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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청교도 설교의 실제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24.

청교도 설교의 실제

PART Ⅲ

청교도 설교의 실제

시작하는 말

어떤 사회든지 잘못된 구조를 바로 잡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혁명적인 방법과 개혁의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왜곡된 기존 질서를 무력이나 힘에 의하여 급진적으로 고치고자 하지만 후자는 기존 질서의 왜곡됨을 인정하나 과격하게 고치는 대신 점진적으로 개선하려고 하는 방법이다.

종교개혁 시대 폭력적인 농민 전쟁을 선동하였던 칼슈타트(Karlstadt)나 토머스 뮌쳐(Thomas Muntzer)가 전자의 방법을 택하였다면 독일의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취리히의 개혁자 울드리히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i) 그리고 제네바의 개혁자 요한 칼빈(John Calvin)은 후자의 방법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지금 다루고자 하는 청교도들은 무지와 미신으로 가득 찬 영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과격한 혁명적인 방법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던 개혁자들의 전통을 따라 영국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처럼 칼에 의한 하나님 왕국의 지상 실현보다는 설교를 통해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상의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하지만 신령한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설교 로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며 교회들이 무지와 미신으로부터 개혁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청교도 설교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설교 없는 청교도 운동이나 청교도 없는 설교 역사는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청교도의 설교 이해는 청교도 이해의 지름길이다. 청교도들은 설교를 거듭남의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 운동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설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복음의 사역에 속하는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역사이며, 사람들을 은혜의 상태로 부르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존 코튼(John Cotton)도 ‘설교는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생명의 샘이신 그리스도’(Christ, the Fountain of Life)라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로 전파되거나 읽혀지는 것, 들려지거나 사경회를 통해서 증거 되는 것 그리고 명상에 사용되든지 인간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이라고 증거 하였다.

성경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권위라는 조나단 미첼(Jonathan Mitchel)도 “믿음이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은 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그것을 적용함으로 믿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설교자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말씀을 증거하고 저주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을 은혜의 상태로 부르는 사람이다.

I. 설교자의 자질

설교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요 첫째 되는 의무였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설교자의 자질을 자주 거론하곤 하였다. 설교자로서 올바른 자질을 갖춘 목사가 많을 때 교회는 안녕을 누릴 수 있지만 목사들이 설교할 줄 모를 때 교회는 악한 자들의 침입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도둑이 올 때 짖어 집을 지키는 것이 개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보았다.

토머스 비콘(Thomas Becon)은 그의 ‘요리문답서’(Catechism)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설교할 줄 모르는 목사는 애물단지와 같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벽면에 그려진 주교(主敎) 보다도 못하고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짖지 못하는 귀머거리 개’와 같다. 또한 그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길에 내버려서 사람들에게 짓밟힐 수밖에 없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배로운 피로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양 무리 위에 이러한 애물단지와 회칠한 벽과 같은 자들을 세운 자들에게 저주가 있을 찌어다.”

이 같이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일어날 때 무지와 미신으로부터 교회를 개혁할 수 있지만 자질을 갖추지 못한 목사들이 많아질 때 교회가 어지럽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신학교육의 우선적인 목표를 자질을 갖춘 설교자 양성에 두고 교육하므로 많은 수의 청교도 설교자를 배출하고자 했다.

설교자는 설교자로서의 자질이 있어야 한다. 청교도 신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서’는 설교자의 자격을 ‘충분한 은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공인되고 이 직분에 부름을 받은 자’로 규정하였다. 충분한 은사를 가졌다는 말은 설교자가 학문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부족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정식으로 공인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노회에 의하여 설교할 수 있는 강도권(講道權)을 받은 자들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신학적인 훈련을 받고 노회에 의하여 공인을 받는 자여야 한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설교자는 학문성과 경건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청교도 설교자들의 무덤에는 고인을 높이면서 그가 높은 학문과 경건을 실천하였다고 기록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청교도들이 설교자의 학문성과 경건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교도들이 설교자의 자질로 학문성과 경건성을 요구한 것은 당시 영국 성공회의 학적인 수준과 경건이 아주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청교도 운동이 일어날 당시 영국 성공회 목사들의 학문적 수준은 아주 낮았다. 영국 국교회(성공회) 예배는 단지 공동기도서를 읽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글을 읽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설령 목사가 학문적으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하더라도 공동기도서를 읽으면 되었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영국 국교회 목사들로 하여금 학문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16세기 중반 청교도운동의 봉화를 든 존 후퍼(John Hooper)의 보고서는 영국 국교회 목사들의 학문적 수준이 어떤 지경에 있었나를 잘 보여준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영국 국교회 목사 331명 가운데 171명이 십계명을 암송할 줄 모르고, 그 가운데 33인은 십계명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30명은 주기도문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27명은 주기도문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으며, 10명은 아예 암송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성직자의 무지는 백성을 무지로 인도할 것이므로 청교도들은 미신과 무지로 가득한 영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목사의 학문적인 자질을 높여야 한다고 믿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목회자가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스승인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가 지적한 것과 같이 “최소한 헬라어와 히브리어와 같은 언어들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필요하다. 이는 성경이 다른 인간적인 문서들에게 요구되는 동일한 수단들 즉 논리, 수사, 문법의 경험, 언어들을 통하여 이해되어야 한다는 데 기인한다.”라고 말헸다.

이런 점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작성한 ‘장로교 목사 안수 규칙서’는 목사 후보생의 자격 심사에서 목사 후보생은 ‘원어를 다루는 지식에 관하여 시험을 칠 것이다. 시험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읽음으로 치고 그 어느 부분은 라틴어로 번역하는데 만일 그가 결함이 드러나면 다른 공부도 철저히 살피고 특별히 그가 논리학과 철학을 습득했는지 검토할 것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이 같이 설교자의 학문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대학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혀 성경의 원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고 철학과 수사학과 논리학을 배워 효과적으로 말씀을 증거 할 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교부들의 설교로부터 당시의 많은 성경 해석자들의 글과 주석들을 섭렵하여 가장 학구적인 설교자 그룹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지식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실천되어야 하고 학문은 경건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경건은 말씀 가운데서 자족(自足)을 배우는 것이다. 지식이 있고 교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도 자족하지 못할 때 넘어지게 된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실족하게 된다. 학문적으로 저급한 상태에 있었던 영국 성공회 목사들이 많이 실족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영국 성공회 목사들은 고위 성직에 오르면 여러 교회를 돌보며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목사가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지 않아도 교회 관할권이 주어지면 관할에 속한 교회들은 사례비를 목사에게 바쳐야 했다. 이처럼 맡은 교회 수에 비례하여 목사의 수입이 결정되었으므로 목사들은 여러 교회 맡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세인트 아삽(Saint Asaph) 성당의 부주교 윌리엄 휴(William Hugh)는 16개의 교회를 맡아 월급을 챙겼다.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를 괴롭히던 리차드 뱅크로프트(Richard Bancroft)는 여섯 교회를 맡아 거기서 나오는 월급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래서 성공회 목사들의 유일한 관심은 어떻게 경건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양떼를 섬길 것인가에 있지 않고 재물 축적에 있었다.

청교도들은 교회를 돌보는 것보다 물질과 명예만 추구하던 성공회의 영국 교회 목사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경건의 실천을 역설하였다. 목사가 경건을 먼저 실천하는 것은 교회 개혁의 기초가 되었다. 왜냐하면 목사가 말씀을 실천할 때 성도들이 그를 존경하게 되고 목사가 존경 받게 될 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 데일(Jean Daille)은 말하기를 “목회자의 설교는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고 그의 삶은 설교로 대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오웬(John Owen)은 언행이 일치 않는 불경건 목회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아의 하인들은 방주를 지었지만 정작 그들은 다 물에 빠져 죽었다. 하나님은 악마에게 사로잡힌 영혼의 입술을 받지 않으신다. ‘예수는 친히 본을 보이고 가르쳤다.’ 만약 사람이 입으로는 진실하게 가르치면서 부정직하게 행동한다면 교리를 세운 것보다도 부정한 행실로 인하여 더 깊은 나락에 빠질 것이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게으르거나 위선적인 목회자를 정죄하고 말씀을 연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거룩을 실천하는 경건한 종들을 귀하게 여겼다.

청교도 목회자들은 경건의 실천을 장려하였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우렸다. 존 트랩(John Trapp)이 ‘설교자를 만드는 세 가지는 말씀과 기도와 시험’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청교도들은 경건한 설교자가 되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다했다.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매일 13시간씩 말씀과 기도에 착념하였고 하버드 대학을 세우는데 공헌하였던 존 코튼(John Cotton)과 뉴잉글랜드 청교도 운동을 대변하였던 코튼의 손자 코튼 매더(Cotton Mather)는 하루 12시간씩 경건 생활에 전념하였다. 코튼 매더의 아버지 인크리스 매더(Increase Mather)는 매일 쓴 일기를 통하여 하루의 일과가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이와 같이 경건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윌리엄 에임스가 지적한 것과 같이 일반적인 신자 이상으로 성경에 지대한 관심을 두지 않는 어떤 사람도 설교자의 직무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청교도 목사들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기도에 전념하므로 좋은 설교자가 되려고 한 것이다.

2. 설교의 준비

한편의 설교가 나오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청교도들은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목사들처럼 설교를 토요일에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준비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 가운데 한 사람인 토마스 쉐파드 (Thomas Shepard)는 한편의 설교를 위하여 3일을 바쳤다. 그는 설교 준비를 등한시하는 목사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일주일 내내 세상일에 묻혀 살다가 토요일 오후에서야 서재로 가서 설교를 준비하는 자를 저주할 것이다. 그때는 너무 늦어서 기도하거나 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나 마음을 조정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작성한 ‘교회 행정을 위한 지침서’(A Directory For Church Government)는 고의로 설교를 등한시하거나 가볍게 취급할 때는 노회가 그러한 목사를 권징을 하도록 하였다.

(1) 개인적인 성경 연구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먼저 개인적 성경공부가 있어야 한다. 먼저 설교하는 자기 자신이 은혜 받지 않고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성경공부에는 몇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청교도 설교학의 기초를 놓은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였던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는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할 것을 그의 후학들에게 권면하였다.

– 본문을 몇 번이고 읽어서 본문을 가슴에 새기고,
– 본문이 무엇을 정의(definition)하고 있는 지를 살핀 후 본문을 여러 대 지로 나누고(division), 대지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피고(explanation),

– 정통적인 신학자의 도움을 얻고,
–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을 간구하라.

이와 같은 개인적인 준비를 통하여 설교자가 은혜를 체험한 후 한편의 설교가 나올 수 있다.

(2) 말씀의 재해석

개인적으로 연구한 성경말씀을 설교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말씀의 재해석이 요구된다. 개인적인 성경 연구를 객관적인 성경 해석 또는 학문적인 성경 해석이라고 한다면 말씀의 재해석은 성령의 지도 아래서의 해석이다. 본문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성경 해석에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퍼킨스가 말한 것처럼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해석자는 성령님’(벧후 1:20)이시기 때문이다. 율법을 만드신 이가 율법의 최종적인 해석자(느 8:8)인 것처럼 성경의 절대적인 해석의 수단은 성령 하나님 자신이시다.

성경 해석에서 칼빈은 퍼킨스와 동일한 맥락을 유지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고 하였다. 그리고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므로 누구도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성경을 바로 이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원리를 따라 청교도들은 성경 해석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폴 베인즈(Paul Baynes)는 “성경은 모든 것을 그 안에서 제공하되 특히 (성경) 이해를 돕는다.”고 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 해석의 무오한 법칙은 오직 성경 자신이다. 성경의 최고 재판장은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뿐이시다.”라고 하였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기 위하여 성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칼빈의 사상이다. 칼빈은 성경을 해석할 때 성령에 맡기라고 하였다. 성경해석에서 성령에 맡긴다는 것은 성경 해석자가 성경 말씀 가운데 단어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해석토록 맡기고 그 다음 한 구절해석으로 나가고 그 다음에 한 문장을 해석하면서 성령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즉 마치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이 말씀을 해석하게 하므로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해석하고 문장들이 해석되어져 한 구절을 해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칼빈이 말하는 ‘말씀에의 양보’(yielding)이다.

말씀에의 양보의 다른 방편은 말씀을 상호 비교하므로 성경이 성경을 해석토록 하는 것이다. 전혀 반대되는 상황을 비교하거나 같은 사건에 대하여 각 성경 기자의 기록을 비교하므로 그 원래의 뜻을 찾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에 대하여 알고자 할 때 ‘증오’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살피며, 겸손의 결과에 대하여 알고자 할 때 교만의 결과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살피므로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다. 복음서의 말씀을 연구할 때 다른 복음서는 어떻게 기록되었나를 살피고 역대기의 말씀은 열왕기서의 말씀을 살피므로 원래의 뜻을 찾아 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원래의 뜻을 파악한 다음의 마지막 단계는 사도 신경과 같은 교리와 연관하여 교리를 유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 방법을 따라 청교도들은 인간적인 성경 해석을 배제하고 오직 성령이 해석하게 하였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도움을 받아 말씀을 바로 해석하여 성도들의 생활에 조명하므로 말씀운동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3) 설교의 구성

청교도들은 개인적인 성경 연구와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을 연구 한 것을 가지고 한편의 설교를 구성하였다. 설교의 주제는 성경에서 찾았고 서론 부분은 본문이나 본문의 문맥에서 인출하였으며 그 내용은 간단하고 명료하였다. 서론 부분에서 본문이 길 때는 간단하게 개념을 말하고 짧은 경우는 말을 바꾸어 설명하였다.

간단한 서론으로 시작한 한 편의 설교는 일반적으로 1)본문 해석, 2)교리 진술, 3)논증, 4)적용으로 구성되었다. 이 같은 구조는 퍼킨스가 ‘설교의 기술’(The Arte of Prophesying)을 통해 이미 제시한 바 있다. 그는 한편의 설교에 바른 성경 해석과 교리 진술과 삶에의 실제적인 적용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에임스도 ‘신학의 정수’에서 본문 해석, 교리 유추, 증명, 적용의 순서로 설교를 구성할 것을 제시했다. 그러면 청교도들의 이 설교 구성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 본문 해석

서론적인 설교 말씀이 끝나면 본문 해석이 따랐다. 청교도들은 성경 본문으로 1,2절을 사용하였고 설교제목을 붙이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제목 없이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철두철미한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해석하였다. 설교자가 본문을 해석할 때에 어떠한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느냐에 따라 본문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개혁주의적인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느냐 루터란의 전제에서 해석하는가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칼빈의 성경 해석의 전통을 따라 본문 말씀을 역사적, 문법적으로 해석하였다.

성경의 역사적인 해석이란 그 말씀이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해석되는 상황 곧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하여, 그전의 상황은 어떠하고, 그 이후의 상황은 어떤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문법적 해석이란 전후 문맥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역사적, 문법적 성경 해석의 기초 위에 수사학적이요 논리적인 분석을 첨가하므로 성경을 해석하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본문 해석을 통하여 먼저 성경이 쓰여진 역사적인 상황을 살폈다. 수신인과 발신인에 대하여 말한 뒤에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리고 본문에 쓰여진 단어를 연구하고 정의한 후 문장을 해석하였다. 문장을 해석 할 때는 원문에 따라 해석하여 성경의 모든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 교리 유출

교리는 ‘성경의 명시적인 단어들로 표현되거나 혹은 직접적인 결과로 이들로부터 도출된 신학적인 원리’이다. 청교도들은 교리 진술 (또는 교훈)을 본문에서 추출하였다. 본문을 가지고 여러 대지나 소지로 나눌 때 대지나 소지에서 하나의 교리나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존 우달(John Udall)은 말하기를 “성경의 모든 문장에는 최소한 하나의 일반적인 교리가 숨어 있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본문에서 교리를 유추하여 설교의 방향을 제시하고 청중에게 무슨 설교를 하는지를 보여주곤 하였다. 교리는 성경에서 먼저 발견한 후 그것을 논의했다. 주어진 본문에서 교리를 발견하는 것은 논리적인 분석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수사학과 문법이 동원되었다. 유추된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진리이어야 하고 교리가 성경에 포함되거나 근거한 것이어야 했다. 교리를 강조할 때는 듣는 이들이 덕을 새우는데 목적을 두고 평범한 용어로 설명하였다. 청교도들은 설교를 책으로 출판할 때 교리 부분을 ‘D.’나 ‘Doct.’ 또는 ‘Doctrine’으로 써서 독자가 쉽게 무슨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 논증(또는 예증)

교리 진술이 나온 뒤에는 반드시 왜 그 교리를 진리로 채택하여야 하는지를 논증을 했다. 청교도들은 이 부분을 논증(Reasons) 또는 예증 (Proofs)이라고 칭했다. 예증 또는 논증은 성경의 보다 명백한 증거들로부터 추출되며 납득이 가는 것이어야 했다. 본문의 논리를 이용하여 논증하거나, 인간적인 경험이나 이야기, 그리고 신학자들과 교부들의 진술을 가지고 논증할 수 있었다. 또한 상식에 근거하여 호소하거나 예화를 들어 설명하였다.

예화는 교리를 예증하는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는 “우리가 교리 부분만 읽을 때 다만 이것들을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예화를 듣거나 읽게 되면 그것들은 감정을 통해 우리 자신이 당한 것처럼 여겨진다.”고 하였다. 예화 사용은 사실에 근거하거나 정확한 것만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교리를 인정해 주는 유사한 성경 말씀을 논증으로 사용할 경우 그 말씀이 명백하고 적절한가를 살폈다. 논증의 다른 방법으로 설교자가 대화 형식을 이용하여 회중에게 질문을 하든지 아니면 반대되는 입장을 소개한 후 그에 대하여 반증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 적용

적용은 회중을 설득하는 과정으로 책으로 출판될 때는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Application’ 또는 ‘Use’라는 말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적용은 설교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표적인 설교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gry God)은 38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9개의 문단이 바로 적용 부분이다. 에드워즈의 설교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적용을 위하여 설교하는 것처럼 적용을 강조하였다.

제임스 더램(James Durham)은 말하기를 “적용은 설교의 생명이다. 어떤 심오한 진리를 찾아내는 것보다도 청중에 양심에 호소하고 그것을 생활에 옮기도록 하는 일은 더 많은 연구와 기술, 지혜, 권위와 평이함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목사는 교리를 찾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적용하는 것도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므로 설교는 설득, 증거, 간청, 탄원, 또는 요청, 권면이라고 불린다.”고 하였다.

설교에서 적용을 강조하는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청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권능이 충만하여 마음과 생각과 뜻을 살핀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설교를 통하여 ‘불신자나 무식한 사람이 자기 마음의 비밀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데’ 있다. 즉 불경건한 삶으로부터 경건한 생활로 개혁하는 데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적용 시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거짓된 교리를 반박할 때 필요 없이 이단의 사상을 말하거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의무를 권면할 때는 그것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까지 제시하여야 한다. 또한 질책을 할 때는 그 죄의 성격과 중량과 거기 따르는 죄의 비참함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듣는 이들에게 그것 때문에 닥칠 큰 위험성을 보여주고 동시에 구제책과 그것을 피할 방법을 알려 주어야한다.

(4) 논리의 적용

본문을 해석하고, 교리를 발견하고 그 교리를 논증한 후 적용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 적절한 논리이다. 청교도들은 프랑스의 위그노 논리학자 피터 라무스(Peter Ramus, 1515-1572)의 논리를 설교에 활용하였다. 라무스의 논리는 1572년 이후 영국의 대학에서 성경 해석의 한 방편으로 가르쳐졌고 하버드 대학에서는 1636년 이후 교과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라무스 이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논리를 대학에서 가르쳐 왔는데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연역논리에 근거하여 교회법을 해석하거나 교황의 교서를 설명하곤 하였다. 라무스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논리는 성경의 논리와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신학에서 성경적인 논리를 적용할 것을 역설하였다. 라무스가 말하는 성경적인 논리는 귀납법적인 논리이다. 라무스가 말하는 성경적인 논리는 다음과 같다.

– 대전제

참된 메시아는 하나님이요, 다윗의 씨로 태어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 하고 율법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는 신자들의 죄를 위하여 죽어야 하고 무덤에서 부활하여야 한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늘 보좌에 계시다가 세상을 심판하러 오셔야한다.

– 소전제

마리아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가 그러한 사람이다.

– 결론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는 참되신 메시아이시다.

이러한 라무스의 삼단논법을 따라 청교도들은 본문에서 먼저 본문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제를 취하였다. 그 뒤 본문의 중심 사상 가운데 교리를 유추하여 소전제로 발전시켜 나아갔다. 또한 그들은 유추된 교리를 상반되는 것에 비추어 검토하고, 그것을 비교 검토한 뒤 적용으로 나아갔다. 곧 ‘갑’은 성경에서 이렇게 말한다.(예를 들면, 겸손) ‘을’은 성경에서 이렇게 부정한다.(예를 들면, 교만) 그리고는 ‘갑’과 ‘을’을 대비시키고 결론으로 이끌어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우리는 ‘갑’을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존 코튼(John Cotton)의 예를 살펴보자. 그는 대전제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보존하고 계신다.’ 소전제로 ‘풍차는 바람에 의하여(by the wind) 돌아 갈 뿐만 아니라, 바람 속에서(in the wind) 돈다.’ 결론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생명이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으로 믿어 그리스도에 의하여 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1639년 11월부터 1640년 2월 사이에 행한 16편의 설교에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은 논리로 전개하였다. 그는 대전제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계시가 실현되고 복음이 왕 노릇 하는 시기가 온다.’고 말하고, 소전제로 ‘로마 가톨릭에 의하여 교회의 타락과 이단이 일어났다.’고 말한 후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기 위해서는 로마 가톨릭을 폐지하고 배척하여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3. 설교의 전달

설교가 잘 준비되고 조직되고 논리 정연하게 구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이 잘못될 때 설교의 효과는 반감하게 된다. 잘 준비된 한편의 설교가 효율적으로 증거 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 연구되어야 한다. 청교도들은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 설교자들은 설교 전달 과정에서 성령의 증거를 강조하였다.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설교는 성령의 사역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는 말하기를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간다.”고 하였다. 에임스는 설교할 때에 “인간의 지혜를 과시하거나 육적인 감정들이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성령의 증거로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설교에는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나타나야 한다. 곧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 안에 그에 의하여 말씀하는 것과 같이 설교해야 한다. 이와 같은 성령의 예증은 언어와 제스쳐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언어는 영적이고 은혜스러워야 한다.

에임스는 설교 전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어와 행동은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완전히 영적이어야 한다. 발음은 자연스럽고 친숙하며 분명하여 쉽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감정을 움직이기에 적당하여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가 피하여야 할 말은 무겁고 느리거나 노래하는 투의 말이나 졸리는 말이며 심지어 한 단어의 음절까지도 마치 쉼표를 찍은 것처럼 단락과 단락 끊어 말하는 것도 멀리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성급하고 빠른 소리도 삼갈 것이다.” 그러면 설교를 어떻게 은혜롭게 증거 할 것인가?

효과적인 설교가 되려면 전하는 설교자와 말씀을 듣는 청중 편에서 상호 노력이 필요하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59문은 설교 전달자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말씀의 사역에 시중들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은 바른 교리를 전파하되 부지런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할 것이며 명백하게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오로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할 것이며, 충실하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지혜롭게 청중들의 필요와 이해에 적용시킬 것이며, 열심히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영혼들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할 것이며, 성실히 하나님의 영광과 회중의 회심과 덕을 세우는 것 그리고 구원을 목표로 삼고 설교할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증거 되도록 하는 것은 목회자만의 의무가 아니다. 말씀을 듣는 회중에게도 책임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60문은 설교가 행해질 때에 회중의 자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를 듣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부지런함과 준비와 기도로 설교 말씀에 따르되 그들이 들은 바를 성경에 의하여 살펴보고, 참된 교훈은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에 받아들이며, 그 말씀을 묵상하고 참고하며 그들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들의 생활에서 그 말씀의 열매가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이와 같이 은혜롭게 설교하기 위하여 설교학적인 기술을 개발할 것을 주장하면서 설교자와 회중의 의무를 논하였다.

청교도 설교에서 특이한 것은 설교를 기록된 말씀을 읽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설득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설교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원고를 가지고 읽어도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설교를 단순히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설득하는 것으로 보았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설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말씀으로 회중을 설득하기 전에 설교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설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은 우선적으로 그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회개하고 바로 선 다음 설교할 때 능력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청교도들은 설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설교를 암송하였다. 청교도들에게 토요일은 기도의 날로 설교를 암송하는 날이었다. 토요일에는 엿새 동안 준비된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고 묵상하곤 하였다. 어떤 이는 강단에 올라가 설교를 예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교 준비로 청교도들은 주일 강단에서 원고 없이 설교할 수 있었다.
4. 설교 문체(文體)

청교도들은 여러 가지 인용구로 짜깁기하고 허세로 장식하는 영국 성공회의 설교체를 배척하였다. 성공회 목사들은 설교에 교부들의 글을 인용하거나 라틴어나 헬라어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여 많이 아는 것을 자랑하곤 하였다.

설교가 학문적이 되거나 학문성만 나타내게 되면 회중의 귀를 즐겁게 해 줄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를 청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윌리엄 퍼킨스는 이러한 설교들은 “그리스도를 그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그린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윌리엄 에임스는 식자들에게만 알려진 이야기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단어들과 문장들은 회중들에게 혼돈만 일으킨다고 말하면서 결코 설교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청교도들은 지성(知性) 위주의 설교를 배격하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게 설교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초창기 학장이었던 헨리 던스터(Henry Dunster)는 목사 후보생들에게 말하기를 “전하고자 하는 교리를 가능한 한 평이하게 말하고 교리가 말하는 그것만 말하라.”고 하였고, ‘예배 모범서’는 “가장 비천한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평범하게, 진리를 사람의 지혜로 권하는 말로 하지 말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효력 없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며, 알지 못할 말이나 이상한 문구나 소리와 단어를 무익하게 쓰는 것을 삼갈 것이다.”라고 제안하였다. 그래서 코튼과 같은 많은 청교도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의도된 설교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평이하게 설교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청교도의 설교체를 평이체(平易體, Plain style)라고 부른다. 평이체는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교하는 것과 설교의 초점을 회중의 가슴을 향하여 두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전통적인 수사 기법과 배열이나 적절치 못한 웅변이나 회중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 또는 다른 언어를 설교에 인용하는 것을 금하였다.(물론 청교도 목사들은 그러한 것을 말하고 쓸 수 있었지만)

설교의 목적은 알아듣고 깨달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므로 설교자는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설교한다고 함’은 헨리 스미스(Henry Smith)가 지적한 것과 같이 무례하거나 무식하게 또는 어지럽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사람도 마치 그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무엇이 가르쳐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平易)하고 명료하게 설교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에게 설교는 지식 전달이 아니라 행동으로 열매를 맺는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설교의 초점을 머리에 둔 것이 아니라 회중의 심장에 두었다. 리차드 매더(Richard Mather)는 말하기를 “설교자의 화살은 사람의 머리에 대고 쏘지 않고 그들의 마음과 심장을 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즉 회중의 머리를 향하여 화살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향하여 대포를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이하게 설교가 전달 될 때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가 지적한 것과 같이 불이 열을 내듯 말씀이 설교에 의하여 회중의 가슴에 불을 붙인다. 청교도들은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교하므로 말씀을 온 백성에게 적용하려고 하였고, 가슴에 대고 설교하므로 전파된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 실현되어 교회 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제스퍼 로젠마이어(Jesper Rosenmeier)가 청교도들이 평이체 설교를 통하여 “개인의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사회까지도 개혁하고자 하였다.”고 한 것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5. 설교와 예표론

청교도들은 구약과 신약의 조화는 물론 계시의 연속성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구약 설교보다는 신약에 치중하는 것과는 달리 구약과 신약을 같은 비중으로 설교하였다. 카든은 매사추세츠 주의 5개 지역에서 163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증거 된 500개의 설교 가운데 42.1%가 구약, 57.9%가 신약을 본분으로 하는 설교였다고 지적하였다.

청교도들에게 구약은 신약의 예표였다. 구약의 인물들, 의식들, 장소들 그리고 다른 요소들은 신약 시대의 예표로 구약의 사건이나 인물을 이중적으로 설명하여야만 하였다. 곧 예표가 되는 과거의 실재와 예표가 상징하는 현재의 실재를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예표론은 종교개혁 때까지 이어 온 중세의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었다.

청교도들은 예표론에 근거하여 유대인의 성전을 복음적인 교회의 예표로, 노아의 방주를 그리스도의 교회의 예표로, 가나안 땅을 천국의 예표로, 아가서에 나오는 피부 검은 여인을 죄악 가운데 있는 교회를 상징으로 해석하였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악에서 벗어남을, 홍해를 통과한 사건은 그리스도의 피로 광야의 유혹을 통과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고난을 당하고 정결케 됨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빠진 죄 또는 포로를 의미하며, 이스라엘의 이교적인 가나안과 싸움은 성도들이 죄악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청교도 설교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 예표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구약의 예표들 곧 삼손, 모세의 장막, 솔로몬의 성전,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아담, 모세, 에녹, 요셉, 솔로몬은 자주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다윗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로, 대제사장은 성도를 위해 대언 기도를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모세의 율법에서 희생의 제물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예표론적인 해석이 가져 올 수 있는 문제는 본문의 의미에서 떠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청교도들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토록 하였다. 토마스 쉐파드에 의하면 한 성경은 다른 성경에 빛을 비추어 준다.(One Scripture gives light unto another). (Thomas Shepard, Church Membership of Children, p. 12 in Puritan Chriistianity in America, p. 125.)

6. 설교의 주제

청교도들의 설교주제에 대하여 살펴보자. 카든은 1630년에서 1700년 사이의 3세대에 걸친 24명의 설교를 연구하였는데 그 중 분류 가능한 것이 80%가 된다고 하였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청교도의 설교는 다음과 같은 5개의 주제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 죄 문제
–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
– 구원으로의 초대
–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 교회와 가정에서의 가족 관계

청교도들은 죄 문제를 다룰 때 어떤 특별한 죄 또는 일반적인 죄의 개념만이 아니라 죄가 사회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그리고 죄의 영적인 결과와 참된 회개를 통한 사죄의 가능성을 다루었다. 제1세대의 청교도들보다 제2세대와 제3세대가 죄 문제를 더 강조했다. 제2세대가 구약을 근거로 이 문제를 주로 다뤘다면 제3세대는 신약을 근거로 다뤘다.

청교도들은 인간이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이단적으로 간주하였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구별된 삶을 살 것을 역설하였다. 성도로써의 구별된 삶은 인간의 구원을 가져오지는 못하지만 사회를 밝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룩한 삶의 강조는 모든 세대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구원으로의 초대에 대한 설교는 모든 청교도들이 행한 설교의 20%를 차지한다. 제1세대에서는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제목 가운데 구원 주제가 26.7%로 제일 많이 취급되었고, 제2세대들의 설교 가운데는 8.5%를, 제3세대에서는 22.9%를 차지한다. 그리스도의 됨됨이와 사역에 대한 설교는 전 세대에 걸쳐 약 10% 차지하는데 그 가운데 25%가 구약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다. 그리고 제1세대는 제3세대보다도 4배 이상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가족 관계로 이해하였다. 특히 교회와 사회는 바로 가족관계를 통하여 이해되었다. 모든 사회 구조의 기초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인크리스 매더는 1679년 가정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가정은 교회와 국가의 유아원입니다. 가정이 메마르면 모든 것이 황폐화됩니다. 가정의 질서가 잘 서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국가는 더 나은 가정을 위해서 힘을 써야 합니다. 뉴잉글랜드의 가장 큰 비극은 가정들이 파괴되고 있다는 점입니다.”라고 경고하였다.(Carden 127-129)
맺는 말

청교도들은 목사의 자격으로 학문성과 경건성을 강조하여 목사의 수준을 높였고, 말씀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해석하므로 성령 중심적인 설교 운동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본문 해석, 교리 유추, 논증, 적용을 설교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 보았고, 그것을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원고에 얽매이지 않고 쉽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증거 하므로 회중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설교운동으로 청교도들은 설교자의 무리를 형성하였다. 초대 교회 이후 오늘날까지 최대의 설교자와 설교자의 그룹이 바로 청교도들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설교운동으로 청교도는 설교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16세기 영국에서 청교도와 성공회를 구별하는 척도로 설교가 사용되었다.

그래서 성공회 지도자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는 영국인들이 성공회의 설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청교도의 설교를 더 좋아한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청교도 설교가 당시에 얼마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로렌스 차더톤의 예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16세기 말경 로렌스 차더톤 (Laurence Charderton)이 그의 고향에서 설교하였다. 2시간 이상 설교했기 때문에 그는 말을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청중들이 “목사님, 제발, 제발 부탁하오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설교하여 주십시오!”라고 애원하였다. 차더톤은 교인들의 집요한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여 설교를 계속하였다.

이런 일은 특별한 경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설교자는 능력 있는 설교로 회중의 관심을 끌었고 회중은 말씀을 듣는 일에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이러한 설교 운동을 통하여 청교도들은 무지와 미신이 왕 노릇하던 영국을 80년 만에 개혁하여 신사의 나라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정과 교회와 국가 영역에서 왕 노릇하던 역사상 가장 도덕적인 사회를 이루었다.(*) 글쓴 이 / 오덕교 교수(몽골 국제울란바타르대학교, International University of Ulaanbaatar 총장) 총신대학교 대학원(Th.M.) 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Research Fellow,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P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