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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의 철학자 하이데거

by 이덕휴-dhleepaul 2019. 11. 8.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나치인가? 하이데거를 언급할 때 항상 그의 ‘나치’ 전력은 뜨겁고도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빅터 파리아스가 쓴 <하이데거와 국가사회주의>라는 책이 1987년에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하이데거가 처음부터 끝까지 반유태주의자였고 골수 나치였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프랑스에서는 새롭게 논쟁이 일었다. 하이데거가 골수 나치라면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현대 철학은 어떻게 평가해야 되는 것인가? 하이데거의 나치 전력에 대한 논쟁은 곧바로 그의 고국인 독일에서도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뜨거운 하이데거 전력 논쟁

사실 하이데거가 나치 당원으로 가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1933년 5월 1일 나치 정권 하의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전임 총장이었던 해부학 교수 폰 묄렌도르프는 유태인에 반대하는 현수막 게양을 금지했기에 나치 당국으로 취임 2주만에 파면을 당했다.

뭘렌도르프는 당 간부가 총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하이데거가 차기 총장을 맡아 주길 권유한다. 대학 평의회에서는 기권 2표를 제외하고 만장일치로 하이데거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총장으로 선출된 하이데거에게 나치 당국은 나치 당원으로 가입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상당히 숙고한 끝에 조건을 달아 입당한다. 입당조건은 총장 재임 중이나 그 이후나 어떠한 당직에도 취임하지 않고 또 당을 위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이데거의 김지나움 시절
하이데거는 1933년 5월 27일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 이라는 제목의 총장 취임 연설을 하였다. 이 취임연설에서 그는 민족에 대한 대학의 3대 봉사, 즉 노동, 국방, 지식의 봉사를 호소했다. 그는 연설 말미에서 수상으로 취임한 지 4개월 밖에 안되는 히틀러 정권을 독일 민족의 “부흥의 위대함과 장엄함”이라는 말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학생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에서는 총통 히틀러만이 “오늘날과 미래의 독일의 현실이자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66년에 슈피겔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이 대화에서 그는 그 당시 나치의 국가사회주의가 그러한 민족의 부흥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고 언급했다. 물론 그는 극단적인 국수주의나 히틀러의 인종차별주의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즘에 대한 그의 기대와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총장 재임 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유태인을 반대하는 현수막을 게양하려고 하는 학생회장단과도 대립했다. 그리고 대학 인사에 개입하려는 나치 당의 압력에도 응하지 않았다. 1934년 2월 그는 결국 총장직을 사임했다.

그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를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했고 그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에 실상과 정체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이데거의 나치 전력은 평생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오명을 안겼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강의를 금지 당했고, 대학에서 추방당했다. 그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데 그의 나치 전력을 항상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치 전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20세기 철학에 가장 많은 영향를 끼쳐 왔다.

총장이 되어 나치당에 가입하기 전까지 그는 학생들에게 찬탄과 존경을 받는 철학 교수였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정식 교수가 되기 전부터, 그리고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이 출간되기 전부터 이미 ‘숨어 있는 사상계의 왕’으로 또는 ‘메스키르히에서 온 마법사’로 불렸다.


하이데거와 가족
그는 독일 슈바르츠발트 남쪽 지역 끝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1889년 9월 26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 마르틴 교회의 성당관리자이자 술창고지기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영주의 장학금을 받을 만큼 공부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수영, 철봉, 축구, 스키 등 스포츠도 잘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로부터 교회 사제직으로 진출한다는 조건부로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1903년에 교회장학금을 받아 콘스탄츠에 있는 김나지움 학교로 갔다가 1906년에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으로 옮겼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그는 약속대로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하고 예수회에 가입을 했다.

사제의 길을 걸은 학생시절

그는 프라이푸르크대학 신학부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 신학공부를 시작 한지 2년 만에 중단하고 만다. 심장병 때문에 1911년 2월에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한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 공부를 그만 두고 싶은 심리적 요인도 컸다. 이때부터 그는 가톨릭 교리와 내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김나지움 시절에 그는 이미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브렌타노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관하여>라는 글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는 부모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결국 철학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1911년 겨울학기부터 그는 프라이부르크대학 철학과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그렇지만 그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가톨릭 철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했다. 1913년에 <심리주의에서의 판단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중세 전성기의 기독교 철학에 집중했다.

1915년에 그는 중세철학자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교수자격논문의 주심은 신칸트학파의 거장 리케르트였다. 그는 1915년부터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그는 첫학기부터 1918년까지 민방위군에 동원돼 전시 업무를 수행하며 저녁에 강의를 진행해야만 했다. 전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하는 동안 하이데거는 인생의 반려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1917년에 자신의 강의를 듣던 육군장교 딸 엘프리데 페트리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후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6년 여름학기에 후설이 쾨팅겐 대학에서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 왔다. 리케르트가 하이델베르크로 떠나고 후설이 오자 프라이부르크 대학 분위기도 신칸트주의에서 금세 현상학으로 바뀌었다. 대학생 시절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미 후설의 초기 주저인 <논리적 탐구>를 도서관에서 2년 동안 계속해서 대출해 읽었다. 그는 1919년에 후설의 조교가 되었다.

이 무렵 그는자기가 물려받은 전통적 신앙에 대해 철저하게 논파하면서 공식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작별한다. 그렇지만 신앙과 신학적 내용은 그의 사유 속에 지속적인 흔적으로 남아 있다. ‘양심’과 ‘죄’ 같은 기독교의 도덕적 개념들이 그의 철학에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에 매료되었다. 현상학은 그에게 새로운 철학적 탐구방법이자 기초가 되었다. 후설은 철학의 관심을 그 근원들에로 되돌리고자 했다. 그래서 철학을 쓸데없는 아카데미 이론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현상학의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사실 자체로!”

후설은 사태가 스스로를 드러낼 때 까지 미리 갖고 있는 입장이나 선입견을 일체 배제하고자 했다. 그는 사태가 자신을 드러내는 대로 그것의 본질을 기술하고자 하는 입장을 취했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에 매료되었다. 후설은 하이데거가 자신의 현상학을 계승 발전시킬 사람으로 기대했다. 당시 후설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현상학, 그것은 하이데거와 나다.”

유대인 후설과의 인연

하이데거는 후설에게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조건들부터 탐구하라는 요구를 수용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관심사를 추구했다. 후설도 하이데거가 자신의 저작을 연구할 때부터 이미 그 자신의 방식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이데거는 후설 이외에도 베르그송, 딜타이, 지멜, 셀러 등으로 대표되는 생철학을 수용했다. 생철학은 생의 본질은 수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인 과학적 방식으로 파악할 수 없고 직관과 체험을 통해 파악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이데거가 볼 때, 세계는 단지 의식의 대상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계와의 연관 속에 이미 들어 와 있다. 또한 세계와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 역시 역사성을 지닌 것이다. 그는 후설의 비역사적 방법과 형식적 논리성을 거부하고, 인간 현 존재의 구체적 실존 분석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그 책에는 하이데거 자신의 철학적 입장이 그대로 들어 있다. 그는 1927년에 출간된 <존재와 시간>을 후설에게 헌정했다. 후설은 <존재와 시간>에 대해 실망했다. 하이데거가 자신과 다른 철학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31년 베를린 강의에서 그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이데거와의 사상적 단교인 셈이었다.

하이데거가 나중에 나치에 가입하면서 유대인인 후설은 하이데거와 인간적 관계마저 끊어 버리고 말았다. 하이데거 역시 어려운 처지에 빠진 후설에 대해 별다른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