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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

루터와 캘빈의 사상

by 이덕휴-dhleepaul 2017. 12. 19.



사상사 개설

루터와 캘빈의 사상

종교개혁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양태를 취하고 권위에 대한 보편적 저항, 독립을 위한 선전포고들의 특징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사상의 영역에서 다양한 탐색과 이론을 발생시켰다는 점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낡은 문제는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종교적 관용의 한계에 대한 문제를 둘러싼 새로운 해결책에 대한 논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쨌든 논쟁 과정 속에서 명확해진 것은, 중세 기독교의 이념이 흔들리게 되고 세속과 신성의 사회라는 두 사회가 자연히 분리되고 적대적인 실체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여러 가지 형태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교도뿐만 아니라 도덕율 폐기론자도 외부의 제약으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신념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혼동 속에서 급진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전체적인 사회, 경제질서에 도전하였으며, 하늘과 땅을 재조직하기 위한 웅대한 계획들을 제기하였다.

독일의 신학자라기보다는 도덕론자이며 개혁론자인 마틴 루터는 기독교가 붕괴함으로써 나타난 문제들에 직면해야 했던 첫 번째 인물이었다. 교황권과 제국에 적대적인 입장에 있으면서 많은 용기를 가졌던 그는 매우 위험시된 인물 중의 하나였다. 루터 사상의 근본은 "우리들은 오로지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신앙의 내면성에 따른 인식론이고 외적인 교회제도나 의식에 구애받지 않는 '만인사제주의'라는 신앙에 있어서의 평등성이 주장되고 또한 가톨릭 교회의 전승주의에 대한 성서주의, 즉 신앙의 근원으로서 신의 말인 성서의 존중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교회제도에 대한 정면에서의 비판, 반대의 결과 가톨릭적인 금욕주의 도덕에 근거한 수도원 제도가 부정되고 사회적, 역사적인 세속적 생활, 특히 직업이 중시되었다.

그의 생존과 안전은 로마 원로원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일 국민의 지지와 외국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제국의 왕위를 계승한 챨스 5세에 대항하는 제국의 제후들의 지원의 가능성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정치는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과 군주적인 성격을 모두 지녔다. 그는 독일어로 독일 민족의 기독교 귀족에 호소하였으며, 그 주장은 라틴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왕자의 권위를 찬양하고 모든 신하들의 복종을 주장하였다.

그는 신성하건 세속적이건 국가를 최상의 권위로 찬미하였으며, 3세기 후에 헤겔과 트라이츄케(Treitschke)의 이론을 수용하도록 게르만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절대주의는 어느 정도의 상대성을 수용해야만 했다. 그는 자신이 찬양한 신성한 특권을 지닌 군주가 스페인의 챨스 5세처럼 국민을 박해하는 가톨릭교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따라서 루터는 지배자의 권위와 국민의 복종에 어느 정도의 한계를 설정해야만 했다. 그는 수동적인 복종의 규칙에 대한 예외규정을 만드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알았다. 마침내 그는 만약 군주가 신성한 법률을 파괴한다면 국민들의 복종을 요구할 권리를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인정은 신성한 법률이 직접적인 개인의 계시의 문제라고 생각한 그 당시의 도덕율 폐기론자들에게는 납득할 만한 사실이었다. 종교적ㆍ도덕적인 모든 제약에 대한 반항 속에서 그들은 독일의 대부분 지역을 혼란으로 몰고 갔다. 파멸로부터 국가를 구하고 희망없는 불신임으로부터 종교조직을 구하기 위하여 루터는 프로테스탄트 왕의 권위가 무제한적이어야 하며 모든 경건한 프로테스탄트 왕은 농민의 봉기를 억눌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의 훌륭한 동료인 필립 멜란히톤(Philip Melanchton ; 1497~1560)은 그의 지도자보다 품위있고 비타협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생각하였다. 그는 루터보다 사려깊은 학자였으며, 더욱 철학적인 정신을 지녔다. 더구나 그는 그 당시의 실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요청을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는 정의감이 있는 프로테스탄트적 아퀴나스라고 일컬어졌다. 스콜라 철학과 시민법,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신약성서의 윤리 등 광범위한 지식에 의지하여 그는 새로운 교회의 조건에 적용할 수 있는 일관된 사회체계를 형성하기 위한 진지한 시도를 하였다.

이 체계의 기초는 기본적으로는 법의 지배, 즉 신의 의지의 계시인 신의 법의 지배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자연법, 즉 신의 감추어진 법은 모든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궁극적인 권위주의적, 이중적 율법체계에 따라서 멜란히톤은 정부제도를 변호하고 지배를 위한 왕의 권위를 합리화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관료의 주요 목표가 평화의 유지와 진정한 종교가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확립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고, 국가가 신성하게 약속된 기능을 수행하는 한 모든 국민들은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만약 국가가 의무를 과도하게 혹은 미약하게 수행하거나 아니면 신의 율법을 깨뜨린다면 무엇이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논의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그는 루터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즉 결국에 가서는 기독교는 인간보다 신에 복종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저항의 의무와 권리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어떤 개혁론자도 반항자의 처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울리히 쯔빙글리(Ulich Zwingli ; 1484~1531)는 루터나 멜란히톤보다 결코 뒤떨어진 개혁자는 아니었다. 쮸리히에서 그가 47세 되던 해, 전쟁에 참전하여 죽음으로써 그의 주요 활동은 끝이 났다. 8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가 정통적인 신학의 길에서 정치의 미로로 헤매고는 있지만, 이 저서들은 그가 기독교의 중세적 이념, 즉 전 공동체가 함께 결합된 단일한 사회-정신적인 측면에서 교회, 일시적인 면에서 국가-의 이념으로 복귀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 범위에 있어서 기독교세계를 포함하는 신성 로마 제국이 아니라 쯔빙글리가 성직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를 결합시키도록 한 쮸리히라는 도시였다. 이 작은 기독교 개혁도시의 한계 속에서 쯔빙글리는 절대적인 보편적 권위에 대한 요구와 대중들의 수동적인 복종의 의무를 함께 요구하였다.

잠시동안 쯔빙글리니즘은 제네바에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종교의 자율성과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는 쯔빙글리의 주장은 사보이 공작과 다른 적들에 대항하여 자유를 지키고자 투쟁하였던 시민들에게 많은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니즘은 곧 군사적인 독립의 수단으로서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유형의 개혁적인 종교로 대체되었다. 1536년 프랑스에서 박해를 피해 피신해 온 캘빈(Jean Calvin ; 1509~1564)은 156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였다. 캘빈의 근본사상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서를 최고의 권위로 하는 성서주의였다.

그의 교의의 최대의 특색은 '심령예정설'이다. 신은 그의 영광을 구현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결의에 의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의 생명을 예정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영원의 사멸을 예정하셨다. 신의 선택은 사람의 바람이나 행동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고 신에의 복종만이 참다운 자유라고 설교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자주적, 능동적 행위를 묵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민중에게는 이 신의 절대적 지배를 확신하는 것이 바로 정신과 사회생활에서의 자유나 해방을 획득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신의 영광을 위해서 신의 도구가 되어 그 부르심인 직업노동에 무한히 각고, 전념하는 열렬한 신봉자가 되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것이 중산층의 사회적 향상의 실천적, 윤리적 동력이 된 것이다.

『기독교 요강』(1536)의 끝부분에서 나타나듯이 매우 놀랄만한 정확성을 가지고 출발하였던 캘빈주의의 정치적 원칙은 신학적이며 공화주의적이었다. 그 기초는 신의 의지의 보편적 통치권이다. 일시적 권위에 대한 정신적 권위의 우월성은 교황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Ⅷ)의 유명한 교서 Unam sanctan에서 주장되었던 것보다 훨씬 강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정부는 교회의 기구로서 여전히 필요하였고, 그것은 성직제도와 같은 독자적 영역을 가지는 것이었다. 정부의 기능은 교회의 원로들의 결정을 강제하고, 개혁종교의 명분을 유지하고, 국내ㆍ외의 평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장로회와 같이 그 형태는 공화국이어야 하며 귀족으로 구성된다. 선량에 대한 서민의 의무는 수동적인 복종이다.

그러나 캘빈이 분명히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논의 끝에서 치명적인 예외사항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만약 세속적 권위가 정신적 지배자에 대한 의무를 망각한다면 그 이탈과 반항을 어떻게 하겠는가?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캘빈은 저항해야 한다고 보았다. 첫째, 만약 폭군적인 성격을 띤다면 정부관리에 의해 법적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둘째, 사악한 성격을 가졌다면 전 공동체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보았다.

무엇이 사악함을 형성하는가 라는 질문은 개인적인 판단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모든 저항을 허용할 만큼 큰 권위의 균열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국가건 가톨릭 국가건 신념있는 캘빈교도들은 사악함을 반항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캘비니즘은 저항자들의 교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4반세기(1520~45) 동안 종교개혁은 다양한 형태-루터교, 쯔빙글리교, 캘빈교, 영국국교-로 전개되어 나갔다. 중세 후기에 교회를 부패시켰던 악습을 바로 잡지 못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 세계의 양심을 잃어버렸다. 루터의 생의 말엽에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에서도 가톨릭은 사라져갈 것처럼 보였다. 위협받은 기존의 교회들은 이에 대해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특히 예수교(1534)와 같은 종교교단은 새로운 이교도와 싸우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신자들의 독서를 규제하기 위하여 금서목록이 제정되었으며 이탈자의 방지를 위해 심문이 시작되었다. 교회의 규칙들이 새로운 종파에 대항하기 위하여 트렌트 평의회(1563)에 의해 상세히 만들어졌다.

가톨릭의 부흥은 시작되었으며, 16세기가 끝나기 전에 기독교세계의 반이 세력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개혁가들은 정복자들에게 끈질기게 저항하였으며, 거의 90년(1559-1648) 동안 유럽은 초기의 갈등상황에서 볼 수 없었던 살벌한 광적인 종교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네덜란드에서(1567~73) 알바(Alva)의 박해, 프랑스에서 성 바돌로매의 축일(St. Bartholomew's Day)의 대학살, 특히 독일에서 매우 오래 지속된 30년 전쟁의 잔학성은 종교적 광기를 억누를 수 있는 국가의 통치를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 관용의 원칙과 국제법 제도의 제정과 같은 정치이론을 제고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전되어온 첫 번째 원칙은 폭군-종교에 대한 저항을 지지하지 않았던 지배자-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필립 2세, 영국의 마리(Mary), 프랑스의 챨스 8세, 프랑스의 헨리 3세, 오렌지의 윌리암과 같은 군주들의 가톨릭 국민들에 의해 시급히 요청된 원칙이었다. 이것은 가톨릭, 기독교의 양측의 수많은 사상가에 의해 발전되었다. 가장 효력있는 캘빈주의 성명서 중의 하나는 'Vindiciae contra tyrannos'인데, 이것은 구약성서에 좇아서 로마법, 봉건지배원칙, 정치적 의무의 원천으로서의 계약이론을 발전시켰다. 또한 주권은 국민들로부터 나오며 행정집행인으로서 왕은 폭군이건 사악한 이유 때문이건 계약을 위반하면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가톨릭에 있어서 저항권리 이론의 주요 주창자는 예수회였다. 가톨릭의 많은 구학파를 위협하면서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정치를 버리고 국가가 악마가 아니며 교회의 신성한 권위에 도전할 수도 있는 순수한 인간제도로서 취급하였다. 예수회의 가장 위대한 정치평론가는 주안 드 마리아나(Juan de Mariana)인데, 그는 그의 저서 『공영단체와 공공제도』(1559)에서 반세기 후에 홉스가 그의 저서 『리바이던』에서 지적한 것과 매우 유사하게 정치철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적 권력의 찬양이 아니라 교회 권위의 찬양을 담고 있었다. 그는 서로가 적대하는 사악한 인간이 몰락한 후의 자연상태의 국가를 그리고 있다. 원시적인 혼동의 상태로부터 계약에 의해 사회가 출현하고 새롭게 구성된 대중들에 의해 지배자가 선출되며, 지배자는 그의 약속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 권위만을 행사한다고 보았다. 만약 폭군이건(즉 제도의 파괴), 사악하건(즉 진리에 대한 신념으로부터 멀어지는) 간에 협정을 위반했을 때는 공개적인 형식적 절차에 의해, 혹은 이것이 실패했을 때에는 암살에 의해서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전쟁의 공포스런 분위기를 이루었던 것 중의 하나는 바로 가톨릭과 캘비니즘에 의한 암살의 승인이었다. 새로운 믿음과 낡은 믿음 사이의 갈등이 벌어졌던 모든 나라의 지배자들은 신은 폭군을 제거한다는 영적인 믿음으로 확신에 찬 광신자의 손에 갑작스런 죽음을 당할 위험스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네덜란드의 윌리암은 1584년 발터서 게라드(Balthasar Gerad)의 총 앞에 쓰러지기 전에 다섯 번의 위기를 넘기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는 부를라히의 경계 덕분에 자신을 죽이려는 15번의 시도가 좌절되었다고 프랑스 대사에게 고백했다. 프랑스의 헨리 4세는 1610년에 독실한 신자 라바일락(Ravaillac)의 20번째 칼 앞에 쓰러지기 전에 19번의 피격을 당하였다.

16세기 후반 정치이론에서 폭군 살해와 저항주의는 시민전쟁의 확산과 암살 기도와 결부되어 있는데, 이것은 정치인이나 애국적 사상가들로 하여금 광기가 억제되고 질서가 회복될 수 있는 수단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실무자들은 종교적 타협의 방식과 강력한 군주제 통치 방식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론가들은 유용한 관용의 원칙과 군주의 권위를 위한 타당한 논의들을 찾도록 노력해야만 하였다. 여기서는 종교적 투쟁이 유럽에서 진정되고 질서가 회복된-프랑스의 낭트칙령(1598)과 리켈리우(Richelieu)의 강력한 통치(1624~42)-그러한 과정의 역사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겠다. 사회가 정상적인 상태로 진행되고 사회의 안정이 확보될 수 있는 길을 열었던 사색적 저술에 관심을 돌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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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루터와 캘빈의 사상 (사상사개설, 1996. 4. 1., 사회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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