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
(바울사상)
Ⅰ. 서론
1. 연구의 목적
어떠한 신학이나 교리적 체계도 하나님을 확증하고 측정하는 절대적인 바로미터 일 수는 없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단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큼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일 뿐이다. 아무리 위대한 신학적 판단과 교리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역시 그것은 한 시대 속에서 그 시대의 과제에 응답하고 그 시대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려는 신학자들의 노정일 뿐이다.
신학의 정의를 고전적으로 구한다면, 그것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신학은 끊임없는 물음을 갖게 하고, 질문을 일으키는 신앙이며, 그러한 질문에 대한 현재의 대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지친 영혼들을 위한 진정제가 아니며, 삶의 깊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해결책도 아니다. 다만 신학은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말하기를, "이해를 위한 나의 준비는 역사를 통한 성서의 연구에 있다"고 했다. 어느 시대의 신학과 사상도 역사적 제한성과 유한성, 상대성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해석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가 그의 삶의 자리와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의 사물인식이나 가치인식이 역사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적 삶의 자리를 무시한 신학사상은 별로 소득 없는 공허한 논의에 불과하다.
율법과 복음에 관련한 바울 신학의 이해도, 역사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바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 복음, 그리고 하나님의 '의'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투쟁한 역사적 삶의 자리가 무엇이었는가를 구원사적 맥락에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동시에 그 삶의 현실을 통해 사도 바울이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명제에서 우리의 이웃과 이웃사랑의 실천적 내용이 무엇이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오늘의 기독교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론적 대안이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그것에 상응하는 우리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사도가 의도하는 율법적 정의와 대조하여 신앙의 정의를 말하고자 하는 가르침에서 논의한다.
2. 연구의 범위와 방법
바울 신학을 묘사하는 일은 그의 사고를 체계화하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러한 체계화의 형태를 시도하지는 않았다. 만일 그러한 체계화가 바울의 신학을 그의 사고와는 동떨어진 범주에다 가둬 맞추려고 하거나 혹은 단순하게 미리 엉뚱한 신학적 체계를 세워 놓고 거기에다 바울의 사고를 하나의 예증으로 갖다 붙이려 시도한다면 그 체계화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바울의 신학방법을 종합하려는 방법은 그의 범주들을 최대한 존중하는 동시에 그의 주장들이 정식화되는 문맥의 다양성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흔히 주목되지는 않지만 바울 신학의 중요한 방법이다. 즉 바울의 진술들은 교의학적인 진술들의 체계적인 배열에 있지 않고, 거의 언제나 단편적이며 항상 다른 것들과 엉켜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신학은 엄격히 말해서 독자적인 주제들이 이미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사이의 해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모든 신학사상은 심판과 은혜를 의미하는 총체로 엉켜있음을 말한다. 이 해후의 지평은 한 번도 포기되지 않은 그의 신학적 사유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과 그리스도, 영, 율법, 심판, 구원에 관한 각각의 진술이 곧 동시에 언제나 시계의 중심에 있는 인간이고, 옛적에 상실된 인간에 관한 진술이며, 새로운 신에 의해 해방된 인간에 관한 진술과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신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동시에 세계의 중심에서 자신의 처지와 삶을 계속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설교와 신학의 목표이다.
바울 신학의 중심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지만, 바울 신학의 여러 중요한 교리인 칭의 교리와 성령 안에서의 삶의 교리는 그의 신학 사상을 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새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 찾아 온 성령의 출현과 함께 전해지는 복음의 교리는 칭의 교리와 함께 거론되어야 하며 칭의 교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 사상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의로운 분이며 동시에 심판주이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고 이행여부에 따라서 심판하는 하나님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행위계약의 총체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모든 의의 완전한 표준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서론에 이어 본 논문을 이끌어갈 바울의 신학사상을 제2장에서 논의하되 율법과 복음을 중심으로 진술하고, 제3장은 사도 바울의 율법과 복음의 진수는 이신칭의에 기반을 둔 의인론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밝힌다. 제4장은 본 논문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그리스도의 법에 관한 문제성을 제시하고, 끝으로 제5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율법사상을 전체적으로 검토하고 사도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의 법의 실천적 요청을 사회정의 실현의 방안으로 모색하고자 한다.
Ⅱ. 바울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
1. 용어의 이해
(1) 율법의 용례
율법이란 히브리어로 '토라'( ), 헬라어로는 '노모스'( )라고 하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관한 신앙과 행위에 따른 명령으로서 사회적·제의적 규범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통해서도 보여지며, 인간의 양심 가운데도 숨겨져 있으나 본질적 의미에서 명문화된 율법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과의 본질적인 관계 형성인 십계명에 있다.
'노모스'( , 법)와 '디케'( , 규범)라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법이라는 헬라적 용법이었다. 이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 아퀴나스에 이르러 오늘날의 세속적인 용법으로서는, 법과 정의를 뜻하는 용어로 정착하였다. 원래 법이란 말은 인간의 행위를 제한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준칙을 세워 가지고 사회의 주인공인 인간의 활동을 보호하거나 제한하고 나아가서 사회를 강제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다. 헬라어 '노모스'라는 말은 갈라디아서에 32번 그리고 로마서에 72번 언급되고 있다. 그 단어는 정관사와 함께 나올 때도 있고(11번), 정관사 없이 나올 때도 있다(21번). 어떤 학자들은 '호 노모스'( )와 '노모스'( )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를 확립하여 보려고 하였다.
라이트풋(J.B. Lightfoot)에 의하면, (the law)가 구체적으로 모세 율법을 지칭하는 반면, 관사 없는 는 일반적인 의미로 율법(law)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충분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바울의 다른 서신의 경우에서처럼 갈라디아에서도 전자나 후자가 의미상의 차이 없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때(참조. 갈 3:11-12, 23-24; 롬 2:23-27),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 수 없다.
(2) 복음의 의미
'복음'( )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선포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말한다. 헬라언어권에서 사용된 복음은 '유안겔로스'( )라는 명사에서 유래하였다. 유안겔로스가 도착했다고 하는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도착했다는 뜻이며,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준 대가로 주어지는 상이 '유안겔리온'( )이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의 개념은 사라지고 단지 '기쁜 소식'만을 의미하였다. 헬라어 문화권에서의 용법은 '승리의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의 기술적 용례가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종교적으로 사용될 때는 다만 '제의를 축하하다' 또는 '신탁의 말씀'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칠십인 역에서는 복음이라는 단어의 단수형은 등장하지 않고 '유안겔리온'의 복수형인 '유안겔리아'( )가 단 한번 나오는 데(삼하 4:10), 그 뜻은 '기쁜 소식에 대한 대가'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전혀 종교적 용법이 아니므로 신약성서의 '복음'과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는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의 '바사르'( )가 있지만, 종말론적으로나 하나님 나라를 뜻하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구약성서에서는 명백하게 복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는 없다. 유대인들은 단지 사생활에서나 공생활에서 벌어진 경사스런 일들, 즉 여호와의 승리(참조. 시 68:12), 유대의 광복(참조. 나훔 1장) 등에서 일반적으로 기쁜 소식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사야서 40-66장에서의 이 단어는 엄밀한 의미로 종교적 성격을 갖고 있다. 기쁜 소식의 사자는 유배 생활의 종말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시온으로 돌아오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은 산에서 울려 퍼지고(사 40:9) 이 복음은 그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고 이제 유배지에서의 귀환이라는 경사스러운 사건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승리와 통치의 안전한 성취를 예고한다. 이사야서 40:3-5은 신약의 누가복음에 인용되고 있다(눅 3:4-6). 누가는 이사야에 묘사된 포로 공동체에게 "위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를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세례 요한의 사역과 동일시한다. 특히 이사야 40:3은 복음서에서 자주 인용된다(마 3:3; 막 1:3; 요 1:23).
신약성경에서 복음이라는 이 명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전도활동과 그들이 전했던 메시지를 언급할 때 특별히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는 않았지만, 신약성경이 형성될 때부터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유안겔리온'이란 말의 동사형 '유안겔리쪼마이'( )는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나 설교를 할 때 주제 요소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상세하게 옹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갈 1:11, 2:1-14)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4장 1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낳았다고 하는 사실에서 복음이라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는 은혜이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이라는 말은 총 76회 나오는데 마가복음에 8번, 마태복음에 4번, 사도행전 2번, 그리고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에 각각 1번씩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바울 서신에만 60번 나오는 것을 보면, 복음이라는 단어는 사도의 애용어 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이라는 용어를 신약성서에서 맨 처음 사용하였다. 바울 서신에서 이 용법은 앞뒤에 사용하는 수식어 없이 다만 '기쁜 소식'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편지를 읽는 독자들이 이미 이 낱말에 친숙해 있어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 없음을 나타낸다.
예수는 그 자신의 행적과 가르침을 '복음'이라고 규정하였으며(마 11:5; 막 1:14-15), 또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명하였다(막 8:35, 10:29). 사람들은 예수사역에 관한 후대의 기록들 자체도 그것이 구전의 형태이든 자료이든, 역시 '복음'이라고 불렀다(막 1:1, 13:10, 14:9; 참조. 고전 15:1-2).
(3) 복음의 내용
바울은 복음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개념적으로는 복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가 복음에 대한 개념 정의를 내리지 아니한 것은 이론 정립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이며, 바울의 적대자들이 선전하는 복음은 무엇이냐? 라는 물음은 복음의 정의에 대한 어떤 공식구를 제세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일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판가름은 그 사람이 복음의 정의에 대하여 공식구를 지적으로 시인하는냐 않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에 부합되느냐 부합되지 않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복음에 관하여 무엇이라 가르쳤는지를 사상적으로 조직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바울 자신에게 일어난 삶의 변화가 무엇이었는지를 철저히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학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졌다고 하여도 삶의 구체적인 전황과 유리되었으면 공리공론일 따름이다.
사도는 복음의 개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복음의 실질적 내용, 즉 실제적인 구원의 현실을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한 것이다. 바울이 수호하려는 복음의 실질적인 내용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한 분석에서 구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바울에 있어서 복음은 하나의 유개념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은 없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의 기록 목적 그 자체가 거짓복음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굳게 붙들라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1:11-12은 분명히 바울 복음의 신적 기원을 주장하는 대목이다. 그 주장인즉 바울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이란 그가 갈라디아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참조. 갈 1:6-9, 3:1, 4:13-14). 그 복음은 일부 적대자들 사이에 바울에 대한 강한 반발을 가져왔다. 그 적대자들은 바울의 복음에 반대하여 갈라디아인에게 다른 복음을 강조하면서 율법준수, 특히 할례를 주장하였다. 이 일로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다.
바울이 볼 때, 그 거짓된 가르침은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구원론적인 의의를 앗아가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부인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자기가 이미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기시키고, 반대자들의 거짓된 복음과 대조시켜 복음의 내용을 명료하게 제시한다. 이를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방인들, 즉 바울 자신의 무할례자들을 위한 복음(갈 2:7)으로써 그것은 의에 이르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의 저주 및 복종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온다(갈 2:16-5:12). 여기서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그 이유는 그들이 참된 내적 할례를 가지고 있는 데, 이는 성령이 마음에 역사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참조. 롬2:28-29). 바울은 그것을 다른 두 복음과 분명하게 구별짓기 위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복음을 특징짓고 있다(참조. 갈 3:1-14).
둘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특히 베드로 및 '기둥역할을 한 사도들'에 의해 대표되는 유대인들, 즉 할례자들을 위한 복음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이러한 유대적인 해석을 유대인들에게 특유한 기독교 케리그마의 합법적인 형태로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바울의 복음과 내용상으로 완전히 상이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것이 자신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한 율법에의 복종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두 복음을 각각 지지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리고 자기들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지지하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복음을 강요하려고 하지 않는 한에서 바울은 만족했다.
하지만 분명하게 팔레스틴 교회 내에는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이방인 선교를 반대했던 율법적 우익파들이 있었다. 그들의 복음이 바로 바울에게 갈라디아서 1:6-9에서 맹렬한 어조로 공격받았던 '다른 복음'이다. 사도 바울이 이 세 번째 복음의 기독교적 위치를 완전히 부인 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강요하려는 소위 유대화 된 자들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문제를 우리에게 확실히 남겨 주었다. 그것은 전혀 기쁜 소식이 아니며, 노예가 되는 길이다. 그것을 선포하는 자들은 거짓 그리스도인들로서 그들은 완전한 진리를 얻는데 실패했으며 스스로를 거세해야만 했다(참조. 갈 2:4-5; 5:12).
결국 갈디아서에서 바울은 교인들에게 반대자들의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반증하여야 했고, 다른 편으로는 바울이 전파한 복음이 왜 정당한가를 규명해야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주어진 자신의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과 그 복음의 진리에 계속 머물도록 하여야만 했다. 여기서 전한 복음은 그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제시한 복음과 동일한 것임은 물론이다.
2. 바울의 율법관
(1) 율법의 의의와 목적
바울의 율법관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아직 요원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서신을 통하여 바라보는 일상적 의미에서의 율법의 제반 모습을 살펴 볼 수는 있다. 최소한 바울은 그 자신만이 가지는 독특한 율법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자기 자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교회들에게 새로운 계약( )으로 적용되는 것에 유념하여야 한다.
율법의 구약적 의미인 '토라'( )는 '나무 조각의 제비를 던진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부터 파생된 것으로서, '가르치다, 인도하다, 훈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신약에서의 의미는 '분배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신약적 용법이나 구약의 용법 모두가 가르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사람들을 그들이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의무로 구속(拘束)하는 모든 교리, 교훈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신적인 것, 인간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다.
빌드버거(Wildberger)가 적절히 지적한데로 율법이란 신명기 17:1에서 볼 수 있듯이 반드시 신앙적인 지침만을 의미하지 않고, 무엇이 법적으로 옳고 그른 것인가를 판멸하여 주는 교훈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과 하나님 앞에서 행할 적절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율법이란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그것이 인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시행될 것을 뜻한다.
바울에 있어서 율법은 언약의 백성에게 주신 생활의 규범일 뿐이지 의인의 규범은 아니었다. 율법은 언약에 대한 그의 일반적 태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옳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에 대한 안내자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총을 밝히신 것과 분리되어, 인간의 의무에 근거하여 제시된 순전한 도덕률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의 표지(標識)된 선, 곧 이 선에 따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백성이나 그들의 생활 자체를 공개하는 선(線)이다.
이상의 설명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과제를 설정할 수 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약속된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를 드러내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개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갈 3:19)라고 바울 사도는 율법의 제정 경위와 그 의의를 간명하게 말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그릇된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로 받아들이지 아니 하였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율법 존재론의 근거이다.
율법 존재론이라는 용어는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 그리고 사도들이 사용하였던 의미에서, 율법은 당시의 이스라엘과 여러 민족들의 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이 열어 놓고 설정해 놓은 생활 질서에 대한 문제이다. 이 생활 질서라는 표현은 인간에게 향한 하나님의 의지표명인데 이것은 준수될 수도 있고 침해당할 수도 있으며, 성취될 수도 있지만 멸시 당할 수도 있다. 따라서 생활의 안녕 질서와 생활규정, 저주와 축복이 공동으로 율법의 생활 질서에 포함된다.
그리스도인들을 규정하는 생활 질서는 더 이상 제의적 희생율법에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의 멍에가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율법에서 존립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예수 시대 이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예수의 율법이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2중 계명에 관한 전승(참조. 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근원적인 의지에 따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에게 나타나는 모세 율법의 비판은 예수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 내는 메시야로서 율법의 메시아적 완성자이다. 이 말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변증되는 "그리스도의 법"(갈 6:2; 고전 9:21)이 그에게는 "율법의 마지막"(롬 10:4)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바울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서 신앙을 위한 "율법의 마지막"을 보고 인식하였다. 바울의 그리스도의 복음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율법 비판적인 의인의 복음이었고 그의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계명 안에서 율법의 영적 의도가 목표에 이르게 된다.
율법에 대한 해석은 사도의 신학사상 가운데 가장 복잡한 교의 단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1과 갈라디아서 6:2에서 그 자신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 율법과 동일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7:19, 갈라디아서 5:14, 로마서 8:3, 13:8-10에 있는 대로 시내산 율법의 의도가 목표에 이르고, 원수 사랑에 이르기까지 심화된 사랑의 계명이 십계명의 근본 요구들과 다함께 타당한 하나님의 뜻으로 요구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법"은 예수가 시내산 율법의 성취에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고 그래서 그 율법을 타락 이후 죄인들과 그 율법에게 지워지는 저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가 이끌어 온 시온 율법이다.
예수의 속죄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참된 피조성에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율법도 종말론적으로 변경되어서 교회가 엄수해야 하며 생활의 질서로서 엄수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31:31이하의 새 계약 의무의 생활 질서로서 종말론적으로 변경된 모세 율법은, 이제부터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며 바울에 있어서 땅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미하는 성령의 선물에 의해 자발적인 사랑의 행위를 가능케 해주는 그러한 종말론적 시온의 율법이다.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서 모세 율법을 새롭게 윤리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최종적으로 수립된 하나님의 뜻, 곧 시내산 율법과 종말론적으로 일치되며 또 그것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로 그들을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진 생의 영적 생활 질서 안에 있다(롬 8:2). 이는 그가 결코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의 법"( )으로 세운다고 할 때(롬 3:27-31)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에서 드러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다.
(2) 율법의 기능
하나님의 백성이 범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드러냄에 의하여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타락한 인간의 저주받은 본성에 한계를 설정하기 위하여 율법이 선포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은 죄인들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어도, 그들을 구속할 수는 있다. 그것은 죄의 상처를 치유하고 낫게 할 수는 없어도 그들을 구속할 수는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는 죄가 왕 노릇을 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어떤 죄를 짓는 성향을 물려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아담이 죄를 범했다는 그 사실이 모든 사람들을 죄인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아담 안에서 범죄 했다는 이 사상으로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죄와 관련되어 있다. 즉 아담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도 죄인이 되었다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를 증거 하였다. 즉 율법이 죄를 유발시킨다는 사상은,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에서 발견된다. 그는 통상적인 유대교적 견해와는 반대로 율법의 목적이 죄를 제한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율법을 통해서 증가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죄를 '더하다'라는 동사가 죄의 본질을 소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바울의 논증 가운데는 확실한 기본적인 단계들이 있다.
먼저, 바울의 논증의 기본은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죽음은 죄로 인해 왔다는 것이다. 죄가 없었다면 죽음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롬 5:12, 6:20-21, 23).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 곧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그것으로 아담은 하나님 앞에 범죄 했고, 또 그 때문에 죽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롬 5:12, 6:23; 참조. 창 2:16-17, 3:17-19; 히 9:27).
그러나 바울은 아담의 이 특별한 죄 안에서 모든 사람들도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 이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었다"고 논증하였다(참조. 롬 5:13-14).
그러면 왜 율법도 없었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어야 했나, 하는 것이다. 그 답변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범죄 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했다 하였다(참조. 롬 5:17,21; 6:12). 그러나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함이니라"(롬 5:21)고 하였다. 이는 갈라디아 3:22, 24에서와 마찬가지의 내용을 이어받아서 하나님이 행하는 궁극목적을 구원에 있음을 예시하고 있다.
바울의 논지는 율법이 존재하기 전, 따라서 죄가 성립될 수 있기 전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으로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와 온전한 순종을 드렸다. 그래서 아담의 죄 안에 연관 되여 있던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악하고 끝없이 계속되는 죄와 죽음의 결박 속에서 해방케 하였다(참조. 롬 8:1-2; 히 5:8-9). 즉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죄 안에서 죄인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의로운 자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증가운데는 영원한 진리가 내재해 있다. 즉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이 될 수 없는 상황에 연관되어 있다. 아담 안에서 죄로 인한 사망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참조. 롬 3:23-24; 갈 3:16; 빌 3:9). 율법은 사악한 인간의 심령을 사슬로 묶어놓음으로써 그들이 감히 그들의 심령에서 발견되는 방종한 경향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 만일 율법에 의한 이러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것은 누구나 다 자기 아우를 죽인 가인, 자기 누이동생을 욕보인 암논, 아비에게 반역한 압살롬, 스스로를 파멸시킨 사울,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가 될 것이다.
다음, 율법은 범법함을 폭로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은 죄를 드러낸다고 하였다. 율법은 거울처럼 죄를 드러내고 죄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율법 자체가 죄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아니었더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않았더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롬 7:7)라고 바울 사도는 고백하였다.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시지 않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은 결코 아니고,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는 확실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그 선물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참조. 갈 3:21-22).
갈라디아서 3:24-25에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으로 비유하였다. 몽학선생이란, 학교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집에서 훈육을 담당하기도 하는, 철들기 전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년 감시자이다. 소년기의 철없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손을 떠나서 그네들끼리 행동할 때, 소홀한 틈을 타서 방종에 흐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가정교사는 엄격하게 때로는 채찍을 들고 야단하는 그야말로 아버지를 대신하는 준엄한 감시자이다. 즉 언약백성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감시자는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임을 알게 하여 그를 믿게 하시려고 율법을 준 것이다. 전적 타락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죄만을 증가시켜 결국 절망에 이르게 하여 완전한 율법 준수자를 갈망하게 하는 직무만을 수행할 뿐이다.
바울은 이 말을 고린도전서 4:15에서도 같은 뜻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일만의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를 훈도 할 사람은 많다. 그러나 너희를 사랑할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또한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 4:21)라고 하여 마치 소년 감시자처럼 매를 가지고 너희 앞에 나아가야 되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할 일과 행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말해 줌으로써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며 우리에게 경고한다. 율법의 이러한 입장은 우리에게 죄를 발견하게 하고 죄를 깨달아 스스로를 낮추게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령께서 사용하는 도구로서의 율법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갈 3:21a)라고 하여 율법과 복음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결국 율법과 복음의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시키려는 것은 사람들의 우매한 생각에서 나온 발상이다. 율법주의자들이 생각할 때 그들은 율법만 지키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였다(참조. 마 19:16-22).
그러나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다. 율법은 한 점도 파기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율법의 실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삶의 규칙으로 남아 있되, 그들은 복음 아래서 율법을 준행 하면서 살아야 한다. 또한 율법은 복음과 모순되지 않고 새 언약을 펴 나가는 데 봉사하는 하나의 채찍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율법이 비록 다양한 기능을 가진다고 해도 바울이 갈라디어서 3:15-4:11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이다. 그것은 아브라함보다 430년 이후 모세 시대에 생긴 것이며(갈 3:17), 율법은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사랑의 종노릇을 통해 성취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갈 5:13-14).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에 거룩하고 선하며 신령하다고 하였다(7:12-14).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때문이다.
율법이 구원사 속에서 담당한 기능은 의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죄악상을 드러내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지적한 구원사로서의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때까지 범죄를 더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신실성에 기초하여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율법과 약속은 하나의 공통적인 전체적인 목적 가운데서 통합되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시종일관되게 적용된 것은 믿음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아브라함의 약속 가운데서 처음으로 예시되었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사는 율법을 통한 구원의 원리가 적용되어 오다가 이제 믿음을 통한 구원의 원리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율법은 본래 생명과 의를 제공하는 구원사의 원리로 의도된 적이 없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약속이 내포하고 있는 믿음만이 의와 생명을 제공하는 구원사의 유일한 원리로 계획하셨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와 능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사실 율법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로서의 율법은 새로운 메시야 시대에서 믿음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갈 5:14; 롬 8:4). 그러므로 율법의 참된 본질은 복음의 정신 속에서 계승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역사적·내용적 맥락에서 파악된다. 구약이 메시아가 강림하기 전의 은혜계약의 시기라면, 신약은 그의 강림 이후 오늘 우리가 사는 지금까지의 시기이다. 구약과 신약이 종종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혼용되고 있는 바, 이는 오해와 혼란을 일으킨다. 주제 자체와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용어의 기원과 의미를 정확히 함으로써 논의의 진행을 원활히 하고자 한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권적으로 사역한 약정이다. 구약성경에서의 언약이란 말은 '베리트'( )이고, 헬라어로는 '디아데케'( )이다. 베리트라는 말의 어원을 조사해 보면 그 의미의 확정은 더 어려워진다. 베리트라는 이 명사는 '자르다' 또는 '보다'라는 어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언약을 맺는 것에 대해 구약에서 사용된 가장 일반적 표현은 '언약을 자르다'라는 말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 언약은 하나님나라가 민족으로 형성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과 이 언약을 이루는 것을 최종의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하신 대로 시내산에서 이루어진다. 이 언약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내용, 즉 언약이 있은 다음에 율법이 역할을 하며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법 정신과 법철학은 고대근동의 다른 백성들이 가졌던 것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고대근동에서는 왕들이 신들로부터 법 제정 권리를 부여받아서 백성에게 공포하면 효력을 발휘하며 백성은 거기에 순종하여야 한다. 법은 그 자체로서 최종 목적이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진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근거하므로 법은 언약에 하위개념이 된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단순히 시내산에서 주권적으로 맺어진 특정한 선포나 집행이 구약에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언약은 아니다. 시내산의 언약은 이미 주어진 언약에 대한 언약의 존재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참조. 출 19:3-4).
'베리트'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유언 또는 계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베리트'라는 말은 어떤 종교적인 재가(裁可)가 덧붙여짐으로 인하여 일방적인 약속이나 규례 또는 율법이라는 말까지도 용례상의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 사용되는 말이다. 이로부터 베리트의 특징들은 자의적이고 가변적인 성질에서가 아니라 불변하고 확실하고 영원히 타당한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바울에 있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분은 문자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장 14절)라는 진술에서 정경의 두 구분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 흔히 율법을 베리트 또는 디아데케로 부르기 때문에 옛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지, 새 언약이 기록된 형태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었다. 여기서는 다만 옛 언약의 시기는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그리스도까지의 기간이 아니라, 모세로부터 그리스도까지의 기간이다. 또한 구원사적 의미에서 신약이란, 그리스도와 사도시대를 넘어서 지금까지의 시대구분은 물론이고 종말적이고 영원한 상태까지를 지칭할 수 있다. 유대인에 있어서 구속사의 중심적인 사건은 여전히 미래에 있었다.
언약이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구분 짓는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서, 전자는 그리스도 이전의 하나님과 인간의 유대, 후자는 당연히 그리스도 이후의 인간과 하나님과의 유대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구분 짓는 궁극적 목표는 오직 유대인의 율법주의와 새 언약의 은혜를 대조시킴으로써(갈 2:14-16; 3:1; 4:31-5:2), 유대주의자의 파괴적인 의견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사도 바울이 내세운 다른 모든 부차적인 대조는 이 근본적인 부분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는데 쓰였을 뿐이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역사와 새 언약 시대를 대조하고 있다. 믿음이 오기 전의 시대는 믿음이 온 때와는 확실히 대조된다(참조. 갈 3:23,25). 믿음이 오기 전 시대란 모세 시대와 현 시대를 특히 대조하고 있다. 이 사실은 구약에서 믿음이 오지 않았다는 시대가 모세 시대 하나인 것 같이 구분 짓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온 사실, 그리고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그의 위치는 전 역사과정을 변경시켰다. 일단 그리스도가 옴으로써 이루어진 구속사의 근본적인 변화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그 이전의 위치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옴으로써 이루어진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고 있다. 다만 바울 사도는 이 절대적인 구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를 수정하고 있는 바,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그와 똑같은 복음이 미리 전해졌기 때문이다(참조. 갈 3:8). 왜냐 하면 오늘날의 하나님과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실체가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 3:9).
둘째, 구약에서의 아브라함 시대와 모세의 시대를 대조시키고 있다(갈 3:15-19). 그는 하나님의 축복이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약속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 대조는 율법의 모세 언약과 약속의 아브라함 언약을 대조시키고 있다. 구약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총괄하여 이른바 율법으로 이해하는 일과,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은총 행위에 대조시키는 것은 신약의 관점으로부터 익숙해져 왔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받았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왔다(참조. 요 1:17). 여기서 율법이란 모조리 모세로 말미암아 부여되었다는 말은 오늘날 역사적으로 더 이상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오늘날의 용법으로 보자면, 율법이란 먼저 국가적인 것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율법을 이해한다. 희랍어 '노모스'는 라틴어에서의 '렉스'(lex)와 같다. 후대에 와서는 제반 계명 및 율법이 모두 언필칭 '토라'라는 개념으로 일컬어져 왔다. '토라'가 후기 의미에서 환언하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 확정, 그리고 규정 등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바뀌었으며 이것은 지금의 모세 오경, 이른바 '문서'의 개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율법이 의미상 극단적으로 치솟고 전제화 되어서 언약이 율법 아래 짓눌려서 뒷걸음 당했던 일이 율법에 대한 신학적 비판의 발단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사도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의 참 복음과 유대주의자의 잘못된 복음을 구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과 언약을 강력히 대조시키면서도 바울 사도는 유대주의자의 율법주의와 대조해서 아브라함과 모세 언약의 통일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참 복음과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복음(갈 1:6-9; 참조. 고후 11:4, 11;13-15; 빌 3:2)을 구별하는 점에 대하여 할례의 율법적 필요성에 그 초점을 맞추어 예를 들었다. 즉,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이다(갈 5:2). 그러나 할례는 모세의 율법 언약에서보다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언약의 규정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근본적인 조화 속에서 합쳐진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모세의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 안에서는 연합하지만,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유대주의자들의 메시지 사이에는 어떠한 통합의 요소도 있을 수 없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모세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을 전해 받을 수 있었던 그 매개체에 불과 하였다. 사도는 말하기를 율법은 그에게 죄를 제시해 주었으며 죄라는 것이 얼마나 악독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죄의 매임으로부터는 구출하여 주지 못하였다(참조. 롬 7장).
생각건대 율법과 복음이라는 서로 대칭 되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의 논의로서는 충분한 논지를 펼 수가 없다. 그것은 이신칭의의 교리가 사도의 확고한 중심사상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을지라도 적어도 이신칭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바울 신학의 중심도, 바울 복음의 진수도 알 수 없다는 것이 통설로 되어있다.
Ⅲ. 하나님의 정의와 율법적 정의
율례라는 용법으로서 히브리어의 '미쉬파트'라는 의미를 영어의 'Justice'(정의)는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은 통일되고 유기적인 성격의 일관된 계획, 즉 어떤 일을 성취하려고 결단한 이의 집요한 연속성을 갖는다. 그 최후의 행동은 우리가 최후의 심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석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미쉬파트라는 히브리말을 예의 주시하지 않았다.
미쉬파트라는 말은 법, 재판, 권리, 정의, 정의를 위한 사법외적 개입이라는 여러 뜻을 가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미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최후 심판이라는 궁극적 내용을 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후의 심판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미쉬파트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좌우된다. 최후의 심판이란,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에서 비롯되며(출 20:23) 그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의이다(신 4:1; 8:1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파기를 초래했으므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였다(창 9:11). 옛 언약의 궁극적 완성인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성취되었다(막 14:24). 따라서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완성되었으며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삶의 전 영역에서 올바르게 정립되게 하는 새 언약이다(롬 1:16).다른 신약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 있어서도 마지막 심판은 행위에 근거한다. 행위심판의 교리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율법의 완성을 최후의 심판과 일관성 있게 연결시키고 있다(참조. 갈 5:13-24, 롬8:1-4, 13:8-14).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의 각 조항을 낱낱이 모두 행함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율법의 참된 목적과 정신이 만족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율법의 완성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자에게는 율법의 종말론적인 정죄 선언이 있게 된다. 그런 자는 영생에 이를 수 없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율법의 완성이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다스림에 순복(馴服)하는 삶의 결과이다.
1. 하나님의 정의(미쉬파트)
(1) 구약성서의 정의
하나님의 초월적인 속성과 공유적 속성의 중앙에 '여호와의 의'가 있다. 먼저 여호와에 대하여 의롭다고 할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해야 할 일을 다한다는 것에 보다는 심판자 편에서 공정한 판결과정과 그 유비가 있다는 점이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은유로서 하나님이 자신의 행동을 판단하기 위해 재판정에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된 곳뿐이다(시 51:4). 이 외에 대체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다. 그런데 공정하다고 함은 그 위에 있는 법에 충실할 때 우리는 의롭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법은 하나님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안에 있는 법이다. 이 법은 독단적인 명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법이 없고, 있을 수도 없는 하나님의 성에 일치하는 것이므로 의로운 법이다(신 4:8).
구약성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정의관을 가장 적나라하게 살펴 볼 수 있는 곳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주신 모세율법의 정수인 십계명이다. 십계명에서의 언약(참조. 출 20:1-17)은 사실상 자세히 정의되지도 않고 또한 아무런 법칙도 없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법률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십계명은 강제적인 방침, 즉 언약 공동체가 강제로 유지시키고자 하는 기본적인 율례이다. 말하자면 실정 헌법상 총론부분에 해당하는 선언적 성격을 띄운다. 구약성서에서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응보적 정의관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는 내용은 출애굽기 21장 12-25로서, 십계명에 대한 각론적 성격을 띄우는 상세 조항이다. 본문의 이 짧은 내용은 이스라엘이 지켜 나아가야 할 개인적 권리에 대한 일반 조항으로서 보복의 원리에 입각한 복수법이었다. 각각 그에 상응하는 응분의 대가를 하나님께서 응징하겠다는 언약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예수의 가르침 이전의 유대인에게 있어서 정의가 응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온갖 미개인과 마찬가지로 고대 유대인도 자연을 사회의 일부로 간주하여 자연현상을 사회생활의 개념을 가지고, 특히 응보율에 따라서 설명했다. 인간에 영향하는 모든 자연현상은 하나님의 역사로 해석되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정의이므로 그것의 존재는 자명한 것(창 1:1)으로서 인간의 선악행위에 상응한 상벌로 해석되었다. 다른 민족과 똑같이 유대민족도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화인 죽음을 죄에 대한 벌로 해석한 것이다.
모세 오경에는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는 장면이 여러 가지로 나온다. 카인은 동생을 죽임으로써 저주를 받았고(창 4:9),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헌화의 의식을 위반했기 때문에 불에 타 죽었다. 이러한 응보율은 비단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동물에게도 적용되었다."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출 21:28)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응보와 복수의 하나님이요, 심판자로서 책벌 하는 하나님이다(참조. 레 26:14-39). 하나님의 복수의 주권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타민족에게서는 더욱 격렬한 주권을 행사한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신 32:35). 또한,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 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참조. 신 32:41-42).
여호와 하나님에 있어서 정의란 본질적 속성이다.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사 30:19), 또한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시 112:3)라고 하는 데서 하나님은 정의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정의 그 자체이며 바빌론 포수 이후 성서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메시아와 하나님의 나라의 대망이지만 메시아가 가져오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정의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미쉬파트'를 때로는 가난한 자의 구원, 의, 정의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미쉬파트의 어근 '쉬파트'( ph )의 동사형, 곧 '사파트'( apha )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바, 'to rule'(재판하다), 그리고 'judge'(심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70인 역에서는 '디케'( , 정의)라고 번역하였다.
히브리어의 '사파트'는 심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칼빈도 지적한바가 있다. 미쉬파트는 약자의 옹호, 억압받는 자의 해방, 가난한 자에 대한 정의의 실천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신현(神顯)의 방법은 오직 미수파트이다. 그리고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정의를 호소하는 이웃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새롭게 다시금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것은 확고한 정의, 종말이 될 것을 요구하면서 다시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이 요구 없이는 복음은 근본적으로 이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정의를 인격화한 것이며,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정의를 찾는 것과 같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니는 사법권은 그의 입법권보다도 한 층 특징적이다. 모세는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여”재판관으로 임명하여 그들에게 "재판할 때 한쪽만 편들면 안 된다. 세력이 있는 자든 없는 자든 똑같이 들어 주어야 한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신 1:15-17)고 하였다.
재판이란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나님께서 몸소 심판하는 것이다. 본문 말씀 중에서도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출 21:22b). 또한 시편의 곳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정의로 판단하는 재판장”으로 진술되는 것을 볼 수 있다(시 75편, 50:6, 9:7, 96:10 etc).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므로 사람들의 가장 비밀스런 사상이나 감정을 아는 이상적 재판관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미수파트'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메타포'(metaphor)로서의 재판관이 아닌 것이다. 오직 정의를 심판하는 여호와 하나님인 것이다(시 94 편).‘악은 악으로’또한‘선은 선으로'라는 슬로건은 우리의 현실 세계의 삶의 지표이자,‘공정한 게임의 원칙'으로 받아들인 그 기원을 창세 이래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실천적인 모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최후의 심판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우리는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처음부터 불의한 자에게 대항하여 우리의 역사 안에 살아 있으면서, 정의의 법이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성취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였고(창 18:17-19), 심판의 총체적이고 세계적인 실현은, 하나님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였던 처음 순간부터 계류 중에 있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의 본질인 응보율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라고 말씀하는 내용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응보적 정의의 제일의적 의미는 벌에 있는 것이다.
(2) 신약성서의 정의
신약 성서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응보에서 사랑으로 그 슬로건은 완전히 역회전한다. 예수의 엄숙하고 단호한 부정은 바로 이 대갚음 즉 앙갚음, 복수, 응보, 보복 등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 5:38-41)라고 함으로써 복수에 대한 강렬한 부정을 하였다.
참으로 예수의 교설은 혁명적이었다. 이어서 바리새인 율법사 한 명이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마 22: 35),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이러한 말씀은 예수의 말씀 선포의 요체가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복음서의 진술들이 모두 사랑으로 되어 있지만, 최후의 심판을 예고하기는 마찬가지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3:33, 26:52). 이 같은 예수의 가르침은, 최후의 심판을 이미 예시한 것이다. 즉 최후의 심판이 실현하는 정의란 악인에게는 가차없는 형벌을, 선인에게는 포상을 한다는 응보적 정의의 관념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도 최후의 심판을 복수의 날로 규정하고 있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눅 21:22), "이는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 24:21). 이 때의 재판관이 되는 사람의 아들이 곧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요 5:22). 따라서 최후의 심판은 결국 응보적 정의의 심판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악인은 망하리라는 통첩이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에서 비롯되며, 언약의 파기는 곧 복수의 피를 부르는 무서운 형벌만이 응징의 대가가 된다. 옛 언약의 궁극적 완성인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성취된다. 특별히 우리는 히브리어의 미수파트라는 말을 식별하고 기억해야 한다. 미수파트라는 단어 하나가 의미하는 것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면,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오류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성서주석의 요체는 문자의 정확한 의미를 거스르지 아니하는 것이다. 성서는 읽는 책이 아니라 연구하는 책이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2. 바울의 의인론
(1) 의인의 개념
바울의 의인론(義認論)은 그것이 발현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는 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의인론이라는 올바른 사상적 관점을 근거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 )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바울은 의롭게 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데 여기서 '의'라는 명사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동적인 의미를 가진다. 구약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왜곡된 인간관계를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회복시킨다.
바울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 3:6)라고 하여 갑작스럽게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주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것과 연관된 '의'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하나님께 보인 아브라함의 유일한 반응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뿐이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할례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말할 때,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의'의 개념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구약에서, 특히 시편과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의'는 그의 언약적 성실성,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지칭한다. 이 경우에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그들에게 호의로운 판결을 내리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의' 또는 '의롭다고 하다'라는 말들은 관계개념이고 또한 법정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선언하거나 판단하는 것이다. 창 15:6에 근거해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최고의 심판자로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은 그가 계명을 준수해서가 아니라(참조. 겔 18:5이하),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에 있어서 의인론의 배경은 안디옥 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바울이 그의 최초의 의인론을 안디옥 사건과 연결시켰다는 것은 의인론의 의미를 밝혀내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갈라디아서 2:11이하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식탁 예식과 정결법을 주장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한 권리를 상징하는 밥상공동체가 파괴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즉각 침해당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 2:15-21을 통해 의인론을 전개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에게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무기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바울은 이런 차별기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로 인해 차별 당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인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멸시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호법이며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인권선언문이다. 또한 바울의 의인론은 모든 불평등과 불의, 착취, 수탈로 점철되는 왜곡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모순된 구조를 해결하려는 인권에 대한 구체적이며 치열한 하나님의 해방사건 이다.
바울의 의인론은 긍정적 명제와 부정적 명제로 구성된다. 먼저 긍정적인 면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면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명제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주장을 부정한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의 대립관계에 있어서 양쪽의 핵심어를 각각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의인론의 핵심은 달라진다.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받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들은 '믿음의 들음'( ), 즉 믿음은 '믿어지는 것'으로서(갈 1:23b) '복음을 들음으로'를 뜻한다. 이에 따라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들음'은 상호 반제적 평행표현이 된다. 이 반제적 평행구들은, 율법에 의해 요구되는 반응이 '행위'이고 믿음에 의해 요구되는 반응이 '들음'이라는 의미의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소유격은 '믿음에서 나오는 들음으로'를 뜻하게 되는 주격 소유격이 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 '믿음'의 본질은 결국 순종적인 '들음'에 있다. 그렇다면 성령의 선물은 어떤 인간적인 성취나 특징들에 관련 없이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들을 때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성령을 받는 일은 바울에 있어서 믿음 '뒤에 따라오는' 것이고, 믿음은 성령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경험한 성령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들음"에 근거한 은총의 선물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성령을 주시고 능력 행함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할례나 율법준수와 같은 율법의 행위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행위에 기초한 것이다.
(2) 언약적 율법주의와 율법의 행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에서 유대인은 율법의 소유와 준수에 의해서 특징화되는 사람들이며 역으로 율법의 준수는 유대인의 종교적 존재양식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는 유대인 된 신분을 나타내준다. 그들은 율법에 의해 요구되는 행위들을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율법의 백성 안에 속해 있다고 간주하였고, 또한 그런 행위들은 자신이 율법의 백성에 속한 구성원임을 표시해주는 행위들이기 때문에 자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자연히 율법은 외적으로 유대인에게 울타리와 경계선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 짓는 사회적 기능을 가지게 된다. 유대인은 율법의 백성 곧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이방인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자의식을 지녔으며, 따라서 그들은 율법에 근거해서 이방인을 죄인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율법의 행함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행함의 원리를 본질로 삼는 율법의 영역 안에 사는 것을 말하며(레 18:5) 따라서 율법의 저주가 작용하는 영역 안에 갇혀있는 것을 말한다.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할 때, 그는 전체로서 율법을 말하고 있으며 아무도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워질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율법주의는 자기숭배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율법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면, 따라서 그들은 칭찬과 영예와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주의는 하나님보다는 사람에게 영광을 들리는 것이다. 바울의 복음은 인간적인 안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자기 분투나 자기 노력은 잘못된 길인 것이다.
1977년에 샌더스(E.P. Sanders)는 그의 저서『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에서 그는 율법주의적 종교로서 팔레스틴 유대교에 대한 편견은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한 후, 당시 유대교가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는 생각은 정당성이 입증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바울 당시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형태로 보다 적절히 묘사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선한 행위를 행함으로써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은 백성들의 모든 죄를 자비롭게 용서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관계를 맺기 전에 어떤 수준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유대교에서는 왜 율법을 지켜야만 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속사역에 대한 응답으로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며, 또한 그의 백성들은 감사함과 겸손한 순종으로 그의 은혜에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을 언약 아래에 포함시키는 것은 샌더스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한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샌더스의 주장은 결국 기독교 학자들이 유대교에서 율법과 언약을 구분하거나 분리하여 유대교가 율법주의적이었다고 선포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지적한다. 이것이 샌더스의 바울신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이유는 구속사적 이유들 때문에 율법을 구원의 길로서 배제하는 것이다. 샌더스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생각하였다. 율법이 구원하지 못하는 한가지 이유는 구원사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약의 희생제사들이 죄를 사하였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오직 그의 십자가의 희생만이 구원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사적 대답이 포괄적으로 제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율법이 죄를 증가시켜 주었다는 바울의 주장은 가장 놀라운 바울신학의 단언 중의 하나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주셨는가? 바울은 인간의 죄의 깊이가 완전히 깨달아질 때, 죄에 대한 은혜의 승리가 더욱 빛나게 된다고 대답한다(롬 5:20-21).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사이의 대조는 유대교 율법의 소위 율법주의적인 기능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대조는 오히려 이방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믿음 외에 할례와 율법을 수용해야 된다는 적대자들의 요구에 반대하여 제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교를 배척하는가? 그것은 샌더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가 본래적인 결함은 없지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바울이 이제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유대교는 민족주의적이어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종족적이고 문화적인 견지에서 묘사될 정도로 그 자체의 역사와 문화에 얽매어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자체로서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이 못된다. 바울이 유대교를 거부한 요인은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독특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위반한 유대인들 위에 임하였던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 위에서 감당하심으로써(갈 3:10-13),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우주적인 구원의 약속(창 12:3; 갈 3:8)을 성취하셨고, 그리하여 모든 인류와 더불어 새 언약을 수립하였다. 옛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한 이스라엘에 의하여 파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러므로 옛 언약에 근거하여 이방인에게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유대교는 거부될 수밖에 없다.
(3) 칭의의 본질
사도 바울에 있어서 '칭의'라는 이 단어는 그가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단어의 뜻을 간단히 말하면, '의롭게 되다' 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바른 삶, 참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갈 3: 26)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구원사건(참조. 갈 3:25-27)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사도 바울의 무차별 의식은 믿음에 의한 의의 완성이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술어적으로 예수 자신에 의해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의 근본정신과 일치하는 원리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막 2:12-17; 마 11:19; 눅 5:27-29). 이것은 이방죄인들을 믿음이라는 조건하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끌어들인 바울의 복음정신과 동일한 것이다.
이신칭의의 본질을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서 모든 인류는 그들의 신분이나 시대나 또는 어느 곳에 살든 막론하고 칭의를 필요로 한다.
2) 크리스챤은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선물로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 구원에 이를 희망이나 칭의를 위한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전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놓여 있다.
3)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값없는 사역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아무 것도 우리 칭의의 근거나 토대가 된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조차도 신적 선물이며 우리 속에서의 신적 역사로서 인식되어져야 한다.
4) 칭의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포되며 성령의 새롭게 하는 역사를 통하여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 칭의에서 우리가 복음에 인격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또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만남으로써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인다.
5)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누구든지 뒤따라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어지며, 선행을 행하도록 자극 받고 또한 가능하게 되어진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선행들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이는 영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제공된 선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역하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칭의는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환상을 드러내며,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온당치 못한 산물들임을 폭로해 준다. 칭의라는 말은 그것이 죽음, 곧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마지막 사건에 이르렀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과 경계는 이제 사망사건이 아니라 부활이다.
따라서 칭의란 '생명의 칭의'( )이고 여기서 의롭다고 선언된 생명은 그 결과 끝없는 삶이고, 신자들이 그 생명 안에서 '다스리라'고 약속된 그런 삶이다(참조. 롬 5:8-21). 바울에 있어서 칭의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과 관계되는가의 포괄적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특히 그의 서신에서 사용된 몇 가지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칭의의 개념은 우리에게 정죄의 제거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및 신분의 확립에 관하여 말해 준다(롬 3:22-27, 4:5, 5:1-5). 양자 됨의 사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가리킨다. 화해와 용서의 개념은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지적해 준다(고후 5:18-21, 엡 2:13-18). 구속과 해방의 개념은 속박과 노예상태로부터의 구출을 가리키는 것이요 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지불된 값임을 가리킨다(막 10:45, 엡 1:7).
이신칭의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적, 변화적 임재가 믿는 자들 속에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칭의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통찰을 확증 시켜주는 하나의 슬로건이요 암호이며 속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바울의 의인론은 바울 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모든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신교회들은 의인론을 교회의 존망이 걸려있는 '신앙조항'으로 여기고 있다. 종교개혁시대의 여러 신학자들은 칭의가 바울 신학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브레데(William Wrede)를 위시한 현금의 많은 신학자들은 칭의를 유대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일시적인 논쟁적 개념으로 일축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칭의 교리를 새 시대의 출현과 동시에 거론하여야 한다. 그 출현을 입증하는 것은 곧 성령의 오심이기 때문이다. 칭의란 마지막 날에 있을 종말론적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이미 역사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칭의는 구약의 의 개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져야 한다. 구약에서의 의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었다. 초기의 유대교인들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현세에서의 부와 복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리고 가난과 고통은 하나님의 응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 유대주의로 넘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당해야 하는 고통, 반대로 악을 일삼는 자이면서도 잘 살아가는 모습에서 그들의 종말관을 의심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4) 의인의 실존상황
바울의 의인의 교리는 그의 서신 가운데서 특별히 전개되고 강조되었다. 의의 법정적 개념은 그 근원을 구약 성서에 두고 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유대교에 있어서의 율법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즉 의는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감시자에 지나지 않았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의 정죄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의한 인간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손은 바로 믿음이며 따라서 의인은 법정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사상과 대조적이지만,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함으로써의 의인 개념은, 그 행위가 먼저 믿음으로 좇아 나온 행함을 말하는 것이므로 바리새인의 그것과 구별되는 것은 물론이다(참조. 약 2:20-21). 그러나 믿음과 행위 사이에는 아무런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보여진다.
비록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고 해도 신약성경은 전체적으로 참되고 살아있는 구원의 믿음은 반드시 선행을 얻는다고 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불의한 자는 주님의 형제들을 돕는 데 있어서 그들에게 당연히 예상했던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때 집요하게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신학과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의 신학을 대립시키려고 하였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바울은 끊임없이 실천의 비평적 중요성에 대해 주장했다.
야고보는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은 행위로 그 '믿음'을 보인다고 하였으며(약 2:19), 사도 바울도 진정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서의 역사는 '믿음'(갈 5:6)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는 오직 사랑의 선행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심판은 행위의 기초 위에서 내려진다.
기독교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실존상황에 침투하여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선물로 주심으로 인하여 인간의 실존상황은 외적 행위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Ⅳ.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바울의 논점
'그리스도의 법'은 그의 사랑의 계명이다(참조. 요 13:34). 그것은 율법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그의 창조적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원칙이다. 여기의 '법'이라는 낱말에는 풍자적인 뜻이 있다. 즉 이전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짐을 졌으나 이제는 그 짐을 벗고 대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라는 짐을 지라는 뜻이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바울의 권면은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을 가장 극명하게 대조시킨 대목이다.
여기서 '노모스'(법)는 바울과 그의 대적자들이 아주 직접적 관심을 가지는 유대인의 '토라'(율법)이다. 히브리어의 토라와 희랍어의 노모스는 영어의 Law(법) 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토라는 하나의 교훈을 의미하고, 노모스는 관습적인 법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사용한 법이란 결국 주님께서 요한 복음서 13: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라고 하신 것 이상은 없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신 그 자유 안에(갈 5:1), 율법에서의 자유 안에, 그리고 죄와 죽음과 특히 자아로부터의 자유 안에(롬 6:7-11, 14; 7:24-8:2) 굳건히 서서 살도록 한다. 그렇지만 자유의 완전한 향유는 종말에 가서야 가능하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스런 자유"(롬 8:21)를 기다린다. 따라서 종말이 오기까지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자유인"(고전 7:22)으로서, "그리스도의 법 아래"(고전 9:21)있는 자로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아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은 믿음이 연약하여 실패한 신자들을 앉아서 판단하고 있는 율법주의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나타낸다. 또한 이 구절은 죄에 빠진 자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관용하며 도와주라는 호소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처럼 제1절에서 우리는 정죄하고 비난하는 정신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경고를 받고 있는데, 이 정신에 정반대 되는 것이 우리가 논의하는 제2절의 말씀이다.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의 짐을 지는 것"(갈 6:2)으로서 형제적 교정(矯正)을 논하는 의미이다.
로마서 13:8-10에서 바울 사도는 보다 명시적으로 십계명 중 5, 6, 7, 8 계명을 반복하고 그 계명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 사람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랑이 율법을 완성한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이 법은 물론 "성령의 법"이다.
1. 그리스도의 법의 개관
(1) 갈라디아서 6:2절과 고린도전서 9:21절에서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의 법'에 관한 사도 바울의 신학적 기반을 추적해 보면, 가말리엘 학파에서, '온 율법이 이웃 사랑의 법에 담겨져 있다'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더 이른 시기에 힐렐(Hillel)이 어떻게 율법을 요약했는지 살펴보면, "스스로에게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온 율법이요, 그 나머지는 주석이니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황금률을 소극적인 측면에서 율법의 정수로서 인용한 것은, 특정한 계명에 직면한 어떤 사람이 그 계명은 이웃의 고통을 악화시키는 것을 막아주거나 이웃의 선을 증진시킬 때에만 구속력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이 된다.
그러나 바울이 "서로의 짐을 져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할 때, 그는 그리스도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였는지를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더욱이 "짐을 서로 지라"는 말은 앞에 나와있는 구절(레 19:18)을 일반화시켜 확대한 듯이 보인다. 이러한 권면은 로마서 12:9-12에서도 '그리스도의 법'에 관한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믿는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사랑하고 동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언급은 예수의 교훈이 윤리적 가르침의 주요한 자료를 이룬다고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증거로서 인증 된다. 그런데 이 구절(갈 6:2)은 고린도전서 9:21에서의 그의 진술과 관련이 있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 그리고 "믿음의 법"(롬 3:27)에 대한 바울의 언급도 논의되어야 한다.
도드(C.H. Dodd)는 예를 들어 바울이 갈라디아서 6:2과 고린도전서 9:21에서 '새로운 법'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핵심은 일단의 예수의 전승된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 6:2과 고전 9:21은 행해지도록 되어 있는 특수한 계명들과 권면들을 나타내고 있는 문맥이다. 이 양 구절은 신약성서 어디에도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고린도전서 9:21에서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분명하다. 바울 자신은 유대교의 율법주의로부터 자유 한 몸이라고 생각하며 이방인 선교를 위한 과정에서 이 자유를 강조하지만, 그가 결코 윤리적 방종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갈라디아서 6:2에서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언급이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에게 타당한 '새로운 법'의 개념을 지지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법'이란 율법을 완성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의 법으로서 사랑은 율법의 성취를 말한다(갈 5:14). 바울에 있어서 성령 안에서 살고 행하는 것(롬 5:25)은 사랑 안에서 살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갈라디아서 6:2절의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의 계명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한다. 로마서 5:5에서도 성령을 하나님의 사랑의 중재자로 보았으며 다음 구절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사건으로서 밝히고 있다(롬 5:25-26; 참조. 8:9-10).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권면 하는 것은 전승된 말씀에 복종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표현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기독교적인 상황에서 '법'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이러한 예비적인 고찰이 타당하다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고전 9:21)이나 "그리스도의 법"(갈 6:2)이라는 구절은 전승된 예수의 말씀들을 새로운 토라나 기독교적 초기 교훈집을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2) 그리스도의 법과 짐의 관계
갈라디아서 6:2에 제시되어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생활상의 윤리적 원리이다. 우리는 모두가 짐을 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짐을 홀로 지고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전제가 이 명령에 선행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홀로 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짐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견인의 예로 여긴다. 실제 그러한 견인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은 서로 돕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 윤리가 아니라 차라리 금욕주의적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그리하면 너를 붙드시리라"(시 55:22) 및 수고하고 짐 진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마 11:28)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에게 고유하게 예정된 거룩한 '부담자'가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연약한 증거라고 논단 한다. 이것 역시 심각한 오류이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와 짐을 지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십자가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다른 짐들, 즉 근심, 걱정, 의심, 유혹 등의 경우는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 수 있음은 그가 우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7). 그러나 그가 우리의 짐을 담당하는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유대를 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서로 짐을 져주는 인간적 유대관계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짐을 홀로 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 안의 친구로 하여금 그것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어지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 짐을 서로 져 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의 구절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짐'과 '법'의 연관을 음미해 보면, 바울 사도가 암시적으로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약성서 안에서 몇 가지 율법의 요구들은 분명히 짐으로 비유되었다(눅 11:46, 행 15:10, 28).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께 용납되기 위해서 준행 해야 하는 율법이라는 짐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부과하려고 하였다. 바울 사도는 결과적으로 그들을 향해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려하지 말고 오히려 어려운 짐을 서로 져줌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이다(요 13:34, 15:12). 그러므로 바울이 갈라디아 5:14에서 언급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가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은 같은 내용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다.
(3) 갈라디아서 6:2의 논리적 분석
"서로 남의 무거운 짐을 져줍시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룰 것입니다"(갈 6:2). 서로 사랑하라는 사도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랑 실천의 구절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내 몸을 불 속에 던져서 비록 남을 도와주었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다만 어떤 의무감에 의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의 짐을 지어 주라'라는 지시어는 세속적 법률조항에서 전제부(또는 조건부)라고 한다. 다음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룬다'라고 하는 후반부는 결과부 라고 한다. 이것은 일정한 조건이 만족하게 되었을 때, 일정한 결과를 귀속시킬 수 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결과부는 전제부를 전제하여야 하고 또한 전제부는 결과부를 선행시켜야 한다. 좀 더 논리적인 표현을 부가한다면, 자연법칙 'A'가 있으면 'B'가 '있다'(is)라고 하는 취지의 언명인데 반하여, 도덕률이나 법률에서의 행위의 준칙은 A가 있으면 B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논리이다. 이것은 존재와 당위와의 상위, 인과성과 규범성과의 상위이다. 어떤 형의 인간행동을 명하는 일반적인 규범을 전제한다면 그 전제한 규범에 적합한 것은 정당한 것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부당한 것으로 특징 지울 수 있다.
이러한 언명을 우리는 '가치판단'이라고 하며 이 규범이 일반적인 규범임을 전제 할 경우에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가치이다. 가치란 평가되는 대상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전제된 규범에 대해서 그 대상이 갖는 관계인 것이다. 가치는 자연의 사실에서 연역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인가 있다고 하는 사실로부터 그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도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자연학이나 인과의 원리가 아니라, 도덕률 또는 법률의 권위자가 행위 하는 의미에서 당위라고 하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사도가 말하기를,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있으니 그것은 사랑의 의무"(참조. 롬 13:8)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본문의 명제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의 최종적 결론이자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의 정의론의 기초를 이루고 나아가서,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가 완성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다"(참고 옙 3:17-19).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신학 하는 일의 대 명제가 된다. 우리가 신학을 한다는 것의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을 본받는 과제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을 우리의 삶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정의의 행함이 추상적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과제는 긍휼이 필요한 자가 누구인가를 밝혀야 하고, 누가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가 라는 이중적 과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이 이중의 과제를 실천하는 일이 소위 '신학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의 법의 구체적 지도원리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오늘에 있어서 신학함의 지도원리이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성서의 법은, 그리이스-로마의 전통을 이어 받아 우리에게 부과하는 어떠한 상대도 강제적으로 저지하면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국법질서와는 다르다. 성서의 법은 이 땅위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성취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국법이 정의 수호를 위한 피동인이라면, 사랑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위에 실현하기 위한 능동인이다. 그 사랑의 실현태가 정의실천의 기본구조가 되며 정의실현은 사실상 분배적 정의의 원리에 바탕 하여야 하는 것이다.
분배, 즉 나눔이란 신학상의 용법으로서는 신자가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것을 일컫는다. 나눔이란 먼저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고로 기쁨도 영광도 서로 나누어야 한다. 기독교의 전통은 실천적으로 행하여지는 나눔의 신앙이다. 나눔의 본령은 역시 상대방의 고통을 분담하는 데 있다. 이때의 고통이 물질에서 오는 고통임은 물론이다. 삶의 기본인 물질의 분배는 구원의 커다란 축으로서 고통과 함께 하는 기독교의 나눔의 정신이야말로 오늘의 신학 함에 있어서 희망의 십자가임에 틀림없다.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이른바 비례의 정의(능력 것 가져감)에 의하여 고통 받고 억압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 결과 오늘과 같은 시대에 가장 고통 받고 설움 받는 민중은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와 나누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와 나누어야 한다.
(4) 갈라디아서 6:2과 6:5에 나타난 짐의 의미론적 차이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갈 6:2a)에서 우리는 믿음이 약하고 짐 진 자들을 낙심시키지 말고, '그들의 짐을 지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자세야말로 율법주의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용서와 관용이야말로 은혜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5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모순되는 것과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한다"(갈 6:5)는 구절은 양자의 '짐'에 관한 의미를 파악하기 전에는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6:2절의 '짐'이란 단어의 원어인 '바로스'( )는, '무거운 짐과 부담'이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서 6:5절의 '짐'이란, '포르티온'( )으로서 '해야 할 임무나 봉사'라는 의미의 '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도와서 다른 사람의 짐을 져야 할 그 '짐'의 의미는 제1절에 비추어서 규정해야 한다. 즉 믿음이 약하여 '범법한 형제'를 도와서 성령의 법으로 그들을 바로 세워주어야 한다고 해석 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 곤궁한 자를 도와주고, 방황하는 자들을 조언해 주며, 회심한 자들을 말씀과 기도로 도와주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서로가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의 본의이다. 이것은 율법이 명시하는 그 이상의 의무이며, 오직 은혜와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며, 새로운 자유의 법에 순종하는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계명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요일 3:23).
이상의 논지가 우리가 나누어 질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짐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나누어 져서는 안 되는 짐, 즉 자신의 짐이 있는 바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한다"(갈 6:5). 원래 이 구절은 '가르'( : 왜냐하면)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문맥의 상하를 검토하면서 논의하여야 한다. 제1절에서 "서로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고 하면서 제3절에서는,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수치를 무릎 쓰고 다른 사람의 궁핍을 기꺼이 도와주어야 하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즐거이 원조해야 한다. 만일 우리 자신을 너무나 소중히 여겨서 믿음이 연약하고 생활이 궁핍한 형제를 관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인다고 사도는 경고하는 것이다.
생활이 궁핍하면 범죄의 유혹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자기의 궁핍함에 그만 범죄 하게 된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에 나오는 '짐'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라"(갈 6:5)에 나오는 '짐'과 의미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해줄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는 말의 진의는 내가 바로 완수해야 할 '봉사의 짐'을 말함은 물론이다.
2. 그리스도의 법의 본질
(1) 하나님의 정의로서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이다. 사랑이란 신의 속성으로서의 정의의 실현태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희랍적인 정의(定義)의 영향을 받아 사랑과 정의를 구분하려는 데 있었다.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희랍어는 모두 사랑을 의미한다. 이 두 낱말은 각각 생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와 희랍적 태도를 말해 준다. '아가페'( )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며,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인자의 생애 가운데 나타났고 그 중에서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이 자기의 영을 통하여 그의 사랑에 감촉 된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불붙여 주신 사랑도 포함된다. 아가페는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하강적 운동이다. 그러나 플라톤 사상의 근원에서 유래한 '에로스'( )는 신을 찾아 구하는 인간 영혼의 상승적 운동이다.
에로스의 본질적 의미는 영혼이 감각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참되신 자 안에서 최고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추구하는 천상적 에로스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구약에서 나타낸 아가페의 불완전한 계시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완전한 계시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인격적으로 계시되는 것은 오직 구속으로만, 즉 아가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와의 관계에서 사랑(charity)의 가장 민감한 부분은 바로 사랑을 받는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데 있다. 이런 존중심으로 사랑은 사랑이 되고, 굴욕감을 주는 온정주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박탈이 사랑과 혼동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이웃에게 억압적인 모욕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의에 대해 날카롭게 의식하지 못하고, 학대받는 나의 형제와 함께 진정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랑은 초월하지 못한다.
(2) 십자가상의 대속으로서 그리스도의 법
루터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법은 세 주요한 단계로 계시되었다. 자연법과 십계명, 그리고 복음의 법이다. 이 세 가지 법은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굳이 차이를 말한다면, 법의 본질적인 의미와 내용을 계시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루터는 생각한다. 따라서 그 모든 법의 본질적 내용은 사랑이며 사랑은 그리스도의 계명과 마찬가지로 자연법과 모세의 법의 요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그 법들의 참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복음의 법이란, 곧 사랑의 법이다. 법의 준수에는 도덕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는데, 전자는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고 후자는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의 성취로서 만족하니 이것은 사람의 행위보다는 그 마음으로부터 율법을 준행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법도 사랑의 법이니 이 법은 자기애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이타적인 사랑, 즉 아가페를 말한다. 이 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시키며 죄 있는 인간성을 더 자극시켜서 발악케 하며, 동시에 그 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할 인간의 무능력을 폭로시켜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선포하는 일종의 폭군이다. 법과 진노의 이 폭군을 정복하는 길은 인간에게는 없다. 이러한 진노는 인간의 사후(死後)가 아니라 현재적인데 이 폭군의 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만큼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진노는 엄격한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킨 만큼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사랑은 위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를 직시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노와 그의 위대한 사랑의 충돌의 드라마를 스스로 연출하였으며, 그 결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둔 은혜의 승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본성의 표출이었다.
정의라는 절대적인 중심적 주제는 무엇인가? 사실 이 물음만큼 격렬하게 논란이 된 의문은 전에 없었으며, 이 물음만큼 많은 고귀한 피와 쓰라린 눈물을 흘리게 한 의문은 결코 따로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진리를 선포하려고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 매달리게 하였을 때, 나사렛 예수가 빌라도 앞에서 한 말, 즉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 18:37). 빌라도가 다시 "진리란 무엇인가?"(요 18:38)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이에 대해서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말은, 빌라도 같은 사람에게 대답조차 필요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정의를 말하였으며, 이 물음은 인간 세상에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것은 진리를 증언한다는 것이 구세주의 주요한 사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실 정의를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고, 정의를 신의 나라에 실현하려 하였고, 그리하여 이 정의의 구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예수는 죄인에게도 심지어 그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적에게도 선을 가지고 보답하라는 사랑의 정의를 말하였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만, 오늘날처럼 정의의 종교, 평등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특성을 강조한 때는 그리 있어온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 사회정의의 구심점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 이외에 그 어느 것도 사랑의 구체적인 의미를 제공할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의 아가페는 십자가의 아가페이며, 그에 있어서 전도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었다(고전 2:2). 갈 3:13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신' 이라는 대속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죄 없는 구주로서 자진해서 고난을 당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게 하였다는 논리에서 결과된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라는 개념과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고후 5:18, 21; 살전 5:10; 갈 1:4; 롬 4:25; 8:32; 골 1:13).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바 되기는 했지만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지는 아니하였다. 차라리 그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옹호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응보적인 공의, 즉 구약에서의 율법적 정의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를 높이는 것이다(롬 3:24-26).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린 진정한 의미를 오늘에 되새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뜻을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율법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는 그의 영원한 용서의 사랑으로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행위까지도 그것은 사랑의 행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고, 우리의 이웃을 진정으로 돕는 것은 십자가의 피 흘림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돕는 것까지는 얼마든지 권장할 만 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숨은 이익을 위한다던가, 선심 공작성 도움이라든가 체면치레를 위한 도움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위배되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이기주의를 버리고 영적인 사랑, 즉 육체적인 욕정적 자유를 버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자유를 얻었으니 서로 무거운 짐을 져줌으로써, 사랑을 실천하라는 간곡한 사도 바울의 권면 이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적인 욕정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시오"(갈 5:13). 이제 자유를 얻은 그들은 어떤 일이나 해도 되는 그러한 자유가 아니라 올바른 일을 행할 자유를 말함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얻었지만,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할 의무는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그의 과거로부터, 그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요구하신다는 사실로써 요약된다. 격식화 된 조문, 즉 율법으로는 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 하며, 자랑하지 아니 하고, 교만하지 아니 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 하고, 자기의 고집을 세우지 아니 하는 것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으로만 말 할 것이 아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구체적인 계명은 일정한 상황, 즉 그의 이웃과의 만남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성령의 열매로서 그리스도의 법
바울 사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法은 사랑의 계명과 관련하여 해석되어져야 한다. 원래 법의 기원은 종교적이다. 이 점은 거의 모든 사회학적 결론들에 의하여 확인된다. 법이란 신의 의지의 표현이다. 법은 사제(司祭)에 의하여 공식화된다. 그리하여 법은 종교적 승인을 받는 것이며, 또한 종교적 가르침도 법적 외양을 갖추어서 표현된다.
본문의 가르침도 법적 외양을 갖춘 종교적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을 율법의 실천으로 묘사하고 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 5:14). 바울 사도에 있어서 성령 안에 살고 행하는 것(롬 5:25)은, 곧 사랑 안에서 살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가 본문에서 가르친 내용은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의 요구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표현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 사랑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의 실체로서, 성령의 열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성령 안에 있는 자이며, 성령 안에 사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가 된다. 바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체험은 곧 성령의 체험이며, 그리스도의 체험은 곧 성령의 체험이며, 성령의 체험은 또한 그리스도의 체험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성령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신자의 새로운 신분과 성령을 통한 신자의 새로운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바울에 있어서 성령은 참으로 실천적이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이니 이런 것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갈 5:22-23)라고 하여 체험에 의한 사랑의 실천적 지도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의 구조, 즉 내적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이는 설령 남의 짐을 져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랑의 실천강령이다. 이하에서 사랑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2) 예언의 능력을 가졌다하더라도 그리고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쓸모가 없다.
3) 비록 모든 소유를 나누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내 몸을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롬 8:2)은,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고 사랑 안에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행위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성령의 법을 따라 나온 것이며, 율법과 규례는 자유롭지만 이것은 이미 자유롭게 된 사람(갈 5:1)에게도 어떤 것을 요구한다. 자유로운 사람이 자유의 특권을 남용한다면, 그는 자신이 위반한 것으로 인해 고통을 당할 것이고(고전 11:30), 때로는 죽기까지 한다(롬 8:13).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성령의 법은 성령을 지닌 자들과 관련하여 자동으로 일하는 자동적인 법이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사랑의 법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일입니다"(약 2:8). 신약성서의 전체적인 규범원리는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제일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그리스도의 법은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기 위한 첫 단계이다. 그리스도의 법의 본질은 살펴 본 바와 같이 사랑을 그 요소로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고린도 인에게 보낸 편지 중, "사랑의 계명"(고전 13:3-7)에 나타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의 구체적인 실천은,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에 다 들어있습니다"(갈 5:14)라고 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최고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의무를 다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남에게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도 역시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롬 13:8). 바울 사도의 사랑의 법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계명'과 일치하나, 그러나 사도에게는 하나님께 향하는 사랑은 하나도 없고 오직 이웃 사랑만 남아 있다. 이것은 아마도 진정한 사랑의 법은 법을 주시는 자 하나님의 동력적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의 법을 실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정의, 힘,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리스도의 법-사랑의 법'으로 하나님의 속성인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요청 받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참된 것이라면 악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 다 햇빛을 주시고,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나 배은 하는 자에게 다 비를 주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같이 우리도 친구든 원수이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우리의 순전한 심정에서 사랑이 생겨 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반을 떠나서 바울의 신앙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는 '그리스도의 법'과 '그리스도의 정신'의 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법은 예수의 교훈이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데 참된 방법론이며 또한 예수 자신이 친히 본이 되어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였다.
고로 그리스도의 법은 바로 하나님의 법안에 성취됨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도에게 있어 모세의 율법은 불필요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참조. 롬 7:5-6, 10:4; 갈 2:16, 3;23; 히 10:1, 1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 예수의 새 계명, 즉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율법과의 연속성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다 확실히 입증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원칙들의 외적 표현이라 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 대한 길과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정신'인 성령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게 하며(고전 2:10-14), 각각 윤리적 판단을 갖추도록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법은 조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철저한 율법주의자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역사로 인하여 복음의 사도 된 바울의 신학사상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독특한 윤리관은 그리스도의 법과 사랑이 하나님의 법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울 신학의 윤리적 특성이다. 그의 윤리관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바울 신학이 정립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철두철미한 윤리적 실천신학 사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롬 13:8).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신 것은 우리가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올바른 관계를 찾아 주신 것이다. 다만 하나의 의무를 주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이웃이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에 사랑과 정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우리 이웃의 고통 받는 모든 일을 참을 수 없는 불의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계명만 지키면 이제 율법은 완성된다고 하였다. 율법이 완성되었으니까 율법은 없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율법은 완성되었지만 우리에게 아직 율법의 효력은 남아 있는 것이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은 없게 된다"(롬 4:15)고 하였지만, 율법이란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정의로운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율법은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불법을 행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제정된 것입니다"(딤전 1:9). 하나님의 의에 반대되는 행위에 대한 징벌의 수단, 즉 죄에 대한 경고이자 이에 대한 징계의 수단으로 율법을 준 것이다.
Ⅴ. 결론
1. 요약 및 평가
사도 바울의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 온지 2000년이 되도록 양자의 관계는 확정되지 않고 지금도 무릇 교회에서는 율법과 복음이 어떠한 관계에 서 있는지도 모르고 오늘은 율법, 내일은 복음, 하는 식으로 서로 적당한 관계에서 어우러져 선포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개신교회의 신학자로 인정받고 주장되는 것은 그의 서신,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주장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소위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루터가 이 교리를 받아들여 종교개혁의 '모티프'(motif)로 삼기까지 로마교회는 선행의 공로에 의한 교리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에 반대하여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오늘의 개신교회의 교리적 초석을 깔았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출발점 때문에 바울의 신학 사상에 있어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거의 모든 개신교회 교리의 출발점으로 자리하였다.
바울에 있어서 칭의의 교리는 율법에서 구할 수 없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이 구원의 길에 들어선다고 하였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구원의 정복(淨福)을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판단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구원의 서정, 즉 구원의 순서에 의한 구원의 길이 아니고 사도가 가르친 것은 구원사의 관점이었다. 즉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믿음의 길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였다는 사실에 바울 신학의 주안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칭의의 교리는 사도의 철저한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살아있는 믿음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끝났다.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이해하는 첩경이다. 율법은 언약백성들의 의식과 신정통치, 그리고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 생활규범으로서의 소년 감시자의 역할을 해 왔다. 예루살렘회의에서도 율법의 구원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그렇기 위해서 할례와 의식법 그리고 예수의 믿음에 모세의 율법까지 강조되는(행 15장)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저들의 얼굴에 모세의 베일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고후 3:13-14)이라고 지탄하였다. 육신은 죄 때문에 연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육신의 죄에 정죄 하신 후 자기의 백성들이 육을 좇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키게 하였다. 영을 따라 사는 신령한 자들은 율법을 영의 능력으로 지키므로 율법의 요구, 즉 율법적 의로움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 됨이 없다(롬 8:1). 왜냐하면 율법을 범한 자들을 정죄 하는 모든 정죄 곧 모든 죄가 다 그리스도의 육신에서 정죄 되고 심판되어 율법의 요구, 즉 그 '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사망에로 이끄는 법에서 우리들을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롬 8:2).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영을 따라 살기 때문에 그 영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키게 되어 율법을 온전히 지키게 된다(롬 8:1-4).
이제 사도는 율법의 성취 이후에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그것은 사랑의 법, 곧 성령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원리는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랑을 실체화하고 구체화한다. 그리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대강령으로 규정하였다(마 22:36-40; 막 12:30-31; 눅 10:27-28). 그리스도인들은 따라서 이웃에 사랑하여야 할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롬 13:8). 이 사랑을 다 갚는 자는 모든 율법을 다 이룬 자라고 하였다. 따라서 율법의 완전한 성취는 바로 이웃사랑에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법"(갈 6:2)을 성취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크리스챤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영역에서 다른 법과 다르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같은 나라 사람에게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이 의무의 범위를 온 세상 끝까지 넓히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가 원수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우리의 참다운 이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법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사도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과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 율법의 완성을 최후의 심판과 일관성 있게 연결시키고 있다. 사도가 말하는 율법의 완성이란, 율법의 각 조항을 낱낱이 다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율법의 참된 목적과 정신이 만족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율법의 완성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자에게는 율법의 종말론적인 정죄 선언이 있게 된다. 바울에 있어서 종말론적 정죄란 마지막의 심판은 행위에 근거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의 완성이 결코 인간의 노력에 의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다스림에 순복하는 삶의 결과이다. 이 성령의 삶은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다. 결과적으로 율법의 완성이란 믿음의 결과이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은 마지막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우리의 결론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와 만나게 된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율법은 복음을 예비하는 첫 단계였으며 복음이 온 후에는 파괴세력으로서의 율법의 지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이제는 복음에 의한 구원의 드라마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구원은 선행의 공로, 즉 율법준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선물은 대가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율법은 애초부터 구원의 길이 아니라 생활규범으로 작동하였던 것이다.
언약의 백성에게 율법준수를 구원의 길로 강요한 것은 기독교의 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이단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다. 구원의 방편으로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 그리고 성령의 오심으로 그 기능은 종결되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2). 율법은 사죄나 은혜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다. 율법은 완벽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되지만, 복음은 죄인 중의 괴수일지라도 아름다운 약속만을 받는다(딤전 5:15).
예수 그리스도가 나사렛 회당에서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나는 어떤 새로운 율법을 강요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려고 왔다"(눅 4:16-21)고 함으로써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정의하였다.
2. 제언
이제 우리는 성서가 가르치는 사랑 실천의 강령에 따라 이웃의 짐을 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의 가난한 이웃은 진정한 우리의 이웃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이웃되게 하여야 한다.
성서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그 이웃을 정확히 적시해 주는 것은 없다. 다만 가난한 자, 불우한 자, 과부 등 생활이 어려운 자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성서에서 암시하는 '네 이웃'이 아닌 자를 살펴본다.
1) 우리가 가난한 자를 가난할 수밖에 없는 자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아니다.
2) 우리가 가진 부와 능력의 척도로 가지지 못한 자를 비평하고 가진 것을 자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아니다.
3)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 가치관을 가지고 가난한자의 무기력을 탓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웃이 아니다.
4) 가난한 가정에서 학대받고 가출하는 자들을 보면서 무관심 하는 것은 이미 그들의 이웃이 아니다.
5) 가난한 가정의 자녀가 비행을 저지른다고 하여 우리의 자녀와 분리시킬 때 이미 우리는 저들의 이웃이 아니다.
예수에 있어서 가난했던 요셉과 마리아가 진정 그의 이웃이었고,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삭개오가, 문둥이, 돌팔매 맞는 여인이, 모두 그의 이웃이었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아무도 거들어 주는 사람 없이 죽어 가는 자, 고통받고 있어도 관심하지 아니하는 자, 이들 모두가 성서의 이웃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자 예수의 제자이다. 바로 이러한 자가 우리의 진정한 이웃으로 돌아 올 때, 그리스도의 법은 성취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는 돈이 없는 자에게 더욱 더 심화된 물질적 고통을 야기 시켜 놓았다. 그들은 절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희망을 간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독일의 초기 파시즘시대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다." 그 희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열쇠는 동력적 사랑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 부활 이후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 공동체의 재원은 희사(喜捨)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자발성과 임의성에 기초하였다. 여기서 사회적 차별은 폐지되었고 공동체 안에는 더 이상의 가난은 없어졌다(행 4:34).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호를 위하여 공동체의 재산은 수시로 처분되었다. 이러한 관행은 바울 사도의 공동체 가운데서 시작되었으며, 거기서부터 유래되어 지속될 수 있었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에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헌금을 모금하였다(롬 15:25-26; 고전 16:1-2; 고후 8:1-2).
여기서 바울이 모금한 헌금은 오직 극빈자들에 대한 상호 연대를 실천하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의 가난을 도와주면서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온정을 베풀었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공동체의 급속한 성장과 전진적인 계획의 결여로 인하여 공동체는 분배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애초에 복음은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선교에서 가난한 자를 제외한 것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거부이며 죄악이다. 우리는 복음을 다시금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역사적 교회에서 가난한 자의 복음은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질되어왔다. 복음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한다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이 순종은 가난한 자와의 상호연대를 실천함으로써 입증되어야 한다.
돈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한 인간의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곳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4).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돈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에 대한 승리이다. 그런데 승리가 가능한 것은 돈이 이미 정복된 권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정복되었다. 바울이 말한 바는 인간은 부에 의해서 또는 가난에 의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위해서 바울은 기도하지 않았고 곧바로 실천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연합함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상황이다.
재물을 무상하게 보는 두 번째 관점은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잠 11:4). 그러나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하나님의 분노는 돈을 주고도 가라앉힐 수 없으며 사탄의 횡포도 돈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가난은 스스로 극복하기 힘든 것이다. 부자와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와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더 낫게 행동한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십계명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지만 그는 도둑질의 유혹을 언제나 지고 살아간다. 가난한 자는 남의 재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도둑질한다. 그는 가난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려 하나님의 이름을 빼앗고 결국 하나님에게 거듭 죄를 짓는다. 돈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과 생활을 영위시켜 준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현실적으로 돈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부와 가난의 편재는 양자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무대 안에서 인간을 붙잡아 주시며 그가 처한 시대의 문제들 속에서 그 시대의 방편들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다. "나는 심었고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전 3:6)는 말도 현재의 우리의 상황을 동일하게 적용시키기에는 어렵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해 줄 것이라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가난한 자는 말씀의 복음보다 물질의 복음을 원한다.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지만,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다(잠 14: 20-21). 우리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할 것인가? 우리의 형제를 빈곤에서 구하는 일, 즉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하는 일은 남의 짐을 지는 것으로서 이것은 '남은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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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초록
본 논문의 목적은 바울신학에 있어서의 '율법과 복음'에 관한 내용을 하나님의 정의에 입각한 사도 바울의 '의인론'과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법, 즉 '그리스도의 법'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법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독교 사회정의 실현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함에 앞서서, 신학적 판단은 사회정의 실현의 안내자일 뿐, 법적 강제력을 동원하는 데는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실정법이 현실사회를 통제하는 궁극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치와 반가치의 극복으로서의 신학은 가치와 현실과의 대립이며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곳에서 출발하여 순간마다 새롭게 출발되어 사회정의의 구심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본 논문의 주제어가 되는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법과 무엇이 다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법은 크리스챤이 그의 삶의 정황에 맞는 어떤 규율을 정해주는 하나의 법전이다. 예를 들어 재산권 분쟁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눅 12:14)라고 예수는 말했다. 그리스도의 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산상수훈에서조차 우리는 행위에 관한 잘 정리된 어떤 규율의 법전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행동할 때 어떤 정신으로 행해야 할 것을 현저하게 예시하여 주는 내용을 보여 줄 뿐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결의론자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도덕적 규칙의 법전으로 환언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관한 규칙과 같은 법전에서 예수는 사도 바울과 같이 오직 위험만을 발견하였다. 그리스도의 법은 오히려 사소한 규칙을 넘어 위대한 이상과 근본적인 원리를 바라보도록 인도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전망이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다른 법과 같이 인간의 행위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다룬다. 마태 복음 5장 후반부와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고 말하는 산상수훈에서 이 사실은 명백해진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온 것이다. 즉 단순히 외형적인 행동으로 명령된 것이 그리스도의 법에서는 내적인 태도의 일이다. 간음의 행위가 아니라 음탕한 생각에 대해서 예수는 주위를 환기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은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은 실상 몹시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자신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외적 행동을 바꾸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법은 크리스천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영역에서 다른 법과 다르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갖고 우리의 도덕적 책임을 같은 나라 사람에게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이 의무의 범위를 온 세상 끝까지 넓히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가 원수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우리의 참다운 이웃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법은 단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는 사도의 가르침이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법에 대하여 여러 다른 태도를 보여 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법으로써 "행동을 직접 제약할 수 있다"고 하여 필요하다면, 사법적 수단이나 징계의 수단에 의하여 강제로 실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유대인 랍비들은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필요한 규율의 간단 명료한 수단을 이런 실천에 만들어 내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의론의 위험성과는 상관없이 기독교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법을 강제로 실행할 아무런 제약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가지고 아무에게도 그것을 강행시킬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아무도 개인의 결단의 자유를 말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형적 징계 수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강제로 실행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에 대한 반대는 기독교가 지금까지 지켜온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극단은 그리스도의 법은 실천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일상생활의 세계 안에서 인간을 인도할 실천적 지침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일종의 하늘의 패턴이므로 인간은 이것에 의해서 자기의 죄를 보게되고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삶의 정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법은 크리스챤의 삶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침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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