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의외로 아주 단순한데 바로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다른 사실을 예측하는 것이다. "이런 과학 이론에 따르면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예측을 하고 주의 깊은 관찰과 기묘한 실험을 통해 그걸 보여 주면 그 이론은 과학적 사실이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 이론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훌륭하고 방법적으로 비상하더라도 그냥 사장된다. 그저 재미난 지적 노력 정도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게 과학의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뭔가를 보여 줬다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긴다. 그리고 증거를 바탕으로 그들의 주장을 판단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건 전문가의 영역이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논문이 담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싶은 사람은 논문을 쓴다. 이걸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보고 논리상의 헛점은 없는지 전체 과정은 제대로 잘 이루어졌는지 그 과정에서 혹여 빠뜨린 요소는 없는지 꼼꼼하게 검증하고 따져 정말로 연구자들의 주장이 맞을 것 같다고 판단되면 (맞다는 보장은 어느 순간에도 없다. 그저 현재라는 제한조건 아래에서는 맞을 것 같다는 강한 심증만 있을 따름이다. 과학자들이 신도 아니고 점쟁이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지금은 받아들여지는 증거나 논리도 나중에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현상이 발견될 여지가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새로운 논리와 이론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게 비로소 제대로 된 논문으로 인정받고 출판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과학은 거대한 논문의 체계다. 과학이라는 전체 몸통은 다름 아닌 논리적으로 서로 느슨하게 이어진 논문의 사슬 체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문을 쓴다는 행위가 바로 과학이라는 거대한 탑에 제대로 벽돌을 하나 더 얹는 일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걸 제대로 하는 게 "과학적 활동"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문을 쓰는 일은 과학자가 독립된 직업 집단으로 분리된 이후 과학자가 생존을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과학을 하는 데는 많은 돈이 든다. 굳이 극지나 오지가 아니더라도 집을 떠나 어디를 가서 거기서 뭔가를 수집하거나 아니면 집 가까운 곳이라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차단된 환경을 만들어 실험을 하거나 하루 종일 컴퓨터로 숫자와 씨름하는 그 어느 활동이건 소위 “과학적 활동”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든다. 그리고 적어도 현대의 과학연구에서 대부분의 경우 이런 비용을 감당하는 건 과학자 자신의 돈이 아니다. 대부분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징수한 공공의 기금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활동의 결과는 공공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돈은 꼬박꼬박 잘도 받아 가면서 도대체 그걸 어디다 쓰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일에 무작정 믿고 돈을 퍼줄 바보는 없다. 이건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적 활동의 결과를 공공에 되돌려주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후원한 후원자에 대한 성실성의 의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결과를 공공에게 돌려주는 이 문제는 과학자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일을 소홀히 하면 과학자의 일은 사장된다. 그가 제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도대체 저 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데 누군가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 당연히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게 되고 그냥 묻히고 만다. 과학자의 일도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과학자 자신도 더 이상 후원받을 기회를 잃는다. 결국 그 과정에서 과학자의 일도 과학자 자신도 도태될 수밖에 없다. (물론 만약 과학자 자신이 그 모든 비용을 다 감당했고 그렇게 해서도 또 생존할 수 있다면 굳이 자신의 연구를 공개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경우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과학적 연구의 비용을 감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과학자는 당연히 그 개인이나 집단에게 보고의 의무를 지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과정에서 그 후원인이나 후원 집단은 경제적 목적이나 기타 이유를 들어 결과를 공공에 알리는 것을 한시적으로나마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후원 관계가 끝난 뒤에도 후원으로 얻은 결과를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논문의 형태로 정리되지 않은 과학적 성과는 모두 묻히게 되고 그에 합당한 과학자의 기여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자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고 과학을 하려는 사람은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특히 논문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지점을 사람들이 헷갈려 한다. 대부분의 경우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으려면 영어로 된 논문을 쓸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게 잘 안되니까 영어 논문을 못 쓰는 이유가 영어가 안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논문을 못 쓴다고 할 때 이게 논리적으로 글을 풀어내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영어가 안 되는 것인지 구분을 못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영어 초고를 다뤄 본 입장에서 말한다면 솔직히 이 둘 가운데 어느 쪽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아주 많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똑같은 결과를 가지고 영어가 아니라 우리말로 논문을 적어 보라고 했을 때 과연 제대로 써낼 수는 있을지 막막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말이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나같은 경우 실제 글쓰는 걸 학교에서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나 대학원을 거치는 동안 글을 써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남을 설득하는 훈련을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저 지식을 암기하는 부분에 너무도 많이 집중했다. 또 특히 그것에 유능한 사람들이 과학자가 되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과학자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의사를 데이터를 바탕으로 솔직히 표현할 줄 알아야 하고 그 글로 남을 논리적으로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과학자가 되려는 사람은 글을 쓰는 훈련을 해야 한다. 자신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언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특히 과학자는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논리로 풀어낼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논리적 연결을 훈련하는 데는 모국어가 제일 좋다. 영어로 논문이 안 된다면 자신의 논리적 사고를 먼저 살펴볼 일이다. 어떤 걸 주장하기 위해 어떤 결과를 준비하고 이용할 것인지, 그렇게 선택한 결과를 어떤 식으로 배열하는 게 자신의 주장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인지 따져 보는 훈련을 먼저 해야 한다. 언어 문제는 그 다음 일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글로써 먹고 살 사람이란 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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