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칼럼

신명기 저자 모세, 마틴 노트의 '신명기적 사가' 가설 비판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22.

                   신명기 저자 모세, 마틴 노트의 '신명기적 사가' 가설 비판                                          

 

DeWette의 박사학위 논문 (1805-1806) 이후 Wellhausen Emil Kautzsch는 신명기의 저자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선지자()가 요시야의 개혁을 위해 문건을 작성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Young 박사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공개적으로 담대하고 확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가 어떤 이유에서 모세라는 이름 뒤에 몰래 숨어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한다. 주님 앞에 정직이 생명인 선지자()의 성격과 그()의 사역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선지자들은 동기야 어쨌든 간에 하나의 속임수를 썼다는 것이 아닌가. 구약의 다른 선지자들 중에 이런 속임수를 써서 선지서를 기록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꾸짖으셨을 때 신명기를 사용하셨는데, 그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은 이 속임수로 작성된 말씀을 이용하셔서 속이는 자를 물리치신 것이 된다.

 이런 난점을 피해가기 위해 Abraham Kuenen은 신명기가 선지자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견해도 참으로 이상한 것이라고 Young 박사는 말한다. 왜냐하면 Kuenen이 속한 Wellhausen 학파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선지자들을 견제한다는 것인데, 신명기의 저자가 제사장들이라면 어떻게 신명기의 내용이 선지자들을 존중하는 내용을 담고 있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요시야 개혁 당시 제사장들은 부패해서 개혁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 선지자 예레미야의 설교를 보면 요시야 때는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였고, 제사장들은 자기 수단대로 다스렸으며, 백성들은 그것을 좋아하여 입을 헤 벌리고 따르던 때였다. 부정과 부패로 이득을 보던 당시 제사장들이 모세라는 이름을 팔아 애써서 그 사회를 개혁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난점을 피해가기 위해 Pfeiffer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그는 신명기의 저자가 선지자적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한 제사장이었다고 본다. 당시 백성들이 그저 제사만 드리고 높은 종교성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 예루살렘의 제사장은 선지자들의 이상적인 가르침에 경도하여 제사장과 선지자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이 신명기 율법을 작성할 필요를 절감했다는 것이다. 뇌를 꽤 많이 회전하여 이런 견해를 발표했으나 Pfeiffer도 여전히 이전 학자들의 전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 이런 선지적 이상을 가진 제사장도 속임수를 써서 개혁을 했다는 것이다. 바른 이상을 지닌 이가 그릇 되이 꾸며 무슨 일을 도모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고 Young 박사는 말한다 (My Servants the Prophets, pp. 14-7).

 한편 신명기와 전선지서(, , , 왕 등)의 유사성을 주목하여 이 책들을 신명기 사가 (Deuteronomist)의 편집으로 본 Martin Noth의 견해가 있다.  회고적 문체, 연대기의 통일적 구조, 일관된 신학 등을 볼 때 이 책들의 최종 편집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출--민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땅의 정복과 그 땅에서의 삶을 내다보는 신명기의 독특한 선지서적 성격을 간과한 견해다. 신명기가 그 이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신명기 사가적 역사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예언의 지평 자체에 먼저 유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예레미야서와 포로 이후의 역사를 일차적으로 이어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BC 6세기의 역사와 예레미야서의 예언을 먼저 이어서 보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설교는 역사의 언약을 새롭게 하고 미래를 조망하는 것이지 예레미야적 사가에 의해서 예레미야의 예언과 그 이후의 역사가 엮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예언을 이어서 본 다음, 우리는 그 예언의 성취를 점검하는 것이다.

 이외에 신명기 저자에 대한 학설들로는 레위인 편집설 (G. von Rad, J. Lindblom), 북 이스라엘 선지자 전승 집단의 편집설 (E. W. Nicholson), 지혜문학적 성향을 가진 서기관 저작설 (M. Weinfeld)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명기 저작 (혹은 편집) 시기를 최소한 히스기야 이후로 잡는다는 것이다. 신명기를 모세의 저작으로 보지 않고 신명기의 특정 내용을 후대의 역사적 상황이나 문서의 내용과 연결시켜 신명기의 편집 시기 및 편집자를 후대로 판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학적 경향은 다소 차이는 있지만 다 DeWette의 전제를 답습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후대의 특정 상황에 신명기의 내용을 끼워 맞추어 그럴듯하게 편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신명기 저자 모세, 마틴 노트의 '신명기적 사가' 가설비판                                       

신명기는 모세의 설교-예언이며, 모세 죽음 기사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세 당대의 말씀이다. 이것의 최종 편집은 모세 사후에 곧바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신약의 복음서들을 보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후에 그 말씀들의 기록은 사도들에 의해 AD 90년까지는 모두 완성되지 않았는가.

 물론 시편이나 잠언은 그 편집이 오랜 시기에 걸쳐 이루어진 증거들이 있다. 시편 중에는 포로 후기의 시편이 있고, 잠언 중에는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시편들이 다윗의 시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요, 포로 후기의 시인이 다윗의 이름으로 그 많은 시들을 지었다는 것도 아니다. 그 많은 잠언들이 솔로몬의 잠언들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요,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솔로몬의 이름으로 잠언들을 지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후대에 다른 성경 기자들을 통해 주어진 계시가 추가되고 그 최종 편집이 이루어졌다는 것뿐이다.

신명기의 경우, 전혀 그 내용이 모세보다 몇 세기 지나 편집될 이유가 없고, 또 그러한 편집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 혹은 몇 세기 후의 정황 속에서 옛날에 존재한 모세라는 이름을 빌어 문서들이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없다. 왜냐하면 신명기 자체에 출애굽, 시내산 언약, 광야 여정에 대한 여실한 체험적 신앙적 진실들이 그 행간 곳곳에 배어있고 설교자(예언자)-목회자로서 가나안에 들어갈 백성들에 대한 깊은 사랑 속에 언약을 새롭게 함과 앞날에 대한 영적 통찰력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땅을 정복한 백성들에게 곧 바로 읽혀야 하므로 이 책은 그의 사후에 즉시 편집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