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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예수 탄생의 의미.(요1:14)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25.

예수 탄생의 의미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2.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53.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1:51-53; 새번역)



기독교가 예수의 탄생날짜로 잡고 있는 12월 25일은 고대 로마달력으로 동짓날입니다. 1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길고,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날이지요.

동아시아의 세시풍속(歲時風俗)에는 3가지 절기가 있는데요. 동지(冬至), 원단(元旦), 입춘(立春)이 그것입니다. 해의 시작을 원단이라 한다면, 24절기의 시작을 입춘이라 하지요.

동지는 무엇인가요? 동(冬)은 종(終)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데요. 동지는 끝에 이르렀다는 뜻이지요. 동양에서는 우주가 음기와 양기의 흐름으로 움직인다고 보고 있어요. 음기가 끝에 이르렀다는 의미에서 동지라고 하지요. 음기의 끝은 양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지요.

서양풍속에서는 어떤가요? 기원전 1세기 로마는 태양신 미트라를 제국의 수호신으로 삼았는데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받아들였지요.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273년 12월 25일 동짓날을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로 정했어요. 로마의 국경일로 선포했지요.

4세기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公認)한 후에, 태양신 미트라와 기독교 하나님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그는 태양신 미트라의 탄신일인 ‘해의 날’(Sunday)을 ‘주의 날’(Lord's Day)로 정하고, 아예 ‘주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 이전 3 백 년 동안은 기독교가 12월 25일을 공식적인 예수 탄생일로 지키지 아니 했었지요.

기독교 문화에서 크리스마스(Christ-Masse) 전통은 예수가 태어난 지 3백년 후에야  생겨났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역사적인 탄생 날짜를 기념하기보다는, 예수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인카네이션(incarnation) 사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요1:14) 신령스런 로고스가 육(肉)이 된 사건을 일컫는 말인데요. 그 분이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라는 선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역사의 실존인물 예수에게서 지상을 걸어 다니는 신령스런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의 어떤 모습에서 그들은 신령스런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을까요? 시간적으로 예수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통치시절에 태어났습니다. 기원전 4년경이지요. 공간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 유대의 변방 갈릴리 나사렛에서 농사일에 종사하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서른 살 즈음에 출가(出家)를 했고요, 갈릴리 전역을 주유(周遊)하다가 유다광야의 세례자 요한을 찾아갑니다. 그가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 신비체험을 하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하늘로부터 신령스런 소리(天語)를 듣게 되지요.“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한다.”(막1:11) 이 천어를 듣고, 예수는 자기 존재의 존귀함과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얻지요. 그것은 곧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사는 것과,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존재이유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예수는 어디로 가나요? 광야입니다. 40일동안 금식하며 수행 정진하는 데, 악마가 등장하여 유혹하지요. 저기 광야에 널브러져 있는 돌들을 빵으로 만들면 네가 하느님 아들임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어요. 허나, 예수는 그 제안을 단호히 배격했어요. 사람이 ‘빵만으로(bread alone)’ 사는 게 아님을 환기시키고 있어요.(마3:4)

‘빵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진리라면, ‘빵만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진리라는 것입니다. 빵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사람이 밖에서 바라고, 구하고, 얻은 것을 지키려는 것들의 총칭(總稱)이지요. 헌데, 밖에서 얻은 것들은 반드시 나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일체 사물은 그것에 그것이라고 할 만한 아이덴티티(自性)가 없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물은 특정한 조건이 형성되어 생겼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무상성(無常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빵과 대비되는 삶의 조건으로 마태의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시하고 있어요. 예수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무엇이었나요? 내가 하느님 아들임을 깨닫고 사는 것이었고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존재이유라는 것이었어요. 예수는 자기의 존재 이유를 하느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새롭게 찾은 것이었지요. 

본문은 누가복음이 전해주는 예수 탄생의 의미를 알려주는데요. 누가는 마리아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어요. “...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력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들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들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존감自尊感을 갖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예수께서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가요? 놀라운 것은, 그 시대의 사회 정치경제적 지평에서 예수 탄생의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신다고 했어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내치신다고 했어요. 부유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낸다고 했어요.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고, ‘주린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며, ‘부한 사람들’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앞으로 예수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입을 빌어 예언된 아기예수 탄생이 갖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사회의 불평등을 바로 잡는 일이었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일이었어요. 이것이 예수 탄생의 의미였고요. 그가 하느님의 아들로 사는 길이었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다는 것이지요. 

기독교 복음은 항상 ‘지금-여기(Here and Now)’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예수께서 선포하고 이루려고 했던 하느님나라는 지금여기의 민중이 겪고 있는 일상적인 불평등 문제였어요. 결코 관념적인 인간의 미래나 사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인류사적 구원지평에서 ‘거대 스토리(Big Story)’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은 후대의 일이었습니다.

  
▲ 작은 형제회 구유(정동 프란치스코 회관 지하 성당)
누가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하늘의 영광, 땅위의 평화”사건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요.(눅2:14) 예수는 땅위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인데요.


땅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가장 화급한 일은 무엇인가요? 경제성장이 아니지요. 분배정의의 실현을 통해 굶주린 사람도 없고 부유한 사람도 없는 정의사회 구현이었어요. 그것을 예수님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경제정의 실현 없는 평화선언은 거짓평화임을 본문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부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부자감세가 아니라 부자증세가 아기예수 탄생의 의미라는 것이었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상급식과 보편복지의 실현이 아기예수 탄생의 의미라는 것이었지요. 오늘 우리 언어로 번역하면, 사회정의 실현과 경제민주화가 아기예수의 탄생의 현대적 의미라는 것입니다. 경제정의를 내용으로 담은 참 평화의 실현이야말로 예수께서 오신 목적이라는 선언이지요.

지금까지 기독교는 어떠했나요? 아기예수 탄생의 본의미를 퇴색시키고, 인류 구원이라는 종교적 지평에서 해석하기에 급급했어요.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에서는 어떻습니까? 아기예수의 탄생은 백화점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물건들을 대대적으로 처분하는 연말세일 기간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종교적 교리나 상업주의에 매몰된 크리스마스의 본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기예수 탄생의 의미는 2 천 년 전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문제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정의, 분배정의, 경제민주화라는 개념들이 실종된 지 오래되었어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권은 99% 국민절대다수를 사지로 몰아넣으면서 1% 대기업들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어요. 노동악법이 국민을 위한 법이라고 호도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국민은 오로지 1% 재벌에 한정되어있을 뿐입니다. 

나라의 주인은 누군가요? 어디까지나 국민입니다. 대통령이 아니지요.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한시적으로 고용된 머슴일 뿐입니다. 헌데 머슴이 주인 노릇하면서, 주인인 국민의 뜻을 거역하는 일만 골라 한다면, 주인인 국민은 어찌해야 하나요? 머슴을 해고해야 하지요.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합니다. 예수보다 5백년 전에 살았던  중국의 맹자는 춘추전국시대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정당성을 말했어요. 

21세기는 어느 종교를 믿느냐보다, 모든 종교가 어떻게 사람답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저는 봅니다. 선교는 특정 종교인을 만드는 일에 급급해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회의 소수자들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정의사회 구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이는 아기예수의 탄생이 이 시대에 던져주는 화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