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앤공주의 이야기와 토마스 모어
토머스 모어(바로 옆 그림)의 《유토피아》의 원제는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의,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새로운 섬에 대해서의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이다. ‘유토피아’라는 새로운 말을 유행시킨 이 저작은 초기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지만, 더 나아가 인류의 영원한 염원, 곧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행복한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는 염원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으며, 이 저작의 긴 생명력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 최선의 국가, 인간의 윤리적 건강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는 항상 참신한 교훈을 줄 것이다.
'유토피아(Utopia)'는 이름 그대로 ‘몽상의 나라’가 아니라, 사실은 인간 각자의 마음속에 실재하는 ‘염원의 나라’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토피아’는 현대가 안고 있는 허다한 문제에 대한 훌륭한 해답도 되리라.
《유토피아》는 토머스 모어에 의해 라틴어로 씌어진 것인데, 이를 처음 영역英譯한 사람은 랄프 로빈슨이다. 1551년에 로빈슨의 영역본이 나온 이후 다시 1695년에 길버트 버네트의 영역본이 나왔고, 그 후 이 책은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사람들의 양식을 가다듬어 주었다.
토머스 모어는 1478년 2월 6일 영국 보통법원의 판사 존 모어의 둘째 아들로 런던의 밀크 스트리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은 상당한 명망을 얻고 있기는 했으나 귀족은 아니었다.
모어는 열두 살에 켄터베리 대주교 겸 대법관이었던 존 몰턴의 집에 입주하게 되었다. 어린 모어가 당시 정계 및 종교계에서 최대의 존경을 받고 있던 몰턴으로부터 받은 인격적 감화는 심대하여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몰턴으로부터 어떠한 감화를 받았는가는 《유토피아》 제1권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몰턴도 모어의 장래를 촉망하여 “이 아이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모어는 14세 때 몰턴의 추천으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한 기간은 2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동안에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의 삶은 모어에게 있어서는 지적 생활에의 입문이었다.
당시의 영국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물결이 휩쓸고 있었다.
모어가 라틴어 공부를 완료하고 그리스어 공부에 열중하기 시작할 무렵, 모어는 옥스퍼드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모어를 법률가로 만들기 위해 ‘뉴 인(New Inn : Inn은 변호사 자격 수여의 권한을 가진 법률협회로 법학 학원을 겸하고 있었다)’에 입학시켰다. 1496년 2월에는 ‘린칸스 인’으로 전학하여 1500년에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 동안에도 그는 신학문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린칸스 인’에 입학한 지 2년 후에 일생을 통해 굳은 우정을 유지해 온 에라스무스를 알게 되었다.
1504년 봄, 그는 처음으로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의회에서 헨리 7세가 강요하는 가혹한 세금 부과안에 반대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공직생활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헨리 7세는 모어의 반항에 대한 보복으로 모어의 아버지에게 1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하고, 벌금을 납부할 때까지 런던탑에 감금했다.
공직생활에서 물러난 모어는 가까운 친구들과 사귀는 것 외에는 소박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이 무렵 그는 수도사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 당시 그가 탐독한 것은 피코의 저술이었으며, 그의 저술을 몇 가지 번역하기도 했다.
헨리 7세가 재위하고 있는 동안에 모어는 법학 연구와 피코의 저술을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가 파리나 루베에 가서 대학 제도를 연구한 것도 이 무렵인 듯하다.
1509년, 헨리 8세(바로 옆 그림)가 왕위에 오르자 모어는 곧 왕립 법학원의 감독관이 되었고, 1510년 9월에는 런던의 대리집정관代理執政官이 되었다.
1514년, 신성로마제국의 황태자 찰스와 헨리 8세의 누이 메리의 파혼으로 영국과 신성로마제국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양모羊毛는 당시 영국의 주요 생산품이었고, 신성로마제국 통치하의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는 모직 공업의 중심지였다. 영국은 모직물을 세금 없이 수입할 수 있었으므로, 영국도 양모를 세금 없이 수출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찰스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던 때이므로, 플랑드르에 양모 부족을 야기할 생각으로 플랑드르로의 양모 수출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신성로마제국과 영국의 관계에 파탄이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으므로, 헨리 8세는 친선 관계의 회복을 위해 특명 공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 때 특명 공사는 카드버트 탄스털이었다.
런던의 상인들은 사절 파견의 소식을 듣고 상인측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토머스 모어를 사절단에 참가시켜 줄 것을 청원하여 허가를 받았다. 상업관계의 문제만을 다루기로 하고 사절단을 따라간 모어는 《유토피아》를 구상하고, 이 여행 중에 안트워프에서 《유토피아》 제2권의 주요 부분을 집필했다.
모어는 약 7개월 동안 해외에 체류했다가 그 해 연말에 귀국했다. 그가 맡았던 상업 부문의 협상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타결을 보았기 때문에, 헨리 8세는 그의 출사出仕를 바라게 되었다. 에라스무스의 말대로 ‘왕실에 끌려 들어간’ 모어는 영전을 거듭하여 1529년 10월에는 대법관이 되었다.
그런데 모어는 그 인품이 쾌활하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편견이 없었다. 《유토피아》의 종교관은 바로 모어 자신의 종교관이었다. 이와 같은 모어가 영국 최고의 법관이 되어 영국의 운명을 맡게 되었으므로, 종교에 대해서는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입장을 취할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영국에는 종교개혁의 실제 운동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명예를 얻었을 정도이므로, 왕실은 개혁에 대해 단호히 반대했다. 이러한 왕실의 태도와는 반대로 지식계급 사이에서는 종교 개혁의 기운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이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 모어는 준엄한 태도로 반대했다. 그의 활달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생각할 때,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완강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모어가 직접 신교도에 대한 박해와 학살을 지휘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종교개혁 반대의 입장에서 신교도 박해를 묵인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유토피아》에 나타난 자유로운 종교관과는 반대되는 모어의 이러한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는 종교개혁이 유럽의 장구한 기독교 문명과 이 문명에 바탕한 사회를 파괴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유토피아》에서 상세하게 설파한 신앙의 자유를 실제 정치에 적용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정치가로서 그가 《유토피아》에서 말한 공유제도를 실시할 의사를 갖지 않았던 것도 물론이다.
그러나 헨리 8세와의 밀월여행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헨리 8세는 즉위하자 형 아더의 미망인인 캐더린(바로 옆 그림)과 결혼했으나, 메리 공주(훗날 메리 1세 여왕) 외에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1532년 11월,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훗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어머니. 맨 마지막 그림)과 결혼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 결혼을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10일 이내에 이혼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헨리 8세는 곧 로마 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영국 내의 모든 교회의 교주임을 선언했다.
1532년에 가톨릭을 옹호하던 모어는 자기의 입장이 불리함을 깨닫고 대법관직을 사퇴했다. 그는 다음 해에 거행된 앤 왕후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534년 3월, 왕위 계승법이 의회의 동의를 얻었다. 이 법은 헨리 8세와 앤 왕후의 소생에게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메리 공주는 서출로 인정하여 왕위 계승을 금지했다. 모어는 이 법안에 동의한다는 선서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그는 선서를 거절했다. 메리를 서출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캐더린과의 결혼이 불법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런던탑에 감금되었다. 1535년, 그는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사형을 선고받던 광경은 매우 감동적이다.
모어는 오랜 감금 생활로 신체가 허약해져 친구이자 런던탑 책임자 킹스턴이 런던 다리 근처까지 데려다 주었다. 킹스턴은 모어를 호송대에 인계하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이 모습을 보고 모어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소.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 즐겁게 사십시다.”
라고 킹스턴을 위로했다.
그는 아들과 딸이 슬피 울며 매달릴 때에도 태연히 이별의 키스를 해주고 오히려 자식들을 위로했다.
그는 사형집행인의 통고를 받고,
“이 음침한 세상에서 이토록 빨리 벗어나게 해주신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리나이다. 저는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저 세상에서도 폐하를 위해 기도하겠나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사형집행인에게,
“기운을 내게. 자네의 직책 수행을 주저할 필요가 없네. 내 목은 대단히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라고 태연히 농담을 하며 최후를 맞이했다. 1535년 7월 6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5월 19일, 앤 불린 왕비 또한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간통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 텍스트 : <유토피아>. 범우사판. 옮긴이 황문수(경희대 교수) 선생님의 글을 편집.
- 그림 출처 : http://www.wf-f.org/WFFResource/StThomasMore.jpg
http://englishhistory.net/tudor/monarchs/boleynmainjpg.jpg
http://www.ronaldbrucemeyer.com/rants/1011almanac.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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