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 최고의 법학자가 남긴 필생의 역작
세계적인 법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인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이 남긴 필생의 역작 [정의론(Justice for Hedgehogs)]이 박경신 교수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드워킨은 롤스 이후 금세기 최고의 법철학자로 평가받는 학자로, 2000년대 내내 법철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학자이며 다수의 주저들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힌 바 있다.
2011년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출간된 [정의론]은 저자가 평생에 걸친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거대한 체계로 종합하는 한편 그동안 다뤄 왔던 법철학과 정치사상의 토대를 밝힌 거대한 ‘가치들의 우주’로, 출간되자마자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대작이다. 게다가 이 책 출간 후 2013년 드워킨 교수가 안타깝게도 작고하게 되면서, 드워킨 사상의 집대성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가치는 더욱 소중해졌다.
일찍이 드워킨의 [생명의 지배 영역]을 번역한 바 있으며 2008년 저자 방한 시 지적 교류를 나누었던 박경신 교수가 동료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더욱 믿을 만한 번역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1세기 데카르트가 쌓아 올린 ‘가치들의 우주’
이 책 [정의론]의 원제는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Justice for Hedgehogs)’다. 여기서 ‘고슴도치’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에 의해 유명해진 아르킬로코스의 시구,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라는 말에서 왔다.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 정의, 평등과 자유, 법과 민주주의 등 수많은 가치들을 관통하는 ‘큰 것 하나’를 집요하게 탐구함으로써 우리 앞에 놓은 수많은 어려운 판단들을 돌파하고자 한다.
드워킨의 [정의론]은 크게 세 가지 가정 위에서 전개된다. 첫째, 도덕적 판단의 독립성. 둘째, 가치들의 통합성. 셋째, 가치들의 해석적 특성이 그것이다.
먼저 드워킨은 ‘도덕적 판단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오늘날 만연한 회의주의적 관점, 즉 도덕적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입장의 차이들만이 있다는 관점을 논박한다. 그러한 관점은 논리적으로도 자기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 정치의 영역에서는 소용이 닫지 않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판단의 문제를 도덕의 영역에서 다루지 않고 메타윤리의 문제로 끌고 가는 것 역시 드워킨은 비판한다. 그는 "도덕의 영역은 논변의 영역이지 날것 그대로 존재하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다"라면서 도덕적 추론은 사실의 문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해석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사실’이 아니라 ‘해석’일 수밖에 없는 도덕적 판단의 영역에서 어떻게 진리를 도출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드워킨의 세 번째 가정, 가치들의 해석적 특성을 고찰하게 된다. 그는 "해석의 성공(해석 대상의 의미에 관한 진리를 획득하는 것)은, 해석 대상과 관련성이 있는 해석적 관행의 목적을 최선으로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학적 주장들과 달리 해석적 명제들은 날것 그대로 참일 수가 없다. 즉 그것들은 스스로도 날것 그대로 참일 수 없는 가치 체계에 의존하는 어떤 해석적 정당화에 의거해서만 참이 될 수 있다. 주 정부들이 미성년자에게 운전면허증 발급을 거부하는 것이 평등 보호 조항에 대한 최선의 해석에 따르면 위헌이라는 것은, 모든 법률가들의 생각과 관계없이 참일 수는 없다. 하나의 해석은 어떤 추가적인 사실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참인 해석적 주장이 참인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이유가 그 반대 주장을 받아들일 이유들보다도 더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도덕적 진리란 해석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사회적 실천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도덕적 판단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가치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평등한 배려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중 어떤 것이, 또는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 중 어떤 것이 최선 혹은 참된 것인가를 평결하기 위해 우리가 최종적으로 설 수 있는 중립적인 성격의 과학적,형이상학적 지평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가치들의 해석을 둘러싸고 경합을 벌일 수밖에 없는데,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가치들의 통합성’이다.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기본적인 도덕적 개념에 대한 해석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해석들을 보다 광범위한 가치의 틀 속에 위치시켜 시험한다. 이렇게 위치시킴으로써 문제의 해석들이 우리가 다른 개념에 대한 최선의 개념관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과 부합하는지, 또 그것들에 의해 지지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다."
즉 자유나 평등, 부조와 책무 등의 가치들은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 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해석을 통해 서로 연관되는 방식을 통해서만 타당성이 인정된다. 따라서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의 ‘진리 문제’란 이처럼 상호 연관된 가치들의 덩어리 간의 지속적인 경합이 된다. 이처럼 서로를 정당화하는 가치론들의 조합 중 논리적 통합성(integrity)이 가장 강한 것이 지고의 가치가 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도덕과 법, 정치 등은 위계적으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가치들의 우주’를 이루게 된다.
"도덕성 일반 역시 나무의 구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법은 정치적 도덕성의 한 가지(branch)인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도덕성 자체는 보다 일반적인 개인적 도덕성의 한 가지이고, 개인적 도덕성은 다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한층 더 일반적인 이론의 한 가지인 것이다."
이는 법을 규칙들의 체계로만 볼 뿐 도덕과 무관하다고 간주하는 법실증주의를 비판해 온 드워킨의 입장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드워킨이 왜 단순한 법철학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에서 가장 위대하고 야심적인 사상가인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데카르트가 철학에 대해 했던 일, 즉 모든 가치들의 ‘코기토(cogito)’를 찾아 다시 그 기반 위에 모든 가치들을 재정립하려는 거대한 작업을 시도한다. 이것이 이 책이 (그 내용의 찬반을 떠나) 금세기의 고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잘 살아 내는 것’이 윤리와 도덕의 기초
이 거대한 작업에서 드워킨이 찾아낸 ‘코기토’는 바로 잘 사는 것(living well)이다.
"우리 각자는 삶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터질 듯 충만하다. 모든 동물 중 분명히 부조리한 이 상황을 의식하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인간뿐이다. 죽음이라는 작은 언덕 바로 아래 우리가 살면서 찾을 수 있는 가치는 오로지, 우리가 실제 그렇게 찾고 있듯이, 부사적인 가치(‘잘 산다’고 할 때의 ‘잘’과 같이 ‘어떻게’와 관련된 가치들)다. 우리는 삶의 가치(삶의 의미)를 잘 사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잘 사랑하고, 그림을 잘 그리고, 글을 잘 쓰거나 노래를 잘 부르는 것에서, 또는 다이빙을 잘하는 것에서 가치를 찾듯이 말이다. 삶에서 그 외의 영속적인 가치나 의미는 달리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부사적 가치는 충분한 가치이자 의미다. 사실 그것은 경이로운 것이다."
이것은 남들이 보기에 훌륭한 ‘좋은 삶(good life)’과는 다르다. 형용사가 아니라 부사적 가치를 갖는 이 삶은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정에 의해서 판단된다. 그리고 이처럼 ‘잘 살아 내기’ 위해 드워킨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존중과 진정성이다.
"첫 번째 원리는 ‘자기 존중의 원리’라고 명명하겠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삶이 낭비된 기회가 되지 않고 성공적인 수행이 되는 것이 중대한 문제임을 그는 받아들여야 한다. 두 번째 원리를 나는 ‘진정성의 원리’라고 부르겠다. 각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성공의 요건들을 식별해야 할 특별하고 개인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자신이 승인한 일관된 서사를 통해서 그 삶을 창조해야 할 개인적인 책임을 진다."
이처럼 자기의 삶을 우주적인 기회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야말로 모든 윤리의 근원이다. 그리고 삶에 대한 이 ‘윤리’는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도덕’을 요청하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행할 때 도덕적 신념을 따르려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의 자기 존중(self-respect)이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기 존중이 이를 요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모든 사람의 삶이 객관적으로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삶을 일관되게 객관적으로 중요하게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인간성의 근본 원칙을 수용할 것을 기대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기대한다. 이것이 문명의 기초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드워킨이 ‘칸트의 원리’라고 명명한 이것이 삶을 개인적 차원에서 공동체의 차원으로 확장하는 지렛대이며, ‘잘 사는 것’이 필연적으로 ‘공동체 속에서 잘 사는 것’일 수밖에 없는 연결 고리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자유와 평등은 대립하지 않는다’라는 드워킨의 주장이 가능하며, 평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입장이 성립된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러한 윤리와 타인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이후의 모든 정치적, 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며, 책의 뒷부분에서는 그 각 부문들에 대한 기존의 입장들을 이 가치들에 비추어 다시 검토해 나간다.
개인들의 ‘잘 삶’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책무
드워킨이 이 책 [정의론]에서 추구하는 정의는 평등과 자유, 법과 민주주의 등 다른 제도와 가치들의 조합과 지지에 의해서만 가능한 중요한 가치다. 그는 이 정의의 조건으로 가장 먼저 ‘평등’이라는 가치를 논하면서 다음 두 가지 지배 원리에 찬동하지 않는 정부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첫째, 정부는 자신이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이들의 운명에 대해 동등한 배려를 표해야 한다. 둘째, 정부는 각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그들의 책임과 권리를 온전하게 존중해야 한다."
즉 앞서 말한 존엄성과 진정성에 대해 동등하게 배려해 시민 각자가 자신의 삶을 더 잘 살아 내도록 돕는 것이 정부의 존재 근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어떤 이유로도 양보될 수 없는 지고의 가치다.
"정치 공동체가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을 평등한 배려와 존중으로 대우하지 않는 한, 즉 정치 공동체의 정책들이 사람들의 운명을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하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시민 각자의 책임을 존중하지 않는 한, 그 정치 공동체는 그들에게 부과될 책무를 창출하고 강제할 어떠한 도덕적 힘도 갖지 못한다. 그러한 정당성의 원칙이야말로 정치적 권리의 가장 추상적인 원천이다. 정부가 그러한 두 가지 요구 사항을 각 개인에 대해 존중하지 않는 한, 심지어 전체 공동체의 복지나 안녕이나 선을 향상시킬 목적으로도, 정부는 어느 누구에게도 강제력을 행사할 도덕적 권위를 결코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구 사항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정치적 권리는 정부의 집단적 정책을 압도하는 으뜸 패다."
드워킨은 이러한 토대에서 민주주의와 법의 근거를 재검토하고, 오늘날 논의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논의한다. 이 과정에서 다수결주의적 민주주의와 동반자적 민주주의의 개념이 논의되고, 법을 도덕성의 한 가지(branch)로 간주하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다. 이것들은 드워킨이 기존 저서들을 통해 주장해 온 것들이지만, 거대한 가치들의 연관 아래 재조명되면서 드워킨 사상 체계의 구조를 명확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 논의들을 깊숙이 따라가노라면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자 혹은 자연법주의자 따위의 레테르로는 도저히 포괄할 수 없는 그 사상의 깊이와 넓이에 압도되게 된다. 또한 우리가 피 튀기는 현실의 잣대라고 생각하는 차가운 법의 이면에 거대한 가치들의 투쟁이 놓여 있음을, 또 단지 복지나 다수결 논의의 이면에 ‘잘 사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정언명법이 엄존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해 가는 능력은 오늘날 법과 정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평생에 걸쳐 그것을 해석하고 탐구했던 이 대가의 대작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우리가 상상한 정의는 불가침의 명제에서 시작했다. 즉 정부는 피지배자들을 평등한 배려와 존중으로 대우해야 한다. 이 정의는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고 확장한다. 이 정의는 자유로움을 평등과 맞바꾸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도 아니다. 게으름뱅이들을 위해 기업들을 마비시키지 않는다. 큰 정부도 작은 정부도 선호하지 않으며 정의로운 정부를 선호한다. 이 명제는 존엄성에서 도출되어 존엄성을 향한다. 이 명제는 좋은 삶을 잘 살기가 더 쉽고 더 가능하게 만든다. 물론 그 함의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존엄성이 없는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좋은 삶을 잘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이상을 창조한 것이다. 우리의 운명 곁에 작은 글자를 적는다. 우리의 삶을 우주라는 모래 속의 작은 다이아몬드로 만든다."
목차
저자소개
생년월일 | 1931~2013 |
---|---|
출생지 | 미국 매사추세츠 |
출간도서 | 9종 |
판매수 | 756권 |
세계적인 법학자이자 정치철학자.
1931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1953년에 하버드대학을 그리고 1955년에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에 하버드로스쿨을 졸업하였다. 이후 핸드(Learned Hand) 판사의 시보로 일하다가 대형 로펌인 설리번 앤드 크롬웰 (Sullivan&Cromwell)에 잠시 재직하였다. 1962년부터 예일로스쿨 교수로 1969년부터는 옥스퍼드대학 법학교수로 그리고 1975년부터는 옥스퍼드대학과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 NYU)로 스쿨의 법학교수를 겸직하다가 1998년부터는 런던대학교(University College of London, UCL)와 NYU로스쿨의 법학교수를 겸직하여 왔다. 칸트 이후 영문으로 된 법률문헌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법철학자이며, [정의론]의 롤스 그리고 [사실과 타당성]의 하버마스가 공유했던 문제의식을 가장 구체적으로 풀어낸 사상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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