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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유서 -박성원

by 이덕휴-dhleepaul 2019. 11. 20.

유서

박성원

나는 지금부터 나의 유서를 쓰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은 유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일종의 고백성사일 수도 있으며, 하나의 사티로스극으로 불러도 좋다. 문건, 조서, 넋두리, 낙서, 대본 그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나는 내 개인의 절대성을 여러분에게 절대 강요하지 않겠다.

대신에 나는 여러분의 어떠한 비평이나 평가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이에는 신도, 비평가도, 법도 필요치가 않다.

또 나는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에 대해서는 남에게 절대 시키지 않는다. 또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의 어떠한 부탁에도 절대 응하지 않겠다. 이 얼마나 간편한 일인가? 그러나, 내가 굳이-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부르든-'유서'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은 '유서'가 갖고 있는 속성 때문이다. 세칭 '유서'라 함은 '죽음을 맞이하여 남기는 글'이 란 뜻이다(모범 국어사전 참조). 나는 이제 이 글로서의 나의 저주를 남기고, 나는 마지막을 경험하러 떠날 것이다. 죽음, 그것은 완성이며 경이로운 마지막 경험이자 최후의 저항, 완전한 해방, 절대적인 전횡의 길이다.

지금 내가 유서를 적으려는 이 방안에는 무엇이든지 두 개이다. 그 것도 똑같이 생긴 것들이 항상 두 개씩 있다. 그 똑같은 두 개는 서로가 왼쪽, 오른쪽을 점하고 있기에 혼란을 일으킬 만큼 대칭적을 배열되어 있다. 똑같은 사물들이 두 개씩인 만큼 그 사물들의 주인도 둘이었었다. 분명히 둘이었었지만 지금은 나 하나이며 그리고 나머지 그 하나도 곧 사라질 것이다.

언제인가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내 방을 보고는 롯데월드에 있는 거울의 집이나 마술의 집과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 똑같은 것들이 항상 두 개씩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고 나서는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와 똑같이 생긴 내 동생을 보고는 모두 다 한번씩 놀란다.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처음 오는 모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가 똑같이 놀란다. 그러다가 내가 하하, 얘는 나보다 9분 차이로 늦게 나온 내 동생이 오라고 하면 모두가 똑같이 고개를 까닥이는 강아지 인형처럼 고개를 까닥이며 아하 한다. 이것은 불문율 같은 일종의 관례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연신 탄복을 자아내면서 나와 내 동생을 번갈아 본다. 신기해 마지않는다. 우리를 신기하게 보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나도 그들을 신기하게 보니깐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짜증이 나는 것은 그들은 나의 저주도 모르는 채, 그들 스스로의 생각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면서 나와 내 동생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는 그 눈길이다.

그 눈길들, 눈길들 난 그 눈길들이 두렵다. 분명 난 동생과는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씩 하는 한번의 엷은 미소 속에 모든 본 질을 무마하려 든다. 꼭 그러는 그들의 대부분은 세상에 던져진 책 몇 권으로 마치 세상을 주관하려 드는, 결코 나와 여행을 할 수 없는, 야무진 나의 적들이다.

나와 내 동생은 그렇게 9분의 차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의 생각에도 나에게는 태어남 자체부터 구속만이 있었을 뿐 자유스러움은 조금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은 존재해 있었고, 그 주어진 세상에 이미 나도 존재해 있었다. 또 세상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굴러갔었고 나 또한 세상과는 상관없이 죽어 갈 것이다. 그러나, 태어남은 나의 절대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되었지만 죽음은 분명 나만의 절대 의지로서 진행될 것이다. 이 점만은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꿈속에서 가끔씩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형체를 잘 알 수 없는 두 개의 핏덩어리가 물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다만 이따금씩 꾸르륵꾸르륵 거리는 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 오고, 그 두 개의 핏덩어리들은 서로 유영하면서 배회한다. 시나브로, 시나브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똑같이 생긴 서로 다른 두 개가 웅크린 채 마주보고 있다. 그 둘의 발목에는 반점이라 부르는 낙인이 찍혀 있다. 그 낙인의 색깔은 코발트색을 닮은 경미한 파란색이다.

그 낙인은 구속의 표시이며 제품의 품질 보증서이다. 그리고 그것은 족쇄 자국이다. 나는 알 수가 있다. 그 둘의 생김새의 구분은 좀처럼 쉽지 않으나, 그 둘의 낙인만은 명확히 구분이 되어 있다. 나의 낙인은 엉덩이가 아닌 왼쪽 발목에 찍혀져 있었고 마주보고 있는 동생의 낙인은 엉덩이가 아닌 오른쪽 발목에 찍혀져 있다. 이것은 거울의 이치와 너무나도 흡사하다. 그렇게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안에는 둘이 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러다가 머리 위로 강렬한 수술실 조명등이 내리 쪼인다. 본능적으로 그때부터 그 강렬한 수술실 조명등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때부터는 그 본능에 굴복을 하고 만다.

나는 그 강렬한 수술실 조명등을 향해 동생의 머리를 박차고 나간다.

그것이 나의 비극의 시작인지도 모르고 다만 '빛'인 줄로만 여기고 동생의 머리를 나의 발로 박차고 튕기며 밖으로 나간다.

탄생. 아아, 강렬한 빛 다음의 어둠이여...... 나는 혼절한 상태 마냥 나의 눈과 나의 사고는 매우 혼란스럽다. 나의 홍채는 갑자기 짙은 안개가 낀 듯이 아주 흐릿해지고, 나의 동공은 어안 렌즈로 돌변하여 사물이 심하게 왜곡되어 보인다. 왜곡되어 보이는 그 모습들이 본질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의 사고는 회전 열차를 탄 것처럼 마냥 어지럽고 깊은 계곡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다.

그 혼돈의 상태에서 무언가가 나의 엉덩이에 충격을 가해온다. 철썩 하고 소래 내어 때린다. 나는 참지 못하고 컥 하고 울음을 터뜨린 다. 입 안에서 오물이 떨어지고 나는 정신을 잃는다. 나는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계속해서 떨어진다. 그리고는 소리 없는 비명 소리에 나는 잠이 깬다.

잠이 깬 채 주위를 둘러보면 나의 홍채는 점점 열리면서 어두운 방 안에서 감각을 찾으려고 확대되고, 동공은 표준 렌즈로 돌아온다. 나의 뇌는 아틀라스처럼 그 무겁고 커다란 꿈을 어깨에 떠받치고 있다.

그때쯤이면 으레 나의 동생은 나의 땀을 닦아준다. 동생의 말없는 행동은 마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다 아는 것처럼 나타난다. 동생은 나를 지배하고 주관하려 든다. 나는 그것이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나에게 절망적인 시기심과 함께 패배감을 가져온다.

시기심과 패배감, 이것이 기원전부터 은밀하게 진행되어온 나에게 주어진 저주이다. 그 저주는 지겹도록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시기심은 적개심으로 치닫고 패배감은 나를 사육하면서 죽게 만들었다.

나에게 쏟아지는 저주를 내가 현세에서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는 다. 그것은 내가 동생 자신이 출연하고,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쓴 사티로스극을 보았을 때였다. 그 사티로스극은 그리스의 비극 중에서 외디푸스왕에 관한 것이었는데, 동생은 주제를 널리 알려진 외디푸스왕 이나 그의 딸 안티고네의 이야기에 맞춘 것이 아니라 외디푸스왕의 두 아들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어 극을 진행하였었다.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바로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였었다.

극은 외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른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외디푸스는 방황의 길로 접어들었고, 외디푸스가 떠난 후 두 아들은 1년씩을 번갈아 가면서 테베를 다스리기로 했었다. 그러나 에테오클레스가 이 1년간의 지배 기간이 다 지난 후에도 왕권을 내놓지 않자,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을 가서 그곳 군사-테베 공략의 일곱 용사들-를 데리고 전쟁을 일으킨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의 칼에 서로가 찔린 채 피비린내 나는 9년간의 장기전과 단기전은 끝이 나고 만 다.

--칼로서 서로가 서로를 찌르다.

나의 동생은 너무 환하지 않은 피에로의 분장으로 의자에 앉은 채, 약간의 소도구만을 들고서 그렇게 한 시간을 독백하였다. 무대 위는 전체가 어두웠었고, 동생의 연기하는 의자 위에는 2차 대전 당시의 기관총 모양의 색광 조명등만이 총신이 돌아가듯 돌면서 비추고 있었다.

색광 조명등의 그 몇 안 되는 원색들이 동생의 이야기의 고저와 흐름 에 따라 번갈아 가면서 바뀌었었고 그것이 바뀔 때마다 나는 환영을 보 았었다.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들판이 있다. 햇무리와 달무리가 동시에 드리워져 주위는 온통 붉게 물들여져 있고 천지사방은 조용하다. 간간 이 말들의 작은 교성 소리와 짐승 소리만이 들리어온다. 나는 은색으로 빛나는 철옷을 입은 채 막사 안에 혼자 있다. 어제까지의 대소 전투에서는 양쪽 모두 아홉 번의 승리와 아홉 번의 패배를 주고받았었다. 내일, 내일 동이 트면 이 전투는 끝이 난다. 동이 터옴과 동시에 양쪽의 군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너와 나는 서로 칼을 겨눌 것이 다. 너와 나는 그렇게 들판에서 서로를 마주볼 것이다. 나는 너를 죽임으로써 나만의 테베 왕국을 건설하리라. 내일이면 너의 피가 묻은 칼을 높이 쳐들고 군사들의 환호 속에서 나는 세상에 등극하리라. 지배자로서 전횡자로서. 오늘은 잠 못 이루는 소름끼치는 전야제. 모든 내일을 앞둔 전야제.

어두운 극장 안에서 나는 동생의 소리 소리마다에 소름이 끼쳤었고, 그 소름은 이후 나를 며칠씩 이유도 없는 고열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고열이라는 고질병. 동생에 대한 패배감에, 나의 몸에는 고열이 모세 혈관마다 흐르고 동생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나의 근육과 뼈까지 시리게 했다.

그래, 유서에다 동생과 나의 이야기를 적자. 그리고 내가 왜 동생을 죽였는지에 대해서도 적자. 그것이 나의 저주스러운 삶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단서가 될지 모르니까.

실상 나의 동생은 훌륭한 배우였다. 비단 배우뿐 아니라 시인이면서 화가였다. 글쎄, 어떤 식으로 동생을 소개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동생은 만재능을 가졌었고, 동생의 그 만재능은 나를 병들게 했었다.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 때도 물론이거니와 여태껏 단 한 번도 나는 시를 통해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때의 그 흔한 교실의 뒷벽 환경미화란에조차 단 한 번도 오르지 못 했었다--그러나 인정을 못 받았을 뿐 나의 시가 훌륭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정말이지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었다. 내가 시를 쓰려고 밤을 새울 적이면 동생은 자다 말고 내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나는 자랑스러이 밤새 적은 시를 보여준다. 동생은 괜찮네 하며 씩 하 고 웃는다. 대개의 주관자들은 보통 그런다. 그리고는 동생은 나도 몇 개 적은 것이 있어 하며 자기 책상에서 종이를 몇 장 들고 온다.

나는 처음에 놀랐다. 미술과 연극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좋은 시를 적다니. 문학 평론에 비록 문외한이지만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그런 시다.

동생은 그러면서 흄의 안티 휴머니즘과 엘리엇의 감수성의 시론, 파운드의 고전주의를 막 내깔린다. 주지적 시론에서 상징적 시론으로 다시 문학 이론에서 기호학, 사회학, 철학까지 치닫는다. 처음에 나는 감동한다. 흥분의 물결이 파도되어 나의 살을 돋게 한다. 짜릿함과 환희. 그 순간의 동생에 대한 신비는 동생에 대한 모든 시기심과 질투를 잊게 만들었고, 나는 동생의 손을 잡으며 나에게 시를 가르쳐 달라고 말했다. 동생은 순간 하던 말을 멈추고 나를 본다. 안돼. 세상에 시를 가르치는 게 어딨어? 동생은 자기 침대에 가서 눕는다.

자는 동생의 뒷모습. 나는 한참이나 동생의 등을 쳐다본다. 그러면 너 시인으로서 문단에 한번 나서보라고 말한다. 내보이기 싫어라고 동생이 말한다.

동생은 결코 자신의 재능을 내보이지 않았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행위들을 경멸하였다. 동생은 내게 상품화된다는 것이 싫다고 말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는 무서운 것이라며 자본주의는 사회주의까지 상품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동생이 다시 일어나 앉았다.

형--동생과 나는 불과 9분의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동생은 내게 항상 형이란 호칭을 붙였었다--생각해봐. 훗날 노동절 기획 상품으로 마르크스 인형이나 레닌 인형이 나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어? 나는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를 않았다. 답을 한다는 것은 저항 그 자 체이다. 하지만 무기력한 나는 동생에게 어떠한 반감도 가질 수가 없다. 동생은 만재능을 지배하지만 나는 시기심과 패배감에 지배를 당하기에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동생은 내게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 해서 무슨 가치가 창조되나. 시가 쌀로 변하고 그림이 연탄으로 변하고 음악이 시멘트로 변한다면 나는 복종하겠어. 주어진 농간에 발맞추는 그런 것 나는 싫어. 인간이라는게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면 시를 적겠지. 생존을 못하는데 생활을 한다? 시라는 게 원래 사치며 가진 자들의 장난이야. 얼마나 많은 시인이랑 화가들이 배고파 죽어 갔는지 알아? 단지 당시의 비평가 나 업자들의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명작들이 대접도 못 받고 사라져 갔는지를 아냐구? 천재라는 것이 다 우연히 재수 있는 놈들을 말할 뿐이야. 당시 비평가들의 입맛에 맞으면 천재고 맞지 않으면 개수작이야.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 절대성이라는 것이 어디 존재할 것 같아? 그렇지만 형은 그렇게 시인이 되고 싶어 했으니 잘해봐. 낭중지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언젠가는 형의 시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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