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시몬느 베이유, 로자 룩셈부르크, 에디트 슈타인과 더불어 유대인 4대 여성사상가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대학 시절 사유 영역의 지배권을 거머쥔 ‘숨겨진 철학의 제왕’ 또는 ‘메스키르히에서 온 마법사’로 불리운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배웠으며, 둘은 연인 관계였다는 것이 공공연한 정설이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죽었으며, 하이데거가 나치의 동조한 부역자라고 낙인이 찍혀도 암묵적으로 묵인하면서 50년 동안 인간적, 학문적으로 교유했다. 또 한 사람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이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에서 “존경과 우정으로 에드문트 후설에게 바친다.”라는 헌사를 쓸 정도로 후설을 학문적으로 존경했으며 아렌트를 소개해서 공부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박사학위논문의 지도교수 였던 카를 야스퍼스가 있다. 야스퍼스 역시 하이데거의 소개가 있었다고 하며, 박사학위의 논문의 주요 대상인 아우구스티누스에 천착한 것도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지대한 영향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제들인 탄생성, 사려깊음, 구원받은 의지, 세계안에 사는 법 등을 전쟁, 관료제, 문화적 순응성, 악의 평범성으로 환치하여 표면적으로 훨씬 더 정치적인 저술속에 포함시켰다. 아렌트는 세 지성에게 받은 학문적 자양분으로 현란한 지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마르크스에 버금가는 거목으로 성장하였다. 그런 배경때문인지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두 스승과는 평생 끈을 놓지 않았다. 아래 연대기는 한나 아렌트의 성장배경과 저작들을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이다.가끔 들여다 보면서 한나 아렌트의 학문의 대양에 한 점으로도 보이지 않는 쪽배를 드리우곤 한다.(2017.05.16) 1906년 10월 4일 독일 하노버 린덴에서 아버지 폴 아렌트와 어머니 마르타 콘의 무남독녀로 출생 어린시절 한나 아렌트와 어머니 마르타 유아시절 할아버지 막스 아렌트와 함께 1919년 아렌트는 어머니와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각종 시위에 참석했다. *1919년 일어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등의 실패한 혁명은 어린 아렌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이후의 정치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1910년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 아버지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했다. 1913년 3월 할아버지 막스 아렌트가, 10월에는 아버지 파울 아렌트가 영면하셨다. 1920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과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en Vernunft )」를 완독하다. 어머니 마르타가 마틴 비어발트와 재혼했다. 재혼 이후에도 어머니는 사회민주의자들과 교제를 했으며 아렌트도 이들과 토론을 나누었으며, 이때 평생 친구의 우정을 나누었던 안네 멘델스존을 만났다. 1922년 카를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 Psychologie der Weltanschauungen )」독파하다. 1924년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하던 아렌트는 독일의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아비투르(Abitur)를 통과하였다. 이후 마르부르크대학교 입학하여 하이데거에게 수학했다. * 한나 아렌트는 35세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매혹되었다. 아렌트는 <80세의 마르틴 하이데거>라는 회고 논문에서 지성사에서 하이데거라는 존재가 갖는 광휘와 실재에 매혹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때 하이데거는 나중에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으로 출간될 내용을 강의하고 있었다. 1925년 봄에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상황이 작용하여 아렌트는 그해 여름에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기 위해 하이델베르크대학교로 옮겨갔다. 1926년 하이데거의 주선으로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전교하여 [철학 3부작]을 준비중이던 철학과장 카를 야스퍼스에게 박사학위 지도를 받았다. 이때부터 평생동안 스승인 야스퍼스와 교류한다.(아렌트와 야스퍼스의 서간집.1992) 21세의 젊은 아렌트
1929년 야스퍼스의 지도로 박사논문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사랑개념(Der)Liebesbegriff bei Augustin /Love and St. Augustine]이 통과 되었다. 아렌트가 평생 아우구스티누스에 매료된 것은 20세기 철학의 두 거장인 하이데거의 영향이 컸으며, 야스퍼스에게서 한층 강화되었다.베를린에서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9월에 마르크부르크 대학교동기인 귄터 스테른과 부모와 친구 2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 귄터 스테른 (1902.7.12 ~ 1992.12.17) 발터 벤야민과 사촌. 필명 귄터 안더스, 미디어사상가. 저서 :<어제의 사랑 Lieben gestern>(1947~1949) <인간의 골동품성 Die Antiquiertheit des Menschen>(1956),〈팬텀과 매트릭스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Phantom und Matrize〉(1956) . 국내에 번역서는 없고 진중권의 [미디어 이론(2016)]등 국내의 저명한 매체이론관련 저서에 다수 인용되고 있다. "현대인은 태어나는 순간 골동품이 되는 낡아빠진 존재다."라는 말이 유명하다. 첫 남편 스테른과 아렌트 1930년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프로테스탄티즘」을 기고하다. 1932년 [독일의 유대인 역사](Geschichte der Juden in Deutschland)라는 잡지에 <계몽주의와 유대인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다. 아렌트는 이 논문에서 보편적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의 태도에 대항하여 개개인과 민족에 필요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헤르더의 입장을 지지했다. 1933년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귀가하던 중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다행스럽게 별다른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8일 만에 풀려났다. 그녀는 더 이상 독일에 머무는 것이 위험하다고 느껴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파리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1951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할 때까지 18년 동안 무국적자로 생활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알려진 독일의회 방화사건 때문에 1933년 봄에 파리로 먼저 망명한 남편 슈테른과 재회하다. 1933년 파리 망명 무렵의 아렌트 1934년 슈테른의 소개로 브레히트와 남편의 사촌인 발터 벤야민과 교류했다. 유대난민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돕는 시온주의 단체에서 일자리를 얻어 시온주의 실천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5년 시온주의 단체에 일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처음으로 방문하다. 1936년 6월에 귄터 슈테른이 뉴욕으로 떠나면서 그들의 관계는 사실상 끝이 났다. 아렌트는 두 번째 남편이 되는 하인리히 블뤼허와 발터 벤야민 등과 모임을 만들어 유대인 문제를 활발히 토론했다. 1937년 남편 귄터 스테른과 법적으로 이혼했다.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1938년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머무는 동안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을 다룬 <라헬 파른하겐: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으며 망명지인 파리에서 완성되었다. 1939년 3월에하인리히 블뤼허와 함께 파리에 아파트를 얻어 어머니 마르타 아렌트 비어발트를 모셔와 생활했다. 여름에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블뤼허는 프랑스 군대를 지원하는 사역에 소집이 되었다. 1940년 1월에 하인리히 블뤼허가 전처와 이혼하고 파리에 돌아오자 시 당국의 허기를 받아 결혼을 했다. 하인리히 블뤼허는 1919년 스파르타쿠스 폭동에 가담했던 비유대인 공산주의자이자 독일 공산당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5월네 프랑스 당국의 포고령에 의해 부부는 독일 난민 수용소 구르로 보내졌다. 나치의 파리 점령이 시작되던 6월에 아렌트는 석방 허가증을 받고 거의 같은 시기에 석방된 블뤼허와 재회했다. 아렌트와 블뤼허 부부(1950년 뉴욕) 1941년 1월 남부 프랑스의 마르세유와 스페인을 거쳐 리스본에서 뉴욕행 배를 탔다.3월에 도착하자마자 벤야민의 원고를 아드르노에 전달했다. 브뤼허와 아렌트는 뉴욕에 거처를 마련했으며, 비자가 발급된 어머니 마르타를 모셔왔다. 미국에서 살기 위해 메사추세츠에서 두 달간 어학 연수코스를 밟았다. 유대계 역사학자 살로 바론의 추천으로 『유대인 사회연구』에 「드레퓌스 사건에서 오늘날 프랑스까지」를 기고 했다. 이 논문을 계기로 학술세게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9월에 유대계 독일 난민에게 우호적이었던 독일어 일간지 『아우프바우』의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 아렌트부부는 벤야민이 맡긴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와 다른 원고를 미국의 뉴욕의 사회조사연구소로 가지고 갔다. 그들은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를 뉴욕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서로에게 읽어 주고 주변사람들에게도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아렌트는 죽은 친구를 위해 발터 벤야민의 이니셜을 딴 <W.B.> 이라는 시를 썼다.
1941년 미국 망명 무렵 아렌트와 발트벤야민 1942년 1~2월 나치가 유대인 말살 계획을 실행하려는 사실을 알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나치의 인종청소라는 믿기지 않은 보도를 접하고 [전체주의의 기원]을 구상했다. 1943년 1월 [우리 난민들(We Refugees)]에서 나치에 쫒기던 유대인을 강렬하고 아주 서글프게 묘사했다. 우리 난민들 (1943년 1월) – 한나 아렌트 우선, 우리는 우리를 “난민”이라고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새로 온 사람” 또는 “이주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신문은 “독일어를 쓰는 미국인”을 위한 신문이며, 내가 아는 한에서는, 히틀러가 처형한 사람들, 난민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다. 난민이란 자신의 행위나 정치적 의견 때문에 피난처를 찾아야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글쎄, 우리가 피난처를 찾아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별다른 행위를 한 적도 없고, 대부분은 급진 정치적 견해를 가질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제 “난민”이란 우리처럼 빈털터리로 새로운 나라에 가서 난민협회의 도움을 받을 처지에 놓인 불운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 우리는 난민이라는 명칭에 대해 훨씬 더 민감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이주자라는 점을 입증하려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선택한 나라로 간 사람이라고 선언했으며,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이른바 유태인 문제”라고 일컬어지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맞다. 우리는 “이주자” 혹은 “새로 온 사람들”이었고, 어느 화창한 하루, 살던 곳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적절치 않아서, 혹은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살던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삶을 구축하길 원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삶을 새로 구축하려면 강인하고 낙관적일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우 낙관적이다. 분명 우리의 낙관주의는 존경할 만하다. 우리 스스로에게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마침내 우리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고향을 잃었다. 친숙한 일상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직업을 잃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제법 쓸모가 있다는 확신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잃었다. 자연스러운 반응, 단순한 몸짓, 꾸밈없는 감정 표현을 잃은 것이다. 우리는 폴란드의 게토에 친척들을 버려두고 떠났으며, 가장 친한 친구들을 강제수용소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다. 사생활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출되자마자 (또 우리 대부분은 여러 차례 구출되어야만 했다)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구해준 이들이 들려 준 좋은 충고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르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망각하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우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리 망각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나라가 새로운 고향이 될 것이라는 점을 친근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4주, 미국에서 6주를 보낸 후, 우리는 프랑스인 혹은 미국인 행세를 하려고 했다. 우리들 중에서 좀 더 낙관적인 이들은 예전의 삶 전체가 일종의 무의식 속 유형지로 옮겨갔다고 말을 보태면서, 진정한 고향이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새로운 나라만이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옛 일을 망각하라는 충고를 들을 때 우리가 가끔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옛 이상은 우리의 사회적 기준 자체가 문제될 때면 보통 내버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는다고 한다. 낙관론자들은, 딱 1년만 지나면, 영어를 모국어만큼이나 능숙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2년이 지나면 영어가 가장 능숙한 언어가 될 것이라고 엄숙하게 맹세한다. 독일어는 거의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언어가 될 것이다. 우리는 더 효율적으로 망각하기 위해,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경험했던 강제수용소 혹은 억류수용소를 암시하는 것은 전부 다 피하는 편이다. 새로운 조국에서는 아마 비관론 혹은 자신감의 결여로 해석될 것이다. 그뿐인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들어 왔던가. 지옥은 이제 종교적 믿음이나 환상이 아니라 집, 바위, 그리고 나무만큼이나 현실적이다. 현재의 역사가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이 새로운 인간은 적들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친구들에 의해 억류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조차 이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신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우리만의 고유한 방법을 찾아냈다. 사람들은 모두 계획을 세우고 소망을 갖고 희망을 갖는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인간 일반적 태도를 논외로 하면, 우리에게는 보다 과학적인 방식으로 미래를 처리한다. 그만큼이나 큰 불운을 겪었기에 권총만큼이나 확실한 길을 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불확실성을 남겨둔 채 지상을 떠나 천상으로 눈길을 돌린다. 히틀러가 언제 패배할 것인지, 우리가 언제 미국 시민이 될 것인지를 알려 주는 것은, 신문보다는 별들이다. 우리는 별들이 우리의 친구들을 다 합한 것보다도 더 믿을 만한 조언자라고 생각한다. 후원자와 언제 점심을 먹으면 좋을지, 그리고 우리의 현재 삶을 따라다니는 무수히 많은 설문지들 중 하나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오는 날이 언제일지, 우리는 별들로부터 그 답을 배운다. 우리는 때때로 별들조차 믿지 못하고 차라리 손금 혹은 필적에 나타난 징표들에 의존하곤 한다. 정신분석학은 유행이 지났지만, 정치적 사건들보다는 우리의 소중한 자아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이다. 상류층 숙녀와 신사들이 지루함을 달래려 어린 시절에 저지른 정겨운 잘못을 이야기하던, 좀 더 행복했던 시절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귀신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살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실제의 경험인 것이다. 이제는 과거에 매료될 필요가 더 이상 없다. 과거는 현실에 충분히 신들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공공연히 말하는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의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마술적 기법들을 총동원한다. 밤마다 어떤 기억과 어떤 생각들이 우리들의 꿈속에 자리를 잡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차마 그 점을 물을 수가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낙관론자에 가까웠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따금씩, 우리가 최소한 밤에는 죽은 이들을 생각하거나 한 때 사랑했던 시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지 상상하곤 한다. 나는 심지어 서부 해안에 있는 우리 친구들이 우리는 야간 통금 시간에 “시민 후보”인 것만이 아니라 “적군 이방인”인 것은 아닌지 믿게 할 만큼 이상스러운 생각들을 가졌어야만 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낮에는, 물론, 우리는 “기술적으로는” 적군 이방인이다. 모든 난민들은 이 점을 안다. 하지만 그런 기술적 이유 때문에 어두운 시간에 집을 나서는 것이 금지된다면, 기술성과 현실성의 관계에 대해 어두운 견해를 갖지 않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다. 우리의 낙관론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 우리들 중에는 이상한 낙관론자들도 있다. 낙관적인 말을 매우 많이 한 뒤 집으로 돌아가 가스를 틀거나 짐작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마천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주장하는 활기의 토대에는 위험한 죽음의 예견이 잠복해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삶은 최고의 선이며 죽음은 가장 큰 실망이라는 확신 속에서 길러졌으나, 죽음보다 더한 공포의 목격자이며 희생자가 되었다. 삶보다 더 높은 이상을 발견할 수는 없는 채로. 따라서 죽음이 우리로부터 공포를 빼앗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동력으로 만들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게 되었다. 싸우는 대신, 혹은 맞받아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려 없이, 난민들은 친구 혹은 친척들에게 죽음을 기원하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 누군가가 죽으면 죽음으로 인해 덜게 된 그 모든 고생을 즐겁게 상상하곤 한다. 결국 우리들 중 많은 이는 자신 또한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을 바라면서, 그 기대에 따라 행동하고 삶을 마감한다. 1983년 이래 –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이래 – 우리는 유창한 낙관론이 얼마나 빨리 말을 잃은 비관론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아 왔다. 우리의 상태는 시간이 가면서 더 나빠졌다. 한층 더 낙관적이 되었고 한층 더 자살에 이끌렸던 것이다. 슈슈니크(K. Schuschnigg – 히틀러의 합병에 저항했던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정권 아래 있던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은 그만큼 활기찬 사람들이었다. 모든 공평무사한 관찰자들은 그들을 존경했다. 사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그들의 깊은 확신은 사뭇 놀랍다. 하지만 독일군이 나라를 침공하고 비유태인 이웃들이 유태인 가정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은 자살하기 시작했다. 다른 자살과는 달리, 우리의 친구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어떤 설명, 어떤 고발도 남기지 않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이 최후의 날까지 활기찬 모습으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강요했던 세계에 대해 어떤 비난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편지는 관례적인 것으로 의미 없는 서류들이다. 따라서 장례식 날 읽는 애도사는 짧고 당혹스럽고 매우 희망차다. 동기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에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인기 없는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한층 나쁜 것은, 내 논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현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것으로는 유일한 논변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숫자들. 유태 민족이라는 것의 존재를 맹렬하게 부인하는 유태인들조차 숫자와 관련된 한에서는 상당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범죄자인 유태인은 소수이며 상당수의 유태인이 전시에 훌륭한 애국자로 죽어간다는 점을 입증할 방법이 달리 또 어디에 있겠는가? 유태 민족의 통계적 삶을 구하려는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모든 문명화된 민족 중에서 유태인이 가장 낮은 자살률을 보인다는 점을 안다. 나는 이제 이 수치가 더 이상은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매우 확신하지만, 그 사실을 새로운 숫자로 증명할 수는 없다. 대신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는 증명할 수 있다. 이는, 두개골의 측정치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정확히 알려준다거나, 범죄 통계가 민족 윤리의 수치를 정확히 알려준다는 점을 단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회의적인 영혼들에게조차 충분할 것이다. 어쨌든, 유럽 유태인들은 세계 어떤 곳에서 살건 통계 법칙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다. 자살은 베를린이나 비엔나, 부다페스트나 파리에서처럼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 가운데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같은 곳에서도 발생한다. 다른 한편으로, 게토나 강제수용소 자체에서 발생한 자살에 대해서는 보고가 거의 없다. 사실 폴란드에서는 극소수의 보고만이 있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강제 수용소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구르(Gurs)의 수용소, 내가 시간을 좀 보낼 계기가 있던 그 곳에서, 나는 자살에 대해서는 단 한 번 밖에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집합적 행동 제안이었고, 외견상으로는 프랑스인을 괴롭히려 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우리들 중 일부가 우리는 어떤 경우에든 “터질 듯(pour crever)” 이송되었다는 것을 주지시켰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갑자기 삶에 대한 거친 용기로 돌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의견은, 사건 전체를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불운으로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다면, 비정상적으로 반사회적이며 일반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고, 한 개인의 삶 역시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끝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으로 돌아오자마자, 겉보기에는 개인적인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고, 절망과 종이 한 장 차이인 이 미친 낙관론으로 다시 한 번 전향했다. 우리는 비종교적 유태인으로서는 최초로 처형당했다. 그리고 우리는 극단에서만이 아니라, 자살로서 대답한 최초의 유태인이었다. 어쩌면 인간 자유 최후의, 그리고 지상의 보증서는 자살이라고 가르침을 주었던 철학자들은 옳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 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창조할 자유는 아니지만, 삶을 버리고 세계를 버릴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경건파 유태인들은 분명 이 부정적인 자유를 깨달을 수 없다. 그들은 자살로부터 살인을 감지해 낸다. 즉, 인간이 절대 이뤄낼 수 없는 파괴, 창조주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 “주님께서 주셨고 주님께서 가져가신다”(Adonai nathan veadonai lakach). 그리고 그들은 이 점을 추가할 것이다: “주님의 이름에 은총이 있기를”(baruch shem adonai). 그들에게 자살이란 살인과 마찬가지로 전체로서의 창조에 대한 신성모독적 공격을 뜻한다.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은 삶은 살 가치가 없고 세계는 자신을 은거시킬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살은 삶과 세계에 대해 투항하거나 자신과 함께 우주 전체를 죽이려 드는 미친 반역이 아니다. 그 죽음은 조용하고 소박한 사라짐이다. 그들은 자신 개인의 문제에 대해 자신이 찾을 수 있던 폭력적인 해결책을 사과하려는 듯 보인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정치적 사건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개인적 운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시절이 좋건 나쁘건, 그들은 자신의 인격만을 믿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을 더 살 수 없게 만드는 이상한 단점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특정한 사회적 기준에 맞는 자격을 지녔다고 느껴 왔기 때문에, 이 사회적 기준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면, 스스로의 눈에 실패작으로 비치는 것이다. 그들의 낙관주의는 머리를 물 밖으로 내 놓기 위한 공허한 시도다. 앞으로 내세운 쾌활함 뒤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절망과 투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일종의 이기심 탓에 죽는다. 우리는 구원된다면 모욕감을 느낄 것이며, 도움을 받는다면 품위가 떨어졌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 운명을 지닌 사적 존재를 고수하려는 광인처럼 싸울 것이다. 예전에 박애주의자였던 사람이 많은 우리들로서는, 우리 스스로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는 비참한 부랑자(schnorrer) 무리에 속하게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단 이른바 부랑자는 불운자(shlemihl)가 아니라 유태 운명의 상징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던 때가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는 유태인으로 단결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유태민족 전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로서는 덜 근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보호자들은 이따금 이러한 몰지각함을 강하게 지지해 왔다. 그래서 나는 한 사건을 기억한다. 파리에 사는 큰 자선 모금회 책임자가 독일계 유태인 지식인으로부터, 불가피하게 “Dr”라는 호칭이 쓰인 명함을 받으면서, 목소리를 한껏 높여 “박사님, 박사님, 부랑자양반, 부랑자양반!(Herr Doktor, Herr Doktor, Herr Schnorrer, Herr Schnorrer!)”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렇든 유쾌하지 못한 경험에서 우리가 이끌어낸 결론은 매우 간단하다. 박사(doctor of philosophy)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충분치 못하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일구려면 우선 낡은 것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괜찮은 작은 동화 하나가 우리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버려진 떠돌이 닥스훈트 한 마리가 슬픔에 차서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세인트 버나드였던 때…” 우리의 새 친구들은 너무나 많은 스타와 유명인들에 압도된 나머지, 우리 과거의 영광 전체를 묘사하는 그 뿌리에는, 인간에 대한 진실이 하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배려했던 누군가였을 때, 우리는 친구들의 사랑을 받았고, 집주인은 우리가 집세를 잘 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먹을 음식을 샀고, 제재 받지 않은 채로 지하철을 탔다. 우리는 약간 히스테리컬해졌다. 언론인들이 우리의 존재를 감지해 내고 우유와 빵을 살 때 불화를 일으키는 일을 그만 두어 달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가 누군지, 어떤 여권을 갖고 있는지, 우리의 출생증명서가 어디에서 작성되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히틀러가 싫어하는 사람은 아닌지 알아차리는 사람들을 피하려, 일상의 매 순간 순간을 지독히도 조심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식을 살 때마다 정치적인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는 세계에 들어맞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세인트 버너드는 점점 더 커진다. 나는 어떤 일자리를 맡기로 되어 있었던 한 젊은이가 이런 말을 하며 한숨을 쉬고 말았던 일을 절대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군요. 나는 카르슈타트(베를린에 있는 큰 백화점)의 점장이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구출되기 위해서 여러 위원회들을 수도 없이 찾아가야만 했던 중년 남성의 깊은 절망감 또한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는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몰라요!” 누구도 그를 존엄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유명인사 및 거물 친족들에게 전보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 미친 세계에서는 한 사람의 인간보다는 “위대한 인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훨씬 쉽다는 점을 재빨리 알게 되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을지 결정하는 일이 덜 자유로운 것이 될수록, 우리는 한층 더 노력을 기울여 대범해지거나 사실을 감추거나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우리는 유태인이기 때문에 독일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경계를 거의 넘지 못했기에 “독일인”(boche)으로 변했다. 우리는 심지어 히틀러의 인종 이론에 정말로 반대한다면 이 명칭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우리는 7년 동안 프랑스인-혹은 최소한은 시민 후보-이 되려 노력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될 무렵 우리는 다시금 “독일인”으로 억류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우리 대부분은 정말로 충실한 프랑스인이 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명령을 비판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우리는 억류되어도 괜찮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 최초의 “자발적 죄수”(prisonniers volontaires)였다. 독일인들이 나라를 침공한 후로 프랑스 정부는 회사의 명칭만 바꾸면 되었다. 우리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감금되었지만 유태인이기 때문에 석방되지는 못했다. 전 세계에서 똑같은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유럽에서는 나치가 우리 재산을 몰수했다.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재외독일인 동맹(Bund der Auslandsdeutschen)의 최고 지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재산의 30%를 지불해야 했다. 파리에서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8시 이후로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적군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우리의 정체성은 너무나 빈번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밝혀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행하게도, 유태인을 만난다고 하여 형편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유태인은 라인강 너머에서 오는 모든 유태인은 자신들이 폴란드계(Polaks)라고 불렀고 독일 유태인은 동부 유태인(Ostjuden)이라고 불렀던 존재라고 완벽하게 확신했다. 하지만 정말로 동유럽에서 왔던 유태인들은 그들의 프랑스 형제들(French brethren)과 의견을 달리하며 우리를 야키(Jaecke)라고 불렀다. 이 야키의 아들들-프랑스에서 태어나 적절하게 동화된 2세대-은 프랑스 상류계급 유태인과 의견을 공유했다. 따라서 동일한 가족 내에서도 아버지는 야키라고 부를 수 있고, 아들은 폴란드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의 유태인에게 파국이 닥쳐 온 이래로, 난민이라는 단순한 사실은 지역의 유태인 사회와 섞이는 것을 가로막았고, 일부 예외는 그 규칙을 강화할 뿐이었다. 이렇듯 문서화되지 않은 사회법들은 공적으로 인정된 적은 없으나 여론에 큰 힘을 미친다. 그리고 그런 조용한 의견과 실천은 모든 공식적인 환대 및 선의의 선언 전체보다도 우리의 일상에서 더 중요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관계가 끊어졌을 때 삶은 쉽지 않은 것이 된다. 도덕적 기준은 사회의 결 속에서 지키기가 더 쉽다. 사회적, 정치적, 법적 지위가 완전한 혼란에 빠졌을 때 자신의 고유한 통합성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은 극소수다. 사회적・법적 지위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울 용기가 없었기에, 우리, 우리들 중 그토록 많은 수는, 그 대신 정체성을 바꾸려고 했다. 그리고 이 이상한 행동은 문제를 한층 더 악화시켰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혼란은 일부 우리 자신의 활동에 기인한다. 언젠가 누군가는 독일로부터 이민을 나온 유태인들에 대해 진실이 담긴 이야기를 쓸지도 모르겠다. 그 작업을 하려는 사람은, 항상 150%의 독일인이었고, 독일의 수퍼 애국자였던 베를린의 콘 씨(Mr. Cohn)를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1933년에 콘 씨는 프라하에서 피난처를 찾았고, 순식간에 확신에 찬 체코 애국자가 되었다. 그는 독일 애국자였을 때만큼이나 진실하고 충실한 체코 애국자였다. 시간이 흘러 1937년 무렵 체코 정부는 이미 나치의 압력 아래서, 유태인 난민은 체코 시민 후보로서 아주 강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콘 씨는 당시 비엔나로 향했고, 거기서 적응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오스트리아 애국주의가 필요했다. 독일 침공은 콘 씨를 그 나라로부터 몰아냈다. 그는 별로 좋지 않은 시기에 파리에 도착하는 바람에 정규 거주권을 받지 못했다. 현실이야 어떻건 낙관적 관측을 하는 데 대단한 기술을 습득해 버린 그는 미래의 삶을 프랑스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단순한 행정적 고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우리”의 조상인 웨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 갈리아 아르베르니 부족장으로 카이사르에게 대항하여 갈리아를 총궐기하도록 만든 인물)와 동일시하면서 프랑스 민족에 적응할 준비를 했다. 콘 씨의 모험은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 듯하다. 콘 씨가 그가 자신은 정말로 누구-유태인-인지 마음을 정하지 않는 한은, 그가 계속 겪어야만 할 그 모든 광적인 변화를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자아를 잃기를 원하는 사람은, 과연, 그 창조만큼이나 무한한 인간 실존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인격을 회복하는 것은 세계를 새로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희망도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누구 행세를 하든, 우리는 변화하고자 하는, 유태인이길 바라지 않는, 광적인 욕망만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유태인이 되길 원치 않기 때문에 난민이 되길 원치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최근 몇 년 간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에게는 유태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인 척 한다. 우리는 국가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데, 국가가 없는 세계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성스러운 호텐토트(Hottentot: 남아프리카의 부족)가 될 의사가 있는데, 그것은 단지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다. 우리는 성공하지 못하고, 성공할 수도 없다. 우리의 “낙관주의”의 이면에서는 동화주의자의 절망적 슬픔이 쉽게 발견된다. 독일에서 온 우리들과 더불어 동화라는 말은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기 힘들 것이다. 동화는 우리가 태어나게 된 나라, 그리고 우리가 말하게 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필수적 적응을 의미할 수 없었다. 우리는 원칙상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적응한다. 나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보이는 내 동료 한 사람 덕분에 이 태도를 명확히 알게 된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에 도착한 직후, 독일계 유태인들이 자신들이 이미 프랑스인이라는 점을 서로 확신시켜 주는 적응 사교모임들 중 하나를 만들었다. 첫 연설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독일에서 좋은 독일인이었으므로 프랑스에서는 좋은 프랑스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중은 박수갈채로 화답했고 누구도 웃지 않았다. 우리는 충성심을 어떻게 증진시킬 수 있는지 배웠기 때문에 행복했다. 만약 애국심이 일상이나 실천의 문제라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애국심이 뛰어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콘 씨의 사례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그는 분명 모든 기록을 갱신했다. 그는 항상, 그리고 끔찍한 운명이 자신을 데리고 간 모든 나라에서, 그 현지의 산들을 즉각 바라보며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이상적인 이주자다. 하지만 애국심은 실천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반복적인 변환이 갖는 진실성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란 힘들다. 이 투쟁은 우리 자신의 사회를 너무나 관용심이 없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집단과 무관하게 완전한 승인을 요구하는데, 현지인들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기 않기 때문이다. 현지민들은 우리처럼 이상한 존재들을 바라보면서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대체로 우리 자신의 옛 국가에 대한 충성심만 납득 가능하다. 그 점이 우리의 삶을 쓰라린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유태인인 채로, 우리가 본래 살던 나라에서 갖고 있던 애국심이 다소간 독특한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의구심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애국심은 정말로 진실하며 뿌리가 깊다. 우리는 그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두꺼운 책들을 썼으며, 그 점의 유서 깊은 측면을 탐사하고 통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학자들에게는 유태인과 프랑스인, 유태인과 독일인, 유태인과 헝가리인, 유태인과 …의 사이에 이미 예정되어 있던 조화에 대해서 철학 논문을 쓰게 했다. 오늘날 종종 의심받는 우리의 충성심은 역사가 길다. 그것은 150년 동안 전례 없는 위업을 보여줘 온, 동화된 유태인의 역사다. 이들은 언제나 비-유태인적 성격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또한 언제나 유태인으로 머물러 있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율리시즈 같은 이들 방랑자들은 위대한 원형과는 달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지만 그들이 겪는 절망적인 혼란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길 거부하는 광증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 광증은 우리 실존의 근본적인 부조리함을 드러냈던 지난 10년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우리는 상상적인 낙인을 덮어 감추기 위해 계속 애를 쓸 수밖에 없는, 고정관념을 지닌 사람들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것, 기적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새로운 가능성을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우리는 단정한 체형의 여성이 자신이 원하는 허리선을 만들어 준다고 약속하는 새로운 옷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새로운 국적에 매혹된다. 하지만 그 여성은 옷이 지닌 기적적인 특성들을 믿는 한에서만 새 옷을 좋아할 것이며, 그 옷이 자신의 지명도, 혹은, 자신의 지위를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내버릴 것이다. 우리의 이상한 위장이 외견상 전부 쓸모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아직 낙담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일 수 있다. 인간이 역사로부터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사례에서처럼, 인간이 계속 반복되는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만큼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첫 번째 돌을 던지기 전에, 유태인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어떤 법적 지위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유태인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법이나 정치적 고안물에 의해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인간, 즉, 단지 인간일 뿐인 존재의 운명에 우리 스스로를 노출시키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위험한 태도는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는 인간 그 자체라는 것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존재하기를 멈추었던 세계에 실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차별은 피를 흘리지 않고도 사람들을 죽일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사회적 무기라는 점을 사회가 발견한 이후, 여권이나 출생증명서, 그리고 심지어는 소득세 영수증조차 공식적인 서류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의 문제가 된 이후의 세계. 우리 대부분이 사회적 기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를 승인하지 않는다면 확신을 잃는다.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언제나, 사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용의가 있다. 하지만 그만큼 사실인 것은, 이런 모든 적응 및 동화에 대한 속임수 및 농담 없이 지내려고 노력했던 우리들 중 극히 일부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뒤죽박죽인 이 세계에서 무법자들에게까지 주어졌던 몇 안 되는 기회들마저 위험에 빠트렸다. 버나드 라자레(Bernard Lazare)의 말을 빌면 “의식적인 파리아”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 극소수의 태도는 우리의 콘 씨처럼 벼락출세를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던 사람의 태도와 같은 최근 사건들을 통해서는 조금 설명될 수 있다. 둘 모두는 19세기의 자손으로, 이 세계는 법적 혹은 정치적 무법자들은 모르며, 사회적 파리아와 그 짝인 사회적 벼락출세자만을 안다. 현대의 유태 역사는 법정의 유태인들로부터 시작해 백만장자 유태인 및 박애주의자들로 그 맥을 이어가는데, 이와는 다른 유태 전통, 하인(Heine), 라헬 반하겐(Rahel Varnhagen), 숄롬 알레이켐(Sholom Aleichem), 버나드 라자레, 프란츠 카프카 혹은 심지어 찰리 채플린에 이르는 전통을 잘 잊는 경향이 있다. 이는 벼락출세가 아니라 “의식적 파리아”의 지위를 선호했던 유태 소수 전통이다. 모두는 유태인의 자질들, “유태인의 심성”, 인간미, 유머, 사심 없는 지성과 같은 것들은 파리아의 자질이라고 내세웠다. 모든 유태인의 단점, 부족한 요령과 정치적 어리석음, 열등감과 돈에 대한 탐욕 모두는 벼락출세자의 특징이다. 인간적인 태도 및 현실에 대한 타고난 통찰력을, 카스트적 정신이나 금융 거래의 근본적 비현실성과 맞교환하기 위해 변화시키는 것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유태인들은 항상 있었다. 역사는 파리아와 벼락출세자 모두에게 무법자의 위치를 강요했다. 벼락출세자는 “두 번 실패는 안 한다”(On ne parvient pas deux fois)라는 발자크의 위대한 지혜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파리아가 갖는 야생적 꿈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과 운명을 공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무례함”이 느껴질 만큼 진실을 말하기를 고집하는 극소수의 난민은 인기가 없는 대신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장점을 얻게 된다. 역사는 그들에게 닫혀 있는 책이 아니며, 정치는 더 이상 비유태인의 특권이 아니다. 그들은 유럽에서 유태인을 치외법권으로 몰아내는 것은 대부분의 유럽 민족을 치외법권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밀려가는 난민들은, 정체성을 지키는 한에서, 그 민족의 전위를 표상한다. 유태인의 역사는 사상 최초로 다른 모든 민족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다. 유럽 민족의 공동체는 가장 약한 구성원들이 배제되고 처형될 때, 그리고 그 때문에, 와해될 것이다.(수유너머, 적린(필명)번역 전문) 1944년~1946년 잡지 유대인 사회연구의 연구책임자로 임명되었다.'유럽 유대인 문화재 건설을 위한 위원회'의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유럽을 여행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 주축국의 점령지에서 유대문화 보고들에 대한 예비적 리스트를 작성 했다. 이로부터 전체주의 정권의 구조를 통찰하고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했다. 1945년 9월에 파르티잔 리뷰의 독일 특파원인 라스키를 통해 아렌트의 생사를 확인한 야스퍼스가 한나 요나스의 소식과 함께 편지를 보내왔다. 이후로 야스퍼스가 죽을 때까지 서신을 계속하여 주고 받았다. 1946년 아렌트가 "프랑스 최고의 작가"라고 칭하였던 알베르 카뮈를 만나다. 카뮈를 만나고 실존주의에 관한 글인 <프랑스 실존주의>를 "더 네이션"지에, <엑시스텐츠란 무엇인가(What Is Existenze Philosophy?>를 "파르티잔 리뷰"에 발표했다. *엑시스텐츠(Existenze)는 야스퍼스의 現存개념이라고 한다.(서유경) 1947년~1948년 뉴욕에 본부를 둔 쇼큰 북스(schocken book)의 책임 편집자가 되었다. 또한 [파르티잔리뷰] [유대인 프런티어] [코멘터리] 등에 원고를 실으면서 뉴욕의 지식인들과 친분을 갖게 되었다. 1948년 6월에 쇼큰 북스를 떠났다. 7월 [파르티잔실존철학 리뷰]에 <강제 수용소>를 기고했다. 같은 달 영국에 살고 있던 의붓딸인 에바 비어발트를 방문한 어머니 마르타가 심한 천식 발작으로 사망했다. 야스퍼스가 디 반들룽(Die Wandlung)시리즈의 한권으로 아렌트의 <여섯 개의 에세이>를 슈프링거에서 출판했다. 1949년 전쟁이 끝나고 유럽을 처음으로 방문하기 직전에 <전체주의의 기원>을 끝냈으며 스위스 바젤에 있던 스승 야스퍼스를 찾아가 재회하였다. *전체주의의 기원 1.2/이진우.박미애 옮김/한길사/2006 “역사에서 모든 종말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포함하고 있다는 진리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 시작은 끝이 줄 수 있는 약속이며 유일한 ‘메시지’이다. 시작은,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되기 전에 인간이 가진 최상의 능력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 1951년 출간된 『전체주의의 기원』은 한나 아렌트의 첫 저서로 그녀만의 독특한 정치사상적 기반을 보여준다. 출간 당시 『전체주의의 기원』은 출간이 되자마자 아렌트를 단번에 세계적인 정치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51년 미국시민권을 얻게되어 18년의 무국적자의 신분을 청산했다. 1952년 블뤼허가 바드 칼리지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아렌트는 유럽여행길에 올랐다. 첫 기착지인 뮈니치에 들러 과르디니를 만났고 하이델베르크로 가서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대해 강연을 했다. 이때 마르크스를 연구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도중 구겐하임 재단의 연구 지원금 수상소식을 들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정치학'의 탐구에 들어갔다. 1953년 3월에 <과거 공산주의>를 [코먼윌]에 기고했다. 프린스턴의 초청으로 강의했다. 1954년 미국정치학회에서 최근 유럽 철학에 나타난 정치학에 대한 관심으로 강연했다. 1955년 버클리에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구겐하임 재단의 연구지원작업 '새로운 정치학'에 대한 보충연구를 계속했으며 한 학기 후 버클리를 떠났다. 1956년 3월 시카코 대학의 초청을 받아 <노동.작업.행위>에 대해 강의를 했다. 봄에 시카코 대학에서 <인간의 조건>초고로 강의를 했다. 가을에 메리 메카티와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한 후 바젤에 있는 야스퍼스와 만났다. <원자폭탄과 인류의 미래>로 독일서적상 협회로부터 평화상을 수상한 야스퍼스의 초청으로 시상식에서 연설을 했다. <인간의 조건>을 시카코대학에서 출판을 했으며 <전체주의의 기원> 2판에 1956년 헝가리혁명에관한 장을 덕붙였다. * 인간의조건/이진우 옮김/한길사/2017 근본악을 경험하고 세계애로 사유하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근대적 근본악을 온몸으로 경험했으며, 철학자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사유했다. 한나 아렌트에게 “어떻게 근본악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철학적 화두였다. 『인간의 조건』은 이전에 나온 『전체주의의 기원』과 이후에 나온 『정신의 삶』에 이르는 철학적 여정에서 나타난 근본악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그러므로 아렌트의 저서들은 자신의 철학적 화두에 대한 답으로 시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의의는 세계에 관해 단순히 관조하고 성찰하는 형이상학적 전통을 넘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실천철학적 방향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인간의 창조와 함께 시작의 원리도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것은 시작의 본질에 속하는 성격이다.(266쪽)
한편 이 책은 영어판 The Human Condition(Chicago, 1958)을 번역한 초판을 토대로 했지만 The Human Condition(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 제2판을 새롭게 완역했음을 밝혀둔다. 제2판의 텍스트는 제1판과 동일하지만 마가렛 캐노번의 「개정판 서문」이 함께 실려 있다. 개념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아렌트 자신이 감수한 독일어판 Vita activa. Vom tatigen Leben(Munchen, 1967)을 전체적으로 대조하여 문장표현을 갈무리했다. 아렌트가 사용하는 개념과 용어들은 대부분 문맥 속에서 이해되기는 하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용어해설」을 첨가했다.
인간의 조건을 다시 사유하다 아렌트는 1959년 『인간의 조건』을 출간하면서 그녀 자신도 예기치 못한 무엇인가를 세상에 내보냈다. 그리고 40년 후에도 이 책의 독창성은 여전히 두드러진다. 책이 어렵지만 그런데도 매력이 있다는 것은 모두 그녀가 대단히 많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아렌트는 확실히 참여 민주주의에 끌렸다. 그녀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미국인들의 시위부터 단명한 1956년 헝가리 혁명 동안의 풀뿌리 시민 ‘의회’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시민 활동의 발생에 대한 열광적 관찰자였다. ‘정치철학자’라는 칭호를 거부하면서 그녀는 플라톤 이래 모든 정치철학자들이 저지른 실수는 정치의 근본조건을 무시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정치철학이 아니다. 정말이지 이 책의 상당량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에 관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노동과 작업에 관한, 그리고 현대 과학과 경제적 성장의 함의에 관한 긴 분석들은 정치 자체보다는 정치를 위한 배경과 관련이 있다. 행위에 관한 논의조차 특별히 정치적인 행위와는 부분적으로만 관계가 있다. 이 책의 가장 명백한 조직 원리는 인간의 조건을 위한 근본적인 세 가지 활동 형식에 관한 현상학적 분석에 있다. 동물로서의 인간의 생물학적 삶에 부합하는 노동, 인간이 지상에 건립하는 대상들의 인공세계에 부합하는 작업, 그리고 별개의 개인으로서 우리의 다원성에 부합하는 행위. 아렌트는 이 구별들과 철학 및 종교적 우선권에 의해 형성된 지적 전통 내에서 무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현상학적 분석 이상의 것이 상당히 많다. 그녀가 서론에서 “오직 우리가 행하는 것을 사유하겠다”는 제안을 밝혔을 때 그녀가 마음먹은 것은 인간활동에 관한 일반적 분석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최근에 겪은 경험과 공포를 고려하여 인간의 조건을 다시 사유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자동화의 함의 핵 기술 같은 대규모 사업을 통해 인간은 자연적 한계에 성공적으로 도전하고 있으며, 현대 과학이 공공 토론에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자신의 역량과 책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 동물은 지구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떠맡기에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결합은 전체주의에 관한 아렌트의 초기 분석에도 가득하다. 전체주의는 신념들의 모순적 결합이 추진한 허무주의적 과정으로 서술된다. 이 책은 아렌트가 1956년 4월 시카고 대학교에서 진행한 월 그린(Charles R. Walgreen) 재단 강연들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 강연들은 “마르크스주의 내의 전체주의적 요소”에 관한 훨씬 더 방대한 프로젝트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다.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uism)을 끝낸 뒤 아렌트는 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원래 그녀의 새로운 대규모 기획은 마르크스 이론의 어떤 특징들이 이러한 재앙에 기여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었다. 막상 시작해보니 그녀의 대대적인 조사는 너무나 방대하고 숨은 문제점이 많아서 마르크스 책은 집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연관된 일련의 많은 사상이 『인간의 조건』으로 흘러들어왔다. 마르크스가, 아렌트가 작업과 노동이라 부른 서로 다른 인간활동들을 혼합했다는 면에서 정치적 행위를 치명적으로 오해했다는 결론이 특히 그렇다. 아렌트는 마르크스가 정치에 대한 특별한 오해를 서구 정치사상의 위대한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다수이고,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관점과 행위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정치적 역량들이 파괴되지 않는 한 그들은 깔끔하고 예측할 수 있는 모형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했던 것이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이 도외시된 인간 역량들을 되찾고 해명함으로써 정치철학의 전체 전통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인간활동에 관한 아렌트의 현상학과 뒤얽혀 있는 두 번째 대주제는 ‘노동자 사회’의 부상에 관한 그녀의 설명이다. ‘사회적인 것’이라는 주제는 이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논쟁적인 측면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많은 독자는 사회적 관심에 대한 아렌트의 경멸 투의 언급들을 공격했고, 아렌트가 현대사회의 순응주의적 물질주의를 비판하면서 영웅적 행위의 삶을 권장하려 한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면 이 책의 복합적인 측면을 놓친다. 왜냐하면 이 책의 다른 핵심주제는 행위자의 통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는 행위의 위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세기 동안 인간세계에 대한 가장 주요한 위협은 모든 안정성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든 경제적 현대화였다. 이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역사적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 마르크스와는 달리, 아렌트는 그것을 우연적인 인간행위의 비의도적 효과로까지 추적한다. 아렌트가 자동화의 함의를 성찰할 때까지 생산과 소비의 과정은 자연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관련된 여러 활동과 방법 그리고 소비재는 정말 모두 대단히 인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현대적 인공성이 예전의 문명들이 거주했던 안정적이고 세계적인 인공물과는 매우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마치 세계의 한복판에서 진행되는 생물학적 과정이자 세계를 둘러싼 순환적 자연과정이라는 이중적 의미의 자연으로부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구조물인 세계를 보호하고 분리하는 경계선을 우리가 억지로 무너뜨려서 항상 위협받는 세계의 안정성을 자연에 내맡기고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208쪽). 경제적 관심사들이 공공의 관심과 공동 정책의 핵심이 된 이후, 세계의 대대적인 파괴 그리고 스스로를 소비욕망의 관점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의 증가가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이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그녀는 ‘생각 없음’이 “우리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라고 말한다. 그녀가 큰 소리로 사유하는 목표는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논쟁의 한가운데서 아렌트의 목적이 사유와 토론을 유발하는 데 있었다면 그녀는 확실히 성공했다. 그녀의 많은 저작처럼 『인간의 조건』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 작품만큼 몇 사람은 천재의 작품으로 간주하고 다른 사람들은 논박할 가치도 없다고 간주하는 엇갈린 평가를 받은 현대 정치이론서는 거의 없다. 또한 이 책에 관한 정치적 논란도 급속도로 번졌다.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에 관한 논의와 사회적 관심에 대한 분석으로 아렌트는 대다수의 좌파에게도 인기를 잃었다. 그러나 행위에 관한 그녀의 설명은, 몇몇 시민권 운동가와 철의 장막 뒤의 사람들을 포함한, 다른 급진주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와 격려를 주었다. 1960년대 학생 운동 시기에는 『인간의 조건』이 참여 민주주의의 교본으로 취급되었다. 아렌트의 사상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최근에는 이 책의 중요성은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있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처럼 서로 가닥이 뒤엉킨 복잡성 때문에 이 책은 다양하게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현상학자, 하버마스주의자, 포스트모더니스트, 페미니스트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은 이 풍부한 직물의 다양한 가닥에서 영감을 얻었다. 출간 이후 40년이라는 기간은 책의 지속적인 중요성을 평가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복잡한 책으로부터 하나의 핵심주제를 뽑아낸다면, 그 주제는 정치의 치명적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우리의 정치적 역량과 그것들이 제공하는 위험과 기회들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상기시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인간의 조건』에서 가장 용기를 북돋워주는 메시지는 인간 탄생성과 시작의 기적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사멸성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와는 대조적으로 아렌트는 인간사의 믿음과 희망은 새로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세계에 태어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미래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사상의 양식과 토론의 여지를 발견할 것이다. 이 비범한 책에서 상이한 실마리와 주제들을 집어 들고 발전시킬 것이다.
네가 쓴 무엇인가를 세계로 내보내어 그것이 공공의 것이 될 때마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은 명백하다. 또 그래야만 한다. 나는 이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당신이 독립적으로 생각해온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장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그 생각을 갖고 하는 일부터 배우려 해야 한다.(66쪽) - 출판사자료인용 1958년 아렌트는 베를린에서 머무는 동안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을 다룬 <라헬 파른하겐: 한 유대인 여성의 삶>이라는 책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아렌트에게 18세기에 실존했던 여성 라헬 파른하겐을 소개해 준 사람은 친구 안나 멘델스존이었다. 아렌트가 쓴 이 책에는 유대인 여성, 역사, 사회 등 여러 가지 측면이 중첩적으로 깔려 있었다. 그녀는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 라헬의 인생 중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 그녀는 이 여인의 전기에 자기의 심정을 이입해 놓았다. 이 책의 밑바닥에는 독일인 하이데거와 유대인 여성 아렌트와의 사랑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깔려 있다. 아렌트는 이 책을 통해 하이데거의 주술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 라헬 파른하겐:한 유대인 여성의 삶 /김희정옮김/텍스트/2013 한나 아렌트 라헬 파른하겐을 쓰다. 1960년 여름에 [뉴요커]지의 편집자에게 나치전범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특별 취재하겠다고 제안을 했다. 1961년 웨슬리언 대학에서 가을 학기동안 <혁명에 관하여>의 초고로 강의했다. 블뤼허가 동맥파열로 쓰러졌다. <과거와 미래사이>를 바이킹사에서 출판을 했으며 블뤼허와 함께 예루셀렘으로 건너가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취재하여 보도했다. 야스퍼스와 블루멘펠트 두 거장과 함께 재판의 쟁점에 대해 편지로 많은 의견을 나누었다. 5개의 논문으로 보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엄청난 반향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과거와 미래 사이/서유경 옮김/푸른숲/2005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문학에 대해 내렸던 정의("Literature is news that stays new.")가 '고전(classic)'에도 적용된다면, 신간 <과거와 미래 사이> 역시 하나의 고전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오늘날의 시민적, 정치적 담론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전통, 역사, 권위, 자유와 같은 개념들의 그리스, 로마적 기원을 추적한다. 1962년 택시로 귀가하던중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이때 심장근육이 손상되었다.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혁명에 관하여>가 뉴욕의 바이킹사에 출판되었다. 이 저서들로 인해 아렌트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형성시켰던 또 한사람의 스승 블루멘펠트와 평생 이어졌던 관계가 끊어졌는데, 3월 21일 그가 죽을 때까지 관계가 회복하지 못했고 아렌트는 심한 충격에 빠졌다. 봄에 유대지성계에 파문을 일으킨 아이히만의 보도가 미국의 학계와 언론계등 관범위한 영역에서 첨예한 논쟁으로 번졌다. 이 논쟁은 1967년 중동전쟁이 일어나기전까지 계속되었다. 여름에 그리스,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거쳐 아렌트의 부부의 첫 고향인 파리에 머물다가 돌아왔다. <혁명에 관하여> 개정판이 나욌으며 가을에는 시카코 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실린 뉴요커 표지와 본문
1964년 10월28일 저명한 저널라스트인 귄터 가우스와 대담이 서부 독일 텔레비전에 방영되어 우수 방영물에 수여되는 아돌프 그림상을 수상했다.
1965년 가을 코넬대학에서 강의하는 동안 준비한 에세이<진리와 정치>를 다음해 미국정치학회에서 발표했다. 1966년 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에서 출판되었다. 1967년 12월 촘스키, 오브라이언, 로렐과 함께 '폭력의 합법성'이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참석을 했다. 시카코대학을 떠나 뉴스쿨 포 쇼셜 리서치로 갔다. 독일 아카데미로 부터 '프로이트 상'을 수상하였다. 1968년 여름에 <폭력에 관하여(On Violence)>의 초고를 마친 뒤 <정신의 삶>의 집필을 구상했다. 친구 발터 벤야민을 위해 자신이 서문을 쓴 벤야민 선집 <문예비평과 이론>을 편집했다.《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이 출판되었다. *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홍원표옮김/인간사랑/2010 "어두운 시대"는 브레히트의 유명한 시 「후손들에게」에서 빌려온 문구이며, 한나 아렌트는 우리 세기의 일상적인 공포가 어둠의 실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제안하고자 이 문구를 사용한다. 이 책에서 그 어둠은 아렌트가 이야기 하려는 사람들 - 레싱, 로자 룩셈부르크, 교황 요한 23세, 칼 야스퍼스, 이자크 디네센,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벤야민, 베어톨트 브레히트, 발데마르 구리안, 그리고 랜달 자렐 등, 그들은 생애 중에 시대를 함께 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전반의 도덕적 갈망, 예술과 과학의 경이적인 발전으로 점철된 20세기 전반의 세계를 서로 공유했다 - 을 통해서 조명된다. 1969년 아메리카 아카데미의 '에머슨 소로'메달을 받았다. 야스퍼스가 86세의 나이로 죽었다.《시민적불복종》 (Civil Disobedience)이 발표되었다. 1970년 <폭력에 관하여>가 출판되었으며 10월 31일에 남편 블뤼허가 죽었다. 남편의 죽음이후에도 아렌트는 정치적 영역에 관한 관심을 잃지 않으면서 '사유의 공간'으로 물러나 <정신의 삶> 제 1부 '사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 폭력의 세기(원제 : on violence)/김정한/이후/1999 제2의 로자 룩셈부르크로도 불리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 철학 에세이집. 이 책은 이제 '역사'가 되는 20세기를 전쟁의 세기, 혁명의 세기 즉 폭력의 세기로 규정하고 있다. 제1부 진보의 역설, 제2부 폭력과 권력, 제3부 폭력의 본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인류의 지적 작업에 거의 전무한, '폭력' 그 자체를 헤아림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 아렌트는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말에 “총구로부터 나오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이다”라는 말로 응답한다. 왜 그런가. 폭력은 권력의 도구일 뿐이며, 인민의 지지야말로 권력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모든 대의제 공화국에서 권력은 인민에게 있다.” 통치자의 권력은 국민에게서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것일 뿐이다. 국민의 지지가 줄어들수록 통치자의 권력은 약해진다. 권력을 만회하려고 통치자가 폭력에 손을 뻗칠 때 국민은 통치자에 대한 동의를 아주 거두어 버린다.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1971년 [뉴욕타임지] 리뷰에 미 국방성 서류를 분석한 긴 논문 <공화국의 위기 : 정치의 거짓말>을 기고했다. * 공화국의 위기/김선욱 옮김/한길사/2011 “아렌트의 정치이론은 현실에 대한 성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결정과 반전운동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이를 ‘공화국의 종말’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는 세 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정치에서의 거짓말」은 정치에서 이미지 제작과 공적 관계의 역할을 다루고 있는 미 국방부 보고서를 심도 있게 분석해 거짓말이 행위의 한 형태이지만 정치영역을 손상시킨다는 점을 부각시켰다.「시민불복종」은 자유의 기수에서 전쟁 반대자들과 분리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을 검토하고 있다.「폭력론」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파리 학생시위, 옛 소련의 체코 침공 등의 폭력을 목격하면서 집필한 것이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이념이 가진 힘은 미국 건국 초기에 구현된 미국적 정신이 무엇인지를 되새겨 그것을 오늘의 현실에 다시 읽어내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시민적 공화주의라고 하며, 시민적 공화주의는 마이클 샌델 등과 같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이론화되고 있다. 아렌트의 공화주의적 입장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정치권력이 시민들로부터 분리되어 그들을 조작과 거짓의 대상으로 삼을 때 성공할 수 없으며, 진정한 정치적 법적 권력은 시민들에게서 나오며, 폭력은 권력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에만 분명하게 지목할 수 있고 또 제어할 수 있음을 『공화국의 위기』를 통해 웅변하고 있다.
「정치에서의 거짓말」 이 글은 이른바 ‘펜타곤 문서’의 누출과 관련해 작성된 논문이다. ‘펜타곤 문서’의 공식 명칭은 ‘1945~67년 미․베트남 관계: 국방부 연구문서’이다. 미 국방부의 일급기밀문서였으나,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의 1면 기사를 통해 공개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공개된 ‘펜타곤 문서’의 핵심 내용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폭격, 북베트남 해안에 대한 폭격, 해병대의 상륙작전 등을 통해 전쟁을 고의적으로 연장했던 사실 등인데, 가장 심각했던 점은 트루먼 대통령에서 존슨 대통령에 이르는 4개 행정부가 미국 시민들에 대해 기만적으로 대했다는 점이었다. 아렌트의 논문은 전통적으로 정부가 국가기밀이라는 이름으로 정보를 독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정부의 작동 과정에서 거짓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엮였는지에 집중한다. 아렌트는 정치 혹은 정치가에게서 거짓이 작용하는 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발생하게 된 것이 아니라 홍보의 과정에서 문제해결사들이 일하는 방식을 통해 현실에 대해 생생한 감각을 갖지 못하게 됨으로써 발생한 일임을 분명히 한다. 거짓은 진실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성을 활용해 판단하려는 우리에게 진실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와 우리를 기만하지만, 아렌트는 “진리는 거짓에 대해 확고한 우선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탐색하지 못하게 하는 ‘정신습관’을 이겨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시민불복종」 이 글은 미국에서의 흑인 민권운동과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쓰인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현행 법질서를 위반하는 불복종운동을 포함하는데, 불복종 행위자들이 속한 주의 법과 연방법의 입장 차이와, 대법원에서 이루어지는 사법심사의 문제까지 연관이 된다. 법은 자기유지를 요구하며 법에 따라 통치를 이루려는 공화정의 이념의 근간이 된다. 하지만 시민의 요구는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법의 개정을 이룬다. 아렌트는 법이 변화에 대항해 사회에 안정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 시민의 반응과 연관해 적용과 폐지가 이루어지는 점에도 주목한다. 예컨대 적법절차 등을 다룬 미국의 수정헌법 제14조와 금주령을 담은 수정헌법 제18조는 모두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취지의 법이지만, 전자는 시민불복종을 통해 남부에서 흑인과 백인 시민의 태도가 명백해졌을 대법원에서 그 적용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반면, 후자는 금주령이 강제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명나자 폐지되었다. 나아가 시민의 의견과 법이 충돌할 경우 이루어지는 사법심사가 중요하다. 한국의 경우 사법심사는 헌법재판소의 권한이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대법원의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미국에서 사법심사 행위는 시민불복종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를 가림으로써 법과 사회의 변화를 열어갈 수 있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는 여론의 영향을 받아 사법심사 자체를 대법원이 거부함으로써 응답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아렌트의 시민불복종 행위에 대한 논의는 미국에서의 시민의 계약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 법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작업은 법에 대한 아렌트의 관점을 나타냄으로써 아렌트의 공화주의적 시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폭력론」 올해 초 아랍권에서 있었던 재스민 혁명이 폭압적 정치권력에 대해 진정한 시민적 권력, 진정한 정치권력이란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경우였다면,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월가 중심의 움직임은 경제체제에 소외된 다수의 시민이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진정한 시민적 권력을 통해 바꾸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아렌트는 이른바 정치는 물리적이건 경제적이건 힘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권력정치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권력 개념을 제시한다.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니라 권력이다”라는 아렌트의 말은 권력의 이름으로 제공되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 폭력에 대해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며, 진정한 권력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데서 나오는 것임을 「폭력론」을 통해 면밀히 분석한다. <!--[endif]--> (출판사 자료 전문) 1972년 뉴스쿨에서 '역사의 의지'를 강의하면서 <정신의 삶> 제 2부인 '의지'를 쓰기 시작했다. 10월에 요크대학에서 '한나 아렌트의 저작에 관한 회견'이 열렸다. 저명한 정치이론가인 리하르트 베른슈타인과 에른스트 블로호 등 네명이 발표하고 아렌트와 함께 토론을 벌였다. 1973년 다트머스, 포트한, 프린스턴대학에서 면예학위를 받았으며 봄에 스코틀랜드의 에버딘 대학으로 부터 기퍼드 강의를 제안받았다. 기퍼드강의는 1888년 이래로 막스 뮐러, 로이스, 제임스, 베그르송, 화이트헤드, 듀이, 질송, 마르셸 등이 거쳐간 곳으로 이 강의에 초청 받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것이었다.뉴스쿨에서 그리스 정치이론을 강의했다. 1974년 뉴욕에서 일주일간 배심원을 지냈다. 동료 배심원들의 공명정대함을 목격하고서 <정신의 삶> 제3부 '판단'의 의미를 법정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1975년 3월에 공적 연설로서는 생애 마지막으로 보스턴 홀 포럼의 200주년 기념강연를 했다. 유럽문명화에 기여한 자에게 덴마크 정부가 수여하는 '소그니상'을 받기 위해 코펜하겐으로 갔다. 미국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최초로 처칠, 슈바이처, 러셀, 카를 바르트, 올리비에 등과 함께 소그니상을 수상했다. 기퍼드 강의를 1976년까지 미룬 채, <정신의 삶>의 '의지'와 '판단'에 각각 포함시키기위해 하이데거 비판과 칸트연구에 몰두했다. 12월4일 친구들을 접대하는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아렌트와 블뤼허의 묘(뉴욕근교) 아렌트의 묘(항상 담배를 끼고 살던 아렌트를 위해 누가 담배를 두고 갔다.) **사후 출판된 저작들** 1978년 메리 멕가티에 의해 <정신의 삶>이 '판단'이 빠진 미완성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 정신의 삶1(사유)/홍원표 옮김/푸른숲/2004 악행을 부르는 생각없는 삶, 왜 그렇게 살까 1992년 <칸트 정치철학 강의>가 아렌트의 제자인 로널드 베이너가 유고를 정리하여 시카코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푸른숲 /2002 《칸트 정치철학 강의》가 아렌트 정치사상의 정점에 해당된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초기의 글들에서 형성된 문제 관심인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처방을 제시하는 데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정치 개념의 핵심에는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이 자리잡고 있다. 다양한 개인들이 함께 모여 정치 공간을 마련하고 여기서 언어를 사용하는 가운데 의사 합일을 이루어 나가고 또 합의된 생각을 바탕으로 '공동의 행위(action-in-concert)'를 이룩하는 것을 정치의 원초적 모습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정치 개념은 이전의 정치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플라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 사상가는 다양성의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진리 주장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을 구성해왔다. 따라서 아렌트의 정치사상은 기존의 정치철학사의 연장에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의 결과인 것이다. 칸트의 미학은 정치학 아렌트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에서 칸트의 판단을 차용해 자신의 정치철학을 정교화한다. 이 책은 아렌트의 강의를 그의 제자 베이너가 모아 출간한 것이다. 완결된 형태의 정치 이론서가 아닌 까닭에 이 책의 구성은 열세 개의 강의와 이에 대한 각주를 겸하는 베이너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3년 <정치란 무엇인가>가 출판되었다. 1996년 아렌트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석과 상당량 수정한 영역본의 원고를 편집한 <아우구스티누스에 나타난 사랑개념>이 시카코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 사랑개념과 성아우구스티누스/조안나 스코트, 주디스 스타크 편집과 해설/서유경 옮김/2013/텍스트 독자가 이 책을 통해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자이자 교부철학의 거장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사상과 조우하기를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로마가 보유한 유일한 철학자”라고 아렌트가 극찬한 그 교부철학자의 기독교 사상이 어떻게 아렌트의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훌륭한 현대의 정치철학으로 탈바꿈하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색다른 재미는 그러한 실망감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다. 분명 이 책은 누구에게나 지독하게 어렵고 난해한 읽을거리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라는 20세기가 낳은 탁월한 정치철학자의 사상적 근원에 닿고 싶다면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책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 책이 정치이론가로서 아렌트와 정치철학자로서 아렌트의 전거점, 요컨대 그녀의 중기 정치이론과 후기 정치철학이 어떠한 동일한 원천에서 출발했는지, 그리고 마침표 없이 남겨진 아렌트 정치철학의 최종 목적지를 짐작케 하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363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 2003년 <책임과 판단>이 출판되었다. 2005년 <정치의 약속>이 출판되었다. * 정치의 약속/김성욱 옮김/푸른숲/2007 『정치의 약속』은 독일현대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의 출간 이후부터 1958년 ≪인간의 조건≫이 쓰일 무렵까지의 정치철학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남겨진 1950년대 유고들을 중심으로, 주로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과의 씨름, 정치의 특징에 대한 발견과 그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는 7편의 글들로 이루어진 책이다. ** 연보는 <인간의 조건/이진우역/한길사>에서 많은 부분 인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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